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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고양시
1. 고대[편집]
한강을 끼었고 구릉지 사이로 넓은 골짜기가 많아 예로부터 논농사가 적합한 지역이었다. 다만 논농사 자체는 한강의 범람원보다는 현 고양시의 북부에 해당하는 덕양구 삼송동이나 일산동구 고봉동 일대에서 성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이유는 수리시설의 미비 때문이다.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조석작용으로 바닷물이 잠실 유역까지 거슬러 오를 정도였는데, 이 때문에 수운은 발달했지만 강 인근은 오히려 논농사를 안정적으로 짓기 힘들었다. 벼를 심어도 홍수에 쓸려나가고 물이 빠지지 않아 도로 습지가 되기 일쑤였기 때문.
한강 주변의 습지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함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이후부터인데, 당시의 수리시설은 경기도 부천시 북부 등에 아직 남아있다. 이 때문에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닦다가 선사시대 집터가 발견된다든지 하는 뉴스가 가끔 나온다. 고양시청 1층에 가 보면 이들 선사시대에 발굴된 볍씨 조각 등을 복도에 전시해놓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삼한의 토착민들이 살았다. 그러다 기원전 281년 중국 전국시대 전국칠웅 중 연나라의 소양왕이 장군 진개를 비롯한 군사들에게 명하여 고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고조선은 요동 일대에서 현 평양시 일대로 중심지를 옮겼다. 고양시 지역 또한 이때 고조선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간 듯하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전한의 무제(전한)에게 멸망한 후 옛 위만조선의 영역과 영향권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위만조선의 중심지였던 평양 일대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었고, 현 고양시 지역은 현 황해도 일대에 설치된 진번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때쯤부터가 원삼국시대에 해당한다.
기원전 82년 전한의 소제는 한사군 중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켰다. 낙랑군은 옛 진번군의 영역에 남부도위(南部都尉)라는 부속기관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는데 따라서 현 고양시 지역은 낙랑군 남부도위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후 전한이 서기 8년 왕망의 신나라에게 멸망했다. 경시제의 현한이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잠시 들어섰다가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경시제가 농민 반란군인 적미에게 피살당해 다시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고 한참 뒤 또 혼란기가 도래해 삼국시대(중국)로 이어지는 등 중국에서는 연속적인 정치 혼란이 발생했는데 그 와중 요동에서는 독립세력인 동연이 들어서게 되고 한사군을 장악한 동연은 3세기 초 낙랑군 남부도위를 낙랑군에서 떼어내 대방군을 설치하고 공손모와 장창 등을 파견해 일대를 정리하였다. 따라서 현 고양시 지역 또한 대방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경기도 파주시·연천군에 걸친 지역을 영역으로 삼았던 걸로 추정되는 마한의 소국인 신분활국(臣濆活國)이 이 즈음부터 한사군의 통제를 받는 토착세력으로 사서에 등장했다. 현 고양시 지역 또한 신분활국의 영향권에 들었던 듯하다. 신분활국이 정확히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원래 고조선부터 한사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지역은 직할통치보다는 느슨한 간접통치가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기반이 되는 경기 북부 일대의 토착민들 또한 원래부터 계속 반자치적인 생활을 이어왔다고 추정할 뿐이다.
237년 조위의 조예는 관구검을 요동을 관할하는 유주자사에 임명해 동연의 마지막 군주인 공손연을 제거하도록 했으나, 관구검은 랴오허도 넘지 못하는 등 성과가 시원찮았다.
238년 조위는 다시 사마의와 4만의 대군을 파견해 관구검을 지원하도록 했는데 사마의는 관구검을 휘하에 편입시키고 고구려 동천왕과 연합해 공손연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조위는 선우사와 유흔을 각각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로 임명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게 했다. 이에 현 고양시 지역 또한 조위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242년 동연 정벌을 지원하고도 얻은 게 없는 고구려는 조위에 불만을 품었다. 동천왕은 조위의 서안평(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을 선제 공격했다.
244년 관구검과 현도태수 왕기가 역공을 가하자 비류수 전투에서 대패한 고구려는 계속 밀려나 수도 국내성(+환도산성)까지 초토화되었다.
245년 전세를 가다듬은 관구검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때 동천왕이 옥저로 달아나자 관구검은 왕기를 보내 추격하게 하였고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에게는 고구려에 복속하던 현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의 소국들을 접수하도록 했다.
246년 왕기의 추격을 받던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죽이고 겨우겨우 살아났다. 이즈음 낙랑군 부종사 오림은 본래 낙랑군이 삼한을 통치해 왔다고 주장하며 진한 8개국을 분할해 낙랑군에 속하게 하려 했다. 이때 통역이 잘못돼 마한의 군주인 신지들이 격분하였고 마침 유무와 궁준이 고구려 공격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마한 연합군이 대방군 기리영(현 황해북도 평산군)을 공격하는 기리영 전투가 벌어졌다.
기리영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국가가 바로 신분활국인 듯하다. 궁준이 전사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신분활국은 멸망한 것 같다.[1] 일대의 소국들은 다시 한사군에 복속되었다. 이때 백제 고이왕 또한 진충을 보내 낙랑군을 공격하게 해 포로를 잡아왔는데, 마한 연합군이 박살나자 후환이 두려웠는지 돌려보내었다.
265년 사마염이 조위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세웠으므로, 한사군 또한 서진에 속하게 되었다.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함락시키자 서진 본토와 교통로가 끊긴 낙랑군과 대방군은 월경지로 고립되었다.
313년 낙랑군이, 314년에는 대방군이 미천왕에게 차례로 멸망했다.
한강 주변의 습지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함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이후부터인데, 당시의 수리시설은 경기도 부천시 북부 등에 아직 남아있다. 이 때문에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닦다가 선사시대 집터가 발견된다든지 하는 뉴스가 가끔 나온다. 고양시청 1층에 가 보면 이들 선사시대에 발굴된 볍씨 조각 등을 복도에 전시해놓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삼한의 토착민들이 살았다. 그러다 기원전 281년 중국 전국시대 전국칠웅 중 연나라의 소양왕이 장군 진개를 비롯한 군사들에게 명하여 고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고조선은 요동 일대에서 현 평양시 일대로 중심지를 옮겼다. 고양시 지역 또한 이때 고조선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간 듯하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전한의 무제(전한)에게 멸망한 후 옛 위만조선의 영역과 영향권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위만조선의 중심지였던 평양 일대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었고, 현 고양시 지역은 현 황해도 일대에 설치된 진번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때쯤부터가 원삼국시대에 해당한다.
