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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역사
분할국
잔존국
상징
정치
법률
군사
행정구역
종교
문화
문헌
건축
경제
외교
정체성
창작물
Imperium Romanum
로마 제국
파일:Justinian555AD.png
동로마 제국의 최대 강역
395년~1204년
1261년~1453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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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Ῥωμανία[13]/Romania(로마국)[14]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15](로마 군주국)
Ἀρχὴ τῶν Ῥωμαίων[16](로마 주권국)
Imperium Romanum(로마 제국)
Πολιτ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17]/Res Publica Romana(로마 공화국)
Ῥωμαΐς(로마이스)
Ἕλληνες[18]/Graeci(헬라스인들)[19]
Γραικία/Graecia(헬라스)[20]
روم (로마)/بِلَادالروم (로마인들의 땅)[21]
동로마 제국[22], 대불림국(大拂臨)
비잔틴 제국[23], 비잔티움 제국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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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수도
니코미디아 (286~330년)[24]
콘스탄티노폴리스[25] (330~1204년)
니케아 (임시, 1204~1261년)[26]
콘스탄티노폴리스 (1261~1453년)
제국 서방
서로마 제국 (395년~476년)
면적
2,350,000 km² (457년)
3,400,000 km² (565년)
880,000 km² (775년)
1,675,000 km² (1025년)
420,000 km² (1320년)
현재국가
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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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6,000,000명 (457년)
20,000,000명 (565년)
7,000,000명 (775년)
12,000,000명 (1025년)
2,000,000명 (1320년)
언어
그리스어 (공용어)
라틴어 (공용어, 7세기 초까지)[27]
기타 지역별 언어
민족
종교
국교: 칼케돈파 기독교 - 정교회
비주류 종교: 가톨릭, 비칼케돈파 기독교[33], 조로아스터교, 이슬람, 유대교, 기타 등등
정치
주요 사건
경제
통화
1. 개요2. 초기
2.1. 새로운 로마의 시작, 동서 분할2.2. 첫 번째 전성기의 도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통치
2.2.1. 로마법의 집대성: 『로마법 대전』 편찬2.2.2. 고토 수복 원정2.2.3. 역병과 군사 부담, 제국 재정의 악순환2.2.4. 재정 정책2.2.5. 멈춰지지 않는 전쟁
2.3. 끝 없이 이어지는 전쟁의 수렁 속으로
2.3.1. 페르시아와의 전쟁2.3.2. 두 제국의 쇠퇴, 그리고 이슬람의 발흥
3. 중기4. 후기
4.1. 니케아 제국4.2. 팔레올로고스 왕조
4.2.1.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제국의 멸망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정치 제도가 후기 로마 시기를 거치며 중앙집권적이고 고도로 관료화된 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 변화는 3세기 군인황제시대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을 거쳐, 콘스탄티누스 대제 아래에서 더욱 정교화되며 확립되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의 권한을 사실상 박탈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한 도미나투스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행정과 군사조직을 이중적으로 분리하고 제국 전역에 걸쳐 통치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체제 개편은 서방의 붕괴 이후에도 동방 제국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으며, 동로마는 5세기 이후에도 연속성과 효율성을 지닌 정치와 경제 운영을 지속하였다. 결과적으로 동로마는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6세기 무렵 서방의 게르만계 국가들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반격에 나설 수 있었으며, 이는 고대 로마 전통을 계승한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제국 체제의 지속성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2. 초기[36][편집]

2.1. 새로운 로마의 시작, 동서 분할[편집]

파일:The_Roman_Empire_ca._400_AD.svg.png
서기 400년 로마 제국의 동서 분할 당시
서기 3세기 말, 로마 제국은 심각한 내우외환 속에서 정치적 재편이 불가피한 시점에 이르렀다.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침입, 행정 체계의 붕괴, 군대의 충성도 약화 등 여러 위기 요인이 겹치며 제국 전체의 존립이 위태로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단일 황제가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방식으로는 방대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 집단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복수의 황제가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새로운 정치 체제, 즉 사두정치를 도입하였다.

사두정치는 둘의 '아우구스투스'와 그 아래 보좌하는 둘의 '카이사르'가 각각 서로 다른 영토를 관할하며 제국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체제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본인은 동방을 맡았고, 동쪽 카이사르 갈레리우스는 발칸과 다뉴브 접경을 담당하였다.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서쪽 카이사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동서의 구분은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제국의 동방과 서방이 서로 다른 권역으로 나뉘어 통치되기 시작하였다. 이 체제는 제국의 행정과 군사 체계를 분산시켜 효율적인 대응을 도모하였고, 특히 동방과 서방 각각의 수도가 따로 설정되며 행정 중심의 이중화가 점차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사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동시 퇴위 이후 곧바로 붕괴되었다. 그 뒤를 이은 황제 계승자들 간의 권력 다툼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내전 끝에 단독 황제로 등극하며 제국을 재통합하였다. 그는 수도를 기존의 로마에서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그곳을 새롭게 정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새로운 제국 수도로 삼았다. 이는 정치적 중심이 점차 동방으로 이동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며, 동로마 제국의 행정적 기반이 마련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분할 통치 체제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구축한 새로운 질서 하에서 황제권의 집중과 계승을 통해 통일 제국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과 가까운 친족에게 영토를 분할하여 맡기되, 최종적인 권력은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구조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자녀들과 친족 간에 벌어진 권력 투쟁은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게 만들었고, 제국은 다시금 분열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일시적으로 제국을 재통합하였으나, 그 또한 죽음을 앞두고 제국을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나누어 물려주었다. 아르카디우스는 동방을, 호노리우스는 서방을 통치하게 되었고, 이는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동서 분할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로 두 지역은 각자의 수도, 행정 체계, 군사 조직, 재정 기반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경로를 걷게 된다.

초기에는 제국의 법령, 제례, 황제의 상징물 등이 양측에 모두 동일하게 전파되고 공동 통치의 외양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집정관의 임명은 양측에서 명목상으로 이루어졌고, 황제들의 조각상은 양 지역에 함께 세워졌다. 법률은 공동 명의로 공포되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법령의 적용 범위와 효력이 달라지게 되었고, 각 지역의 행정 체계는 점차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 동서 간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해관계의 차이가 점점 심화되면서 통일 제국이라는 형식적 외피는 무력화되었다.

동방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안정된 관료 체계와 정비된 세금 시스템을 바탕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지속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고도로 훈련된 행정관과 세무 관리 체계를 기반으로 한 재정 운용이 가능하였고, 이는 군사력의 유지와 외교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반면 서로마 제국은 점차 게르만족의 침입, 내부 귀족 세력의 분열, 군대의 이탈 등으로 인해 통제력을 잃어가며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르카디우스 치세의 동로마 제국은 초기에 서고트족의 침공 앞에서 무력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당시 서방의 장군 스틸리코가 동방의 방어를 지원하였으며, 동방의 군사적 취약성이 일시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장기 통치 동안, 외교적 협상과 재정적 지원을 통해 훈족과 사산 제국의 위협을 일정 부분 완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시기의 중요한 업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기 위한 삼중 성벽, 이른바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축조가 있으며, 이는 이후 천 년 가까운 기간 동안 동로마 수도를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지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국방을 강화하고, 외세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며 제국의 자주성을 회복하였다. 그 뒤를 이은 제노 치세에는 내부 반란과 외적 침입이 교차하면서 제국 내부가 흔들렸으나, 뒤이어 즉위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동로마판 대동법에 해당하는 조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세금 납부 체계를 현물에서 화폐로 전환하고, 공정한 납세 기준을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개혁은 제국의 재정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는 국고에 3년치 예산을 비축한 채 퇴위하였으며, 이 자산은 후계자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추진한 대대적인 정복 사업의 재정적 토대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처럼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서방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서로마가 5세기 말 게르만족에 의해 공식적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동로마는 자신들이 정통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동로마의 황제들은 로마 황제의 칭호를 유지하였고, 로마법에 기반한 법률과 행정체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단순히 두 지역 간의 정치적 분할이 아니라, 로마 제국 내부의 구조적 변화와 정체성의 이중화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행정과 군사, 재정, 종교,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동로마는 점차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해 갔고, 이는 곧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정치적 실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에도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중해 세계의 중심 국가로 존속하며,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 슬라브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출발점은 바로 이 동서 분할에 있었던 것이다.

