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로마의 역사 | ||||||
Imperium Romanum | ||||||||||||||||||||||||||||||||||||||||||||||||||||||
로마 제국 | ||||||||||||||||||||||||||||||||||||||||||||||||||||||
로마 제국의 최대 영토 | ||||||||||||||||||||||||||||||||||||||||||||||||||||||
성립 이전 | 최종 분할 | |||||||||||||||||||||||||||||||||||||||||||||||||||||
초기 국호 |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 Senatus Populusque Romanus | |||||||||||||||||||||||||||||||||||||||||||||||||||||
수도 | ||||||||||||||||||||||||||||||||||||||||||||||||||||||
언어 | ||||||||||||||||||||||||||||||||||||||||||||||||||||||
주요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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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
국교 | ||||||||||||||||||||||||||||||||||||||||||||||||||||||
면적 | ||||||||||||||||||||||||||||||||||||||||||||||||||||||
인구 | 56,800,000명 (기원전 25년) | |||||||||||||||||||||||||||||||||||||||||||||||||||||
통화 | ||||||||||||||||||||||||||||||||||||||||||||||||||||||
현재 국가 | ||||||||||||||||||||||||||||||||||||||||||||||||||||||
언어별 명칭 | ||||||||||||||||||||||||||||||||||||||||||||||||||||||
Imperium Romanum | ||||||||||||||||||||||||||||||||||||||||||||||||||||||
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 ||||||||||||||||||||||||||||||||||||||||||||||||||||||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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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로마 제국(BC 27 ~ AD 1453)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로마 제정이 성립한 과정은 내전과 정치 개혁의 교차 속에서 이루어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사적 정복과 정치적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로마 정치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였으며, 종신 독재관이라는 사실상의 군주 지위에 오르면서 공화정의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의 암살은 일시적으로 공화정 복원의 기대를 낳았으나, 실제로는 후계자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사이의 권력 분점 체제(2차 삼두정치)를 거쳐 또 다른 내전을 불러왔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아 제1시민으로서 제국의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이른바 원수정이라 불리는 이 체제는 공화정의 제도적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사실상 제국의 통일된 중앙 권력을 창출하는 구조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병권과 속주 통치권을 장악하였으며, 원로원과의 협력 구도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이후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로 이어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제정을 제도적으로 고착시키는 한편, 수도 로마의 정비와 속주 행정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이후 네 황제의 해라는 내전을 거쳐 황위를 차지한 플라비우스 왕조가 제국을 안정시켰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부 출신 황제로서 속주 방어와 행정 조직의 재편을 이끌었다.
도미티아누스 시기에는 황제권이 절대화되며 전제정의 성격이 강해졌으며, 이는 후대의 군인 황제 시대를 예고하는 특징이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으로 이어지는 오현제 시대는 로마 제국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에는 속주민에 대한 시민권 부여 확대, 도로망 정비, 국경 방어선의 강화, 법제도의 정비 등이 이루어졌으며, 트라야누스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까지 확장되면서 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어졌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제국은 다시 불안정한 흐름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전제군주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귀족층과 군부의 반발이 거세졌고, 결국 다섯 황제의 해라는 내전과 세베루스 왕조 하의 일시적 안정을 거쳐, 3세기의 위기(군인 황제 시대)라는 본격적인 난세가 도래했다.
이 시기는 여러 장군들이 짧은 기간 동안 황제로 즉위하고 폐위되는 불안정한 정치 구조가 반복되었으며,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 등 일부 속주에서 독자적인 제국을 선포한 세력이 나타나는 등 분열의 조짐이 본격화되었다. 외부로는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의 침입이 잦아졌고, 내부로는 경제 기반의 붕괴와 도시 생태의 쇠퇴가 가속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황제권을 강화하였고, 제국을 네 명의 공동 통치자가 분할 지배하는 체제를 도입하였다. 이른바 사두정치라 불리는 이 체제는 서방과 동방을 각각 두 명의 정제와 부제로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군사적 방어와 행정의 효율을 높였으나, 권력 계승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또다시 내전을 불러왔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단일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그가 행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종교적 기반으로 활용하면서 교회를 통치 체제에 통합하였고, 동방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잔티움을 새 수도로 삼아 도시를 대대적으로 개조하였다. 이 도시는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리며 동방 제국의 중심지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은 다시 분할 통치로 나아갔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일시적으로 제국을 재통일하였으나 그의 죽음 이후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할 상속하면서 동서 분할이 공식화되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 구역상의 분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 문화와 종교 운영 방식을 바탕으로 두 개의 제국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이처럼 로마 제국은 공화정 이후 점진적으로 전제정으로 전환되었으며, 초기에는 원로원과의 협력을 통한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점차 황제 중심의 권력 구조가 고착되었다.
