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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수비오에서 넘어옴
분류
10년 화산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인 화산들
베수비오 산
Vesuvio | Mount Vesuvius
파일:1024px-Vesuvio_e_nave_a_Napoli.jpg
베수비오 산의 모습
지도
위치
이탈리아 캄파니아 주
높이
1,281m
분류
형태
지질학적 형성
신생대 제4기
40만년 전
외국어 표기
한국어
베수비오 산
이탈리아어
Vesuvio
영어
Mount Vesuvius
라틴어
Mons Vesuvius
그리스어
Όρος Βεζούβιος (Óros Vezouvios)
아랍어
جبل فيزوف (Jabal Fayzūf)
1. 개요2. 어원3. 신화4. 지형5. 분화 역사와 특징
5.1. 서기 79년 이전
5.1.1. 베수비오 산의 형성5.1.2. 서기 79년 이전의 화산 활동과 기록5.1.3. 서기 79년 베수비오 산 대분화5.1.4. 서기 79년 이후 분화
5.2. 20세기의 분화5.3. 미래 전망과 대비 계획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베수비오 화산은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역의 나폴리 만 인근에 위치한 솜마-성층화산 이다. 나폴리에서 약 9km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해안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화산은 캄파니아 화산대를 구성하는 여러 화산 중 하나로, 현재는 거대한 성층 화산체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칼데라는 과거 훨씬 높은 대분화로 인해 붕괴되면서 형성되었다.

베수비오 화산이 10년 화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대규모 분화 이력, 주변의 높은 인구 밀집도, 그리고 강력한 폭발성 때문이다.

베수비오는 서기 79년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파괴한 대규모 분화를 비롯해 여러 차례 폭발적인 분출을 기록했다. 현재도 유럽 본토에서 유일하게 지난 100년간 분화한 활화산이며, 향후 폭발 가능성이 높다.

특히, 화산 주변에는 약 3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중 60만 명 이상이 직접적인 위험 지역에 속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화산 지역으로, 만약 대규모 분화가 발생하면 막대한 인명 피해가 예상된다.

2. 어원[편집]

베수비오 화산이라는 명칭은 고대 로마 공화정 후기와 로마 제국 초기에 널리 사용된 이름으로, 과거에는 베사에부스(Vesaevus), 베세부스(Vesevus), 베스비우스(Vesbius), 베스비우스(Vesvius) 등의 다양한 형태로 표기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도 Οὐεσούιον(Ouesouion) 또는 Οὐεσούιος(Ouesouios) 와 같은 표기가 발견된다.

이 명칭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철기 시대 캄파니아 지역에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공존했기 때문에, 화산의 이름이 어떤 언어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이 지역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정착하면서 "네아폴리스(Neapolis, 새로운 도시)" 라는 도시(현재의 나폴리)를 세웠고, 오스키 족이 주변 농촌 지역에서 거주했다. 또한, 라틴족과 에트루리아인들도 캄파니아 지역을 두고 경쟁적으로 정착했다. 이외에도 기원이 불분명한 다양한 민족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고 여러 고대 문헌에서 언급된다.

베수비오 화산의 어원에 대한 첫 번째 가설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그리스어 οὔ(oú, "아니다") 와 σβέννυμι(svennymi, "끄다") 가 결합되어 "꺼지지 않는", 즉 "끊임없이 타오르는 화산" 이라는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두 번째 가설은 화산의 폭발적인 특성을 반영한 명칭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어 ἕω(eō, "내던지다") 와 βίη(bíē, "폭력, 힘") 가 결합하여 "격렬하게 분출하는 화산" 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가설은 인도유럽어족에서 유래한 이론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베수비오라는 이름은 "빛나다" 또는 "불타다"는 의미를 가진 인도유럽 조어 *h₁ews-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라틴어 또는 오스키어를 거쳐 화산의 이름으로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네 번째 가설은 화산이 "난로" 또는 "불의 신"과 관련된 이름을 가졌다는 주장이다. 인도유럽어 조어 *wes(난로, 불과 관련된 것) 가 어원이며, 이는 로마의 가정신인 베스타(Vesta) 와도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베수비오 화산의 정확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양한 민족이 공존했던 캄파니아 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이 화산의 이름은 그리스어, 라틴어, 오스키어, 또는 인도유럽어족에서 영향을 받은 복합적인 기원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3. 신화[편집]

