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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Succession of the Roman Empire.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한 국가 및 그에 관련된 사상과 이론들을 다루는 문서.

관련 이론 중에서는 '제3의 로마'가 가장 유명해서 그냥 로마 계승 주장이면 싹다 제3의 로마로 묶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나무위키의 제3의 로마 문서와 그에 영향을 받은 역덕 커뮤니티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오해로, 실제로는 서로마, 동로마를 분열 이전의 로마와 연속된 실체로 파악하고 제2의 로마를 선포하거나, 아예 자국이 로마 제국 그 자체라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2. 로마 황제위 계승 주장[편집]

2.1. 서로마 황제위 계승 주장[편집]

2.1.1. 동로마 제국[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동로마 제국/정체성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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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서기 395년에 동서로 분리된 이후,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을 정통 로마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인식했다. 이는 단순한 주장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적·문화적·법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한 자각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인들의 제국(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Basileia tōn Rhōmaiōn)"이라 칭했으며, 황제는 "로마인의 황제(Βασιλεὺς τῶν Ῥωμαίων, Basileus tōn Rhōmaiōn)"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은 단순히 로마의 영향을 받은 국가가 아니라, 스스로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서방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가리켜 "비잔티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붙인 명칭일 뿐, 동로마 제국 스스로는 결코 자신들을 로마 제국과 분리된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로마(Νέα Ῥώμη, Nea Rhōmē)"로 불렸다.

특히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서부 히스파니아 지역을 재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라틴어를 공용어로 유지하고, 로마 법전을 집대성하여 제국의 법적 연속성을 강화했다. 이러한 노력은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로마의 전통을 이어가는 국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완전히 전환되면서 서방 세계와의 문화적 간극이 심화되었다. 또한 9세기 말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하면서 서유럽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로마 계승권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도 스스로를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제국의 계승권은 자신들에게만 속해 있었다. 서방에서 등장한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가질 수 없으며, 이는 단순한 군사적·정치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동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이는 13세기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오스만 제국조차도 동로마의 황제 칭호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로마의 유산을 인정했다.

이는 동로마인 스스로의 입장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시각으로도 마찬가지였는데, 발칸 반도 및 동유럽 일대의 슬라브 국가들과, 중근동의 이슬람 국가들, 튀르크계 유목민 국가들은 카롤루스의 칭제와 상관 없이 계속 동로마를 로마라 불렀으며, 카롤루스와 그가 세운 서방 제국 출신들은 프랑크인이라 부르며 구별했다.

또한 카롤루스의 칭제 이후의 서방인들도 동로마가 로마임을 완전히 부정하진 않아서, 4차 십자군이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로마니아 제국[1], 로마 제국의 3/8의 주인[2] 등을 칭하는 사례가 나타났으며, 15세기 서방 국가들을 순방한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를 위해 이탈리아인들이 그를 '로마인의 황제이자 왕'으로 표현한 주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연속성을 유지한 유일한 국가였으며, 이를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법과 제도를 통해 실질적으로 유지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끝날 때까지 변함없는 신념이었으며, 제국의 존재 자체가 로마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3]

2.1.2. 카롤루스 제국 ~ 신성 로마 제국[편집]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여제 이리니가 즉위한 이후 적법한 남성 로마 황제가 없다는 이유로 교황에게 대관받아 로마 황제를 칭했다.

이민족 군주인 그가 황제를 칭한 것을 당대의 로마인들이 쉽사리 인정할리가 없었기에, 그는 이리니 여제와의 결혼을 통해 진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려 핬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봉기가 일어나 여제가 축출되고 니키포로스 1세가 즉위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롤루스는 니키포로스 왕조 하의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다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로서 즉위한 미하일 1세 랑가베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 서방의 황제 칭호는 인정받되 로마 황제로는 인정받지 않는 형태로 타협을 맺었다.

이로써 카롤루스의 제국은 황제국이되 로마 제국은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존속하게 되었고, 이는 카롤루스 왕조 단절 이후 오토 대제에 의해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을 중심으로 재편된 962년 이후의 서방 제국에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오토 대제의 아들인 오토 2세는 동로마 마케도니아 왕조의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의 딸 테오파노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오토 3세가 제위를 계승함으로써 동로마 황제의 외손인 황제가 등장했고, 이후의 여러 황제들도 동로마 황실과 통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황제들은 신성 로마 황제들의 정통성까진 인정하지 않아서 서방 황제들이 외교 문서에서 로마 황제를 칭하는 것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했다.

