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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나에서 넘어옴
10년 화산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인 화산들
에트나 산
Monte Etna | Mungibeddu
파일:512px-Etna_eruption_seen_from_the_International_Space_Station.jpg
우주에서 바라본 에트나산의 분화
지도
위치
이탈리아 시칠리아 주 카타니아 현
높이
3,329 m
분류
형태
지질학적 형성
신생대 플라이스토세 중기
약 50만년 전
외국어 표기
한국어
에트나 산
이탈리아어
Monte Etna
시칠리아방언
Mungibeddu
영어
Mount Etna
그리스어
Αίτνα
라틴어
Aetna
1. 개요2. 어원
2.1. 고대 그리스어 기원설2.2. 페니키아어 기원설2.3. 아랍어와 중세 시대 명칭 변화2.4. 이탈리아어 및 시칠리아 방언에서의 명칭2.5. 로마 신화와 불카누스와의 관련성
3. 신화4. 지질
4.1. 산체의 초기 형성과 발전
4.1.1. 초기 해저 화산 활동과 화산체 형성4.1.2. 화산 중심의 이동과 성층 화산 형성4.1.3. 17만 년 전 이후, 현재의 화산 중심부 형성
4.2. 폭발적 분화와 칼데라 형성4.3. 최근의 화산 활동과 지속적인 변화4.4. 역사적 분화4.5. 현대의 분화
5. 여담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에트나 산(Mount Etna)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동부 해안에 위치한 활화산으로, 유럽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화산 중 하나이다.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인 카타니아시에서 북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있으며,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화산 중 하나로 여겨진다. 또한 인근에 카타니아시가 있고 유럽의 항공로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10년 화산(Decade Volcanoes)"으로 지정되었다.

2. 어원[편집]

에트나 산의 명칭은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변화해 왔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고대 언어와 역사적 기록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들은 이 명칭이 여러 시대에 걸쳐 변형되었으며,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받았음을 시사한다.

2.1. 고대 그리스어 기원설[편집]

에트나 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어원 중 하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이토(aitho)"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단어는 "나는 타오른다" 또는 "불타오르는"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는 지속적으로 분출하는 화산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구자들은 이 명칭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시칠리아에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도 에트나 산은 불타는 산으로 묘사된 바 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에트나 산은 "아이트네(Aitne)"라고 불렸으며, 이는 현재의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 지역과 원래 "이네사(Inessa)"로 알려진 도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명칭은 라틴어로 변형되어 "에트나(Aetna)"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 영어 및 이탈리아어에서 사용되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시칠리아는 그리스인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이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어는 에트나 산의 명칭에 제일 많은 기여를 하였다.

2.2. 페니키아어 기원설[편집]

일부 연구에서는 에트나 산의 명칭이 페니키아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페니키아어 "아투나(attuna)"는 "로" 또는 "굴뚝"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는 화산에서 연기와 불꽃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이론은 페니키아인들이 시칠리아와 지중해 무역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해당 명칭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해상 무역을 통해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시칠리아 동부 해안에도 거점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접촉으로 인해 에트나 산의 명칭이 페니키아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가설을 확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한 상태이다.

2.3. 아랍어와 중세 시대 명칭 변화[편집]

중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랍인들이 시칠리아를 지배하게 되자, 에트나 산은 아랍어로 "자발 알 나르(Jabal al-Nar)"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불의 산"이라는 의미로, 화산 활동이 활발한 에트나 산의 특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명칭이었다.

이 시기에 아랍인들은 시칠리아에서 농업과 과학을 발전시키면서, 화산 활동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이탈리아 남부 지역과 아랍권 사이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에트나 산의 명칭도 변화를 겪었다.

2.4. 이탈리아어 및 시칠리아 방언에서의 명칭[편집]

시칠리아 지방에서는 에트나 산을 "문치벨두(Muncibbeddu)"라고 부르며, 이탈리아어에서는 "몽지벨로(Mongibello)"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몽지벨로"라는 이름은 로망스어 "몬테(Monte)"(산)와 아랍어 "자발(Jabal)"(산)이 결합된 형태로, 중복된 의미를 가지면서도 에트나 산을 강조하는 독특한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중세 유럽에서 아랍어와 라틴어가 혼용되었던 언어적 환경을 반영하며, 이는 시칠리아가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아온 지역임을 보여준다.