2.2. 첫 번째 전성기의 도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통치[편집]

파일:Sanvitale03.jpg
유스티이나누스 대제(중앙)과 장군들과 관료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통치하던 시기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전성기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며, 정치 구조의 개편과 법률 체계의 정비, 고전 문화의 계승, 대외 원정에 의한 영토 확장, 기독교 제국으로서의 정체성 강화 등 여러 분야에서 총체적인 변화가 집중적으로 나타난 시기였다. 그의 재위는 단지 한 황제 개인의 정치적 야망이 아니라, 고대 로마 제국의 이상을 마지막으로 실현하려는 국가적 시도였으며, 동시에 중세 유럽의 형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는 결정적 국면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의 통치자로서 과거의 유산을 단순히 존속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고대 로마의 정치적 권위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합한 새로운 제국 이념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 가능한 통치 구조로 구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이상은 곧 법률, 행정, 군사, 종교, 건축 등 모든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으며, 제국은 그가 주도한 개혁 아래 일시적이나마 고대 로마 제국의 위상을 회복한 듯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그는 제국 내 관료 체계를 재정비하고 지방 행정 단위를 재조직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불필요한 관직과 중복된 행정 권한을 축소하고, 지방 총독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여 행정 효율성을 높이려는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군사 지휘권과 민정권을 통합하여 변방 방어를 강화하고 황제권의 직접적 통제를 확대하려는 시도와도 연결된다.

법률 분야에서는 『로마법 대전』 편찬이 중심에 놓인다. 이 법전은 고대 로마의 법률 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정합성을 부여한 작업으로, 단순한 기록이나 보존이 아니라 법적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제국은 동방의 다민족 다종교 사회에서 공통의 법률 체계를 통해 통일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는 후대 유럽 법학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군사적으로는 제국의 옛 영토였던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일부 지역을 되찾기 위한 고토 수복 원정이 본격화되었다. 이들 원정은 반달 왕국,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등 이민족 왕국을 상대로 전개되었으며, 유능한 장군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활약 아래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북아프리카와 남이탈리아는 이후 제국의 안정적 기반으로 기능하였고, 이탈리아에서의 재정복은 로마 시와 교황청에 대한 제국의 영향력을 다시 확립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문화 및 종교적 측면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는 중대한 전환을 이끌어냈다. 그는 교회를 제국 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기구로 간주하였으며, 정통 교리를 강화하고 이단을 탄압함으로써 교회 내 통일을 도모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건립된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이러한 종교적 이상과 황제권의 상징성을 함께 담은 대표적 건축물로, 이후 수 세기 동안 정교회의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이처럼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는 단순한 권력 강화를 넘어, 제국의 전통과 현실 사이에서 조화와 개혁을 동시에 추구한 시기였다. 그는 자신을 단순한 제국의 수호자가 아닌, 고대 로마 문명의 계승자이자 그리스도교적 질서의 수호자로 자임하였으며, 그에 따라 동로마 제국은 일시적이나마 고대 로마의 이상국가로 복귀하려는 역사적 시도를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시도는 제국 내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동시에, 후세에 정치적 이상과 문명사적 모범이 되는 본보기으로 남게 되었다.

2.2.1. 로마법의 집대성: 『로마법 대전』 편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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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rpus_Iuris_Civilis,_Fragment_(18506481224).jpg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통치 시기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도 장기적인 영향을 남긴 업적은 고대 로마의 누적된 법률 전통을 정리하여 하나의 체계로 집성한 『로마법 대전』의 편찬이다. 이 작업은 단순한 법률 집합이 아니라, 수 세기 동안 누적된 법률 지식과 실천을 정제하고 보존하여 이후 유럽 문명의 법적 기초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이 대작업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명령에 따라 당시 가장 뛰어난 법학자로 평가받던 트리보니아누스를 중심으로 구성된 법학자 집단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이미 황제의 시대에까지도 방대하고 혼란스러웠던 법률 문헌과 선례, 판례, 황제 칙령, 법학자의 주석 등을 면밀히 분석하였으며, 상호 충돌하거나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조항들을 제거하거나 재해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법률의 논리성과 실천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체계화가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단순히 법 조항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론적 기반과 적용 원리까지 정리하여 일관된 법체계를 구축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로마법 대전』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율법 집성』은 유스티니아누스 이전 황제들의 칙령을 수집하고 정리한 법령집이다. 둘째, 『법학 논평집』은 고전기 로마 법학자들의 논문과 주석서를 선별하여 정리한 것으로, 고대 로마 법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셋째, 『학설 집성』은 법학 교육을 목적으로 작성된 교재로, 법의 일반원칙과 해석 방법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마지막으로 『신율집』은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이 통치 기간 중 새로 제정한 법령들을 포함한 자료집으로, 로마법의 현행성을 반영하였다. 이 네 가지 집성본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연관성을 갖추어, 로마 제국 전역에서 통일된 법 적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로마법 대전』은 본래 유스티니아누스가 통치하던 동로마 제국 내에서 행정과 사법 체계의 정비를 위한 실천적 목적에서 출발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집성 법전은 제국의 국경을 넘어 수세기 뒤까지도 유럽 전역에 걸쳐 법적 모범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서유럽에서는 중세 말기 이후 로마법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로마법 대전』은 법학의 정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대학교육의 핵심 교재로 사용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이 법전을 토대로 한 국가법이 수립되었고, 궁극적으로는 근대 시민법의 기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제정한 『나폴레옹 민법전』은 『로마법 대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는 다시 독일 민법전, 일본 민법전 등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 집성 사업은 일국의 행정 개혁에 그치지 않고, 인류 문명사 전체에 걸쳐 지속적인 법률적 구조를 제공한 것이며, 고대의 지식과 질서를 근대에 전수하는 연결 고리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성쇠와 무관하게 이 법전의 생명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라틴어로 정리된 이 법전은 오랜 세월 동안 원문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중세의 수도원과 대학을 거쳐 르네상스 법학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 동로마 제국이 최종적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법 대전』의 법리와 논리는 유럽 대륙법계의 근간으로 기능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는 군사 정복이나 성당 건축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로마법 대전』의 편찬은 그러한 단기적 업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시대를 초월한 문명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이 작업은 제국의 통일성과 정당성을 제도적으로 강화하였으며, 로마라는 이름이 법과 질서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에서 가장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 것은 단연코 이 법전의 집성이라 할 수 있다.

2.2.2. 고토 수복 원정[편집]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야심찬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며, 그의 통치는 단순히 행정과 종교 개혁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제국의 중심에서 정치적 질서를 정비하고 법률을 통합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로마 제국의 고전적 권위와 영광을 회복하는 데 강한 열망을 품었다. 이 열망은 곧 실질적인 군사 원정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역사적으로 '고토 수복'이라는 이름 아래 기억된다. 그의 목표는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 등 서방에 흩어진 고대 로마의 핵심 영토들을 다시 제국의 통치 아래 통합하는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제국을 단지 동방의 제국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과거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던 통합 제국의 이상을 복원하려 하였다.

