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国有鉄道 Japanese National Railways / 일본국유철도 | |
정식 명칭 | 일본국유철도 |
종류 | 특수법인 (국유철도) |
운행 지역 | 일본 전역 |
본사 소재지 | |
약칭 | JNR[2], 일본국철, 국철(国鉄, こくてつ) |
업종 | 육운업 |
전신 | 철도총국 (鐵道總局)[3] |
후신 | |
창립년일 | 1949년 6월 1일 |
해산년일 | 일본국유철도 1987년 4월 1일 국철청산사업단 1998년 10월 22일 |
1. 개요[편집]
일본의 국유철도를 운영하던 운수성[4] 산하 공기업으로[5], 현재 JR그룹의 전신이다.
본사는 도쿄도 치요다구 마루노우치에 위치했으며[6], 2차대전 이전 철도성(鐵道省) 시절부터 사용된 유서깊은 빌딩이었다. JR그룹이 발족할때 JR 동일본이 한동안 이곳에 본사를 두기도 했다. 해당 빌딩은 1997년 JR 동일본이 요요기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마루노우치 오아조 빌딩이 들어서 있다.
국철 보유 선로의 연장은 JR 설립 직전 기준으로 신칸센과 재래선을 모두 합쳐 19,639km에 달했으며, 그와 동시에 총 연장 132km의 선박 노선[7]과 총 연장 11,739km에 달하는 버스 사업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금도 각지에 국철이 운영하던 철도병원이 남아 있으며, 대한민국 철도청이 한국철도대학을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하게, 국철도 중앙철도학원이라는 자체 교육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철도학원은 민영화와 함께 폐지하고 부채 상환을 위해 부지를 재개발했다.
한국의 철도 환경 자체가 일본국유철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온 만큼 한국 철도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대한항공-일본항공의 관계와 매우 닮았다. 사소한 것 같지만 지금도 무궁화호에서 볼 수 있는 호차 표시 플라스틱 판자같은 것도 일본국유철도의 영향이다. 차량 측면에서도 관광호, 초저항은 말할 것도 없고[8] 1990년대 이전의 무궁화호 차량이나 CDC 디젤동차의 내장에서 일본 동차의 영향을 강하게 볼 수 있다. 다만 암트랙 객차와 닮게 만들어진 새마을호 차량이나[9] 프랑스 SNCF의 영향이 강한 KTX[10]과 같이 일부 차량이 그 예외가 된다.
직원수는 1980년대 초반까지 40만명에 달했으나 사업 합리화 정책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청산직전에는 27만 7천명까지 줄어들었고 이중 20만 1천명이 JR그룹으로 승계됐다.
본사는 도쿄도 치요다구 마루노우치에 위치했으며[6], 2차대전 이전 철도성(鐵道省) 시절부터 사용된 유서깊은 빌딩이었다. JR그룹이 발족할때 JR 동일본이 한동안 이곳에 본사를 두기도 했다. 해당 빌딩은 1997년 JR 동일본이 요요기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마루노우치 오아조 빌딩이 들어서 있다.
국철 보유 선로의 연장은 JR 설립 직전 기준으로 신칸센과 재래선을 모두 합쳐 19,639km에 달했으며, 그와 동시에 총 연장 132km의 선박 노선[7]과 총 연장 11,739km에 달하는 버스 사업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금도 각지에 국철이 운영하던 철도병원이 남아 있으며, 대한민국 철도청이 한국철도대학을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하게, 국철도 중앙철도학원이라는 자체 교육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철도학원은 민영화와 함께 폐지하고 부채 상환을 위해 부지를 재개발했다.
한국의 철도 환경 자체가 일본국유철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온 만큼 한국 철도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대한항공-일본항공의 관계와 매우 닮았다. 사소한 것 같지만 지금도 무궁화호에서 볼 수 있는 호차 표시 플라스틱 판자같은 것도 일본국유철도의 영향이다. 차량 측면에서도 관광호, 초저항은 말할 것도 없고[8] 1990년대 이전의 무궁화호 차량이나 CDC 디젤동차의 내장에서 일본 동차의 영향을 강하게 볼 수 있다. 다만 암트랙 객차와 닮게 만들어진 새마을호 차량이나[9] 프랑스 SNCF의 영향이 강한 KTX[10]과 같이 일부 차량이 그 예외가 된다.
직원수는 1980년대 초반까지 40만명에 달했으나 사업 합리화 정책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청산직전에는 27만 7천명까지 줄어들었고 이중 20만 1천명이 JR그룹으로 승계됐다.
2. 역사[편집]
인계서[11]일본국유철도는, 쇼와 24년 일본국유철도법의 시행에 의해, 국책사업으로써 철도사업을 인계하여, 이후 나라의 기간적 수송기관으로써 우리 나라의 수송의 근간을 맡아, 국가의 발전, 국민생활의 향상에 큰 공헌을 해 왔다. 그러나, 최근 우리 나라의 수송구조의 변화, 경제정세의 진전에 의해, 철도수송은 그 독점성을 상실하고, 경영현황의 악화 일변도를 걸어, 파국적 상황에 빠져 있다.
(중략)
일본국유철도는, 민영분할에 따른 철도사업의 재생이야말로, 철도를 미래지향적으로 유지, 발전시키는 유일의 방도라고 확신하여, 국가와 한 마음으로, 또한 임직원이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쳐, 역사적 대개혁에 임해, 마침내 이 어려운 사업을 완수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중략)
쇼와 62년 3월 31일 24시 0분 현재
국철 전 노선에 사고 발생 보고 없음. 일본국유철도는, 모든 열차 운행을 무사고로 확실히 각사에 인계하고, 여기에서 철도 사업의 역할을 마친다.
쇼와 62년 3월 31일
일본국유철도
(후략)
- 1987년 3월 31일, 국철이 JR 각 사에 업무를 이관하면서 국철 총재 스기우라 타카야 외 4인[12] 명의로 쓴 인계서 중 일부 내용에서.
