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고대 로마[편집]
2.1.1. 로마 제국의 황제[편집]
유럽의 황제 칭호는 천명을 받은 천자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한자문화권 황제 칭호와 달리 로마 공화정의 여러 칭호와 관직을 결합하여 공화정 체제 내에서 합법적인 독재를 구축하려는 일종의 꼼수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초기 정치 체제는 겉으로는 시민의 대표인 프린켑스(Princeps)가 다스리는 공화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주나 다름없는 권력을 갖고 세습까지 가능한 제정이라는 모순을 내포한 이른바 원수정(Principatus) 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는 황제의 제위를 물려받을 자식이 없을 때 전임 황제의 혈통과 무관하지만 유능한 자가 제위를 합법적으로 계승하여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오현제 시대의 전성기를 가능하게 했지만, 역으로 누구나 힘만 있으면 제위에 도전하여 국가를 내전에 빠뜨릴 위험성 역시 내포하고 있었고 그게 극대화되어 제국의 쇠퇴를 불러온 시기가 바로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였다.
3세기 말에 집권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내세운 대책은 바로 동방식 전제군주제의 요소를 도입하고 공화정 시대의 잔재를 대폭 약화시킨 도미나투스(Domintus) 체제였고, 거기에 제국을 네 구역으로 나누고 선임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본인의 3명의 공동 황제와 함께 통치하는 사두정(Tetrarchia)을 가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은 그가 자진 퇴위한 후 혈연 관계가 없는 공동 황제들 간의 내전으로 인해 붕괴되었으나, 내전의 승자인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도미나투스 체제를 통한 황제권 강화의 필요성은 인정했고, 그 과정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비롯한 전임 황제들이 박해했던 기독교를 공인하고 황제에게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교회를 황권 강화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초기 정치 체제는 겉으로는 시민의 대표인 프린켑스(Princeps)가 다스리는 공화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주나 다름없는 권력을 갖고 세습까지 가능한 제정이라는 모순을 내포한 이른바 원수정(Principatus) 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는 황제의 제위를 물려받을 자식이 없을 때 전임 황제의 혈통과 무관하지만 유능한 자가 제위를 합법적으로 계승하여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오현제 시대의 전성기를 가능하게 했지만, 역으로 누구나 힘만 있으면 제위에 도전하여 국가를 내전에 빠뜨릴 위험성 역시 내포하고 있었고 그게 극대화되어 제국의 쇠퇴를 불러온 시기가 바로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였다.
3세기 말에 집권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내세운 대책은 바로 동방식 전제군주제의 요소를 도입하고 공화정 시대의 잔재를 대폭 약화시킨 도미나투스(Domintus) 체제였고, 거기에 제국을 네 구역으로 나누고 선임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본인의 3명의 공동 황제와 함께 통치하는 사두정(Tetrarchia)을 가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은 그가 자진 퇴위한 후 혈연 관계가 없는 공동 황제들 간의 내전으로 인해 붕괴되었으나, 내전의 승자인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도미나투스 체제를 통한 황제권 강화의 필요성은 인정했고, 그 과정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비롯한 전임 황제들이 박해했던 기독교를 공인하고 황제에게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교회를 황권 강화의 수단으로 삼았다.
2.1.2. 번외[편집]
2.1.2.1. 3세기의 자칭 독립 제국들[편집]
로마 제국의 지방 통제력이 흔들리던 3세기의 위기(군인 황제 시대)에는 여러 속주에서 황제를 참칭하는 반란자들이 등장했는데, 이들 대다수는 중앙정부를 직접 전복하려 시도하든, 자신의 근거지에서 황제놀이를 하는데 만족하면서 자립하든 로마 제국이라는 틀 자체를 깨려하지는 않았으나, 일부 군벌들은 아예 로마에서 벗어난 독립 제국을 선포했다.
