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외교에서 넘어옴
분류
로마의 역사 | ||||||
Imperium Romanum | |||||||||||||||||||
로마 제국 | |||||||||||||||||||
![]() | |||||||||||||||||||
동로마 제국의 최대 강역 | |||||||||||||||||||
395년~1204년 1261년~1453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국호 | |||||||||||||||||||
| |||||||||||||||||||
지리 | |||||||||||||||||||
인문 | |||||||||||||||||||
| |||||||||||||||||||
정치 | |||||||||||||||||||
주요 사건 | |||||||||||||||||||
| |||||||||||||||||||
경제 | |||||||||||||||||||
통화 |
1. 개요2. 국호3. 정치4. 역사5. 군사6. 문화7. 경제8. 외교9. 인문 환경
9.1. 민족
10. 로마의 유산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틀9.1.1. 그리스인9.1.2. 트라키아인과 일리리아인9.1.3. 라틴인9.1.4. 아르메니아인9.1.5. 시리아인과 아시리아인(아람계)9.1.6. 이집트인9.1.7. 슬라브족9.1.8. 불가리아인9.1.9. 유대인9.1.10. 고트족 및 게르만계 민족들9.1.11. 기타 소수 민족
9.2. 언어9.3. 종교1. 개요[편집]
ἀλλ’ ἀγρυπνῶν ἅπαντα τὸν ζωῆς χρόνον 나는 생애 내내 깨어 있었으며, Ῥώμης τὰ τέκνα τῆς Νέας ἐρυόμην 새로운 로마의 자손들을 보호하였노라. |
동로마 제국은 서기 395년부터 1453년까지 로마 제국의 동부를 중심으로 존속한 로마 제국의 연속체이다. 공식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연속으로 인식되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였다. 당대의 사람들 또한 이를 별도의 국가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로마 제국이 계속 유지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시대적 구분의 필요에 따라 동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그의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서로마와 동로마를 통치하면서 로마 제국의 행정적 분리가 더욱 뚜렷해졌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한 반면, 동로마 제국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유지하며 1,000년 이상 존속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법적, 군사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적 색채를 더욱 강화하였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번영하였으며, 강력한 관료제와 정교회 체제를 기반으로 한 황제 중심의 통치 구조가 확립되었다.
제국의 역사는 대체로 초기(395 ~ 843년), 중기(843~1204년), 후기(1204~1453년)[36]로 나뉘며,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영토 회복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확장, 서유럽과의 갈등, 십자군 전쟁, 내부 권력 투쟁 등의 요인으로 점진적으로 쇠퇴하였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면서 라틴 제국이 수립되었으나, 1261년 다시 복원되었다. 이후 제국은 점차 축소되었고,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비록 정치적 실체로서의 동로마 제국은 사라졌지만, 그 문화적, 법적, 종교적 유산은 이후 유럽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그의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서로마와 동로마를 통치하면서 로마 제국의 행정적 분리가 더욱 뚜렷해졌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한 반면, 동로마 제국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유지하며 1,000년 이상 존속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법적, 군사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적 색채를 더욱 강화하였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번영하였으며, 강력한 관료제와 정교회 체제를 기반으로 한 황제 중심의 통치 구조가 확립되었다.