동로마를 비롯한 동방 정교회 세계나 다른 문화권의 입장과는 별개로, 교황의 수위권이 미치는 서방 가톨릭 세계 내에서만큼은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 제국으로서의 권위가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받아들여진 편인데, 신성 로마 제위가 장기간 공석이던 대공위시대에는 제국의 주축인 독일 지방과 멀리 떨어진 잉글랜드, 카스티야 등의 군주 및 귀족들이 신성 로마 제위를 노리기도 했고, 16세기에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에 맞서 황제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에는 더이상 자신들보다 정통성이 앞서는 동로마가 남아있지 않으니 유일한 로마 제국이라 자처하는데 더더욱 거리낌이 없어졌는데, 동로마 제위 계승을 표방한 오스만 제국, 루스 차르국(이후의 러시아 제국) 등은 신성 로마 제국 스스로는 물론이고 서방 세계의 다른 국가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신성 로마 제국은 동방 정교회권이나 타 문화권의 입장과는 관계 없이, 서방 가톨릭 세계에서만큼은 지속적으로 로마 제국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해나갔으며, 이는 30년 전쟁으로 제국이 수많은 영방국가들의 집합에 불과한 상태로 전락한 이후에도 명분상으로는 지속되었다.
2.1.2.1. 프랑스 제국[편집]
1804년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카롤루스 대제와 위그 카페를 거쳐 자신에게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교황을 파리로 끌고 와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황제로 즉위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들이 다스린 신성 로마 제국이 아직 멸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위그 카페의 후손인 부르봉 왕조를 혁명으로 축출한 나라의 집권자가 이러한 주장을 펴는 것은 심각한 논리적 하자가 있었으나, 당시 제위를 보유하고 있던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당대 강대국들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르고 황제 선출권을 가지는 선제후 구성을 자기 입맛대로 바꿀만큼 절정에 달했던 나폴레옹의 무력 앞에서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듬해인 1805년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맹군을 격파하며, 기존에 로마 제위 계승을 주장하던 두 제국으로부터 완승을 거두었으며, 1806년에는 공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신성 로마 황제였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4]는 자신의 딸 마리 루이즈를 반강제로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내야 했고, 그렇게 태어난 나폴레옹 2세는 로마 왕(Roi de Rome)으로 책봉되었다.

러시아 원정을 비롯한 일련의 실책으로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고 1815년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된 이후에는, 부르봉 왕가의 복고 왕정과 7월 왕정, 제2공화국 등을 거치고 1852년에 이르러서야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이 들어섰는데, 제2제국은 제1제국보다도 2배 이상 긴 시간을 존속했으나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로 멸망하며, 프랑스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1.2.2. 오스트리아 제국 ~ 이중제국[편집]
나폴레옹이 선제후 구성을 입맛대로 바뀌고, 1804년에는 황제를 칭하기까지 하자,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를 나폴레옹이나 그 꼭두각시에게 빼앗기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그리고 나폴레옹의 막강한 군사적 위협에 직면한 여러 합스부르크 영지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할 필요가 생겼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칭제한 바로 그 해에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신성 로마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2개의 제위를 겸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내부와 외부의 합스부르크의 영지들을 통합하며 창설되었기에,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두 제국에 동시에 속하는 영지가 여럿 존재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 달리 오직 합스부르크 혈통을 통해 정통성을 보장받는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비록 직접적으로 로마를 계승했다 표방하진 않았지만, 쌍두수리 등 신성 로마 시절부터 쓰던 문장을 비롯한 각종 상징을 계속 사용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창설된 독일 연방에서는 이러한 위상을 인정받아 의장국 역할을 했다.

1866년 보불전쟁 패전으로 독일 연방에서 축출된 이후에는 1867년 대타협을 통해 헝가리인들과 공동의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중제국)을 출범했는데, 이는 새로운 칭호를 창설한 게 아니라 헝가리 왕국을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동군연합 체제로 인정한 것이라, 황제로서의 칭호는 1918년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 오스트리아 황제였다.
2.1.2.3. 독일 제국[편집]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의 계승을 표방하며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것은 로마의 계승을 직접 표방한다기보다는, 독일 지역의 통일국가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 것에 가까웠으며, 무엇보다도 신성 로마 제위를 세습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통일이라는 점,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가톨릭 제국이 아닌 개신교 국가였다는 점에서 하자가 있었다.