기원전 82년 전한의 소제는 한사군 중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켰다. 낙랑군은 옛 진번군의 영역에 남부도위(南部都尉)라는 부속기관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는데 따라서 현 고양시 지역은 낙랑군 남부도위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후 전한이 서기 8년 왕망의 신나라에게 멸망했다. 경시제의 현한이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잠시 들어섰다가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경시제가 농민 반란군인 적미에게 피살당해 다시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고 한참 뒤 또 혼란기가 도래해 삼국시대(중국)로 이어지는 등 중국에서는 연속적인 정치 혼란이 발생했는데 그 와중 요동에서는 독립세력인 동연이 들어서게 되고 한사군을 장악한 동연은 3세기 초 낙랑군 남부도위를 낙랑군에서 떼어내 대방군을 설치하고 공손모와 장창 등을 파견해 일대를 정리하였다. 따라서 현 고양시 지역 또한 대방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경기도 파주시·연천군에 걸친 지역을 영역으로 삼았던 걸로 추정되는 마한의 소국인 신분활국(臣濆活國)이 이 즈음부터 한사군의 통제를 받는 토착세력으로 사서에 등장했다. 현 고양시 지역 또한 신분활국의 영향권에 들었던 듯하다. 신분활국이 정확히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원래 고조선부터 한사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지역은 직할통치보다는 느슨한 간접통치가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기반이 되는 경기 북부 일대의 토착민들 또한 원래부터 계속 반자치적인 생활을 이어왔다고 추정할 뿐이다.
237년 조위의 조예는 관구검을 요동을 관할하는 유주자사에 임명해 동연의 마지막 군주인 공손연을 제거하도록 했으나, 관구검은 랴오허도 넘지 못하는 등 성과가 시원찮았다.
238년 조위는 다시 사마의와 4만의 대군을 파견해 관구검을 지원하도록 했는데 사마의는 관구검을 휘하에 편입시키고 고구려 동천왕과 연합해 공손연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조위는 선우사와 유흔을 각각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로 임명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게 했다. 이에 현 고양시 지역 또한 조위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242년 동연 정벌을 지원하고도 얻은 게 없는 고구려는 조위에 불만을 품었다. 동천왕은 조위의 서안평(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을 선제 공격했다.
244년 관구검과 현도태수 왕기가 역공을 가하자 비류수 전투에서 대패한 고구려는 계속 밀려나 수도 국내성(+환도산성)까지 초토화되었다.
245년 전세를 가다듬은 관구검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때 동천왕이 옥저로 달아나자 관구검은 왕기를 보내 추격하게 하였고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에게는 고구려에 복속하던 현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의 소국들을 접수하도록 했다.
246년 왕기의 추격을 받던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죽이고 겨우겨우 살아났다. 이즈음 낙랑군 부종사 오림은 본래 낙랑군이 삼한을 통치해 왔다고 주장하며 진한 8개국을 분할해 낙랑군에 속하게 하려 했다. 이때 통역이 잘못돼 마한의 군주인 신지들이 격분하였고 마침 유무와 궁준이 고구려 공격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마한 연합군이 대방군 기리영(현 황해북도 평산군)을 공격하는 기리영 전투가 벌어졌다.
기리영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국가가 바로 신분활국인 듯하다. 궁준이 전사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신분활국은 멸망한 것 같다.[1] 일대의 소국들은 다시 한사군에 복속되었다. 이때 백제 고이왕 또한 진충을 보내 낙랑군을 공격하게 해 포로를 잡아왔는데, 마한 연합군이 박살나자 후환이 두려웠는지 돌려보내었다.
265년 사마염이 조위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세웠으므로, 한사군 또한 서진에 속하게 되었다.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함락시키자 서진 본토와 교통로가 끊긴 낙랑군과 대방군은 월경지로 고립되었다.
313년 낙랑군이, 314년에는 대방군이 미천왕에게 차례로 멸망했다.
2. 삼국시대[편집]
이때부터 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현 고양시 지역 또한 그즈음 백제에 귀속되었다고 추정되나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304년 분서왕 대에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계속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려 시도했던 모양이다. 327년 비류왕 대에 왕의 이복동생 내신좌평 우복이 한강 이북인 북한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으니, 적어도 이때쯤에는 현 고양시 지역이 백제에 속하였음이 확실하다. 그 이후인 근초고왕 대에는 치양(현 황해남도 배천군) 일대에서 고구려 고국원왕과의 치양 전투가 벌어지는 등 백제가 황해도까지 밀고 올라갔다고 나온다.
백제에 속하게 된 현 덕양구 지역은 개백현(皆伯縣)으로 불리게 되며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지역 역사의 시작이다. 개백현의 치소는 행주산성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심 영역이 현재의 덕양구 행주내동에서 능곡동 일대에 해당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개로왕이 죽고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는 등 달달 털렸다. 위례성보다 북쪽에 있었던 개백현 또한 당연히 이때 함락된 뒤 고구려가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일대에 설치한 북한산군(北漢山郡), 별칭 남평양(南平壤)에 편입되었다.
또한 현 일산동/서구 지역에 달을성현(達乙省縣)이 따로 설치되었고 굴화군(屈火郡)에 속했다고 추정한다. 다만 이 달을성현은 원래 아예 따로 있던 백제의 현에다 덮어쓰기로 설치했는지, 아니면 개백현의 북부를 뚝 떼어내서 설치했는지는 불명이다. 달을성현의 치소는 고봉산 일대였던 듯한데, 중심 영역이 현 일산동구 성석동에서 덕양구 관산동 일대에 해당한다. 광개토대왕 때 달을성현을 분리 설치하면서 일산 일대가 달을성현의 관할에 들어간 것 같다. 안장왕의 사랑과 전쟁(...) 에피소드에서 달을성현의 고봉산 아래(일산동구 중산동으로 보인다.)에 살던 미녀 한씨는 고봉산 정상에 불을 피워 안장왕을 기다렸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삼국시대의 군은 현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현대의 도와 시군의 관계처럼 직접적인 수직관계는 아니었다.
고구려 문자명왕 말기에는 현 고양시 지역을 다시 백제에게 뺏긴 듯하다. 그때 백제는 수도가 웅진성으로 밀려났던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흥군주 동성왕과 무령왕을 배출해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한강 근처까지 다시 올라가 고구려와 공방전을 벌였다. 그리고 춘향전의 원조가 되는 안장왕과 한씨의 왕봉 설화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한씨가 산 정상에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기다렸는데 그래서 그 산의 이름이 고봉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안장왕과 미녀 한씨의 상봉을 기념, 개백현이 이때 왕을 맞은 곳이라 하여 왕봉현(王逢縣)으로 개명됐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개백현이 정말로 왕봉현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지리지 등의 기록에서 현의 이름이 그냥 고구려 개백현으로 나온 경우가 많고 왕봉현은 그냥 개백현의 별칭이었다고만 적혔기 때문이다.[2] 혹은 그냥 개백은 훈차[3], 왕봉은 그 뜻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아서 같은 지명의 다른 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개백현이나 왕봉현 둘 다 고구려의 지명이 되며 백제에서는 원래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례로 후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통일신라의 옛 지명이 아닌 고려 당대에 익숙했던 새 지명으로 덮어씌운 경우가 흔히 나타난다.[4]
553년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때 경기도 일대가 신라에 점령되었다.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이때 설치된 신주(新州, 후의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곧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밀어붙였는데, 개백현과 달을성현은 이때 고구려가 다시 되찾은 듯하다. 또한 이전에 개백현이 속했던 북한산군을 되찾고자 고구려의 뇌음신이 북한산성 전투를 벌였으나 신라의 동타천이 막아낸 기록이 있다. 이후 당나라가 개입한 삼국통일전쟁 때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자 현 고양시 지역은 통일신라의 땅이 되었다.