제국의 역사는 대체로 초기(395 ~ 843년), 중기(843~1204년), 후기(1204~1453년)[36]로 나뉘며,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영토 회복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확장, 서유럽과의 갈등, 십자군 전쟁, 내부 권력 투쟁 등의 요인으로 점진적으로 쇠퇴하였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면서 라틴 제국이 수립되었으나, 1261년 다시 복원되었다. 이후 제국은 점차 축소되었고,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비록 정치적 실체로서의 동로마 제국은 사라졌지만, 그 문화적, 법적, 종교적 유산은 이후 유럽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 국호[편집]
동로마 제국은 역사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사용한 용어일 뿐이며, 당시 제국 내에서는 결코 쓰이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로 인식하며 국호 또한 이를 반영하였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를 유지하였다.[37]라틴어로는 Imperium Romanum(로마 제국) 또는 Res Publica Romana(로마국)라는 표현이 쓰였으며, 황제의 칭호 또한 로마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로마 제국의 행정과 문화가 그리스화됨에 따라, 국호도 자연스럽게 그리스어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제국의 공식 명칭은 Basileia tōn Rhōmaiōn(로마인의 제국)으로 정착되었으며, 이는 로마 제국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들이 서방이든 동방이든 모든 로마 영토의 정당한 지배자임을 주장하였다. 비록 제국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행정과 문화가 그리스적 요소를 더 많이 포함하게 되었지만, 황제와 국민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로마인"(Rhōmaioi)이라 불렀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법과 전통을 계승한 국가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황제들은 공식 칭호로 Autokrator kai Basileus tōn Rhōmaiōn(로마인의 절대 군주)를 사용하며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정통한 황제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점차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Imperium Graecorum)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의 계승성을 부정하려 했다. 800년 서방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수립된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으며, 서방 세계는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38]반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계속해서 "룸"(로마)이라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 또한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로마 황제 명칭을 사용하며 자신들의 국가가 로마를 계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동유럽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스스로를 "제3의 로마"라고 칭하며 황제권을 계승하려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호를 바꾸지 않았으며, 1453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들은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Basileus tōn Rhōmaiōn)로 칭하였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신(新) 로마"(Nova Roma)로 불렸으며, 이는 제국의 정통성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결국 동로마 제국의 국호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제국 내부에서는 끝까지 자신들을 "로마인"으로 인식하며, 제국의 정치·문화·법적 유산을 계승하였다. 비록 서방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으로 부르게 되었지만, 실제로 제국 내부에서는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유지하며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정의해 나갔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를 유지하였다.[37]라틴어로는 Imperium Romanum(로마 제국) 또는 Res Publica Romana(로마국)라는 표현이 쓰였으며, 황제의 칭호 또한 로마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로마 제국의 행정과 문화가 그리스화됨에 따라, 국호도 자연스럽게 그리스어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제국의 공식 명칭은 Basileia tōn Rhōmaiōn(로마인의 제국)으로 정착되었으며, 이는 로마 제국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들이 서방이든 동방이든 모든 로마 영토의 정당한 지배자임을 주장하였다. 비록 제국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행정과 문화가 그리스적 요소를 더 많이 포함하게 되었지만, 황제와 국민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로마인"(Rhōmaioi)이라 불렀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법과 전통을 계승한 국가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황제들은 공식 칭호로 Autokrator kai Basileus tōn Rhōmaiōn(로마인의 절대 군주)를 사용하며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정통한 황제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점차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Imperium Graecorum)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의 계승성을 부정하려 했다. 800년 서방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수립된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으며, 서방 세계는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38]반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계속해서 "룸"(로마)이라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 또한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로마 황제 명칭을 사용하며 자신들의 국가가 로마를 계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동유럽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스스로를 "제3의 로마"라고 칭하며 황제권을 계승하려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호를 바꾸지 않았으며, 1453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들은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Basileus tōn Rhōmaiōn)로 칭하였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신(新) 로마"(Nova Roma)로 불렸으며, 이는 제국의 정통성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결국 동로마 제국의 국호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제국 내부에서는 끝까지 자신들을 "로마인"으로 인식하며, 제국의 정치·문화·법적 유산을 계승하였다. 비록 서방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으로 부르게 되었지만, 실제로 제국 내부에서는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유지하며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정의해 나갔다.
3. 정치[편집]
동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 중심 체제를 계승하면서도, 행정·군사·종교적 요소가 결합된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황제가 제국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가 유지되었다.
