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1832년부터 1973년까지 그리스를 지배한 왕국.
동로마 황제의 칭호였던 바실레프스 칭호를 부활시켜 사용했으나, 자국의 독립을 지원한 열강들[1]의 눈치를 보느라 공공연하게 제국을 칭할 수 없었기에 각국 언어에서 황제가 아닌 왕에 대응되는 단어들로 번역했고, 이에 따라 그리스 제국이 아닌 그리스 왕국이 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 이후 그리스 제1공화국을 대체하면서 건국되었는데, 여러 차례 왕정 폐지와 복고를 반복하다 1973년 군사정권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고, 1974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복고가 부결되며 확인사살당하고는 지금의 그리스 제3공화국 체제로 이어졌다.
동로마 황제의 칭호였던 바실레프스 칭호를 부활시켜 사용했으나, 자국의 독립을 지원한 열강들[1]의 눈치를 보느라 공공연하게 제국을 칭할 수 없었기에 각국 언어에서 황제가 아닌 왕에 대응되는 단어들로 번역했고, 이에 따라 그리스 제국이 아닌 그리스 왕국이 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 이후 그리스 제1공화국을 대체하면서 건국되었는데, 여러 차례 왕정 폐지와 복고를 반복하다 1973년 군사정권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고, 1974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복고가 부결되며 확인사살당하고는 지금의 그리스 제3공화국 체제로 이어졌다.
2. 역사[편집]
2.1. 건국[편집]
2.2. 비텔스바흐 왕조[편집]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는 바이에른 왕국의 오토 왕자가 추대되었고, 그가 그리스 국왕 오톤으로 즉위함에 따라 그리스는 바이에른과 같은 비텔스바흐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다만 바이에른에서 그리스까지 이동하는데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었기에, 그가 정식으로 아테네에 도달하여 즉위한 건 왕국이 세워지고 1년이 지난 1833년이었고 그 전까지는 섭정 위원회가 통치를 대신했다.
오톤은 재위 초기 바이에른에서 따라온 독일인 섭정들에게 통치를 위임했다가 성년이 된 후 친정을 시작했는데, 열강들이 그리스 제1공화국의 혼란이 헌정에 있다고 파악하고 그리스 왕국의 헌법 제정을 용인하지 않았기에 오톤은 전제군주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국 출신 군주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결코 환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인의 민족종교인 정교회로 개종하길 거부하고 바이에른 왕국의 국교인 가톨릭 신앙을 고수했기에 민심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그리스 시민들과 군부가 합세하여 1846년 그리스 혁명을 일으키며 헌정을 요구했고, 오톤이 이를 수락하면서 헌법이 제정되고 그리스 왕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렇게 오톤과 시민들의 타협으로 그리스 왕국은 안정화되는 듯 했으나,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있었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을 도와 참전하려다 오스만 제국을 돕던 영국과 프랑스에 발각되어 본격적인 참전도 하기 전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을 당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외교 참사가 이어졌다.
결국 오톤의 무능을 참지못한 그리스 시민들과 군부는 1862년에 다시 혁명을 일으켜 이번에는 왕권을 약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오톤을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해버렸다.
다만 바이에른에서 그리스까지 이동하는데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었기에, 그가 정식으로 아테네에 도달하여 즉위한 건 왕국이 세워지고 1년이 지난 1833년이었고 그 전까지는 섭정 위원회가 통치를 대신했다.
오톤은 재위 초기 바이에른에서 따라온 독일인 섭정들에게 통치를 위임했다가 성년이 된 후 친정을 시작했는데, 열강들이 그리스 제1공화국의 혼란이 헌정에 있다고 파악하고 그리스 왕국의 헌법 제정을 용인하지 않았기에 오톤은 전제군주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국 출신 군주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결코 환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인의 민족종교인 정교회로 개종하길 거부하고 바이에른 왕국의 국교인 가톨릭 신앙을 고수했기에 민심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그리스 시민들과 군부가 합세하여 1846년 그리스 혁명을 일으키며 헌정을 요구했고, 오톤이 이를 수락하면서 헌법이 제정되고 그리스 왕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렇게 오톤과 시민들의 타협으로 그리스 왕국은 안정화되는 듯 했으나,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있었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을 도와 참전하려다 오스만 제국을 돕던 영국과 프랑스에 발각되어 본격적인 참전도 하기 전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을 당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외교 참사가 이어졌다.
결국 오톤의 무능을 참지못한 그리스 시민들과 군부는 1862년에 다시 혁명을 일으켜 이번에는 왕권을 약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오톤을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해버렸다.
2.3. 공위시대[편집]
2.4. 글뤽스부르크 왕조[편집]
열강들이 앨프리드 대신 그리스 국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빌헬름 게오르크 왕자였는데, 그는 영국 왕실과 사촌지간이었기에 비록 영국 왕자는 아니었지만 영국 출신 국왕을 원했던 그리스인들의 의사를 나름대로 고려하며 타협한 결과였다.
1863년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로 즉위한 그는 곧바로 덴마크의 국교인 루터파에서 그리스의 민족종교인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민심을 확보했다.
또한 그는 재위 초반에만 같은 덴마크 출신인 빌헬름 스포네크에게 섭정을 맡기고, 성년이 된 직후 친정을 시작하면서 스포네크를 덴마크로 돌려보내면서 외국인 섭정의 내정간섭으로 인한 불만도 무마시켰다.
요르요스 1세의 즉위 직후에만 해도 그리스의 영토는 아티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 지금의 그리스 중남부에 국한되었으나, 1864년 영국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 제도를 반환받은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끝에 제2차 발칸 전쟁 직후인 1913년에는 마케도니아 남부[2]와 트라키아 등 그리스 북부 일대까지 확장되었다.
1863년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로 즉위한 그는 곧바로 덴마크의 국교인 루터파에서 그리스의 민족종교인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민심을 확보했다.
또한 그는 재위 초반에만 같은 덴마크 출신인 빌헬름 스포네크에게 섭정을 맡기고, 성년이 된 직후 친정을 시작하면서 스포네크를 덴마크로 돌려보내면서 외국인 섭정의 내정간섭으로 인한 불만도 무마시켰다.
요르요스 1세의 즉위 직후에만 해도 그리스의 영토는 아티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 지금의 그리스 중남부에 국한되었으나, 1864년 영국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 제도를 반환받은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끝에 제2차 발칸 전쟁 직후인 1913년에는 마케도니아 남부[2]와 트라키아 등 그리스 북부 일대까지 확장되었다.
2.5. 그리스 제2공화국[편집]
2.6. 그리스 왕정복고와 8월 4일 체제[편집]
2.7. 추축국 점령기[편집]
2.8. 왕실의 귀환과 그리스 내전[편집]
2.9. 1950~60년대의 그리스 왕국[편집]
2.10. 그리스 군사정권과 왕정 폐지[편집]
2.11. 그리스의 민주화와 왕정복고 실패[편집]
3. 정치[편집]
3.1. 왕실[편집]
3.1.1. 국왕[편집]
3.1.2. 왕족[편집]
그리스의 왕세자는 디아도코스 칭호를 받았으며, 역대 국왕 중에서 콘스탄티노스 1세가 유일하게 디아도코스와 별도로 스파르타 공작위 역시 하사받았다.
요르요스 1세 이래 그리스 왕족들은 덴마크 왕위 계승권도 보유한 상태였는데, 이에 따라 왕자들은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공주들은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칭호른 사용했다.
요르요스 1세 이래 그리스 왕족들은 덴마크 왕위 계승권도 보유한 상태였는데, 이에 따라 왕자들은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공주들은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칭호른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