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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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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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편집]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태생으로,[2] 형제는 원래 6남 5녀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셋째 형 전기환과 본인, 그리고 남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뿐으로 총 3남 5녀이다.
전두환의 부모와 형제는 다음과 같다.
전두환의 부모와 형제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전상우(全相禹, 1893 ~ 1967)
- 어머니 김점문(1898 ~ 1978)
전두환의 아내와 자녀는 다음과 같다.
- 전두환(全斗煥, 1931 ~ 2021)
- 아내 이순자(李順子, 1939 ~)
4세 때인 1935년에 대구시로 가족이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11] 때문에 경남 출신이지만[12] PK가 아니라 TK 계열 정치인으로 분류된다.[13]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때문에 전두환과 관련해서 대구공고와의 역사가 많다. 특기할 점이라면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해 고등학생 시절 대구의 학교들을 주먹으로 평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훗날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 그리고 적이 되는 노태우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14]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전두환은 대구공고에서 축구부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로 몸이 엄청나게 단련되어 있어서 싸움을 잘할 수밖에 없는데, 특히 다리 힘이 엄청났다고 한다. #[15] 그런데다가 강인하기만 한 게 아니라 넉살이 좋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싸움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사람들을 모아 다정하게 잘 구슬리는 능력까지 뛰어났으니, 무리를 만들어 두목이 되기 매우 유리했다.[16]
이후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그 후 육군종합학교 갑종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합격했으나 형 전기환이 군에 입대한 것에 불만이 많았던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입교하지 못했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점수가 낮아 낙방하였다. 다행히 합격생 중 몇 명이 입교를 포기한 덕택에 충원합격(보결)으로 합격되어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갑종간부후보생 장교들은 단기간 교육을 받은 후 임관과 동시에 최전선 격전지의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중공군,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마치 다진 고기 처럼 갈려나가 '소모품 소위', '하루살이 소위'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1951년은 중공군의 대공세로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등 전황이 매우 좋지 않은 때였지만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제일 안전한 후방에서 보호를 받았으며 4년간 교육을 마치고 1955년 2월 임관 때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아 예정대로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여 1951년에 바로 소위로 임관되었다면 전두환은 중공군의 대공세와 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이어졌던 치열한 고지전들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전사한 수많은 '하루살이 소위', '소모품 소위'들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나 전화위복이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4년제 정규육사의 첫 기수였기 때문에 입학 당시엔 육사 1기라는 명칭으로 입학했지만 나중에 육군 수뇌부가 육군 초창기 장교들에 대한 예우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그전까지의 임시육사[17] 기수들을 육사 1~10기로 쳐주기로 하고 정식 기수들을 부여하면서[18] 전두환의 정규육사 1기는 11기로 수정되어 밀려나는 바람에 졸지에 11기생이 된 육사생도들이 격렬히 항의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 이 이후로도 육사 11기생들의 임시육사 세대 선배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상호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나중에 11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탄생과 12.12 군사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20]
전두환은 운동 실력 및 강인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잘 이끄는 성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육사 동기들 중에서 조차 항상 리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같은 동기인데도 육사 시절부터 정호용과 김복동 정도를 제외하면 전두환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23]
주말에 생도들끼리 축구시합을 끝내고 나면 동기들을 전부 모아다가 당시 육사 교장의 사택에 방문해서 교장을 설득해 잔치를 베풀게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다만 육사 입학 성적은 좋지 않아서 충원합격으로 겨우 입학하였으며, 졸업 등수도 낮아서 156명 중 121등이었다. 이때 노태우는 67등.
이후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그 후 육군종합학교 갑종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합격했으나 형 전기환이 군에 입대한 것에 불만이 많았던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입교하지 못했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점수가 낮아 낙방하였다. 다행히 합격생 중 몇 명이 입교를 포기한 덕택에 충원합격(보결)으로 합격되어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갑종간부후보생 장교들은 단기간 교육을 받은 후 임관과 동시에 최전선 격전지의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중공군,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마치 다진 고기 처럼 갈려나가 '소모품 소위', '하루살이 소위'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1951년은 중공군의 대공세로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등 전황이 매우 좋지 않은 때였지만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제일 안전한 후방에서 보호를 받았으며 4년간 교육을 마치고 1955년 2월 임관 때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아 예정대로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여 1951년에 바로 소위로 임관되었다면 전두환은 중공군의 대공세와 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이어졌던 치열한 고지전들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전사한 수많은 '하루살이 소위', '소모품 소위'들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나 전화위복이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4년제 정규육사의 첫 기수였기 때문에 입학 당시엔 육사 1기라는 명칭으로 입학했지만 나중에 육군 수뇌부가 육군 초창기 장교들에 대한 예우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그전까지의 임시육사[17] 기수들을 육사 1~10기로 쳐주기로 하고 정식 기수들을 부여하면서[18] 전두환의 정규육사 1기는 11기로 수정되어 밀려나는 바람에 졸지에 11기생이 된 육사생도들이 격렬히 항의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 이 이후로도 육사 11기생들의 임시육사 세대 선배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상호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나중에 11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탄생과 12.12 군사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20]
전두환은 운동 실력 및 강인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잘 이끄는 성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육사 동기들 중에서 조차 항상 리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같은 동기인데도 육사 시절부터 정호용과 김복동 정도를 제외하면 전두환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23]
주말에 생도들끼리 축구시합을 끝내고 나면 동기들을 전부 모아다가 당시 육사 교장의 사택에 방문해서 교장을 설득해 잔치를 베풀게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다만 육사 입학 성적은 좋지 않아서 충원합격으로 겨우 입학하였으며, 졸업 등수도 낮아서 156명 중 121등이었다. 이때 노태우는 67등.
2. 5.16 군사정변 이전[편집]
대위 시절의 모습 |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육군 제25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첫 군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제21보병사단에서 근무한 뒤 1957년에서 1958년까지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을 거쳤다.
1959년 초에 미국 특수전 파견교육 장교로 선발되어 육군 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해서 1959년 4월에 수료했다. 1959년 5월에 육군 제1공수특전단[24] 본부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6월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의 미육군 특전단(그린베레)으로 군사유학을 가서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와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 이 두 교육을 수료한 뒤 귀국했다. 이 미 특수전학교 군사 유학에 전두환은 노태우 등 4명의 한국 장교들과 함께 갔다. 참고로 이때 미 특수전학교에 전두환과 같이 유학 갔던 장교인 이영진 씨(육사 12기)가 쓴 회고담에 전두환의 당시 성격 등이 묘사돼 있다.[25]
1959년에 전두환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만남을 하게 된다. 바로 박정희와 첫 만남을 가진 것이다. 전두환이 결혼 직후 그의 장인이자 육군본부 경리감 이규동 준장의 손에 이끌려,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을 만나러 간 것이다. 이 당시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은 바로 박정희로, 이규동이 6살 위였지만 둘 다 경북 출신으로 고령, 박정희는 선산 태생이었다. 박정희와 이규동 둘 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여 만주군으로 근무하였으며 육사 2기 동기이기도 했다. 이때 박정희는 절친의 사위이자 동향 후배인 전두환 중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자신의 부관이 되라 제안했으나 전두환이 '자신은 부관 체질이 못 된다'라고 거절하였다.[26]
전두환은 이듬해인 1960년에도 다시 미국으로 군사유학 가서 조지아 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을 이수했고, 그 다음에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유격훈련 교관교육도 받았다. 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는 노태우와 통역장교를 비롯한 4명의 한국 장교들과, 이듬해의 레인저 스쿨은 차지철을 비롯한 5명의 한국 장교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지만,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 장교으로서는 전두환 혼자 입교해서 교육받았다.
그 뒤 귀국하여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의 대대본부에서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이듬해 196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받아 육본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육군 ROTC 창단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의 ROTC 교관으로 선정되어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였다.[27] 바로 이때 5.16 군사정변이 발생한다.
1959년 초에 미국 특수전 파견교육 장교로 선발되어 육군 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해서 1959년 4월에 수료했다. 1959년 5월에 육군 제1공수특전단[24] 본부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6월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의 미육군 특전단(그린베레)으로 군사유학을 가서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와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 이 두 교육을 수료한 뒤 귀국했다. 이 미 특수전학교 군사 유학에 전두환은 노태우 등 4명의 한국 장교들과 함께 갔다. 참고로 이때 미 특수전학교에 전두환과 같이 유학 갔던 장교인 이영진 씨(육사 12기)가 쓴 회고담에 전두환의 당시 성격 등이 묘사돼 있다.[25]
1959년에 전두환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만남을 하게 된다. 바로 박정희와 첫 만남을 가진 것이다. 전두환이 결혼 직후 그의 장인이자 육군본부 경리감 이규동 준장의 손에 이끌려,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을 만나러 간 것이다. 이 당시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은 바로 박정희로, 이규동이 6살 위였지만 둘 다 경북 출신으로 고령, 박정희는 선산 태생이었다. 박정희와 이규동 둘 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여 만주군으로 근무하였으며 육사 2기 동기이기도 했다. 이때 박정희는 절친의 사위이자 동향 후배인 전두환 중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자신의 부관이 되라 제안했으나 전두환이 '자신은 부관 체질이 못 된다'라고 거절하였다.[26]
전두환은 이듬해인 1960년에도 다시 미국으로 군사유학 가서 조지아 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을 이수했고, 그 다음에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유격훈련 교관교육도 받았다. 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는 노태우와 통역장교를 비롯한 4명의 한국 장교들과, 이듬해의 레인저 스쿨은 차지철을 비롯한 5명의 한국 장교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지만,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 장교으로서는 전두환 혼자 입교해서 교육받았다.
그 뒤 귀국하여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의 대대본부에서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이듬해 196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받아 육본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육군 ROTC 창단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의 ROTC 교관으로 선정되어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였다.[27] 바로 이때 5.16 군사정변이 발생한다.
3. 5.16 군사정변 당시[편집]
5.16 당시 전두환은 군이 아닌 서울대학교에서 ROTC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정변에 직접 참가하진 못했다. 다만 쿠데타 당일 날 아침 8시에 육군본부로 향해 상황을 파악하는 눈치 빠른 면모를 보였다. 전두환은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알았을 뿐 아니라, 이 당시 박정희의 부관은 전두환의 오랜 친구인 육사 11기 동기 손영길이었기에 전두환은 어떻게든 쿠데타를 돕고자 했다. 뒤늦게라도 기여해서 쿠데타 세력에 끼고 싶었던 전두환은 '젊고 정의로운 이미지의 육사 생도들이 5.16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한다면 국민들이 '혁명'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지선언과 지지행진을 이끌어내기 위해 육사로 향했다. 육사교장 강영훈 중장은 여러 이유를 들어 생도들을 혁명 지지 시위에 동원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전두환은 강영훈 교장이 장교와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지지시위를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군부혁명 본부는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결국 18일, 육사 생도들은 육사 선배인 전두환의 설득과 강압[28]에 넘어가서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였고, 이는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그의 계급은 고작 대위, 나이도 겨우 30살이었다.[29]
군부혁명 본부는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결국 18일, 육사 생도들은 육사 선배인 전두환의 설득과 강압[28]에 넘어가서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였고, 이는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그의 계급은 고작 대위, 나이도 겨우 30살이었다.[29]
4. 5.16 군사정변 이후[편집]
1962년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역하고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거절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몇몇 동기생들이 조직한 육군 내 사조직이 하나회로서 확립 되는 것도 이 시기이며, 전두환과 하나회는 군대 내부의 박정희 친위대를 표방하며 정권의 비호를 받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당시 소령, 중령이었던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을 거쳤다. 이 동안 전두환의 신원을 보증해준 것은 '피스톨 박' 박종규와 장인인 이규동이었다.
이후 1963년에는 군내에 '7.6 쿠데타설'이 퍼졌다. 박정희는 육군 방첩대에 지시해 이 7.6 쿠데타설을 수사했는데, 이 7.6 쿠데타설은 다름아닌 5.16 쿠데타 당시 참가자들 중 부패의 온상이 된 육사 8기의 구성원, 예를 들어 김종필 등을 체포해버리자는 친위쿠데타 주장이었다. 당시 방첩대장은 공교롭게도 정승화 준장이었다. 육사 11기이자 민정당 의원이 되는 김식은 4대 의혹 사건과 장도영 축출 등을 보고 분노하였고, 7월 2일날 밤 노태우의 자택에서 전두환, 노정기, 정요홍 등과 만나 설익은 야심을 꾸민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 육사 11기, 즉 하나회의 전신이 되는 이들과 가까웠던 박정희의 부관 손영길이 박정희에게 직소하여 방첩대의 조사가 부풀려지고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고 박정희가 육사 11기를 보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김종필을 적대하며 전두환의 편을 둘어주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이 축출되고 만다.[30]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때 청와대의 경비가 부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박격포를 청와대에 설치했다. 이 설치 과정은 전두환이 수경사령관 최우근에게 보고하자 최우근이 대통령에 대한 결례라고 거부하고, 전두환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후원자인 경호실장 박종규를 찾아가 허락을 받아 진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벌어진 1.21 사태 때 북한 김신조 일당이 서울로 침투하여 국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이었던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박격포로 많은 조명탄을 계속 쏘아 올려서 밝게 비추어, 김신조 일당의 소탕과 생포에 적잖은 역할을 한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된다.
이후에는 육군참모총장 서종철의 수석부관으로 박정희의 직접 지시로 발령이 나 근무하였다. 이 당시 육군본부 참모총장실 옆 방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던 자가 노재현으로 후일 전두환 편을 들어주었던 12.12 당시의 그 국방부장관이다. 전두환은 대단히 붙임성이 좋아 노재현과도 친분을 쌓았고, 이는 후일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69년에 육사 동기들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한다.[31]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32]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는데, 상관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육군특수전사령부의 2대 사령관인 조천성 장군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테니스나 치고 앉았다'고 29연대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전두환의 연대가 군공이 전혀 없자 전두환은 무기밀매상으로 부터 적성화기 다수를 구매해서 그걸 노획물이라고 속여 상부에 바치며 있지도 않은 군공이 있다고 속였다. 그러나 이 전두환의 거짓말은 바로 들통났다. 전두환이 노획했다는 총기가 사용한 적이 없어 약실과 총열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무기밀매상으로부터 구매한 무기는 다음과 같았다.
이후 1963년에는 군내에 '7.6 쿠데타설'이 퍼졌다. 박정희는 육군 방첩대에 지시해 이 7.6 쿠데타설을 수사했는데, 이 7.6 쿠데타설은 다름아닌 5.16 쿠데타 당시 참가자들 중 부패의 온상이 된 육사 8기의 구성원, 예를 들어 김종필 등을 체포해버리자는 친위쿠데타 주장이었다. 당시 방첩대장은 공교롭게도 정승화 준장이었다. 육사 11기이자 민정당 의원이 되는 김식은 4대 의혹 사건과 장도영 축출 등을 보고 분노하였고, 7월 2일날 밤 노태우의 자택에서 전두환, 노정기, 정요홍 등과 만나 설익은 야심을 꾸민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 육사 11기, 즉 하나회의 전신이 되는 이들과 가까웠던 박정희의 부관 손영길이 박정희에게 직소하여 방첩대의 조사가 부풀려지고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고 박정희가 육사 11기를 보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김종필을 적대하며 전두환의 편을 둘어주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이 축출되고 만다.[30]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때 청와대의 경비가 부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박격포를 청와대에 설치했다. 이 설치 과정은 전두환이 수경사령관 최우근에게 보고하자 최우근이 대통령에 대한 결례라고 거부하고, 전두환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후원자인 경호실장 박종규를 찾아가 허락을 받아 진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벌어진 1.21 사태 때 북한 김신조 일당이 서울로 침투하여 국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이었던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박격포로 많은 조명탄을 계속 쏘아 올려서 밝게 비추어, 김신조 일당의 소탕과 생포에 적잖은 역할을 한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된다.