2.5. 로마 신화와 불카누스와의 관련성[편집]

일부 학자들은 "몽지벨로"라는 명칭이 라틴어 "물키베르(Mulciber)"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물키베르"는 불과 관련된 로마 신 불카누스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을 달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에트나 산이 불의 신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또 다른 언어적 기원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로마 신화에서는 불카누스가 에트나 산 아래에서 대장장이 역할을 하며 신들의 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에트나 산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화적 상징성과 결합되어 해석되었음을 의미한다.

3. 신화[편집]

에트나 산은 태곳적부터 불과 연기의 장막을 두른 채, 신화와 전설 속에서 신들과 괴물들의 투쟁이 펼쳐지는 무대가 되어왔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서부터 중세 유럽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이 거대한 화산은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신비로운 초자연적 힘의 발현으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트나의 분화을 신들의 대장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로 보았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로마 신화에서는 불카누스—가 이곳을 자신의 대장간으로 삼고, 신들을 위한 무기와 갑옷을 만들며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산이 흔들리고 용암이 분출한다고 믿었다. 그 연기와 불길은 단순한 화산 활동이 아니라, 신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소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에트나 산의 신화적 배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태초의 혼돈에서 태어난 괴물, 티폰의 전설도 이 화산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티폰은 신들의 왕 제우스에 대항한 거대한 거인이었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신화에 따르면, 분노한 제우스가 그를 에트나 산 아래에 가두었고, 지금도 티폰이 몸부림칠 때마다 화산이 불을 뿜으며 대지를 흔든다고 전해진다. 거인의 숨소리가 산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고, 그의 분노가 대지를 가르는 용암으로 분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해석은 단순한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고, 중세 유럽의 전설 속에서도 에트나 산을 신비로운 존재와 연결된 장소로 만들었다. 노르만족과 함께 시칠리아로 건너온 브르타뉴 출신의 탐험가들은, 이 화산이 아서 왕과 마법사 모건 르 페이가 다스리는 마법의 세계로 가는 관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에트나 산을 ‘몽지벨(Mongibel)’이라 부르며, 그 아래에는 지하 왕국이 존재하며, 때때로 길을 잃은 기사들이 그곳에서 모건 르 페이와 마주쳤다고 이야기했다.

12세기 후반, 게르바세 오브 틸버리(Gervase of Tilbury)와 카이사리우스 오브 하이스터바흐(Caesarius of Heisterbach)는 문헌 속에서 이러한 전설을 기록하였다. 한 이야기에서는 한 기사가 길을 잃고 에트나 산 아래의 신비로운 세계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아서 왕이 그를 맞이하고, 잃어버린 말을 찾아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이후 프랑스와 브르타뉴의 문학 속에서도 반복되었으며, 에트나 산은 단순한 화산을 넘어 초자연적 힘이 깃든 마법의 세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에트나 산은 단순한 자연의 분화구가 아니라, 신과 괴물, 전설 속 영웅들이 거쳐 간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불길과 연기가 자욱한 그 산속에는 여전히 헤파이스토스의 망치 소리가 울리고, 티폰의 신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리고 혹시라도 길을 잃은 기사가 화산의 어두운 동굴을 헤맨다면, 그 앞에 아서 왕과 모건 르 페이가 서서 지하 세계로 이끄는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4. 지질[편집]

파일:Etna_storia_geologica.png
에트나의 지질 단면
에트나 산은 약 50만 년 전부터 화산 활동을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분화를 이어오고 있는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중 하나이다. 이 화산의 형성과 진화는 복잡한 지질학적 과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여러 연구에 따르면 해양 지각과 대륙 지각의 상호작용이 주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4.1. 산체의 초기 형성과 발전[편집]

4.1.1. 초기 해저 화산 활동과 화산체 형성[편집]

