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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토 지방 関東地方 | Kantō Region |
1. 개요[편집]
2. 어원[편집]
칸토라는 개념이 일본에서 형성된 것은 672년 임신의 난(壬申の乱) 이후, 제40대 텐무 천황이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세 관소(関所)[2]의 동쪽을 일컫는 칭호에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서도 아시가라고개(足柄峠の坂)[3]와 우스이 고개(碓氷峠の坂)[4]의 동쪽을 '반도'(坂東)라고 불렀는데, 간토평야 일대를 의미하는 지역으로 오늘날 기준 간토의 기원이 된다.[5]
그 뒤로 일본 정세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던 간토의 개념[6]이 오늘날의 1도 6현으로 정착된 것은 대략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오늘날의 간토 지방을 관할하는 기관으로서 가마쿠라 쿠보(鎌倉公方)가 설립된 시기부터이다. 가마쿠라 구보의 관할지역은 넓게는 도호쿠와 이즈국, 카이국을 포함하지만, 오늘날의 1도 6현의 전신에 해당하는 사가미국, 무사시국, 코즈케국, 시모츠케국, 카즈사국, 시모우사국, 아와국, 히타치국이 중심이었고 이 지역들이 세칭 '관동8주'로 일컬어지면서 오늘날로 이어지는 관동이 된 것이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하코네의 관소 이동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가운데서도 아시가라고개(足柄峠の坂)[3]와 우스이 고개(碓氷峠の坂)[4]의 동쪽을 '반도'(坂東)라고 불렀는데, 간토평야 일대를 의미하는 지역으로 오늘날 기준 간토의 기원이 된다.[5]
그 뒤로 일본 정세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던 간토의 개념[6]이 오늘날의 1도 6현으로 정착된 것은 대략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오늘날의 간토 지방을 관할하는 기관으로서 가마쿠라 쿠보(鎌倉公方)가 설립된 시기부터이다. 가마쿠라 구보의 관할지역은 넓게는 도호쿠와 이즈국, 카이국을 포함하지만, 오늘날의 1도 6현의 전신에 해당하는 사가미국, 무사시국, 코즈케국, 시모츠케국, 카즈사국, 시모우사국, 아와국, 히타치국이 중심이었고 이 지역들이 세칭 '관동8주'로 일컬어지면서 오늘날로 이어지는 관동이 된 것이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하코네의 관소 이동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여겨졌다.
3. 지리와 인구[편집]
칸토평야는 1만 7천 ㎢에 달하는 일본 최대의 평야지대이다.
토치기현, 군마현, 이바라키현이 있는 북간토의 인구는 2015년 5월 기준 685만 8979명, 면적은 1만 8867.3 ㎢이고, 사이타마현, 치바현, 카나가와현이 있는 남간토(도쿄 제외)의 인구는 2257만 662명, 면적은 1만 1371.2 ㎢이다. 도쿄도의 인구는 1400만 2973명, 면적은 2193.96 ㎢다. 간토 지방 전체의 인구는 4358만 1963명[8]으로 일본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집중되었다. 거기에 야마나시현을 포함하면 무려 4432만 2298명이 된다. 면적은 3만 6891.43 ㎢로 10%가 조금 안 된다. 지도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광대한 간토 평야가 있기에 예부터 농업 생산력이 좋았다. 사실상 일본 열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그야말로 사기적인 평야.
의외일 수 있지만 일본 최대의 천연가스전이 존재한다. 치바현과 도쿄 일대 지하수에 메탄 등이 섞여있는 형태로, 20세기 초에 개발되었지만 지반침하 유발 문제로 대부분 채굴이 중단되었다. 추정 매장량이 7000억 ㎥ 이상으로, 일본내 소비량으로는 8년분 정도의 양이다.
대체적으로 도쿄를 위시한 치바현,[9] 사이타마현, 카나가와현은 개발이 잘 되어있는 편이지만, 치바현 동부 지역과 토치기현, 군마현, 이바라키현은 개발이 덜 되어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지바와 붙어있는 이바라키는 인구가 증가하지만 도치기나 군마는... 지못미. 대개 남간토는 한국의 경기 남부와, 북간토는 경기 북부와 비슷하다 보면 된다.
하지만 칸토 일대는 다른 일본 지역에 비해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지진이 굉장히 잦다는 점이다. 간토 지하로는 무려 판 세 개가 층을 이루는데 오호츠크판이 가장 위에 얹혔고[10] 그 아래로 필리핀판, 가장 지하에는 태평양판이 층을 이룬다. 따라서 일본 내에서도 지진이 매우 잦은 지역으로 손꼽힌다.