고토 수복 정책의 실현은 군사적 역량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위해 외교, 재정, 행정 등 다방면의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그는 세금 체계를 정비하고 관료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동시에 기독교 정통 신학에 기반한 제국 통합 이념을 강조하여 전쟁의 명분을 종교적 차원에서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이념적 토대는 특히 반달족과 동고트족 같은 아리우스파 계통의 게르만 왕국들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을 받아 고토 수복 전쟁을 실제로 수행한 인물들은 탁월한 군사 지휘관들이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각각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의 전략적 통찰과 유연한 전술 운용은 황제의 이상주의적 정책을 현실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중앙 정부는 병력과 군자금을 아낌없이 지원하였으나, 전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지휘관의 역량이 승패를 좌우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재정복은 고토 수복 정책의 첫 번째 단계였다. 당시 이 지역은 반달족이 세운 반달 왕국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수도는 카르타고였다. 반달 왕국은 해상 전력에 강점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내부 정치가 불안정하였고, 종교적으로는 정통 교회에 대한 억압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 동로마 제국의 개입 명분이 충분하였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원정을 개시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정예군을 이끌고 튀니스 인근에 상륙한 뒤, 이듬해 카르타고를 점령하였다. 이후 반달 왕국은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제국은 북아프리카 전역을 다시 속주로 편입하였다. 이 지역은 제국 경제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곡물 수출과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카르타고는 제국의 아프리카 총독부가 설치된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후 수십 년간 안정된 속주로 기능하였다.

이탈리아 원정은 북아프리카보다 훨씬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 전쟁이었다. 이 지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동고트족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중심은 라벤나에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탈리아 반도를 제국의 핵심 영토로 간주하고, 고전 로마의 중심지를 회복하는 것이 제국의 위신을 회복하는 일이라 판단하였다. 535년,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점차 북상하며 나폴리와 로마, 라벤나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고트족의 저항은 강력하였고, 전쟁은 몇 차례에 걸친 공방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반도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도시와 농촌은 모두 황폐화되었다. 로마는 포위와 약탈을 반복적으로 겪었고,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귀환한 이후에도 고트족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노장 나르세스를 파견하여 전황을 일거에 반전시켰다. 나르세스는 북이탈리아에서의 일대 전투에서 고트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이탈리아 전역의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이후 이탈리아에는 제국의 행정 기관이 복원되었고, 라벤나에는 총독부가 설치되어 동로마 제국의 서방 통치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 총독부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칸반도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전략적 이동로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탈리아 남부는 특히 오랫동안 제국의 통제 아래 유지되었으며, 이는 중세 후반까지도 동로마의 영향력을 서방에 지속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이탈리아 전쟁의 말기에는 랑고바르드족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제국의 방어선을 무너뜨렸고, 밀라노와 베로나 등 다수의 도시가 랑고바르드족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남이탈리아와 라벤나는 여전히 제국의 통제 하에 놓였으며, 이 지역은 동로마와 서방 세계 사이의 전략적 교두보로서 기능하였다. 이러한 영토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강력한 요새화와 해상 보급로 확보, 그리고 교황과의 정치적 협력 덕분이었다.

히스파니아에서의 동로마 제국 개입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동고트 왕국이 멸망한 이후, 이베리아반도는 서고트족이 지배하였으나, 그 권력이 아직 공고하지 않았고, 지방 귀족들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틈을 타 해군을 파견하여 남동부 해안 일대의 일부 도시들을 점거하였다. 이 지역은 이후 '히스파니아 속주'로 불렸으나, 실질적으로는 바르셀로나에서 카르타헤나에 이르는 해안선 일부에 국한된 점령지였다. 이 속주는 전략적 가치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으며, 제국이 여전히 로마의 유산을 서방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이 속주는 수십 년 뒤 서고트 왕국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 의지가 단지 현실적 정복에 그치지 않고 이념적 차원에서도 추진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군사적 성공과 영토 확장을 이끌어냈으나, 장기적으로는 제국의 재정과 병참 능력에 큰 부담을 남겼다. 지속적인 전쟁과 점령지의 유지에는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으며, 이는 내부 세금 부담의 증가와 사회적 불만을 야기하였다. 또한 페르시아와의 국경 방어에 필요한 병력이 서방으로 전환되면서 동방 국경이 약화되었고, 이는 후에 사산 왕조와의 분쟁에 불리한 조건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은 단지 군사 작전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제국의 정체성, 문화, 법, 종교, 그리고 로마라는 이름이 지니는 역사적 상징성을 되살리려는 대규모 문명사적 시도였다. 동로마 제국의 이후 역사는 다시 동방 중심으로 재편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시대는 마지막으로 서방과 동방을 아우르는 통합 로마 제국의 이상이 실현되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2.2.3. 역병과 군사 부담, 제국 재정의 악순환[편집]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추진한 고토 수복 정책은 군사적으로 일시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정치적 상징과 문화적 자부심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도 일정한 효과를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원정이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을 보장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재정과 인력의 과도한 소모, 예상치 못한 자연 재해, 내부의 사회적 긴장 등 여러 구조적인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제국의 내구력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중반, 즉 540년대 중반 이후 제국 전역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역병은 그 충격의 깊이와 범위에서 고토 수복 정책 못지않게 역사적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 이 역병은 후기 사료들에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며, 전염병학적으로는 흑사병을 유발하는 세균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염병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제국 전역을 강타하였고,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하였다. 노동력의 감소는 즉각적으로 경제 생산력을 축소시켰고, 동시에 병력 충원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하였다.

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방어하고 점령지를 안정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병력을 유지하고 확충해야 했으나, 인구 감소로 인해 병사들의 수급이 점점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농민 병사들이 속주에서 자급자족 형식으로 병역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역병 이후 그 기반이 무너졌고, 점차 고용군에 의존하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이로 인해 군사 유지 비용이 급증하였으며, 국방 예산의 부담은 제국 재정 전반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동시에 전염병으로 인해 광범위한 지역에서 세수 기반이 약화되었고, 행정력이 약화된 지방에서는 납세 거부나 반란의 징후도 포착되었다.

이처럼 병력 부족과 세입 감소라는 이중적 악순환은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 정책이 가져온 영토 확장의 효과를 상당 부분 상쇄시켰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히스파니아의 일부 지역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어하고 통치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반복되는 반란과 외적의 침입, 농촌의 피폐, 도시 기반 시설의 붕괴 등으로 인해 제국의 통치력이 제한되었고, 점령지를 안정된 속주로 재편하기 어려운 조건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지의 가치가 모두 퇴색한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 속주는 비교적 빠르게 행정 체계가 재정비되었고,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곡물 생산과 항구 세입은 중장기적으로 제국 재정에 기여하였다. 이 지역은 해상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곡물을 공급할 수 있었고, 동시에 해적 활동이나 외적 침입에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이 단기적 재정 위기를 초래한 것은 분명하지만, 속주의 유지 여부와 그 효율성은 지역별로 상이하였다. 남이탈리아 역시 방어 거점으로서 가치가 높았고, 발칸반도 및 에게 해 연안과 연결되는 교두보로 기능하면서 제국의 서방 전략에 장기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탈리아 재정복이 단순한 군사적 작전이 아닌 문명사적 시도였던 만큼, 그 결과 또한 문화적 갈등을 동반하였다. 이탈리아와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정치적,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이미 일정 수준의 분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고전 라틴어 문화를 바탕으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그리스어가 행정과 학술, 교회 언어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 동부 속주에서는 이미 그리스어가 일상 언어로 정착되어 있었으며, 정부 문서와 법률 조항, 심지어 교회 회의에서도 그리스어 사용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 지역은 여전히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정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고, 특히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한 귀족 집단과 교회는 동로마의 문화적 동방화를 경계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문화적 이질성은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이후 갈등의 씨앗이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병사들과 관리들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점점 '해방자'가 아닌 '지배자'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단지 정서적 거부감에 그치지 않고, 교회와 총독부 간의 권력 충돌,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간의 교리 해석 차이 등으로 이어지며 점차 분열의 실질적 양상을 드러내었다.