685년 신문왕은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하는데 이때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하였다.
698년 발해가 세워지고 남북국시대가 개창했다.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때 한산주에 속한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각각 한주(漢州)에 속한 한양군(漢陽郡) 우왕현(遇王縣)과 교하군(交河郡) 고봉현(高烽縣)으로 개칭되었다. 우왕현과 고봉현은 각각 한양군과 교하군의 영현이었다 한다.
백제에 속하게 된 현 덕양구 지역은 개백현(皆伯縣)으로 불리게 되며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지역 역사의 시작이다. 개백현의 치소는 행주산성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심 영역이 현재의 덕양구 행주내동에서 능곡동 일대에 해당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개로왕이 죽고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는 등 달달 털렸다. 위례성보다 북쪽에 있었던 개백현 또한 당연히 이때 함락된 뒤 고구려가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일대에 설치한 북한산군(北漢山郡), 별칭 남평양(南平壤)에 편입되었다.
또한 현 일산동/서구 지역에 달을성현(達乙省縣)이 따로 설치되었고 굴화군(屈火郡)에 속했다고 추정한다. 다만 이 달을성현은 원래 아예 따로 있던 백제의 현에다 덮어쓰기로 설치했는지, 아니면 개백현의 북부를 뚝 떼어내서 설치했는지는 불명이다. 달을성현의 치소는 고봉산 일대였던 듯한데, 중심 영역이 현 일산동구 성석동에서 덕양구 관산동 일대에 해당한다. 광개토대왕 때 달을성현을 분리 설치하면서 일산 일대가 달을성현의 관할에 들어간 것 같다. 안장왕의 사랑과 전쟁(...) 에피소드에서 달을성현의 고봉산 아래(일산동구 중산동으로 보인다.)에 살던 미녀 한씨는 고봉산 정상에 불을 피워 안장왕을 기다렸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삼국시대의 군은 현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현대의 도와 시군의 관계처럼 직접적인 수직관계는 아니었다.
고구려 문자명왕 말기에는 현 고양시 지역을 다시 백제에게 뺏긴 듯하다. 그때 백제는 수도가 웅진성으로 밀려났던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흥군주 동성왕과 무령왕을 배출해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한강 근처까지 다시 올라가 고구려와 공방전을 벌였다. 그리고 춘향전의 원조가 되는 안장왕과 한씨의 왕봉 설화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한씨가 산 정상에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기다렸는데 그래서 그 산의 이름이 고봉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안장왕과 미녀 한씨의 상봉을 기념, 개백현이 이때 왕을 맞은 곳이라 하여 왕봉현(王逢縣)으로 개명됐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개백현이 정말로 왕봉현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지리지 등의 기록에서 현의 이름이 그냥 고구려 개백현으로 나온 경우가 많고 왕봉현은 그냥 개백현의 별칭이었다고만 적혔기 때문이다.[2] 혹은 그냥 개백은 훈차[3], 왕봉은 그 뜻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아서 같은 지명의 다른 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개백현이나 왕봉현 둘 다 고구려의 지명이 되며 백제에서는 원래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례로 후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통일신라의 옛 지명이 아닌 고려 당대에 익숙했던 새 지명으로 덮어씌운 경우가 흔히 나타난다.[4]
553년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때 경기도 일대가 신라에 점령되었다.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이때 설치된 신주(新州, 후의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곧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밀어붙였는데, 개백현과 달을성현은 이때 고구려가 다시 되찾은 듯하다. 또한 이전에 개백현이 속했던 북한산군을 되찾고자 고구려의 뇌음신이 북한산성 전투를 벌였으나 신라의 동타천이 막아낸 기록이 있다. 이후 당나라가 개입한 삼국통일전쟁 때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자 현 고양시 지역은 통일신라의 땅이 되었다.
685년 신문왕은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하는데 이때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하였다.
698년 발해가 세워지고 남북국시대가 개창했다.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때 한산주에 속한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각각 한주(漢州)에 속한 한양군(漢陽郡) 우왕현(遇王縣)과 교하군(交河郡) 고봉현(高烽縣)으로 개칭되었다. 우왕현과 고봉현은 각각 한양군과 교하군의 영현이었다 한다.
3. 고려시대[편집]
940년 태조(고려) 대에 우왕현을 행주현(幸州縣)으로 개칭하였다. 이 행주현의 별칭이 바로 덕양현(德陽縣)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우왕현과 고봉현은 고려 대에 들어선 행주현과 고봉현이 되었다.
983년 성종(고려) 대에 행정구역을 정비하며 12목을 두었는데 이때 현 경기도 북부 일대의 중심지로 설치된 게 양주목(楊州牧, 중심지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이었다. 목의 경우 현대의 도와 시군의 관계처럼 주변의 주현과 직접적인 수직관계를 이루고 있진 않았지만 대도시로서 주변의 주현을 통제하였다. 따라서 행주현과 고봉현 또한 양주목의 감독을 받게 된다.
1018년 현종(고려) 대에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며 12목이 8목으로 축소되고 5도 양계가 실시된다. 교통로가 개경 중심으로 바뀌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 탓에 견주(見州, 중심지는 현 양주시 양주1동, 양주2동)는 견주현으로 격하되었으며 충청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된다. 양광도의 '양'이 양주목에서 나왔으며 '광'은 광주목에서 나왔다. 이때 행주현과 고봉현 또한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행주현과 고봉현은 양주목의 속현이 된다.
1067년 문종(고려) 대에 양주에서 분리된 남경(南京,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일대.)이 설치되며 행주현과 고봉현은 양주목의 속현에서 남경의 속현으로 이관된다.
1298년 충렬왕 대에 남경이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983년 성종(고려) 대에 행정구역을 정비하며 12목을 두었는데 이때 현 경기도 북부 일대의 중심지로 설치된 게 양주목(楊州牧, 중심지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이었다. 목의 경우 현대의 도와 시군의 관계처럼 주변의 주현과 직접적인 수직관계를 이루고 있진 않았지만 대도시로서 주변의 주현을 통제하였다. 따라서 행주현과 고봉현 또한 양주목의 감독을 받게 된다.
1018년 현종(고려) 대에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며 12목이 8목으로 축소되고 5도 양계가 실시된다. 교통로가 개경 중심으로 바뀌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 탓에 견주(見州, 중심지는 현 양주시 양주1동, 양주2동)는 견주현으로 격하되었으며 충청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된다. 양광도의 '양'이 양주목에서 나왔으며 '광'은 광주목에서 나왔다. 이때 행주현과 고봉현 또한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행주현과 고봉현은 양주목의 속현이 된다.
1067년 문종(고려) 대에 양주에서 분리된 남경(南京,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일대.)이 설치되며 행주현과 고봉현은 양주목의 속현에서 남경의 속현으로 이관된다.
