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1. 개요2. 제1차 세계 대전의 배경
2.1. 제국주의 경쟁과 경제적·군사적 대립2.2. 식민지 경쟁과 국제적 긴장2.3. 발칸 반도의 불안정과 민족주의 갈등2.4. 동맹 체제와 군사주의 확산2.5. 사라예보 사건과 전쟁의 발발2.6. 전쟁의 필연성과 장기화
3. 명칭4. 참전국
4.1. 협상국4.2. 동맹국
5. 전개
5.1. 전쟁의 발발과 초기 전격전 (1914년)5.2. 교착 상태와 참호전의 본격화 (1915~1916년)5.3. 전쟁의 확대와 미국의 참전 (1917년)5.4. 독일의 마지막 공세와 종전 (1918년)5.5. 전후 처리와 영향
6. 결과7. 영향
7.1. 인문학에 끼친 영향7.2. 군사학에 끼친 영향7.3. 사회에 미친 영향7.4. 각 나라에 미친 영향
7.4.1. 미국7.4.2. 영국7.4.3. 프랑스7.4.4. 독일7.4.5.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7.4.6. 오스만 제국7.4.7. 일본 제국7.4.8. 한국
8. 제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
8.1. 서부 전선(Western Front) 주요 전투
8.1.1. 마른 전투 (1914년 9월 6~12일)8.1.2. 이프르 전투 (1914년 10월 ~ 1917년 11월)8.1.3. 베르됭 전투 (1916년 2월 ~ 12월)8.1.4. 솜 전투 (1916년 7월 ~ 11월)8.1.5. 독일의 춘계 공세 (1918년 3월 ~ 7월)8.1.6. 아미앵 전투 (1918년 8월 8~12일)
8.2. 동부 전선(Eastern Front) 주요 전투
8.2.1. 탄넨베르크 전투 (1914년 8월 26~30일)8.2.2.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 (1915년 5월 ~ 9월)8.2.3. 브루실로프 공세 (1916년 6월 ~ 9월)8.2.4. 리가 전투 (1917년 9월)
8.3. 발칸 전선(Balkan Front) 주요 전투
8.3.1. 세르비아 침공 (1914년 ~ 1915년)8.3.2. 도이란 전투 (1917년, 1918년)
8.4. 이탈리아 전선(Italian Front) 주요 전투
8.4.1. 이손초 전투 (1915년 ~ 1917년, 총 12차례)8.4.2. 카포레토 전투 (1917년 10월 ~ 11월)
8.5. 중동 전선(Middle Eastern Front) 주요 전투
8.5.1. 갈리폴리 전역 (1915년 2월 ~ 1916년 1월)8.5.2. 예루살렘 전투 (1917년 12월)8.5.3. 메깃도 전투 (1918년 9월)
8.6. 서아프리카 및 태평양 전투
8.6.1. 탕가 전투 (1914년 11월)

1. 개요[편집]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1918년)은 20세기 초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된 총력전이었다. 이 전쟁은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발발했으며,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이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격돌하였다.

2. 제1차 세계 대전의 배경[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제국주의 경쟁, 민족주의 갈등, 군비 확장, 동맹 체제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발생한 전쟁이었다. 유럽 강대국들은 식민지 쟁탈전과 경제적 패권 경쟁을 벌였고, 발칸 반도에서는 민족주의 운동과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했다. 또한, 독일과 영국의 군비 경쟁, 프랑스와 독일의 영토 분쟁,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의 대립이 전쟁 가능성을 높였다. 이러한 배경원인을 분석해보고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보겠다.

2.1. 제국주의 경쟁과 경제적·군사적 대립[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단순한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니라, 19세기 후반부터 누적된 강대국 간의 경쟁과 긴장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전쟁이었다. 19세기 유럽 열강들은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자원 확보와 시장 개척을 위한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을 펼쳤다.

독일은 1871년 통일 이후 빠르게 산업화를 이루며 영국과 경제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 이후 독일은 석탄과 철강 생산량에서 영국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고, 독일 기업들은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진출하며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충돌했다. 독일의 크루프 공업 그룹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수산업을 형성하며 무기 생산 경쟁을 가속화했다.

특히 독일이 1890년대부터 "세계정책(Weltpolitik)"을 추진하면서 해군력을 강화하고 해외 식민지 확대를 시도한 것이 영국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영국은 19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해군력을 압도적으로 유지했지만, 독일이 1898년과 1900년 해군법을 통과시키며 대규모 해군 증강을 시작하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영국은 이에 맞서 1906년 신형 전함 드레드노트를 건조하며 독일과의 군비 경쟁을 본격화했다.

2.2. 식민지 경쟁과 국제적 긴장[편집]

19세기 말 유럽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 확장을 위해 경쟁하며 여러 차례 충돌했다. 독일은 1884년 이후 아프리카와 태평양 지역에서 식민지를 확보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 및 영국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모로코 위기(1905년, 1911년)는 프랑스와 독일 간의 갈등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방해하려 했고, 이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을 깨뜨리려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 협력을 더욱 강화하였고, 독일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국제적 갈등은 군비 경쟁으로 이어졌다. 각국은 군사력을 증강하며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과 영국은 해군력을, 프랑스와 독일은 육군력을 증강하며 전쟁 가능성을 높여갔다.

2.3. 발칸 반도의 불안정과 민족주의 갈등[편집]

유럽에서 가장 불안정한 지역이었던 발칸반도는 민족주의와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며,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발칸 지역에서는 독립과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세르비아는 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주장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남슬라브계 지역을 흡수하려 했다.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견제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를 지원하면서 양국 간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다. 1912년과 1913년에 걸친 발칸 전쟁은 이 지역의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유럽 전체가 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키웠다.

2.4. 동맹 체제와 군사주의 확산[편집]

유럽 각국이 맺은 군사 동맹 체제는 전쟁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로 이루어진 삼국 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구성된 삼국 협상은 유럽을 양분하였으며, 한 국가의 분쟁이 다국적 전쟁으로 번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독일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 아래 슐리펜 계획을 수립하며 프랑스와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역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견제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지속하였으며, 유럽 전체가 전쟁을 대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은 강한 군사주의를 표방하며 전쟁을 정당화했다. 독일은 "짧고 결정적인 전쟁"을 통해 유럽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으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되찾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영국 역시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견제하기 위해 군비를 확대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2.5. 사라예보 사건과 전쟁의 발발[편집]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면서 전쟁이 촉발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세르비아 정부의 개입으로 간주하고 강경 대응을 결정했으며,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였고, 이어 프랑스와 영국까지 개입하면서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휘말렸다.