- 문맥에 맞게끔 일부 의역한 부분이 있음.
인계서 전문(일어주의)
1949년에 운수성 철도 총국을 공기업화하면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이후 파괴된 철도의 복구가 계속되었으나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막대한 인건비로 인해 철도 총국의 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한편 GHQ에서는 철도 총국, 전매사업 등의 공기업화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근거법인 일본국유철도법이 1948년 제정되었다. 국철이 설립된 것은 1949년 6월 1일이다.
1964년에는 도카이도 신칸센, 1975년에는 산요 신칸센 전구간을 개통하는 등 승객과 화물을 쓸어담으며 리즈 시절을 누렸다. 하지만 동시에 점점 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정치권에서 도호쿠 신칸센, 조에츠 신칸센, 세이칸 터널, 세토 대교 등 새 철도노선 건설 요구가 잇따르면서 건설에 막대한 투자비를 쏟아부어야한데 반해서 기존 JR의 돈줄인 지방노선들의 수요는 이촌향도와 자가용 보급 및 고속도로 개통, 항공교통 대중화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다나카 가쿠에이의 일본열도개조론에 따라 지방토건 사업이 잇따라 벌어지자 지방선 건설은 크게 늘어났고, 결국 적자를 메꾸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요금인상도 수시로 단행해서 국유회사임에도 사철에 비해 요금이 싸지도 않았다 즉, 신칸센이나 도쿄권, 간사이권, 나고야권 등 대도시권에서는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지만 이걸 무리한 신규노선 확충과 지방노선 운영 및 수요감소로 죄다 까먹었다는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파업도 잦았고, 적자인데다가 서비스도 좋지 않다는 식의 이미지도 박혀서, 국민들 신뢰도도 바닥을 쳤다.[13]
국철도 자체적으로 적자를 개선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통신 사업이다. 일본전신전화공사 민영화와 함께 통신산업 자유화가 이루어지자, 자체 인프라를 활용해 광섬유망을 부설해서 통신 산업에 진출하고자 한 것. 그래서 미쓰이, 스미토모, 미쓰비시와 손을 잡고 계열사로 일본텔레콤주식회사를 설립, 신칸센 노선을 따라 광섬유망을 부설하여 통신 인프라를 구축할 준비를 하다가 민영화 크리를 맞는다.[14]
1964년에는 도카이도 신칸센, 1975년에는 산요 신칸센 전구간을 개통하는 등 승객과 화물을 쓸어담으며 리즈 시절을 누렸다. 하지만 동시에 점점 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정치권에서 도호쿠 신칸센, 조에츠 신칸센, 세이칸 터널, 세토 대교 등 새 철도노선 건설 요구가 잇따르면서 건설에 막대한 투자비를 쏟아부어야한데 반해서 기존 JR의 돈줄인 지방노선들의 수요는 이촌향도와 자가용 보급 및 고속도로 개통, 항공교통 대중화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다나카 가쿠에이의 일본열도개조론에 따라 지방토건 사업이 잇따라 벌어지자 지방선 건설은 크게 늘어났고, 결국 적자를 메꾸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요금인상도 수시로 단행해서 국유회사임에도 사철에 비해 요금이 싸지도 않았다 즉, 신칸센이나 도쿄권, 간사이권, 나고야권 등 대도시권에서는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지만 이걸 무리한 신규노선 확충과 지방노선 운영 및 수요감소로 죄다 까먹었다는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파업도 잦았고, 적자인데다가 서비스도 좋지 않다는 식의 이미지도 박혀서, 국민들 신뢰도도 바닥을 쳤다.[13]
국철도 자체적으로 적자를 개선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통신 사업이다. 일본전신전화공사 민영화와 함께 통신산업 자유화가 이루어지자, 자체 인프라를 활용해 광섬유망을 부설해서 통신 산업에 진출하고자 한 것. 그래서 미쓰이, 스미토모, 미쓰비시와 손을 잡고 계열사로 일본텔레콤주식회사를 설립, 신칸센 노선을 따라 광섬유망을 부설하여 통신 인프라를 구축할 준비를 하다가 민영화 크리를 맞는다.[14]
3. 분할 민영화[편집]
4. 청산사업단[편집]
일본 국철은 모든 사업을 JR에 넘긴 후에도 일본국유철도청산사업단(JNRSC)란 이름으로 1998년까지 존속했다. 법인상 '국철'의 완전한 소멸은 1987년이 아닌 1998년이라 볼 수 있다. 해산 이후 일본철도건설공단[16]에 흡수되었으며, 2003년 다시 '운수시설정비사업단'과 통합하여 최종적으로 '독립행정법인 철도 건설 · 운수 시설 정비 지원기구(JRTT)가 되었다.
5. 민영화에 대한 평가[편집]
5.1. 긍정[편집]
현재까지 국철 민영화는 일본 내외에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JR 7사의 경영이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1985년에 국철은 1조엔 이상의 적자를 냈는데, 이나마 일본 정부가 6,000억엔의 보조금을 투입한 것이 이 정도다. 이러한 국철 말기의 난국은 JR 7사 성립 이후 2005년 5,000억엔 이상의 흑자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JR 홋카이도와 JR 시코쿠, JR 화물을 빼면 모두 민간 기업으로서 정상적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운임 인상을 반복했던 국철과 달리 JR 성립 이후에는 거의 운임 인상이 없었다는 점[17], 민영화 과정에서 노조를 강경하게 탄압하는 대신 직원들의 임금 수준과 복리후생을 크게 개선하여 파업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 JR 성립 이후 철도 서비스 전반의 질적 향상이 있었다는 점도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분할민영화로 인해 각 지역에 알맞는 경영전략이 수립되었다는 점도 분할민영화를 좋게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간사이, 나고야권 지역은 과거 국철 체제에서는 도쿄 수도권에만 관심을 쏟았던 영향으로 신차 도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서비스 질이 낮았지만 민영화 이후 각각 간사이권과 나고야권이 중심인 JR 서일본과 JR 도카이가 구형 차량을 물갈이하고 사철 대비 양호한 인프라를 살려 속달 보통열차를 도입하는 등 지역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 편리성을 높이고 수익성을 개선한 바 있다.
