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도시의 역사[편집]
2.1. 초기 정착과 아스타코스[편집]
니코메디아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식민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 지역의 초기 역사는 기원전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712년경, 그리스 본토의 메가라와 아테네에서 온 정착민들은 마르마라해 남동부 해안, 즉 오늘날 이즈밋만이 위치한 비옥하고 전략적인 지역에 새로운 식민 도시를 세웠다. 이 도시는 처음에는 '올비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교역로를 연결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초기부터 해상 교역과 어업 활동에 적합한 거점으로 발전하였다.
올비아는 단순한 항구 마을에 그치지 않고 점차 독자적인 정치·경제적 정체성을 갖춘 도시로 성장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는 '아스타코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바닷가재를 뜻하는 단어와 연결되는 어원을 가진 명칭이다. 이는 해당 도시가 해양 자원, 특히 어업과 관련된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스타코스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걸쳐 비티니아 지역에서의 해양 활동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며,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나톨리아 내륙을 연결하는 교역로 상의 중요한 중계 지점이었다. 특히 소아시아 북서부에 퍼져 있던 여러 도시 국가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졌으며, 헬레니즘 이전부터 활발한 도시 생활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스타코스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기원전 3세기 초, 마케도니아 제국의 유산을 두고 경쟁하던 디아도코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리시마코스가 소아시아 서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 도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리시마코스는 전략적 목적에서 아스타코스를 파괴하고, 이 지역을 자신의 군사적 지배 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 결과 아스타코스는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도시의 정치적 중심성과 경제 활동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도시의 파괴 이후 아스타코스는 회복되지 못하고 역사에서 그 이름을 잃게 되었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은 정착과 도시 활동이 중단된 채 방치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침묵의 시기는 곧 새로운 도시인 니코메디아의 건설로 이어졌으며, 이는 아스타코스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로 도약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올비아는 단순한 항구 마을에 그치지 않고 점차 독자적인 정치·경제적 정체성을 갖춘 도시로 성장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는 '아스타코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바닷가재를 뜻하는 단어와 연결되는 어원을 가진 명칭이다. 이는 해당 도시가 해양 자원, 특히 어업과 관련된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스타코스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걸쳐 비티니아 지역에서의 해양 활동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며,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나톨리아 내륙을 연결하는 교역로 상의 중요한 중계 지점이었다. 특히 소아시아 북서부에 퍼져 있던 여러 도시 국가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졌으며, 헬레니즘 이전부터 활발한 도시 생활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스타코스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기원전 3세기 초, 마케도니아 제국의 유산을 두고 경쟁하던 디아도코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리시마코스가 소아시아 서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 도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리시마코스는 전략적 목적에서 아스타코스를 파괴하고, 이 지역을 자신의 군사적 지배 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 결과 아스타코스는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도시의 정치적 중심성과 경제 활동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도시의 파괴 이후 아스타코스는 회복되지 못하고 역사에서 그 이름을 잃게 되었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은 정착과 도시 활동이 중단된 채 방치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침묵의 시기는 곧 새로운 도시인 니코메디아의 건설로 이어졌으며, 이는 아스타코스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로 도약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2.2. 니코메디아의 재건과 비티니아 왕국의 수도[편집]
아스타코스가 파괴된 이후, 비워진 도시의 자리는 곧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으로 다시 태어났다. 비티니아 왕국의 군주였던 니코메데스 1세는 기원전 264년경, 혹은 일부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262년경에 해당 지역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그 도시를 니코메디아라 명명하였다. 이는 단순한 도시 재건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의 정체성과 권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정치적 행위였다.
니코메디아는 곧바로 비티니아 왕국의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국왕은 이 도시를 통해 새로운 왕조의 중심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도시의 인구를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 칼케돈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는 두 도시 간 인구와 자원의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칼케돈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반대로 니코메디아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니코메데스 1세는 이 새로운 수도에 자신의 통치 정당성과 왕권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도시 곳곳에 웅장한 건축물을 세웠다. 그는 단단한 석재로 성벽을 건설하여 방어 능력을 강화하였으며, 도시의 상징으로 상아로 만든 자신의 조각상을 제작하게 하여 이를 로마로 보내, 외부 세계에도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조각상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왕권을 홍보하고 국제적 위상을 드러내는 외교적 수단이었다.