이후에는 육군참모총장 서종철의 수석부관으로 박정희의 직접 지시로 발령이 나 근무하였다. 이 당시 육군본부 참모총장실 옆 방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던 자가 노재현으로 후일 전두환 편을 들어주었던 12.12 당시의 그 국방부장관이다. 전두환은 대단히 붙임성이 좋아 노재현과도 친분을 쌓았고, 이는 후일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69년에 육사 동기들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한다.[31]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32]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는데, 상관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육군특수전사령부의 2대 사령관인 조천성 장군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테니스나 치고 앉았다'고 29연대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전두환의 연대가 군공이 전혀 없자 전두환은 무기밀매상으로 부터 적성화기 다수를 구매해서 그걸 노획물이라고 속여 상부에 바치며 있지도 않은 군공이 있다고 속였다. 그러나 이 전두환의 거짓말은 바로 들통났다. 전두환이 노획했다는 총기가 사용한 적이 없어 약실과 총열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무기밀매상으로부터 구매한 무기는 다음과 같았다.
베트남 전쟁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관례에 따라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가 존재한다. 이유는 인사 오류 + 민간인 상대 문제 행위 + 작전 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맡겨 놓은 사례 다수 + 전투 수행 능력 부족 + 무기 밀매 및 적성화기로 거짓 보고[33][34] +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35] 등 부정적 평가가 쏟아진 것이다. 기사 결국은 훈장을 수여받았다.[36]
이 일로 전두환의 준장 특별진급은 당연히 미뤄지고 대령이 부대장인 1공수특전단의 단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2년 9월에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 부대장이 준장급인 보직이 되자, 아직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이 될 수 없으므로 제1공수특전여단장 '직무대리'라는 직함으로 계속 부대장을 맡게 된다. 이후 전두환은 1973년 1월에 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되었다.[37] 이 장군 승진 시에는 박정희가 직접 외제차(일제 크라운)를 하사하였다.
마침내 전두환은 1973년 1월,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함께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976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됐고, 보안차장보직을 겸직하였다. 이후 1977.2.1 전두환은 소장 진급하였다. 소장 2차보직으로 전두환은 1978년1월 사단장 중 가장 요직인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38]이 되었는데 1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 1사단이 1978.10.17 똘이장군 제3땅굴 편(1978)의 배경이 되는 제3땅굴을 발견하며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어서 1979년 3월에는 요직인 국군보안사령관[39][40]이 된다. 취임 시기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에 있어선 강경진압을 계획하기도 했다. #
이 일로 전두환의 준장 특별진급은 당연히 미뤄지고 대령이 부대장인 1공수특전단의 단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2년 9월에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 부대장이 준장급인 보직이 되자, 아직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이 될 수 없으므로 제1공수특전여단장 '직무대리'라는 직함으로 계속 부대장을 맡게 된다. 이후 전두환은 1973년 1월에 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되었다.[37] 이 장군 승진 시에는 박정희가 직접 외제차(일제 크라운)를 하사하였다.
마침내 전두환은 1973년 1월,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함께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976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됐고, 보안차장보직을 겸직하였다. 이후 1977.2.1 전두환은 소장 진급하였다. 소장 2차보직으로 전두환은 1978년1월 사단장 중 가장 요직인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38]이 되었는데 1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 1사단이 1978.10.17 똘이장군 제3땅굴 편(1978)의 배경이 되는 제3땅굴을 발견하며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어서 1979년 3월에는 요직인 국군보안사령관[39][40]이 된다. 취임 시기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에 있어선 강경진압을 계획하기도 했다. #
5.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편집]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중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한 상황에서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10.26 사건 수사를 맡았고 수사 전권을 맡게되며 권력이 점차 전두환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월권 행사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대장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 당시 정승화는 인사권을 여전히 유지하던 상태에서 민주적 직선제를 통한 대통령 선출을 지지하던 상황이었는데 하나회의 든든한 뒷배였던 박정희가 사라짐에 따라 하나회 소속 장성들을 좌천시키거나 숙청할 의지를 드러냈다. 하나회 전체가 날아갈 위기에 놓이자 전두환은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자신의 휘하였던 보안사 주도의 감청을 통해 군 안팎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쥔 상태로 하나회 소속 장군들의 휘하 부대인 노태우의 제9보병사단, 박희도의 제1공수특전여단, 최세창의 제3공수특전여단, 장기오의 제5공수특전여단 등을 불법적으로 동원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승화 계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이 모두 체포됐다. 그리고 국방부 일각에서 숨어있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내 정승화 사령관 연행에 필요한 서류에 사인하도록 협박한다. 수도권 외곽에 있던 공수부대와 전방 병력인 9사단이 서울 삼각지까지 한달음에 내려오는데 성공한 것은 당시 육군 지휘부가 북한의 도발 우려 때문에 병력 투입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이후 전두환은 비하나회와 하나회에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던 장교들을 하나하나 숙청한 뒤 하나회 출신을 꽂아넣으며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그를 임명할 때 차지철을 견제할 목적으로 노재현이 박정희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전두환을 천거한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안사령관인 그의 권력 순위를 짐작할만할 것이다. 그는 보안사령관에 앉고 주어진 임무대로 차지철, 그리고 김재규를 견제할 각종 방안을 연구하였고 10.26 이후 그 방안들을 바탕으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상기한다면 유신 권력의 1인자와 두 2인자가 모두 사라진 이상, 두 2인자를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던 그가 부상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당시 전두환은 6인위원회[41]를 구성하여 장성 진급을 결정하였다.
1980년 3월 1일을 기해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희성 대장은 전례없는 일이라며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항의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 최규하의 승인 하에 중장으로 셀프 진급한 후 민간인이 차지하던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42]하며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손에 넣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5.17 내란을 통한 반란으로 헌정을 중단시킨다.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한 시위인 서울의 봄 이후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함으로써 새로운 폭압적 독재 정권을 예고했다.[43] 같은 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이 반란은 아직 김재규에 대한 재판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했다. 정권 장악 이후 대통령직을 공식으로 이어받기 위해 군 전역을 준비했고[44] 대장 진급 16일 만인 1980년 8월 21일에 예편했고 예편 결정 다음날인 8월 22일 제1보병사단 예하 모 대대 연병장에서 성대한 전역식을 거행하였다. 전역식 영상[45]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해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대표 국가였기에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을 규탄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집권하던 지미 카터는 이란 팔레비왕조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독수리발톱 작전이라는 군사작전도 실패하고 경제도 낙제점을 받아 레임덕 상태라 이 이상 군사투입 및 간섭에 부정적이라 타협하는 수 밖에 없었고 보수인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레이건 본인도 전두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결국 전두환은 미국의 인정이 없다면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못 받을시 고립되는 것을 알았기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980년 초 백곰 미사일 사업을 취소하고 박정희가 몰래 진행하던 핵개발 무궁화 프로젝트 폐기 및 개발에 쓰려던 플루토늄 반납, ICBM 개발 계획 취소, ADD 해체 등 이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 선언으로 대미관계 악화에 따라 추진한 자주국방 정책의 방향을 역행시켰다. 국방을 사실상 미국에 헌납하고, 국산무기 개발 대신 미국과 거대 무기 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방식으로 미국에게 집권 보장을 받았다.[46]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정치인, 군인, 교수, 기업인,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함과 동시에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실시하여[47] 정치계와 사회 저변에 대규모 탄압작전을 시작한다.[48] 한국판 굴라크로 불려진 삼청교육대와 삼청계획 5호에 덤으로 낀 사회보호법[49]도 이때 생겼다.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을 명분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진행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은 다득표를 얻어 대통령직에 오른다. 한편 이때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소수에 의한 간접 회의로 열렸는데, 이것은 평생 오명으로 따라다니게 된다. 전두환 부부는 심지어 후임 노태우 부부에게 "우리는 체육관 선거로 집권하지 않았어요."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자신의 휘하였던 보안사 주도의 감청을 통해 군 안팎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쥔 상태로 하나회 소속 장군들의 휘하 부대인 노태우의 제9보병사단, 박희도의 제1공수특전여단, 최세창의 제3공수특전여단, 장기오의 제5공수특전여단 등을 불법적으로 동원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승화 계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이 모두 체포됐다. 그리고 국방부 일각에서 숨어있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내 정승화 사령관 연행에 필요한 서류에 사인하도록 협박한다. 수도권 외곽에 있던 공수부대와 전방 병력인 9사단이 서울 삼각지까지 한달음에 내려오는데 성공한 것은 당시 육군 지휘부가 북한의 도발 우려 때문에 병력 투입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이후 전두환은 비하나회와 하나회에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던 장교들을 하나하나 숙청한 뒤 하나회 출신을 꽂아넣으며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그를 임명할 때 차지철을 견제할 목적으로 노재현이 박정희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전두환을 천거한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안사령관인 그의 권력 순위를 짐작할만할 것이다. 그는 보안사령관에 앉고 주어진 임무대로 차지철, 그리고 김재규를 견제할 각종 방안을 연구하였고 10.26 이후 그 방안들을 바탕으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상기한다면 유신 권력의 1인자와 두 2인자가 모두 사라진 이상, 두 2인자를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던 그가 부상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당시 전두환은 6인위원회[41]를 구성하여 장성 진급을 결정하였다.
1980년 3월 1일을 기해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희성 대장은 전례없는 일이라며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항의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 최규하의 승인 하에 중장으로 셀프 진급한 후 민간인이 차지하던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42]하며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손에 넣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5.17 내란을 통한 반란으로 헌정을 중단시킨다.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한 시위인 서울의 봄 이후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함으로써 새로운 폭압적 독재 정권을 예고했다.[43] 같은 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이 반란은 아직 김재규에 대한 재판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했다. 정권 장악 이후 대통령직을 공식으로 이어받기 위해 군 전역을 준비했고[44] 대장 진급 16일 만인 1980년 8월 21일에 예편했고 예편 결정 다음날인 8월 22일 제1보병사단 예하 모 대대 연병장에서 성대한 전역식을 거행하였다. 전역식 영상[45]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해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대표 국가였기에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을 규탄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집권하던 지미 카터는 이란 팔레비왕조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독수리발톱 작전이라는 군사작전도 실패하고 경제도 낙제점을 받아 레임덕 상태라 이 이상 군사투입 및 간섭에 부정적이라 타협하는 수 밖에 없었고 보수인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레이건 본인도 전두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결국 전두환은 미국의 인정이 없다면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못 받을시 고립되는 것을 알았기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980년 초 백곰 미사일 사업을 취소하고 박정희가 몰래 진행하던 핵개발 무궁화 프로젝트 폐기 및 개발에 쓰려던 플루토늄 반납, ICBM 개발 계획 취소, ADD 해체 등 이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 선언으로 대미관계 악화에 따라 추진한 자주국방 정책의 방향을 역행시켰다. 국방을 사실상 미국에 헌납하고, 국산무기 개발 대신 미국과 거대 무기 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방식으로 미국에게 집권 보장을 받았다.[46]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정치인, 군인, 교수, 기업인,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함과 동시에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실시하여[47] 정치계와 사회 저변에 대규모 탄압작전을 시작한다.[48] 한국판 굴라크로 불려진 삼청교육대와 삼청계획 5호에 덤으로 낀 사회보호법[49]도 이때 생겼다.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을 명분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진행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은 다득표를 얻어 대통령직에 오른다. 한편 이때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소수에 의한 간접 회의로 열렸는데, 이것은 평생 오명으로 따라다니게 된다. 전두환 부부는 심지어 후임 노태우 부부에게 "우리는 체육관 선거로 집권하지 않았어요."하는 말을 듣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국가적 요청과 역사적 소명에 부응하여 80년대의 국가 장래를 개척해 나아감에 있어, 대통령 각하께서 공약하신 정치발전과 경제적 발전을 균형있게 추구하며 여하한 경우에도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확고히 보전할 수 있는 국가안보태세를 정착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족적이고 사회정의가 넘치는 민주복지사회의 건설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여하한 형태의 용공 내지 사회주의적인 정치활동이나 정부수립 기도도 용납해서는 안 되며, 북괴와의 대결에 있어 국민적 단합을 와해시키려는 계급의식의 선동 및 조장, 소요 등 민중봉기를 통한 정부전복 기도를 단호히 봉쇄해야 하겠읍니다.[50]
둘째, 학원의 학구 목적의 서클활동이나 자치활동 등 자율적인 권리와 합법적인 의사표시는 최대한으로 보장할 것이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불법시위 및 소요행위 등은 국력의 불필요한 소모와 사회혼란 등, 결과적으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므로 기필코 근절되어야 하겠읍니다.
세째, 권력형 부조리를 비롯한 각종 사회적 비리를 과감히 척결하고, 만연된 사회적 불신풍조를 불식하여 성실한 노력만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명랑한 사회기풍을 만들어야 하겠읍니다.
넷째, 부정부패와 권모술수, 선동과 중상모략 등으로 점철된 정치풍토를 쇄신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나 권력에의 맹종을 시정하여, 부정과 불의에 대하여는 여야를 막론하고 자유로운 비판을 할 수 있는 건설적이고 활성화된 도의정치를 구현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겠으며,
다섯째, 언론은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이익이 우선되고 윤리와 도덕이 존중되는 건전한 풍토를 조성하는 데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종교 및 신앙의 자유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하에서 최대한 보장하고, 비록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정치활동은 이를 보장하되 종교단체, 집회 또는 선교활동 등을 빙자한 정치활동은 강력히 통제되어야 하며,
일곱째, 노동운동은 노사 공히 공동운명체적인 입장에서 상호이해와 협조로서 공존공영할 수 있는 바탕 위에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도록 유도하고 기업의 부당노동행위 및 수탈행위와 노조의 불법적인 집단행동 등을 다같이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 밀수, 마약, 폭력배, 부정식품, 강력범 등 각종 사회악을 말끔히 근절시켜 사회정화를 기하고,
아홉째, 학원의 기업화와 과열과외 등 비뚤어진 교육풍토의 쇄신과, 퇴락한 윤리 도덕관을 바로잡아 도의사회를 구현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혼란요인과 사회적 병폐가 깨끗이 시정되어야만 우리 사회는 여하한 내외의 도전이나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의와 인정미 넘치는 풍요한 민주복지사회의 기틀이 확립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하는 바입니다.전두환, 1980년 6월 5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분과위원장 및 위원에 대한 훈시 中
6. 제11대 대통령[편집]
취임하자마자 연좌제를 폐지하고, 야간통행금지, 심야 영업 금지령을 해제했다. 이후 야간통행금지는 잠시 부활했다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다.
집권과 동시에 전직 대통령 박정희를 홀대하는 조치를 하였다. 박근혜의 회고에 따르면, 5공 시절에는 아버지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하지 못했을 정도라고. 이런 조치는 훗날 자신도 당하는데 절친이자 심복인 노태우에게 백담사 유배를 당하게 된다. 아무튼 자기 정권의 정당성과 색깔을 국민들에게 어필하고자 겉으로만 그렇게 한 것일 뿐, 12.12 군사반란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던 김종필이 양김을 견제할 목적으로 박정희와 유신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자, 이를 패륜적으로 받아들여 쿠데타 멤버에서 배제했을 정도로 자신들을 챙겨주고 비호해주며 키워준 박정희를 당연히 존경했다.
정당 해산령을 내려 여러 정당을 해산시킨 후, 1980년 10월 27일에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을 공포하였다.[51] 그리고 1981년 1월에는 새로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고 당 총재에 취임, 그 후 새 헌법에 따른 간접 선거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7. 제12대 대통령[편집]
대통령 재임 시절 모습[52] |
전두환의 두번째 취임은 언론을 상당히 활발하게 사용한 정치적인 사례였다. 어차피 간접선거라 결과는 뻔했지만, 그래도 구색이라도 맞춰야 했기 때문에 당시 개표생중계 방송을 KBS에서 했고, 초대형 스튜디오를 만들어 전광판으로 실시간 현황을 보였다. 지금과 다른 점은, 명목상 후보가 다수인데도(...) 후보별로 있는 게 아니라 항목이 <찬성>과 <반대> 밖에 없었다는 점. 반대는 겨우 9%나 넘을까 했다. 그밖에 당시 2채널에서 하던 오락 프로그램 100분쇼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의 축하와 지지로 이루어진 특집 방송을 했었고, 당시 유아동 프로그램에서도 패널들이 전두환 대통령 찬양 일색의 멘트를 날렸다. 게다가 취임 전날에는 취임 경축 전야제라고 해서, 장충체육관에서 밤새 공연했고 이를 생중계했다. 전형적인 독재 국가에서 보이는 프로파간다의 극치였다.