동시에 국경 방어와 속주 통치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복수의 황제가 협력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 제국의 생존을 연장시킨 한편, 궁극적으로는 동서의 정치적 분화를 낳았고, 이후 동로마 제국의 독자적 역사로 이어지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로마 제정이 성립한 과정은 내전과 정치 개혁의 교차 속에서 이루어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사적 정복과 정치적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로마 정치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였으며, 종신 독재관이라는 사실상의 군주 지위에 오르면서 공화정의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의 암살은 일시적으로 공화정 복원의 기대를 낳았으나, 실제로는 후계자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사이의 권력 분점 체제(2차 삼두정치)를 거쳐 또 다른 내전을 불러왔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아 제1시민으로서 제국의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이른바 원수정이라 불리는 이 체제는 공화정의 제도적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사실상 제국의 통일된 중앙 권력을 창출하는 구조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병권과 속주 통치권을 장악하였으며, 원로원과의 협력 구도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이후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로 이어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제정을 제도적으로 고착시키는 한편, 수도 로마의 정비와 속주 행정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이후 네 황제의 해라는 내전을 거쳐 황위를 차지한 플라비우스 왕조가 제국을 안정시켰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부 출신 황제로서 속주 방어와 행정 조직의 재편을 이끌었다.
도미티아누스 시기에는 황제권이 절대화되며 전제정의 성격이 강해졌으며, 이는 후대의 군인 황제 시대를 예고하는 특징이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으로 이어지는 오현제 시대는 로마 제국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에는 속주민에 대한 시민권 부여 확대, 도로망 정비, 국경 방어선의 강화, 법제도의 정비 등이 이루어졌으며, 트라야누스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까지 확장되면서 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어졌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제국은 다시 불안정한 흐름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전제군주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귀족층과 군부의 반발이 거세졌고, 결국 다섯 황제의 해라는 내전과 세베루스 왕조 하의 일시적 안정을 거쳐, 3세기의 위기(군인 황제 시대)라는 본격적인 난세가 도래했다.
이 시기는 여러 장군들이 짧은 기간 동안 황제로 즉위하고 폐위되는 불안정한 정치 구조가 반복되었으며,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 등 일부 속주에서 독자적인 제국을 선포한 세력이 나타나는 등 분열의 조짐이 본격화되었다. 외부로는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의 침입이 잦아졌고, 내부로는 경제 기반의 붕괴와 도시 생태의 쇠퇴가 가속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황제권을 강화하였고, 제국을 네 명의 공동 통치자가 분할 지배하는 체제를 도입하였다. 이른바 사두정치라 불리는 이 체제는 서방과 동방을 각각 두 명의 정제와 부제로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군사적 방어와 행정의 효율을 높였으나, 권력 계승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또다시 내전을 불러왔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단일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그가 행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종교적 기반으로 활용하면서 교회를 통치 체제에 통합하였고, 동방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잔티움을 새 수도로 삼아 도시를 대대적으로 개조하였다. 이 도시는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리며 동방 제국의 중심지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은 다시 분할 통치로 나아갔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일시적으로 제국을 재통일하였으나 그의 죽음 이후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할 상속하면서 동서 분할이 공식화되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 구역상의 분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 문화와 종교 운영 방식을 바탕으로 두 개의 제국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이처럼 로마 제국은 공화정 이후 점진적으로 전제정으로 전환되었으며, 초기에는 원로원과의 협력을 통한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점차 황제 중심의 권력 구조가 고착되었다.