도시의 설계 또한 정교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높은 지대에는 왕실 궁전이 위치하였는데, 이는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써 군주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하였다. 왕궁 아래에는 법정, 관청, 회당 등의 공공 건물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시민들의 주거 구역은 그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배치되었다. 해안선에는 항구가 건설되어, 소아시아 내륙과 에게 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해상 교역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니코메디아는 왕의 직접적인 주도로 기획되고 구축된 도시로서, 단지 행정적 중심지에 그치지 않고 군사적 방어와 해상 교역, 왕권의 상징성과 문화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적인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도시 구조는 이후 니코메디아가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시기까지도 지속적으로 중시되며 이어지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니코메디아는 곧바로 비티니아 왕국의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국왕은 이 도시를 통해 새로운 왕조의 중심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도시의 인구를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 칼케돈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는 두 도시 간 인구와 자원의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칼케돈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반대로 니코메디아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니코메데스 1세는 이 새로운 수도에 자신의 통치 정당성과 왕권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도시 곳곳에 웅장한 건축물을 세웠다. 그는 단단한 석재로 성벽을 건설하여 방어 능력을 강화하였으며, 도시의 상징으로 상아로 만든 자신의 조각상을 제작하게 하여 이를 로마로 보내, 외부 세계에도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조각상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왕권을 홍보하고 국제적 위상을 드러내는 외교적 수단이었다.
도시의 설계 또한 정교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높은 지대에는 왕실 궁전이 위치하였는데, 이는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써 군주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하였다. 왕궁 아래에는 법정, 관청, 회당 등의 공공 건물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시민들의 주거 구역은 그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배치되었다. 해안선에는 항구가 건설되어, 소아시아 내륙과 에게 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해상 교역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니코메디아는 왕의 직접적인 주도로 기획되고 구축된 도시로서, 단지 행정적 중심지에 그치지 않고 군사적 방어와 해상 교역, 왕권의 상징성과 문화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적인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도시 구조는 이후 니코메디아가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시기까지도 지속적으로 중시되며 이어지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2.3. 로마의 품으로[편집]
니코메디아는 비티니아 왕국이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부터 일관되게 로마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도시의 정치적 생존 전략이자, 동방 지역에서 안정된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도시의 지도자들과 주민들은 로마의 통치 원칙을 수용하였으며, 제국과의 협력 속에서 도시의 권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니코메디아가 로마 제국 동부에서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거점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곧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서기 1세기 말부터 1세기 중엽에 걸쳐 벌어진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니코메디아의 운명을 시험하는 사건이었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중,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에 대항하여 대규모 반격을 시도하였고, 그 일환으로 니코메디아를 점령하였다. 그는 이 도시를 군사적 중심지로 삼아 로마군의 동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집요한 반격과 내륙 지역의 전쟁 수행 능력 앞에서 미트리다테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니코메디아는 다시 로마의 손에 들어갔다.
전쟁 이후, 니코메디아는 단순한 속주 도시를 넘어 로마 제국 내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도시 내에서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이는 곧 도시가 제국 내에서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함을 의미하였다. 동전의 주조는 도시의 경제적 독립성과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상징적 행위였으며, 니코메디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니코메디아의 평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서기 120년, 도시 전역을 뒤흔든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피난하였으며, 도시의 중심 건축물과 기반 시설은 거의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참사 속에서 도시를 구한 인물은 당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 그는 니코메디아 출신으로 알려진 철학자이자 행정가인 아리안누스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대규모 복구 사업을 직접 후원하였다. 하드리아누스의 기부는 단순한 원조 차원을 넘어서, 제국 내 도시들에 대한 황제의 책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복구 이후 니코메디아는 다시금 동방의 거점으로서 위신을 회복하였으며,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도 확립되었다. 기독교가 점차 제국 내에서 확산되던 이 시기, 니코메디아는 교회 행정 체계에서 최고 지위 가운데 하나인 ‘메트로폴리스’로 지정되었다. 이는 비티니아 전역에서 가장 높은 주교 관할권을 가진 도시였음을 뜻하며, 교회 조직과 로마 제국의 행정이 긴밀히 결합하는 국면에서 니코메디아의 중심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곧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서기 1세기 말부터 1세기 중엽에 걸쳐 벌어진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니코메디아의 운명을 시험하는 사건이었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중,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에 대항하여 대규모 반격을 시도하였고, 그 일환으로 니코메디아를 점령하였다. 그는 이 도시를 군사적 중심지로 삼아 로마군의 동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집요한 반격과 내륙 지역의 전쟁 수행 능력 앞에서 미트리다테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니코메디아는 다시 로마의 손에 들어갔다.