특히 교회 문제는 단순히 신학의 차이를 넘어서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에 대한 경쟁으로 발전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권이 교회에 대해 우위를 갖는 ‘황제교권’의 원칙을 고수하였으며, 이를 통해 종교적 통일을 제국의 안정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교회, 특히 로마 교황청은 제국의 간섭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는 훗날 교황권의 독립성과 로마 교회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의 고토 수복은 역사적으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제국의 정치적 이상과 문명적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일부를 재정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복은 그가 기획한 바와 같은 제국의 재통합을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하였고, 도리어 제국의 내적 안정성에 도전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동방과 서방 사이에 존재하던 문화적 간극은 시간이 갈수록 좁혀지기보다 심화되었으며, 이는 후대에 동로마 제국이 점점 그리스적 정체성을 강화해가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의 원정은 영광스러운 정복의 기록일 뿐 아니라, 제국의 역량이 어느 수준까지 확장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그 뒤로도 여러 세기 동안 존속하였지만, 그 문화적 중심은 점차 지중해 동부로 완전히 옮겨갔고, 고전 로마의 통합 제국이라는 이상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를 끝으로 사실상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2.2.4. 재정 정책[편집]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로 평가받으며, 그 정치적 야망과 행정적 성취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종종 ‘방만한 재정 지출’과 ‘무리한 정복욕’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의 광범위한 정복 사업,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 교회 통합을 위한 종교 정책 등은 모두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했으며, 특히 역병과 전쟁이라는 복합적인 재난 속에서도 이를 지속했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자초한 통치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 운용 방식을 보다 세밀하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에 실제 운용되었던 국가 재정 규모가, 이전의 대규모 중앙집권 개혁을 단행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및 갈레리우스 시대보다도 작았다는 점이다. 제3세기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금 제도를 강화하고 속주 체계를 재정비하며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과 관료 체계를 유지했다. 이와 비교하면 유스티니아누스는 오히려 제한된 재정 하에서 효율적 운용을 꾀했던 통치자였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단순히 세입과 지출의 총량을 비교한 결과가 아니라, 제국이 직면한 구조적 조건을 감안한 상대적 평가에서 비롯된 관점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세입 기반을 확대하고 안정화하기 위해 체계적인 세제 개편과 속주 관리 강화 정책을 병행하였다. 그는 특히 이집트, 시리아, 아프리카 등 농업 생산력이 높은 속주들에서 세금 징수를 강화하였고, 행정 관료에 대한 감독도 철저히 시행하였다. 부패한 징세관을 처벌하고, 세금 회피를 막기 위해 인구조사와 토지 조사도 반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제도 개혁은 단기적으로는 지방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하였으나, 장기적으로는 세입의 일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보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그는 도시 개발과 군사 작전, 공공건축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출을 제국의 전략적 이익과 직결된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 시설 보강, 안티오키아와 같은 주요 도시의 재건, 성 소피아 대성당의 건축 등은 단지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중심 도시들을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 강화하기 위한 철저한 국가 전략의 일환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외교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재정을 활용하였다. 사산 왕조와의 국경 안정화, 북방의 훈족 및 불가르족에 대한 금전 외교는 모두 일정한 자금을 소모하는 작업이었지만, 군사적 충돌보다 효율적인 수단으로 평가되었다.

군사 정복 사업 역시 단순한 확장주의적 야망이 아니라, 제국의 외교적 위신과 전략적 자산을 회복하기 위한 고도의 국가 운영 철학에 기초하고 있었다. 북아프리카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제국의 주요 곡창지였고, 지중해 해상로의 핵심 거점이었다. 이탈리아는 로마라는 이름의 상징성과 서방 교회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제국 정체성 회복에 결정적 요소였다. 히스파니아 해안에 대한 제한적 개입 역시 로마 제국이 서방 세계에 대해 여전히 주권을 주장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정치적 선언에 가까웠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유스티니아누스의 정복 사업은 단순한 영역 확장이 아닌, 제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국제적 위상을 복원하려는 복합적 기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 정복지에 대해 신중한 재정 운용을 시도하였다. 북아프리카는 정복 후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제국의 재정 체계에 통합되었고, 세금과 물자 조달을 통해 본국에 실질적 이익을 제공하였다.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총독부는 곡물 세입을 통해 제국 수도의 생필품 공급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 지역은 해상 교통망이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병참 유지에도 유리하였다. 이탈리아는 전쟁과 재건에 따른 비용이 컸지만,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지역은 전략적 방어 거점으로서 가치가 있었고, 라벤나 총독부는 교황청과의 관계 관리 및 서방 교회의 통제에 필수적인 기관으로 작동하였다.

이처럼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 지출은 겉으로 보기에는 방대한 군사비와 건축비로 인한 재정 압박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운용 아래 실행된 것이었다. 그의 통치는 재정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한 가운데,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제국의 정치적 영토와 문화적 경계를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재정 총량이 오히려 3세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보다 작았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바이며, 제국의 운영 능력과 황제 개인의 통치 역량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표로 작용한다.

결론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단지 화려한 건축물과 군사 정복으로만 기억될 통치자가 아니다. 그는 제국의 구조적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최적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치밀한 전략가이자 행정가였다. 그의 재정 운용은 종종 과도한 야망의 산물로 오해받지만, 보다 정밀하게 살펴보면 그는 실질적인 재정 역량 내에서 제국의 외형을 재건하고, 그 정체성을 명확히 하려는 근대적 감각의 통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 전략은 단기적 수치를 넘어선 정치적·문화적 효과를 지닌 결정적 정책이었으며, 제국이 중세를 통과하며 생존할 수 있었던 핵심 기반 중 하나였다.

2.2.5. 멈춰지지 않는 전쟁[편집]

6세기 후반의 동로마 제국은 외적으로는 전쟁과 침입, 내적으로는 역병과 재정난에 시달리며 극심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는 표면적으로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거대한 회복 사업으로 평가되지만, 그 야심은 결국 제국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그는 고트족에게 점령당한 이탈리아, 반달 왕국이 지배하던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 남부 일부까지 탈환하며 고전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고, 이 정복은 단기적으로는 제국의 위신을 크게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 모든 확장은 막대한 병력 운용과 군수 비용을 동반하였고, 이는 곧바로 제국의 국고를 고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정복지에서 징세를 통해 손실을 복구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으나, 바로 이 시점에 제국을 강타한 대역병이 그 기대를 무너뜨렸다. 유럽과 지중해 전역을 휩쓴 이 전염병은 이른바 제1차 페스트 또는 선 페스트로 불리며, 중세 흑사병 못지않은 규모의 사망자를 낳았다. 제국의 인구는 급감하였고, 유스티니아누스 본인도 감염되어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통치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병은 한 차례로 그치지 않고 주기적으로 재발하여 제국 사회 전반을 장기간 마비시켰다.

전염병은 단순한 인명 피해에 그치지 않고, 경제와 사회 구조 자체를 붕괴 시켰다. 노동력 부족으로 세수는 감소했고, 황폐해진 경작지와 쇠퇴한 도시들은 더 이상 제국의 재정 기반이 되어주지 못했다. 국고는 빈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이 상태에서 제국은 끊임없는 외부의 전쟁과 반란에 시달리게 된다. 전쟁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일으킨 정복 전쟁에 그치지 않고, 정복지를 유지하고 방어하는 과정에서 되려 끊임없이 재점화되었다. 결국 동로마는 전쟁을 멈추고자 해도 멈출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탈리아는 고트족을 몰아낸 이후에도 새로운 침입의 표적이 되었으며, 특히 롬바르드족이 북부 이탈리아에 대규모로 침입하며 제국의 지배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제국은 고작 몇몇 해안 도시와 중부의 라벤나 총독부만을 유지하였고, 그마저도 위태로운 상태였다. 북아프리카 역시 반달 왕국을 무너뜨리고 얻은 땅이었지만, 지방 반란과 유목 민족의 침입, 현지 행정의 붕괴로 인해 끊임없이 군사 개입이 필요한 불안정한 지역으로 남았다.