2.6. 전쟁의 필연성과 장기화[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단순한 암살 사건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경쟁, 민족주의적 대립, 군비 경쟁과 외교적 실패, 동맹 체제의 경직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각국은 단기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참호전과 총력전으로 인해 전쟁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으며, 유럽과 전 세계를 초토화하는 장기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3. 명칭[편집]

세계 제1차 대전은 처음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것이 아니라, 전쟁의 양상이 점차 확대되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4년 10월, 캐나다의 잡지 맥클린스(Maclean's)에서는 "어떤 전쟁은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그것이 바로 ‘대전(Great War)’이다"라고 언급하며, 이 전쟁을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닌 전례 없는 규모의 국제전으로 인식했다. 같은 해 말, 뉴욕에서 출판된 전쟁의 기원과 초기 역사에 관한 책에서는 ‘세계 대전(World War)’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당시부터 이 전쟁이 지구적 규모의 전쟁임을 반영하였다.

전간기 동안,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영미권에서는 이 전쟁을 주로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이라고 불렀다. 이는 당시 유럽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주요 강대국들이 모두 참전한 사상 초유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914년 9월로,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유럽 전쟁’의 규모와 성격을 고려할 때, 이는 단순한 지역 전쟁이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러야 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영국 군 장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찰스 아 코르트 레핑턴(Charles à Court Repington)은 1920년대 자신의 저서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 표현을 더욱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First World War, World War I)’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었다.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주로‘First World War’라는 표현이, 미국에서는‘World War I’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4. 참전국[편집]

4.1. 협상국[편집]

  • 미국
  • 대영제국
    • 캐나다 (Canada)
    • 오스트레일리아 (Australia)
    • 뉴질랜드 (New Zealand)
    • 남아프리카 연방 (Union of South Africa)
    • 뉴펀들랜드 (Newfoundland)
    • 인도 제국(British India)
    • 이집트 보호령(Egyptian Protectorate)
    • 외 기타 식민지
  • 프랑스
    • 프랑스령 북아프리카(Afrique du Nord Française)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Afrique Occidentale Française, AOF)
    •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Afrique Équatoriale Française, AEF)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Indochine Française)
    • 외 기타 식민지
  • 벨기에
  • 러시아 제국
  • 루마니아
  • 세르비아
  • 이탈리아
  • 일본 제국

4.2. 동맹국[편집]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독일 제국
  • 불가리아 차르국
  • 오스만 제국

5. 전개[편집]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 호엔베르크 여공작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공식 방문했다. 이 방문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 이후 더욱 고조된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대한 저항이 팽배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조직 흑수단(Black Hand)이 후원한 젊은 보스니아계 민족주의 단체 청년 보스니아(Young Bosnia)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에 반대하며 황태자 암살을 계획했다.

이날,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를 비롯한 암살단 6명 (췌베트코 포포비치,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 트리프코 그라베츠, 바소 쿠브릴로비치)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갈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암살단 중 차브리노비치가 먼저 수류탄을 던졌으나 차량을 빗나갔고, 폭발로 인근 시민 몇 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 황태자는 무사했다. 이에 따라 경호팀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신속히 피신시키려 했으며, 대공의 차량 행렬은 계획된 경로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사건이 실패한 듯 보였으나, 한 시간 후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대공은 수류탄 공격으로 부상당한 군 관계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한 뒤 돌아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었다. 이때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사라예보 거리의 한 빵집 앞에 서 있었는데, 대공의 차량이 우연히 그의 앞을 지나가며 정지하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총을 꺼내 두 발을 발사했다. 첫 번째 총탄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목을, 두 번째 총탄은 그의 아내 조피의 복부를 맞혔다. 두 사람은 치명상을 입었고, 짧은 시간 내에 사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에서는 황태자의 암살에 대해 예상보다 차분한 반응이 나왔다.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 내에서 개혁을 시도하려는 입장이었고, 황실 내에서도 그의 정치적 방향성에 대한 반감이 존재했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은 당시 상황을 두고 "빈의 시민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셨다"라고 회고하며, 사건 직후 황실과 국민들의 반응이 냉담했음을 전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에 대한 응징의 명분으로 삼았다. 사라예보를 포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들 사이에서는 반세르비아 감정이 폭발했으며, 이틀 후 사라예보에서 대규모 반세르비아 폭동이 발생했다.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 군중들은 세르비아계 시민들의 집과 상점을 공격했으며, 세르비아인 두 명이 살해되고 다수의 건물이 방화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반세르비아 감정은 사라예보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이를 이용하여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약 5,500명의 세르비아인을 체포하거나 강제 추방했으며, 이들 중 최소 700명에서 2,200명이 수감 중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460명 이상의 세르비아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지역에서는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친오스트리아 민병대가 결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핍박을 주도했다.

사라예보 사건은 단순한 암살 사건을 넘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간의 긴장을 극도로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을 보내 전쟁을 준비했고, 세르비아가 이를 거부하자 1914년 7월 28일 결국 선전포고를 하며 세계 제1차 대전의 불씨를 지폈다.

5.1. 전쟁의 발발과 초기 전격전 (1914년)[편집]

파일:3c41ed5c81.jpg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선전포고 전보
사라예보 사건은 발칸 반도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민족주의 갈등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강력한 대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한 후, 1914년 7월 23일 세르비아에 10개 조항으로 구성된 최후통첩을 보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반(反) 오스트리아-헝가리 선동 활동 금지,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대상으로 한 모든 선전 활동을 중단하고, 자국 내에서 반(反) 오스트리아 정서를 퍼뜨리는 모든 조직과 개인을 단속해야 한다.

2. 반(反) 오스트리아 단체 해산, 세르비아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반(反) 오스트리아 조직(특히 '검은 손'과 같은 민족주의 단체)을 해산하고, 그 활동을 금지해야 한다.

3. 반(反) 오스트리아 언론 통제, 세르비아 정부는 반(反) 오스트리아적인 기사나 출판물을 검열하고 금지해야 한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적대적인 보도를 하는 언론을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한다.

4. 반(反) 오스트리아 교육 및 선전 중단, 세르비아의 공교육 기관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비방하는 교육을 중단하고, 모든 반(反) 오스트리아 교과서를 폐기해야 한다.

5. 반(反) 오스트리아 관리 및 군인 해임,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모든 관리와 군 장교들을 즉시 해임해야 하며, 이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

6. 암살 사건 관련 수사 협조 및 공범 체포, 세르비아 정부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공범을 수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제공하는 증거에 따라 체포해야 한다.