전두환은 취임 후 허문도가 주장하는 3S정책을 시행했다. 스포츠(Sports), 성 개방(Sex), 영상 산업 진흥(Screen)을 3S 정책이라 불렀는데, 이는 한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진, 정부에 대한 불만을 돌리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에 맞춰 프로야구 및 K리그 등 프로스포츠가 출범했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대회를 유치하였으며,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를 보급하기 시작했다.[53] 더불어 영화 검열 완화, 야간통행금지 폐지, 두발 및 교복자율화[54]를 실시하여 국민들이 가진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한편 1970년대 후반들어서는 고교평준화가 진행되면서 풍선효과로 대학 입시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다. 블루칼라가 일반적이었던 시대라지만 경제력이 증가하면서 자식들을 노동조건이 열악한 블루칼라 대신 상대적으로 급여를 더 많이 받은 사무직에 취직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과외를 폐지하는 강압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인 엘리트화를 전두환은 추구하였고, 청소년 시절에 대학 입시로 자살하는 일이 이때부터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대학은 거의 매일 전투 상태였다. 전두환 정부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할 엄두를 못내도록 학원안정법을 제정하고 녹화사업을 실시했으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전까지 학내에 정보형사와 경찰 프락치가 상주하였고 거의 매일 화염병과 최루탄이 오가는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도 사수대라는 민병조직을 만들어 냉병기 훈련을 하고 폭력시위에 앞장세웠으며 그 절정이 동의대 사태와 10.28 건국대학교 항쟁이었다. 86 아시안게임, 1988 서울 올림픽이라는 초대형 세계적 이벤트에 대해서도 학생권에서는 국민들, 특히 도시빈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올림픽을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상당히 반발했었다. 당시 방송국에서는 이들을 '좌경의식분자'[55]라면서 한창 내리까는 프로파간다를 많이 보도했었다. 그래서 장노년층들에게 학생운동권 출신의 선입견이 많이 안 좋은 것도 그 까닭이다. 학원, 과외 폐지는 전두환이 퇴임한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부 때 현실성이 없다는 문제로 철회한다.
전두환은 집권 직후 록히드 마틴과 F-16 도입 계획을 체결하였고, 전두환 집권을 좋지 않게 보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TV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전두환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반미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3년 11월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중지를 약속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추진한 미사일, 핵 등 자주 국방 계획은 전두환 집권과 함께 폐기되었고, 훗날 노태우 정부는 미사일 설계도까지 전부 없어졌다며 한탄했다. 노태우 시절에 군이 전작권 전환 추진을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은 이 시기의 경험이 크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탄압을 방관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에 있었는데, "어떻게 군대가 이동하여 광주에서 발포하고 학살을 저지를수 있냐?"는 것. 그 당시 매우 심각한 논쟁 거리였다. 또한 그 당시는 유교문화가 사회 저변에 아직 뿌리 깊던 시대라,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은 대국(大國)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 실제로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오히려 한국의 무기 도입을 감사해하며 전두환과 웃으며 악수하고 전두환을 지지하였다.
경제 개발이 시작된 1962년대로부터 20여 년이 넘게 경과함으로써 자연스레 산업 고도화가 이루어졌고, 전두환 집권기에 이르면 중화학공업이 한국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직전 시대에 터졌던 오일쇼크의 극복 과정에서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하여 중화학공업 내 체질개선을 꾀하는 한편, 김재익을 등용하여 1945년이래 40년 가까이 지속된 높은 물가상승률을 재임 기간 동안 한 자릿수로 떨어뜨렸다. 덕분에 1983년에는 중진국 중에서도 안정권에 들어섰고,[56] 1987년에는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겼다. 그러나 성장해 가는 경제 규모에 비해 연간 3천 시간에 달하는 과중한 노동 시간 및 열악한 노동 환경 등 노동자들의 인권은 그대로였으며, 6.29 선언 직후 그간 내내 억눌려있던 노동자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본격화된 이 목소리들은 후임 노태우 정권 때 절정을 이룬다.
1983년 미얀마 방문 때, 북한 스파이의 표적이 되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일어났으나 그 시각에 현장에 없어 휘말리지 않았다.[57]
1986년에는 최초로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고 평화의 댐 건설 홍보를 시작했다.
1987년 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정부와 부산직할시 사회가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심지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남녀노소 통금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다 잡아들여서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킨 기관으로, 박인근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갖은 폭행과 살인으로 500명가량의 원생이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유기되고 암거래로 대학에 팔려나가는 천인공노한 짓거리를 벌였다. 35명의 원생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집단탈출한 끝에 사건의 전말이 알려졌음에도 전두환은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하고 압력을 가해 사건을 덮어버린다.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 경제 성장에 걸맞지 않는 노동 인권으로 민주화 요구는 거세져 갔다. 그리고 이를 억누르는 과정에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반인륜적 사건사고가 터졌다. 사회의 불만은 더욱 가중되어 갔고 결국 개헌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민정당의 의원내각제 고수로 인해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전두환은 다음 대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다음 대선은 대통령 간선제로 하고 개헌 논의는 그 이후로 미룬다는 내용의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국민들이 6월 항쟁으로 들고일어나자,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본인은 연임 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했고 제5공화국 헌법 상 대통령의 임기도 7년[58] 단임으로 명시해 두었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1986년 개헌 논의 당시 민정당이 들고 나왔던 의원내각제[59]나 전임 대통령을 의장으로 한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전두환이 노태우를 허수아비로 앉힌 채 상왕 노릇을 하려 했다는 정황으로 꼽힌다. 그러나 막상 노태우가 집권하고서 전두환 색채를 지속적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지웠고, 3당 합당을 통해서 여권을 장악하게 될 김영삼의 등장으로 실패하였다.
8. 퇴임과 구속[편집]
후임자인 노태우는 이래봬도 체육관 선거가 아닌 직선제로 당선되었다[60]는 자부심이 있었고, 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마침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중앙회장으로 있으면서 저지른 비리가 드러나고 전경환이 일본 오사카로 도망치면서 국민의 공분을 사버렸다. 이에 노태우는 '총선 끝나면 풀어주겠다'는 협상을 하여 전경환을 귀국시킨 다음 교도소에 처넣어 5공과 단절하고 여론에 힘입어 전두환을 쳐냈다. 직후 서울 올림픽이 열렸는데, 전두환이 군부 독재자였어도 유치에 공이 있었음에도 노태우는 전두환이 오면 분노한 관중들이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며 전두환이 개회식에 오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전두환은 노태우가 개회식을 선언하는 것을 집에서 TV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외교문서 따르면 1988년 3월에 뉴욕에서 가진 연설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무장 세력의 난동'이라는 취지로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8년 11월, 5공 청문회가 열리자 전두환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재산을 사회에 반환하겠다는 인터뷰를 남긴 채 11월 23일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 들어가 2년 1개월여 간 칩거하게 된다. 청문회는 5공 시절 은폐되었던 전두환의 전횡을 낱낱이 파헤쳐 단죄하는 게 목표였지만, 정작 전두환을 구속시키지는 않고[61] 일가친척들만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다만 이러한 행보로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그런 식으로 하면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김영삼이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12.12사태의 당사자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이 전두환을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시효 문제를 해결하면서 전두환은 1995년 12월 3일 전격 구속된다.[62] 죄목은 반란수괴 · 반란모의참여 · 반란중요임무종사 · 불법진퇴 ·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 상관살해 · 상관살해미수 · 초병살해 · 내란수괴 · 내란모의참여 · 내란중요임무종사 · 내란목적살인 ·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이었다.
외교문서 따르면 1988년 3월에 뉴욕에서 가진 연설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무장 세력의 난동'이라는 취지로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8년 11월, 5공 청문회가 열리자 전두환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재산을 사회에 반환하겠다는 인터뷰를 남긴 채 11월 23일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 들어가 2년 1개월여 간 칩거하게 된다. 청문회는 5공 시절 은폐되었던 전두환의 전횡을 낱낱이 파헤쳐 단죄하는 게 목표였지만, 정작 전두환을 구속시키지는 않고[61] 일가친척들만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다만 이러한 행보로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그런 식으로 하면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김영삼이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12.12사태의 당사자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이 전두환을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시효 문제를 해결하면서 전두환은 1995년 12월 3일 전격 구속된다.[62] 죄목은 반란수괴 · 반란모의참여 · 반란중요임무종사 · 불법진퇴 ·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 상관살해 · 상관살해미수 · 초병살해 · 내란수괴 · 내란모의참여 · 내란중요임무종사 · 내란목적살인 ·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이었다.
"이러한 검찰의 태도는 더 이상 진상 조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저는 검찰의 소환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1995년 12월 2일, 전두환의 골목성명
당시 상황을 보면 검찰은 노태우를 구속한 직후 전두환에게 1995년 12월 2일 오후 3시에 출석하여 조사를 받으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미 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63]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재조사를 한다니 자신이 응할 이유가 없고 단지 법을 존중하기 위해 사법부의 조치만 수용할 것이다는 요지의 골목성명을 연희동 자택 앞에서 발표했으며, 발표 직후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다음 그대로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가버렸다. 이에 검찰은 전두환의 이런 행동을 피의자의 도주행위로 간주, 관할법원인 서울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리고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면서 전두환이 원하는 대로 사법부의 조치에 따라 그 다음날 새벽 합천 생가에서 검찰에 체포되어 그대로 안양교도소로 압송되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는 안양교도소에 구속된 직후 검찰의 첫 방문조사에서 담당검사가 전두환에게 화를 자초하셨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출두를 거부하고 도주한 점과 자기 때문에 죽은 순국 군인들이 잠든 현충원에 무슨 낯짝으로 참배했냐는 점에서 욕을 거하게 먹었다. 또한 도주에 대한 보복 차원인지, 검찰은 전두환을 차량 내부가 외부에서 다 보이는 일반 승용차에 태워 고속도로를 통해 데려왔으며, 이 때문에 방송사 차량들이 승용차 주변을 둘러싸고 차에 태워져 끌려가는 전두환의 모습을 실중계했다. 전 대통령까지 지낸 입장에선 그야말로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구속된 전두환이 얌전히 수사에 협조했냐면 당연히 아니다. 구금된 즉시 구속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안양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보름 넘게 벌이다가[64] 심한 탈진과 영양실조상태에 따른 건강 악화로 1995년 12월 21일 새벽에 국립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검진 결과 전해질과 간기능 등 여러 검사가 정상으로 나오고 단식으로 인한 두통과 현기증 등의 탈수증세가 있는 것 외에는 건강에 큰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샤워시설, 싱크대, 다용도실, 응접실에 갖추어진 10평 안팎의 VIP특실에서 익년 3월 2일까지 2달이 넘는 70여일 기간동안 입원치료를 받았다. 첫 공판은 1996년 2월 26일에 진행되었는데, 그동안 전두환은 경찰병원에서 푹 쉬고 있었으므로 공판날 교도소 측이 병원을 방문해서 법원으로 이송하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공판에서 너무 정정한 모습으로 나오자 이를 빌미삼아 다시 안양교도소로 재수감되었다.
재판 진행 과정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 이전 1995년 10월경 육군사관학교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 피고인의 신분으로 1심 재판정에서 몇 달 만에 재회했는데, 오랜만에 보자마자 전두환이 대뜸 하는 말이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후라이 주나?"였다. 노태우는 안 준다고 대답했고 전두환도 "우리도 안 줘."라 대답하며 두 사람의 짤막한 대화는 끝이 났는데, 백담사에 칩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노태우 그 놈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귀싸대기 맞는다."라며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던 전두환인데, 죽을지도 모르는 일생일대의 위기 앞에서 오랜 사적인 감정을 훌훌 턴 듯하다.
전두환은 1심 마지막 최후진술에서 다음 서면을 제출하며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 라는 말을 했다.
전두환은 1심 마지막 최후진술에서 다음 서면을 제출하며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 라는 말을 했다.
본인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을 본인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이러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 아래 과거정권의 법통과 정통성을 심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의 권력이 제 아무리 막강하다 하여도 역사를 자의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또한 국가의 계속성과 헌정사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정권이 바뀌었다 하여, 그 정권의 정치적 시각과 역사관에 의해 과거정권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나라를 위하여 노력한 처절한 삶의 기록입니다. 우리나라가 건국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과 국정 담당자는 온갖 역사적 시련을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였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급자족하며,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놓았다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건국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가 독재와 부정부패로만 뒤덮인 암흑의 시기였다면, 어떻게 오늘날의 번영이 가능하였겠습니까.
따라서 지난 반세기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런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의도적으로 매도만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본인도 국정을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10.26 사건 이후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였으며,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는 정의로운 선진조국을 창조하려는 개혁의지를 가지고 국정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부덕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본의아니게 정책수행의 부작용이 발생하여 국민에게 불편과 피해를 준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89년 12월 30일, 당시 여 야 4당의 합의에 의해 국회의 증언대에 섰을 때, 이미 과거에 있었던 모든 잘못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 한 사람에게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이 원한다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한 본인의 마음은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개인적으로는 미얀마에서 수많은 국가의 인재들을 잃고, 이 땅에 홀로 귀국했던 그 날부터 하루하루의 삶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뜻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여분의 인생이라 생각하고 보내왔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본인의 생명에 연연하거나 처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으며, 오직 바라는 것은 본인 하나의 처벌로 국론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막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
끝으로 본인은 과거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적인 재판이 본인에서 끝이 나고, 앞으로는 과거정권을 긍정적으로 승계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높이고, 좀더 밝은 미래를 향하여 온 국민이 매진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1심에서 반란 수괴와 부패 혐의로 거액의 추징금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65] 그리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상고하지 않고 검찰이 너무 처벌이 약하다며 상고했지만 결국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의 서울고법 판결을 확정지었다. 대법원에 의해 선고된 전두환의 범죄사실은 아래와 같다.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66]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사형을 10번도 넘게 선고할 만한 죄목들인데[67] 무기징역으로 끝났으니 검찰에서 따질 만하다. 어쨌든 위와 같이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받음으로써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경비 • 경호를 제외한 연금, 치료, 비서관 지원 등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모두 박탈당했다. 여기에는 의전 및 예우, 연금, 비서관, 기념 사업 추진비, 사무실 제공, 전(前) 대통령 호칭까지[68][69] 포함된다. 그리고 법률상 국가장은 가능하지만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능하다.[70]
이렇게 무기징역이었지만 김영삼은 대선 후 임기 내의 기간에 추징금 회수와 사면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 계획은 3명의 대선 주자들에게 허가를 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자서전으로 밝혀진 지금까지도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김대중의 요구란 미명 하에 사면이 진행되었단 이야기가 대중에 많이 퍼져있듯이 당시엔 폭로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인제에 비해 지지도에서 열세에 밀렸기 때문인지 이회창이 추석 전에 둘을 사면시킬 것을 김영삼에게 직접 건의하겠단 발언을 했다. 이로 인해 곧 다가오는 15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71]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는 그를 사면복권하였다. 당시 보도
당시엔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72]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안양교도소 앞에서 언론과 짤막한 인터뷰를 했으며, 이 때 밝은 표정으로 “여러분들은 교도소 오지 마시오!” 라고 말한 건 지금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73] 노태우가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사절하고 비교적 조용히 자택으로 돌아갔던 것과 달리, 전두환은 교도소 앞에서 기자들과 담소를 하고 연희동에 도착한 뒤 환영인파들과 인사를 나누는 등 떠들석하게 출소 행사를 치렀다.
이렇게 무기징역이었지만 김영삼은 대선 후 임기 내의 기간에 추징금 회수와 사면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 계획은 3명의 대선 주자들에게 허가를 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자서전으로 밝혀진 지금까지도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김대중의 요구란 미명 하에 사면이 진행되었단 이야기가 대중에 많이 퍼져있듯이 당시엔 폭로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인제에 비해 지지도에서 열세에 밀렸기 때문인지 이회창이 추석 전에 둘을 사면시킬 것을 김영삼에게 직접 건의하겠단 발언을 했다. 이로 인해 곧 다가오는 15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71]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는 그를 사면복권하였다. 당시 보도
당시엔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72]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안양교도소 앞에서 언론과 짤막한 인터뷰를 했으며, 이 때 밝은 표정으로 “여러분들은 교도소 오지 마시오!” 라고 말한 건 지금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73] 노태우가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사절하고 비교적 조용히 자택으로 돌아갔던 것과 달리, 전두환은 교도소 앞에서 기자들과 담소를 하고 연희동에 도착한 뒤 환영인파들과 인사를 나누는 등 떠들석하게 출소 행사를 치렀다.