2.2. 동로마 황제위 계승 주장[편집]

2.2.1. 불가리아 제국[편집]

불가리아 제국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7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존속한 불가리아 제1제국과, 12세기 말부터 14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불가리아 제2제국이다. 이 두 시기는 각각 다른 정치적·군사적 상황 속에서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맺었으며, 동로마 황제위 계승과 관련한 입장 또한 차이를 보였다.
2.2.1.1. 불가리아 제1제국[편집]
제1차 불가리아 제국(681~1025)의 차르 시메온 1세는 동로마 황제위를 가장 적극적으로 요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불가리아 제국의 군사적·문화적 위상을 확립하는 한편, 동로마 제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나아가 스스로 로마 황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군사적 침략과 외교적 전략을 병행하였으며, 동로마 황실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합법적인 정통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도 했다.

시메온 1세는 어린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으며 그리스 문화를 익혔고, 동로마 황실의 정치 구조와 외교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불가리아가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대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통치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는 군사적으로도 매우 능력 있는 지도자로, 동로마 제국과의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불가리아 제국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917년 불가로피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시메온 1세는 자신의 승리를 정치적으로도 활용했다. 그는 기존의 불가리아 군주가 사용했던 "칸" 또는 "왕"이라는 칭호를 뛰어넘어 자신을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불가리아가 더 이상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가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서 독자적인 황제권을 주장하는 국가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메온은 동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황제 권위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불가리아의 위상을 강화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동로마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들은 이러한 시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의 강성함을 위협으로 여겼으며, 시메온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점령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견제하는 데 주력했다. 결국 시메온은 수도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의 야심은 실현되지 못한 채 927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시메온의 후계자인 페타르 1세(재위 927~969)는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조정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협정을 맺고, 동로마 황실과 혼인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불가리아 군주의 지위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불가리아 군주는 제한적이나마 동로마 황제의 승인 아래 황제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동로마 제국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불가리아 황제가 동로마 황제와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11세기 초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불가리아가 동로마 제국에 완전히 병합되면서, 불가리아 제1제국의 황제위 계승론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바실리오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은 1018년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이를 제국의 일부로 통합하였다.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불가리아 지역은 동로마의 지배 아래 놓였으며, 불가리아의 독립적인 황제위는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불가리아는 동로마의 행정 체제 속에 편입되었고,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감독 아래 놓이게 되었다.[5]

시메온 1세의 야망은 실현되지 못했으나, 그의 통치는 불가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이후 불가리아의 독립성과 국가적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비록 불가리아가 동로마 황제위를 온전히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노력은 불가리아 제국이 단순한 변방 국가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경쟁하는 강국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2.1.2. 불가리아 제2제국[편집]
불가리아 제2제국(1185~1396)의 군주들은 이전 시기와는 달리 직접적인 군사적 정복보다는 외교적·정치적 수단을 통해 동로마 황제위와 관련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초창기를 이끈 아센 왕조의 군주들은 자신들을 독립적인 불가리아 황제로 선언하면서도,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특히 칼로얀(재위 1197~1207)은 동로마 제국과 서방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로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협력하여 불가리아 정교회의 독립을 인정받았고, 동시에 서방 세계로부터 불가리아 황제의 권위를 승인받았다. 이는 동로마 황제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3세기 이후 불가리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의 혼인 동맹을 활용하여 황실 내부의 분쟁에 개입하려 했다. 14세기에는 불가리아의 일부 군주들이 동로마 제국의 계승 문제에 영향을 미치며 동로마 황제들과 연합하거나 경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몽골 제국오스만 제국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불가리아의 동로마 황제위 계승론은 점점 약화되었고, 14세기 후반에는 자체적인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결국 불가리아 제2제국은 14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고, 동로마 제국 역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불가리아와 동로마의 황제위 경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불가리아 제1제국은 주로 군사적 정복과 직접적인 황제위 주장을 통해 동로마 황제와 경쟁하였다. 특히 시메온 1세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정통성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동로마 제국의 승리로 불가리아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반면, 불가리아 제2제국은 보다 외교적·정치적 수단을 활용하여 동로마 제국과 경쟁하였으며, 동로마 황제위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려 했다. 그러나 몽골과 오스만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전략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불가리아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약화되었다.