이렇게 형성된 제국이 바로 갈리아 속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갈리아 제국과 동방 속주들을 장악하며 형성된 팔미라 제국인데, 이들이 장기간 국체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으면 로마가 유일한 황제국이라는 관념이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제국 모두 20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주도한 재정복 전쟁으로 무너지며 단명한 반란정권에 그치고 말았고, 이후 사두정 시대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세워진 브리타니아 제국[1]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로마에 재정복됨으로써 로마 이외의 황제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관념이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제국이 바로 갈리아 속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갈리아 제국과 동방 속주들을 장악하며 형성된 팔미라 제국인데, 이들이 장기간 국체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으면 로마가 유일한 황제국이라는 관념이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제국 모두 20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주도한 재정복 전쟁으로 무너지며 단명한 반란정권에 그치고 말았고, 이후 사두정 시대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세워진 브리타니아 제국[1]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로마에 재정복됨으로써 로마 이외의 황제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관념이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2.1.2.2. 로마와 이란 왕중왕의 관계[편집]
고대 로마 제국과 동시대에 공존했던 다른 문화권의 황제국 가운데 로마와 직접적인 접점이 있었고, 고대 로마인들이 상세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국가는 왕중왕(샤한샤) 칭호를 사용하던 이란계 제국(파르티아&사산조 페르시아)였다.[2]
두 제국은 로마와 파르티아가 처음 충돌한 기원전 1세기부터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하는 기원후 7세기까지 700여년에 걸쳐 중근동 세계의 패권을 겨룬 숙명의 라이벌이었으나, 서로의 황제위에 대한 정통성을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이는 양국 황제 칭호의 기원이 달랐기 때문인데[3], 오늘날에는 로마 황제나 이란 왕중왕이나 둘다 한자어 황제, 영어 Emperor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대인들은 각자 상대국의 지배자가 쓰는 별개의 칭호로 인식했기에, 로마인들이나 이란인들이나 서로의 황제 칭호가 자국 황제 칭호의 정통성과 충돌한다는 의식은 갖지 않았다.
두 제국은 로마와 파르티아가 처음 충돌한 기원전 1세기부터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하는 기원후 7세기까지 700여년에 걸쳐 중근동 세계의 패권을 겨룬 숙명의 라이벌이었으나, 서로의 황제위에 대한 정통성을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이는 양국 황제 칭호의 기원이 달랐기 때문인데[3], 오늘날에는 로마 황제나 이란 왕중왕이나 둘다 한자어 황제, 영어 Emperor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대인들은 각자 상대국의 지배자가 쓰는 별개의 칭호로 인식했기에, 로마인들이나 이란인들이나 서로의 황제 칭호가 자국 황제 칭호의 정통성과 충돌한다는 의식은 갖지 않았다.
2.2. 중세[편집]
2.2.1. 제위 계승의 제1요건: 로마 제국의 정통성[편집]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다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제국의 남은 반쪽인 동로마 제국은 굳건하게 유일한 황제국으로서 존재했고, 서방 국가들도 그 권위를 부정하지 못했기에 좋든 싫든 유럽에서 황제는 곧 로마 황제요, 로마 황제가 아닌 황제는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동로마에 맞서 황제를 칭하려는 이민족 국가들도 좋든 싫든 로마의 정통성을 가져다가 황제를 칭해야만 했고, 처음으로 이를 실행에 옮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800년에 로마인의 황제를 칭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황제를 칭한 이민족 국가들은 국호에 로마를 집어넣거나[4], 로마와 관련된 명칭이 들어간 황제 칭호[5]를 사용했다.
따라서 동로마에 맞서 황제를 칭하려는 이민족 국가들도 좋든 싫든 로마의 정통성을 가져다가 황제를 칭해야만 했고, 처음으로 이를 실행에 옮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800년에 로마인의 황제를 칭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황제를 칭한 이민족 국가들은 국호에 로마를 집어넣거나[4], 로마와 관련된 명칭이 들어간 황제 칭호[5]를 사용했다.