제국의 통치는 황제(Basileus tōn Rhōmaiōn)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황제는 단순한 세속적 통치자가 아니라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다. 입법·행정·군사·종교적 권한을 모두 장악한 황제는 제국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로서, 즉위 과정에서 원로원의 승인이나 군대의 지지가 필요할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세습제와 궁정 내 권력 투쟁을 통해 결정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행정 조직은 정교한 관료 체계를 갖추었으며, 황제를 보좌하는 여러 기관이 운영되었다. 황제 직속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는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는 사크라 콘실리아(황제의 회의체)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재정을 담당하는 로고테테스, 외교와 문서를 담당하는 마지스트로스, 군사 작전을 총괄하는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과 같은 고위 관료들이 행정과 국정을 운영하였다. 지방 행정은 테마제(군관구)로 운영되었으며, 각 테마의 지휘관인 스트라테고스가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며 중앙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였다.
7세기 이후 도입된 테마 제도는 행정과 군사를 결합한 제도로, 각 지역을 방어하면서도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체제였다. 각 테마는 독립적인 군대를 보유하였으며, 지역 지휘관이 행정과 군사력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이는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방 군사력의 강화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법률 체계는 로마 법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편찬한 법전(Corpus Juris Civilis)이 제국의 공식적인 법률로 자리 잡았다. 이후 여러 황제들이 이를 보완하고 개정하여 법률 체계를 더욱 체계화하였으며, 바실리우스 1세와 레온 6세 시대에는 법률이 더욱 정비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법률은 이후 유럽 법 체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와 정치 또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황제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로서 강력한 종교적 권한을 행사하였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었으며, 신학적 논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로 불리며,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결합된 정치 구조를 형성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는 황제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관료제와 테마제를 통해 행정과 군사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법률과 종교 정책을 통해 국가를 통제하며, 로마 제국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다.
제국의 통치는 황제(Basileus tōn Rhōmaiōn)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황제는 단순한 세속적 통치자가 아니라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다. 입법·행정·군사·종교적 권한을 모두 장악한 황제는 제국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로서, 즉위 과정에서 원로원의 승인이나 군대의 지지가 필요할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세습제와 궁정 내 권력 투쟁을 통해 결정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행정 조직은 정교한 관료 체계를 갖추었으며, 황제를 보좌하는 여러 기관이 운영되었다. 황제 직속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는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는 사크라 콘실리아(황제의 회의체)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재정을 담당하는 로고테테스, 외교와 문서를 담당하는 마지스트로스, 군사 작전을 총괄하는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과 같은 고위 관료들이 행정과 국정을 운영하였다. 지방 행정은 테마제(군관구)로 운영되었으며, 각 테마의 지휘관인 스트라테고스가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며 중앙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였다.
7세기 이후 도입된 테마 제도는 행정과 군사를 결합한 제도로, 각 지역을 방어하면서도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체제였다. 각 테마는 독립적인 군대를 보유하였으며, 지역 지휘관이 행정과 군사력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이는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방 군사력의 강화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법률 체계는 로마 법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편찬한 법전(Corpus Juris Civilis)이 제국의 공식적인 법률로 자리 잡았다. 이후 여러 황제들이 이를 보완하고 개정하여 법률 체계를 더욱 체계화하였으며, 바실리우스 1세와 레온 6세 시대에는 법률이 더욱 정비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법률은 이후 유럽 법 체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와 정치 또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황제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로서 강력한 종교적 권한을 행사하였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었으며, 신학적 논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로 불리며,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결합된 정치 구조를 형성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는 황제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관료제와 테마제를 통해 행정과 군사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법률과 종교 정책을 통해 국가를 통제하며, 로마 제국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다.