민영화를 통해 정치권의 무분별한 새 철도노선 건설 요구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도 민영화를 고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정부의 의견에 복종해야 하고 정치권 및 정치권과 결탁한 지역 여론의 눈치도 봐야 하는 국철과 달리 민간 기업인 JR은 정부와 정치권의 눈치를 훨씬 적게 본다. 이에 따라 수익성이 나지 않는 노선은 아예 설치 자체를 거부하여 건설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노선의 설계/건설 및 운영 과정에서 지역 여론이나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한 운임 인상을 반복했던 국철과 달리 JR 성립 이후에는 거의 운임 인상이 없었다는 점[17], 민영화 과정에서 노조를 강경하게 탄압하는 대신 직원들의 임금 수준과 복리후생을 크게 개선하여 파업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 JR 성립 이후 철도 서비스 전반의 질적 향상이 있었다는 점도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분할민영화로 인해 각 지역에 알맞는 경영전략이 수립되었다는 점도 분할민영화를 좋게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간사이, 나고야권 지역은 과거 국철 체제에서는 도쿄 수도권에만 관심을 쏟았던 영향으로 신차 도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서비스 질이 낮았지만 민영화 이후 각각 간사이권과 나고야권이 중심인 JR 서일본과 JR 도카이가 구형 차량을 물갈이하고 사철 대비 양호한 인프라를 살려 속달 보통열차를 도입하는 등 지역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 편리성을 높이고 수익성을 개선한 바 있다.
민영화를 통해 정치권의 무분별한 새 철도노선 건설 요구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도 민영화를 고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정부의 의견에 복종해야 하고 정치권 및 정치권과 결탁한 지역 여론의 눈치도 봐야 하는 국철과 달리 민간 기업인 JR은 정부와 정치권의 눈치를 훨씬 적게 본다. 이에 따라 수익성이 나지 않는 노선은 아예 설치 자체를 거부하여 건설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노선의 설계/건설 및 운영 과정에서 지역 여론이나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5.2. 비판[편집]
한편, 일부 철도 동호인 및 국철 노조원 등 일각에서 일본의 국철 민영화는 너무나 성급하게 시행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실패한 민영화라고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런 주장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이런 주장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5.2.1. JR 그룹 내 경영 격차[편집]
일반적으로 혼슈3사로 불리는 JR 동일본, JR 도카이, JR 서일본은 각각 토호쿠 신칸센, 도카이도 신칸센, 산요 신칸센과 관내 대도시권인 수도권, 주쿄권, 긴키권, 센다이권, 히로시마권의 거대 네트워크를 독점적으로 보유하여 큰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혼슈 3사는 빠르게 경영기반 확립에 성공하였고, JR 동일본이 2002년, JR 서일본이 2004년, JR 도카이가 2006년에 주식을 모두 민간에 매각해 민영화를 완료했다. 2016년에는 이에 더해 JR 큐슈가 후쿠오카권의 대도시 네트워크를 통한 수입과 큐슈 신칸센의 성공, 관광열차 운행 등으로 경영 개선을 달성해 2016년에 주식 매각을 완료하여 완전 민영화되었다.
하지만 JR 시코쿠와 JR 홋카이도의 경우 지역 인구가 너무 적고 자연재해로 인한 복구비용이 커 다수의 적자 노선을 떠안은 탓에 지금도 흑자를 보지 못하고, 국가의 지원으로 버티고 있다. JR 화물은 자체적인 구조조정과 기술 혁신 그리고 일본 운수물류업의 트렌드 변화로 최근에 흑자로 전환했으나, 그 이전까지의 누적 적자가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이걸 해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JR 시코쿠와 JR 홋카이도의 경우 지역 인구가 너무 적고 자연재해로 인한 복구비용이 커 다수의 적자 노선을 떠안은 탓에 지금도 흑자를 보지 못하고, 국가의 지원으로 버티고 있다. JR 화물은 자체적인 구조조정과 기술 혁신 그리고 일본 운수물류업의 트렌드 변화로 최근에 흑자로 전환했으나, 그 이전까지의 누적 적자가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이걸 해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5.2.2. 노선망 위축[편집]
국철 시기에는 노선망 확충이 적극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국철이 철도를 놓기 위해 사들인 토지가 다수 있었다. 이 토지 중 철도가 놓이지 않았던 토지는 분할민영화와 동시에 및 철도 계획이 취소 되면서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에서 떠안아 처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장래에 철도가 들어섬으로써 발생하는 신규 수요 또한 그대로 공중에 날아가게 되었다.
또한 국철 시대에 그럭저럭 열차가 굴러다니면서 최소한의 수요가 있었던 노선들이 '적자'라는 이유로 하나 둘 폐선되어, 국철 시대보다 철도망이 위축되었다. 당시 민영화를 추진하던 정부는 민영화된 JR그룹이 대도시 지역의 수익과 부대사업 수익으로 이윤을 얻어 적자 노선을 유지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민영화된 JR그룹은 적자 노선의 시설 개선에 게을러지거나, 아예 적자 노선을 폐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확실한 흑자 노선 없이 모든 노선이 적자인 JR 홋카이도는 정부 및 홋카이도청과 협의해 2010년대부터 적자 노선을 폐선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일찍 흑자를 본 JR 동일본과 JR 도카이, JR 서일본은 대도시 지역과 신칸센의 수익으로 적자 노선을 지탱해왔으나 2020년대 코로나19를 맞아 철도사업이 적자를 보자 마찬가지로 적자 노선을 폐선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폐선했다고 해서 끝은 아니고 보통 대행버스로 전환하기는 하나 소요시간 증가 등의 문제로 지역의 반발이 크다. 아울러 이런 폐선조치는 주요 간선의 바이패스 역할이 큰 보조간선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즉, 수익성에 집증하다 국가적 수송망으로써의 철도의 가치를 떨어뜨릴 위험이 크다.