이처럼 두 시기의 불가리아 제국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동로마 황제위 계승과 관련된 야망을 드러냈으나, 결국 불가리아 군주들이 동로마 황제위를 차지하는 일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6]

2.2.2. 라틴 제국[편집]

라틴 제국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후,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차지하면서 수립된 국가로,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이는 서유럽 봉건 제후들과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세워진 정권으로, 기존 동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와 정치적 전통을 온전히 계승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라틴 제국의 황제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배권을 근거로 자신들이 로마 황제의 정통 후계자임을 주장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승인 아래 이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동로마 제국의 법적·문화적 전통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오랜 세월 동안 정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황제권은 교회를 수호하고 관료제를 통해 제국을 다스리는 전통적 방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라틴 제국은 서유럽의 봉건 제도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와의 유대를 강화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정교회를 신봉하는 동로마 제국의 귀족들과 주민들 사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라틴 제국의 정착을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의 귀족과 지식인 계층은 라틴 제국을 서유럽 십자군이 강압적으로 세운 불법적인 정권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동로마 제국의 주요 귀족과 지도층은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같은 후계 국가들이 형성되었으며, 이 중 니케아 제국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니케아 제국은 정교회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한편, 라틴 제국의 지배를 부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면서 종결되었다. 니케아 황제 미하일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였고, 라틴 제국은 붕괴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전통이 라틴 제국의 지배보다 더 강력하게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결국 라틴 제국은 동로마 황제위를 계승하려 했으나, 기존의 행정 체계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으며, 정교회를 따르는 주민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단명한 국가로 남게 되었다.

2.2.3. 세르비아 제국[편집]

파일:Car_Dušan,_Manastir_Lesnovo,_XIV_vek,_Makedonija.jpg
스테판 두샨의 어진
로마 제국의 계승 문제는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더욱 복잡해졌고, 주변의 여러 강대국들이 자신을 로마의 정통 후계자로 내세우는 상황이 벌어졌다. 특히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세르비아 제국은 동로마 황제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유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스테판 두샨의 통치 아래 세르비아 제국은 단순한 지역 강국이 아닌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서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세르비아는 본래 동로마 제국과 신하 관계를 유지하며 자치권을 인정받는 형태로 존재했으나, 13세기 후반부터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4세기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이 잇따른 내전과 외세의 압박으로 크게 약화되면서, 세르비아의 세력 확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 이후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의 내전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졌으며, 이는 세르비아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와 신흥 강국인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스테판 두샨은 1346년 세르비아 수도 스코페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단순한 왕국이 아닌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명확한 동로마 계승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 칭호를 사용한다고 해서 단순히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었고, 두샨은 동로마 황제가 가진 종교적 권위를 차지하기 위해 세르비아 정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는 강수를 두었다. 기존 동로마 황제가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로서 권위를 행사한 것처럼, 세르비아 총대주교가 자신을 정통 황제로 인정하도록 만들면서 황제의 종교적 권위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세르비아 제국이 동로마 황제로서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걸림돌이 되었다.

스테판 두샨은 단순히 칭호를 선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공하여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이피로스 등을 차지하며 실질적으로 동로마의 중요한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몇 가지 현실적인 장애물에 부딪혔다. 첫째,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일시적인 동맹을 고려했지만, 오스만 세력은 점점 강대해지면서 결국 세르비아 제국을 위협하는 존재로 변해갔다. 둘째, 세르비아 제국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독립성이 강했고, 중앙집권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제국의 통일성이 부족했다. 셋째, 1355년 스테판 두샨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원대한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두샨 사후 그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세르비아 제국은 급속도로 분열되었다. 지방의 귀족들은 점차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중앙 정부와의 연계를 약화시켰고, 제국은 강한 통합력을 유지하지 못한 채 무너져갔다. 결국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대는 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였고, 이는 세르비아 제국이 붕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세르비아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나, 이후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으며 결국 1453년 멸망하고 말았다.