7.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의 세르비아 경찰 조사 참여 허용,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들이 세르비아 경찰의 조사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며, 이를 통해 암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8. 오스트리아-헝가리 법원의 판결 존중, 암살 사건과 관련된 용의자들은 세르비아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수도 있으며, 세르비아 정부는 이를 인정하고 협력해야 한다.

9. 반(反) 오스트리아 테러 방지 조치 강화,세르비아 정부는 국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테러 활동을 방지하기 위한 특별 조치를 시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협력해야 한다.

10. 최후통첩 수락 여부를 48시간 내에 회신, 세르비아는 위의 모든 요구를 48시간 내에 수락하고, 이를 실행할 구체적인 계획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통보해야 한다.

이 내용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이었으며,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경찰과 관리들이 세르비아 내에서 직접 조사와 체포를 수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등 사실상 국가 주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몇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주권을 이유로 거부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하였고, 이는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즉각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한 군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독일은 러시아의 개입을 경고하며 동원 해제를 요구했으나, 러시아가 이를 거부하자 8월 1일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였다. 러시아와 동맹 관계에 있던 프랑스 역시 독일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으며,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 전역이 전쟁에 휘말렸다.

독일은 전쟁 초반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을 실행하여 프랑스를 신속히 점령한 후, 러시아를 상대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중립국 벨기에를 통과하여 프랑스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으며, 독일군은 8월 4일 벨기에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벨기에군은 예상보다 강한 저항을 보였으며, 벨기에 침공을 이유로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8월 4일)하면서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초기 전투에서 독일군은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하며 진격하였으나, 예상보다 빠른 영국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의 개입과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진격 속도가 느려졌다. 9월 초 독일군은 파리 북동쪽 50km 지점까지 도달하였으며, 프랑스의 수도를 점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9월 5일부터 12일까지 벌어진 제1차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강력한 반격을 가하며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더 이상의 신속한 진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퇴각 후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부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본격적인 참호전(Trench Warfare)이 시작되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과 러시아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에서 러시아군을 압도적인 전술로 격파하였으며, 이후 러시아군은 전선에서 크게 후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상대로 고전하며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침공에서 여러 차례 패배하였으며, 전쟁 초반부터 세르비아를 빠르게 점령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5.2. 교착 상태와 참호전의 본격화 (1915~1916년)[편집]

파일:ww1-2187095_1280.jpg
세계 1차 대전의 참호
1915년부터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전선은 고착 상태에 빠지며 본격적인 참호전이 전개되었다.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이 1915년 4월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염소가스를 사용하며 화학전을 도입했다. 독가스는 연합군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독일군이 이를 결정적인 승리로 연결하지 못하면서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후 연합군도 독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참호전의 잔혹함은 더욱 심화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 5월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를 단행하여 러시아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공세로 인해 러시아군은 1914년 점령했던 갈리치아 지역에서 후퇴해야 했으며, 독일군은 바르샤바를 포함한 러시아 폴란드를 점령하며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공세로 러시아 제국은 큰 군사적 손실을 입었고, 내부적인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한편, 1915년 5월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런던 조약을 체결하며 삼국동맹에서 이탈하고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간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으며, 이손초 강을 중심으로 반복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손초 전투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총 12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이에 대응해 영국과 프랑스는 1915년 갈리폴리 전역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다. 연합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확보하고 오스만 제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키려 했지만, 오스만군의 강력한 저항과 지형적 불리함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지휘한 무스타파 케말(훗날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전쟁 영웅으로 부상했다.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가 이어졌다. 독일군은 2월부터 12월까지 베르됭 전투를 벌이며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독일군은 프랑스의 전력을 소진시키려 했지만, 프랑스군은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Il ne passeront pas!)"라는 슬로건 아래 필사적으로 방어했고, 결국 독일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후퇴했다. 베르됭 전투에서만 7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전쟁의 잔혹함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베르됭 전투에 대한 대응으로 연합군은 7월부터 11월까지 솜 전투를 개시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전투 첫날 영국군은 단 하루 만에 6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하며 전쟁사에서 최악의 첫날 손실을 경험했다.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양측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고, 최종적으로 연합군이 약간의 전선 진격에 성공했으나 전략적 성과는 미미했다.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최초로 전차(Tank)를 사용하며 새로운 전쟁 기술을 도입했지만, 아직 기술적으로 미완성된 상태였기에 전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1915년과 1916년의 전쟁은 기존의 기동전 개념에서 벗어나, 철저한 소모전과 참호전으로 변화하며 전장 환경을 극도로 가혹하게 만들었다. 전선의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각국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고, 군인들과 국민들의 피로감은 점점 커져갔다. 이로 인해 1917년 이후 전쟁을 지속할 능력이 점점 한계에 다다르며, 결국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었다.

5.3. 전쟁의 확대와 미국의 참전 (1917년)[편집]

1917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해였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이 극에 달하며 내부에서 혁명이 발생했다. 2월 혁명으로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전쟁 지속 여부를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격화되었다. 임시정부는 연합국 측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지친 러시아 국민과 병사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결국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고, 1918년 3월 3일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폴란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핀란드, 우크라이나 등 광대한 영토를 상실했으며,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서부 전선으로 병력을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한편, 독일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다. 이는 1915년 루시타니아 호 격침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전략이었으나,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해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독일은 다시 이를 강행했다. 이로 인해 미국 상선들이 독일 U보트(U-boat)에 의해 침몰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 내 반독 감정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짐머만 전보 사건이 발생하며 미국과 독일 간의 긴장이 더욱 높아졌다. 독일 외무장관 아서 짐머만이 멕시코에게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지역을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담은 암호 전문이 영국의 첩보 기관에 의해 해독되어 미국에 전달되었고, 이는 미국 여론을 완전히 돌아서게 만들었다.

결국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다. 이는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미국은 이미 연합국 측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며 경제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참전 이후 본격적으로 병력과 자원을 서부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전쟁 이탈로 동부 전선에서의 부담을 덜었지만,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서부 전선에서 새로운 강력한 적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17년은 러시아의 전쟁 이탈과 미국의 참전이라는 두 가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며 전쟁의 균형이 크게 흔들린 해였다. 독일은 한때 서부 전선에서의 승리를 기대했으나, 신선한 병력과 압도적인 자원을 가진 미국의 등장은 독일과 동맹국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으며, 이는 1918년 독일의 최후 공세와 결국 연합국의 승리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5.4. 독일의 마지막 공세와 종전 (1918년)[편집]

러시아와의 강화 조약으로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한 독일은 1918년 춘계 공세(Spring Offensive)를 감행하며 서부전선에서 승부를 보려 했다. 하지만 제2차 마른 전투(Second Battle of the Marne, 7월~8월)에서 연합군이 독일군을 저지하며 반격을 시작했다.