2.2.2. 서방 세계의 부가적 요건: 교회의 인정[편집]
서방 가톨릭 세계에서는 이와 별도로 교회의 인정, 정확히는 교황의 인정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 직접 이어지는 제국이라 굳이 교회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아도 로마 제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동로마 제국과 달리, 서방 가톨릭 세계의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은 태생부터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에게 관을 씌워주며 시작되었기에 교회의 인정이 곧 제국의 존립 그 자체를 보증해주는 필수요소였으며, 신성 로마 황제들은 황제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에도 교황으로부터 대관받기 이전까지는 왕을 칭해야만 했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여러 영방국가의 집합에 불과한 상태가 되어 유명무실해지는 계기가 된 건 가톨릭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개신교가 제국 북부를 휩쓴 16~17세기 종교 개혁이었으니, 말 그대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성과 가톨릭 교회의 인정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고대 로마에서 직접 이어지는 제국이라 굳이 교회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아도 로마 제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동로마 제국과 달리, 서방 가톨릭 세계의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은 태생부터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에게 관을 씌워주며 시작되었기에 교회의 인정이 곧 제국의 존립 그 자체를 보증해주는 필수요소였으며, 신성 로마 황제들은 황제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에도 교황으로부터 대관받기 이전까지는 왕을 칭해야만 했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여러 영방국가의 집합에 불과한 상태가 되어 유명무실해지는 계기가 된 건 가톨릭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개신교가 제국 북부를 휩쓴 16~17세기 종교 개혁이었으니, 말 그대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성과 가톨릭 교회의 인정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2.2.3. 번외[편집]
2.2.3.1. 중세 스페인의 자칭 황제들[편집]
레콩키스타가 진행 중이던 중세 스페인에서는 여러 가톨릭 왕국의 군주들이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칭했으나, 이들은 억지로라도 로마와의 연관성을 찾아서 칭제한 나라들과 달리 로마 제위 계승과 무관하게 칭제한 것이기에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2.2.3.2. 중세 유럽인들과 다른 문화권의 황제[편집]
중세 유럽인들은 위와 같이 제위 계승에 있어서 로마 제국과 연결되는 정통성을 극도로 중시했으나, 이슬람 세계의 칼리파, 유라시아 대초원의 카간(대칸) 등 다른 문화권의 황제급 칭호들에 대해서는 그냥 '아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이는 중세 유럽의 봉건적 관습에서 작위는 토지와 직결되기에 유럽에는 로마 황제만이 존재할 수 있어도 다른 대륙에는 다른 황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이 이란 왕중왕에 대해 가졌던 견해, 즉 '기원이 다른 칭호면 로마 황제와 무관한 별개의 칭호'라는 인식이 더 컸다.
그래서 아예 다른 대륙에 있던 제국들은 물론이고 로마의 속주였던 이베리아 반도에 세워진 코르도바 칼리파국도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에 이교도라고 욕을 먹을 지언정, 로마의 정통성과 연계해서 물고 늘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중세 유럽의 봉건적 관습에서 작위는 토지와 직결되기에 유럽에는 로마 황제만이 존재할 수 있어도 다른 대륙에는 다른 황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이 이란 왕중왕에 대해 가졌던 견해, 즉 '기원이 다른 칭호면 로마 황제와 무관한 별개의 칭호'라는 인식이 더 컸다.
그래서 아예 다른 대륙에 있던 제국들은 물론이고 로마의 속주였던 이베리아 반도에 세워진 코르도바 칼리파국도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에 이교도라고 욕을 먹을 지언정, 로마의 정통성과 연계해서 물고 늘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3. 근세[편집]
2.3.1. 서방: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 황제[편집]
15세기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로 선출된 막시밀리안 1세는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 이전까지는 황제가 아닌 왕을 칭하던 관례를 깨고 선출 직후에 바로 황제를 칭했는데, 본거지인 오스트리아 외에도 저지대(지금의 베네룩스)를 비롯한 여러 영지를 획득하며 기세를 올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에 눌린 교황이 마지못해 이를 인정하여, 교황 집전 대관식 없이도 황제를 칭할 수 있게 되었고, 아예 신성 로마 황제의 공식 칭호가 선출된 로마 황제로 굳어지기까지 했다.