세르비아 제국이 동로마 황위를 계승하려 했던 시도는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실패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점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지 못한 점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황제 칭호를 선언하고, 정교회의 독립을 통해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며, 군사적 확장을 통해 동로마의 영토를 차지하려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동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세르비아 제국의 계승론은 일시적인 정치적 야망에 그쳤으며, 역사적으로도 실질적인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동로마의 붕괴와 함께 세르비아 역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스테판 두샨의 위대한 야망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2.4. 오스만 제국[편집]

오스만 투르크의 로마 제국 계승론은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힌 개념이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로 규정한 데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입장은 단순한 정복자의 선언이 아니라, 여러 역사적 전통과 정통성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구축된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근거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함으로써 로마의 중심지를 장악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일한 제국의 수도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의 술탄들은 이를 바탕으로 로마 황제의 후계자로 자처했다.

둘째,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행정적 체계를 상당 부분 계승하였다. 로마 관료제와 법 체계의 일부가 오스만 행정 체제에 흡수되었으며, 정복 후에도 로마 귀족 및 관리들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는 오스만이 단순히 정복자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받았음을 의미한다.

셋째,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자신들이 단순한 이슬람 군주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황제로서 군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메흐메트 2세는 "카이사르 이 루미"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자신이 로마 황제의 후계자임을 공언하였다. 이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기존의 이슬람권에서 사용되던 칼리파나 술탄과는 다른 세계제국의 지도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넷째, 오스만 제국은 다민족과 다종교적 사회를 포괄하는 제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로마의 전통을 계승했다. 로마 제국은 정복한 지역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하며 융합을 통해 발전했으며, 오스만 역시 밀레트 제도를 통해 각 종교 공동체에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유사한 통치 방식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로마 계승론은 서유럽에서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오스만이 이슬람 국가라는 점에서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또한 동방 정교회권에서도 오스만의 통치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들을 로마의 정통 후계자로 보는 것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론은 단순한 명분 이상의 의미를 지닌 전략적 이념이었다. 이는 제국의 통합을 도모하고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아우르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였으며, 오스만의 황제권을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세계 양쪽에서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2.2.5. 러시아 제국[편집]

러시아 제국의 로마 제국 계승론은 오스만 제국과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자신들이 정통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주장한 개념이었다. 이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으로 체계화되었으며, 정치적·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 계승론의 배경에는 정교회의 전통, 황제 권위의 계승, 그리고 로마적 통치 이념의 연속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로마의 계승을 주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투르크의 손에 넘어가면서, 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동방 기독교 세계에서 동로마의 전통을 계승할 새로운 중심지가 필요해졌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정교회의 신앙을 유지하고 동로마의 정신적 유산을 보존할 유일한 국가라고 주장하며, 제3의 로마 이론을 발전시켰다. 특히 1472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동로마 황실의 마지막 공주였던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와 결혼한 것은 계승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는 동로마 황실의 혈통이 러시아 대공국으로 이어졌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며, 러시아 군주의 황제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러시아의 로마 계승론은 종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정당성을 확보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에 의해 정복된 이후,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옮겨졌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는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 전통을 계승했으며, 이는 러시아가 종교적 차원에서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는 중요한 논리였다. 1510년대에 필로페이라는 수도사가 “두 개의 로마는 멸망했고, 세 번째 로마는 모스크바이며, 네 번째 로마는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모스크바가 기독교 문명의 최후의 보루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은 러시아의 국가 정체성과 황제 권위를 신성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군주들은 동로마 황제의 권위를 계승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황제적 상징과 의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이반 3세와 그 후계자들은 동로마 황실의 상징과 의례를 받아들였으며, 이반 4세(이반 뇌제)는 1547년 러시아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차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자신이 로마 황제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차르는 황제적 권위와 정교회의 신성성을 결합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동로마의 전제 군주제와 유사한 구조를 형성했다. 로마 황제가 신의 대리자로서 통치했던 개념을 계승하면서, 차르의 권위는 종교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로마 계승론은 단순한 이론적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동로마를 재건하려는 정치적·군사적 시도로 이어졌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녀는 그리스 지역을 오스만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자신의 손자 콘스탄틴에게 동로마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그리스 계획(Greek Plan)이라고 하며, 러시아가 단순히 동로마의 계승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복과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1768년부터 1774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며 이 계획을 현실화하려 했고, 1774년의 퀴츽카이나르지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 내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확보하면서 동로마 부활의 기반을 닦았다. 비록 러시아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예카테리나 2세의 정책은 이후 러시아의 팽창주의와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제국의 로마 계승론은 서유럽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로 간주되었으며, 러시아의 주장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한 오스만 제국 역시 자신들을 로마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동방에서의 패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오스만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경쟁 관계에 놓였다. 서방 세계는 러시아의 로마 계승론을 정통성이 부족한 주장으로 보았으며, 러시아가 유럽의 정치 질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것은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였다. 그는 서유럽식 군주 체제를 도입하면서도 차르의 황제적 권위를 유지하여, 로마 계승론을 러시아식 절대군주제와 결합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로마 계승론은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군주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정치적·종교적 이념이었다. 이를 통해 러시아는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동로마 제국의 정신적·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유럽과 오스만 제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러시아 내부에서도 시대가 변하면서 계승론의 실질적 의미는 점차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의 로마 사상은 러시아의 국가 정체성과 자부심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으며, 예카테리나 2세의 동로마 재건 계획과 같은 실질적인 시도로 이어지면서 러시아의 대외 정책과 제국적 야망에 깊이 영향을 주었다.