신칸센이 들어서고 남는 병행재래선의 제3섹터 분리도 민영화 이후 JR의 적자를 줄이기 위한 대책인데, 정비신칸센에 한해 제3섹터 분리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적자 메우기에도 급급한 JR 각 회사들은 정비신칸센 노선도 아직 건설 중인 곳이 많아 사실상 JR시대에 지어지는 모든 신칸센 노선에 적용되고 있다. 이 경우는 선로가 사라지지는 않아 화물열차와 보통열차 운행은 지속되지만 운영주체가 영세 회사로 바뀌는 만큼 주요 간선이 로컬선만큼 소홀히 관리되며 적자 보전을 위해 운임도 JR보다 비싸진다. 이 문제는 정비신칸센법의 지자체 비용부담 원칙과 더불어 신칸센이 건설될 때마다 연선의 신칸센 무정차 지역들이 건설에 크게 반발하는 원인이 되며, 결국 니시큐슈 신칸센에서 이 문제가 건설과정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이로 인해 민영화가 오지 지역 주민들의 교통 접근권을 크게 침해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또한 국철 시대에 그럭저럭 열차가 굴러다니면서 최소한의 수요가 있었던 노선들이 '적자'라는 이유로 하나 둘 폐선되어, 국철 시대보다 철도망이 위축되었다. 당시 민영화를 추진하던 정부는 민영화된 JR그룹이 대도시 지역의 수익과 부대사업 수익으로 이윤을 얻어 적자 노선을 유지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민영화된 JR그룹은 적자 노선의 시설 개선에 게을러지거나, 아예 적자 노선을 폐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확실한 흑자 노선 없이 모든 노선이 적자인 JR 홋카이도는 정부 및 홋카이도청과 협의해 2010년대부터 적자 노선을 폐선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일찍 흑자를 본 JR 동일본과 JR 도카이, JR 서일본은 대도시 지역과 신칸센의 수익으로 적자 노선을 지탱해왔으나 2020년대 코로나19를 맞아 철도사업이 적자를 보자 마찬가지로 적자 노선을 폐선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폐선했다고 해서 끝은 아니고 보통 대행버스로 전환하기는 하나 소요시간 증가 등의 문제로 지역의 반발이 크다. 아울러 이런 폐선조치는 주요 간선의 바이패스 역할이 큰 보조간선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즉, 수익성에 집증하다 국가적 수송망으로써의 철도의 가치를 떨어뜨릴 위험이 크다.
신칸센이 들어서고 남는 병행재래선의 제3섹터 분리도 민영화 이후 JR의 적자를 줄이기 위한 대책인데, 정비신칸센에 한해 제3섹터 분리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적자 메우기에도 급급한 JR 각 회사들은 정비신칸센 노선도 아직 건설 중인 곳이 많아 사실상 JR시대에 지어지는 모든 신칸센 노선에 적용되고 있다. 이 경우는 선로가 사라지지는 않아 화물열차와 보통열차 운행은 지속되지만 운영주체가 영세 회사로 바뀌는 만큼 주요 간선이 로컬선만큼 소홀히 관리되며 적자 보전을 위해 운임도 JR보다 비싸진다. 이 문제는 정비신칸센법의 지자체 비용부담 원칙과 더불어 신칸센이 건설될 때마다 연선의 신칸센 무정차 지역들이 건설에 크게 반발하는 원인이 되며, 결국 니시큐슈 신칸센에서 이 문제가 건설과정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이로 인해 민영화가 오지 지역 주민들의 교통 접근권을 크게 침해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5.2.3. 국철 노조 탄압?[편집]
국철에는 크게 3개의 노조가 있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지고 강경파였던 국철노동조합(국노), 기관사를 중심으로 국노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초강경파 동력차노동조합(동노), 그리고 두 단체에 반대하던 승무원 중심의 온건파 철도노동조합(철노)이 그들이었고, 산하에 수많은 방계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주로 국철 노조라고 하면 국노와 동노를 일컫는다.
당시 국철 노조는 파업 및 노동운동을 많이 벌였으며, 이는 정부 및 국철 경영진에서 많은 골치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국철 노조를 섣불리 해체할 경우 이는 국철 노조에게만 좋은 일을 시켜줄 뿐 국철 경영진과 정부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으므로, 아예 '국철'이라는 조직을 없애버림으로써 내부적으로 와해시키기 위해 민영화를 진행하였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또한 분할민영화를 추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도 퇴임 후 취재에서 국철 노조 해체가 분할민영화의 목적 중 하나임을 인정한 바 있어 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민영화 추진 당시 철노는 찬성, 국노는 반대를 고수했다. 특이하게도 동노는 처음에는 반대 입장이었지만, 민영화 직전 치러진 중의원 총선에서 민영화를 추진하는 자민당이 압승하자 민영화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임을 인정하고 JR에 재취업해서 일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사실상 항복했다. 그러나 분할민영화 이후에도 끝까지 저항한 국노에게 JR의 각 계열사들은 재취업 및 이직 불가 통보로 대응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이전 국노 조합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등 민영화 이후에도 탄압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노 자체는 아직도 법정 공방과 투쟁을 이어가고 있지만, 오늘날 JR에서는 철노가 중심이 되어 창설된 JR 노조 총련이 제1노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실 이 외에도 국철 분할민영화 이후 일본이 불경기로 접어들면서 철도 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에 대한 노동운동 자체가 위축된 점도 크다.