베수비오산은 오랜 역사와 문학적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신화적 요소가 깊이 얽혀 있다. 로마 시대에는 신적인 존재, 즉 수호령(Genius)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서기 79년 대폭발 당시에는 강력한 신적 존재로 숭배되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가정 신전(라라리움)의 벽화에는 뱀의 형상으로 묘사된 베수비오산이 등장하며, 이는 로마인들이 이 산을 신격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카푸아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유피테르 베수비우스(Jupiter Vesuvius)'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베수비오산이 주신(主神) 유피테르의 신성과 결부되어 숭배되었음을 나타낸다.

베수비오산은 또한 헤라클레스와 깊은 연관이 있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헤라클레스가 그의 모험을 수행하던 중 이탈리아 남부를 지나 시칠리아로 향하면서, '불타는 평원(Phlegraean Plain)'이라는 지역을 지났다고 전한다. 그는 이곳이 과거 거대한 불길을 내뿜었던 산으로 인해 그렇게 불렸다고 설명하며, 그 산이 바로 베수비오산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이 지역은 대지의 아들들, 즉 거인 강도들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평정하고 계속 여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전설이 어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혹은 이탈리아의 도시 헤르쿨라네움이 헤라클레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서기 88년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한 시에서 베수비오산 인근 지역에서 비너스와 헤라클레스가 함께 숭배되었음을 암시하였다. 폼페이의 수호신이었던 비너스는 이곳 사람들에게 보호와 번영을 상징하는 존재였으며, 헤라클레스는 힘과 용맹을 상징하였다. 이는 베수비오산이 단순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신화적 세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인들은 베수비오산을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응축된 장소로 보았으며, 그 신격화 과정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신화적 요소들은 베수비오산이 단순한 화산이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는 신과 연결된 신성한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4. 지형[편집]

파일:Vesuvius_volcano_in_Italy_20110808_aerial_view_1.jpg
베수비오 산의 항공 촬영
베수비오산은 특이한 형상을 지닌 화산으로, 큰 원뿔 형태의 화산체인 '그란 코노(Gran Cono)'가 오래된 화산 구조물의 일부였던 '솜마 산(Monte Somma)'의 가파른 칼데라 경계에 의해 부분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이 화산을 '솜마-베수비오(Somma-Vesuvius)'라고도 부른다. 솜마 산은 과거 베수비오산보다 훨씬 높았던 오래된 화산체였으며, 지금의 베수비오산은 서기 79년 대폭발 이후 형성된 그란 코노로 이루어져 있다.

베수비오산의 칼데라는 약 17,000~18,000년 전의 대규모 분화로 인해 처음 형성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폭발적 분화를 거치며 더욱 확장되었다. 이 과정은 서기 79년의 대분화로 절정을 이루었으며, 그 결과 솜마 산의 주요 구조가 붕괴되고 현재의 화산 지형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화산은 과거의 칼데라 경계를 유지한 채 새로운 원뿔형 화산체가 중앙에서 성장하는 특징을 가지며, 이를 지칭하는 용어인 '솜마 화산(Somma volcano)'이 바로 베수비오산에서 유래하였다.

솜마 산의 칼데라 북쪽 경계를 이루는 절벽은 가장 높은 지점인 푼타 나소네(Punta Nasone)에서 1,132m에 이른다. 이에 반해 현재 베수비오산의 주봉은 해발 1,281m이며, 솜마 산 칼데라의 북쪽 저지대인 '아트리오 디 카발로(Atrio di Cavallo)' 계곡보다 400m 이상 높은 위치에 있다. 이 계곡은 약 5km 길이로 솜마 산의 옛 칼데라 바닥을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과거 폭발적 분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베수비오산의 경사면에는 과거의 용암 흐름이 남긴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으며, 비교적 최근의 분출에 의해 형성된 용암류는 주변 지형을 거칠고 험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한 풍경과 달리,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관목과 숲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으며, 낮은 지역에서는 기후와 토양의 영향을 받아 포도밭이 광범위하게 조성되어 있다. 베수비오산 주변의 비옥한 화산토는 농경에 적합하여, 이곳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 와인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특산물 중 하나로 유명하다.