1298년 충렬왕 대에 남경이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4. 조선시대[편집]
1394년 태조 대에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이 때부터 속현은 주군현의 일부로 여겨지기 시작하면서 월경지, 땅거스러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행주현, 황조향(荒調鄕, 현 일산서구 주엽동 일대.), 부원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마포구 일대. 부원현으로 분리되기 전에는 과천시의 모태인 과주)에 속했다.)을 고봉현에 예속시키고 고봉현을 주현으로 승격시켜 지방관인 감무를 두었다. 이후 부원현의 일부는 현 서울특별시의 전신인 한성부에 편입되어 떨어져 나간다. 부원현 지역이 성저십리 중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 등이 된다.
1395년 한양부에서 한성부를 분리함과 동시에 읍치(邑治)를 현재의 양주 시내로 옮겼다.
1397년 양주군이 양주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해당 지역의 주민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다.
태종(조선) 대인 1413년, 최하급 지방관인 감무를 현감으로 바꿨다. 동년에 고봉현과 그 속현들을 고봉과 덕양의 이름을 섞은 고양현(高陽縣)으로 통폐합하고 현감을 두었다.
세조(조선) 대인 1466년, 양주부가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에 진관사(津寬寺)의 옛 이름으로부터 유래한 신혈면(神穴面)이 설치되었다.
1471년 성종(조선) 대에 고양현 내에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무덤인 경릉과 예종(조선)과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이 있다는 이유로 고양군(高陽郡)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양주목과 한성부에 속했던 현 덕양구 삼송동과 효자동 일부를 제외하고는 현 고양시의 범위와 대략 일치한다.
1504년 연산군 대에 고양군의 지언, 이오을, 미장수 등이 국왕을 모독했다는 죄로 처벌당하면서 죄인이 살던 곳이라 하여 고양군을 고양현으로 강등하고 유행처(놀이터)로 만들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몰락하고 중종(조선)이 즉위하자 다시 고양군으로 복구되었다.
원래 고양군의 치소는 덕양구 원당동(행정동으로는 원신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537년 희릉을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고양군 치소도 덕양구 대자동(행정동으로는 고양동과 관산동에 걸쳐 있음.)의 고읍마을(고골)로 이전하였다. 고양군에서 원당동이 중심지였던 것은 고양군 땅이 좀 넓어서 ◁ 모양인 고양의 정 중앙 부분이 원당동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1593년 1월 27일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이 일본군한테 왕창 깨진 벽제관 전투가 있었다. 계속 밀려나던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박살내면서 자신감을 찾고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이 지키고 있던 행주산성으로 쳐들어가 8차에 걸친 회전을 벌였으나 산성을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 이후 1625년 치소를 명의 요구에 의해 현 벽제동(행정동으로는 고양동)에 있던 벽제관으로 옮기면서 1914년까지 현 고양동 일대가 고양군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명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던 루트가 통일로를 따라서 있었는데 이 가운데에 사신들이 머물던 벽제관이 있다. 아마 사신들의 편의를 위해 옮겨진 듯 하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동·증산동 일대, 마포구 상암동 일대, 서대문구 가좌 일대인 고양군 하도면(下道面) 증산리와 수상리 등이 한성부로 편입되었다.
1895년 고종(대한제국) 대 갑오개혁 때 칙령 제98호로 부·목·군·현을 각각 23개·337개의 부·군으로 개편하는 행정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고양군은 한성부 산하가 되었다. 동시에 현 법정동 지축동, 행정동 삼송동 및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일대를 관할하고 있던 양주목도 양주군으로 개편되며 한성부 산하가 되었다. 동시에 신평동을 관할하고 있던 금포군[독음]은 인천부 산하가 되었다.
1896년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 산하 양주군, 고양군, 금포군[독음]이 되었다.
1906년 칙령 제49호로 양주군 신혈면(현 덕양구 삼송동의 법정동 지축동,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일대.)이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이 때, 한강의 하중도였던 금포군[독음] 고란태면의 월경지가 고양군에 편입되기도 했는데 현 덕양구 능곡동의 법정동 신평동이다. 참고로 신평동은 덕양구민이나 고양시민에게도 익숙한 지역은 아닌데, 원래 외지에 속했던 데다 별다른 유명시설도 없고 대중교통도 나쁘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양시민 및 타지역 주민들이 알만한 시설로는 자유로에서 파주시 방향으로 갈 때 보이는 '신평빗물배수펌프장'이 있다. 후에 제2자유로에 신평IC가 생기면서 그나마 인지도가 좀 생겼다.
1910년 8월 23일, 동·리 통폐합이 있었다. 아카라이브의 ‘대한제국 마지막날 관보 - 고양군 동리 합병’ 이때 지축동 등의 지명이 생겨났다.
1395년 한양부에서 한성부를 분리함과 동시에 읍치(邑治)를 현재의 양주 시내로 옮겼다.
1397년 양주군이 양주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해당 지역의 주민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다.
태종(조선) 대인 1413년, 최하급 지방관인 감무를 현감으로 바꿨다. 동년에 고봉현과 그 속현들을 고봉과 덕양의 이름을 섞은 고양현(高陽縣)으로 통폐합하고 현감을 두었다.
세조(조선) 대인 1466년, 양주부가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에 진관사(津寬寺)의 옛 이름으로부터 유래한 신혈면(神穴面)이 설치되었다.
1471년 성종(조선) 대에 고양현 내에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무덤인 경릉과 예종(조선)과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이 있다는 이유로 고양군(高陽郡)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양주목과 한성부에 속했던 현 덕양구 삼송동과 효자동 일부를 제외하고는 현 고양시의 범위와 대략 일치한다.
1504년 연산군 대에 고양군의 지언, 이오을, 미장수 등이 국왕을 모독했다는 죄로 처벌당하면서 죄인이 살던 곳이라 하여 고양군을 고양현으로 강등하고 유행처(놀이터)로 만들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몰락하고 중종(조선)이 즉위하자 다시 고양군으로 복구되었다.
원래 고양군의 치소는 덕양구 원당동(행정동으로는 원신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537년 희릉을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고양군 치소도 덕양구 대자동(행정동으로는 고양동과 관산동에 걸쳐 있음.)의 고읍마을(고골)로 이전하였다. 고양군에서 원당동이 중심지였던 것은 고양군 땅이 좀 넓어서 ◁ 모양인 고양의 정 중앙 부분이 원당동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1593년 1월 27일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이 일본군한테 왕창 깨진 벽제관 전투가 있었다. 계속 밀려나던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박살내면서 자신감을 찾고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이 지키고 있던 행주산성으로 쳐들어가 8차에 걸친 회전을 벌였으나 산성을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 이후 1625년 치소를 명의 요구에 의해 현 벽제동(행정동으로는 고양동)에 있던 벽제관으로 옮기면서 1914년까지 현 고양동 일대가 고양군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명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던 루트가 통일로를 따라서 있었는데 이 가운데에 사신들이 머물던 벽제관이 있다. 아마 사신들의 편의를 위해 옮겨진 듯 하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동·증산동 일대, 마포구 상암동 일대, 서대문구 가좌 일대인 고양군 하도면(下道面) 증산리와 수상리 등이 한성부로 편입되었다.