에트나 산의 화산 활동은 지질학적으로 매우 오래된 시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현재의 에트나 산이 존재하는 시칠리아 동부 지역은 약 50만 년 전부터 해저에서 활발한 화산 활동이 시작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기는 지중해 지각 구조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 초기에는 해저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면서 점차 화산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화산 활동은 대부분 해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용암이 직접적으로 해수와 접촉하면서 냉각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로 인해 고철편모양 혹은 유문암질질의 괴상 구조가 발달하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점성이 낮은 현무암질 용암이 주류를 이루었다. 현무암질 용암은 빠르게 흘러 넓은 면적을 덮으며 해저 퇴적층 위에 차곡차곡 쌓였고, 이는 점토질 기반을 이루는 기존의 퇴적층과 뚜렷이 구분되는 암석층을 형성하였다. 퇴적층 위로 형성된 이 화산암층은 해저 지형을 점차적으로 융기시켰으며, 반복되는 마그마의 상승과 화산 분화는 해수면 근처까지 도달하는 작은 해저 화산언덕을 형성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화가 누적되고, 용암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결국 일부 용암류는 해수면을 돌파하였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인 해상 화산섬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초창기의 에트나 산은 하나의 독립된 화산섬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초기 화산체는 현무암질 용암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해수와의 접촉으로 인한 수성폭발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성폭발은 물과 마그마가 직접 반응하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분화 강도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지만 짧은 시간 동안 화산쇄설물을 넓게 흩뿌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시기의 화산 활동은 비교적 조용한 용암 분출과 간헐적인 폭발적 분화를 병행하였다. 조용한 용암 분출은 넓고 평탄한 화산 경사를 만들어냈고, 때때로 나타나는 폭발적 분화는 화산쇄설물과 화산재를 주변에 퇴적시켜 초기 화산체의 형태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에 형성된 암석 샘플들을 분석하여, 당시의 화산 활동이 매우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밝혀냈다. 특히 마그마의 조성 변화, 분화 빈도, 해수면 변화와의 관계 등을 바탕으로 초기 에트나 산이 상당히 복잡한 형성과정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해저 화산 활동은 단순히 화산체의 형성에 그치지 않고, 이후 수십만 년에 걸친 에트나 산의 진화과정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해저에서 출발한 이 화산은 이후 해양판과 대륙판의 경계에서 지속적인 지각 운동과 함께 성장하여,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고 거대한 화산 중 하나로 발달하게 된다.

4.1.2. 화산 중심의 이동과 성층 화산 형성[편집]

약 30만 년 전부터 에트나 산의 화산 중심은 점차 현재의 정상부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동은 단순한 위치 변화가 아니라 지각 구조 내에서의 점진적인 변형과 화산 활동의 확장을 의미한다. 지하 깊은 곳에서 상승하는 마그마는 지각 내의 약한 틈을 따라 이동하면서 새로운 통로를 만들었고, 이로 인해 여러 개의 독립된 분화구가 생성되었다. 이러한 분화구들은 시간이 흐르며 반복적인 화산 활동을 통해 서로 연결되거나 겹쳐지면서, 보다 복잡하고 거대한 화산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화산 활동은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고 다양하게 나타났다. 조용한 용암 흐름뿐만 아니라, 강한 폭발을 동반하는 분화가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며, 이로 인해 화산체의 외형과 내부 구조 모두 빠르게 변화하였다. 마그마의 조성과 상승 경로에 따라 분화의 양상이 달라졌고, 분화구 주변에는 두꺼운 용암류와 함께 화산재, 암편, 화산탄 등 다양한 형태의 화산쇄설물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분화 양상의 반복은 에트나 산을 성층 화산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성층 화산은 유동성이 다른 용암류와 다양한 입자의 화산쇄설물이 번갈아 퇴적되며 층을 이루는 형태의 화산으로, 일반적으로 경사가 크고 구조가 견고한 것이 특징이다. 에트나 산은 바로 이러한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층 화산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 내부에는 서로 다른 시기의 화산물들이 쌓이며 복잡한 지층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화산 활동은 단순한 분화의 반복을 넘어, 주변 지형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용암은 기존의 분화구를 매립하거나 새로운 분화구를 덮어가며 지형을 바꾸었고, 일련의 활동을 통해 화산 중심이 북동 방향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지질학자들은 이러한 이동 경로와 축적된 분화물의 층위를 통해 당시의 지각 운동과 마그마 활동 양상을 역추적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에트나 산의 성층 화산으로의 전환이 단일 사건이 아닌 수많은 국지적 변동의 누적 결과임을 밝혀냈다.

결국 에트나 산은 수십만 년에 걸친 반복적인 화산 활동과 화산 중심의 점진적 이동을 통해, 오늘날처럼 거대하고 복잡한 성층 화산으로 성장하였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산체가 아닌, 시간과 지질 운동의 축적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지각 구조물로 이해할 수 있다.