민영화를 노조 탄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노조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여론은 싸늘했는데, 국철 노조는 일본에서도 강성 노조에 속하여서 파업과 폭력을 포함한 노동운동을 자주 벌였고, 분할민영화 반대 운동이랍시고 아사쿠사바시역에 불 질렀다가 제대로 역풍 맞아 그때부터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기 때문이다.[18]
당시 국철 노조는 파업 및 노동운동을 많이 벌였으며, 이는 정부 및 국철 경영진에서 많은 골치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국철 노조를 섣불리 해체할 경우 이는 국철 노조에게만 좋은 일을 시켜줄 뿐 국철 경영진과 정부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으므로, 아예 '국철'이라는 조직을 없애버림으로써 내부적으로 와해시키기 위해 민영화를 진행하였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또한 분할민영화를 추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도 퇴임 후 취재에서 국철 노조 해체가 분할민영화의 목적 중 하나임을 인정한 바 있어 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민영화 추진 당시 철노는 찬성, 국노는 반대를 고수했다. 특이하게도 동노는 처음에는 반대 입장이었지만, 민영화 직전 치러진 중의원 총선에서 민영화를 추진하는 자민당이 압승하자 민영화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임을 인정하고 JR에 재취업해서 일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사실상 항복했다. 그러나 분할민영화 이후에도 끝까지 저항한 국노에게 JR의 각 계열사들은 재취업 및 이직 불가 통보로 대응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이전 국노 조합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등 민영화 이후에도 탄압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노 자체는 아직도 법정 공방과 투쟁을 이어가고 있지만, 오늘날 JR에서는 철노가 중심이 되어 창설된 JR 노조 총련이 제1노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실 이 외에도 국철 분할민영화 이후 일본이 불경기로 접어들면서 철도 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에 대한 노동운동 자체가 위축된 점도 크다.
민영화를 노조 탄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노조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여론은 싸늘했는데, 국철 노조는 일본에서도 강성 노조에 속하여서 파업과 폭력을 포함한 노동운동을 자주 벌였고, 분할민영화 반대 운동이랍시고 아사쿠사바시역에 불 질렀다가 제대로 역풍 맞아 그때부터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기 때문이다.[18]
5.2.4. 정치권의 책임 회피[편집]
1960~70년대 국철은 정치권의 압박으로 인해 수요가 적은 지역에도 울며 겨자먹기로 철도를 운영하는 일이 많았다.[19] 또한 건설 부채에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세이칸 터널, 세토대교, 도호쿠 신칸센 또한 정치권에서 압박을 넣어 억지로 건설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철의 재정이 막장으로 치닫으려고 할 때 '적자 83선'이라던지 '특정지방교통선'과 같이 수요가 안 나오는 노선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 관리작업을 위해 살생부 리스트를 만들고 버스 전환, 폐선 등 경영 개선을 위해 노력하려 할 때는 정치계에서 방해를 놓아 (대표적으로 일본 열도 개조론을 앞세운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경영 개선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는 곧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켰으며 말기암 환자처럼 국가 보조금이 없이 버틸 수 없는 국철을 정치계에서는 손을 놔버리고 신경쓰지 않기 위하여 토사구팽 해버렸다는 의견이다.
5.2.5. 국철 채무 상환 지체[편집]
1980년대 초부터 일본 경제는 소위 버블 경제라고 하여 모든것이 성장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는 거품으로 인한 성장일 뿐이며 거품이 꺼지면 헬게이트가 열릴 것 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 또한 이러한 성장세가 거품임을 자각하지 못하였으며, "어차피 시중에 돈이 넘쳐나니까 민간자본을 유치하면 돈을 더 잘벌겠지?" 하는 심산으로 일본전신전화공사와 일본항공, 그리고 일본국유철도의 민영화 계획을 1980년대 초반에 수립하였다. 당시에는 5년안에 민영화 한다고 하였으나, 정작 1985년에 민영화 된 것은 (구)전신전화공사(전전공사) 뿐이었다. 하지만 국철 분할민영화가 이루어진 1987년 이후, 즉 1980년대 말부터는 버블이 서서히 꺼지더니 결국 1989년부터 소위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을 넘은 장기적인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다.
민영화 이후에도 국철이 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철도 사업을 JR 7개사로 넘긴 국철은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으로 개칭하고 JR 각 사 주식[20]과 채무를 떠안는 형식을 취했다. 1997년 민영화 시점에서 청산 대상인 부채는 국철 자체 부채 25.1조엔 외에 철도건설공단 부채 4.5조엔, 여기에 건설중인 시설의 부채와 적자경영이 예상된 홋카이도, 시코쿠, 규슈 3개사에 주어질 경영안정화기금을 합하여 37조 1100억엔에 달했다. 이 중 5.9조엔이 동일본(4.2조엔), 도카이(0.5조엔), 서일본(1.1조엔), 화물(0.1조엔) 4개 사업회사에 분담되고 5.6조엔이 신칸센철도보유기구, 나머지 25.5조엔이 청산사업단에 남았다.(일본 총리관저 자료) 당초의 계획은 JR 사업회사가 부채 승계와 시설사용료를 부담하고 자산 매각을 통해 23조엔 수준을 상환하고 14조엔 수준이 '국민부담'(=정부 부채)로 남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철 청산 과정에서 버블 경제가 붕괴되면서 JR 주식과 유휴 부동산이 전부와 다름없는 자산 매각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91년에는 신칸센철도보유기구를 조기 해산하고 시설을 사업회사에 매각하였으며, 시설을 인수한 3개 사업회사는 청산사업단에 대해 동일본 3.1조엔, 도카이 5.1조엔, 서일본 9741억엔, 총 9.2조엔의 미납금을 떠안게 된다. 1987년 분담과 합해 혼슈 지역 3개사가 가져간 부채 총액은 15조엔에 달한다. 청산사업단은 1998년 10월 22일 해산하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부채 중 24.2조엔은 일반회계로 편입하였다. 나머지 3.9조엔은 철도 건설 · 운수 시설 정비 지원기구[21] 내 국철 청산 사업본부가 담당하였다.(결론은 이 모두가 나라 빚) 현재도 매년 원금 4,000억 이자 6,600억 합계 1조엔 이상을 세금으로 지불하고 있으며 세원(税源)은 국철 부채의 일반회계 편입 과정에서 신설된 법률(해당링크, 일본어)에 의한 담배특별세(たばこ特別税)이다. 즉 일본의 흡연자에게 국철 부채 상환금을 뜯어가고 있는 것이다.
