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신학적 기원: 군주에 대한 기름부음(도유식)[편집]
2.2. 동로마 황제의 대관식[편집]
로마 제국 초기 원수정(Principatus) 시대의 황제들은 공화정 시대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제정을 운용했기에 별도의 의례 없이 바로 즉위를 선포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한 의식을 치르더라도 필수적인 절차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와 사두정 시대를 거치며 전제정이 형성된 4세기 무렵에는 기독교의 공인[2]과 국교화[3]가 이루어졌으나, 이 당시에도 황위 계승에 기독교적 의례가 도입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황위 계승 의례로서 도입된 것은 게르만 부족사회의 전통이었다.
게르만족은 자신들의 족장을 추대할 때 전사들이 신임 족장을 방패 위에 앉히고 들어올리는 의례를 수행했는데, 고대 후기 로마군에 유입된 게르만 혈통의 군인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이 거병하여 황제 즉위를 선포할 때 충성 맹세의 차원에서 이를 시행했고[4], 나중에는 아예 공식적인 황제 즉위 절차로서 자리잡기까지 했다.
교회가 황위 계승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른바 '대관식이라는 절차가 등장한 계기는 기독교가 국교화되고도 수십년이 지난, 457년 레오 1세의 대관식이었다.
레오 1세는 기존 황실인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혈연관계가 없어서 정통성이 취약한데다 실권자 아스파르[5]의 허수아비로서 옹립되어 권력 기반도 딱히 없었는데,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권위가 아예 없으면 곤란하다 판단한 아스파르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대관식이 개최되었다.
레오 1세의 대관식은 방패 위에 올라가 군인들의 충성 서약을 받는 기존의 게르만식 즉위 의례를 따르면서도, 단독이 아닌 세계 총대주교와 함께 올라가 총대주교로부터 관을 받았으니 이것이 바로 대관식의 시초였다.
이후 레오 1세가 아스파르를 숙청하고 실권을 확보한 후 세습까지 성공하면서, 대관식은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닌 동로마 황제의 종교적 정통성을 보장하는 정식 계승 절차로 자리잡았고, 이는 방패 즉위를 비롯한 고대 즉위 의례가 소멸한 이후에도 살아남아 고도로 정교화되고 제국 말기까지 이어졌다.
다만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1449년 즉위할 때부터 1453년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는데, 일단 그의 재위 기간은 오스만 술탄국의 위협으로 인해 대관식이라는 성대한 예식을 치를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건 물론이고, 서방 가톨릭 교회와의 재통합 문제로 제국의 국교인 정교회가 심각한 내홍을 앓고 있었던데다 황제 본인 역시 교회와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와 사두정 시대를 거치며 전제정이 형성된 4세기 무렵에는 기독교의 공인[2]과 국교화[3]가 이루어졌으나, 이 당시에도 황위 계승에 기독교적 의례가 도입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황위 계승 의례로서 도입된 것은 게르만 부족사회의 전통이었다.
게르만족은 자신들의 족장을 추대할 때 전사들이 신임 족장을 방패 위에 앉히고 들어올리는 의례를 수행했는데, 고대 후기 로마군에 유입된 게르만 혈통의 군인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이 거병하여 황제 즉위를 선포할 때 충성 맹세의 차원에서 이를 시행했고[4], 나중에는 아예 공식적인 황제 즉위 절차로서 자리잡기까지 했다.
교회가 황위 계승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른바 '대관식이라는 절차가 등장한 계기는 기독교가 국교화되고도 수십년이 지난, 457년 레오 1세의 대관식이었다.
레오 1세는 기존 황실인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혈연관계가 없어서 정통성이 취약한데다 실권자 아스파르[5]의 허수아비로서 옹립되어 권력 기반도 딱히 없었는데,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권위가 아예 없으면 곤란하다 판단한 아스파르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대관식이 개최되었다.
레오 1세의 대관식은 방패 위에 올라가 군인들의 충성 서약을 받는 기존의 게르만식 즉위 의례를 따르면서도, 단독이 아닌 세계 총대주교와 함께 올라가 총대주교로부터 관을 받았으니 이것이 바로 대관식의 시초였다.
이후 레오 1세가 아스파르를 숙청하고 실권을 확보한 후 세습까지 성공하면서, 대관식은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닌 동로마 황제의 종교적 정통성을 보장하는 정식 계승 절차로 자리잡았고, 이는 방패 즉위를 비롯한 고대 즉위 의례가 소멸한 이후에도 살아남아 고도로 정교화되고 제국 말기까지 이어졌다.
다만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1449년 즉위할 때부터 1453년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는데, 일단 그의 재위 기간은 오스만 술탄국의 위협으로 인해 대관식이라는 성대한 예식을 치를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건 물론이고, 서방 가톨릭 교회와의 재통합 문제로 제국의 국교인 정교회가 심각한 내홍을 앓고 있었던데다 황제 본인 역시 교회와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기독교 세계 각국으로의 전파[편집]
2.3.1. 유럽[편집]
2.3.1.1. 중세 유럽의 대관식[편집]
2.3.1.2. 근세 절대왕정 시대의 대관식[편집]
2.3.1.3.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편집]
2.3.1.4. 19세기 이후 유럽의 대관식[편집]
2.3.2. 비유럽 기독교 국가[편집]
2.3.2.1. 에티오피아 황제 대관식[편집]
2.3.2.2. 기타[편집]
2.4. 비(非)기독교권의 대관식 도입[편집]
2.4.1. 팔라비 2세의 황제 대관식[편집]
3. 대관식 집전 성직자[편집]
4. 대관식 관련 레갈리아[편집]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물인 레갈리아 가운데 일부는 주로 대관식에서만 사용되어, 대관식의 신성한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데 쓰였다.
- 왕관
-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황제관
- 중세 이탈리아 왕국: 랑고바르드의 철관(롬바르디아 철관)[9]
- 영국: 성 에드워드 왕관
- 헝가리: 성 이슈트반 왕관
- 옥좌
- 프랑크 왕국: 다고베르의 옥좌
- 영국: 스콘의 돌
5. 현재 대관식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군주국[편집]
- 통가
[1] 해당 용어 자체는 군주가 아닌 일반 신도를 축복하거나 병마를 이겨내기 위해 기름을 붙누 의식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2] 313년 메디올라눔 칙령(밀라노 칙령).[3]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4] 다만 이러한 방식으로 즉위한 황제 본인들은 게르만족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로마인 혈통을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5] 게르만계 및 이란계 알란족 혼혈 군인으로, 정통파 기독교인이 아닌 아리우스파 신자였기에 교회의 반발을 고려하여 자신이 직접 즉위하지 않고 정통파 기독교인 황제를 추대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유지했다.[6] 개신교 중에서도 성공회와 일부 루터 교회는 주교제를 유지하고 있다.[7] 헨리 8세의 잉글랜드 종교 개혁 이전까지는 가톨릭 소속이었다.[8] 교황 대관 미사에 쓰이다가 폐지되어 지금은 더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현대 교황들은 대관 미사보다 간소한 즉위 미사만을 치른다.[9]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단 한 번도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기에 해당 왕관이 통일 이후에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