막시밀리안 1세 사후에 선출된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 대관받기는 했으나, 이는 황제로 즉위하고 수십년이 지난 1527년에 교황의 도시 로마를 약탈함으로써 교황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를 확정지은 승리를 자축하는 퍼포먼스였으므로, 이때의 대관식은 오히려 교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만 했다.
카를 5세 이후의 황제들은 위와 같은 형식적인 대관식마저 치르지 않고 선거 직후에 바로 황제가 되었으며, 이는 나폴레옹의 압력에 의해 제국이 해체되는 1806년까지 지속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 사후에 선출된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 대관받기는 했으나, 이는 황제로 즉위하고 수십년이 지난 1527년에 교황의 도시 로마를 약탈함으로써 교황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를 확정지은 승리를 자축하는 퍼포먼스였으므로, 이때의 대관식은 오히려 교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만 했다.
카를 5세 이후의 황제들은 위와 같은 형식적인 대관식마저 치르지 않고 선거 직후에 바로 황제가 되었으며, 이는 나폴레옹의 압력에 의해 제국이 해체되는 1806년까지 지속되었다.
2.3.2. 동방[편집]
2.3.2.1. 오스만 제국의 카이세리 룸[편집]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킴으로써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 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을 칭하고, 동로마의 국교였던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정교도 신민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이와 별도로 오스만 제국의 군주는 페르시아어로 '왕들의 주인'을 뜻하는 중동식 황제 칭호인 파디샤 역시 사용하고, 1517년부터는 이슬람 세계의 수장인 칼리파 칭호 역시 카이로의 아바스 왕조로부터 강탈하여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중근동 이슬람 세계에서는 파디샤이자 칼리파로서,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는 로마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두 거대 종교권에 걸친 제국을 유지했다.
이와 별도로 오스만 제국의 군주는 페르시아어로 '왕들의 주인'을 뜻하는 중동식 황제 칭호인 파디샤 역시 사용하고, 1517년부터는 이슬람 세계의 수장인 칼리파 칭호 역시 카이로의 아바스 왕조로부터 강탈하여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중근동 이슬람 세계에서는 파디샤이자 칼리파로서,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는 로마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두 거대 종교권에 걸친 제국을 유지했다.
2.3.2.2. 전러시아의 황제[편집]
러시아는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마지막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 조이 팔레올로기나(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선포하고 차르를 칭했으며, 이반 4세 시대부터는 공식 국호 역시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루스 차르국으로 갈아치웠다.
루스 차르국은 유럽의 주류 국가들과 이질적인 동방 국가인데다 칭호 역시 유럽의 국제어인 라틴어가 아닌 슬라브어 칭호인 차르고, 국력도 주변국들[6]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수준이라 국제 사회에서 제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개혁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대북방전쟁을 비롯한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연승행진을 이어가면서 열강을 반열에 오르는데 성공했고, 1721년에 기존의 차르 칭호 대신 서구식 칭호인 전러시아의 임페라토르(황제)를 칭하며 명실상부한 황제국이 되었다.
루스 차르국은 유럽의 주류 국가들과 이질적인 동방 국가인데다 칭호 역시 유럽의 국제어인 라틴어가 아닌 슬라브어 칭호인 차르고, 국력도 주변국들[6]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수준이라 국제 사회에서 제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개혁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대북방전쟁을 비롯한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연승행진을 이어가면서 열강을 반열에 오르는데 성공했고, 1721년에 기존의 차르 칭호 대신 서구식 칭호인 전러시아의 임페라토르(황제)를 칭하며 명실상부한 황제국이 되었다.