5. 분화 역사와 특징[편집]

베수비오 산은 수많은 분화를 거쳐 온 아주 유명한 활화산으로, 서기 79년의 대폭발 이전에도 선사 시대부터 여러 차례 거대한 분출을 일으켰다. 특히 기원전 1800년경 발생한 '아벨리노 분화(Avellino eruption)'는 청동기 시대 정착지를 뒤덮을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이와 유사한 대규모 분화는 최소 세 차례 더 있었으며, 이들은 베수비오 산의 화산활동이 고대부터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서기 79년 폼페이를 파괴한 대분화 이후에도 베수비오 산은 계속해서 폭발하였다.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172년, 203년, 222년, 303년(추정), 379년, 472년, 512년, 536년, 685년, 787년, 860년경, 900년경, 968년, 991년, 999년, 1006년, 1037년, 1049년, 1073년경, 1139년, 1150년 등 중세에도 수차례 분화가 이어졌다. 또한 1270년, 1347년, 1500년경에도 분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1631년의 대폭발을 비롯해 18세기 동안 6회(1779년과 1794년 포함), 19세기 동안 8회(대표적으로 1872년), 그리고 20세기에는 1906년, 1929년, 1944년에 분화가 발생했다. 1944년 이후로는 새로운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 이전의 분출 중에서도 서기 79년과 같은 규모의 대격변은 없었다.

베수비오산의 분화 강도는 매우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폭발적인 분출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유형의 분출은 '플리니식 분화(Plinian eruption)'라고 불리며, 이는 로마 작가 플리니우스가 서기 79년 분화를 상세히 기록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분화 당시 대량의 화산재와 가스가 기둥 형태로 솟아올랐으며, 결국 화산쇄설류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덮쳐 도시 전체를 파괴하였다.

베수비오 산의 일부 분화는 남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거대했다. 예를 들어 472년과 1631년의 분화에서는 화산재가 1,200km 이상 떨어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날아가 쌓였다. 1944년 이후에는 새로운 분화가 없었으나, 크레이터 내에서 산사태가 발생하여 화산재 구름이 형성되는 일이 몇 차례 있었으며, 이는 새로운 분화의 신호로 오인되기도 했다.

1750년 이후 베수비오산 의 분화 중 7회가 5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는 장기간 활동하는 에트나산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장기적인 분출이 잦았음을 의미한다. 특히 1875년부터 1906년까지, 그리고 1913년부터 1944년까지 두 차례의 분출은 각각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현재 베수비오산은 여전히 활화산으로 분류되지만, 최근에는 크레이터 내부 벽과 바닥에서 유황 함량이 높은 증기가 분출되는 정도의 활동만 관측되고 있다. 그러나 산의 역사적 기록을 고려할 때, 언제든지 다시 분화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주변 지역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베수비오산의 화산체는 용암, 화산재, 스코리아(scoria), 부석(pumice) 등이 층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광물 조성은 다양한 변화를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실리카 함량이 낮고 칼륨이 풍부한 성질을 갖는다. 특히 1631년의 분화에서는 화산암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분출된 것이 관찰되었으며, 초기에는 폰올라이트(phonolite), 이후에는 테프리틱 폰올라이트(tephritic phonolite), 마지막으로 폰올리틱 테프라이트(phonolitic tephrite)가 분출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분석은 베수비오산의 마그마 조성이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오늘날 베수비오산은 비교적 조용하지만, 여전히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험한 화산 중 하나로 간주된다.

5.1. 서기 79년 이전[편집]

베수비오산의 지질학적 역사는 과학적 탐사를 통해 밝혀졌으며, 특히 화산의 측면에서 2,000m 이상의 깊이까지 시추한 심부 시료 분석을 통해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연구자들은 칼륨-아르곤 연대 측정법과 아르곤-아르곤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과거 분출 시기를 분석하였다. 이러한 연구에 따르면 베수비오산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최소 40만 년 전부터 화산 활동이 지속되었으며, 현재 솜마 칼데라(Somma caldera)의 가장 하층부를 이루는 화산 퇴적물은 약 4만 년 전에 발생한 캄파니아 이그님브라이트(Campanian ignimbrite) 분출물 위에 놓여 있다. 이는 베수비오산이 훨씬 오래된 화산 지형 위에 형성된 비교적 젊은 화산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현재의 화산 복합체는 넓은 퇴적 평원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지역의 지질학적 특성은 베수비오산의 폭발적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5.1.1. 베수비오 산의 형성[편집]