4.1.3. 17만 년 전 이후, 현재의 화산 중심부 형성[편집]

약 17만 년 전부터 에트나 산의 현재 화산 중심부에서 본격적인 분화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는 에트나 산의 지질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이전까지는 여러 지역에서 분화가 흩어져 있었던 반면, 이 시기부터는 하나의 주요 중심부를 통해 집중적인 마그마 활동이 나타났고, 그에 따라 화산체의 형태와 내부 구조도 빠르게 변화하였다.

당시 분화 양상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 용암류는 점차 점성이 높은 성질을 띠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흐름의 속도는 늦어졌으나 지표에 쌓이는 두께는 증가하였다. 점성이 높은 용암은 쉽게 멀리 퍼지지 않고 화산체 인근에 두껍게 축적되면서 급경사의 지형을 형성하였고, 이로 인해 에트나 산의 전반적인 윤곽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동시에 폭발적인 분화 빈도도 증가하면서, 분화구 주변에는 화산재와 암편, 화산탄 등이 풍부하게 퇴적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는 마그마 내부에서 이루어진 화학적 상호작용의 증가였다. 서로 다른 조성의 마그마가 한 구조 내에서 섞이거나 충돌하는 과정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분화의 형태는 예측하기 어려운 양상을 보였다. 이로 인해 일부 분화는 매우 폭발적인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화산체의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복잡한 구조가 발달하게 되었다.

지질학자들은 이 시기에 형성된 화산암층을 채취하고 분석하여, 당시의 마그마 조성이 현재의 에트나 산에서 관찰되는 화산 활동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화산 활동이 수십만 년에 걸친 화산 진화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간주된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에트나 산이 성층 화산으로 완전히 자리 잡는 과정을 의미한다. 층을 이루는 용암과 화산쇄설물이 규칙적으로 쌓이면서 구조적으로 안정되고, 동시에 내부에서는 복잡한 마그마 경로와 압력 축적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이후 수만 년에 걸쳐 다양한 지질학적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정상부의 붕괴는 과도한 분화나 내부 붕괴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이는 칼데라 형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칼데라는 분화구가 함몰되면서 형성되는 넓은 분지 형태의 구조로, 에트나 산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주요 중심부 외에도 화산체의 측면에서 마그마가 새어나오는 측면 분화구 활동이 활발하게 나타났으며, 이는 화산체 외곽에 새로운 분출구와 용암류를 만들어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약 17만 년 전 이후의 시기는 현재의 에트나 산을 구성하는 주요 특징들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시기로, 이 시기에 형성된 구조와 활동 양상이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에트나 산은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지각 운동과 마그마 활동의 결과로 형성된 복합적이고 동적인 지질 구조물이다.

4.2. 폭발적 분화와 칼데라 형성[편집]

에트나 산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화산 분출이 발생한 시기는 약 3만 5천 년 전부터 1만 5천 년 전까지이며, 이 시기 동안 대규모 폭발적 분화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연구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방출된 화산재와 화쇄류는 로마 남부를 포함하여 800km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폭발적 분화는 화산체의 불안정을 초래하였으며, 반복적인 붕괴와 함께 여러 차례의 칼데라가 형성되었다.

화산 활동이 계속되면서 정상부에서 점진적인 붕괴가 발생하였고, 이는 거대한 함몰 지형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연구자들은 에트나 산에서 최소 세 개의 주요 칼데라가 형성되었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각각의 칼데라는 대규모 폭발과 화산체 붕괴의 결과로 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칼데라는 약 8천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에트나 산 동쪽 사면의 대규모 붕괴로 인해 형성된 ‘발레 델 보베’로 알려진 함몰 지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 과정에서 산사태가 발생하였고, 방출된 물질이 급격히 이동하면서 정상부가 무너져 내렸다. 이 사건은 1980년 발생한 세인트 헬렌스 산 분화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며, 연구자들은 이 당시의 붕괴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 거대한 쓰나미를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발레 델 보베 지역은 현재도 화산 활동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의 절벽에 드러난 지층은 에트나 산의 분화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칼데라 형성 과정과 화산체 붕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정상부 붕괴는 약 2천 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때 형성된 칼데라는 '피아노 칼데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지속적인 용암 분출로 인해 이 칼데라는 점차 채워졌지만, 여전히 정상부 아래 경사면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4.3. 최근의 화산 활동과 지속적인 변화[편집]