2.3.3. 번외: 근세 유럽인들과 다른 문화권의 황제[편집]
대항해시대에 접어들어 유럽인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유럽인들이 존재를 인식하는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도 늘어났고, 유럽인들은 그들의 존재 역시 해당 문화권 내에서는 황제급 위상을 가진다고 인정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유럽 기독교 제국들과 대립하던 오스만 제국은 카이세리 룸(로마 황제) 칭호는 인정받지 못해도 이슬람 세계의 황제급 칭호인 파디샤(왕들의 주인)과 칼리파는 인정받았고, 그 라이벌인 이란계 제국[7]의 왕중왕(샤한샤), 그리고 아프리카의 기독교 제국 에티오피아의 왕중왕(느구서 너거스트)와 머나먼 동방의 거대 제국인 명청시대 중국의 천자, 인도 무굴 제국의 파디샤 등도 해당 문화권을 대표하는 황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오늘날 제국이라 불리는 모든 문화권 황제국들이 이러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는데, 대항해시대 초기에 콩키스타도르에게 무너진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은 당대 유럽인들에게는 그냥 힘 좀 쓰는 왕국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유럽 기독교 제국들과 대립하던 오스만 제국은 카이세리 룸(로마 황제) 칭호는 인정받지 못해도 이슬람 세계의 황제급 칭호인 파디샤(왕들의 주인)과 칼리파는 인정받았고, 그 라이벌인 이란계 제국[7]의 왕중왕(샤한샤), 그리고 아프리카의 기독교 제국 에티오피아의 왕중왕(느구서 너거스트)와 머나먼 동방의 거대 제국인 명청시대 중국의 천자, 인도 무굴 제국의 파디샤 등도 해당 문화권을 대표하는 황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오늘날 제국이라 불리는 모든 문화권 황제국들이 이러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는데, 대항해시대 초기에 콩키스타도르에게 무너진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은 당대 유럽인들에게는 그냥 힘 좀 쓰는 왕국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2.4. 근대[편집]
2.4.1. 나폴레옹의 칭제와 19세기의 변화[편집]
1804년 나폴레옹이 교황을 파리로 끌고 와서 프랑스인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유럽의 황제위 계승론에도 변화게 생겼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과 동시대에 공존하는 별개의 가톨릭 제국을 다름아닌 교황이 대관식을 집전하여[8] 인정함으로써 가톨릭 세계에는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한다는 중세적 관념이 붕괴되었고, 신성 로마 황제위를 보유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마저 오스트리아 황제 칭호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물론 나폴레옹도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논리를 내세워 억지로나마 로마 계승을 표방하긴 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 본인이었으니 로마 제국 계승론에 입각한 황제위 계승 논리가 완전히 부정된 건 아니었지만, 이전에 비하면 칭제에 필요한 명분과 대내외적 여건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리고 1871년에 이르러선 로마 계승과 무관해보였던 개신교 국가 프로이센 왕국마저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며 이와 같은 칭제 릴레이에 동참했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과 동시대에 공존하는 별개의 가톨릭 제국을 다름아닌 교황이 대관식을 집전하여[8] 인정함으로써 가톨릭 세계에는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한다는 중세적 관념이 붕괴되었고, 신성 로마 황제위를 보유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마저 오스트리아 황제 칭호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물론 나폴레옹도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논리를 내세워 억지로나마 로마 계승을 표방하긴 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 본인이었으니 로마 제국 계승론에 입각한 황제위 계승 논리가 완전히 부정된 건 아니었지만, 이전에 비하면 칭제에 필요한 명분과 대내외적 여건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리고 1871년에 이르러선 로마 계승과 무관해보였던 개신교 국가 프로이센 왕국마저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며 이와 같은 칭제 릴레이에 동참했다.