베수비오산의 형성 과정은 여러 단계로 나뉜다. 초기에는 용암류가 여러 차례 분출되며 화산이 점진적으로 성장하였고, 이후 대규모 폭발적 분출이 이어지면서 칼데라가 형성되었다.
  • 약 25,000년 전: 코돌라 플리니식 분화가 발생하며 초기 베수비오산이 형성되었다.
  • 이후 화산은 여러 차례의 용암류 분출과 간헐적인 폭발을 반복하며 점차적으로 성장했다. 당시 베수비오산은 현재보다 훨씬 높은 2,000m까지 성장했으며, 정상은 현재 위치에서 약 500m 동쪽에 있었다.
  • 약 19,000년 전: 분화 양상이 용암류 중심에서 대규모 폭발적 분출과 칼데라 형성 단계로 변화하였다. 솜마 칼데라는 동서 방향으로 정렬된 여러 개의 칼데라 분출로 인해 형성되었다.
  • 약 18,300년 전: 기저 부석 분화(Basal Pumice eruption)가 발생하며 솜마 칼데라가 형성되었다. 이 분화는 화산폭발지수(VEI) 6에 해당하는 대규모 폭발로, 칼데라가 서쪽으로 비대칭적으로 형성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용암 분출이 지속되었다.
  • 약 16,000년 전: 녹색 부석 분화(Green Pumice eruption, VEI 5)가 발생하며 화산 지형이 다시 변화하였다.
  • 약 11,000년 전: 라뇨 아멘돌라레(Lagno Amendolare) 분화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후대의 메르카토(Mercato) 분화보다 작은 규모였다.
  • 약 8,000년 전: 메르카토 분화(Pomici di Mercato, VEI 6)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쌍둥이 부석(Pomici Gemelle)' 또는 '오타비아노 부석(Pomici Ottaviano)'으로도 불린다.
  • 약 5,000년 전: 아벨리노 분화 이전에 두 차례의 비교적 작은 폭발적 분화가 발생하였다.
  • 약 3,800년 전(기원전 19세기): 아벨리노 분화(Pomici di Avellino, VEI 6)가 발생하였다. 이때의 분화구는 현재의 화산 분화구보다 서쪽으로 약 2km 떨어져 있었다. 아벨리노 분화는 청동기 시대 아펜니노 문화(Apennine culture)의 여러 정착지를 파괴하였으며, 현재의 나폴리 지역까지 화산쇄설류가 퍼졌다.

이 분화의 증거는 기원전 2천년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목재 및 뼈 유기물의 탄소 연대측정을 통해 확인되었다. 2001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은 놀라(Nola) 지역에서 화산재에 보존된 다양한 유기물 흔적을 발견하였다. 석고 주입 기법을 사용하여 복원한 결과, 울타리 기둥, 양동이, 그리고 수천 개의 인간 발자국이 드러났다. 이 발자국들은 사람들이 분화 직전 북쪽 아펜니노 산맥으로 급히 피난한 흔적이며, 이 마을에는 오두막과 도자기, 염소 등이 남겨져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서기 79년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화산재에 뒤덮이며 보존된 과정과 유사하다.

5.1.2. 서기 79년 이전의 화산 활동과 기록[편집]