이어 100일 공세(100 Days Offensive, 8월~11월)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군이 독일군을 밀어내면서 전황이 급격히 연합국 쪽으로 기울었다. 독일 내부에서는 전쟁 피로도가 극심해졌고, 11월 9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하며 독일은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컴피에뉴에서 연합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며 전쟁이 종식되었다.

5.5. 전후 처리와 영향[편집]

1919년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이 체결되며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과 군사적 제한을 부과받았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었고,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으나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6. 결과[편집]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컴피에뉴 휴전 협정을 체결하며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항복했으며,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연합국이 부과한 베르사유 조약을 수락해야 했다. 독일은 이 조약을 통해 전쟁의 모든 책임을 인정해야 했으며, 엄청난 금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독일군은 10만 명 이하로 감축되었으며, 전차, 항공기, 잠수함과 같은 주요 군사 장비의 보유가 금지되었고, 라인란트는 비무장 지대로 설정되었다. 영토적으로는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고,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 할양했으며, 해외 식민지를 모두 상실했다. 독일 국민들은 이를 굴욕적인 조약이라 여겼고, 이후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불안정한 정권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극단적인 정치 세력의 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나치 독일의 부상을 촉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서부전선이 프랑스 영토에서 전개되면서 국토가 심각하게 황폐해졌으며,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에 대한 강한 보복 조치를 원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의 군사력을 철저히 제한하고 경제적 보상을 요구했다. 알자스-로렌을 되찾았고,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여 전후 경제 재건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독일의 반발을 초래했고,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의 강경한 태도는 외교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전후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영국과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미국이 고립주의 정책을 선택하며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면서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할 확실한 동맹국을 잃게 되었다.

영국 역시 승전국이었으나 경제적 부담이 컸다. 전쟁 동안 엄청난 자금을 지출하며 국채가 급증했고, 전쟁이 끝난 후 실업률이 상승하고 경제 침체가 발생했다. 그러나 영국은 해외 식민지에서 독일의 식민지를 추가로 획득하면서 대영제국의 세력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보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며, 독일이 너무 심하게 약화될 경우 유럽의 균형이 무너질 것을 우려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붕괴로 영국은 중동 지역의 위임통치를 확보하며 전략적 이점을 얻었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으며, 아일랜드 문제와 노동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내부적인 갈등이 심화되었다.

미국은 전쟁의 후반부에 참전하여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고, 전후 국제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후 평화를 위한 14개 조항을 제안하며 국제 질서 재편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국제 연맹 창설을 주도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전후 외교 정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커졌으며, 결국 미 의회는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하며 고립주의를 선택했다. 이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서 점차 거리를 두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 기간 동안 급성장한 미국 경제는 유럽 국가들에게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며 국제 금융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으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이 체제는 무너지고 이후 세계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러시아는 전쟁 중 혁명이 발생하며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으며, 이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공산주의 국가로 변화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으며 동부전선에서 철수하였고, 그 대가로 서부 영토를 독일과 그 동맹국에게 할양했다. 하지만 독일이 패전하며 조약은 효력을 잃었고, 이후 러시아 내전이 발생하면서 공산 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전쟁 후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서방 국가들은 소련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전쟁의 패배로 인해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 붕괴하며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의 독립 국가로 분열되었으며, 이는 이후 동유럽 지역에서 민족 간 갈등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 후 연합국의 점령을 받으며, 1920년 세브르 조약으로 영토가 분할되었으나, 터키 독립전쟁을 통해 1923년 현대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탈리아는 전쟁에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여 승전국이 되었으나, 기대했던 영토 확장을 충분히 이루지 못했다. 런던 조약을 통해 약속받은 일부 영토를 확보하였지만, 달마티아 연안 지역을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며 "배신당한 승리"라는 불만이 커졌다. 이러한 불만은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고,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일본은 전쟁 동안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독일의 태평양 지역 식민지를 점령하였고,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1919년 국제 연맹에서 인종 평등 조항을 제안하였으나, 이는 서방 국가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국제적인 발언권을 강화하였으나, 이후 미국과 영국과의 해군력 경쟁이 심화되면서 태평양 지역에서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의 종전은 단순한 군사적 승패를 넘어 국제 사회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후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지만, 이는 패전국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며 향후 국제 정세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유럽은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부채와 인플레이션 문제에 직면했고, 이는 결국 1929년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파시즘이 경쟁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씨앗이 되었다.

7. 영향[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고, 전 세계적으로 정치·경제·사회·군사적 변화를 초래했다. 정치적으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고,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새로운 국가들이 독립하며 유럽의 국경이 재편되었고, 전쟁 방지를 위해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지만 실효성이 부족했다.

7.1. 인문학에 끼친 영향[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철학, 문학, 예술, 심리학 등 인문학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참호전과 대규모 사상자가 초래한 충격은 인간 존재와 문명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고, 이는 전후 인문학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다.

철학에서는 전쟁이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삶의 무의미함을 강하게 인식하게 만들면서 실존주의가 부상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는 인간이 의미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죽음과 불안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다. 전쟁을 경험한 군인과 생존자들은 신에 대한 회의와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으며, 이는 이후 실존주의 문학과 예술로 이어졌다.

문학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조명하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29)는 참호전의 비극과 군인들의 허무함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T.S. 엘리엇의 《황무지》(1922)는 전후 문명의 붕괴와 인간의 상실감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1929)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병사의 내면적 갈등을 그렸으며,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술에서는 기존의 전통적인 미학이 붕괴되고 새로운 형태의 실험적 예술이 등장했다. 다다이즘(Dadaism)은 전쟁의 광기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으며,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무의미함과 우연성을 강조했다.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예술의 개념 자체를 전복하려 했으며,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전쟁의 공포와 무의식을 탐구하면서 전후 예술의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

심리학에서는 전쟁의 충격이 인간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전쟁 경험이 인간의 억압된 욕망과 트라우마를 표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으며, 전후 심리 치료와 정신 분석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낙관론을 잃어버렸으며, 오히려 인간의 본성과 문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는 현대 인문학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졌으며, 이후의 철학, 문학, 예술 사조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7.2. 군사학에 끼친 영향[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군사학과 전쟁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의 전쟁이 기병과 대규모 병력의 기동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1차 대전에서는 참호전, 대량 살상 무기, 총력전 개념이 등장하며 현대전의 양상이 확립되었다.