1895년 고종(대한제국) 대 갑오개혁 때 칙령 제98호로 부·목·군·현을 각각 23개·337개의 부·군으로 개편하는 행정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고양군은 한성부 산하가 되었다. 동시에 현 법정동 지축동, 행정동 삼송동 및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일대를 관할하고 있던 양주목도 양주군으로 개편되며 한성부 산하가 되었다. 동시에 신평동을 관할하고 있던 금포군[독음]은 인천부 산하가 되었다.
1896년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 산하 양주군, 고양군, 금포군[독음]이 되었다.
1906년 칙령 제49호로 양주군 신혈면(현 덕양구 삼송동의 법정동 지축동,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일대.)이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이 때, 한강의 하중도였던 금포군[독음] 고란태면의 월경지가 고양군에 편입되기도 했는데 현 덕양구 능곡동의 법정동 신평동이다. 참고로 신평동은 덕양구민이나 고양시민에게도 익숙한 지역은 아닌데, 원래 외지에 속했던 데다 별다른 유명시설도 없고 대중교통도 나쁘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양시민 및 타지역 주민들이 알만한 시설로는 자유로에서 파주시 방향으로 갈 때 보이는 '신평빗물배수펌프장'이 있다. 후에 제2자유로에 신평IC가 생기면서 그나마 인지도가 좀 생겼다.
1910년 8월 23일, 동·리 통폐합이 있었다. 아카라이브의 ‘대한제국 마지막날 관보 - 고양군 동리 합병’ 이때 지축동 등의 지명이 생겨났다.
5. 일제강점기[편집]
일본 제국의 부군면 통폐합 당시 고양시는 '한뫼'에 대해 일본인 조사관들의 착오로 인해 일산으로 번역된 것만 제외하면 각 동네의 지명에 큰 변화를 겪지는 않았다. 1910년 점거 직전에 일본 제국의 의중대로 지명이 상당히 한자화되었기 때문. 부군면 통폐합 때 자잘한 읍면동까지 한화된 한국의 다른 지명과 달리, 고양시는 시흥군, 연천군 등과 같이 지명의 한화가 상당히 빨리 진척되어 있었다.
(위 지도는 현재 법정동 경계를 기준으로 그려서 약간 오차가 있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부군면 통폐합 직전의 대략적인 고양군의 행정구역. 당시 고양군은 구이동면(九耳洞面)·구지도면(求知道面)·사리대면(沙里大面)·사포면(巳浦面)·송산면(松山面)·신혈면(神穴面)·원당면(元堂面)·중면(中面)·하도면(下道面)의 9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고양군 관할구역은 현재 고양시 관할구역과 거의 일치하는 편이었다. 서울시에 뜯긴 은평뉴타운과 난지도, 디지털미디어시티를 빼면.
부군면 통폐합 직후의 고양군의 영역. 오늘날 서울/강북 지역(현 영등포구 여의도동, 송파구 잠실 포함)은 도심부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고양군의 영역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신혈면과 하도면이 신도면(神道面)으로, 사리대면과 구이동면, 신혈면의 벽제관 지역이 벽제면으로, 송산면과 사포면이 송포면으로 통합되었고, 구지도면은 지도면이 되었으며, 경성부로부터, 옛 한성부 성저십리 거의 전역인 8개 면, 양주군으로부터 고양주면(古楊州面, 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및 송파구 잠실 일대.)이 편입되었다. 그리고 경성부 은평면 훈창계 소속이었던 하창마을, 서문안, 훈국, 비석거리, 사기막골, 신둔, 제청안 등(현 북한동 효자동[8])이 고양군 신도면에 편입되었다(1911년경 경성부 지도).[9] 그리고 이에 따라 현 고양동의 법정동 벽제동에 있었던 고양군청을 경성부 내로 이전하였다. 1896년 경기감영이 현 수원시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남긴 돈의문 바깥의 현 종로구 평동 164번지(당시 주소는 죽첨정1정목 90번지)의 옛 경기감영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28년 고양군청이 현 을지로6가 18-22번지(당시 주소는 황금정6정목 18번지)로 신축 이전된다. 원래 고양군청 건물에는 조선적십자병원이 들어섰고 이는 이후에 현 서울적십자병원이 되었다. 1928년부터 사용하던 구 고양군청 부지에는 현재 동대문밀리오레관리단이 들어서 있다. 서대문과 을지로에 있었던 옛 고양군청에 대해 다룬 글. 당시 사진, 지도 등이 첨부되어 있다.
이 시절에는 인구도 전국 최상위였다. 1930년 인구는 19만 명(현 고양시 지역 6개 면의 인구는 3만 7천 명)으로 경성부와 제주도에 이어서 전국 3위, 1935년 인구는 28만 명(현 고양시 지역 6개 면의 인구는 4만 3천 명)으로 경성부에 이어서 전국 2위였다. 당시 고양군이었던 지역의 현재 인구는 약 450만 명이다.
1936년 경성부 확장 정책에 따라 용강면[10], 연희면 일부[11], 한지면[12], 은평면 일부[13], 숭인면 일부[14]가 경성부에 재편입되었고 연희면의 잔여지역인 북가좌리, 남가좌리, 성산리, 중리, 수색리, 상암리, 증산리는 은평면에 편입되었다. 이때 고양군 동남부에서 유일하게 뚝도면(纛嶋面, 현 광진구, 성동구 성수동·송정동, 동대문구 장안동, 중랑구 면목동, 송파구 잠실 일대.)만이 고양군으로 남는 바람에 1949년까지 경성부/서울특별시를 사이에 두고 뚝 떨어진 월경지가 되었다.
1940년 고양군의 인구는 경성부 확장 정책의 여파로 1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위 지도는 현재 법정동 경계를 기준으로 그려서 약간 오차가 있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부군면 통폐합 직전의 대략적인 고양군의 행정구역. 당시 고양군은 구이동면(九耳洞面)·구지도면(求知道面)·사리대면(沙里大面)·사포면(巳浦面)·송산면(松山面)·신혈면(神穴面)·원당면(元堂面)·중면(中面)·하도면(下道面)의 9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고양군 관할구역은 현재 고양시 관할구역과 거의 일치하는 편이었다. 서울시에 뜯긴 은평뉴타운과 난지도, 디지털미디어시티를 빼면.