지중해 서부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이베리아반도 남부에 확보했던 제국령도 현지의 반발과 서고트족의 반격 속에서 오랫동안 안정된 지배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제국은 하나의 전선을 겨우 수습하면 다른 전선이 무너지는 악순환 속에 놓여 있었고, 군사력은 분산되며 재정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와 동시에 동방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대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의 평화 협정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이후 양 제국은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등을 놓고 수차례 전면전을 벌였다. 이 충돌은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닌,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제국 간 대결로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로마는 막대한 병력과 자원을 소모하였다.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사산 왕조의 침입은 점차 제국의 심장부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북방에서도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발칸반도에서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도나우 강을 넘어 남하하면서 국경 방어선이 위협받았고, 이들은 정착과 약탈을 반복하며 제국의 농촌 지대를 유린하였다.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이 침입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집중하였지만, 역병과 재정난으로 인해 병사들에게 충분한 급료와 보급을 제공하지 못하였고, 군대 내부의 불만은 결국 포카스의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유스티니아누스 사후의 동로마 제국은 전쟁을 끝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전쟁이 끝나야 재건이 가능했지만, 제국은 늘 새로운 전쟁에 휘말렸고, 전쟁을 준비할 여력도 없이 끌려다니는 상황이었다. 각각의 전쟁은 다음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정복의 과실을 기대했던 유스티니아누스의 제국은 전쟁을 거듭하며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정치적으로도 제국은 불안정했다. 반복되는 역병과 전쟁 속에서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귀족 세력과 지방 군벌들은 점차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궁정 내 권력 다툼과 황위 찬탈은 빈번해졌으며, 이는 중앙 통제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제국은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곳곳에서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6세기 후반의 동로마 제국은 전쟁 없는 시기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정복의 과거는 기억으로만 남고, 현실은 방어와 후퇴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곧 7세기 초의 대재난, 사산조 제국과의 양국의 운명을 건 파국적인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해 이슬람 세계의 대두라는 거대한 격변으로 이어지며,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2.3. 끝 없이 이어지는 전쟁의 수렁 속으로[편집]

2.3.1. 페르시아와의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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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사이의 602~628년 전쟁은 고대 후기 세계의 마지막이자 가장 격렬한 로마-페르시아 간 충돌이었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두 제국은 일시적으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동로마의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이전 전쟁에서 사산 왕자 호스로 2세를 도와 페르시아 왕위 탈환을 지원했고, 그 대가로 사산 제국은 일부 영토를 동로마에 양도하며 화친하였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의 재위 말기 동로마 내부 사정은 악화일로였다. 국고가 바닥나자 황제는 군비를 줄이고 군사의 봉급을 삭감하는 등 긴축 정책을 폈고, 발칸 반도에서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침입에 맞서 혹독한 원정까지 이어지면서 군심이 동요하였다. 결국 602년 도나우 강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군대가 황제를 폐위시키고 장교 포카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였다. 마우리키우스와 그의 가족은 잔인하게 처형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군사 정변으로 혼란에 빠졌다.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는 이 사태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은인이었던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살해당한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동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다. 호스로 2세는 나아가 마우리키우스의 장남이라고 자칭하는 테오도시우스라는 인물을 앞세워 “정당한 황제의 복위를 위한 성전”이라고 선전하고, 동로마의 백성들에게 포카스 같은 찬탈자에 협력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겉으로는 복수와 정의 구현을 내걸었지만, 호스로 2세의 실제 속내는 591년 동로마에 할양했던 영토를 되찾고 더 나아가 동로마의 약점을 이용해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야심이었다. 반면 포카스의 폭압 통치로 내부 혼란에 빠진 동로마 제국은 이런 외침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두 제국 간에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경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했다.

전쟁 초반에는 사산 제국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호스로 2세는 정예 군대를 이끌고 서방으로 진군하며 오래도록 균형을 유지해 온 로마-페르시아 국경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페르시아 군대는 동로마령 메소포타미아와 남캅카스 일대의 요새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동로마의 변경 방어 거점이었던 다라와 에데사 같은 도시들이 함락되고, 아르메니아의 전략적 거점 테오도시오폴리스[37]는 별다른 저항도 못 해보고 페르시아에 항복하였다. 특히 테오도시오폴리스의 투항에는 호스로 2세가 내세운 가짜 황자 테오도시우스의 존재가 한몫했는데, 수비군은 그를 진짜로 믿고 문을 열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의 동부 방어선이 붕괴되자, 페르시아 군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내륙과 레반트로 급속히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포카스 황제 치하의 동로마는 외교적으로도 고립되고 군사적으로도 무능함을 드러냈다. 황제에 반발한 여러 세력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국은 혼란스러웠고, 이런 사이에도 페르시아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608년에는 페르시아 군 선봉대가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바라볼 수 있는 칼케돈[38]까지 나타나 시위를 벌이고 돌아갈 정도로 동로마의 방어는 허술해졌다. 610년, 결국 포카스에 반발한 아프리카 총독 이라클리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해상 경로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포카스는 축출되어 처형되고, 이라클리오스가 새로운 동로마 황제로 즉위했으나, 이미 제국 동부의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된 뒤였다.

610년대 초반부터 페르시아의 정복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611년 페르시아 군은 안티오키아를 함락하며 시리아로 진입했고, 613년에는 동로마 군대가 반격을 시도했지만 사산의 장군 샤힌과 샤흐르바라즈에게 연이어 패배하였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은 시리아 전역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614년에는 예루살렘마저 세 주간의 포위 끝에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유대인 공동체가 페르시아를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실제로 예루살렘이 함락될 당시 유대계 주민들이 환영했다는 설도 있지만, 전란 속에 전해진 이야기라 과장이 섞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함락은 동로마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주민이 학살되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기독교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성유물인 예수의 성십자가 조각을 비롯하여 성창과 성해면 같은 유물들이 약탈되어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으로 운반되었다. 오랜 신앙의 중심지를 잃은 동로마인들은 이를 하늘이 자신들에게 노한 징조로 받아들였고, 일부는 이 비극의 원인을 제국 내 종교적 분열이나 유대인들의 배신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615년까지 페르시아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소아시아 남동부와 이집트 접경에 이르렀다. 동로마 제국은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일부만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처지가 되었고, 옛 영광의 핵심이던 남부 속주들과의 육로 연결이 끊어졌다. 616년에서 618년에 걸쳐 페르시아의 명장 샤흐르바라즈는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618년에 1년간의 공방 끝에 함락되었고, 이집트 전체가 621년경까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집트는 로마 세계의 곡창 지대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에게 식량을 공급하던 곳이었기에, 이 상실은 동로마 제국에 치명적 경제 타격을 입혔다. 실제로 수도에서 주민들에게 지급되던 곡물 배급은 이집트 잃은 해에 폐지되었고, 물가와 세금 부담은 치솟았다. 더군다나 발칸 반도에서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국경을 넘어와 도시들을 약탈하고 있었으므로, 제국은 동서양 양면에서 위기에 빠져 있었다.

페르시아의 군사적 승리에 도취한 호스로 2세는 더욱 대담해졌다. 617년에는 페르시아 군이 다시 칼케돈에 주둔하며 사실상 수도 코앞까지 위협했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새로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호스로에게 여러 차례 평화 교섭을 시도했지만, 연전연승 중인 호스로는 이를 거절했다. 심지어 전승에 의기양양해진 호스로 2세가 “동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황제를 포로로 만들겠다”는 조롱과 협박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일화의 진실성은 나중에 의심받았지만, 당시 동로마인들에게는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실제로 620년경 동로마 제국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처했고, 호스로 2세의 페르시아는 마치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이래의 옛 페르시아 제국을 재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조차 더 버티기 어렵다는 절망감에 한때 황제가 수도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로 옮기는 방안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위기상황은 오히려 동로마 제국에 마지막 반격의 결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패배와 혼란이 거듭되자 더 이상 기존의 소극적 대응으로는 제국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례 없이 황제로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먼저 내부 결속과 자원 동원을 단행했다. 622년경,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상과 교회 보물을 내다 팔고 아야 소피아 성당의 장식 금까지 뜯어낼 만큼 모든 가용 자금을 전쟁에 투입했다. 성직자들과 시민들도 황제의 호소에 따라 금은보화를 헌납했고, 군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사기를 북돋았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비상시국에 교회와 황실 재산을 총동원한 것이다. 이라클리오스는 이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군대를 재편성하고 장비를 정비했으며, 남아 있던 병력을 긁어모아 직접 야전 지휘에 나섰다. 또한 그는 기존의 정통 로마군뿐 아니라 자원봉사 병사도 받아들였고, 일부 역사학자는 이 과정에서 훗날 테마제로 발전할 지방 군사 조직의 싹이 등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황제가 친히 군마에 올라 전장을 누빈다는 사실은 군심을 크게 고무시켰다. 궁정의 의전과 안일함을 뒤로 하고 황제가 솔선수범한다는 모습에 병사들과 백성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게 되었다.