북아메리카판과 필리핀판의 경계에서 사가미 트로프 대지진(200년 주기, M8)이 발생 가능해 항상 간토를 위협하며 북아메리카판과 태평양판과 북아메리카판 경계에는 일본 해구가 길게 형성되어 있어 도호쿠와 간토에서 빈번한 지진을 유발하며 도호쿠 대지진과 같은 큰 지진도 가끔 일어난다. 다만 일본 해구에서 아직까지 간토 지방에 발생한 해구형 지진이 거의 없어서 불행 중 다행. 만약 M9가 센다이 앞바다가 아닌 치바현 보소반도 앞에서 터졌다면...
한편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 필리핀판이 만나는 이즈 반도와 후지산 일대도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아 이 지역[11]에서도 지진 빈도가 잦다. 물론 19세기 당시는 판 구조론이 제창되기 전이었지만 당시 일본인들도 경험적으로 칸사이보다 칸토에 지진이 훨씬 잦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옮긴 이유는 생산성 등 그만한 메리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계에서는 뒤로 알음알음 수도 이전을 준비하면서 1996년에 수도 이전 후보지까지 발표했지만 도쿄 주민들이 반발하여 논의가 중단되었다.[12]
4. 역사[편집]
기원전 조몬 시대 때부터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지역으로 추측되며 야요이 시대들어 논농사와 철기 문화가 전파되며 소규모 국가들이 성립되었으며 간사이 일대의 야마토가 일본 전역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기 6세기 경에 복속되었다. 일본의 옛 수도권인 칸사이 지방과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부터 라이벌 관계. 그 이전에도 긴키의 조정이 간토에 대해 유독 압정을 했었으며, 실제로 교토 조정이 있는 키나이 지역에서는 칸토 사람들을 가리켜 아즈마에비스(東夷)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동이, 에조라는 뜻인데[13] 이 단어가 한국에서 어떤 의미로 알려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미묘하다. 다만 이 단어는 카고시마 사람들을 사츠마하야토(薩摩隼人)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다분한 지역차별적 뉘앙스가 깔려 있는 단어이다. 에도 시대 이후에는 오히려 간토가 앞질러버려 이젠 반대로 왠지 긴키 사람이 간토 사람을 상대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다.
12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단지 도호쿠의 에미시 세력을 소탕하는 전초기지적 성격을 지닌 지역이었다. 하지만 1185년 이곳에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된 이후 한반세기 동안 일본의 실질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여 긴키의 정치적 라이벌 지역으로 부상했고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센고쿠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진 못하나 나름 유력한 다이묘였던 후호조씨가 오다와라시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기반했다. 하지만 카마쿠라와 오다와라 등 사가미 만을 중심으로 한 전근세 간토 지역은 분명 도쿄, 요코하마 등 도쿄 만 중심의 현 간토와 판이하게 달랐다.
현대 도쿄를 위시로 한 간토 메트로폴리스의 개간은 16세기 말~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작품인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등으로 휘하 세력을 소모하는 틈을 타 칸토 평야를 개간하고 에도를 키우며 본격적으로 칸토를 일본의 근세 이후 400년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에도 막부는 에도를 중심으로 관개시설을 발달시키고 참근교대 제도를 정착시키며 그 이전까지는 억새밭에 불과했던 이 지역에서 도시와 대규모 농업지대를 일구어내기 시작했다. 이에야스 이후에도 에도의 개발과 발전은 지속되었는데 상업이 고도로 발달하고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면서 에도 시대 중기인 18세기 즈음에 이르면 긴키를 역전하고 일본의 새 중추지이자 세계적인 규모의 대도시로 자리잡았다.[14] 이후 1869년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 제국의 조정이 에도를 도쿄로 개칭했고 천년고도 교토를 떠나 에도에 정착했으며[15] 이로써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도쿄 대도시권이 완성되었다.
12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단지 도호쿠의 에미시 세력을 소탕하는 전초기지적 성격을 지닌 지역이었다. 하지만 1185년 이곳에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된 이후 한반세기 동안 일본의 실질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여 긴키의 정치적 라이벌 지역으로 부상했고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센고쿠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진 못하나 나름 유력한 다이묘였던 후호조씨가 오다와라시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기반했다. 하지만 카마쿠라와 오다와라 등 사가미 만을 중심으로 한 전근세 간토 지역은 분명 도쿄, 요코하마 등 도쿄 만 중심의 현 간토와 판이하게 달랐다.