부군면 통폐합 직후의 고양군의 영역. 오늘날 서울/강북 지역(현 영등포구 여의도동, 송파구 잠실 포함)은 도심부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고양군의 영역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신혈면과 하도면이 신도면(神道面)으로, 사리대면과 구이동면, 신혈면의 벽제관 지역이 벽제면으로, 송산면과 사포면이 송포면으로 통합되었고, 구지도면은 지도면이 되었으며, 경성부로부터, 옛 한성부 성저십리 거의 전역인 8개 면, 양주군으로부터 고양주면(古楊州面, 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및 송파구 잠실 일대.)이 편입되었다. 그리고 경성부 은평면 훈창계 소속이었던 하창마을, 서문안, 훈국, 비석거리, 사기막골, 신둔, 제청안 등(현 북한동 효자동[8])이 고양군 신도면에 편입되었다(1911년경 경성부 지도).[9] 그리고 이에 따라 현 고양동의 법정동 벽제동에 있었던 고양군청을 경성부 내로 이전하였다. 1896년 경기감영이 현 수원시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남긴 돈의문 바깥의 현 종로구 평동 164번지(당시 주소는 죽첨정1정목 90번지)의 옛 경기감영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28년 고양군청이 현 을지로6가 18-22번지(당시 주소는 황금정6정목 18번지)로 신축 이전된다. 원래 고양군청 건물에는 조선적십자병원이 들어섰고 이는 이후에 현 서울적십자병원이 되었다. 1928년부터 사용하던 구 고양군청 부지에는 현재 동대문밀리오레관리단이 들어서 있다. 서대문과 을지로에 있었던 옛 고양군청에 대해 다룬 글. 당시 사진, 지도 등이 첨부되어 있다.
이 시절에는 인구도 전국 최상위였다. 1930년 인구는 19만 명(현 고양시 지역 6개 면의 인구는 3만 7천 명)으로 경성부와 제주도에 이어서 전국 3위, 1935년 인구는 28만 명(현 고양시 지역 6개 면의 인구는 4만 3천 명)으로 경성부에 이어서 전국 2위였다. 당시 고양군이었던 지역의 현재 인구는 약 450만 명이다.
1936년 경성부 확장 정책에 따라 용강면[10], 연희면 일부[11], 한지면[12], 은평면 일부[13], 숭인면 일부[14]가 경성부에 재편입되었고 연희면의 잔여지역인 북가좌리, 남가좌리, 성산리, 중리, 수색리, 상암리, 증산리는 은평면에 편입되었다. 이때 고양군 동남부에서 유일하게 뚝도면(纛嶋面, 현 광진구, 성동구 성수동·송정동, 동대문구 장안동, 중랑구 면목동, 송파구 잠실 일대.)만이 고양군으로 남는 바람에 1949년까지 경성부/서울특별시를 사이에 두고 뚝 떨어진 월경지가 되었다.
1940년 고양군의 인구는 경성부 확장 정책의 여파로 1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6. 현대[편집]
6.1. 시 승격 이전[편집]
1992년 시 승격 이전까지 사용한 고양군의 상징
1949년 서울 행정구역 추가 확장으로 은평면(현재의 은평구 대부분 및 종로구 평창동 등), 숭인면(현재의 강북구 전역과 성북구 나머지 지역), 뚝도면(현재의 광진구, 성동구 성수동, 중랑구 면목동 및 송파구 잠실 등)이 각각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울특별시 성북구(동대문구에서 같은 날에 분리된 구),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재)편입되면서 고양군의 월경지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로써 고양군 중 옛 성저십리 지역은 효자동을 제외하고 다시 원래의 서울로 되돌아갔다. 다만 효자동은 지역번호로 경기도 번호인 031이 아닌, 서울 번호인 02를 쓰며, 생활권과 학군도 고양시의 다른 지역보다는 은평구와 가깝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고양군은 6월 26일 오전 1시에 조선인민군한테 점령당했다. 고양군에서는 이후 북한에 의해 대대적인 인민재판이 벌어졌다가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 유엔군에 의해 수복된다. 이후 1950년 12월 26일 중공군에 의해 다시 고양군이 점령됐다가 1951년 5월에 유엔군에 의해서 수복됐다. 이후로는 고양군은 쭉 대한민국의 영토로 귀속됐으며 전선이 고양군까지 남하하진 않았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점령한 시기에는 원당지역에 고양군 임시 인민위원회 청사를 만들어서 통치했다. 당연히 해당 건물은 대한민국 수복 후 폭파 철거되었다.(...)
1961년 드디어 고양군청이 서울 을지로6가에서 현재의 원당으로 이전하였다. 옛 성저십리 일대가 1949년에 대부분 서울로 재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여 년이 더 지나서야 원래의 고양군 땅으로 되돌아온 것(...). 당시 현재의 고양시청과 그 인근의 땅을 소유하고 있던 박용관이라는 분이 자신의 땅을 선뜻 기증하여 군청사를 이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 또한 본 기사에 따르면, 원래는 중면(훗날의 일산읍)으로 이전하려고 했다고 한다.
1963년 9월 17일에 고양군 신도면이, 장기적으로는 서울 편입을 염두에 두겠다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에 편입되었다. 구 신도·화전지역에 속하는 삼송동, 지축동, 용두동, 화전동 등의 서울 편입 떡밥의 근원이자 지역번호가 경기도의 031이 아닌 서울의 02인 이유.
1967년 신도면 화전리, 덕은리, 향동리, 현천리를 관할로 하여 화전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3년 7월 신도면의 구파발·진관내·진관외리가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읍으로 승격되었다. 신도면은 고양군에서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기에 가장 먼저 도시화되었고, 이에 신도면이 가장 먼저 읍으로 승격된 것.
1979년 원당면이 원당읍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인 1980년 벽제면이 벽제읍으로, 중면이 일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85년 지도면이 지도읍으로, 신도읍 화전출장소가 화전읍으로 승격되어, 고양군은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6개 읍(원당읍(군청소재지), 일산읍, 벽제읍, 지도읍, 화전읍, 신도읍)과 1개 면(송포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보통 1개의 군이 군청소재지이자 중심지 역할을 하는 1개의 읍과 나머지 읍·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고양군은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근교 지역으로서 읍이 면보다 훨씬 많은 독특성을 지닌 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2. 시 승격 과정 및 "일산시" 문제[편집]
1992년 시 승격 이후 2003년 로고 변경 전까지 사용한 로고. 일산신도시 시가지를 걷다 보면 맨홀 뚜껑에 많이 남아 있는데 고양시 맨홀은 대부분 일산신도시 개발 시점에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1996년까지 썼던 옛날 서울시 로고가 박힌 맨홀 뚜껑도 상당수 있다는 것. 아마 서울시에서 쓰고 버리려던 맨홀 뚜껑을 당시 신도시 개발 중인 고양시에 양여[15]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에 들어와 일산읍에 일산신도시, 원당읍, 지도읍 일대에 원당, 화정, 행신지구 개발이 추진되면서 1992년 2월 1일 군 전 지역이 시로 승격됨으로써 고양군은 폐지되었다. 서울특별시와 바로 인접한 위성도시 치고는 시 승격이 상당히 늦은 편이다. 오늘날 비슷한 인구 규모 도시인 수원시가 1949년에, 울산시가 1962년에, 성남시, 부천시, 안양시는 1973년에 승격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많이 늦었다.