이라클리오스는 기습적인 기동으로 페르시아의 허점을 찌르는 과감한 전략을 세웠다. 당시 페르시아 군대는 거대한 점령지를 유지하느라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고, 동로마가 방어 태세에 급급하여 먼 본토까지 쳐들어올 것이라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이 점을 노렸다. 622년 봄, 이라클리오스는 어린 아들을 수도에 남겨두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부활절 직후 출발한 그는 소아시아 내륙을 가로질러 흑해 연안의 트라브존(Trabzon, 고대 트라페주스)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부터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르메니아 방면으로 진군했다. 이 예상 밖의 진격로를 통해 페르시아의 배후를 위협하자, 소아시아에 주둔하며 안일하게 진격을 늦추고 있던 페르시아 군은 허둥지둥 퇴각하기 시작했다. 곧 이라클리오스는 카파도키아 방면에서 사산군 장군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부대를 격파하여 첫 승전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황제는 일부러 후퇴하는 척하며 페르시아 군을 유인한 다음, 매복해둔 정예 기병을 일시에 투입하여 크게 무찔렀다고 전한다. 이 승리로 오랫동안 유린당하던 소아시아 영토가 한숨 돌리게 되었다.

한편 서방 발칸에서는 아바르족이 여전히 위협적이어서, 이라클리오스는 두 전선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그는 아바르족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일시적인 휴전을 시도하였으나, 623년 협상 과정에서 아바르족이 약속을 깨고 자신을 사로잡으려는 함정을 파는 일도 벌어졌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황제는 많은 수행원이 포로로 잡히는 손실을 치렀으나, 더 이상의 배후 교란을 막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많은 금화를 넘기고 황족을 인질로 보내 아바르족과 평화를 맺었다. 이로써 겨우 등 뒤의 걱정을 덜어낸 이라클리오스는 동부 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624년, 이라클리오스는 다시 한 번 동쪽 원정에 나섰다. 이번에는 훨씬 더 깊숙이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노렸다. 그는 아르메니아를 거쳐 사산 제국의 영토로 진군하면서 여러 도시와 거점을 하나씩 파괴했다. 황제는 스스로 선제 평화 제의를 하여 시간을 벌고는 기습 공격을 가하는 전술도 사용했다. 대대적인 역공에 직면한 호스로 2세는 다급히 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긁어모아 세 방향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사산군의 유명한 장군 샤흐르바라즈, 샤힌, 샤흐라플라칸이 각각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이라클리오스를 포위망에 가두려 했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는 노련하게도 적장들 사이의 경쟁심을 이용해 각개격파에 나섰다. 그는 일부러 탈영병을 가장한 밀사를 보내 샤흐르바라즈에게 “다른 장수가 이미 로마군을 격멸해 전공을 세우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에 속은 샤흐르바라즈가 서둘러 합류하려 움직이자, 이라클리오스는 분산된 페르시아 군을 각개로 공격하였다.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노케르타 부근에서 그는 샤흐라플라칸과 샤힌의 부대를 잇따라 격파했고, 이어서 그해 겨울 알라오니온(알리오빈)의 전투에서는 야습을 감행하여 샤흐르바라즈의 주둔지를 습격, 페르시아 주력군을 궤멸시켰다. 이라클리오스의 기습에 샤흐르바라즈는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달아났고, 그의 진영에 있던 보급품과 하렘까지 모두 동로마 군의 손에 넘어갔다. 연이은 패전으로 사산 측의 사기는 급속히 저하되었다.

이라클리오스는 혹독한 겨울에도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625년 초, 그는 눈과 추위를 뚫고 콜키스와 아르메니아 방면에서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했다. 놀라울 만큼 기동적으로 움직인 동로마 군은 불과 일주일 만에 아라라트 산과 유프라테스 계류를 넘어, 잃었던 북메소포타미아의要충 아미다(디야르바크르)와 마르티로폴리스 등을 탈환하였다. 이후 황제의 군대는 시리아 북부로 향했고, 간신히 패잔병을 추스른 샤흐르바라즈가 집요하게 뒤를 추격했다. 소아시아 남동부 사루스 강(현재의 아다나 인근) 부근에서 두 군대는 다시 격돌했다. 이 교전에서 샤흐르바라즈는 일부러 패주하는 체하며 로마 군을 함정으로 유인해 선봉대를 괴멸시켰으나, 이라클리오스가 몸소 후군을 이끌고 다리 건너 돌격하자 오히려 페르시아 군이 놀라 흩어졌다. 전세를 만회한 이라클리오스는 비교적 안전하게 병력을 이끌고 흑해 방면으로 철수하여 625년 겨울을 보냈다. 동로마 군은 이렇게 물러났지만, 더 이상 패배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선전상으로는 승리에 가까운 결과였다. 반면 호스로 2세는 연이은 실책을 벌인 장수 샤힌에게 모욕을 주어 분노케 했고, 그 충격으로 샤힌이 병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점차 전쟁의 주도권이 동로마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626년에 찾아왔다. 궁지에 몰린 호스로 2세는 마지막 승부수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려 했다. 그는 북쪽의 유목 제국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어 동서 양면에서 동로마의 수도를 협공하는 대담한 전략을 세웠다. 호스로 2세의 총애를 받는 장군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은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다시 보스포루스 해협 부근 칼케돈에 집결하고, 아바르족과 슬라브 연합군은 반대편 유럽 쪽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압박하였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여전히 야전에서 적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 방어는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와 재상 보누스의 지휘 아래 시민과 잔존 병력이 책임져야 했다. 장기간 적의 침공을 겪으면서도 버티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이러한 일대 결전에 결연히 맞섰다. 626년 7월, 아바르족이 이끄는 약 8만의 대군이 성벽 밖을 포위하자, 도시 안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 아이콘을 앞세운 세르기우스 총대주교의 순례 행렬과 함께 수만 명의 군민이 사기를 다졌다. 포위전 한 달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자, 8월 초 아바르족과 페르시아 군은 최후의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동로마의 해군이 제해권을 쥐고 있었기에, 해협을 건너 협공하려던 페르시아 군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아바르족 휘하의 슬라브 전사들이 뗏목을 타고 황금뿔만을 건너 해안 성벽을 노렸지만, 동로마의 해상 방어선에 격퇴되었다. 결국 8월 7일을 전후하여 벌어진 총공세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아바르족은 막대한 손해를 입고 퇴각을 시작했다. 마침 이 시기에 이라클리오스의 동생 테오도루스가 소아시아 방면에서 페르시아 장수 샤힌의 군대를 격파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더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아바르족은 약탈한 재물을 챙겨 본국으로 철수했고, 이후 다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위협하지 못했다. 칼케돈 쪽에 남아 있던 샤흐르바라즈의 페르시아 군도 고립된 채 별 성과 없이 대치를 이어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마침내 포위를 풀었고, 시민들은 신의 가호에 감사하는 감사기도를 올렸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작곡된 찬송가가 바로 유명한 아카티스트 찬송으로, 훗날까지 전해지는 동로마의 종교 문화 유산이 되었다.