현대 도쿄를 위시로 한 간토 메트로폴리스의 개간은 16세기 말~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작품인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등으로 휘하 세력을 소모하는 틈을 타 칸토 평야를 개간하고 에도를 키우며 본격적으로 칸토를 일본의 근세 이후 400년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에도 막부는 에도를 중심으로 관개시설을 발달시키고 참근교대 제도를 정착시키며 그 이전까지는 억새밭에 불과했던 이 지역에서 도시와 대규모 농업지대를 일구어내기 시작했다. 이에야스 이후에도 에도의 개발과 발전은 지속되었는데 상업이 고도로 발달하고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면서 에도 시대 중기인 18세기 즈음에 이르면 긴키를 역전하고 일본의 새 중추지이자 세계적인 규모의 대도시로 자리잡았다.[14] 이후 1869년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 제국의 조정이 에도를 도쿄로 개칭했고 천년고도 교토를 떠나 에도에 정착했으며[15] 이로써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도쿄 대도시권이 완성되었다.
5. 관광[편집]
자세한 내용은 칸토/관광 문서 참고하십시오.
6. 간토 내 행정구역 일람[편집]
6.1. 카나가와현[편집]
6.2. 군마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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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토치기현[편집]
6.4. 도쿄도[편집]
6.5. 사이타마현[편집]
6.6. 이바라키현[편집]
6.7. 치바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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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기체류시 수속처[편집]
도쿄출입국재류관리국이 칸토 지방 전역을 관할한다. 외국인들이 많이 살며 관련 방문, 여행 후기가 가장 많이 올라오는 곳.
JR 시나가와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도착한다. 시나가와역 고난 출구에 도쿄출입국재류관리국행 버스 승강장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으니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다만 비자수속을 하러 온 외국인들로 허구헌날 붐비는 곳이니 본서에서만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면 산하 출장소를 활용하자. 이바라키현 미토시의 미토 출장소, 토치기현 우츠노미야시의 우츠노미야 출장소, 군마현 타카사키시의 타카사키 출장소, 카나가와현 요코하마시의 요코하마 지국이나 카와사키시의 카와사키 출장소,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의 사이타마 출장소, 치바현 치바시의 지바 출장소, 도쿄도 쿠니타치시의 타치카와 출장소[16], 니가타현 니가타시의 니가타 출장소, 야마나시현 코후시의 고후 출장소, 나가노현 나가노시의 나가노 출장소가 있다. 신주쿠 출장소와 동부 출장소 그리고 오다이바 분실도 있긴 한데 강제퇴거 수속/재류카드 후일교부 업무[17]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비자업무는 이곳에서 받을 수 없으니 주의.
JR 시나가와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도착한다. 시나가와역 고난 출구에 도쿄출입국재류관리국행 버스 승강장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으니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다만 비자수속을 하러 온 외국인들로 허구헌날 붐비는 곳이니 본서에서만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면 산하 출장소를 활용하자. 이바라키현 미토시의 미토 출장소, 토치기현 우츠노미야시의 우츠노미야 출장소, 군마현 타카사키시의 타카사키 출장소, 카나가와현 요코하마시의 요코하마 지국이나 카와사키시의 카와사키 출장소,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의 사이타마 출장소, 치바현 치바시의 지바 출장소, 도쿄도 쿠니타치시의 타치카와 출장소[16], 니가타현 니가타시의 니가타 출장소, 야마나시현 코후시의 고후 출장소, 나가노현 나가노시의 나가노 출장소가 있다. 신주쿠 출장소와 동부 출장소 그리고 오다이바 분실도 있긴 한데 강제퇴거 수속/재류카드 후일교부 업무[17]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비자업무는 이곳에서 받을 수 없으니 주의.
8. 여담[편집]
지역마다 꽤나 이미지가 명확한 편이다. 주로 게닌들의 출신지 드립에서 파생되는 일종의 개그일 뿐이긴 하지만, 군마와 도치기는 낙후된 지역의 이미지, 사이타마와 치바는 거친 이미지로 일종의 한 묶음 취급된다.[18] 그에 비해 도쿄는 반짝반짝하는 꽃의 에도, 카나가와는 부자들이 사는 좋은 동네 이미지이다.[19] 어디까지나 이미지일 뿐이고, 어느 동네들 부촌 빈촌 다 있게 마련이라는 전제에서 얘기하자면, 결국 간토의 다른 지역 출신에게 도쿄는 하나의 이상향이며, 카나가와는 또 다른 의미의 동경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이바라키현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 때 칸토 지방에서 대규모 정전이 일어났는데, 간토와 간사이의 전기주파수가 달라 칸사이에서 칸토로 전력 공급이 불가능했다고 한다.[20]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거대한 팬덤이라고 한다. 간토 지방에는 교진 외에 야구팀이 4개 더 있는데 이 4팀의 팬을 모두 합쳐도 교진 팬보다 적다.