동시에 국경 방어와 속주 통치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복수의 황제가 협력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 제국의 생존을 연장시킨 한편, 궁극적으로는 동서의 정치적 분화를 낳았고, 이후 동로마 제국의 독자적 역사로 이어지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2. 시대별 역사[편집]
2.1. 원수정 시대[편집]
2.1.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편집]
2.1.2. 네 황제의 해[편집]
2.1.3. 플라비우스 왕조[편집]
2.1.4.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편집]
2.1.5. 다섯 황제의 해[편집]
2.1.6. 세베루스 왕조[편집]
2.1.7. 3세기의 위기(군인 황제 시대)[편집]
2.2. 전제정 시대[편집]
2.2.1. 사두정치[편집]
2.2.2. 콘스탄티누스 왕조[편집]
2.2.3. 발렌티니아누스 왕조[편집]
2.2.4. 테오도시우스 왕조[편집]
2.2.5. 395년 동서 분할 이후[편집]
2.2.5.1. 서로마 제국 [편집]
2.2.5.2. 동로마 제국[편집]
[1]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로서의 건설을 명했지만 천도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건설되고 서로마가 망해버리면서 모양새가 로마시를 버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 치세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시와 동일한 특별시로 승격되어 로마와 대등하게 되었을 뿐, 사실 동서 최종분할 전까지 로마 제국의 명목상 수도는 항상 로마였다. 제국 최종 분할 이후에도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가 메디올라눔, 라벤나였다지만 명목상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멸망할 때까지도 항상 로마였다.[2] 니케아 제국 시절 수도[3] 니케아 제국의 점령 이후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동로마 제국 시절이다.[4] 공화정 시대의 전통을 일부 계승한 로마 특유의 전제정이었다. 안소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는 그의 저서 비잔틴 공화국(The Byzantine Republic)에서 황제를 마치 '제위 세습이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5] 사실 이는 북아프리카의 국경을 어디로 하냐 문제로서, 6,500,000km²로 보기도 한다. 북아프리카의 경우 사하라 사막이 있기 때문에 국경선이 무의미하다.[6] 1/16 데나리우스[7] 1/8 데나리우스[8] 1/4 데나리우스[9] 카라칼라 황제 때 추가된 2 데나리우스짜리 은화.[10] 25 데나리우스[11]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개혁 때부터 나온 금화.[12] 조사인 '의'에 해당하는 τῶν의 유무에서 고전 그리스어와의 차이가 있다.[13] '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다른 언어와 달리 독일어에서는 '로마제국기(Römische Kaiserzeit)'라는 표현으로 로마 제국을 지칭하는데 이는 단순 한 국가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로마라는 다양한 국가들의 시기를 포괄하여 지칭하기 위함인듯 하다. 보통은 로마 공화국 이후에서 서로마 제국에 이르는 기간의 로마제국을 지칭한다.[14] 여헌(혹은 이헌). 트락시아네, 레켐, 알렉산드리아 등의 도시명을 음차한 것으로 추정. 가장 오래된 한문 명칭. 상고한어: *riːl *qʰan (정장상팡), *(r)ˤij *qʰa(r) (백스터-사가르)[15] 여헌. 앞선 여헌과 같은 발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음차. 가장 오래된 한문 명칭. 상고한어: *riːl *qʰan (정장상팡), *(r)ˤij *qʰa(r) (백스터-사가르)[16] 대진. 장건의 원정으로 생겨난 명칭. 주로 '로마 제국'의 공식 명칭으로 통용됨. 상고한어: /*lˤat-s (dz)i(n)/ (백스터-사가르) /*daːds zin/ (정장상팡)[17] 불림. 주로 당나라시기의 명칭. '로마'를 뜻하는 고전 그리스어 Ῥώμη에서 유래했다.[18] 나마(라마). '로마' 자체의 음차. 현대 중국어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함. '로마' 도시를 통칭하기도 하다.[19] 아주 짧은 시기이지만, 근대 한국에서는 나만/라만(羅曼)으로 음역했었다. 중국어에서는 Roma(罗马/羅馬)를 음역한 것에 비해, 당대 한국에서는 형용사형 Roman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