전략적으로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참호전이 본격화되었고, 이에 따라 방어가 공격보다 유리한 형태로 전쟁이 진행되었다.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장기간 대치하며 적의 공격을 방어했지만, 이는 전쟁을 장기화시키고 대규모 사상자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기동전이 어려워졌고, 전쟁 승리를 위해서는 새로운 전술과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무기와 기술적으로는 중화기와 대량 살상 무기가 대거 도입되었다. 기관총은 방어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며 적의 돌격을 무력화시켰고, 독가스(염소가스, 머스타드가스)는 전장에서 새로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탱크는 참호전을 돌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어 1916년 솜 전투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이후 기동전의 핵심 무기로 발전했다. 항공기는 정찰과 폭격에 사용되며 공중전 개념이 등장했고, 독일의 U보트(잠수함)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해상전의 개념을 바꾸었다.

전쟁 방식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의 제한적 전쟁 개념에서 벗어나 전 국민과 국가 경제가 총동원되는 총력전(Total War) 개념이 등장했다. 전쟁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국가 전체가 전쟁 수행을 위한 체제로 전환되는 형태로 변화했다. 산업과 과학이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전시 경제 체제가 확립되었다.

전후 군사학에서는 1차 대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쟁 이론과 전략이 연구되었다. 기동전이 어려운 참호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은 기갑부대와 공군을 활용한 전격전(Blitzkrieg)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핵심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은 공군력을 활용한 전략 폭격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해군 전략에서는 항공모함이 새로운 전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기존의 전쟁 개념을 완전히 변화시킨 전쟁이었으며, 이후의 모든 현대전의 기반이 되었다. 기계화된 전쟁, 총력전, 공중전, 해상전의 변화 등은 20세기 군사 전략의 핵심 요소가 되었으며, 전쟁의 양상이 더욱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7.3. 사회에 미친 영향[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각국은 총력전 체제로 전환되었고, 이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고 노동 환경이 변화했으며, 정치적 이념과 문화적 흐름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남성들이 전장으로 나가면서 여성들이 산업과 공공 서비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여성들은 군수 공장에서 탄약과 무기를 제조하며, 버스와 철도를 운행하고, 우체국과 행정 기관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의료 분야에서도 간호사와 구호 활동가로 활약하며 전쟁을 지원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여성들은 노동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고, 이는 전후 여성 참정권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전쟁 후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확대되었다.

노동 환경도 크게 변화했다. 전쟁 이전에는 노동조합 활동이 일부 국가에서 제한되었지만, 전시 경제 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의 역할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이 노동조합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권리가 확대되었고, 전쟁 후 노동조합 운동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전후 경제 불황으로 인해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일부 국가에서는 파업과 노동 쟁의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전쟁은 정치적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중 정부들은 전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통제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에 따라 국가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경제적 혼란과 군대의 붕괴가 심화되었고, 결국 1917년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러시아 혁명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도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요구가 강화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전쟁의 영향은 광범위했다. 전쟁으로 인해 기존 사회 질서가 흔들리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도전받았고, 예술과 문학에서도 이를 반영하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작가들은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을 담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전후 사회에서는 전쟁을 비판하는 문학과 예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의 잔혹성과 참호전의 무의미함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쟁은 정신 건강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참호전과 대규모 포격으로 인해 많은 군인들이 신경쇠약과 전쟁 신경증(오늘날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으로 고통받았다. 이는 현대 정신의학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개념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전쟁에서 참전 군인들의 정신 건강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후 세계는 전쟁의 충격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야 했다. 기존의 군주제 국가들이 몰락하고 민주주의 체제가 확산되었으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국제 연맹이 창설되면서 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협력이 시도되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실효성을 갖추지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전쟁이었다. 전쟁을 통해 사회 구조가 재편되고,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으며, 노동운동과 정치적 이념이 변화했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경제적, 심리적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이는 결국 20여 년 후 또 다른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7.4. 각 나라에 미친 영향[편집]

7.4.1. 미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 초반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지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짐머만 전보 사건으로 인해 1917년 4월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다. 이는 미국이 국제 무대에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으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미국은 전쟁 특수를 누리며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으로 떠올랐다. 유럽 국가들이 전쟁으로 인해 산업이 마비된 반면, 미국은 연합국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며 공업과 금융이 크게 성장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에 막대한 대출을 제공하면서 국제 경제의 중심이 되었고, 이는 미국 달러가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공업 생산이 급증하면서 대량생산 체제가 확립되었고, 이는 1920년대 미국 경제 호황의 기반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여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남성들이 전장에 나가면서 여성들이 공장과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노동력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는 여성 참정권 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결국 1920년 미국은 수정헌법 제19조를 통과시키며 여성에게 투표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또한, 군수 생산과 노동력 수요 증가로 인해 남부의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북부의 공업지대로 이주하는 대이동이 발생했으며, 이는 미국 내 인종 구성을 변화시키고 이후 인권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대규모 군대 운영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전쟁 전까지 미국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군대를 유지했으나, 참전을 계기로 병력 규모가 대폭 확대되었으며, 이후 군사 기술과 전략이 급격히 발전했다. 미 해군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고, 전쟁 후 미국은 영국과 함께 세계적인 해군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외교적으로는 전쟁을 계기로 국제 무대에서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후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14개조 원칙을 발표하며 국제 연맹 창설을 주도했다. 하지만 미국 의회는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하며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했고, 이는 전후 미국 외교 정책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미국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고, 군사적으로는 현대적 군대 운영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여성과 소수 인종의 사회적 변화가 촉진되었다. 외교적으로는 국제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고립주의 정책을 유지하며 유럽 문제에서 일정 부분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20세기 미국의 역할과 정책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7.4.2. 영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영국에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초기 영국은 유럽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강력한 해군을 앞세워 독일의 해상 봉쇄를 실시했고, 서부 전선과 중동에서 연합국의 주요 전력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영국 경제와 사회 전반에 심각한 부담이 가중되었으며, 전쟁 후 기존의 대영제국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영국은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막대한 차입을 했고, 이는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전쟁 전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영국은 전쟁 중 미국과 다른 연합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받았으며, 전후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산업 생산력은 전쟁 기간 동안 증가했지만, 전쟁 후 경제 회복이 지연되면서 실업률이 급증하고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기존 무역망이 약화되었으며, 식민지 경제 의존도가 높아졌다.