민영화 이후에도 국철이 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철도 사업을 JR 7개사로 넘긴 국철은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으로 개칭하고 JR 각 사 주식[20]과 채무를 떠안는 형식을 취했다. 1997년 민영화 시점에서 청산 대상인 부채는 국철 자체 부채 25.1조엔 외에 철도건설공단 부채 4.5조엔, 여기에 건설중인 시설의 부채와 적자경영이 예상된 홋카이도, 시코쿠, 규슈 3개사에 주어질 경영안정화기금을 합하여 37조 1100억엔에 달했다. 이 중 5.9조엔이 동일본(4.2조엔), 도카이(0.5조엔), 서일본(1.1조엔), 화물(0.1조엔) 4개 사업회사에 분담되고 5.6조엔이 신칸센철도보유기구, 나머지 25.5조엔이 청산사업단에 남았다.(일본 총리관저 자료) 당초의 계획은 JR 사업회사가 부채 승계와 시설사용료를 부담하고 자산 매각을 통해 23조엔 수준을 상환하고 14조엔 수준이 '국민부담'(=정부 부채)로 남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철 청산 과정에서 버블 경제가 붕괴되면서 JR 주식과 유휴 부동산이 전부와 다름없는 자산 매각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91년에는 신칸센철도보유기구를 조기 해산하고 시설을 사업회사에 매각하였으며, 시설을 인수한 3개 사업회사는 청산사업단에 대해 동일본 3.1조엔, 도카이 5.1조엔, 서일본 9741억엔, 총 9.2조엔의 미납금을 떠안게 된다. 1987년 분담과 합해 혼슈 지역 3개사가 가져간 부채 총액은 15조엔에 달한다. 청산사업단은 1998년 10월 22일 해산하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부채 중 24.2조엔은 일반회계로 편입하였다. 나머지 3.9조엔은 철도 건설 · 운수 시설 정비 지원기구[21] 내 국철 청산 사업본부가 담당하였다.(결론은 이 모두가 나라 빚) 현재도 매년 원금 4,000억 이자 6,600억 합계 1조엔 이상을 세금으로 지불하고 있으며 세원(税源)은 국철 부채의 일반회계 편입 과정에서 신설된 법률(해당링크, 일본어)에 의한 담배특별세(たばこ特別税)이다. 즉 일본의 흡연자에게 국철 부채 상환금을 뜯어가고 있는 것이다.
6. 노선[편집]
JR그룹의 각 항목을 참조. 다만 민영화 이후 잘려나간 노선이 많아 민영화 직후 노선과는 다소 다르다.
- 홋카이도 여객철도 (JR 홋카이도)
- 동일본 여객철도 (JR 동일본)
- 도카이 여객철도 (JR 도카이)
- 서일본 여객철도 (JR 서일본)
- 시코쿠 여객철도 (JR 시코쿠)
- 큐슈 여객철도 (JR 큐슈)
JR 화물은 화물 전용선이나 지선 위주로만 노선을 보유하고 있으며, 간선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노선을 배분할 때 가능한 한 여객철도에 몰아줬기 때문으로, 심지어 화물 전용역/노선을 여객철도 회사에서 빌려쓰는 경우까지 있다.
7. 차량[편집]
8. JR 여객철도 6개사의 관할지역[편집]
9. 역대 총재[편집]
- 시모야마 사다노리 (1949)
- 카가야마 유키오 (1949~1951)
- 나가사키 소노스케 (1951~1955)
- 소고 신지 (1955~1963)
- 이시다 레이스케 (1963~1969)
- 이소자키 사토시 (1969~1973)
- 후지이 마츠타로 (1973~1976)
- 타카키 후미오 (1976~1983)
- 니스기 이와오 (1983~1985)
- 스기우라 타카야 (1985~1987)
10. 사가: 철도정신의 노래[편집]
자세한 내용은 鉄道精神の歌 문서 참고하십시오.
11. 관련 영상[편집]
1957년(!) 당시 전동차에 관한 영상. 참고로 영상 맨 앞의 사진은 JR 히가시니혼이 1997년까지 사용한 옛 본사(=일본국유철도 본사)다.[24]
1960년 당시 디젤 동차에 관한 영상.
1964년에 개통한 도카이도 신칸센에 관한 영상.[26]
국철이 JR로 바뀌는 순간의 영상(1987년 3월 31일 ~ 4월 1일). 영상의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 그러니까 1987년 4월 1일 자정부터 JR로 이어지게 된다. 교토 우메코지 기관구[27]의 증기 기관차들이 야마모토 나오즈미(山本直純)[28] 지휘로 낸 경적 소리를 멜로디 삼아 은퇴한 직원과 현직들이 함께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의 번안곡인 반딧불의 빛[29]을 노래한다.
자정 이후 등장하는 순서대로 JR 시코쿠 본사가 위치한 카가와현 타카마츠역, JR 화물 군마현 타카사키 기관구[30], JR 홋카이도 본사가 위치한
해외라던가 일부에서는 민영화 가지고 왜 이리 요란이냐는 비판도 있었는데 이는 일본에서 철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답이 나온다. 일본은 철도교통이 상당히 발달해있으며 일본인들에게 철도 교통이 가지는 의미가 상당히 큰 만큼 철도가 하나의 문화와도 같은 개념인 것이다. 바로 위 영상에서도 레일 위의 역사를 강조하며 '일본국유철도의 열차가 다니던 레일은 이제 각각의 철도로 분리되었고, 그 레일 위의 민철 JR그룹[33]의 첫 열차가 도착했다'를 강조한 이유이며 그 장소가 일본 철도 최초의 역인 시나가와역인 이유이기도 하다. 멀리 갈 것 없이
12. 기타[편집]
오랫동안 관습에 지나지 않았던[34] 지적확인 환호응답을 처음 제도화시킨 곳이었다.