3.1. 황제[편집]
3.2. 작위 및 관직[편집]
동로마 제국의 작위와 관직 체계는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구조를 유지하였으며, 정치·행정·군사·궁정 조직이 정교하게 세분화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직과 작위는 더욱 복잡해졌으며, 이는 제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황제(Basileus tōn Rhōmaiōn)는 제국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입법·행정·군사·종교적 권한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는 단순한 세속적 통치자가 아니라 신이 선택한 군주로 여겨졌으며, 공식 칭호로 아우토크라토르(Autokrator)를 사용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하였다. 또한, 황실의 적통 후계자는 포르피로게니토스(Porphyrogennētos)라는 칭호를 받아 황위 계승의 정당성을 나타냈다. 황후는 아우구스타(Augusta)로 불렸으며, 경우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행정 조직은 황제를 중심으로 정교하게 운영되었으며, 여러 부서가 나뉘어 국가 운영을 담당하였다. 총리 격의 메사존(Mesazōn)은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조율하였으며,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는 로고테테스(Logothetes)들이 관료 체계를 구성하였다. 로고테테스 투 게니쿠(Logothetes tou Genikou)는 제국의 재정을 관리하고, 로고테테스 투 드로무(Logothetes tou Dromou)는 외교 및 통신을 담당하였다. 마기스트로스(Magistros)는 황제의 자문 역할을 맡았으며, 쿠로팔라테스(Kouropalatēs)는 황궁의 질서와 의식을 총괄하였다.
군사 체제 또한 행정 체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강력한 방어 구조를 형성하였다.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Domestikos tōn Scholōn)은 제국의 총사령관으로 황실 친위대를 지휘하였으며, 스트라테고스(Strategos)는 각 테마제(군관구)의 행정과 군사력을 동시에 책임졌다. 해군 총사령관인 메가 두카스(Megas Doux)는 해상 방어를 담당하며, 제국의 해군을 지휘하였다.
귀족 작위는 군사적·행정적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수여되었으며, 계층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세바스토스(Sebastos)는 황제의 친족이나 고위 귀족에게 주어진 작위였으며, 카이사르(Caesar)는 초기에는 황제의 후계자를 의미했으나 이후 명예 작위로 변하였다. 데스포테스(Despotēs)는 특히 후기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직계 친족에게 부여된 중요한 작위였으며, 지방 통치자에게 사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의 작위와 관직 체계는 황제 중심의 통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인 행정과 군사 운영을 가능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직위는 명예적인 성격이 강해졌으나, 기본적인 체제는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유지되었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다.
황제(Basileus tōn Rhōmaiōn)는 제국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입법·행정·군사·종교적 권한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는 단순한 세속적 통치자가 아니라 신이 선택한 군주로 여겨졌으며, 공식 칭호로 아우토크라토르(Autokrator)를 사용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하였다. 또한, 황실의 적통 후계자는 포르피로게니토스(Porphyrogennētos)라는 칭호를 받아 황위 계승의 정당성을 나타냈다. 황후는 아우구스타(Augusta)로 불렸으며, 경우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행정 조직은 황제를 중심으로 정교하게 운영되었으며, 여러 부서가 나뉘어 국가 운영을 담당하였다. 총리 격의 메사존(Mesazōn)은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조율하였으며,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는 로고테테스(Logothetes)들이 관료 체계를 구성하였다. 로고테테스 투 게니쿠(Logothetes tou Genikou)는 제국의 재정을 관리하고, 로고테테스 투 드로무(Logothetes tou Dromou)는 외교 및 통신을 담당하였다. 마기스트로스(Magistros)는 황제의 자문 역할을 맡았으며, 쿠로팔라테스(Kouropalatēs)는 황궁의 질서와 의식을 총괄하였다.
군사 체제 또한 행정 체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강력한 방어 구조를 형성하였다.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Domestikos tōn Scholōn)은 제국의 총사령관으로 황실 친위대를 지휘하였으며, 스트라테고스(Strategos)는 각 테마제(군관구)의 행정과 군사력을 동시에 책임졌다. 해군 총사령관인 메가 두카스(Megas Doux)는 해상 방어를 담당하며, 제국의 해군을 지휘하였다.