에트나 산은 현재도 활발한 화산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지속적인 지질학적 변화를 겪고 있다. 가장 최근의 정상부 붕괴는 약 2천 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피아노 칼데라가 형성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용암 분출이 이루어지면서 칼데라 내부는 점차 채워졌지만, 현재도 정상부 아래 경사면에서는 칼데라 형성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지질학적 변화가 에트나 산의 화산 활동 패턴과 연관되어 있으며, 과거와 현재의 지형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평가하고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에트나 산의 화산 활동은 정상부 분화구뿐만 아니라 측면 균열에서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1991년부터 1993년 사이와 2001년의 분화는 에트나 산의 구조적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분화 활동은 정상부뿐만 아니라 화산체 측면에서 균열을 따라 마그마가 분출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와 같은 활동은 화산체 내부에서 마그마의 상승 경로가 변화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변형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연구자들은 에트나 산이 연평균 약 14mm씩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화산체가 단단한 기반암 위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점토질 기반의 연약한 지층 위에서 점진적으로 미끄러지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이동 현상은 장기적으로 에트나 산의 구조적 변화와 붕괴 가능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연구자들은 이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에트나 산에서 발생한 분화의 패턴을 분석한 결과, 정상부의 용암 분출과 함께 측면 분화구에서의 활동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11년부터 2022년까지의 연구에서는 위성 데이터를 이용한 고해상도 지형 분석을 통해 정상부와 측면에서 발생한 분화 활동의 빈도와 규모를 정밀하게 파악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에트나 산의 화산 활동이 단순한 주기적인 분화가 아니라, 장기적인 지질 구조 변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연구에서는 에트나 산의 이동 속도와 분화 양상의 변화를 보다 정밀하게 측정하여, 지질학적 불안정성을 평가하고 화산재해 예방을 위한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연구자들은 위성 기반의 원격 탐사 기법과 지진파 분석을 활용하여 화산 내부의 마그마 이동 경로를 추적하고 있다.

4.4. 역사적 분화[편집]

파일:512px-Etna_eruzione_1669_platania.jpg
1669년 에트나 산의 분화 삽화, 카타니아 시의 성벽이 용암을 막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에트나 산의 분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대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에 의해 남겨졌다. 기원전 396년에는 에트나 산의 분화가 카르타고 군대의 시라쿠사 진격을 저지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제2차 시칠리아 전쟁 중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 화산 분화가 전쟁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특히 기원전 122년에는 에트나 산에서 플리니식(Plinian) 분화가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남동쪽 방향으로 다량의 화산재가 쏟아졌다. 카타니아(Catania) 지역에서는 화산재가 건물의 지붕을 무너뜨리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로마 정부는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카타니아 시민들에게 10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irgil)도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d)'에서 에트나 산의 분화를 직접 목격한 듯한 묘사를 남긴 바 있다.

서기 1,500년 동안 에트나 산의 많은 분화가 기록되지 않았거나 문서가 유실되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분화 사례는 남아 있다. 약 1030년경에는 몬테 일리체(Monte Ilice) 근처의 남동쪽 사면에서 분화가 발생했으며, 용암류가 약 10km를 흘러가 아치레알레(Acireale) 북쪽 해안까지 도달했다. 이 용암류가 바다와 만나 형성한 델타 위에는 현재 산타 테클라(Santa Tecla)와 스타초(Stazzo)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1160년경(또는 1224년)에는 남남동쪽 사면 해발 350~450m 지점에서 균열 분화가 발생했다. 이때 발생한 용암류는 현재 오그니나(Ognina)로 알려진 카타니아 북쪽 해안까지 도달했다. 이후 1287년 6월 18일, 서방을 여행하던 중국인 라반 바르 사우마(Rabban Bar Sauma)가 에트나 산의 분화를 목격하고 기록을 남겼다.

1669년에는 에트나 산에서 기원전 122년 이후 가장 파괴적인 분화가 발생했다. 3월 11일에 시작된 이 분화로 인해 남쪽 사면에 위치한 최소 10개의 마을이 용암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5주 후인 4월 15일에는 용암류가 카타니아 성벽에 도달했다. 다행히 성벽이 대부분의 용암을 남쪽 바다로 유도하면서 카타니아 도심으로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용암이 서쪽 성벽의 취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와 몇몇 건물을 파괴한 후 베네딕틴 수도원 뒤편에서 멈추었다.