현재의 일본의 비싼 교통비를 만든 원흉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철도의 비싼 교통비는 민영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재의 비싼 교통비는 국철 말기에 수직상승 시켜놓은 결과물이다. 특히 대형 사철보다 JR이 교통비가 더 비싼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일본국유철도 마지막 날인 1987년 3월 31일에는 하루 한정으로 신칸센을 포함하여 모든 노선의 자유석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티켓을 6000엔에 10만장 한정으로 발매했다. 그래서 그날 수많은 인파가 일본 전국 각지 역에 모여 표를 샀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도쿄에서 각 JR 회사의 본사 소재지(도쿄에 본사가 있는 JR 동일본의 경우 센다이역)로 가는 특별 열차를 '국철 마지막 열차 겸 JR 첫 열차'로 운행했다. 여행 떠나는 JR(旅立ちJR)호 이 특별 열차는 승객을 추첨으로 모집했으며 운임, 요금 등은 면제되었다.
현재의 일본의 비싼 교통비를 만든 원흉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철도의 비싼 교통비는 민영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재의 비싼 교통비는 국철 말기에 수직상승 시켜놓은 결과물이다. 특히 대형 사철보다 JR이 교통비가 더 비싼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일본국유철도 마지막 날인 1987년 3월 31일에는 하루 한정으로 신칸센을 포함하여 모든 노선의 자유석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티켓을 6000엔에 10만장 한정으로 발매했다. 그래서 그날 수많은 인파가 일본 전국 각지 역에 모여 표를 샀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도쿄에서 각 JR 회사의 본사 소재지(도쿄에 본사가 있는 JR 동일본의 경우 센다이역)로 가는 특별 열차를 '국철 마지막 열차 겸 JR 첫 열차'로 운행했다. 여행 떠나는 JR(旅立ちJR)호 이 특별 열차는 승객을 추첨으로 모집했으며 운임, 요금 등은 면제되었다.
13. 관련 문서[편집]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팀의 시발점은 일본국유철도가 창단한 고쿠테츠(국철) 스왈로즈였다. 스왈로즈의 닉네임도 창단 당시 가장 빠른 열차였던 츠바메호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국영기업 특성 상 일반 사기업처럼 프로야구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없었고 만년 하위를 전전하다가 산케이 신문, 야쿠르트에 차례차례 매각되어 현재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됐다.
하필 국철이 적자로 망해가던 1980년대 메이지진구 야구장을 보수공사를 해주었다...[35] 야쿠르트의 인수 이후 일본시리즈 우승 6번을 달성하였고 현재도 플레이오프 진출권에서 다크호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RAIL WARS! -일본국유철도공안대-: 이 작품 세계관에서는 아직 민영화되지 않은 국유철도를 다룬다. 여기서 민영화 찬성파는 테러조직(...) 수준으로 나온다.
히로시마 시티 네트워크: 국철 해체 후 25년이 넘은 지금도 국철차로 땜빵해서 돌린다는 이유로 일본 철덕들한테서 아직도 국철 히로시마 지사에서 운영하냐는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227계가 도입되어 급속히 옛 국철 차량을 밀어내면서 이젠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그리고 오카야마가 새로운 국철 차량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흡연자 - 현재 일본 거주 흡연자는 일본국유철도의 잔여 부채 상환을 위한 세수 확보에 기여하고 있다.
14. 특징[편집]
운영과 관련해서 말이 많았으며 대표적으로 다음이 있다.
- 국철 노조 역시 파업을 자주 하면서 통근객들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심어졌다.[37]
[1] 현재의 마루노우치 키타구치 빌딩 자리에 있다. 도쿄역 주소가 1쵸메 9-1, 히타치 본사가 있는 생명빌딩이 6-6, 생명빌딩 바로 뒤에 있는 오아조백화점 및 마루노우치 호텔이 6-4를 배정받으며, 마루노우치 호텔 바로 뒷 건물인 키타구치 빌딩이 6-5를 배정받는다. 또한, 위치는 전혀 다르지만 일단 도쿄메트로 지하도쿄역과도 주소가 일치한다.[2] 국유철도의 마크가 JNR을 형상화한 것이다.[3] 과거 일본 제국 운수성(현 국토교통성) 산하기관이였다[4] 현재는 운수성이 건설성, 국토청, 홋카이도개발청과 합쳐져서 국토교통성으로 재편되었다.[5] 일본 법률로는 공공기업체(公共企業体)라 한다.[6] 도쿄역과 오테마치역 마루노우치선 출입구 사이에 있다.[7] 민영화 당시의 운영 항로는 우노역과 타카마츠역사이의 우코 연락선 18km, 아오모리역과 하코다테역사이의 세이칸 연락선 113km, 미야지마구치잔교와 미야지마잔교 사이의 미야지마 연락선 1km, 총 세 노선이었다. 1982년 6월까지는 니가타역과 요산선 호리에역 사이에 니호리 연락선 70km도 운영했다. 참고로 전부 운임 계산을 위한 영업거리이고, 실제 거리와는 차이가 크다.[8] 관광호는 신칸센 0계 전동차, 초저항은 101계&103계 전동차의 영향 [9] TGV의 영향도 있는데 바로 DHC 동차의 선두부 디자인이다.[10] 특실 적색계열 출입문 도장, 젖혀서 여는 방식인 자동문 등. 애시당초 첫 KTX 차량은 TGV 레조의 방계 모델로, 레조 기반에 TGV 듀플렉스의 운전실과 전장품을 부분적으로 적용한 과도기의 모델이다. 프랑스식 고속열차 설계사상은 다음 모델인 KTX-산천가까지 동력집중식과 연접대차로 전승되다가, KTX-이음과 그 이후 고속열차는 신칸센과 유사하게 변하고 있다.[11] 군에서 사용하는 인수인계할 때 그 인계이다.[12] 부총재 하시모토 마사시, 기사장 오카타 히로시, 총재실장 이데 마사타카, 총재실 문서과장 혼다 유이치로.[13]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몇몇 역에서는 직원들이 지나가는 사람들 전부에게 인사하는 운동을 했다.