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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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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AVGVSTVS | |
이름 | |
출생 | |
사망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 개요
1. 개요[편집]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Gaius Julius Caesar Augustus)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황제로 군림한 인물로, 공화정 말기의 내전을 마무리하고 제정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본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평민 계열의 기사 신분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율리우스 가문 출신으로, 이로 인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혈연적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옥타비우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법적으로 양자가 되었고, 그 결과 이름과 유산, 카이사르를 따르는 이들의 충성심까지 모두 계승하였다.[14]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협력하였고,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그들을 무찌르며 로마 세계의 지배권을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삼두정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붕괴되었으며, 레피두스는 배제되었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동맹으로 인해 로마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결국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결정적으로 무찌른 뒤, 이집트를 제국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황제로서의 지위를 공식화하였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공화정의 제도를 존중하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군사권과 정치권, 감찰권과 호민관 권한을 통합하여 로마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였다. 자신을 '시민 중 첫째'라는 의미의 프린켑스(Princeps)로 칭하며 왕정을 부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종신적인 최고 지휘관이자 절대적인 행정 권력자로 군림하였다. 이로 인해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로 불리는 새로운 제정 체제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이후 약 300년간 제국의 기본 통치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와 외교 양면에서 제국의 확장을 추진하였다. 그는 이집트, 달마티아, 판노니아, 노리쿰, 라에티아를 병합하고, 아프리카 내 영토를 넓혔으며 히스파니아의 정복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게르마니아에서는 심각한 군사적 손실을 입으며 확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외부 국경에서는 속국 체제를 활용하여 완충 지대를 형성하였고, 동방에서는 파르티아와의 전면전을 피하고 외교를 통해 안정적인 관계를 수립하였다.
내정적으로 그는 로마 제국의 행정과 기반 구조를 정비하였다. 조세 제도를 전면 개혁하고, 제국 전역에 도로망과 공문 전송 체계를 마련하였으며, 상비군과 친위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수도 로마에는 최초의 소방대와 치안 조직을 도입하고, 공공 건축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그의 주도로 로마는 새로운 기념물과 사원들로 채워졌으며, 그는 생전에 자신이 '돌로 된 도시를 대리석 도시로 바꾸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는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인은 자연사로 기록되었으나, 당시에는 그의 아내 리비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사후 그는 신격화되었으며, 로마인들에 의해 국가적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양자였던 티베리우스(Tiberius)가 후계자로 지명되어 황위를 계승하였고, 이는 로마 제국에서 황제직이 혈연 중심으로 세습되는 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협력하였고,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그들을 무찌르며 로마 세계의 지배권을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삼두정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붕괴되었으며, 레피두스는 배제되었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동맹으로 인해 로마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결국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결정적으로 무찌른 뒤, 이집트를 제국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황제로서의 지위를 공식화하였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공화정의 제도를 존중하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군사권과 정치권, 감찰권과 호민관 권한을 통합하여 로마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였다. 자신을 '시민 중 첫째'라는 의미의 프린켑스(Princeps)로 칭하며 왕정을 부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종신적인 최고 지휘관이자 절대적인 행정 권력자로 군림하였다. 이로 인해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로 불리는 새로운 제정 체제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이후 약 300년간 제국의 기본 통치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와 외교 양면에서 제국의 확장을 추진하였다. 그는 이집트, 달마티아, 판노니아, 노리쿰, 라에티아를 병합하고, 아프리카 내 영토를 넓혔으며 히스파니아의 정복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게르마니아에서는 심각한 군사적 손실을 입으며 확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외부 국경에서는 속국 체제를 활용하여 완충 지대를 형성하였고, 동방에서는 파르티아와의 전면전을 피하고 외교를 통해 안정적인 관계를 수립하였다.
내정적으로 그는 로마 제국의 행정과 기반 구조를 정비하였다. 조세 제도를 전면 개혁하고, 제국 전역에 도로망과 공문 전송 체계를 마련하였으며, 상비군과 친위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수도 로마에는 최초의 소방대와 치안 조직을 도입하고, 공공 건축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그의 주도로 로마는 새로운 기념물과 사원들로 채워졌으며, 그는 생전에 자신이 '돌로 된 도시를 대리석 도시로 바꾸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는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인은 자연사로 기록되었으나, 당시에는 그의 아내 리비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사후 그는 신격화되었으며, 로마인들에 의해 국가적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양자였던 티베리우스(Tiberius)가 후계자로 지명되어 황위를 계승하였고, 이는 로마 제국에서 황제직이 혈연 중심으로 세습되는 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1] 흔히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 알려진 이 사람의 본래 이름이다.[2] 라틴어식 표기이며, 영어식 표기로는 Gaius Octavius Thurinus.[3] 現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4] 76번째 생일을 1달 4일 남긴 상태에서 사망했다.[5] 75년 320일[6] 이탈리아는 본토라서 속주(Provincia)가 설치되지 않았다.[7] 나폴리 광역시에 속한 시이다.[8]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였지만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사용된 제호 개념의 이름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가 된 후에 모든 공식기록에서 본명 대신 이 이름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임페라토르는 프라이노멘으로 사용됐고,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이후부터 사용된 개인 분파 가문 성씨(코그노멘)가 공식직책 임페라토르와 함께 붙여진 이름에 해당된다. 참고로 위에 나온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위 필리우스'는 사후 신격화되면서 붙여진, 최종 존호 개념이자 기원전 40년 이후 함께 사용된 제호이다.[9] 보통 로마인 이름 중 입양의 경우는 반드시 출생 가문의 끝부분에 -anus 를 붙인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바뀌었다. 즉, 본가 옥타비우스(Octavius) 끝부분에 ‘anus’가 붙어지면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고 이름이 붙여지고 불리게 된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본래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이지만 스키피오 가문의 양자가 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가 있다.[10] 출처[11] 혈연상으로는 어머니 아티아의 외삼촌이라 외가 쪽 작은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어른이었다.[12]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자식, 자기 친구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했다.[13]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대 율리아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사이에서 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로 각각 3살, 1살 때 입양됐다.[14] 안토니우스 등 일부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