당시 15,000~20,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널리 퍼져 있지만, 이탈리아어 및 영어로 기록된 동시대 문서들에는 인명 피해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대신 건물 파괴 수, 농경지 손실 면적, 경제적 피해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보고된 사망자 수가 1669년 화산 분화가 아니라 24년 후인 1693년 시칠리아 남동부(특히 카타니아)를 강타한 지진과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에트나 산 분화로 인한 사망자는 총 77명으로, 가장 최근 사례는 1987년 정상부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폭발로 인해 관광객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1750년 이후, 에트나 산에서는 총 7번의 분화가 5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는 베수비오 산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장기 분화 기록이다.

4.5. 현대의 분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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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에트나 산의 분화
에트나 산은 유럽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분화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2001년에는 한 해 동안 총 16차례의 분화가 기록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특히 지난 한 세기 동안 주목할 만한 여러 차례의 대규모 분화가 발생했다.

1923년 6월 6일부터 29일까지 장기간 지속된 분화를 비롯해, 1928년에는 용암류가 마을을 덮쳐 1669년 이후 처음으로 인구 밀집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분화는 에트나 산 북동쪽 사면에서 11월 2일에 시작되었으며, 이후 여러 균열이 점진적으로 낮은 고도에서 열리면서 활발한 용암 분출이 이어졌다. 11월 4일 밤, 해발 약 1,200m 지점인 리페 델라 나카(Ripe della Naca)에서 가장 격렬한 분출이 일어났고, 하류에 위치한 마스칼리(Mascali) 마을이 단 이틀 만에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을 북쪽 일부, 산탄토니노(Sant'Antonino) 구역에서는 교회와 몇 개의 건물만이 살아남았다. 마지막 며칠 동안 용암류는 메시나-카타니아 철도를 가로막고 마스칼리 기차역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선전 목적으로 활용했으며, 대피 및 재건 작업이 파시즘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홍보되었다. 이후 마스칼리는 새로운 위치에 재건되었고, 그 교회에는 예수상 위에 파시스트 상징인 횃불이 장식되었다.

이후에도 20세기 동안 에트나 산에서는 1949년, 1971년, 1979년, 1981년, 1983년, 그리고 1991년에서 1993년 사이에 여러 차례 대규모 분화가 발생했다. 1971년의 분화로 인해 19세기 후반에 세워졌던 에트나 천문대가 용암에 묻혔고, 에트나 케이블카의 1세대 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동쪽 사면의 여러 작은 마을들이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1981년 3월에는 북서쪽 사면에 위치한 란다초(Randazzo) 마을이 빠르게 이동하는 용암류에 의해 큰 위기를 맞았으나, 가까스로 파괴를 면했다. 이 사건은 1928년 마스칼리 마을이 파괴된 당시의 상황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이어진 장기 분화에서는 자페라나(Zafferana) 마을이 용암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으나, 성공적인 유도 작업 덕분에 마을은 대부분 보존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용암의 흐름을 막기 위해 흐름 방향과 수직으로 흙 둑을 쌓았으나, 분화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면서 둑 뒤쪽의 인공 저수지가 완전히 채워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1992년 5월 23일, 용암이 흘러가는 경로를 변경하기 위해 분화구 근처에서 폭파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폭발로 인해 용암이 이동하던 주요 용암관이 파괴되었고, 새롭게 형성된 인공 수로를 따라 흐르게 되면서 자페라나 마을로의 확산이 막혔다. 이후 분출량이 점진적으로 감소했으며, 1993년 3월 30일까지 지속된 분화 동안 용암이 다시 마을로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에트나 산의 정상부 분화구 네 곳에서는 매우 활발한 화산 활동이 지속되었다. 2001년 7월과 8월에는 1991년 이후 처음으로 사면 분화(flank eruption)가 발생했으며, 남쪽 사면에서 총 7개의 균열이 열렸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G8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어 많은 언론이 현지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분화가 관광지 근처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미디어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분화로 인해 에트나 산 남쪽 관광지 일부와 케이블카 도착 지점이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인 규모는 에트나 산의 평균적인 분화에 비해 크지 않았다.