전쟁 이후, 니코메디아는 단순한 속주 도시를 넘어 로마 제국 내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도시 내에서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이는 곧 도시가 제국 내에서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함을 의미하였다. 동전의 주조는 도시의 경제적 독립성과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상징적 행위였으며, 니코메디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니코메디아의 평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서기 120년, 도시 전역을 뒤흔든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피난하였으며, 도시의 중심 건축물과 기반 시설은 거의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참사 속에서 도시를 구한 인물은 당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 그는 니코메디아 출신으로 알려진 철학자이자 행정가인 아리안누스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대규모 복구 사업을 직접 후원하였다. 하드리아누스의 기부는 단순한 원조 차원을 넘어서, 제국 내 도시들에 대한 황제의 책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복구 이후 니코메디아는 다시금 동방의 거점으로서 위신을 회복하였으며,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도 확립되었다. 기독교가 점차 제국 내에서 확산되던 이 시기, 니코메디아는 교회 행정 체계에서 최고 지위 가운데 하나인 ‘메트로폴리스’로 지정되었다. 이는 비티니아 전역에서 가장 높은 주교 관할권을 가진 도시였음을 뜻하며, 교회 조직과 로마 제국의 행정이 긴밀히 결합하는 국면에서 니코메디아의 중심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된 것이다.
2.4.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제국의 동방 수도[편집]
3세기 중반, 니코메디아는 또 한 차례 지진 피해를 입으며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이 자연재해는 이미 정치적, 경제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에 발생하여 도시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제국 차원의 대전환 속에서 니코메디아는 오히려 새롭게 중흥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서기 29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사두정치, 즉 테트라르키아 체제를 도입하였고, 동방 제국의 수도로 니코메디아를 공식 지정하였다.
이 선택은 단순히 도시의 지리적 위치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니코메디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지에 있었고, 동방의 국경 방어, 교역, 그리고 로마적 질서의 전파를 위한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따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의 재건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는 도시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공공 건축 사업을 시행하였고, 거대한 황궁, 군수품 생산을 위한 공장, 공공 목욕탕, 원형극장, 대형 기념 건축물, 그리고 자체 화폐를 주조하는 주조소를 건설하였다. 이 같은 도시 재건 사업은 단순한 복구 수준을 넘어, 동방 제국의 상징적 수도로서 니코메디아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종합적인 계획이었다.
그 결과 니코메디아는 단숨에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티오키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도시에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인구가 집중되었고, 제국의 행정, 군사, 상업, 종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 아래에서 니코메디아는 동로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303년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그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 박해를 공식화하였고, 니코메디아는 그 박해의 시작점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는 곧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몰아가졌다. 당시 황궁 내부에는 기독교 고위 관료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기독교 내부의 반란으로 간주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니코메디아의 대성당이 철거되었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체포되거나 고문당했으며, 일부는 처형되었다. 이 시기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한 대표적 인물로는 성 바르바라, 성 키리아케, 성 율리아네, 성 판텔레이몬 등이 있다. 이들의 이름은 훗날 기독교 신앙 내에서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니코메디아는 순교의 성지로 기억되기에 이르렀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 퇴위하고 공적 생활에서 물러났다. 그와 함께 니코메디아는 다시금 제국 행정의 중심에서 한 발 물러났으며, 제국 내의 정치 지형 또한 서서히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기에 구축된 도시 기반과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후에도 계속 영향을 끼쳤으며, 니코메디아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여전히 동방 제국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다.
이 선택은 단순히 도시의 지리적 위치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니코메디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지에 있었고, 동방의 국경 방어, 교역, 그리고 로마적 질서의 전파를 위한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따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의 재건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는 도시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공공 건축 사업을 시행하였고, 거대한 황궁, 군수품 생산을 위한 공장, 공공 목욕탕, 원형극장, 대형 기념 건축물, 그리고 자체 화폐를 주조하는 주조소를 건설하였다. 이 같은 도시 재건 사업은 단순한 복구 수준을 넘어, 동방 제국의 상징적 수도로서 니코메디아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종합적인 계획이었다.
그 결과 니코메디아는 단숨에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티오키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도시에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인구가 집중되었고, 제국의 행정, 군사, 상업, 종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 아래에서 니코메디아는 동로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303년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그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 박해를 공식화하였고, 니코메디아는 그 박해의 시작점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는 곧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몰아가졌다. 당시 황궁 내부에는 기독교 고위 관료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기독교 내부의 반란으로 간주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니코메디아의 대성당이 철거되었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체포되거나 고문당했으며, 일부는 처형되었다. 이 시기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한 대표적 인물로는 성 바르바라, 성 키리아케, 성 율리아네, 성 판텔레이몬 등이 있다. 이들의 이름은 훗날 기독교 신앙 내에서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니코메디아는 순교의 성지로 기억되기에 이르렀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 퇴위하고 공적 생활에서 물러났다. 그와 함께 니코메디아는 다시금 제국 행정의 중심에서 한 발 물러났으며, 제국 내의 정치 지형 또한 서서히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기에 구축된 도시 기반과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후에도 계속 영향을 끼쳤으며, 니코메디아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여전히 동방 제국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다.