고양군 시 승격이 비교적 늦었던 이유는 신도읍, 원당읍, 벽제읍, 일산읍, 지도읍 등 각각의 읍들이 따로따로 성장하는 바람에 '각 읍들을 개별적인 시로 승격시킬 것이냐, 군 전체를 시로 승격할 것이냐'를 두고 당시 내무부(현재의 행정자치부)에서 계속 검토를 해왔기 때문이다. 신도읍은 구파발 일대를 서울에 넘겨준 이후 아예 통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시키려고 하다가 광명시의 경우[16]처럼 무산되었고, 1979년에 신도시(神道市)로 승격시키는 계획이 나왔지만 이 계획도 무산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신도읍 남쪽의 화전출장소를 화전읍으로 분리시키는 것으로 넘어갔다. 여담으로, 1973년 신도읍과 함께 승격된 곳에는 양주군 구리읍도 있었는데, 이쪽은 1986년 구리시로 승격되는 데 성공했다.
군 전체가 시로 승격된 사례는 고양시가 최초이다. 1995년의 도농통합시 출범에 비해 약 3년이나 앞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지방자치법에서는 고양군을 고양시로 승격하기 위한 적절한 법률 조항이 없었다. 1995년 도농복합시 제도가 실시될 때 승격을 했더라면 도농복합시 규정에 의해 군이 통째로 시로 승격이 가능했겠지만, 당시의 지방자치법에는 도농복합시 규정이 없었다.
고양시에 농촌 지역이 많고, 광역시의 자치구(광역시의 자치구에는 읍·면을 둘 수 없다. 읍·면을 둘수 있는 행정단위는 특별자치시, 광역시의 자치군, 도 산하의 시군구이다)가 아님에도 읍·면이 하나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7]
고양군 3분할 시승격 검토안. 각 시의 명칭은 가칭이다. 참고로 만약 저렇게 되었으면 2014년 기준으로 일산시는 약 53만, 원릉시는 약 33만, 고양시는 약 10만 정도인 도시가 된다. 1990년 기준으로 간주했을 경우엔 고양 9만 1600명, 원릉 10만 4155명, 그리고 일산 4만 9220명.
지방자치법에 적절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내무부는 처음에 고양군을 '원당읍+지도읍'(원릉시), '신도읍+벽제읍+화전읍'(고양시), '일산읍+송포면'(일산시)으로 나누어 3개 시로 분할 승격시키는 방안을 잠시 검토했으나,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나와 결국 고양군 전체를 통째로 승격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
만약 저 3개시 분할안이 그대로 실시되었다면 각 시의 명칭은 '원릉시', '고양시'[18], '일산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당시 원당, 능곡에 살던 주민들은 '원릉시' 승격을 기대했다고 한다. # 이는 '일산시' 승격을 바라던 일산 주민들도 마찬가지.
하여간 적절한 조항은 없었지만 당시의 지방자치법 "제7조 (시·읍의 설치기준등) ① 시는 그 대부분이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인구 5만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규정을 군을 통째로 시로 승격시킬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하여서 고양군 전체를 시로 승격시켰다. 시 승격 직전인 1990년 당시 고양군의 읍면별 인구를 보면 신도읍 3만 4015명, 원당읍 5만 6391명, 벽제읍 3만 2554명, 일산읍 4만 308명, 지도읍 4만 7764명, 화전읍 2만 5031명, 송포면 8912명이었다. 이미 고양군의 각 읍들이 거의 시(市)에 준하는 규모로 성장하여서 고양군의 인구는 당시에 20만 명을 돌파한 상황이었으다.
하지만 각 읍면들의 면적이 상당히 넓은 편이라 도시화된 지역을 조금만 나가면 논밭이 대부분인 농촌지역이 많았다. 도농복합시 제도가 시행된 이후였다면 용인시 처인구처럼 읍/면으로 묶을 수 있었겠지만, 이 당시에는 도농복합시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농촌 지역도 그냥 전부 행정동 분동 조치를 해버렸다. 그래서 고양시의 농촌지역에서는 가끔 "농어촌 특별혜택을 돌려달라"며 읍, 면으로 되돌려 놓으라는 주장도 한다.
실제로 동이 읍·면으로 환원되는 사례가 드물지만 있다. 1957년 경상북도 달성군, 전라남도 광산군의 일부 읍면들이 대구시와 광주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가, 1963년 일부가 도로 달성군, 광산군으로 환원되어 면으로 돌아간 사례가 있다. 또한 2014년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이 남양읍으로 전환되었다. 만약 도농복합시 제도 실시 이후 시로 승격되었다면 시가지화가 고도로 진행된 일산읍, 지도읍(능곡, 행신, 화정 일대), 원당읍의 3개 읍만 분동 조치되고, 나머지 신도읍, 화전읍, 벽제읍, 송포면(신도시에 속한 대화동 제외)은 그대로 읍면으로 유지되었다가 도시화의 진행 여부에 따라 분동되었을 터이다.
시 승격 3년 뒤인 1995년에 옛 신도읍, 화전읍 지역이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에서 해제되어 고양시 도시계획 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로 고양군 시절에는 무려 3개의 도시계획구역이 따로 설정되어 있었다. 원릉지구, 일산지구, 벽제지구.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했던 신도·화전 지역까지 포함하면 한 군에 도시계획이 4개나 되었던 것.
한편 "일산시" 승격 계획은 1995년 일산신도시 추진 시기에 다시 거론되시 시작했다. 현재 일산동구청 부지에 일산시청을 설치하고, 게다가 화정지구에도 별도로 (고양)시청 부지가 계획되면서(이곳이 바로 현재의 덕양구청이다.) 고양시와 일산시의 분리가 실제로 추진되었던 것. # 이는 최종적으로 무산 대신에 분구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일산신도시의 일산시청 부지는 일산구청(현 일산동구청)으로, 화정지구의 고양시청 부지는 덕양구청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고양시청은 원당 주교동에 그대로 남아 현재에 이른다.
고양시는 도농복합시가 법제화되기 전 시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읍면을 설치할 수 없다. 읍면을 설치하려면 국회에서 고양시를 도농복합시로 전환하는 법률을 통과시켜야 한다.
한편 화성시 남양읍(2014년 동에서 전환)과 안산시(대부도)의 도농복합시 전환에 대한 움직임이 계속되면서 비공식적으로 고양시에서는 일부 농촌 지역을 읍면으로 전환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군 전체가 시로 승격된 곳이다 보니 수원시와 오산시를 비롯한 서울 근교의 다른 위성도시들(의정부시, 성남시, 부천시, 안양시, 광명시, 과천시, 구리시, 안산시, 군포시, 의왕시, 시흥시, 하남시, 동두천시)보다 면적이 굉장히 넓다. 상기된 도시들은 기존 군에서 1~2개 읍면만 가지고 시로 승격되었기 때문. 심지어 그 중에서도 덕양구(165.44㎢)는 수원시(121.09㎢)나 성남시(141.82㎢), 안산시(149.1㎢)보다도 더 넓으며, 시흥시(166.60㎢)와 맞먹는다.