사회적으로 영국은 전쟁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변화했다. 전쟁 중 남성들이 전장으로 나가면서 여성들이 공장, 병원, 운송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노동력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는 여성 참정권 운동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18년에는 일정 연령 이상의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으며, 1928년에는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전후 경제 침체로 인해 여성들의 직장 복귀가 제한되면서 노동 시장에서의 역할은 일시적으로 축소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는 기존의 해군 중심 전력에서 현대적 육군과 공군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해군은 전쟁 초반 독일 해군을 견제하며 북해 봉쇄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1916년 유틀란트 해전에서 독일 해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해군 전력 유지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전쟁 후 영국은 해군력 유지에 많은 자원을 투자했으나, 동시에 공군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918년 영국 왕립공군(RAF)이 창설되었다. 또한, 전차와 독가스 등 새로운 무기 기술이 등장하면서 전쟁 방식이 급변했으며, 이는 이후 영국 군사 전략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영제국의 정치적 구조도 전쟁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은 인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자치령(Dominions)에서 군대를 모집했고, 이들의 전쟁 기여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인도에서는 영국의 전쟁 협력 요청에 대한 보상으로 자치 확대를 기대했으나, 전후 기대와 달리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민족운동이 더욱 거세졌다. 아일랜드에서도 1916년 부활절 봉기가 발생하며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고, 결국 1921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었다.

외교적으로 영국은 전쟁 후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독일의 군사력을 제한하고 국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이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하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질서 유지의 주요 책임을 떠맡게 되었고, 이는 이후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중동에서는 전쟁 중 맺어진 맥마흔-후세인 서한과 밸푸어 선언이 충돌하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는 이후 중동 문제의 기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영국이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세계 최강국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점진적으로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미국에 밀려나며 세계 금융 중심의 위치를 잃었고, 군사적으로는 해군력의 우위를 유지하려 했으나 공군과 육군의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들이 점차 독립을 요구하며 제국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는 2차 대전 이후 본격적인 탈식민지화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전후 영국은 여전히 강대국이었지만, 이전과 같은 절대적인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7.4.3. 프랑스[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프랑스에 엄청난 피해와 변화를 가져왔다. 프랑스는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었으며, 서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른 국가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입었으며, 전후에도 오랫동안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경제적으로 프랑스는 전쟁으로 인해 공업지대가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며, 주요 산업 지역인 북부와 동부가 전투로 황폐화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경제 회복이 더뎠으며, 노동력 부족과 인프라 재건이 큰 과제로 남았다. 또한, 전쟁 중 막대한 차입을 하며 미국과 영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전후 프랑스 경제의 불안정성을 초래했다.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실제 배상금 지급이 지연되면서 프랑스 경제 회복은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사회적으로 프랑스는 전쟁에서 약 140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수백만 명이 부상을 입거나 장애를 가지게 되면서 인구 구조가 크게 변화했다. 많은 마을과 도시가 폐허가 되었으며, 전후 사회는 전쟁의 충격과 상실감에 빠졌다. 전쟁 동안 여성들이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경제에 기여했지만, 전후에는 남성들의 일자리 복귀를 위해 여성 노동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은 이전보다 강화되었고, 이는 이후 프랑스 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이어졌다.

군사적으로 프랑스는 전쟁 중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방어 태세를 강화했으며,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방어에 성공했다. 전쟁 후 프랑스는 다시는 독일의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 국경 방어에 집중했고, 이를 위해 1920년대에 마지노선(Maginot Line) 건설을 계획했다. 또한,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의 군사력을 제한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 동맹을 추진했다.

정치적으로 프랑스는 전후 불안정한 정국을 맞이했다. 전쟁 동안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리했지만, 전쟁의 충격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노동운동과 좌파 세력이 강화되었으며, 전후 재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과 경제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었다. 국제적으로는 독일을 약화시키고 프랑스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독일의 배상금 지급을 강하게 요구했으며, 1923년에는 독일이 배상금 지급을 지연하자 루르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강경책은 독일 내 반프랑스 정서를 키우며 장기적으로 프랑스의 안보에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

외교적으로 프랑스는 전후 유럽 질서를 주도하려 했지만, 미국과 영국이 독일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프랑스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미국이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하면서 프랑스는 독일 견제를 위해 영국과 긴밀한 협력을 시도했으나, 영국 역시 점차 독일에 대한 제재 완화를 원하며 프랑스와의 관계에 거리감을 두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동유럽 국가들과 군사 동맹을 강화하며 독일을 견제하려 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내부 정치 불안으로 인해 외교 정책이 흔들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프랑스에 군사적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국가적 재앙을 초래했다. 경제적으로 회복이 더디고,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치적으로 불안정성이 커졌다. 독일의 패배와 배상금 요구를 통해 전후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 내 반발을 키우며 장기적으로 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제공하는 요소가 되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의 주요 강대국이었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국제 무대에서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고, 향후 유럽의 정치와 군사 전략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7.4.4. 독일[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의 발판이 되었다. 독일은 전쟁 초반에는 승리를 거두며 유럽 전역에서 영향력을 확장했지만, 1917년 미국의 참전과 1918년 서부 전선에서의 연합국 반격으로 패배를 맞이했다. 1918년 11월, 독일 제국은 연합국과 휴전에 합의했고, 전쟁이 끝나면서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 체제가 무너지고 혼란이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 독일 제국은 전쟁 패배와 함께 붕괴했다. 1918년 11월 9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으며, 독일은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전쟁 패배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군부와 보수 세력은 전쟁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배후의 칼날(도 stab-in-the-back myth)"이라는 음모론이 확산되며, 전쟁 패배의 책임을 사회민주당과 유대인, 좌파 세력에게 돌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는 이후 극우 세력이 부상하는 기반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독일은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대규모 국채를 발행했고, 전쟁 후 독일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1320억 금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았고, 이는 독일 경제에 더욱 큰 부담이 되었다. 1923년에는 독일 정부가 배상금 지급을 지연하면서 프랑스와 벨기에가 루르 지역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독일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결과, 독일 내에서는 배상금 문제를 둘러싼 불만이 커졌고, 정치적 혼란이 더욱 심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전쟁 패배와 경제 위기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수백만 명의 병사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귀환한 군인들은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여성 참정권을 확대하고 노동자 권리를 강화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지만, 극심한 경제 위기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안정적인 사회 체제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전후 독일 사회에서는 좌우 극단주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폭력과 갈등이 빈번해졌고, 이는 나치당과 같은 극우 정당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군사적으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군사력이 크게 제한되었다. 독일군은 10만 명 이하로 감축되었으며, 전차와 공군 보유가 금지되었고, 해군도 소규모로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 군부는 비밀리에 군사력을 재건할 방법을 모색했고, 이는 나중에 나치 독일의 재무장으로 이어졌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쟁 전술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용된 전격전(Blitzkrieg) 전략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외교적으로 독일은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전쟁 책임을 인정해야 했으며, 이는 독일 국민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또한, 독일은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못했으며, 해외 식민지를 모두 상실했다. 하지만 독일은 점차 국제 외교 무대에서 입지를 회복하려 했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는 로카르노 조약(1925)을 통해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국제 연맹에도 가입(1926)하는 등 외교적 복귀를 시도했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 경제가 다시 붕괴했고, 이는 극단주의 정치 세력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 사회 전반을 뒤흔들었으며,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이 극우 세력의 부상을 촉진했다. 전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사적, 경제적 제한을 받았으나,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으며, 이는 결국 나치 정권의 탄생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1차 대전의 패배는 독일 역사에서 깊은 상처로 남았고, 이후 독일의 정치, 군사, 외교적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7.4.5.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이었으며, 결국 제국의 해체로 이어졌다. 전쟁 이전부터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내부적으로 민족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고,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쟁 초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과 동맹을 맺고 동부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지속적인 패배와 내부 문제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경제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을 감당할 능력이 부족했다. 산업화가 상대적으로 뒤처진 상태였으며, 독일에 비해 군수물자 생산 능력이 낮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식량과 원자재 부족이 심각해졌고, 이는 군대의 사기 저하와 민간인의 불만 증가로 이어졌다. 1916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한 후 후계자인 카를 1세가 전쟁을 끝내려 했으나,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해야 했기에 적극적인 평화 협상을 시도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제국이었기 때문에 내부 분열이 심각했다. 체코, 헝가리, 폴란드, 세르비아,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등 다양한 민족들이 제국 내에서 자치를 요구했으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1918년이 되자 민족주의 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제국 정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군사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 내내 독일에 크게 의존했다.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우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1915년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면서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손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와 12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917년 독일의 지원을 받아 카포레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8년에는 이탈리아군이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격파하며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정치적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 과정에 접어들었다.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헝가리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되었다. 1918년 11월, 카를 1세 황제는 퇴위하지는 않았지만 통치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사실상 제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별도의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으며, 1919년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영토가 대폭 축소되었다.