2.4.2. 다른 문화권을 이용한 편법 칭제[편집]
19~20세기에는 기존의 유럽 황제국들과 달리 자국 본토에서는 계속 왕을 칭하면서도 다른 문화권의 황제 칭호를 겸임하는 동군연합을 통해 황제가 되는 신박한 편법마저 등장했는데, 이는 다른 문화권에는 로마 황제가 아닌 황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이 있기에 가능했디.
우선 영국은 1857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시키며 자신들이 없애버렸던 '인도 황제' 칭호를 20여년만인 1876년에 부활시키는 꼼수를 두며 영국령 인도 제국을 수립했고, 이탈리아 왕국은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하여 에티오피아 왕중왕(황제) 칭호를 강탈하여 황제를 칭했다.[9]
한편 아메리카에서는 유럽 식민제국에서 독립한 신생국들이 유럽식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아이티 제국[10][11], 멕시코 제국[12][13], 브라질 제국[14] 등이 수립되었는데, 이들은 신대륙에 위치했던만큼 로마 계승과는 아예 무관했고 기존의 현지 제국을 계승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런 칭호도 없는 빈 땅에 새로운 황제 칭호를 창조해내는 것도 칭호와 영지가 직결된다는 관점에 따르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우선 영국은 1857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시키며 자신들이 없애버렸던 '인도 황제' 칭호를 20여년만인 1876년에 부활시키는 꼼수를 두며 영국령 인도 제국을 수립했고, 이탈리아 왕국은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하여 에티오피아 왕중왕(황제) 칭호를 강탈하여 황제를 칭했다.[9]
한편 아메리카에서는 유럽 식민제국에서 독립한 신생국들이 유럽식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아이티 제국[10][11], 멕시코 제국[12][13], 브라질 제국[14] 등이 수립되었는데, 이들은 신대륙에 위치했던만큼 로마 계승과는 아예 무관했고 기존의 현지 제국을 계승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런 칭호도 없는 빈 땅에 새로운 황제 칭호를 창조해내는 것도 칭호와 영지가 직결된다는 관점에 따르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2.4.3. 20세기: 황제국의 종말[편집]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로마 계승을 주장하며 황제를 칭한 제국들을 모조리 집어삼키며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렸다.
우선 러시아 제국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가장 먼저 붕괴되었고, 1918년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황제가 퇴위하고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폐지되었으며, 그나마 오스만 제국이 패전 이후에도 제정을 유지하며 버텼으나 연합국에게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실권을 장악한 전쟁영웅 무스타파 케말이 1922년에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키며 유럽에서 로마 계승을 표방하며 칭제한 국가들은 모두 멸망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1936년부터 1941년까지 겸임하던 에티오피아 황제위를 영국에게 패하여 토해내고, 그 영국도 1947년 인도의 독립을 승인하며 인도 황제위 겸임을 포기함으로써, 동군연합이라는 편법으로나마 제위를 유지하던 나라들마저 사라지고 유럽에는 더이상 황제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선 러시아 제국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가장 먼저 붕괴되었고, 1918년에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황제가 퇴위하고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폐지되었으며, 그나마 오스만 제국이 패전 이후에도 제정을 유지하며 버텼으나 연합국에게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실권을 장악한 전쟁영웅 무스타파 케말이 1922년에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키며 유럽에서 로마 계승을 표방하며 칭제한 국가들은 모두 멸망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1936년부터 1941년까지 겸임하던 에티오피아 황제위를 영국에게 패하여 토해내고, 그 영국도 1947년 인도의 독립을 승인하며 인도 황제위 겸임을 포기함으로써, 동군연합이라는 편법으로나마 제위를 유지하던 나라들마저 사라지고 유럽에는 더이상 황제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3. 유럽 문화권의 황제국 및 칭호 목록[편집]