한편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수도 방위전이 승리로 끝나자 더욱 공격적으로 나왔다. 그는 비밀리에 샤흐르바라즈 장군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를 이간질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가 호스로 2세의 밀서를 가로채 위조한 편지에는 샤흐르바라즈를 의심하고 제거하라는 왕의 명령이 담겨 있었다. 자기 왕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여긴 샤흐르바라즈는 배신을 결심하고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그는 이후 전황을 관망하며 호스로와 이라클리오스 사이에서 저울질하게 되는데, 이로써 호스로 2세는 가장 믿었던 장군과 정예 부대를 잃고 말았다. 이라클리오스는 또한 북방의 강력한 지원군을 끌어들이는 외교에도 능했다. 서돌궐 제국의 통엽후 카간(톤 야브구 카간)과 동맹을 맺어 투르크계 용병을 얻은 것이다. 황제는 자기 딸을 카간에게 혼인 동맹으로 보내는 조건까지 걸면서 협력을 이끌어냈고, 이에 호응한 돌궐 기병 수만 명이 코카서스 방면에서 사산 영토를 공략해 들어갔다. 돌궐족 동맹군은 조지아 지역의 티빌리시 등을 포위 공격하며 사산 제국을 압박했다. 이렇게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다발로 곤경에 처한 호스로 2세에게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627년, 이라클리오스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직접 메소포타미아 깊숙이 진군했다. 그는 겨울이 닥쳐오는데도 진격을 늦추지 않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적들도 동계에는 대규모 전투를 피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사이, 동로마 황제는 눈보라를 뚫고 옛 아시리아 땅까지 내려섰다.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눈앞에 두고도 멈추지 않겠다는 듯한 그의 기세에 당황한 호스로 2세는 급히 군대를 보내 막으려 했다. 남은 병력 중 일부는 국경 수비대를 빼내 충당한 까닭에, 정예라기보다는 날림으로 모은 부대였다. 이 군대를 지휘한 자는 페르시아 군의 아르메니아인 용장 라잔(르하자드)이었다. 두 제국의 운명을 건 최후의 결전은 627년 12월, 고대 니네베 유적 인근 평원에서 벌어졌다. 안개 낀 겨울 날씨 탓에 페르시아 측이 우세한 기병궁병 전력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라클리오스는 다시금 책략을 동원했다. 그는 거짓 퇴각으로 적군을 평지로 유인한 후 돌연 역습을 개시하였다. 장장 8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페르시아 군은 끝내 무너져 퇴각했고, 수천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전투 도중 라잔 장군이 결투를 요청하자, 이라클리오스가 직접 나가 일합에 그를 쓰러뜨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승리로 사실상 사산 왕조의 야전 군대는 궤멸되어 버렸다. 이제 호스로 2세에게는 더 이상 믿을 만한 군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동로마 황제의 군대는 승세를 타고 페르시아 영토를 휩쓸었다. 호스로 2세의 호화로운 별궁 다스타게르드가 약탈당하여 엄청난 전리품과 동로마의 옛 군기(軍旗) 수백 개가 회수되었다. 호스로 2세는 수도 근처까지 몰려오는 적을 막을 힘이 없자 왕궁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이라클리오스는 도망친 호스로 2세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황제는 “더 이상의 무의미한 파괴를 멈추고 평화 협상에 응하라”는 취지로 관용을 베풀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호스로 2세는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싸울 태세를 보였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음에도 왕은 패전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리며 패잔병과 노예까지 긁어모아 최후 발악을 하려 했다. 그러자 궁정의 사산 왕족과 귀족들이 등을 돌렸다. 628년 2월, 호스로 2세는 결국 왕궁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은 도망친 옛 왕을 붙잡아 지하 감옥에 가두고, 며칠에 걸쳐 굶긴 뒤 냉혹하게 처형해 버렸다. 장장 38년간 제국을 통치했던 호스로 2세의 비참한 최후였다.

새로 즉위한 호스로의 아들 카바드 2세(시로에)는 더 이상의 전쟁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즉시 동로마 측에 강화를 요청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승리자였지만, 그 역시 십수 년 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한계에 달해 있었기에 관대한 조건으로 평화에 합의했다. 628년 맺어진 평화 조약으로 사산 제국은 정복지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전쟁 이전의 국경을 회복하기로 했다. 페르시아가 점령했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영토가 동로마 제국에 모두 반환되었고, 전쟁 포로들도 서로 송환되었다. 아울러 사산 왕조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예루살렘에서 약탈해간 성십자가를 비롯한 성유물들도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26년 동안 이어진 이 대전쟁은 결국 동로마의 영토를 거의 모두 회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지리멸렬했던 패전의 나락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난 이라클리오스와 동로마 제국은 환희에 휩싸였다.

승전 소식이 전해지자 동로마 제국의 민심은 크게 달아올랐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몇 달 뒤 개선장군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각지 교회에서는 황제의 승리를 신의 섭리가 내린 축복으로 찬양했고, 황제는 승리자라는 뜻의 칭호인 “페르시쿠스(페르시아의 정복자)”를 공식 칭호로 받았다. 629년 9월,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소에 안치했던 성십자가를 직접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그리고 630년 봄, 십자가의 조각을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 다시 봉안함으로써, 페르시아에 빼앗겼던 기독교 세계의 가장 신성한 유물이 제자리를 찾았다. 이는 동로마인들에게 신앙적 승리감과 큰 자부심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이라클리오스는 잃었던 옛 영토들을 회복하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킨 구원자로 여겨졌고, 어떤 역사가들은 그를 두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래 가장 위대한 로마의 장군”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과연 전쟁 직후만 보자면, 수십 년간 이어진 시련을 이겨내고 제국을 보존해 낸 그의 업적은 찬란해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라클리오스의 대승리는 겉보기와 달리 제국에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긴 결과이기도 했다. 우선 오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력이 소모되었다. 소아시아와 동방 여러 속주가 수년간 전란에 시달리며 농토는 황폐해졌고 인구도 크게 줄었다. 전쟁 기간 동안 늘어난 세금과 징발로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황제가 전쟁을 위해 주조한 경화(輕貨)와 화폐 가치 하락은 경제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전쟁 전에 비해 국고는 비었고,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으나 더 이상 넉넉한 봉급이나 토지로 그들을 보상할 여력이 부족했다. 발칸 반도에서는 전쟁 중 방치되었던 슬라브족의 정착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전쟁 전부터 슬라브계 이주민들이 남하해 있었지만, 이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북부 일대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슬라브인 공동체가 자리잡아 동로마의 지배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황제가 어렵게 회복한 동방 지역들도 수년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는 사이 동로마와 유대가 느슨해졌고, 그동안 행정이나 세제도 변화가 생겨 다시 완전히 동로마에 통합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은 비록 영토는 되찾았어도 이전과는 사정이 달라진 채로 겨우 숨을 돌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산 제국은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오랜 전쟁 끝에 패배한 것도 뼈아팠지만, 결정적으로 최고 권력층이 붕괴되며 제국 자체가 혼란에 빠졌다. 호스로 2세의 죽음 이후 왕위에 오른 카바드 2세는 겨우 몇 달 만에 역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어린 아들 아르다시르 3세가 즉위했으나 곧 살해되었다. 한때 동로마와 내통했던 장군 샤흐르바라즈가 쿠데타로 왕위를 노렸으나 그도 오래 가지 못했고, 호스로 2세의 딸들인 푸란도흐트와 아자르미도흐트 같은 여왕들이 차례로 옹립되었다가 폐위되는 등 불안정한 정권이 이어졌다. 4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다섯 명이 넘는 왕이 갈려 나갔고, 중앙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그 사이 제국 각지의 귀족 지배자들은 반자치적인 세력을 키우며 분열을 심화시켰다. 632년에 이르러서야 호스로 2세의 손자 야즈데게르드 3세가 가까스로 왕위에 올라 사산 왕조의 정통 계승을 회복했지만, 이미 제국은 통제 불능에 빠져 있었다. 오랜 전쟁과 정치 혼란으로 국력은 극도로 약해졌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국민 사이의 불만도 팽배했다. 전통적으로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사산 왕실은 그간의 실패로 권위가 흔들렸고, 제국 내에 거주하던 기독교도들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파들도 동요하였다. 이 모든 여파로 사산 제국은 외부 침략에 대처할 힘을 거의 잃게 되었다.