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후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오스트리아는 소규모 공화국이 되었고, 헝가리는 독립 국가로서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전쟁 이전까지 동유럽과 발칸반도의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제국의 해체로 인해 유럽에서 정치적, 군사적 역할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다민족 국가로서 내부적인 불안을 안고 있던 제국은 전쟁을 통해 민족주의적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결국 전후 독립국들이 탄생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제국 해체의 여파는 20세기 내내 동유럽과 발칸반도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7.4.6. 오스만 제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오스만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이었으며, 결국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19세기부터 점진적으로 약화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병자"로 불릴 정도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중앙 동맹국 측으로 참전했지만, 전쟁의 결과는 제국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전쟁을 치를 능력이 부족했다. 이미 19세기부터 유럽 열강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전쟁을 수행할 만큼 충분한 산업 기반과 물자가 부족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군수 물자와 식량 부족이 심화되었고, 이는 군대의 전투력 저하와 민간인의 극심한 생활고로 이어졌다. 특히, 연합국의 해상 봉쇄와 전쟁으로 인한 교역 단절은 제국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사회적으로는 전쟁 중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다민족 국가였지만, 19세기 이후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면서 내부 분열이 깊어졌다. 특히, 아랍인들은 오스만 지배에 대한 불만이 커졌으며, 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모색했다. 1916년 아랍 반란이 발발하면서 아랍 지역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전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 상실로 이어졌다. 또한, 1915년에는 오스만 정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는 오늘날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평가되고 있다.

군사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여러 전선에서 연합국과 싸웠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1915년 연합국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확보하기 위해 갈리폴리 전역을 전개했을 때, 오스만군은 무스타파 케말(훗날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의 지휘 아래 강력한 저항을 펼쳐 승리했다. 하지만 다른 전선에서는 열세에 놓였다. 1916년 러시아가 캅카스 지역을 점령하면서 동부 전선이 무너졌고, 영국군은 1917년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오스만 제국을 중동에서 몰아냈다. 또한, 1918년에는 메깃도 전투에서 연합군이 오스만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종결을 앞당겼다.

정치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전쟁 동안 독일과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지만,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내부적으로 분열이 심화되었다. 전쟁 중 제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한 것은 청년 튀르크당이었으며, 이들은 독일과의 동맹을 통해 제국의 재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18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무드로스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 이후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포함한 주요 지역을 점령했다.

외교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전쟁 후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붕괴했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고, 중동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분할되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는 영국이 차지했으며, 그리스와 이탈리아도 오스만 영토의 일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내에서는 이러한 조약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무스타파 케말이 주도하는 터키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600년 동안 지속된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와 내부 분열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현대 터키가 대신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는 중동 지역의 현대적 국경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이후 20세기 중동 분쟁의 기초가 되었다.

7.4.7. 일본 제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일본 제국이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확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일본은 전쟁 발발 직후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여 독일의 태평양 및 중국 내 영토를 점령하며 아시아 내 패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전후 국제 질서에서 기대한 만큼의 이익을 얻지 못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일본의 외교 및 군사 정책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적으로 일본은 전쟁 특수를 누리며 급속한 산업 성장을 이루었다. 전쟁으로 인해 유럽 열강이 아시아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지면서 일본은 군수 물자 및 공산품 수출을 크게 확대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 수행에 집중하느라 아시아 시장에서 철수하는 동안 일본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서 경제적 입지를 넓혔다. 일본 경제는 전쟁 기간 동안 호황을 누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산업 기반이 강화되었지만, 전후 경기 침체와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내부적인 갈등이 커지기도 했다.