2.5.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니코메디아의 황혼[편집]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이후, 로마 제국은 다시금 황제 계승권을 둘러싼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정한 사두정치 체제는 장기적인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유력한 군사 지휘관들은 각자의 세력을 기반으로 제국 전체를 장악하고자 다투었다. 이 혼란의 시대를 종결지은 인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그는 서방에서 출발하여 동방으로 진군했고, 324년에 리키니우스를 무너뜨리며 제국의 단일한 통치자로 등극하였다.
승리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니코메디아를 일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중심지로 삼았다. 이 도시는 여전히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기반 시설과 행정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동방의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수도를 새롭게 구상하고 있었고, 그 구상의 중심에 있었던 도시는 고대 비잔티온이었다. 이곳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공되면서 니코메디아는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곧바로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니코메디아는 새로운 수도와의 근접성 덕분에 여전히 중요한 학문과 종교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도시에는 여러 교회와 학문 기관이 유지되었고, 특히 기독교 공동체는 박해의 시기를 지나 안정된 정착지를 이루며 교세를 확장하였다. 니코메디아는 메트로폴리스로서 지역 교회 구조의 정점에 자리하였고, 그 명성은 수도 이전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니코메디아의 지속적인 성장과 안정을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 요소로 작용하였다. 도시가 위치한 지질대는 지진 활동이 빈번한 지점에 놓여 있었으며, 358년과 363년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였다. 6세기 중엽에는 554년, 이어 8세기 초에는 740년에도 또다시 강진이 발생하여 도시 기반을 반복적으로 파괴하였다. 이러한 지진은 도시의 건축물과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약화시켰고, 주민들의 삶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와 지논의 통치기에도 이러한 자연재해는 빈번히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도시 복구는 반복되었으나 점차 회복력은 떨어지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도시 재건을 시도하였다. 그의 통치는 제국 전역에서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유명하였고, 니코메디아 역시 그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국경 분쟁이 심화되고, 아랍 세력이 동방으로부터 침입하면서 도시의 안전은 또다시 위협을 받았다. 외세의 침략과 반복되는 지진은 니코메디아의 사회 구조와 인구 기반을 붕괴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고, 도시는 점차 동로마 제국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니코메디아는 더 이상 제국의 중심지로서 언급되지 않게 되었으며, 정치적·종교적 영향력도 감소하였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 사이,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를 아우르는 몇 세기 동안, 니코메디아는 단순한 도시를 넘어 제국의 동방에서 빛나는 중심지로 존재하였다. 이 도시는 로마 제국의 변천 속에서 시대의 굴곡을 몸소 겪어낸 상징적인 장소로, 제국사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승리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니코메디아를 일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중심지로 삼았다. 이 도시는 여전히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기반 시설과 행정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동방의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수도를 새롭게 구상하고 있었고, 그 구상의 중심에 있었던 도시는 고대 비잔티온이었다. 이곳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공되면서 니코메디아는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곧바로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니코메디아는 새로운 수도와의 근접성 덕분에 여전히 중요한 학문과 종교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도시에는 여러 교회와 학문 기관이 유지되었고, 특히 기독교 공동체는 박해의 시기를 지나 안정된 정착지를 이루며 교세를 확장하였다. 니코메디아는 메트로폴리스로서 지역 교회 구조의 정점에 자리하였고, 그 명성은 수도 이전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니코메디아의 지속적인 성장과 안정을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 요소로 작용하였다. 도시가 위치한 지질대는 지진 활동이 빈번한 지점에 놓여 있었으며, 358년과 363년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였다. 6세기 중엽에는 554년, 이어 8세기 초에는 740년에도 또다시 강진이 발생하여 도시 기반을 반복적으로 파괴하였다. 이러한 지진은 도시의 건축물과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약화시켰고, 주민들의 삶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와 지논의 통치기에도 이러한 자연재해는 빈번히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도시 복구는 반복되었으나 점차 회복력은 떨어지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도시 재건을 시도하였다. 그의 통치는 제국 전역에서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유명하였고, 니코메디아 역시 그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국경 분쟁이 심화되고, 아랍 세력이 동방으로부터 침입하면서 도시의 안전은 또다시 위협을 받았다. 외세의 침략과 반복되는 지진은 니코메디아의 사회 구조와 인구 기반을 붕괴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고, 도시는 점차 동로마 제국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니코메디아는 더 이상 제국의 중심지로서 언급되지 않게 되었으며, 정치적·종교적 영향력도 감소하였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 사이,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를 아우르는 몇 세기 동안, 니코메디아는 단순한 도시를 넘어 제국의 동방에서 빛나는 중심지로 존재하였다. 이 도시는 로마 제국의 변천 속에서 시대의 굴곡을 몸소 겪어낸 상징적인 장소로, 제국사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2.6. 오스만 제국의 정복[편집]