3. 근대적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로마 계승 의식[편집]

3.1. 이탈리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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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문명의 발상지였던 이탈리아는 476년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서로마 제국)[7] 상실 이후에는 더이상 제국의 중심부가 아니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의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에 다시 수복되었다가 분열된 이후에는 로마가 아닌 독자 정체성을 내세우는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했으나[8], 로마에 대한 향수 자체는 계속 남아있었다.

예를 들면 중세 초기 교황령에서는 고대 로마 시절의 공식 국호였던 'Senatus Populusque Romanus(로마 원로원과 인민)'의 약자인 SPQR이 도시 로마를 상징하는 문장과 교황청 발행 주화에 반영되었고, 12세기 교황령에서 코무네(Comune) 정권을 수립한 콜라 디 리엔초는 로마 공화정의 관직인 호민관을 자칭했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로마 문화의 부흥을 추구하는 르네상스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문화적 계승에 그치지 않는, 근대적인 Nation 정체성에 입각한, 본격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이탈리아의 로마 계승 주장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친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대표하는 혁명가 중 하나였던 주세페 마치니는 '황제들의 로마 이후에 교황들의 로마가 있었고, 이후에는 인민들의 로마가 올 것이다'라 주장하며 로마 공화국 시절처럼 이탈리아가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공화국이 아닌 입헌군주제로의 통일을 추구한 사르데냐 왕국과 그 후신인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 마치니처럼 직설적으로 로마 계승을 외치진 않았고, 황제를 칭한 것도 아니었으나[9], 통일 이후 적극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며 로마에 버금가는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마치니의 구호를 자기 입맛에 맏게 변형한 '황제들의 로마 이후에 교황들의 로마가 있었고, 이후에는 파시스트 로마가 올 것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이를 제3의 로마(Terza Roma)라 명명했으며, 위에서 언급한 SPQR을 각종 시설물에 써먹었는데 이 과정에서 도로 뚫는답시고 로마 시대 문화재를 때려부수고(...), 2차 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했다가 깨지는 흑역사를 쓰기도 했다.

오늘날의 이탈리아 공화국은 자국이 로마의 직접적인 후신이라 주장하거나 로마의 역사를 자국이 독점한다는 배타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지만, 상당수 이탈리아인들이[10] 로마는 이탈리아의 민족 정체성이자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3.2. 그리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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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리스고대 그리스 문명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유산을 자신들의 정체성 중심에 두고 있다. 동로마 제국은 원래 고대 로마 제국의 동부 행정구역이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천년 이상 존속하며 스스로를 ‘로마인의 나라’라 자처하였다. 제국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을 아테네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고, 언어는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전환되었으며, 정교회 신앙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명 체계를 형성하였다.

현대 그리스는 동로마 제국을 단순히 역사상의 제국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로 간주한다.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그리스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으로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도 정교회를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특히 교회의 전례, 언어, 제도 등은 동로마 제국의 체계를 이어받았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그리스 정교회의 중심적 전통으로 존속하고 있다.