후쿠시마 원전 때 칸토 지방에서 대규모 정전이 일어났는데, 간토와 간사이의 전기주파수가 달라 칸사이에서 칸토로 전력 공급이 불가능했다고 한다.[20]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거대한 팬덤이라고 한다. 간토 지방에는 교진 외에 야구팀이 4개 더 있는데 이 4팀의 팬을 모두 합쳐도 교진 팬보다 적다.
[1] 간토는 전술한 1도 6현이 포함되며, 일본의 수도권은 츄부 지방의 야마나시현을 포함한 1도 7현이다.[2] 미노, 이세, 에치젠으로 가는 관문을 의미. 삼관(三関)이라고도 부른다.[3] 스루가노쿠니와 사가미노쿠니의 경계에 있던 고개. 현재 행정구역 기준으로 시즈오카현 오야마정과 카나가와현 미나미아시가라시 사이에 위치하였다.[4] 시나노노쿠니와 코즈케노쿠니의 경계에 있던 고개.[5] '반도'라는 지명이 나라 시대를 거치며 정착했는데, 히타치노쿠니 동북쪽은 미치노쿠니라고 해서 반도와는 별도로 떼어 따로 관리했기 때문.[6] 예를 들어 나라시대만 하더라도 간토는 호쿠리쿠와 도카이 일대를 포함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7] 사진 중앙의 지평선 위로 튀어나온 하얀 것은 후지산이다.[8] 그나마도 군마, 도치기 같은 북간토가 인구밀도를 어느 정도 낮춰준다. 남간토 + 도쿄만 할 경우 1만 3559 ㎢, 3575만 6164명이다. 한국 수도권보다 약간 넓은 땅 위에 한국 수도권보다 1천만 명이나 더 산다는 것. 다만 사진에도 나오지만 산이 많은 한국 수도권과 달리 이쪽은 광활한 대평야라 실질 가용면적은 크게 차이난다.[9] 단, 도쿄에 접하는 서부 지역은 도회지이지만 치바시를 기준으로 더 멀리 넘어가면 대부분 농촌이다.[10] 과거에는 북아메리카판에 속한 오호츠크판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오호츠크판은 북아메리카판과는 별개의 판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11] 시즈오카현 동부 및 카나가와현 서부[12]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이 있더라도 한번 수도를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인프라가 발전하면 천도하기가 몹시 어렵다.[13] 홋카이도처럼 근세, 근대에 일본 본토에 편입된 지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본의 전신인 야마토가 한창 중국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점차 일본 전역에 세를 떨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간토 지역과 도호쿠 지역에서는 일본 조정의 느슨한 복속 가운데 아이누 계통의 부족들이 군소 집단을 이루면서 점점이 살았다. 어쨌든 간사이/주부/주고쿠 지방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야마토의 영역이 아니었고, 가마쿠라 시대 이전까지 꽤나 변방으로 인식되었다.[14] 아직 조정이 교토에 있었던 1853년 페리 제독의 미군 함대가 오사카시나 고베시, 사카이가 아닌 요코스카시에 상륙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수도로서 에도의 위상을 알 수 있다.[15] 이를 도쿄 전도라 부른다. 단, 이 당시까지만 해도 천황가가 교토를 떠난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민심을 고려하여 천도라 하진 않지만 실질적으론 천도나 마찬가지이다.[16] 타치카와시와 쿠니타치시의 경계선상에 있는 법무합동청사에 위치해 있다. 사이타마현 거주자들이 관할지역을 헷갈려 이 출장소로 잘못 오는 경우가 많은지 청사 안에 안내지가 붙어있는데, 이 출장소는 도쿄도, 야마나시현 거주자들의 접수만 받기 때문에 잘못 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자.[17] 초기 입국시 '재류카드 후일교부'라는 도장이 찍힌 경우, 전입신고를 하면 재류카드가 우편으로 오는데, 이 후일교부 재류카드를 만드는 곳이 오다이바 분실이다.[18] 둘 다 지역드립을 시작하면 양키 얘기가 흥한다. 오토바이 경적이 요란하다거나, 벽돌로 사람 때렸다거나(...).[19] 사이타마현 출신 게닌들이 "우리 같은 사이타마현 출신들은 카나가와현 출신에겐 말도 못 걸지요" 같은 드립을 치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20] 메이지 시대 독일에서 발전기를 수입한 칸토는 50헤르츠, 미국에서 발전기를 수입한 캬사이는 60헤르츠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