동로마 제국의 말기, 니코메디아는 과거의 위엄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상을 회복한 이후, 니코메디아는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에서 점점 멀어졌으며, 제국 문서나 연대기에서도 점차 그 이름이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완전히 폐허로 전락하지는 않았고, 전략적 위치와 군사적 가치 때문에 동로마 황제들이 간헐적으로 거처하거나 일시적 주둔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인근 해역과 도로망의 중심지로서,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지역적 통제권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초,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를 무대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던 오스만 세력은 비티니아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니코메디아는 그들의 주요 정복 대상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도시는 이미 정치적, 군사적 방어 체계가 약화된 상태였으며, 제국의 군사적 지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337년, 오스만군은 니코메디아를 공격하였고, 큰 저항 없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 정복은 단순한 도시 점령을 넘어,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내륙 지배권이 사실상 종결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니코메디아의 함락으로 인해 오스만 세력은 마르마라해 동쪽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하게 되었고, 이는 곧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도시 정복 이후, 니코메디아는 이슬람 도시 체계에 통합되었으며, 행정적 구조와 종교 기관 또한 오스만 체제에 맞추어 재편되었다.
니코메디아는 그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정복과 재건을 거듭하며 살아남았던 도시였다. 기원전 그리스 식민 시대부터 비티니아 왕국의 수도,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전략 거점, 그리고 기독교 순교의 중심지로서 니코메디아는 고대와 중세를 통과하는 문명 교차점으로서 기능하였다. 수차례의 지진과 외침 속에서도 도시의 구조는 수복되었고, 때로는 제국의 수도로도 기능할 만큼 그 중요성은 꾸준히 유지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 이후 그 명성은 점차 쇠퇴하였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손에 들어가며 고대 도시로서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도시의 중심은 점차 이슬람 문화와 오스만 행정 체계에 맞춰 변화하였고, 과거 니코메디아의 흔적은 점차 신도시의 틀 속에 흡수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메디아는 고대 세계에서 중세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정치와 종교, 군사와 학문이 교차하던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14세기 초,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를 무대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던 오스만 세력은 비티니아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니코메디아는 그들의 주요 정복 대상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도시는 이미 정치적, 군사적 방어 체계가 약화된 상태였으며, 제국의 군사적 지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337년, 오스만군은 니코메디아를 공격하였고, 큰 저항 없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 정복은 단순한 도시 점령을 넘어,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내륙 지배권이 사실상 종결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니코메디아의 함락으로 인해 오스만 세력은 마르마라해 동쪽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하게 되었고, 이는 곧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도시 정복 이후, 니코메디아는 이슬람 도시 체계에 통합되었으며, 행정적 구조와 종교 기관 또한 오스만 체제에 맞추어 재편되었다.
니코메디아는 그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정복과 재건을 거듭하며 살아남았던 도시였다. 기원전 그리스 식민 시대부터 비티니아 왕국의 수도,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전략 거점, 그리고 기독교 순교의 중심지로서 니코메디아는 고대와 중세를 통과하는 문명 교차점으로서 기능하였다. 수차례의 지진과 외침 속에서도 도시의 구조는 수복되었고, 때로는 제국의 수도로도 기능할 만큼 그 중요성은 꾸준히 유지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 이후 그 명성은 점차 쇠퇴하였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손에 들어가며 고대 도시로서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도시의 중심은 점차 이슬람 문화와 오스만 행정 체계에 맞춰 변화하였고, 과거 니코메디아의 흔적은 점차 신도시의 틀 속에 흡수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메디아는 고대 세계에서 중세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정치와 종교, 군사와 학문이 교차하던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1] 이즈미르가 아니라 이즈미트다. 둘다 '이즈' 돌림으로 시작하는 도시라 자주 혼동되지만, 이즈미르의 그리스어 명칭은 스미르나(스미르니)라서 어원을 살펴보면 전혀 다른 도시라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