1996년 3월 1일에는 시 승격 4년만에 인구 50만을 돌파하여 일반구인 덕양구와 일산구를 설치하였다. 2005년 5월 16일 일산구가 인구 50만을 돌파하여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로 분구하였다.
6.3. 꿈의 100만 도시[편집]
2014년 8월 1일, 드디어 인구 100만을 돌파하여 거대도시 반열에 등극했다. 서울특별시와 부산광역시 등 시급의 광역자치단체를 포함하면 10번째, 기초자치단체만 놓고 보면 3번째이다.
다만 인구가 100만이 된 것에 비해서 거대도시에 걸맞는 도시 인프라(산업, 경제 등)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모습이다. 고양시 주변 지역엔 최소한 한 개 이상씩 있는 산업단지나 4년제 종합대학도 한국항공대학교나 최근에 생긴 중부대 캠퍼스, 동국대 캠퍼스 빼고는 없다. 전문대 급인 농협대학교나 대학원과정만 존재하는 국제경영법률대학원대학교와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는 빼고 이야기 하자면.. 물론 그들도 대학은 대학이니 리스트에 넣을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도시 치고는 광역시 승격 주장이 거의 없는 편이며, 일산신도시 분할론 또한 2010년대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
2022년 1월 13일 개정 지방자치법에 따른 특례시가 되었다.
다만 인구가 100만이 된 것에 비해서 거대도시에 걸맞는 도시 인프라(산업, 경제 등)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모습이다. 고양시 주변 지역엔 최소한 한 개 이상씩 있는 산업단지나 4년제 종합대학도 한국항공대학교나 최근에 생긴 중부대 캠퍼스, 동국대 캠퍼스 빼고는 없다. 전문대 급인 농협대학교나 대학원과정만 존재하는 국제경영법률대학원대학교와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는 빼고 이야기 하자면.. 물론 그들도 대학은 대학이니 리스트에 넣을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도시 치고는 광역시 승격 주장이 거의 없는 편이며, 일산신도시 분할론 또한 2010년대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
2022년 1월 13일 개정 지방자치법에 따른 특례시가 되었다.
7. 시청사 이전[편집]
현재 고양시청 청사는 매우 낡고 좁으며 100만 특례시의 행정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 고양시의 중심지는, 시청이 잠시 고양동 일대로 옮겨 갔을 때를 제외하면, 전통적으로 원당에 쭈욱 위치해 왔기 때문에 원당 주민들의 반발 가능성이 높다. 지리적인 위치만 봐도 원당이 고양시 영역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에 있기도 하고.
고양시에서 시 청사 이전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로, 시정의 안정화와 고양-일산 시민 대통합을 바라는 시청으로써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성 전 시장 재임기에는, 시 청사 이전에 드는 예상비용의 반의 반도 안되는 비용으로 30년 된 시 청사를 소규모 리모델링을 추진한 후 계속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부담으로 덕양구 주교동 일대에 신청사 건립을 추진했었으나 진행 상황은 미비하다.
일산신도시가 정치 기반인 이동환 시장이 취임한 이후, 주교동 신청사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대신 2023년 1월 일산동구 백석동 요진와이시티 부근의 업무빌딩으로 청사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백석 이전안이 오히려 고양-일산 주민 간의 갈등을 심화시킨 면도 있다. 고양시청을 받게 된 일산신도시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전안에 찬성하고 있고, 시청을 뺏기게 된 원당지역 입장에서는 반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래 고양시의 중심지는, 시청이 잠시 고양동 일대로 옮겨 갔을 때를 제외하면, 전통적으로 원당에 쭈욱 위치해 왔기 때문에 원당 주민들의 반발 가능성이 높다. 지리적인 위치만 봐도 원당이 고양시 영역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에 있기도 하고.
고양시에서 시 청사 이전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로, 시정의 안정화와 고양-일산 시민 대통합을 바라는 시청으로써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성 전 시장 재임기에는, 시 청사 이전에 드는 예상비용의 반의 반도 안되는 비용으로 30년 된 시 청사를 소규모 리모델링을 추진한 후 계속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부담으로 덕양구 주교동 일대에 신청사 건립을 추진했었으나 진행 상황은 미비하다.
일산신도시가 정치 기반인 이동환 시장이 취임한 이후, 주교동 신청사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대신 2023년 1월 일산동구 백석동 요진와이시티 부근의 업무빌딩으로 청사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백석 이전안이 오히려 고양-일산 주민 간의 갈등을 심화시킨 면도 있다. 고양시청을 받게 된 일산신도시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전안에 찬성하고 있고, 시청을 뺏기게 된 원당지역 입장에서는 반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8. 관련 문서[편집]
[1] 설령 이때 멸망하지 않았더라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그 사이 세력을 키운 백제에게 나중에 흡수되었다고 추정한다.[2] 혹은 왕봉현이라 써놓고 일명 개백현이라고도 한다고 써놓기도 했다.[3] 고대 한국어로 왕을 뜻하는 '가(加, 皆)'를 '맞'이한 곳.[4] 혹은 제3의 가능성으로 백제에서든 고구려에서든 혹은 그 이전 시대부터 일관되이 지명이 개백이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분쟁을 직접 겪었던 당대인들이 지명과 당대의 어떤 실제 사건을 각색해 왕봉 설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공주시의 경우도 애시당초 왜 곰과 관련된 지명이 붙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아무튼 곰과 관련된 설화가 내려온다.[독음] 5.1 5.2 5.3 조선지형도, Daum 카페 배우리 땅이름 연구에서 재인용[8] 다만 고양시청 측에서는 효자동은 원래 한성부가 아니라 1906년 양주군에서 편입된 것이라 주장하며 강북구의 효자동 서울 편입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9] 현 덕양구 효자동의 법정동 북한동이 한성부 성저십리 중 상평방(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일대)에 속해 있었다.[10] 현 마포구 공덕동과 영등포구 여의동 일대.[11] 현 서대문구 대부분과 마포구 홍대거리 일대.[12] 현 성동구 왕십리와 용산구 한남동 일대.[13] 현 종로구 부암동과 서대문구 홍제 일대.[14] 현 동대문구 대부분과 성북구 성북동, 삼선동, 안암동, 돈암 일대.[15] 재활용 등의 이유로 정부 및 공공기관 사이에 물품이나 부동산을 무상으로 넘겨주는 것을 법령 상으로는 양여라고 한다.[16] 시 승격이전에 구로공단과 개봉지구 계획과 연계되어 철산동, 광명동의 서울 편입이 검토된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행정구역 개편/수도권/서울개편론/광명시 서울 편입 참조.[17] 비슷한 예로 시흥군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의 시흥군에서 안양읍은 안양시로, 소하읍은 광명시로, 과천면은 과천시로, 수암면+군자면 각 일부는 안산시로, 군포읍은 군포시로, 의왕읍은 의왕시로 모두 제각각 시로 승격되고, 다 분리시키고 남은 소래읍+수암면+군자면만이 하나로 묶여 현재의 시흥시가 되었다.[18] 벽제가 고양동, 고양향교 등 역사적으로 고양군의 중심지였으므로 '고양'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가져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