9. 출소 후[편집]
출소 후 전두환은 군인 시절부터 살던 서대문구 연희동의 안전가옥으로 돌아가 철통경호를 받으며 심심하면 골프를 치러 놀러다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퇴임한 이후에는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이나 관련 행사 등에나 종종 나오면서 아주 태평하게 여생을 보냈다.
2003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5.18 항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74]
2003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5.18 항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74]
광주는…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또한 같은 해 4월에는 추징금 미납 관련 문제로 재산 추징차 법원에 출석했는데, 자신의 계좌에는 29만 1천원 밖에 없다는 희대의 발언을 해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2013년 7월 16일 검찰이 시공사 본사[75]와 기숙사, 연천 허브빌리지 등 그의 자택 및 그와 관련된 기업에 전격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압수한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아 낙찰총액 72억 원을 기록하며 마무리되었다. 아직 약 1,200억 원의 추징금이 남아있는 상태다. 2013년 9월 아들로 하여금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부 납부하지는 않고 있다.
2015년 9월까지 추징금을 완납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추징금이 선고된 년도가 1997년인데 27년째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은 것이며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순수 액수는 줄고 있는 셈이다.
나이가 구순에 가까워진 2010년대까지도 대통령 취임식이나 장례식, 국가 행사 등에 정정한 모습으로 참석하곤 했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물론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 영결식에도 참석하였다. 대통령 취임식 역시 노태우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식까지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했다.[76] 동 시대에 활동했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삼김 중 1명인 김종필 전 총리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함께 하나회의 핵심이었던 노태우도 병환으로 2021년 사망할 때까지 10여년 이상을[77]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로 지냈던 것과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78][79]
전두환은 자신이 집권기간 동안 줄곧 김대중을 탄압하고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하여 죽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본인을 자주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등 전직 대통령으로써의 예우를 충분히 갖췄다. 김대중은 취임 직후 정치보복에 대한 근절 의사를 밝혔고,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취임식에 초청하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대한의 대접을 해줬다.[80] 전두환은 이 점에 대해 늘 감사하다고 언급했으며, 인터뷰 등지에서 여러차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이 제일 행복했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영결식에도 참석하였으며, 매년 추도식 때마다 조화를 보내는 등 보답은 제대로 해준 모양.[81]
반면에 김영삼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 껄끄러웠는데, 전두환은 집권기간 김영삼을 가택연금시켜버려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고, 김대중이 미국에서 입국할 당시 김영삼이 마중을 나가려 했지만 전두환이 군인들을 보내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또한 정계에 발을 딛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등 재임 당시 김영삼을 줄곧 탄압했다. 결국 인고하던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이후 하나회와 전두환 정부 인사들을 개박살내고 전 전 대통령을 감옥에 넣어 대통령 예우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 퇴임 후에도 자신을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맹비난을 퍼부었고 2010년 전직 대통령[82] 회동 자리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현직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쟈는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는 못 간다."라고 일갈하고, 오찬 시간에 "와인 더 없느냐"는 전두환의 말에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라고 망신을 준 사례는 유명하다.[83] 하지만 2015년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며 상당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용서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기사
2019년에는 경찰청 측이 2023년 의무경찰 폐지에 대비키 위한 차원에서 노태우와 함께 연내 경비인력 철수 입장을 밝혔다.#
10. 명예훼손 피소[편집]
2017년 박근혜 탄핵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와중에 은근슬쩍 2천 페이지 분량의 3권짜리 회고록을 내놓았다. 당연히 자신에게 유리한 서술로 점철된 내용이라 비난의 여론이 일었다.[84] 결국 법원에서 전두환 회고록의 발매를 금지하였다. # 5.18 관련 내용이 실려있는 1권의 발매만 금지되고 그 이후의 내용이 실린 2, 3권은 정상적으로 발매가 되었기 때문에 1권의 문제가 되는 부분은 까맣게 처리해서 내놓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어서 그런지 이마저도 다시 출판, 배포가 금지 되었다. #
회고록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박근혜와 최순실-최태민 부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어 언론이 주목하기도 했다.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 당시 최태민이 박근혜의 신임을 뒤에 업고 각종 전횡을 저질렀으며, 박정희도 최태민에게 하도 시달려서 그를 조사해보라는 부탁까지 했었다고 한다. 10.26 이후에도 최태민이 계속 권력을 행사하려 하자, 자신이 보안사령관 자격으로 전방부대에 격리시켜 버렸다고. 군내에서 구속해서 군사법정에 세우라는 요구가 많았지만, 최태민을 처벌할 경우 박정희와 그 일가에 대한 명예까지 훼손될 것을 우려해서 그냥 짱 박아놓는 것으로 끝냈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전두환 뿐 아니라 박정희 시절부터 일했던 5공 인사들은 최태민과 청와대의 관계에 대해 여러차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바 있었다. 이 내용은 군사정권 쪽 인사들 뿐 아니라, 삼김 쪽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가 전두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회고록에 적었다.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이라는 신당을 만들고 기반이 부족했던 박근혜가 사람을 보내 전두환에게 정치적 도움을 요청했던 것.[85] 그러나 전두환은 박근혜가 대통령까지 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꼭 그래야 겠는가. 잘못하면 부친에게도 누가 되니 그 뜻을 접으라고 권해라' 라고 말하며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회고록 내용 중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고 조철현 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이었다. 결국 조 신부의 유족[86]들이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죄 혐의로 형사 고소[87]하였다. 그런데 형사 재판을 맡은 재판부가 바로 광주지방법원. 이와 관련하여 이상한 것은 형사소송법에 의해 관할은 범죄지, 피고인의 주소, 거소 또는 현재지로 하되 피고인이 그 관할구역 내에 현재하지 아니하는 경우에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결정으로 사건을 피고인의 현재지를 관할하는 동급 법원에 이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검사는 범죄의 성질, 지방의 민심[88], 소송의 상황 기타 사정으로 재판의 공평을 유지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는 때 상급법원에 관할이전을 신청하여야 하는데 법률상 관할과 상관없이 고소인 측이 고소장을 제출한 경찰서를 관할하는 법원에 공소제기된 것에 대해 놀랍게도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다시피 한 가운데 당연히 전두환은 재판 연기 및 재판부에서울 이송 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5월 28일로 예정되었던 재판의 연기만 받아들이고 이송 신청은 기각하였다. 이후 2018년 8월 27일 첫 공판이 열렸다. 전두환의 변호인 측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8년 들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며 불출석하겠다고 밝혔지만 재판부는 "관련 법에서 건강 문제는 불출석의 사유가 될 수 없다'"라고 밝혔으나 형사소송법 제277조(경미 사건 등에서 피고인 불출석)에서 '''장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다액 500만원을 초과하는 벌금 또는 구류에 해당하는 사건에서 피고인의 불출석허가신청이 있고 법원이 피고인의 불출석이 그의 권리를 보호함에 지장이 없다고 인정하여 이를 허가한 사건"을 정하고 있다.
전두환은 '도저히 광주에서 재판받지 못하겠다'며 대법원에까지 재판관할 이전 신청을 항고했으나 기각되고, 2019년 1월 7일에는 알츠하이머에 이어서 독감에 걸렸다고 부인 이순자 여사가 대신 인터뷰까지 하며 재판에 불출석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다면서 골프를 쳤다는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측근들은 운동과 법정 진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 아무리 봐도 꾀병같아 보였는지 광주지법은 3월 11일로 재판을 다시 연기했고 끝내 구인장까지 발부했다.
한편 2018년 12월 20일에 서울시에서 전두환의 재산을 압류했는데, 그 이유가 세금체납. 금액도 무려 9억 8천만원에 달하며 연희동의 그 대저택도 추징금을 받기 위해 '공매'로 넘어간다고. 전체 땅과 건물을 합친 감정가는 약 102억 원이라고 한다.[89]#
그리고 마침내 부인의 동석 하에 2019년 3월 11일 경찰 경호팀의 호위로 재판 출석을 결정하였고 이로써 퇴임 이후 23년만에 피고인 신분으로 법원에 출석하게 되었다. 광주지방법원 장동혁 부장판사의 주재로 열린 첫 공판에서 전두환은 헤드셋을 착용하기는 했지만 거동이 불편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명확하게 자신의 육성으로 본인이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하여 전면 부인했다.[90] 그리고 이전에도 누차 요구했던 재판관할이전 신청도 같이 했으나 이에 관하여 담당판사는 일단 심리를 계속 진행하면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고도 하며, 다음 공판기일은 2019년 4월 8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이었다.
근 30년만의 광주 방문에 일대는 난리가 났다. 아침부터 전두환을 규탄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며[91], 전두환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자 바로 고성이 터지고 몸싸움이 벌어지는 등 아수라장이 되는 가운데 전두환은 인터뷰를 일체 거부하며 철통경호 속에 실내로 이동했다. 하차 직후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법원에서 나올 때에도 소동이 일어나서 쇼크를 먹었는지 사저 귀가길에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방문하기도 했다.
한편 법원 청사내로 들어가려는 전두환을 한 시민이 제지했다가 경호원한테 발길질을 당해 분위기가 극으로 치닫기도 했다. 법원 바로 건너편 광주동산초등학교[92]에서는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법원을 바라보며 항의하기도 했다. 이를 빌미삼아 극우 단체들이 시위법을 악용해서 학습권 침해를 벌였는데 #, 이에 광주 시민들은 잇따라 동산초에 격려 메시지를 보냈고 인근 떡집들과 제과점들에는 간식 배달 주문 문의가 폭주하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다시금 전두환의 악행을 돌아보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었다. #, #
앞으로 남은 공판기일 내내 이러한 모습이 재차삼차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유죄판결이 나오더라도 벌금으로 그칠 것으로 보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단죄를 해야 한다고 난리가 났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구순에 접어든 만큼 과거의 죄업에 대한 참회와 반성으로 국민화합을 위한 메시지와 비록 쿠데타의 수괴로서 집권했을지라도 전직 국가원수로써의 품격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2019년 4월 8일 2번째 공판기일에서는 재판부가 '공판준비기일'로 지정함에 따라 피고인의 출석의무가 없어 전두환은 출석하지 않고 변호인만 출석한 상태에서 속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측 변호인은 "회고록상 문제되는 '거짓말쟁이' 발언은 문학적인 표현이어서 명예훼손의 범의가 없이 단순견해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며, 검찰이 제출한 대다수 증거에 '부동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첫번째 공판기일에서 전두환이 재판정에서 조는 모습을 보인 것과 관련하여 재판부에 결례를 끼쳤다며 사과했다.
다음 재판기일은 2019년 5월 13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 이 날은 증인심문을 개시하는 공판절차의 본격적인 시작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두환이 출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법원은 전 씨의 불출석 허가 신청을 5월 8일에 받아들였다. ‘5.18 헬기사격’ 형사재판, 전두환 출석없이 진행 이후 이 재판은 불출석 재판으로 진행된다.
회고록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박근혜와 최순실-최태민 부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어 언론이 주목하기도 했다.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 당시 최태민이 박근혜의 신임을 뒤에 업고 각종 전횡을 저질렀으며, 박정희도 최태민에게 하도 시달려서 그를 조사해보라는 부탁까지 했었다고 한다. 10.26 이후에도 최태민이 계속 권력을 행사하려 하자, 자신이 보안사령관 자격으로 전방부대에 격리시켜 버렸다고. 군내에서 구속해서 군사법정에 세우라는 요구가 많았지만, 최태민을 처벌할 경우 박정희와 그 일가에 대한 명예까지 훼손될 것을 우려해서 그냥 짱 박아놓는 것으로 끝냈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전두환 뿐 아니라 박정희 시절부터 일했던 5공 인사들은 최태민과 청와대의 관계에 대해 여러차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바 있었다. 이 내용은 군사정권 쪽 인사들 뿐 아니라, 삼김 쪽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가 전두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회고록에 적었다.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이라는 신당을 만들고 기반이 부족했던 박근혜가 사람을 보내 전두환에게 정치적 도움을 요청했던 것.[85] 그러나 전두환은 박근혜가 대통령까지 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꼭 그래야 겠는가. 잘못하면 부친에게도 누가 되니 그 뜻을 접으라고 권해라' 라고 말하며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회고록 내용 중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고 조철현 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이었다. 결국 조 신부의 유족[86]들이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죄 혐의로 형사 고소[87]하였다. 그런데 형사 재판을 맡은 재판부가 바로 광주지방법원. 이와 관련하여 이상한 것은 형사소송법에 의해 관할은 범죄지, 피고인의 주소, 거소 또는 현재지로 하되 피고인이 그 관할구역 내에 현재하지 아니하는 경우에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결정으로 사건을 피고인의 현재지를 관할하는 동급 법원에 이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검사는 범죄의 성질, 지방의 민심[88], 소송의 상황 기타 사정으로 재판의 공평을 유지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는 때 상급법원에 관할이전을 신청하여야 하는데 법률상 관할과 상관없이 고소인 측이 고소장을 제출한 경찰서를 관할하는 법원에 공소제기된 것에 대해 놀랍게도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다시피 한 가운데 당연히 전두환은 재판 연기 및 재판부에서울 이송 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5월 28일로 예정되었던 재판의 연기만 받아들이고 이송 신청은 기각하였다. 이후 2018년 8월 27일 첫 공판이 열렸다. 전두환의 변호인 측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8년 들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며 불출석하겠다고 밝혔지만 재판부는 "관련 법에서 건강 문제는 불출석의 사유가 될 수 없다'"라고 밝혔으나 형사소송법 제277조(경미 사건 등에서 피고인 불출석)에서 '''장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다액 500만원을 초과하는 벌금 또는 구류에 해당하는 사건에서 피고인의 불출석허가신청이 있고 법원이 피고인의 불출석이 그의 권리를 보호함에 지장이 없다고 인정하여 이를 허가한 사건"을 정하고 있다.
전두환은 '도저히 광주에서 재판받지 못하겠다'며 대법원에까지 재판관할 이전 신청을 항고했으나 기각되고, 2019년 1월 7일에는 알츠하이머에 이어서 독감에 걸렸다고 부인 이순자 여사가 대신 인터뷰까지 하며 재판에 불출석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다면서 골프를 쳤다는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측근들은 운동과 법정 진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 아무리 봐도 꾀병같아 보였는지 광주지법은 3월 11일로 재판을 다시 연기했고 끝내 구인장까지 발부했다.
한편 2018년 12월 20일에 서울시에서 전두환의 재산을 압류했는데, 그 이유가 세금체납. 금액도 무려 9억 8천만원에 달하며 연희동의 그 대저택도 추징금을 받기 위해 '공매'로 넘어간다고. 전체 땅과 건물을 합친 감정가는 약 102억 원이라고 한다.[89]#
그리고 마침내 부인의 동석 하에 2019년 3월 11일 경찰 경호팀의 호위로 재판 출석을 결정하였고 이로써 퇴임 이후 23년만에 피고인 신분으로 법원에 출석하게 되었다. 광주지방법원 장동혁 부장판사의 주재로 열린 첫 공판에서 전두환은 헤드셋을 착용하기는 했지만 거동이 불편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명확하게 자신의 육성으로 본인이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하여 전면 부인했다.[90] 그리고 이전에도 누차 요구했던 재판관할이전 신청도 같이 했으나 이에 관하여 담당판사는 일단 심리를 계속 진행하면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고도 하며, 다음 공판기일은 2019년 4월 8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이었다.
근 30년만의 광주 방문에 일대는 난리가 났다. 아침부터 전두환을 규탄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며[91], 전두환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자 바로 고성이 터지고 몸싸움이 벌어지는 등 아수라장이 되는 가운데 전두환은 인터뷰를 일체 거부하며 철통경호 속에 실내로 이동했다. 하차 직후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법원에서 나올 때에도 소동이 일어나서 쇼크를 먹었는지 사저 귀가길에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방문하기도 했다.