아벨리노 분화 이후 베수비오산은 한동안 비교적 잦은 분출을 반복하였으나, 규모는 이전보다 작았다. 이러한 분화의 증거는 화산재 퇴적물에서 발견되었으나, 솜마-베수비오 복합체의 분출인지, 아니면 인근의 캄피 플레그레이(Campi Flegrei) 화산 지대에서 발생한 것인지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기원전 217년에 이 시기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분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해 이탈리아에서 지진이 발생했으며, 하늘이 회색 안개나 건조한 연무로 인해 어두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나폴리 인근의 하늘이 불타는 듯했다고 기록했으며, 실리우스 이탈리쿠스(Silius Italicus)는 서사시 푸니카(Punica)에서 베수비오 산이 에트나 산과 견줄 만한 불꽃과 굉음을 내뿜었다고 서술하였다. 또한 그린란드 빙하에서 발견된 빙핵 샘플에서는 같은 시기의 대기 중 황화수소(H₂S) 농도가 높았음을 보여주며, 이는 대형 분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서기 79년 대분화 이전 베수비오산은 약 295년 동안 활동을 멈춘 상태였다. 로마 시대 작가들은 화산이 숲과 포도밭으로 덮여 있었으며, 정상부는 바위투성이였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베수비오산은 현재와 달리 하나의 정상만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폼페이의 '백년의 집(Casa del Centenario)'에서 발견된 벽화 *바쿠스와 베수비오(Bacchus and Vesuvius)*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로마 시대의 여러 문헌에서도 베수비오산이 과거에 화산 활동을 했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스트라본(Strabo, 기원전 63년~기원후 24년경)은 그의 저서 지리학(Geographica)에서 베수비오 산 정상부가 평탄하고 불모지이며, 그을린 재와 같은 색의 바위로 덮여 있다고 기술하였다. 또한 이 지역의 비옥한 토양이 과거 화산 활동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비트루비우스(Vitruvius, 기원전 80?)의 건축서(De Architectura)에서는 베수비오산에서 과거 불길이 솟아올랐으며, 주변 지역에 화산재를 뿜어냈다고 언급하였다.

이렇듯 베수비오산은 오랜 기간 동안 화산 활동을 이어오면서 주변 지역의 지형과 인류 문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5.1.3. 서기 79년 베수비오 산 대분화[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서기 47년 베수비오 분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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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서기 79년 이후 분화[편집]

베수비오 산은 서기 79년 대분화 이후로도 끊임없이 활동을 이어갔다. 로마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화산은 주기적인 분화로 수많은 지역을 뒤덮었으며, 때로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때로는 기름진 토양을 제공하는 자연의 양면성을 보여주었다.

서기 203년,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가 생존했던 시기에 또 한 차례의 분화가 일어났으며, 472년에는 엄청난 양의 화산재를 내뿜어 무려 1,220km 떨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날아갔다. 이 화산재는 하늘을 가려 태양빛을 흐리게 만들었고, 먼 타지에서도 베수비오윽 존재감을 생생히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512년의 분화는 더욱 심각하여, 화산 근처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따라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는 이들에게 세금 면제 혜택을 주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중세에도 베수비오는 여전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787년, 968년, 991년, 999년, 1007년, 1036년에 걸쳐 크고 작은 분화가 반복되었으며, 1036년에는 처음으로 용암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말경부터 화산은 점차 조용해졌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다시금 이 땅에 포도밭과 정원을 가꾸며 생업을 이어갔다. 심지어 분화구 내부에도 관목이 자라나는 등, 사람들은 화산이 다시는 분화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평온함은 1631년 12월, 갑작스럽게 발생한 대규모 분화로 무너져 내렸다. 이때 화산은 수많은 마을을 집어삼킬 정도로 엄청난 용암류를 분출했으며, 더불어 화산이류까지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약 3,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로 베수비오의 활동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도 화산은 꾸준히 분화를 이어갔으며, 1660년, 1682년, 1694년, 1698년, 1707년, 1737년, 1760년, 1767년, 1779년, 1794년 등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강력한 분화가 발생했다. 용암은 마을을 덮고, 화산재는 대지를 뒤덮었으며, 하늘은 다시 한 번 검은 연기에 감싸였다.

19세기에도 베수비오 화산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1822년, 1834년, 1839년, 1850년, 1855년, 1861년, 1868년, 1872년까지 연속적인 분화가 이어졌으며, 20세기에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1906년, 1926년, 1929년에는 다시 한번 강력한 분화가 일어나 인근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고, 1944년 마지막으로 분화하면서 화산 활동이 잠시 멈춘 상태에 접어들었다.