1832년 그리스 왕국이 건국된 이후, 이러한 역사적 계승 의식은 더욱 뚜렷해졌다. 새로 탄생한 국가는 고대 그리스뿐 아니라 동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자의식을 내세우며, 메갈리 이데아라는 민족적 이상을 발전시켰다. 메갈리 이데아는 그리스인들이 과거 동로마 제국의 옛 영토,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회복하고 통합하길 바라는 역사적·민족적 목표였다. 이 이념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그리스 외교와 군사 정책을 이끌었으며, 현실 정치에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계승 의식은 상징적인 사건들 속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 1868년, 왕자 한 명이 태어났을 때, 많은 시민들은 그 이름이 ‘콘스탄티노스’로 정해지길 열망하며 이를 연호하였다. 이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끝까지 지킨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민속적 기억과 연결된다. 그리스 민간 전승에는 ‘한 명의 콘스탄티노스가 잃은 제국은, 또 다른 콘스탄티노스가 되찾는다’는 예언이 오랫동안 전해졌고, 이에 따라 왕자의 이름이 정해졌을 때 이를 제국 부흥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이들이 많았다. 이후 그는 콘스탄티노스 1세로 즉위하게 되었고, 국민들은 그를 통해 과거의 영광이 되살아나길 기대하였다.

실제로 그의 통치 시기에는 메갈리 이데아가 절정에 이르렀으며, 소아시아 원정과 이즈미르 점령 등 동로마 옛 영토 회복을 위한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비록 이러한 시도는 스미르나 전투 이후의 패배로 무산되었으나,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과,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라는 그리스인의 집단 기억은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현대 그리스는 로마 제국의 직접적 법적 계승을 주장하지 않지만, 동로마 제국을 매개로 로마 제국의 언어, 종교, 문화, 정신을 이어받은 문명적 후손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계승 의식은 단지 과거의 유산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그리스인의 정체성과 역사적 자부심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3.3. 루마니아와 몰도바[편집]

루마니아는 국호에서부터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별명이었던 로마니아에서 따온 국호인 '로므니아'를 사용하며 로마 계승을 강하게 표방하는 나라다.

이러한 국호는 중세 왈라키아 공국 시절부터 이미 공식적으로 루마니아국을 칭하며 사용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가 독립한 이후 몰다비아 공국(몰도바 공국)[11]과 통합하여 루마니아 연합공국을 결성한 후, 루마니아 왕국을 거쳐 현대 루마니아까지 이어졌으며, 루마니아 국가의 가사에도 트라야누스 황제가 언급되는 등 로마 계승 의식이 나타난다.

한편 오늘날의 몰도바 공화국메 해당되는 몰다비아 공국의 동부 지역은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의 통일 이전에 러시아 제국으로 할양되어 통일 루마니아에 합류하지 못했는데, 1차 대전 이후의 전간기에 루마니아 왕국령이 된 적도 있으나, 2차 대전 말기에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냉전 독립하는 과정을 거치며 루마니아와 별개의 나라로 존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역사를 거치면서 현대 몰도바의 정치 지형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추구하는 '통일주의자'와 통일에 반대하는 '몰도바주의자'들의 대립 구도가 되었는데, 전자는 루마니아와 같은 로마 계승 의식이 있으나 후자는 루마니아 정체성 반대의 연장성 상에서 로마 계승 역시 거부하고 있다.

4. 여담[편집]

4.1. 바티칸(교황청)[편집]

교황청은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계승을 내세우지 않으며, 태생적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가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가톨릭 성직자와 일부 평신도로 구성되었기에 민족적 차원에서의 로마 계승도 표방하지 않지만, 로마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교황청,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톨릭 교회 자체를 비유하는 단어로 널리 쓰였는데, 교황정의 공식 명칭 역시 라틴어Curia Romana(쿠리아 로마나)다.

또한 국가 바티칸이 도시 로마에서 분리된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행정적 분리일 뿐,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로마 교구 소속이며, 교황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직함도 로마의 주교다.

이외에도 교황청에 남아있는 로마적 전통으로는 교황이 공개석상에서 라틴어로 행하는 강론을 가리키는 문구인 'Urbi et Orbi[12]'가 있는데, 이는 고대 로마에서 다른 설명 없이 그냥 도시(Urbs)라 하면 로마 시를 의미하고, 로마 제국을 세계 그 자체로 여기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4.2. 유럽 연합[편집]

유럽 연합은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유럽 국가의 대부분을 통합했다는 점에서 종종 현대판 로마로 비유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연합은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독립국들이 집합이기에 진정한 통합에는 한계가 있었고, 최근에는 유로존 위기와, 브렉시트, 극우 정당들의 약진 등을 거치며 결속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라 초창기만큼 진지하게 로마와의 연관성을 찾는 시도는 줄어들었다.