한편 법원 청사내로 들어가려는 전두환을 한 시민이 제지했다가 경호원한테 발길질을 당해 분위기가 극으로 치닫기도 했다. 법원 바로 건너편 광주동산초등학교[92]에서는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법원을 바라보며 항의하기도 했다. 이를 빌미삼아 극우 단체들이 시위법을 악용해서 학습권 침해를 벌였는데 #, 이에 광주 시민들은 잇따라 동산초에 격려 메시지를 보냈고 인근 떡집들과 제과점들에는 간식 배달 주문 문의가 폭주하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다시금 전두환의 악행을 돌아보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었다. #, #
앞으로 남은 공판기일 내내 이러한 모습이 재차삼차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유죄판결이 나오더라도 벌금으로 그칠 것으로 보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단죄를 해야 한다고 난리가 났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구순에 접어든 만큼 과거의 죄업에 대한 참회와 반성으로 국민화합을 위한 메시지와 비록 쿠데타의 수괴로서 집권했을지라도 전직 국가원수로써의 품격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2019년 4월 8일 2번째 공판기일에서는 재판부가 '공판준비기일'로 지정함에 따라 피고인의 출석의무가 없어 전두환은 출석하지 않고 변호인만 출석한 상태에서 속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측 변호인은 "회고록상 문제되는 '거짓말쟁이' 발언은 문학적인 표현이어서 명예훼손의 범의가 없이 단순견해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며, 검찰이 제출한 대다수 증거에 '부동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첫번째 공판기일에서 전두환이 재판정에서 조는 모습을 보인 것과 관련하여 재판부에 결례를 끼쳤다며 사과했다.
다음 재판기일은 2019년 5월 13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 이 날은 증인심문을 개시하는 공판절차의 본격적인 시작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두환이 출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법원은 전 씨의 불출석 허가 신청을 5월 8일에 받아들였다. ‘5.18 헬기사격’ 형사재판, 전두환 출석없이 진행 이후 이 재판은 불출석 재판으로 진행된다.
전두환은 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알츠하이머 투병 중임을 주장해 왔지만, 2019년 11월 8일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가 전두환이 홍천군의 한 골프장에서 시원하게 골프를 치고, 거동과 의사소통이 원활한 신체건강한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하면서 다시 시끌시끌해지고 있다. 이미 법원출석 당일 90살 먹은 노인이 몰린 인파를 제치는 모습으로 "알츠하이머는 구라 아니냐"는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이번 영상이 나오며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이었다.[93]
2019년 12월 12일에는 최세창, 정호용 등 쿠데타 주역들,[94] 그리고 김장환 목사 내외와 함께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고급 중식당에서 인당 20만원씩 하는 호화만찬을 즐기는 모습이 공개되었다.[95] 하필 12.12 쿠테타 40주년이 되는 날 옛 부하들과 모였다는 점에서 영상을 촬영한 임한솔 부대표는 만찬장을 나오는 전두환에게 쿠테타기념회가 아니냐고 질문했지만 전두환은 단순 친목회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임 부대표는 "알츠하이머라는 전두환이 줄곧 큰 목소리로 대화를 주도했으며, 각하 소리까지 나왔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이에 5.18 관련 단체들은 반성 없는 뻔뻔한 태도에 경악하여 비난성명을 내고 여론도 꾀병으로 법원을 농락하는 전두환을 제대로 법정에 세울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0년 4월 27일 재판 참여를 위해 광주 법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0월 5일. 검찰은 전두환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11월 30일, 광주지방법원이 사자명예훼손죄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이날 재판을 위해 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죄를 요구하던 시위대에게 "말 조심해 인마!"라며 역정을 내서 논란을 빚었다. 그가 광주로 올 때 탑승했던 세단 차량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맞았다.[96]
2019년 들어 신군부의 두 수괴 중 노태우 측은 뒤늦게나마 5.18 유족에게 사죄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전두환과는 매우 대비되고 있다. #, #
2021년 7월 5일 전두환은 2번째 재판에 불출석하였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병력이 있다며 줄기차게 주장해 온 그의 말과는 달리 자택 앞 골목에서 멀쩡하게 산책을 하고, 기자에게 호통치는 모습이 <한국일보>를 통해 단독 기사화되어 다시금 알츠하이머 발병설의 진실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 하지만 사진과 같이 급격히 노쇠한 모습이나 집주변을 배회하는 행동, 갑자기 호통을 치는 모습을 알츠하이머 환자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97]
2020년 4월 27일 재판 참여를 위해 광주 법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0월 5일. 검찰은 전두환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11월 30일, 광주지방법원이 사자명예훼손죄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이날 재판을 위해 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죄를 요구하던 시위대에게 "말 조심해 인마!"라며 역정을 내서 논란을 빚었다. 그가 광주로 올 때 탑승했던 세단 차량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맞았다.[96]
2019년 들어 신군부의 두 수괴 중 노태우 측은 뒤늦게나마 5.18 유족에게 사죄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전두환과는 매우 대비되고 있다. #, #
2021년 7월 5일 전두환은 2번째 재판에 불출석하였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병력이 있다며 줄기차게 주장해 온 그의 말과는 달리 자택 앞 골목에서 멀쩡하게 산책을 하고, 기자에게 호통치는 모습이 <한국일보>를 통해 단독 기사화되어 다시금 알츠하이머 발병설의 진실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 하지만 사진과 같이 급격히 노쇠한 모습이나 집주변을 배회하는 행동, 갑자기 호통을 치는 모습을 알츠하이머 환자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97]
2021년 8월 9일 전두환은 결국 항소심 3번째 재판에 출석하였다. 전 전 대통령 측 변호인은 '재판부에서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으면 신청한 증거나 증인들을 받아줄 수 없다는 취지로 얘기해 부득이 출석하기로 했다'고 밝혔으며, 결국 광주지방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 도중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잘 쉴 수 없다고 했으며, 재판장의 동의를 얻어 퇴장하였으나 7분 만에 다시 돌아와 앉았다. 재판 중에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직업을 묻는 질문에 '직업은 무직'이라고 느릿느릿하게 답했고, 재판장이 '지금은 무직이고, 전직 대통령이셨죠'라고 말하자 '네'라고 답했다. 주소와 등록기준지를 묻는 질문에는 이순자 여사가 옆에서 말해주는 것을 그대로 따라 말하기도 했다. 이후 재판 중에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2019년 골프 칠 때랑 친목회 할 때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불과 2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급격히 노쇠하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모습은 후술할 암으로 인해 그럴 가능성이 크다.
2021년 11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전두환이 사망함으로써 공소기각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2021년 11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전두환이 사망함으로써 공소기각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11. 혈액암 진단[편집]
사실 나이가 90세인지라 이제 와서 노쇠하고 수척해지지 않는 게 되려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평소 강골에다가 젊었을 때부터 술담배를[98] 좀 한 것을 빼면 건강관리를 상당히 잘 해 온 탓에 노쇠화의 진행이 늦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하지만 광주지방법원에 출두하였을 때 나이 대비 극도로 정정하던 얼마 전과 달리[99] 여느 90세 노인처럼 수척해져 건강에 이상이 온 것으로 추정되었고, 돌아온 뒤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2021년 8월 13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고,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100]에 걸렸음이 밝혀졌다.
8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전두환은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은 것이 맞다고 한다. 다만 고령의 전 전 대통령이 항암치료를 받기 어려워 대증요법으로 치료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발성 골수종은 백혈병, 림프종과 함께 혈액암 3대장으로 불릴 정도로 위험한 병이다. 다만 무슨 병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고, 친구 노태우가 10년도 넘게 거동도 못 하면서 심하게 투병하다가 죽은 것에 비하면 진행이 빨라 얼마 앓지 않고 죽는 혈액암에 걸린 것은 상당한 호상이라고 볼 수 있다.[101]
8월 25일, 전두환은 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했다. 입원 중 치료가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는 자택에서 안정을 취하며 약물 치료를 할 것이라고 한다.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에 따르면, 2014년부터 기억력 감퇴가 있어 지금은 현저한 치매로 광주를 갔다온 것과 입원했다는 사실도 기억 못한다고 한다.
2021년 10월 21일, 막내동생인 전경환이 향년 79세로 사망했으며, 불과 5일 뒤인 10월 26일, 자신의 반평생을 함께했던 친구이자 후임자인 노태우가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친동생과 동지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노태우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하며 정신과 거동이 상당히 불편한 상태라서[102] 빈소 방문은 하지 못했다. 대신 아내 이순자와 장남 전재국이 조문을 갔다.
8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전두환은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은 것이 맞다고 한다. 다만 고령의 전 전 대통령이 항암치료를 받기 어려워 대증요법으로 치료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발성 골수종은 백혈병, 림프종과 함께 혈액암 3대장으로 불릴 정도로 위험한 병이다. 다만 무슨 병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고, 친구 노태우가 10년도 넘게 거동도 못 하면서 심하게 투병하다가 죽은 것에 비하면 진행이 빨라 얼마 앓지 않고 죽는 혈액암에 걸린 것은 상당한 호상이라고 볼 수 있다.[101]
8월 25일, 전두환은 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했다. 입원 중 치료가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는 자택에서 안정을 취하며 약물 치료를 할 것이라고 한다.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에 따르면, 2014년부터 기억력 감퇴가 있어 지금은 현저한 치매로 광주를 갔다온 것과 입원했다는 사실도 기억 못한다고 한다.
2021년 10월 21일, 막내동생인 전경환이 향년 79세로 사망했으며, 불과 5일 뒤인 10월 26일, 자신의 반평생을 함께했던 친구이자 후임자인 노태우가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친동생과 동지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노태우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하며 정신과 거동이 상당히 불편한 상태라서[102] 빈소 방문은 하지 못했다. 대신 아내 이순자와 장남 전재국이 조문을 갔다.
12. 사망[편집]
전두환 전 대통령 공식 영정 |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5분 경 자택에서 화장실로 가던 중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결국 사망했다. 지난 8월 혈액암 진단을 받은 후 구순에 가까운 나이 치고 굉장히 건강하던 모습과는 달리 급격히 쇠약해진 모습으로 머지않아 세상을 뜨리라는 예상이 많았는데, 결국 일생의 동지 노태우가 사망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두환 본인도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지난 10월 26일에 노태우가 사망한지 정확히 4주(28일)가 지나서였고, 나아가 백담사로 자의 반 타의 반 유배를 떠난지 정확히 33년이 되는 날에 세상을 떴다. 또 생전의 치열한 정적이기도 했던 김영삼의 6번째 기일 다음날에 숨졌다. 자택에서 화장실로 이동하던 중 쓰러져 숨졌다고 한다.[103][104] 당시 부인 이순자가 쓰러진 전두환을 발견하고 경찰 경호대와 119에 즉시 연락해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119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에 심정지 상태가 왔다고 한다. 시신이 자택에 있는 동안 전두환의 최측근 인사였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고명승 전 3군사령관이 조문을 다녀갔다.
아무래도 이 무렵에는 전두환 본인이 더 이상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5] 사실 그럴만도 했던 것이 90세까지 장수하며 누릴 수 있는 것도 많이 누렸으며, 막내동생 전경환과 동지 노태우의 죽음 이후 이제 본인도 갈 때라는 것을 직감하여 운명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미 정치 생활을 함께 한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황에다가[106] 재판 출석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삶에 대한 의욕도 점점 떨어졌을 것이다. 거기다 애초에 징역형이란 본인이 90세 고령인데다 치매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기에 형을 살 가능성은 사실상 없지만 본인 관련 논란이 불거지면 자신의 추징금을 환수하겠다고 자기 아들들의 사업체[107]를 뺏길까 하는 걱정은 들었을 것이다.
이로써 전두환을 마지막으로 20세기에 집권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은 전부 이 세상을 떠났다. 초대 이승만부터 15대 김대중까지 모두 고인이 됐으며[108], 21세기에 처음으로 집권한 대통령인 16대 노무현도 사망했으므로 현재 생존 중인 사람은 17대 이명박과 18대 박근혜, 전두환의 사망일 기준 현직 대통령이었던 19대 문재인, 현 20대 대통령 윤석열까지 총 4명이다. 후임들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보다 오래 생존한 두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 모두 현재는 고인이어서 생존한 대통령들은 사망한 대통령들의 후임 뿐이 되었다. 우연히도 전두환부터 노무현까지의 사망 순서는 대통령 직책 역순이다.[109]
노태우의 국가장에서 이철희 정무수석비서관은 전두환의 국가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밝힌 적이 있고,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도 유족을 대신하여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승만 전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예에 따라 운구 과정에서 경찰 경호는 있을 예정인데, 이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함이다.[110] 이렇게 해서 윤보선 이후 31년만에 가족장으로 지낸 대통령이 되었다.[111]
사인이 명확하기에 부검이나 검시는 하지 않지만 의료기관이 아닌 장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검안은 한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고, 25일 17시에 입관해 27일 8시 발인하여 1개월 전 평생의 동반자였던 노태우가 화장되었던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었다.[112] 이로써 전두환은 노무현과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화장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전두환의 사망을 공식 발표한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전두환이 화이자 백신을 접종 받은 뒤에 건강이 악화되었다며 전두환의 죽음은 백신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13]
지난 10월 26일에 노태우가 사망한지 정확히 4주(28일)가 지나서였고, 나아가 백담사로 자의 반 타의 반 유배를 떠난지 정확히 33년이 되는 날에 세상을 떴다. 또 생전의 치열한 정적이기도 했던 김영삼의 6번째 기일 다음날에 숨졌다. 자택에서 화장실로 이동하던 중 쓰러져 숨졌다고 한다.[103][104] 당시 부인 이순자가 쓰러진 전두환을 발견하고 경찰 경호대와 119에 즉시 연락해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119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에 심정지 상태가 왔다고 한다. 시신이 자택에 있는 동안 전두환의 최측근 인사였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고명승 전 3군사령관이 조문을 다녀갔다.
아무래도 이 무렵에는 전두환 본인이 더 이상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5] 사실 그럴만도 했던 것이 90세까지 장수하며 누릴 수 있는 것도 많이 누렸으며, 막내동생 전경환과 동지 노태우의 죽음 이후 이제 본인도 갈 때라는 것을 직감하여 운명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미 정치 생활을 함께 한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황에다가[106] 재판 출석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삶에 대한 의욕도 점점 떨어졌을 것이다. 거기다 애초에 징역형이란 본인이 90세 고령인데다 치매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기에 형을 살 가능성은 사실상 없지만 본인 관련 논란이 불거지면 자신의 추징금을 환수하겠다고 자기 아들들의 사업체[107]를 뺏길까 하는 걱정은 들었을 것이다.
이로써 전두환을 마지막으로 20세기에 집권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은 전부 이 세상을 떠났다. 초대 이승만부터 15대 김대중까지 모두 고인이 됐으며[108], 21세기에 처음으로 집권한 대통령인 16대 노무현도 사망했으므로 현재 생존 중인 사람은 17대 이명박과 18대 박근혜, 전두환의 사망일 기준 현직 대통령이었던 19대 문재인, 현 20대 대통령 윤석열까지 총 4명이다. 후임들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보다 오래 생존한 두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 모두 현재는 고인이어서 생존한 대통령들은 사망한 대통령들의 후임 뿐이 되었다. 우연히도 전두환부터 노무현까지의 사망 순서는 대통령 직책 역순이다.[109]
노태우의 국가장에서 이철희 정무수석비서관은 전두환의 국가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밝힌 적이 있고,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도 유족을 대신하여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승만 전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예에 따라 운구 과정에서 경찰 경호는 있을 예정인데, 이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함이다.[110] 이렇게 해서 윤보선 이후 31년만에 가족장으로 지낸 대통령이 되었다.[111]
사인이 명확하기에 부검이나 검시는 하지 않지만 의료기관이 아닌 장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검안은 한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고, 25일 17시에 입관해 27일 8시 발인하여 1개월 전 평생의 동반자였던 노태우가 화장되었던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었다.[112] 이로써 전두환은 노무현과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화장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전두환의 사망을 공식 발표한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전두환이 화이자 백신을 접종 받은 뒤에 건강이 악화되었다며 전두환의 죽음은 백신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13]
12.1. 사후[편집]
유언으로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라고 남겼다.[114] 이 말은 민정기 전 비서관이 밝혔는데, 사망 열흘 전에 만났을 때는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평소에 회고록의 마지막 부분을 유서처럼 여겨 왔으니 이를 고인의 유언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 생전에도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라고 말하곤 했다. # 다만 민정기 본인이 지적하듯이 국방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화장한 유골은 자택에 안치되었다. 전방 고지에 묻는 것은 안보적인 문제가 있는데다 하나회를 비롯한 전두환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국방부와 군에서는 허락해줄 리가 만무하다. 거기다 본인 유언대로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묻히든 조상들이 묻힌 고향 합천 선영에 묻히든 친구 노태우처럼 동화경모공원 같은 일반 묘소에 묻히든 묻히기만 하면 전두환에 원한이 있는 이들에게 묘소가 훼손될 것이 뻔하기에 그 어디에서도 외면해서 아직도 자택에 보관되고 있다. 물론 그가 벌인 만행들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이기 때문에 동정의 여지는 없다.