베수비오 화산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인간과 조우하며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화산의 활동성과 파괴력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인류의 문명과 운명을 뒤흔들었고, 한편으로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여 농경사회의 발전을 돕기도 하는등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5.2. 20세기의 분화[편집]

베수비오 화산은 20세기에도 여전히 강력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특히 1906년과 1944년의 분화는 주변 지역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6년 4월 5일, 베수비오 화산은 기록적인 규모의 용암을 내뿜으며 강력한 분화를 일으켰다. 이번 분화로 인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는 베수비오 화산이 남긴 가장 참혹한 재난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탈리아 당국은 당시 190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화산 폭발로 인해 나폴리와 그 주변 지역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올림픽 개최를 위한 자금이 나폴리 재건을 위해 전환되었으며, 올림픽 개최지는 결국 런던으로 변경되었다.

1906년 대분화 이후 베수비오 화산은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1913년부터 1944년까지 화산 내부에서는 지속적으로 용암이 흘러나오며 분화구를 채웠고, 때때로 소량의 용암이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베수비오 화산은 비교적 잠잠한 상태를 유지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1944년 3월, 또 한 번의 대규모 분화가 발생하며 이 평온함을 완전히 깨뜨렸다.

1944년 3월, 베수비오 화산의 활동은 처음에는 비교적 제한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13일부터 18일까지 분화구 내부에서 용암이 상승하며 활동이 감지되었으나, 용암이 분화구 밖으로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18일이 되자 마침내 용암이 분화구 경계를 넘었고, 19일부터 22일까지 주변 마을을 휩쓸며 커다란 피해를 남겼다. 용암류는 산 세바스티아노 알 베수비오, 마사 디 소마, 오타비아노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산 조르조 아 크레마노의 일부 지역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어 3월 24일, 폭발적인 분화가 일어나며 거대한 화산재 기둥이 하늘을 뒤덮었고, 작은 규모의 화쇄류까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더욱 넓은 지역이 영향을 받았으며, 화산재는 하늘을 가려 햇빛을 차단하는 등 기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분화는 단순히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미군 제340 폭격비행단(USAAF 340th Bombardment Group)은 테르치뇨 근처의 폼페이 비행장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화산재와 뜨거운 화산 쇄설물이 공군기지까지 날아들면서 비행단의 중형 폭격기 B-25 미첼(Mitchell) 여러 대가 손상되었다. 기체의 조종면과 엔진은 물론, 투명한 플렉시글라스(plexiglass)로 제작된 조종석 유리와 기관총 포탑까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최소 78대에서 최대 88대의 항공기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분화는 나폴리에서도 뚜렷이 관측될 정도로 강력했으며, 미군 공군 부대의 사진사들과 인근 지역의 군인들에 의해 다양한 각도에서 기록되었다. 폐허가 된 마을과 비행장의 피해 상황은 당시 촬영된 사진과 영상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20세기 베수비오 화산의 가장 강력한 활동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베수비오 화산은 20세기에도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으며,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은 때로는 무력하게 희생될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재건과 적응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베수비오의 분화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끊임없이 맞부딪히며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5.3. 미래 전망과 대비 계획[편집]

베수비오 화산은 과거 수천 년 동안 여러 차례 강력한 분화를 일으켜왔다. 가장 규모가 큰 대분화는 약 1km³ 이상의 화산물질을 방출하며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파괴한 서기 79년과 같은 유형의 분화였다. 이러한 대규모 분화는 수천 년간의 비활동 기간 이후 발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비교적 더 자주 발생하는 ‘준플리니안(Sub-Plinian) 분화’는 약 0.1km³의 분출물을 방출하며, 대표적인 사례로 472년과 1631년의 분화가 있다. 이러한 유형의 분화는 수백 년 간격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관측되었다. 1631년 이후 1944년까지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분화가 수년에 한 번씩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 동안 베수비오 화산은 0.001~0.01km³의 마그마를 방출하는 주기적인 활동을 보였다. 연구에 따르면 베수비오 화산은 분화 간격이 길어질수록 방출되는 마그마의 양이 선형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략적으로 연간 0.001km³의 마그마가 축적된다고 추산된다. 이는 약 80년간 비활동 상태를 유지할 경우, 0.08km³의 분출이 예상된다는 의미다.