4.3. 미국[편집]

미합중국은 로마 제국 시절에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던 신대륙에 세워진 신생국이라 로마 계승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로마 공화국정치 제도로마 제국의 여러 상징들을 모방했다.

우선 미국의 흰머리수리 국장부터 고대 로마의 검수리(아퀼라) 문장을 모방하였으며, 미국의 상원(Senate)는 로마 원로원(Senatus Romanus)에서 이름을 따왔다.

또한 현대 미국이 전세계에 행사하는 패권을 로마의 전성기를 일컫는 표현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따온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 부르며, 미국 대통령을 한국에서 천조국 황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로마 황제에 빗대는 경우도 종종 있다.

4.4. 한국 인터넷상의 로마 계승 밈[편집]

여담으로 대한민국이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주장은 인터넷 밈화되어 주장되고 있는데, 이 밈에서는 대한민국과 로마 제국의 유사점을 다양한 요소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로마 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은 대한 해협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와 대한민국의 군부 정권을 비교하기도 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 중 하나가 교황청이었다는 점에서 로마와의 기독교적 연결고리를 강조한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의 발달된 도로망을 로마의 도로 체계와 비교하거나, 북한의 군사 경제 구조를 로마의 둔전병(테마) 제도와 유사하다고 사거나, 더 나아가 한반도의 분단이 서로마와 동로마의 분열과 닮았다는 점[13], 북한 김씨 일가의 통치 방식이 법적으로 은 아니지만 사실상 왕이라는 점에서 로마 황제의 사실상 세습과 비슷하다는 점도 밈화 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대한민국이 ‘제4의 로마’ 혹은 ‘로마의 후예’라는 밈이 형성되었으며, 로마 관련 떡밥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5. 관련 문서[편집]

[1] 라틴 제국이 자칭한 국호.[2] 베네치아 공화국[3]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 후 동로마는 서로마의 제위 또한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속한다고 여겼고, 그 증거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토 수복 전쟁이 있다.[4] 나폴레옹이 황제를 칭한 바로 그 해에 신성 로마 제위와 별도로 오스트리아 황제위를 창설한 상태였다.[5] 그러나 총대주교 임명 등 불가리아 정교회에 대한 실권은 모두 황제에게 있었다.[6] 어떻게 보면 불가리아 제국이야 말로 그나마 진정항 의미의 동로마 제위에 가장 가까웠으나 그 조차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7] 당대에는 서로마와 동로마가 서로 다른 제국으로서 존재한 것이 아닌 하나의 로마 제국을 두 황제가 나눠서 통치한 것으로 인식되었다.[8] 이탈리아 남부 일대는 1071년까지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긴 했다.[9] 이탈리아 왕국은 1861년 건국 당시에는 도시 로마를 보유하지 않았고, 1870년에는 교황령을 강제 병합하며 로마를 손에 넣는데는 성공했으나 나폴레옹처럼 다른 유럽 국가들을 무시하고 교황을 압박하여 황제 대관식을 치를만한 힘은 없었다. 또한 입헌군주제라 칭호 격상 및 국호 변경을 군주의 입맛대로 결정할 수 없었고, 교황청과의 관계 역시 극도로 험악했다. 그나마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 이후에는 일당독재 구축 및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통한 교황과의 화해가 이루어져서 작정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황제로 올리고자 했으면 못 할 건 없었으나, 그 역시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10] 모든 이탈리아인이 아닌 이유는 일부 지역에서는 통일 이탈리아 정체성을 거부하고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11] 몰다비아(몰도바)는 강 이름에서 따온 국호인데 해당 국호의 사용도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당시 양국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통일국가의 이름으로 로마 계승을 드러내는 루마니아가 더 적합하다고 받아들여졌다.[12] 도시와 세계에[13] 개판 오분전이었던 서로마와 북한, 굉장히 부유하고 강력했던 동로마와 남한으로 보면 납득이 된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북한과 남한이 각각 공식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상이한 체제를 택한 반면, 서로마와 동로마는 같은 국호와 체제를 공유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14] 러시아 측은 황제위 계승의 차원에서, 이탈리아 측은 내셔널리즘의 차원에서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