유해는 죽고 3개월이 지난 2022년 2월 10일 시점에도 연희동 자택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 노태우의 묘소인 파주 동화경모공원이 국가장을 치르고 국가보존묘지[115]로 지정되었기에 전두환 역시 묻힌다면 같은 길을 밟을 것으로 보이나 알 수 없다.
노태우의 경우 전두환과 동일한 역사적 범죄를 지었지만, 최소한 자손들과 함께 자신의 과오를 몇 차례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언론에 최대한 노출되지 않게 지내면서[116] 삶의 마무리라도 잘한 탓에 사망한 이후에도 별 다른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있는 것에 비해, 전두환은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일절 반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뻔뻔한 태도를 일관했던 탓에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된 논란과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사후 손자 전우원이 가족과 지인의 비리와 범죄를 폭로하고 5.18의 피해자들과 만나서 사죄하고 공개 회견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자 학살자이고 민주주의를 역으로 흐르게 했다고 비판하고 집안에서 전두환의 주장대로 5.18은 폭동이고 피해자는 자신의 가족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았다고 폭로했으며 이후 기자와의 질의응답시간에서 한 기자가 1980년 5월 18일에 광주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주범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묻자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대학살의 현장이자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주범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할아버지 전두환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친손자의 양심선언으로 인해 다시금 그의 망언들이 회자되면서 죽어서도 조롱 받고 욕먹고 있다.
2023년 11월, 전두환의 안장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전방 고지에 마땅한 장지를 찾는데 난항이 있어서 늦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의 장산통일전망대 인근 사유지를 매입해서 묘를 조성할 예정이었으나, 예상대로 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기 시작했다. 김경일 파주시장까지 나서 안장을 막겠다고 나섰고, 결국 땅 주인이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껴 땅을 팔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파주 안장은 무산되었다. 반대 시위 관련 기사 토지 구입 무산 관련 기사
한편 이미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에서도 2021년 "전두환을 국립묘지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 주민들의 의견이 있었고# 고인의 부모 선영이 있는 합천군 율곡면 기리에 고인의 유해가 안치될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도 있긴 했지만# 별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산된 듯하다. 애초에 전두환의 선산은 2013년에 추징금 반환을 위해 매각되어 전두환 일가에게는 권리가 없기도 하고. 합천에서는 일해공원에 분향소가 설치되었지만 그마저도 종친회에서 독단으로 설치한 것이지 합천군에서 허가를 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져[117] 합천군에서 철거명령을 내리는 등 이래저래 구설이 많았다. #
그런데 12월 21일 이한신 합천군의원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유해 안장 문제에 합천군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합천군에 안장될 가능성이 열릴 여지가 생겼다. 허나 합천에서도 전두환에 반대하는 여론도 많고, (애초에 땅을 팔아서 불가능하지만) 합천 선영에 묻었다간 전두환 본인의 묘는 물론 선친 전상우의 묘와 조상들의 묘까지 같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기에 특정 묘소에 안장하는 것보다는 계속 자택에 보관하고 있거나 바다에 유해를 뿌리는 게 낫다는 의견도 많다. 어느 지역에 묻든 안장 반대 여론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 뿌린다 해도 비판 여론 때문에 아예 12해리 밖의 공해상으로 나가라는 말이 있다.[118]
유해는 죽고 3개월이 지난 2022년 2월 10일 시점에도 연희동 자택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 노태우의 묘소인 파주 동화경모공원이 국가장을 치르고 국가보존묘지[115]로 지정되었기에 전두환 역시 묻힌다면 같은 길을 밟을 것으로 보이나 알 수 없다.
노태우의 경우 전두환과 동일한 역사적 범죄를 지었지만, 최소한 자손들과 함께 자신의 과오를 몇 차례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언론에 최대한 노출되지 않게 지내면서[116] 삶의 마무리라도 잘한 탓에 사망한 이후에도 별 다른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있는 것에 비해, 전두환은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일절 반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뻔뻔한 태도를 일관했던 탓에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된 논란과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사후 손자 전우원이 가족과 지인의 비리와 범죄를 폭로하고 5.18의 피해자들과 만나서 사죄하고 공개 회견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자 학살자이고 민주주의를 역으로 흐르게 했다고 비판하고 집안에서 전두환의 주장대로 5.18은 폭동이고 피해자는 자신의 가족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았다고 폭로했으며 이후 기자와의 질의응답시간에서 한 기자가 1980년 5월 18일에 광주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주범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묻자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대학살의 현장이자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주범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할아버지 전두환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친손자의 양심선언으로 인해 다시금 그의 망언들이 회자되면서 죽어서도 조롱 받고 욕먹고 있다.
2023년 11월, 전두환의 안장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전방 고지에 마땅한 장지를 찾는데 난항이 있어서 늦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의 장산통일전망대 인근 사유지를 매입해서 묘를 조성할 예정이었으나, 예상대로 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기 시작했다. 김경일 파주시장까지 나서 안장을 막겠다고 나섰고, 결국 땅 주인이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껴 땅을 팔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파주 안장은 무산되었다. 반대 시위 관련 기사 토지 구입 무산 관련 기사
한편 이미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에서도 2021년 "전두환을 국립묘지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 주민들의 의견이 있었고# 고인의 부모 선영이 있는 합천군 율곡면 기리에 고인의 유해가 안치될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도 있긴 했지만# 별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산된 듯하다. 애초에 전두환의 선산은 2013년에 추징금 반환을 위해 매각되어 전두환 일가에게는 권리가 없기도 하고. 합천에서는 일해공원에 분향소가 설치되었지만 그마저도 종친회에서 독단으로 설치한 것이지 합천군에서 허가를 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져[117] 합천군에서 철거명령을 내리는 등 이래저래 구설이 많았다. #
그런데 12월 21일 이한신 합천군의원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유해 안장 문제에 합천군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합천군에 안장될 가능성이 열릴 여지가 생겼다. 허나 합천에서도 전두환에 반대하는 여론도 많고, (애초에 땅을 팔아서 불가능하지만) 합천 선영에 묻었다간 전두환 본인의 묘는 물론 선친 전상우의 묘와 조상들의 묘까지 같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기에 특정 묘소에 안장하는 것보다는 계속 자택에 보관하고 있거나 바다에 유해를 뿌리는 게 낫다는 의견도 많다. 어느 지역에 묻든 안장 반대 여론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 뿌린다 해도 비판 여론 때문에 아예 12해리 밖의 공해상으로 나가라는 말이 있다.[118]
12.2. 반응[편집]
전두환계 인물 중에선 갈 수 있는 사람은 다 가는 분위기다. 앞서 언급한 장세동과 고명승은 빈소가 차려지자 다시 조문을 갔으며 박희도, 유경현, 이영일, 김용갑, 박철언, 이종구, 김진영, 금진호, 강창희, 허화평, 정영의, 사공일, 오명, 이원홍, 이종찬뿐만 아니라 아웃사이더였던 민병돈도 그의 조문을 갔다. # 현역 정치인 중에선 전 사위였던 윤상현과 개인자격으로 김기현, 주호영, 박대출이 갔다. 종교계 인사로는 백담사 은거 시절 주지였던 도후스님도 그의 조문을 갔으며 이외에도 이석채 전 KT 회장, 반기문 전 유엔총장, 박상범, 최대집, 변희재, 전여옥, 주옥순, 황교안, 손학규, 김진태, 노재헌, 조갑제, 최철원, 김경한 등이 그의 조문을 다녀갔다.
군인 출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두환에 호의적이었던 일부 정계, 특히 군 관련 인사들은 빈소에서 절이 아니라 거수경례를 하였다.[119][120]
논란의 인물이 사망했으니만큼, 장례식장에서도 고성이 오갔다. 정진태 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이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 과정에서 북한군을 운운하는 발언을 한 바람에 장내가 시끄러워졌으며, 전태일의 동생인 전태삼[121]이 장례식장 앞에서 전두환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우파 유튜버들이 반발하는 등 소란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기에 장례식장 현장에는 의무경찰과 병원측 보안요원이 상시 대기했다.
군인 출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두환에 호의적이었던 일부 정계, 특히 군 관련 인사들은 빈소에서 절이 아니라 거수경례를 하였다.[119][120]
논란의 인물이 사망했으니만큼, 장례식장에서도 고성이 오갔다. 정진태 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이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 과정에서 북한군을 운운하는 발언을 한 바람에 장내가 시끄러워졌으며, 전태일의 동생인 전태삼[121]이 장례식장 앞에서 전두환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우파 유튜버들이 반발하는 등 소란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기에 장례식장 현장에는 의무경찰과 병원측 보안요원이 상시 대기했다.
12.2.1. 언론[편집]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요? #전두환씨발언모음'
"전두환이 90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80년 5월 당시 광주 시민들에게 총을 쏘고 곤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계엄군의 실질적 수장이었지만, 40년이 흐르는 동안 사과 한 마디 없었는데요. 오히려 거짓 변명의 회고록을 쓰고, 골프와 호화 외식까지 하며 국민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줬습니다."
보통 전직 대통령이나 유력 정치인이 사망하면 뉴스에서 앵커들이 직접 고인의 생애를 요약해서 공식적으로 언급해주는데, 이번에는 사망 소식과 이후 장례절차 등 객관적인 사실만 앵커들이 직접 언급하고 이후 부분은 대부분 전문가와의 대담형식으로 이 사안을 갈음했다.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되어 전 대통령을 붙일 필요가 없기에 조선일보나 채널A등 보수성향 언론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은 호칭을 전 대통령도 아닌 그냥 전두환 씨[123]로, 서거라는 표현이 아닌 그냥 사망으로 보도했다. 보수성향인 중앙일보 역시 일부 보도에서 전두환 씨로 표현했다.[124] 후임 노태우의 사망 당시에도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 과거의 과오 등을 이유로 전 대통령이라는 표기를 하지 않은 일부 언론사들이 있었으나 노태우는 그래도 최소한 장례 기간 동안만이라도 전 대통령이라고 호칭을 하는 언론들도 상당히 많았던 데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직접 서거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일생이나 대통령 재임 중 행적을 짚어주는 언론들이 많았다. 지금도 다수 기사들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해 꼭 '전두환 씨·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나눠 기술함으로써 전 대통령 칭호를 노태우에게만 붙이고 전두환에게는 안 붙이는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외신들도 이 점을 반영했는지 노태우 사망 때에는 명과 암을 비교해 기사를 작성했으나, 전두환의 사망에는 대놓고 Dictator, Strongman 등 군사 독재자를 뜻하는 표현을 써가며 전두환 사망을 보도했다. 또한 기사와 함께 죄수복 또는 군복을 입은 모습의 사진들을 함께 첨부하면서 전두환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보여주었다.로이터, 가디언, 뉴욕타임스, NBC, CBC,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125]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되어 전 대통령을 붙일 필요가 없기에 조선일보나 채널A등 보수성향 언론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은 호칭을 전 대통령도 아닌 그냥 전두환 씨[123]로, 서거라는 표현이 아닌 그냥 사망으로 보도했다. 보수성향인 중앙일보 역시 일부 보도에서 전두환 씨로 표현했다.[124] 후임 노태우의 사망 당시에도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 과거의 과오 등을 이유로 전 대통령이라는 표기를 하지 않은 일부 언론사들이 있었으나 노태우는 그래도 최소한 장례 기간 동안만이라도 전 대통령이라고 호칭을 하는 언론들도 상당히 많았던 데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직접 서거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일생이나 대통령 재임 중 행적을 짚어주는 언론들이 많았다. 지금도 다수 기사들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해 꼭 '전두환 씨·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나눠 기술함으로써 전 대통령 칭호를 노태우에게만 붙이고 전두환에게는 안 붙이는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외신들도 이 점을 반영했는지 노태우 사망 때에는 명과 암을 비교해 기사를 작성했으나, 전두환의 사망에는 대놓고 Dictator, Strongman 등 군사 독재자를 뜻하는 표현을 써가며 전두환 사망을 보도했다. 또한 기사와 함께 죄수복 또는 군복을 입은 모습의 사진들을 함께 첨부하면서 전두환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보여주었다.로이터, 가디언, 뉴욕타임스, NBC, CBC,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125]
12.2.2. 정치권[편집]
- 더불어민주당은 공과를 명확하게 평가해야 된다는 반응을 내놨다.[126]
- 국민의힘은 공식적인 반응은 내놓지 않았다. 당 차원에서의 공식적 조문과 추모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이준석 대표가 당을 대표해 조화를 보내겠다고 하며, 당 소속의 구성원들의 조문 여부는 개인적 판단에 맡긴다고 밝혔다. 이후 이준석 대표 명의의 조화를 장례식장에 보냈다.
- 국민의힘은 과거부터 꾸준히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이 자신들의 뿌리이지, 전두환과는 딱히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3당 합당 이후 문민정부를 거치며 민정계 정치인들은 하나회 숙청과 역사바로세우기로 인해 급격히 몰락했다.[132]
그리고 국민의힘 소속 중진들 대다수가 김영삼[133] 혹은 상도동계나 민주계 정치인들과 직간접적인 영향을 맺고 있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김영삼, 이회창 등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중도우파 정치인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당시 민정계가 강한 대경권에서 가장 외면받은 정당인만큼 개혁적 성향이 강했다.[134]
현재 국민의힘 중진들은 신한국당 시절 전후부터 정치를 시작한 경우가 많다. 김영삼에 의해 쫓겨난 민정계 의원 중 일부는 자민련에서 활동했다. 참고로 민정계의 완전 해체는 2006년 자민련 해산이다. 이때 한나라당에 자민련의 당원들은 일괄적으로 합류했으나 당 재산은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기에 현재 국민의힘은 전두환 관련 세력과는 개념적으로는 단절되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135]
하지만 이런 대외적 노력과 이론적인 내용과는 달리 국민의힘에 비판적인 일부 국민들은 민정당을 국민의힘의 뿌리로 보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국민의힘은 신군부 세력이 창설한 민주정의당의 재산은 아직도 유산으로 넘겨받아 사용하고 있다. 국민의힘 광주시당·전남도당 건물도 원래 민주정의당 당사였으나, 김종인 전 위원장의 특별 지시로 2021년에 매각하고 이사를 갔다. 물론 국민의힘 대구시당, 경북도당 건물은 민정당 당사였지만 매각되지 않았다. 부산시당, 강원도당, 경기도당, 전북도당 역시 민주정의당을 승계하면서 함께 넘겨받은 당 재산이며, 충북도당과 경남도당은 민주자유당을 승계하면서 함께 넘겨 받은 건물들이다.[136] 이 때문에 전두환이 구설에 오르거나 5.18 관련 막말이 나오면 국민의힘의 주류 세력도 같이 엮여서 여러 곤란을 겪기도 했다.[137]
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불어민주당처럼 비판적인 성명을 내는 것이지만 국민의힘 지지자 중에는 전두환을 지지하고 추모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비판하기에는 쉽지 않다. 이 문제 때문에 국민의힘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계륵 같은 전두환의 존재를 최대한 털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침묵하는 것으로 보인다.[138]
특히 당장 내년으로 들이닥친 제20대 대통령 선거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호남권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올려야 하는 국민의힘이 전두환을 두둔하는 모습이 비추어지면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국민의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 지는 명약관화하다.