군사적으로 일본은 전쟁을 통해 현대적 해군력을 강화할 기회를 얻었다. 일본 해군은 영국과 협력하여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독일군을 견제했으며,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를 점령하면서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거점을 확보했다. 또한, 중국 산둥반도의 독일 조차지였던 칭다오를 점령하며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의 군사적 입지를 넓히고, 이후 제국주의적 확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전쟁을 통해 국제 무대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독일로부터 점령한 태평양과 중국 내 영토를 정식으로 인정받았으며, 국제 연맹의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했다. 또한, 일본은 파리 평화 회의에서 인종 평등 조항을 삽입하려 했지만, 미국과 영국 등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서구 열강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일본 내에서 서구 열강에 대한 반감을 키웠고, 이후 자급자족을 위한 제국주의 확장 정책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으로 일본은 전쟁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사회 불안이 증가했다. 대규모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 계층이 성장했지만, 노동 환경은 열악했고, 전후 경제 불황으로 인해 실업률이 증가했다. 또한, 농촌 지역에서는 전쟁 특수 이후 경제적 불안정이 심화되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커졌으며, 이는 1920년대 일본 내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외교적으로 일본은 전후 국제 질서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서구 열강과의 마찰이 점점 심화되었다. 1921~1922년 열린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서는 일본 해군이 미국과 영국보다 적은 비율로 군함을 보유하도록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졌으며, 이는 일본 군부 내에서 서구 열강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924년 미국이 일본인을 대상으로 이민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양국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일본이 국제 무대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서구 열강과의 갈등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경제적, 군사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전후 기대했던 만큼의 외교적 성과를 얻지 못하면서 점차 서구 열강과 대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불만과 군국주의적 확장은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태평양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7.4.8. 한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은 한반도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는 않았지만, 국제 질서의 변화와 일본 제국의 정책에 따라 한국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된 조선은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서 강압적인 통치를 받았으며, 전쟁 후 국제 사회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성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조선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 공급지로 활용되었다. 일본은 전쟁 기간 동안 군수 산업과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수탈했다. 쌀, 금속, 목재 등 주요 자원들이 일본으로 대량 반출되었으며, 특히 1910년대 중반부터 "산미 증식 계획"이 추진되면서 조선의 농민들은 일본으로 쌀을 공급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농업 생산량을 늘려야 했다. 하지만 이는 조선 내 식량 부족을 초래하며,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을 더욱 악화시켰다. 또한,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면서 조선인들은 일본의 공장과 군수산업에 강제로 동원되거나 저임금 노동자로 착취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적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는 점점 강압적으로 변화했다.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 내에서도 총동원 체제가 구축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민족 억압이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은 전쟁을 이유로 사상 통제를 강화했으며, 조선 내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더욱 탄압했다. 신문,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철저히 제한되었으며, 일본어 교육과 일본식 문화 강요가 더욱 강해졌다.

정치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변화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공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의 기회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약 200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비록 일본의 강경한 탄압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으로 이어지며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한반도의 독립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3·1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알리려는 노력이 강화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설립되어 외교 활동을 전개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독립 청원 운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국제 사회는 일본을 전후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동맹국으로 간주했으며, 조선의 독립 문제는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전후 독립운동 방식이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의 의병 활동이 일본군의 탄압으로 약화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무장 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을 조직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무장 독립운동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한반도에 직접적인 전쟁 피해를 주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식민 통치가 강화되고 독립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 수탈이 심화되었고, 사회적으로는 민족 억압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전후 민족 자결주의가 대두되면서 독립운동이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독립운동의 방향성이 변화하였다. 이후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더욱 강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1930년대 이후 더욱 강력한 저항 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8. 제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편집]

8.1. 서부 전선(Western Front) 주요 전투[편집]

8.1.1. 마른 전투 (1914년 9월 6~12일)[편집]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며 파리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연합군의 반격으로 저지당했다. 이 전투 이후 서부 전선은 참호전으로 전환되었으며, 전선이 장기간 고착화되었다.

8.1.2. 이프르 전투 (1914년 10월 ~ 1917년 11월)[편집]

벨기에 이프르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로, 독일군이 처음으로 독가스를 사용했다. 영국과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했지만,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참호전이 더욱 강화되었다.

8.1.3. 베르됭 전투 (1916년 2월 ~ 12월)[편집]

독일군이 프랑스를 소모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지만, 프랑스군이 격렬히 저항하며 전투가 장기화되었다. 양측 사상자가 70만 명 이상 발생했으며,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8.1.4. 솜 전투 (1916년 7월 ~ 11월)[편집]

영국과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전투 첫날 영국군만 6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하며 참혹한 전투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전차(Tank)가 처음으로 전장에 투입되었으며, 현대 기갑전의 시작을 알렸다.

8.1.5. 독일의 춘계 공세 (1918년 3월 ~ 7월)[편집]

독일군이 러시아 전선에서 철수한 병력을 서부 전선에 집중하며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초기에는 성공적으로 진격했으나, 연합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패배하며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8.1.6. 아미앵 전투 (1918년 8월 8~12일)[편집]

연합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으며, 독일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이 전투 이후 독일군은 연이어 후퇴하였고, 결국 휴전에 이르게 되었다.

8.2. 동부 전선(Eastern Front) 주요 전투[편집]

8.2.1. 탄넨베르크 전투 (1914년 8월 26~30일)[편집]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포위 섬멸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러시아군은 이 전투에서 17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이후 동부 프로이센에서의 전투 주도권을 상실했다.

8.2.2.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 (1915년 5월 ~ 9월)[편집]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하고 폴란드를 점령하며 동부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러시아군은 대규모 후퇴를 단행하며 전열을 재정비해야 했다.

8.2.3. 브루실로프 공세 (1916년 6월 ~ 9월)[편집]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엄청난 사상자를 기록하며 전쟁 지속이 어려워졌다.

8.2.4. 리가 전투 (1917년 9월)[편집]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격파하며 동부 전선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내 혁명이 가속화되었으며, 결국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8.3. 발칸 전선(Balkan Front) 주요 전투[편집]

8.3.1. 세르비아 침공 (1914년 ~ 1915년)[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세르비아를 침공했으나 초반에는 패배했다. 이후 독일과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를 점령하며 발칸 전선을 장악했다.

8.3.2. 도이란 전투 (1917년, 1918년)[편집]

영국군과 불가리아군 간의 전투로, 불가리아군이 방어에 성공했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며 발칸반도의 전쟁 양상이 연합국 측으로 기울었다.

8.4. 이탈리아 전선(Italian Front) 주요 전투[편집]

8.4.1. 이손초 전투 (1915년 ~ 1917년, 총 12차례)[편집]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이손초 강을 중심으로 반복적인 교전을 벌였으나, 전략적 성과 없이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8.4.2. 카포레토 전투 (1917년 10월 ~ 11월)[편집]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이탈리아군을 크게 패배시키며 전선을 대폭 밀어붙였다. 이탈리아군이 대규모 후퇴하며 국가적 위기에 빠졌다.

8.5. 중동 전선(Middle Eastern Front) 주요 전투[편집]

8.5.1. 갈리폴리 전역 (1915년 2월 ~ 1916년 1월)[편집]

영국과 프랑스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점령하려 했으나, 오스만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이 전쟁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8.5.2. 예루살렘 전투 (1917년 12월)[편집]

영국군이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중동 전선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8.5.3. 메깃도 전투 (1918년 9월)[편집]

영국군이 오스만군을 대패시키며 중동 전선에서 승기를 잡았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8.6. 서아프리카 및 태평양 전투[편집]

8.6.1. 탕가 전투 (1914년 11월)[편집]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충돌했으며, 독일군이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