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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종파별 총대주교
2.1.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정교회)2.2.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정교회)2.3.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톨릭)
2.3.1.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마론파)2.3.2.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멜키트 그리스 가톨릭)2.3.3.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가톨릭)2.3.4. 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

1. 개요[편집]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고대 도시 안티오키아의 기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최고 성직자로,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온 전통적 직위이다. 오늘날 이 명칭은 여러 교단이 각기 독립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기원은 사도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 초기 전승에 따르면 안티오키아 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직접 세운 교회이며, 베드로는 이곳의 초대 주교으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가운데 최초로 형성된 교회 중 하나로, 바울로의 선교 활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로 인해 안티오키아의 주교직은 바울로 계열의 기독교 전통 내에서 아주 중요햐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 교구의 독특한 점은, 사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주교들의 명단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와 더불어 안티오키아가 기독교 전통에서 매우 오랜 역사와 권위를 지닌 교회임을 방증한다.

그러나 교회 내 분열과 신학적 대립은 일찍부터 이 직위에 대한 경쟁과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362년에 발생한 멜레티오스 분열 당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직은 이원화되었으며,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는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인 측과 거부한 측이 각각 다른 총대주교를 세우며 분열이 심화되었다. 이후 멜카이트 교회에서 7세기에 다시 계승권 갈등이 일어나자, 마론파 공동체는 독자적인 총대주교를 선출하면서 독립적인 교회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안티오키아에 라틴 교회 총대주교를 따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 직위는 1268년 안티오키아가 함락된 이후 실질적인 의미를 잃고 명예직으로 남아 있다가, 1964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18세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내부에서 다시 총대주교직을 둘러싼 분열이 발생하였다. 일부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로마 가톨릭과 일치를 이루면서, 각각 멜카이트 그리스 가톨릭 총대주교와 시리아 가톨릭 총대주교가 새롭게 세워졌다. 이로써 같은 명칭을 사용하되,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과 전례 전통을 가진 여러 총대주교직이 병존하게 되었다.

현재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교회는 모두 다섯이다. 동방 정교회 계열로는 그리스 정교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회가 있으며, 오리엔트 정교회 계열로는 시리아 정교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회가 존재한다. 동방 가톨릭 교회에서는 마론파, 시리아 가톨릭,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각각 독자적인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두고 있다.

이처럼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직은 단일한 계보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역사적 분열과 신학적 갈등 속에서 여러 계통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각 교회는 저마다 자신들의 계보가 초대 사도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교회적 정통성과 고유성을 확립하고 있다.

2. 종파별 총대주교[편집]

2.1.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정교회)[편집]

2.2.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정교회)[편집]

2.3.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톨릭)[편집]

2.3.1.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마론파)[편집]

2.3.2.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멜키트 그리스 가톨릭)[편집]

2.3.3.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가톨릭)[편집]

2.3.4. 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폐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