- 기타 정당
- 국민의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역사적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안혜진 국민의당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90세의 일기로 오늘 사망했다.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애도를 표한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안 대변인은 "그로 인해 현대사는 어두웠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며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12.2.3. 여론[편집]
연세대학교 부속병원 장례식장의 사이버 조문 게시판에 올라왔던 추모글 일부[139] |
전반적으로 4주 전 노태우의 사망 때보다 여론이 훨씬 더 부정적이다. 노태우는 생전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으며[140] 추징금도 완납했고, 무엇보다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뽑힌 대통령이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어느 정도 우호적인 여론이 있어 국가장을 치르는 데 큰 반발은 없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애초에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아니라서 집권의 정당성이 없었던데다가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추징금까지 완납하지 않은 점, 지방세 체납으로 고액 상습체납자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탈세범이란 점이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위에서 알 수 있듯 정치계와 언론계를 비롯한 모두가 전두환을 실컷 비난하고는 싶지만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장례만 치러줘서 조용히 묻어간 것에 가까운 상황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애초에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아니라서 집권의 정당성이 없었던데다가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추징금까지 완납하지 않은 점, 지방세 체납으로 고액 상습체납자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탈세범이란 점이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위에서 알 수 있듯 정치계와 언론계를 비롯한 모두가 전두환을 실컷 비난하고는 싶지만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장례만 치러줘서 조용히 묻어간 것에 가까운 상황이다.
12.3. 관련 시사 프로그램[편집]
[1] KBS NEWS 소속 계열사인 KBS뉴스 전북에서 업로드한 영상. 한때 연령 제한에 걸렸으나 현재 해제되었다.[2] 합천군에서 '새천년생명의 숲'의 이름을 '일해공원'으로 바꾼 것은 전두환의 연고지가 합천군이기 때문이다. 본래 선대의 집성촌은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인데, 전두환의 증조부 전석주(全錫注) 때에 율곡면 내천리로 이주했다고 한다. #[3] 10살 때 집에서 놀다가 마루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4] 생후 5개월 당시 옆집 처녀의 등에 업혀 있다가 그 처녀의 실수로 땅에 떨어져 역시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두 형제가 전부 추락사고로 사망.[5] 전두환의 누이들은 막내딸 전점학씨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생사여부에 대해 정보가 없다.[6]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무렵을 전후해서 경찰관으로 취업했다. 1974년 최종계급 경사로 경찰관을 그만두었으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뜬금없이 경찰관의 대부라는 소문이 퍼지고 경찰관으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전기환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성격은 전두환과 달리 천하의 순둥이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7] 생존 사실이 확인된 여동생 전점학 씨와는 다르게 전학렬씨는 생존 여부가 불명이다. 현재 생존해 있다면 89세이다.[8] 1991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1991년도 고졸자격 검정고시에서 9개 과목에 총점 608점, 평균 67.5점으로 당시 시험에서 최고령으로 합격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이 56세. 기사[9] 20대에 병으로 요절하였다.[10] 전두환 11남매의 늦둥이. 당장 얼굴도 보지 못한 큰형인 전열환과 27살 차이가 나며, 조혼 풍습이 아직 남아 있던 20세기 초에는 사실상 부모자식뻘 수준의 나이 차이다. 형의 후광으로,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에서 경호 5계장을 지냈다. 이후 형이 대통령이 되자, 새마을운동본부 총재를 맡았다. 전두환이 퇴임한 이후, 새마을운동본부 비리사건으로 1988년 구속.[11] 그래서 그런지 말하는 억양을 들어보면 경남 쪽이 아니라 경북 쪽이다.[12] 합천군 자체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이지만 대구에 인접해 있고, 부산광역시나 창원시 같은 경남권 대도시보다는 대구광역시에 훨씬 가까운 생활권이다. 행정구역 경계선이 실제 생활권과 일치하지 않는 사례다.[13] 경남 출신이지만 TK 계열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정치인으로는 홍준표가 있다.[14] 노태우는 전형적인 학구파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게다가 문학과 음악에도 관심이 많은 교양 소년이었다고 한다. 반면 전두환은 문학이나 예술보다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타입이었다.[15] 골키퍼가 팔만 좋으면 되지 왜 다리 힘까지 세느냐는 소리도 있지만 골키퍼도 골킥을 계속 차야하고 유사시 프리킥까지 차는 등 롱킥처리 비율이 높아 필드 플레이어들보다도 다리 힘이 센 키퍼들도 많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다만 육사 시절엔 공부 잘 하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성적이 하위권이었다. 육사 시절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보도들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도 하위권이었던 걸로 잘못 인식되어 와전된 것, 애초에 고등학교에서 하위권 성적이면 4년제 정규육사에 합격할 수도 없다. 아무리 그 당시 육사가 전쟁으로 인해 인원이 부족하다고 해도 지방에서 꼴통인 학생을 정규육사가 국가의 장교로서 책임지고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16] 그래서 하나회를 만들고 보스로 군림하게 된다.[17] 다만 군사영어학교는 별개로 간주.[18] 사실 10기 이후에 1950년 입교생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1950년 입교생들을 11기로 하고 1951년 입교생들은 12기가 되는 것이 맞으나 모종의 사유 때문에 11기로 불렸어야 할 1950년 입교생들은 10-2기 취급을 받게 되었으며 1951년 입교생들이 11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육사 기수 - 11 = 정규 육사 기수가 되면 계산이 힘들기 때문에 육사 기수 - 10 = 정규 육사 기수로 하여 계산을 좀 더 쉽게 할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입교 년도도 1951년 입교 = 육사 11기로 딱 들어맞기도 하고.[19]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유의진 1명만 퇴교시키는 선에서 끝났다.[20] 하지만 이 육군사관학교 11기들이 안전한 강의실에서 4년 동안 군사학을 배우는 동안 그들이 무시하던 임시육사 선배 장교들은 일본군, 광복군, 만주군으로의 실전과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전까지 38도선 인근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던 북한군과의 소규모 전투들을 치르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지옥도가 열려버렸고, 1950년부터 모집이 시작된갑종간부후보생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중학교(6년제)를 갓 졸업하여 20살도 채 안된 십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장교로 임관하여 중공군,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실전으로 군사학을 터득한 전투 베테랑들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장교들의 대부분도 실전 경험이 있는 이 갑종간부후보생 장교들이었다.[21][22] 전두환이 존경했다던 박정희 대통령도 그들이 무시하던 임시육사 7기 선배였다.[21]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소장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행정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갑종간부후보생으로 분류)이 되었으며 동기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나 그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진급한 케이스였다.[22] 실전 경험이 없었던 정규 출신 장교들은 진급을 위해서는 전투부대 지휘 경력이 필요하므로 베트남 전쟁 파병부대의 대대장, 연대장을 거져가는 식이었는데 전두환도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970년 뒤늦게 파병 부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하게 되고 서훈에 욕심을 내어 후술되는 대단한 사고들을 치게 된다.[23] 전두환이 1년 늦은 나이에 입학하긴 했지만, 그 시절은 1~2년씩 늦게 취학하는 건 흔했기 때문에 동기들 중에 전두환만 나이가 많은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전두환 본인의 절친 노태우부터가 (취학이 늦은 건 아니지만) 말라리아 때문에 사경을 헤메느라 1년을 휴학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 제5공화국이 이를 잘 고증하였다. 극 중 정호용은 전두환에게 "두환이"라고 하지만, 노태우는 "전 장군"이라고 높여 부른다.[24] 현재는 제1공수특전여단[25] 참고로 이영진씨는 이후 5.16때 반혁명군으로 분류되어 체포되었고, 풀려난 후에도 진급에서 계속 누락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다가 결국 군 생활을 조기에 마쳐야 했다. 당연히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치 군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다.[26] 출처는 허화평의 회고록 '나의 생각, 나의 답변'이다.[27] 그래서 형식적으로만 따지면 서울대학교 ROTC 1기가 전두환의 제자들인 셈이지만, 밑에 내용에 나오듯이 이 ROTC 교관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전두환은 이에 동참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담당 비서관으로 옮겼기 때문에 실제 교관 생활을 한 건 매우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특전사든 ROTC 교관이든 뭐든간에 어느 한 곳에 진득이 있지 않고 짧게만 근무하며 굉장히 여러 조직과 보직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도 전두환 군 이력의 특징이다.[28] 생도들에게서 전두환은 선배이기 이전에 무서운 폭력배여서 군부혁명 지지 퍼레이드를 안 하겠다고 개겼다간 욕지거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전두환의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29] 한편 강영훈은 이 때문에 박정희 시기에는 중장 예편한 후 해외유학을 떠나야 했고 전두환 정부 때는 해외대사로 타국을 떠돌다가 노태우 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금의환향한다.[30] 김재춘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들을 보호한 것은 아니었기에, 후일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시점에서는 전두환과 김재춘은 대단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31] 이에 대해 전두환은 소령은 제일 늦게 달았지만 대령은 제일 빨리 달았다고 회고했다.[32] 現 제29보병여단. 2021년 1월 1일부로 연대에서 여단으로 확대되었다.[33] 없는 군공 있다고 속이기[34] 심지어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들을 학살한 다음 나중에 시신이 발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신분증을 파기하고 암매장한 뒤 마치 베트콩들을 사살한 것 처럼 허위 전과 보고를했는데 그들 중 다행히도 부상만 당하고 정신을 잃었는데 죽은 것으로 착각되어 함께 매장되었던 민간인 한 명이 살아나와 신고를 함으로 전과 조작이 들통나버린 대형사고도 쳤다.[35] 이 '파티광', '파티 보이'라는 별명들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따라다녔다.[36] 이 때문인지 이세호는 괘씸죄로 낙인찍혀 전두환 집권 이후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했다.[37] 이 여단장 시기에 전두환에게 우수 훈련병사 표창장을 받았던 사병 중 한명이 먼 훗날 유명 정치인을 넘어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문재인이다. 표창장 사진도 공개한 적이 있고, 심지어 대통령후보 경선토론회에서도 본인이 말했다.[38] 이게 어떤 진급코스냐 하면 제1보병사단 사단장을 역임 후 제7기동군단 군단장을 역임하면 대장 진급 100%일 정도로 둘 다 진급코스이다.[39] 전투 특기들이 대장으로 진급하는 게 대세인 지금 국군방첩사령관은 그저 그런 보직이다. 대부분 국군방첩사령관을 마치면 전역하기 때문. 현 사령관인 황유성 중장도 임기제 진급자다. 물론 남영신 장군처럼 특별한 이유로 인해 대장으로 진급한 사례도 있다. 방첩사령관은 중장 서열 2위로 이 보직에서 다른 직으로 가는 것은 모양새가 좌천에 가깝다. 하지만 이 당시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국내의 모든 정보를 관리하는 하나의 축이었으며, 문민 정부 이전까지는 일개 사령관이 무려 대통령과 독대도 할 정도로 위세가 높은 요직이었다.[40] 본래 보안사령관 자리는 중장 보직인 것이 1977.10.20 제20보병사단 62연대 대대장인 유운학 중령이 월북사건을 계기로 보안사가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사령관 계급도 아예 소장으로 내려간 것이다.[41]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유학성, 김윤호, 차규헌[42] 중앙정보부장을 새로 임명하는 대신 자신이 대행이라는 명목으로 중장 계급임에도 정보기관을 독점한 것이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될 때까지 사실상 보안사령부의 손 안에 놓이게 된다.[43] 특히 항쟁 중인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발포의 발포명령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장명령자는 조창구이지만, 그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44] 대한민국 헌법상 대한민국 대통령은 민간인만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전역한 것이다.[45] 열병식 마지막 파트의 전두환 찬양 멘트가 북한의 우상화 멘트를 연상시키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46] 덕택에 노태우 정부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된 것이 전작권 반환이었다.[47] 1980년 국보위 창설 시부터 '정화운동기획단'으로 출발하여 11월부터 사회정화위원회로 계승되어 정권 유지를 뒷받침하다가 노태우 시기인 1989년에 해체되어 민간단체인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로 재탄생했다.[48] 대표적으로 삼청계획과 연예인 사회정화운동 등.[49] 이 법은 범죄자가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실형을 받고 그 형기의 합계가 3년 이상인 자가 다시 유사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등의 사유로 인해 상습성이 인정될 때는 형량과 상관없이 추가로 장기간의 보호 감호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는 법인데, 1989년 지강헌 탈주 사건과 보호감호 중 사망자 속출 등 장기간 보호감호 처분에 따른 반발과 부작용이 발생하고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1989년 사회보호법을 개정해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나, 이후 사회보호법상의 보호 감호가 ‘사실상의 이중 처벌’로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오다가 2005년 8월 4일에 폐지되었다.[50] 1980년 당시 ㅆ 뒤에서의 맞춤법은 읍니다가 맞다. 습니다로 개정된 때는 1989년.[51] 7년 단임 대통령제[52] 당시 학교, 관청 등 각종 공공기관에는 태극기와 함께 거의 대부분 이 사진이 걸려 있었다.[53] 컬러TV 방송은 미국에서는 60년대부터 보편적이었고 국내에서도 1970년대에 이미 방송기술 및 수상기 제작기술을 다 갖췄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사치라는 명목으로 컬러TV 수상기 시판을 금지하고 있었다.[54] 대학 교복자율화는 즉각적으로 정착되었지만 중고등학교 교복자율화는 교복보다 사복을 입는 것이 가격이 비싸서 생활비를 증가시킨다는 학부모들의 항의와 선생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1986년에 학교장 재량으로 교복을 다시 입히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이후 교복 부활이 대세가 되어서 결국 노태우 정권 말기 즈음이 되면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교복을 다시 입히게 되었다. 덧붙여 두발단속도 하나둘씩 부활한 것은 덤이었다.[55] 쉽게 말해 빨갱이라는 뜻이다.[56] 오늘날로 치면 2010년대 후반 이후 중국과 비슷한 포지션이다.[57] 다만 전두환이 사고에 휘말리지 않은 것이 다행인데, 당시 대한민국은 하나회의 영향력이 컸던지라, 까딱했다면 또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전두환의 악행에 대한 비판 여론도 북한에 살해당한 순국자 여론에 뜸해지는 것은 덤이고.[58] 7년이라는 기간은 샤를 드골의 프랑스 제5공화국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다만 드골의 프랑스는 연임이 가능했다.[59] 전두환이 민정당 총수로 취임 후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지며 막후 권력을 행사하는 구상이었다고 한다. 일본 자유민주당의 사례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정파 혹은 정당의 독재노선을 꾀한 것으로도 보인다.[60] 그러나 이 것도 허울만 좋은 것이지 실상은 통장, 반장들이 투표권자들의 이름이 적힌 연명부를 가지고 집집마다 들러서 대통령 선거 때 노태우 후보를 찍겠다는 확인 도장을 받아갔다.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의료보험, 즉 국민건강보험 실시 등 여러 혜택이 있을 것임을 설명하고 확인 도장을 받아갔다. 당시 사회 정황 상 본인 이름이 있는 명부에 도장까지 찍어 놓고 선거 때 야당 후보를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군부대 부재자 투표는 공개 투표로 이루어졌는데 야당 후보를 찍는 경우 구타로 이어졌다.[61] 당시 대통령 노태우부터가 5공의 핵심 가담자였고 전두환과 세트로 얽혀있어서, 전 정권 심판하려다 현 대통령까지 잡혀들어갈 게 뻔했다.[62] 노태우는 비자금이 폭로되면서 그 이전인 11월 16일 구속되었다.[63] 앞서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기소유예로 마무리지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기소유예로 끝났는데 또 트집 잡냐는 얘기.[64] 위 '단식투쟁'은 병원 이송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다가 1995년 12월 30일 국립경찰병원에서 제공하는 쌀뜨물에 이상이 생겨 설사증세가 발생한 이후 중단하였다.[65] 재밌는 게 1심 판결 당시 사형을 선고한 판사 김영일은 훗날 최종영 대법원장의 지명을 받아 헌법재판관이 되어 노무현 탄핵 때 찬성표를 던진 적이 있다.[66] 12.12 사태 당시 육군본부 벙커에서 초병 근무를 하던 정선엽 병장이 반란군을 막다 사망하였다.[67] 당시 법률상 반란수괴, 상관살해는 법정형이 사형밖에 없고,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초병살해 및 내란죄도 최대 사형까지 선고가 가능했다.