[14] 일본텔레콤은 이후 소프트뱅크가 인수한다. 후에 소프트뱅크텔레콤으로 이름이 바뀐 뒤 소프트뱅크BB, Y모바일과 함께 소프트뱅크모바일에 흡수합병된다. 유사한 사례로 한전KDN의 자회사인 파워콤(LG U+의 전신)이 있다.[15] 쉽게 표현하자면 장사 더럽게 안되는 로컬선. 조건은 1977년 ~ 1979년(3년간) 평균 수송밀도가 4천명/1일 미만인 노선(다만 피크타임에 시간당 1천명 이상 이용, 대체 도로가 없거나 적설로 1년에 쉬는 날짜가 10일을 초과할 경우 등 일부 예외조건이 있었다)[16] 한국의 국가철도공단에 대응되는 기관. 1964년에 설립되었다.[17] 운임 인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JR 홋카이도와 JR 큐슈, JR 시코쿠는 인상이 몇 번 있었고, 그 외의 JR 그룹도 소비세 인상에 따른 운임 인상이나 일부 열차의 전 좌석 지정석화 등으로 실질적 운임 인상이 이뤄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경우도 민영화 반대 진영에서 흔히 말하는 재앙 수준의 인상은 아니다.국철 시절에 엄청나게 요금인상을 해댔으니까 물론 90년대 이후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일본 물가상승률이나 이자가 거의 바닥급이었다는 건 감안해야 한다.[18] 우는 아이에게 동노가 지나간다고 하면 울음을 그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게오 사건이다.[19] 이는 2차대전 후 정부를 지속 장악한 자민당 정권이 고도성장기에 노선 건설을 대량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으로, 국유철도가 중앙부처인가 공사인가와는 관계가 없다. 국철이 철도성이었던 시절에는 철도가 없어서 문제였지, 한산한 철도가 나올 일이 없었다. 그 뒤 광업 쇠퇴와 자동차 보급으로 철도 수송량이 급감하는 것은 1960년대 이후에나 등장하는 문제이다.[20] 이는 자산을 출자해 JR 각 사를 설립하고 그 대가로 주식을 받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었다.[21] 국토교통성 산하 기관으로 JR 시코쿠, JR 홋카이도, JR 화물을 자회사로 가지고 있으며, 정비 신칸센 구간도 가지고 있다.[22] 타카사키 ~ 조에츠묘코 구간.[23] 조에츠묘코 ~ 츠루가 구간.[24] 중간에 지금 상식으로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장면들이 몇 군데 나오는데, 수송원들이 달리는 화차에 뛰어오르내리는(비승비강) 장면이라든지, 빠르게 무동력으로 달리는 화차를 연결시킨다든지(돌방)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다만 현재는 위험하기 때문에 돌방금지나 비승비강금지가 당연한 상식이지만, 이 당시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심지어 미국도 당연한 행태였다. 심지어 유튜브 뒤져보면 당시 미국 철도회사에서 만든 비승비강 튜토리얼 영상 필름(!) 같은 물건도 있다.(여담으로 배우는 당시 헐리우드의 중견급 배우로 실제 철도 수송원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고.)[25] 이 영상도 후대에 기술적 바탕이 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이 열차는 151계 다이이치 코다마나 츠바메에서 운영이나 외형적인 설계 면을 계승했고, 유압식 토크 컨버터는 이후 자동차의 자동변속기 기술에도 적용되었다.[26] 이 영상 또한 현대 관점에서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시험차량의 제조는 현대의 차량제조보다는 오히려 2차대전 전투기 기체의 목업 제작방식과 비슷하다던지, 현재 중국이 토목에서 허구헌날 자랑하는 선로 부설 차량이 벌써 이 때 등장했다던지... 참고로 저 조립식 선로 부설은 소련이 만날 국가 프로파간다 영상에서 자랑하던 것이다(...)[27] 현재의 교토 철도 박물관은 구 우메코지 기관구와 교통과학박물관을 합쳐 재개장한 곳이다. 우메코지기관구도 자연스럽게 차량정비시설은 전부 다른데로 이관되었고 교토철박 운영자인 공익재단법인 교통문화진흥재단의 관리를 받고있다.[28] 1932~2002. 1970 ~ 90년대에 일본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지휘자 겸 작곡가로, 특히 TBS 테레비 클래식 방송 음악회 '오케스트라가 왔다(オーケストラがやってきた)'를 약 10년 동안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29] 蛍の光 ( 호타루노 히카리, ほたるのひかり ) 매년 연말에 열리는 NHK 홍백가합전 마지막에 부르기도 한다.[30] 타카사키역과 타카사키 조차장 사이에 위치해 있다.[31] 현재는 오타루 운전소.[32] 현재는 오이 차량기지.[33] 民鉄. 더 이상 국철이 아니기 때문에 国과 대비되는 民을 사용해 민철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철은 사철을 달리 부르는 말로, 일본에서 사철이라 하면 JR그룹이나 제3섹터는 제외하는게 일반적.[34] 한국철도공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에도 환호응답은 존재했다고 한다.[35]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게 1980년대면 팀을 매각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고, 구단도 산케이로 넘어갔다가 다시 야쿠르트로 넘어간 지도 한참 된 상황이었다. 메이지진구 야구장에 어렵사리 입성하면서 프로야구 경기에 적합하게 국철이 직접 증/개축을 실시한 것이 마치 평생 보수에 대한 의무를 진 것 처럼 왜곡되어 퍼져있다. 물론 이 곳을 사용하는 프로야구팀은 구장 보수에 대해 일정 정도 책임지게 되어 있어서, 야쿠르트가 비용 부담을 하고 있다.[36] 결국 JNR과 민영화 이후의 JR은 아무데나 신칸센을 놓으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정비신칸센의 도입으로 이어졌다.[37] 노조의 배짱운행과 파업 때문에 민영화 직전 국철의 상황은 분노한 승객들이 폭동까지 일으킬 정도였다. 심지어 나고야에서는 민간 철도가 혜자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험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