- 3세기 로마 제국의 지방정권[15]
- 갈리아 제국: 갈리아 황제
- 팔미라 제국: 팔미라 황제
- 브리타니아 제국: 브리타니아 황제
- 서로마 계승 주장 국가
- 동로마 계승 주장 국가
- 기타
- 중세 스페인: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 아이티 제국: 아이티 황제
- 아이티 제1제국(1804 ~1806)
- 아이티 제2제국(1849 ~ 1859)
- 멕시코 제국: 멕시코 황제
- 멕시코 제1제국(1821 ~ 1823)
- 멕시코 제2제국(1864 ~ 1867)
- 브라질 제국(1822 ~ 1889): 브라질 황제
4. 관련 문서[편집]
[1] 갈리아계 로마인 군벌 카라우시우스가 건국했다.[2] 중국 대륙이나 인도 아대륙의 황제국들은 제한적인 교류를 통한 단편적인 정보만을 얻을 수 있었고, 비교적 로마와 교류가 활발했던 악숨(에티오피아)는 아직 왕중왕(느구서 너거스트)가 아닌 왕(느구스)를 칭하는 왕국이었다.[3] 로마 황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로마 공화정의 여러 칭호와 관직을 결합하면서 형성되었고, 이란의 왕중왕은 아시리아의 군주가 일반적인 왕(샤르)보다 높은 왕중왕(샤르 샤라니)를 칭한 것에서 유래했다.[4] 신성 로마 제국, 로마니아 제국(라틴 제국).[5]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차르,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차르 등[6] 오스만,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등[7] 사파비 왕조, 아프샤르 왕조, 카자르 왕조 등[8] 단, 나폴레옹은 교황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제관을 머리에 썼다.[9] 로마 제국의 본토였던 이탈리아 반도를 보유한 왕국이 직접 로마 황제를 칭하지 않고 다른 문화권의 황제 칭호를 가져다 쓴 게 아이러니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강제로 합병하며 통일을 달성해서 장기간 교황청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여 가톨릭 세계의 전통에 따라 교황의 인정을 받은 제국을 세우기 어려웠다. 1929년에는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을 독립시키며 교황과 화해하긴 했지만, 특정 국가의 군주에게 초국가적 교단인 가톨릭의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치러주는 행위는 이미 전근대적 보편제국 관념이 힘을 잃고 내셔널리즘이 세계 각국에 확산된 20세기 국제사회의 정세에선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다.[10] 근대 아메리카에서 미국 다음으로 독립을 달성했으며,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를 칭하자 아이티 독립군 지도자 장 자크 데살린은 자국이 프랑스와 대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황제 자크 1세로 즉위하며 아이티 제1제국을 수립했다.[11] 아이티 제2제국은 대통령이었던 포스탱 엘리 술루크가 황제 포스탱 1세로 즉위하여 다스렸다.[12] 독립군 지도자였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황제 아구스틴 1세를 칭하며 멕시코 제1제국을 수립했다.[13] 멕시코 제2제국은 프랑스 제2제국의 괴뢰국이었다.[14] 제국을 선포한 주체가 포르투갈 왕세자 페드루였지만, 브라질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그는 본국에 반기를 들고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으며, 부왕 주앙 6세의 포르투갈 왕위를 일시적으로 승계하기도 했으나 딸 마리아 2세에게 포르투갈 왕위를 넘겨서 포르투갈 왕국과 브라질 제국의 동군연합은 오래가지 않았다.[15] 모두 로마계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아닌 독자적인 제국을 선포했다가 진압당했다.[16]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17] 오토 대제의 대관식[18] 백일천하[19]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메흐메트 2세의 칭제.[20] 러시아 혁명[21]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여제 즉위. 영국 정부의 인도 직할 통치 자체는 1857년에 이미 시작되었다.[22] 인도 독립법 제정 및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23]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일부였다.[24] 이탈리아 왕국군이 에티오피아에서 축출된 이후 원래 주인인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가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