[68] 이 호칭설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립하는데, 사법부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에 따라 국가로부터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된 이상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붙이면 안 된다는 의견과 "예우와 사법부의 판결과는 별개로 어디까지나 역사적 인물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의미로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게 맞다는 의견이 있다. 이는 전두환뿐만 아니라, 역시 실형 판결을 받았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에게도 붙는 논쟁거리다.[69] 참고로 문재인 정부의 총리인 정세균과 이낙연도, 대통령인 문재인도 재임 도중 논란이 되고 있는 전(前) 대통령들에 대하여 전직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바 있다.[70] 국립묘지 안장 등을 전담하는 국가보훈처에서는 사면이 되기는 했으나 판결 자체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유로 전두환의 사후 현충원 안장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2019년에 내놓았다.[71] 위키백과 15대 대통령선거, 대선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72]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73] 드라마 제5공화국의 마지막 장면도 바로 전두환이 특별사면으로 출소하는 내용이다.[74] 이 방송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을 맞아 SBS에서 제작한 역대 전직 대통령들을 인터뷰한 특집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 최규하가 출연했다.[75] 시공사는 1989년에 전두환이 장남 전재국을 시켜서 비자금으로 만든 출판사이다.[76]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 탄핵에 따른 보궐선거로 당선되었기에 취임식 자체가 국회 로텐더홀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이 때문에 외부 인사들의 참석은 없었다.[77] 2004년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78] 심지어 자신보다 정치적으로 한 세대 뒤인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전두환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다.[79] 이 때문에 2010년대까지만 해도 전두환이 노태우와 고작 1달 차이로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예측하는 여론은 드물었다.[80] 다만 법령에 명시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는 절대 복권시켜주지 않았다. 박지원의 말에 따르면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던 2002년, 전두환 측에서 사람을 보내 전직 대통령 예우를 복권시켜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는 불가능하다며 여러차례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81] 전두환은 이 밖에도 김대중 정부 시절 추진했던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평을 더러 내린 바 있다. 다만 이는 전두환이 정말 DJ 정부의 대북정책에 동의해서 그런 발언을 했다기보단, 자신을 사면시켜 주고 이후에도 융숭한 대접을 해주는 것에 보답 차원의 립서비스 정도에 불과하다. 자신을 구속시켰던 YS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비판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고, 이명박에 대해서도 DJ 때처럼 해달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으며 노무현 역시 국민장 당시 조문도 하지 않았다. 박근혜에 대해서는 2013년 추징금 논란으로 갈등을 빚어 실망스럽다는 식의 말을 여러차례 했었고,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박근혜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더러 내리기도 했다.[82] 말이 전직 대통령이지 거동이 불가능했던 노태우를 빼면 저 둘을 제외한 나머지 전직 대통령들이 죄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사실상 전두환과 김영삼 단 둘의 회동이었다. 현재는 다들 역사 속으로 들어간 상태다.[83] 이때 전두환은 첫 발언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2번째 발언 때는 화가 나서 일찍 자리를 떴다고 한다.[84] 전두환 회고록 출간 이전에는 아내 이순자가 먼저 회고록 <당신은 외롭지 않다>를 출간한 바가 있다.[85] 아마 전두환-노태우 밑에서 일했던 민정계 세력들을 자신에게 결집시켜달라는 부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000년대 초반 민정계는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등 여야에 뿔뿔이 흩어져있었다.[86] 고인의 조카인 천주교 광주대교구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가 대표하였다.[87] 유가족의 고소가 있어야 사건 성립하는 범죄[88] 전두환이 재판 출석하던 날에 초등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89] 어마어마한 땅값이지만 과거 1997년 내란·반란수괴 등 혐의로 선고받은 추징금이 잔여 1,000여억 미환수 상태라서 남은 돈 900억을 더 내야한다.[90] (사자명예훼손 등)에 관하여 회고록은 허위가 아닌 공적인 사실인 과거 국가기관기록과 검찰조사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헬기 사격설의 진실은 아직 확인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로 전두환 자신이 고의성을 가지고 위 회고록을 작성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91] 당시 영상 등을 확인해 보면 "살인마"나 "개새끼" 정도는 예사로 수많은 사람들의 욕설, 저주, 고함, 야유 등이 뒤섞여 들린다.[92] 우연히도 이 학교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사망한 故 이한열 열사의 모교이기도 하다.[93] 단 손자 전우원의 증언이 나옴에 따라 당시 이미 중증 알츠하이머였음이 확인되었다. 2015년부터 손자의 얼굴을 간혹 알아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고.[94] 중환자인지라 칩거하던 노태우와,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을 제외하고 다 모인 듯 하다. 다만 노태우는 2019년경부터 5.18 유족에게 사죄하는 쪽으로 입장을 굳힌 것으로 보여, 여기 참가한 나머지 쿠데타 주역들과 노선을 달리하고 있다. 물론 본인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어디 못 나가는 상황이어서 아들 노재헌 씨가 사죄에 대신 참여했다. 다들 전 前 대통령을 각하라고 높여 부르며 윗사람 대우를 했고, 정호용 씨만 '두환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전두환과 정호용은 육사 동기인데다가 5공 내내 요직을 시킬 정도로 친한 친구 사이라서 가능한 듯.[95] 코코넛 제비집, 양등심 탕수육 샥스핀, 와인 등이 포함된 고가의 메뉴이다. 불도장을 세트와는 별개로 주문하기는 했으나 테이크 아웃으로 가져갔다고 한다.[96]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전두환은 다른 차량을 타고 빠져나갔다. 그가 차에 내리고 탈 때마다 경호원들이 마른 하늘에 비닐 우산을 펼치다 접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97] 후일 전두환이 사망하고 난 이후 손자인 전우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치매는 진짜였고,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대외활동이 왕성한 편이였던 2014년에도 이미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고 한다. 5분 전에 비서관에게 바둑 두자 해놓고 바둑 둘 줄 아냐고 물어보거나 휴가를 나온 전우원에게 군대 언제 가냐고 물어보는 등 단기 기억력을 아예 상실한 상태였다고. 이것 때문에 부인인 이순자 여사가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고 한다.[98] 말년에는 둘 다 끊었는데, 담배의 경우 1997년 출소하고 나서부터 바로 끊었다고 하며 술은 언제부터였는지는 불명이다.[99] 전두환 본인이 건강 관리를 굉장히 잘해서인지, 당장 2019년까지만 해도 80대 후반 노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건강이 악화된 것은 자기가 가기 싫어했던 광주지방법원에 갔다오면서 느낀 치욕으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게 원인일 가능성도 있다.[100] 이완구 전 총리도 이 병으로 사망했으며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도 이 병의 영향으로 사망했는데, 그만큼 무시무시한 병이다. 한 마디로 뼈를 파고드는 병.[101] 워낙 고통스러운 병들이 많기 때문에 의사들은 종종 농담삼아 말년까지 건강하다가 혈액암으로 죽는 것이 가장 편하게 죽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슷한 사례로 KFC 창업자 할랜드 샌더스가 있는데, 이쪽도 평생 치킨을 주식으로 먹고 살았으면서도 90세까지 건강하다가 패스트푸드와는 상관도 없는 백혈병으로 사망했다.[102] 동생의 장례 때도 조화만 한 점 보냈다.[103] 보도 초기에는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아 용변을 보다가 숨졌다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인터넷 등지에서는 "똥 싸다가 죽었다."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화장실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비하의 의미에서 화장실이나 변기를 언급하며 조롱하는 사례도 많다.[104] 오히려 진짜로 변기 위에서 죽은 독재자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다.[105] 저 기사에도 나와 있듯 약만 먹었는데도 병세가 상당히 호전됐었고, 대증치료가 상당히 효과를 내는 걸 본 의사가 항암치료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두환 본인이 '난 살 만큼 살았다'며 거절한 것.[106]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나 5공화국 때 일했던 자신의 측근들도 2010년대를 전후해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2020년대 이후에도 생존해있는 5공 시절 인사들은 그리 많지 않은데, 전두환도 이들 중에서는 장수한 편이다.[107] 전재국:출판업 및 음반산업, 전재용:부동산 사업, 전재만:와이너리. 전효선은 특별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지 않고 대학 교수를 하고 있다.[108] 20세기에 집권한 대통령들의 각각 사망년도를 나열하면 이승만(1965), 윤보선(1990), 박정희(1979), 최규하(2006), 전두환(2021), 노태우(2021), 김영삼(2015), 김대중(2009) 순이다.[109] 노무현(16대, 1946년 9월 ~ 2009년 5월) - 김대중(15대, 1924년 1월 ~ 2009년 8월) - 김영삼(14대, 1927년 12월 ~ 2015년 11월) - 노태우(13대, 1932년 12월 ~ 2021년 10월) - 전두환(11-12대, 1931년 1월 ~ 2021년 11월). 전두환의 전임자였던 10대 대통령 최규하는 노무현의 사망 3년 전인 2006년에 별세했다. 이는 자살한 대통령인 노무현을 제외하면 비슷한 연배에 태어난 전두환과 노태우부터 김대중까지 나이가 점점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 대통령은 아니지만 삼김의 일원인 김종필 총리는 1926년 생이고 2018년에 사망해 김영삼보다 먼저 태어나 늦게 사망한 셈이다. 우연의 일치처럼 2009년에는 노무현, 김대중 2015년에는 김영삼, 2021년에는 노태우, 전두환이 사망했는데, 모두 6년 간격이다.[110]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당한 경우에도 경호 및 경비(警備) 인력은 그대로 유지된다. 꼭 저 규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경찰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경호를 하는 게 가능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전두환 옹호 세력과 비판 세력이 한데 뭉쳐져서 양측의 충돌에 유혈 사태까지 일어날 수도 있다.[111] 윤보선 이후 사망한 대통령들 중 최규하와 노무현은 국민장으로, 김대중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국가장 통합 이후에는 김영삼과 노태우가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렀다.[112] 유언으로 화장해달라고 남겼지만, 이미 예전에도 몇 차례 자신이 사망하면 화장해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2002년 이주일의 장례식 때 빈소에서 이주일이 화장을 결정했다는 기사를 봤다는 언급을 하며 자신도 죽으면 화장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었다.[113] 실제로 화이자 백신 부작용 중 다발성 골수종이 보고된 바는 있다. 다만 전두환이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대였던 만큼 설득력은 별로 높지 않다. 주장을 증명할 근거도 부족하고.[114] 다른 의견도 있는데, 처조카 이용택 전 국회의원은 합천 선영에 모셔달라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115] 국가보존묘지는 국가장을 치르고서 국립묘지 이외의 지역에 안장된 대상자로 지정된다.[116] 이는 건강이 악화되어 불가피한 상황이기도 했다.[117] 웃긴 건 합천군수 문준희는 여기에 분향하러 갔다.[118] 국제적으로 자국 영토에서 12해리 (약 22km)까지를 영해로 설정하고 있다. 거기에 기선으로부터 200해리 (370.4km)까지를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배타적 경제수역 밖으로 나가라는 말까지 있긴 하다.[119] 사실 전두환뿐만이 아닌 고위 군 인사가 죽으면 거수경례를 올리기도 한다. 조문하는 사람보다 기수가 낮거나 동기이면 절을 하고, 높으면 거수경례를 한다.[120] 다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고는 성우회 홈페이지에 나왔음에도 똑같은 육군 대장 출신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고는 실리지도 않았다.[121] 어머니 이소선과 그는 전두환 집권 시절 성동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다.[122] 눈치챘겠지만 특정 욕설을 연상케 하는 의도로 만든 텍스트이다.[123] 특히 5.18 당시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던 광주MBC는 호칭 자체를 빼 버렸다. 즉 그냥 전두환 사망이라 표기했다. 이건 다른 광주 지역 언론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그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 특히 저항할 능력이 없는 약한 사람들도 마구 학살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나마 YTN은 전 대통령 호칭을 붙이기는 하였지만 그마저도 전 대통령을 지냈던 전두환 씨 사망으로 보도하였다.[124] 중앙일보는 보수언론이지만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을 잃은 역사 때문에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강한 편이다. 특히 신사옥(현 KBS 별관)을 건립하고 컬러TV 방송 준비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 자산들을 한국방송공사에 강제로 매각당했다.[125] WSJ와 워싱턴 포스트는 한 술 더떠 Brutal이란 수식어까지 붙여썼다.[126] 포스팅을 3회 수정하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당초 '전 전 대통령을 애도'한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가 지지자들의 항의로 '애도'라는 표현이 빠지고, 나중에는 '전 대통령'이라는 표현도 뺐다.[127] 참고로 이재명은 노태우의 사망 때에는 최소한의 노력은 보였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고 조문도 갔었다. 실제로 노태우는 말년에 아들의 입을 통해 사죄의 뜻을 밝혔다.[128] 위에도 있듯 국민의힘 지지자라도 박정희나 노태우를 지지하면 했지, 일부를 제외하면 전두환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성향이 많다.[129] 같은 동네 웃어른이니 조문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한 바 있다. 홍준표의 고향인 창녕과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은 같은 서부경남 지역으로 인접해 있으며 부울경이지만 같은 대구 생활권이라는 점에서 나름 동질감이 있다. 또한 홍준표는 합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합천과도 어느정도 연고가 있다.[130] 다만 누군가가 박근혜를 사칭하여 박근혜보다 먼저 조화를 보내는 바람에 이를 치우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작 박근혜가 조화를 보낸 사실보다 위 해프닝이 더 화제가 되었다.[131] 전두환의 전 사위다.[132] 주요 정당들의 중앙당사에는 자신들이 기리는 정치인들의 사진을 걸어놓는다. 가령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에는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국민의힘 중앙당사 회의실에는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의 사진은 있지만 전두환의 사진은 없다. 원래는 이승만, 박정희의 사진만 있었지만 자유한국당 시절 홍준표 대표가 김영삼의 사진도 걸었다. 물론 상도동계 직계인 정병국 의원은 김영삼과 박정희의 관계를 거론하며 반발했다. 일단 김영삼은 3당 합당으로 현재 국민의힘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고, 직간접적으로 김영삼과 가까운 중진들이 많다.[133] 김영삼은 박정희보다 전두환을 더 싫어했다. 민정계를 호랑이에 비유하며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며 전두환, 노태우 위주의 민정계를 숙청하고, 하나회를 해체했다. 오히려 민정계 중에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해 DJP연합 당시 김대중에게 협조한 이들이 꽤 많다.[134] 실제로 문민정부 들어 치러진 전국단위 공직선거 결과를 보면 민주자유당(민자당) 간판으로 치른 마지막 선거가 된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는 대구광역시장 선거에서 민자당 조해녕 후보가 무소속 후보 2명과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에게 밀려 4위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포항시장을 민주당에 내주기도 했고,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이 6공화국 들어 처음으로 서울에서 승리하는 가운데서도 대구에서 자민련에게 참패했다.[135] 오히려 민주정의당보다 민주공화당을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박근혜도 한나라당 의원 시절에 당의 뿌리는 3공부터 이어져 왔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136] 즉 경제적 자산은 계승하면서도 정치적 부채는 피하고자 하는 이율배반적 성격이란 비판을 받는다.[137] 국민의힘에서 전두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친박계와 같이 국민의힘에서도 굉장히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다.[138] 전두환의 연고지인 대경권 노년층 중에는 지지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물론 2030들 중에도 전두환 추종자도 존재하긴 하지만 이들은 국민의힘 지지자 중에서도 친박, 친황과 같은 극우 계통에 해당되거나 모두까기 성향이다.[139] 사진에 올라온 내용은 당시 올라왔던 수많은 저주와 욕설, 패드립, 고인모욕, 야유 중 극히 일부이다. 결국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추모글 작성이 막혔고, 기존 글들도 전부 삭제되었다.[140] 물론 노태우 역시 처음부터 사과를 한건 아니고 90년대 중반까지는 '중공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광주 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바뀌었는지 거동이 불편한 본인 대신 아들 노재헌 변호사를 통해 직접 사과의 뜻을 여러 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