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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1세기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을 다스린 왕조.
두카스 왕조는 로마 제국의 왕조로, 11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제국을 통치하였다. 이 왕조는 기존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주로 군사 및 행정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조의 기원은 동로마 제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귀족 두카스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왕조는 미하일 7세 두카스의 통치기에 절정을 맞이했으나, 그의 재위 동안 제국의 경제적 어려움과 외세의 위협이 심화되면서 약화되었다. 특히, 튀르크계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이 커지면서 동방 방어선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두카스 왕조는 점차 제국 내 다른 유력 가문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결국 콤니노스 왕조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두카스 왕조는 행정적 개혁보다는 기존의 귀족 체제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으며, 결과적으로 제국의 방어력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화폐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사회적 불안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후 동로마 제국이 겪게 될 장기적인 쇠퇴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두카스 왕조는 정치적 혼란과 군사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동로마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가문으로서 이후에도 제국의 여러 고위 관직을 차지하며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도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제국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다.
두카스 왕조는 로마 제국의 왕조로, 11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제국을 통치하였다. 이 왕조는 기존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주로 군사 및 행정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조의 기원은 동로마 제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귀족 두카스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왕조는 미하일 7세 두카스의 통치기에 절정을 맞이했으나, 그의 재위 동안 제국의 경제적 어려움과 외세의 위협이 심화되면서 약화되었다. 특히, 튀르크계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이 커지면서 동방 방어선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두카스 왕조는 점차 제국 내 다른 유력 가문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결국 콤니노스 왕조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두카스 왕조는 행정적 개혁보다는 기존의 귀족 체제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으며, 결과적으로 제국의 방어력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화폐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사회적 불안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후 동로마 제국이 겪게 될 장기적인 쇠퇴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두카스 왕조는 정치적 혼란과 군사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동로마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가문으로서 이후에도 제국의 여러 고위 관직을 차지하며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도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제국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다.
2. 역사[편집]
2.1. 제위 계승 이전[편집]
2.2. 두카스 왕조의 제국 통치[편집]
2.2.1.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치세[편집]
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로부터 양위받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황제 콘스탄티노스 10세로 즉위하면서 두카스 왕조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2.2.2. 미하일 7세의 치세[편집]
콘스탄티노스 10세 사후에는 어린 미하일 7세가 뒤를 이었다.
콘스탄티노스 10세의 황후였던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는 어린 아들의 제위를 지키기 위해 본래 정적이었던 장군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와 재혼하여 공동 황제 로마노스 4세로 추대했고, 따라서 미하일 7세 재위 초반의 국정 운영은 로마노스 4세가 주도했다.
1071년 로마노스 4세는 셀주크 제국에 맞세기 위해 출정했다가 제2차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 본인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하며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상실했고, 원로원이 그의 폐위를 결의하면서 본격적인 미하일 7세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미하일 7세는 셀주크 제국에서 석방된 로마노스 4세의 복위 시도를 진압하며 권력 기반을 굳히는 듯 했으나 경제 정책 실패로 민심을 잃었고, 결국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의 쿠데타로 실각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0세의 황후였던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는 어린 아들의 제위를 지키기 위해 본래 정적이었던 장군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와 재혼하여 공동 황제 로마노스 4세로 추대했고, 따라서 미하일 7세 재위 초반의 국정 운영은 로마노스 4세가 주도했다.
1071년 로마노스 4세는 셀주크 제국에 맞세기 위해 출정했다가 제2차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 본인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하며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상실했고, 원로원이 그의 폐위를 결의하면서 본격적인 미하일 7세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미하일 7세는 셀주크 제국에서 석방된 로마노스 4세의 복위 시도를 진압하며 권력 기반을 굳히는 듯 했으나 경제 정책 실패로 민심을 잃었고, 결국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의 쿠데타로 실각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2.3. 제위 상실 이후[편집]
2.3.1. 콤니노스 왕조 치하[편집]
비록 미하일 7세는 실각했으나 여전히 정계에 암약하던 두카스 왕조의 종친들은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이사키오스 1세의 조카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니키포로스 3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콤니노스 가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알렉시오스 1세는 미하일 7세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로 지명했고, 사위로 삼으며 혈연관계까지 맺었다.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요안니스 2세가 태어난 이후,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는 제위 계승권에서 밀려났으나 황족으로서 받는 예우는 계속되었고, 두카스 가문은 콤니노스 왕조 치하에서도 명문가로 남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알렉시오스 1세는 미하일 7세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로 지명했고, 사위로 삼으며 혈연관계까지 맺었다.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요안니스 2세가 태어난 이후,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는 제위 계승권에서 밀려났으나 황족으로서 받는 예우는 계속되었고, 두카스 가문은 콤니노스 왕조 치하에서도 명문가로 남았다.
2.3.2. 앙겔로스 왕조 치하[편집]
콤니노스 왕조가 앙겔로스 왕조로 교체된 후 앙겔로스 일가의 제위 계승권 분쟁과 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제국이 어수선하던 와중인 1204년에 알렉시오스 두카스가 황제 알렉시오스 5세로 즉위하여 오랜만에 두카스라는 이름을 가진 황제가 등장했다.
다만 알렉시오스 5세의 구체적인 계보는 알 수 없기에 콤니노스 시대 이전에 집권한 두카스 왕조와 혈연관계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알렉시오스 5세는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4세가 끌어들였던 십자군에 맞서 항전을 이끌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는 것을 막는데는 실패했고, 이후 알렉시오스 3세와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결국 십자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다만 알렉시오스 5세의 구체적인 계보는 알 수 없기에 콤니노스 시대 이전에 집권한 두카스 왕조와 혈연관계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알렉시오스 5세는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4세가 끌어들였던 십자군에 맞서 항전을 이끌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는 것을 막는데는 실패했고, 이후 알렉시오스 3세와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결국 십자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3.3. 콤니노스 두카스[편집]
4차 십자군 이후에는 동로마 유민 국가 중 하나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군주들이 '콤니노스 두카스', 즉 콤니노스 왕조와 두카스 왕조의 혈통을 동시에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통치했으나, 그들은 부계 혈통상으로는 앙겔로스 왕조의 후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