오랜 기간 지하 마그마 방에 머물러 있던 마그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를 겪게 된다. 높은 용융점을 가진 감람석과 같은 광물들이 먼저 결정화되면서 잔여 마그마 내에 용해된 가스의 농도가 점차 증가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이후 분화를 더욱 폭발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된다. 가스가 풍부한 마그마가 지표로 상승할 때, 상부 암석의 압력이 감소하면서 마그마 내에 용해된 가스가 급격하게 방출된다. 이로 인해 기체의 부피가 갑작스럽게 팽창하며, 동반된 마그마보다 훨씬 큰 부피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높은 용융점을 가진 물질이 제거되면서 마그마 내에 점성이 높은 규산염(SiO₂) 성분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게 되는데, 이는 마그마의 유동성을 낮추고 폭발성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이탈리아 정부의 비상 대응 계획은 1631년의 VEI(화산 폭발 지수) 4 수준의 분화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정하고 있다. 이 경우, 화산 분화구에서 약 7km 반경 내에 위치한 경사면 지역이 화쇄류에 직접 노출될 가능성이 있으며, 보다 넓은 지역에는 화산재가 쌓이는 위험이 있다. 베수비오 화산의 주된 편서풍 기류를 고려할 때, 남쪽과 동쪽 방향의 도시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아벨리노(Avellino)와 살레르노(Salerno) 지역에서는 화산재가 100kg/m² 이상 쌓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건물 지붕이 붕괴될 정도의 무게다. 나폴리 북서쪽 지역은 상대적으로 화산재의 영향을 덜 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하지만, 실제로 어느 지역이 영향을 받을지는 분화 당시의 기상 조건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정부의 비상 대책에 따르면, 분화 징후가 포착되면 약 2주에서 20일 정도의 사전 경고 기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 기간 동안 약 60만 명에 달하는 ‘붉은 구역(zona rossa)’ 주민들이 신속히 대피해야 한다. 붉은 구역은 화쇄류의 직접적인 위험이 있는 지역으로, 대규모 피해가 예상되는 곳이다. 대피는 기차, 배, 자동차, 버스를 동원하여 약 7일간 진행될 예정이며, 대피한 주민들은 인근 캄파니아(Campania) 지역이 아닌 이탈리아 전역의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분산될 계획이다. 이들은 몇 개월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며, 화산의 지속적인 활동 여부에 따라 대피 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언제 대피를 시작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너무 늦게 시작하면 수천 명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며, 너무 일찍 시작하면 거대한 인구 이동이 불필요하게 이루어져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1984년에는 나폴리 근처의 캄피 플레그레이(Campi Flegrei) 화산 활동 징후로 인해 4만 명이 대피했으나, 결국 분화는 발생하지 않아 헛된 대피가 되었던 사례가 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붉은 구역 내 거주 인구를 줄이기 위한 장기적인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불법적으로 건설된 건물들을 철거하고, 베수비오 화산 전체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새로운 건축을 막는 한편, 거주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여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 2020~33년)에 걸쳐 대피 시간을 기존의 7일에서 2~3일로 단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재 베수비오 화산은 이탈리아 국립지질연구소(INGV) 산하 에르콜라노(Ercolano)의 베수비오 관측소에 의해 철저히 모니터링되고 있다. 이들은 광범위한 지진 및 중력 측정 네트워크, GPS 기반 측량 시스템, 위성 기반 합성 개구 레이더(SAR)를 이용한 지표 이동 감지, 현장 조사 및 푸마롤 가스의 화학 분석을 통해 화산 내부 마그마의 이동을 추적하고 있다.

2024년 7월 기준, 베수비오 화산은 공식적으로 ‘녹색 경보(Green Alert Level)’ 상태로 분류되어 있으며, 이는 낮은 수준의 화산 활동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감지된 저에너지 지진 활동은 주로 분화구 내부 암석의 중력 침강(gravitational subsidence)에 의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이는 화산 내부의 구조적인 변화는 있더라도 당장 분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베수비오 화산의 역사적 패턴과 지질학적 특성을 고려할 때, 앞으로 수십 년 내에 새로운 분화가 발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정부와 과학자들은 화산 활동을 면밀히 감시하며, 다가올 미래의 분화에 대비하고 있다. 베수비오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화산 중 하나이며, 그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 날, 인류는 다시 한 번 자연의 거대한 힘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6. 관련 문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