2002년에서 2003년 사이에는 더욱 강력한 분화가 발생해, 거대한 화산재 기둥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600km 떨어진 리비아까지 날아갔다. 지진 활동이 증가하면서 화산의 동쪽 사면이 최대 2m까지 이동하였으며, 사면에 위치한 여러 건물들이 구조적 손상을 입었다. 또한, 북동쪽 사면의 관광지 피아노 프로벤차나(Piano Provenzana)와 남쪽 사면의 리푸지오 사피엔자(Rifugio Sapienza) 관광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이때 촬영된 화산 폭발 장면은 2005년 개봉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에서 무스타파 행성의 풍경을 구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2008년 5월 13일에는 정상 분화구 동쪽에서 새로운 균열이 형성되었으며, 이에 동반된 200여 건의 지진과 지표면 변형이 감지되었다. 이 분화는 417일 동안 지속되어, 1991-1993년 473일간 이어진 분화 이후 에트나 산에서 두 번째로 긴 사면 분화로 기록되었다.

2011년 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에트나 산 정상에서는 지속적인 화산 활동이 관측되었으며, 이로 인해 카타니아 공항이 여러 차례 폐쇄되었다. 2014년에는 새로운 사면 분화가 발생했으며, 이는 2008-2009년 이후 처음이었다.

2015년 12월 3일, 보라진(Voragine) 분화구에서 용암 분수가 1km 높이까지 치솟았으며, 화산재는 3km까지 상승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지면서 12월 7일에는 화산재 기둥이 7km까지 상승하며 카타니아 공항이 일시적으로 운영을 중단했다.

2017년 3월 16일, 마그마가 눈과 접촉하면서 폭발이 발생해 BBC 뉴스 취재진을 포함한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2018년 12월 24일, 얕은 심도의 암상(dyke intrusion)으로 인해 화산이 분화하며 공중으로 화산재를 방출했고, 이로 인해 에트나 산 주변 공역이 폐쇄되었다. 이틀 후인 12월 26일, 규모 4.9의 지진이 플레리(Fleri)와 카타니아 지역을 강타하며 건물들이 손상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2021년 2월부터 에트나 산은 연속적인 폭발적 분화를 일으켰으며, 화산재와 암석이 인근 마을과 도시에 떨어졌다. 3월 12일까지 3주 동안 총 11차례의 분화가 발생했으며, 화산재 기둥이 10km 이상 상승해 시칠리아 공항이 여러 차례 폐쇄되었다.

2022년 2월 11일과 19일에는 남동쪽 분화구에서 연속적인 폭발이 발생했고, 용암 분수가 1,000m 이상 치솟았다. 같은 해 5월 29일, 남동쪽 분화구의 붕괴로 인해 북쪽 사면에 균열이 형성되었으며, 이 균열에서 용암이 분출되어 레오네 계곡(Leone Valley) 방향으로 이동했다.

2024년 7월 4일과 8월 14일에도 강력한 분화가 발생했으며, 두 차례 모두 화산재로 인해 카타니아 공항이 폐쇄되었다. 8월 14일 분화에서는 화산재 기둥이 9.5km까지 상승했다.

5. 여담[편집]

에트나 산의 용암 분수는 최대 약 1,500m(1.5km)까지 상승한 기록이 있다. 특히 2021년 2월 23일 분화에서는 용암 분수가 1,500m 높이까지 치솟은 것이 관측되었으며, 이는 최근 몇 년간 가장 높은 분출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또한, 유럽우주국(ESA)의 위성 모니터링에 따르면, 에트나 산에서 발생한 용암 분수가 1.5km까지 도달한 사례가 확인된 바 있다.

이처럼 에트나 산은 강한 용암 분수를 동반하는 분화가 자주 발생하지만, 현재까지 1.5km보다 더 높은 용암 분출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1]

또한 에트나의 높이는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이는 활발한 화산 활동 때문이다. 한번은 너무 많은 물질을 분출하여 화산의 높이가 수개월 만에 30m가 상승하기도 했었다가 붕괴되어 이전 높이보다 더 낮아지기도 하였다.

에트나 산은 섭입대 부근에 위치해 있지만 섭입이 아닌 열점 활동으로 형성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1] 비공식적으로 에트나 산의 정상에서 10초 동안 3km까지 기록은 있으니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