로마와 페르시아라는 양대 제국이 피로해진 사이, 아라비아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고 있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 아래 이슬람으로 통일된 아랍 군대가 곧 두 제국을 향해 밀려들었다. 불과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만인 630년대 중반부터 아랍인들의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로마와 사산 제국은 사실상 이 거대한 인적 파도를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는 아랍 군에게 참패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다시 상실했고, 이듬해 카디시야 전투에서는 사산의 군대가 무너져 메소포타미아가 뚫렸다. 640년대에 이르면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해안까지 모두 빼앗겼고, 사산 왕조는 페르시아 본토마저 점령당해 651년 최후의 왕 야즈데게르드 3세가 살해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602~628년의 혈전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양측 모두를 쇠약하게 만들어, 이후 나타난 이슬람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이렇듯 7세기 초반의 동로마-사산 전쟁은 단순한 두 제국의 싸움을 넘어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꾼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서는 이 전쟁을 통해 동로마의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제국을 구원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로 주목해왔다. 실제로 이라클리오스는 용맹하고 지략 있는 황제로서, 무너져 가던 제국을 부흥시켰고 성십자가를 탈환하여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칭송받았다.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은 그의 원정을 신의 이름으로 이뤄낸 성전(聖戰)으로 묘사하기도 했으며, 훗날 서유럽에서는 그를 이상적인 기독교 군주의 전형으로 숭배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라클리오스의 일련의 군사 행동을 훗날 십자군 원정의 선구적인 사례로 보기도 한다. 반면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이 전쟁의 결과를 보다 냉정하게 평가한다. 비록 동로마가 영토 회복에는 성공했지만, 오래 지속된 전쟁은 양국의 사회·경제 구조를 황폐화시켰고 국력을 소진시켰다. 특히 사산 제국은 이 전쟁으로 치명상을 입고 불과 얼마 뒤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동로마 제국 역시 간신히 존속하였으나, 이후 몇십 년 동안 옛 영토 대부분을 이슬람 세력에 내주고 소규모 국가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라클리오스의 승리는 단기적으로는 위대한 위업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피로스의 승리”와 같았다는 해석이 많다.

결과적으로 602~628년의 동로마-사산 전쟁은 고대 시대부터 이어진 로마와 페르시아의 수세기 대립에 종지부를 찍은 최후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막이 내린 직후부터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의 패권은 새로운 주체인 아랍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갔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은 한 시대를 끝내고 중세 초기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여는 전환점이었다.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투쟁은, 승패를 떠나 두 문명의 쇠퇴를 재촉하고 새로운 세력에게 길을 열어준 격변의 사건으로 역사에 남았다.

2.3.2. 두 제국의 쇠퇴, 그리고 이슬람의 발흥[편집]

3. 중기[39][편집]

4. 후기[40][편집]

4.1. 니케아 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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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팔레올로고스 왕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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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제국의 멸망[편집]

[1] 로마 왕국 건국 기준[2] 로마 제국 건국 기준[3] 사두정치 시절 로마의 동서 분할 기준[4] 콘스탄티노폴리스 완성 기준[5]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 격상 기준[6] 로마의 최종적인 동서 분할 기준[7]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기준[8] 모레아 전제군주국 멸망 기준[9] 트라페준타 제국 멸망 기준[10]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멸망 기준[11] 1204년, 제4차 십자군[12] 1453년, 최종 멸망[13] 로마자 전사: Rhōmanía[14] 당사자들이 쓰던 이름. 라틴 제국 역시 공식 국호는 '로마니아'였다.[15] 로마자 전사: Basileía tōn Rhōmaíōn[16] 로마자 전사: Árchē tōn Rhōmaíōn[17] 로마자 전사: Politeia tōn Rhōmaíōn[18] 로마자 전사: Hellēnes[19] 1204년 이후 국토가 헬라스인들의 거주지로 한정되면서 용례가 늘어난 이름이다. Nicol, Donald M. (30 December 1967). "The Byzantine View of Western Europe". Greek, Roman, and Byzantine Studies. 8 (4): 318. ISSN 2159-3159[20] '그리스'를 말한다.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연장으로 거부하겠다는 의미와 함께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때때로 동로마를 '로마'라 칭하지 않고 '그리스'라고 불렀다. 같은 맥락에서 '유나스탄(Յունաստան, 이오니아(그리스의 땅))이나 '그리스 제국(Imperium Graecorum)' 등도 사용되었으며, 아예 그리스마저 빼버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imperium Constantinopolitanum)'이라고 하기도 했다. 다만 후술하듯이 서방 세계도 내심 동로마 제국이 옛 로마 제국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반증하듯 당대에 가장 많이 쓰여진 명칭은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이었다.[21] 이슬람에서의 명칭.[22] '비잔틴'과 함께 현대에 가장 널리 통용되는 이름이다.[23] 역시 '동로마'처럼 현대에 가장 통용되는 이름이다.[24]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동방의 수도로 지정되어 근처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워질 때까지도 수도 역할을 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여기서 생을 마감하였다.[25] 라틴어 Constantinopolis. 한국어와 영어로는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쓴다. 동로마 제국의 주 공용어인 그리스어로는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Kōnstantinoúpolis)라고 쓰는데,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현대 그리스어처럼 ντ의 τ를 /d/로 발음했고, ού는 이미 코이네 시절부터 /u/로 발음했기 때문에 실제 발음은 '콘스탄디누폴리스'다. 현대 그리스어로는 주로 콘스탄디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고 쓴다.[26]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지방 정권들의 분립기 시대이다. 그중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제국의 부활을 선포해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것이 아닌 로마 제국 그 자체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제국 당시엔 지리상의 문제로 님페온이 실질적인 수도였다.[27]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제국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바꾸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에도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제국 동방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가 널리 쓰였다. 로마법 대전에서 라틴어가 쓰이는 등 동로마에서 라틴어의 지위는 결코 '외국어'가 아니었으나, 7세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간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았고 의례 부분으로 나타나는 정도였다.[28] 자신들을 '로마인(Ῥωμαῖοι 로메이)'라고 불렀다.[29] 특정 민족만이 로마인을 구성한 게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이 로마인 정체성으로 융화되었다.[30] 이탈리아인 등.[31] 고트인, 반달인 등 동게르만계와 프랑크인을 비롯한 서게르만계, 그리고 바랑인 근위대로 들어온 북게르만인(노르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게르만계 민족들이 유입되었다.[32] 초기 불가리아의 지배층인 불가르인은 튀르크계였으나 이후 슬라브화되었다.[33] 오리엔트 정교회(합성론), 단성론, 네스토리우스파, 비삼위일체파(아리우스파, 영지주의 등).[34] 공화정 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로마 고유의 전제정이었다.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거나 심각한 실정을 범할 경우 황제는 군단장이나 원로원의 반란을 직면해야 했으며 이렇게 새워진 왕조는 금방 시민의 인정을 받았으나 이전 왕조와 똑같은 한계를 지녔다. 동로마의 황제들은 자신의 통치를 신의 권위를 빌려 정당화하려 했으나 궁극적으로 동로마 멸망까지 이런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은 황제를 제위 세습이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으로 기술하고 있다.[35] 당시에는 행정수도 건설. 359년이 돼서야 로마시에만 두었던 수도시장 내지는 특별시장(Praefectus Urbi)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두었으며, 원로원 또한 로마의 그것과 동급으로 격상시켰다.[36] 843년 이전.[37] 오늘날 에르주룸[38] 오늘날 이스탄불의 아시아측 거점[39] 843년~1204년.[40] 1204년~145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