귀족 작위는 군사적·행정적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수여되었으며, 계층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세바스토스(Sebastos)는 황제의 친족이나 고위 귀족에게 주어진 작위였으며, 카이사르(Caesar)는 초기에는 황제의 후계자를 의미했으나 이후 명예 작위로 변하였다. 데스포테스(Despotēs)는 특히 후기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직계 친족에게 부여된 중요한 작위였으며, 지방 통치자에게 사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의 작위와 관직 체계는 황제 중심의 통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인 행정과 군사 운영을 가능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직위는 명예적인 성격이 강해졌으나, 기본적인 체제는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유지되었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다.
3.3. 원로원[편집]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은 고대 로마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한 기관으로, 서방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속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의 권한은 축소되었고, 결국 제국 말기에는 명목적인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로마 공화정과 제정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원로원은 동로마 제국에서 일정 기간 동안 행정과 입법에 영향을 미쳤으나, 황제권이 강화됨에 따라 점점 그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로마 시대의 원로원은 공화정에서 국가 운영의 핵심 기관이었으며, 황제정이 확립된 이후에도 일정한 권한을 유지했다. 그러나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로마 원로원의 중요성은 감소하고, 새로운 수도에 기반을 둔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이 설립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서방 로마 제국의 원로원과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초기에는 황제와 함께 법률을 제정하고 국가 정책을 논의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1세까지의 황제들은 원로원을 존중하며 일정한 자문 기능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점차 중앙집권적으로 변하면서 원로원의 역할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5세기 중반 이후 원로원은 행정적 기능보다는 귀족 계층의 대표 기관으로 변모하였으며, 실질적인 입법 권한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황제의 자문 기구로서 남아 있었으며,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중요한 행정직이나 군사적 직책을 맡기도 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기에 들어서면서 원로원의 지위는 더욱 약화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원로원을 행정 기구로서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원로원 의원의 신분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해졌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 개혁과 관료제 개편으로 인해 원로원의 역할이 더욱 축소되었으며, 행정적 기능은 중앙 정부의 관료들에게 집중되었다.
7세기 이후 원로원의 존재는 거의 형식적인 것으로 변하였다. 제국이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등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행정 구조가 더욱 군사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지방의 테마(군관구) 체제가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원로원의 역할은 사실상 소멸한 거나 다름없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고, 9세기 이래 공식 기록에서의 언급도 줄어들었으며, 11세기에 이르러선 기존의 원로원(Synkletos)를 대체하는 '상급 원로원(Prote-Synkletos)'[39]이라 불리는 기관마저 등장하여 원로원의 명목상 권한마저 대체했다.
다만 이렇게 권한이 줄어들고 존재감마저 적어지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명목상의 기관으로나마 원로원은 존속했고, 원로원이 완전히 기록에서 사라진 시기는 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인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은 본래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전통을 계승한 기관으로서, 초기에는 황제와 함께 정책을 논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기능은 점점 약화되었으며, 결국 중앙집권적인 황제 체제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오랫동안 귀족 계층의 대표 기관으로 존속하였고, 동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고대 로마의 정치적 유산을 상징하는 요소로 남아 있었다.
로마 시대의 원로원은 공화정에서 국가 운영의 핵심 기관이었으며, 황제정이 확립된 이후에도 일정한 권한을 유지했다. 그러나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로마 원로원의 중요성은 감소하고, 새로운 수도에 기반을 둔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이 설립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서방 로마 제국의 원로원과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초기에는 황제와 함께 법률을 제정하고 국가 정책을 논의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1세까지의 황제들은 원로원을 존중하며 일정한 자문 기능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점차 중앙집권적으로 변하면서 원로원의 역할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5세기 중반 이후 원로원은 행정적 기능보다는 귀족 계층의 대표 기관으로 변모하였으며, 실질적인 입법 권한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황제의 자문 기구로서 남아 있었으며,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중요한 행정직이나 군사적 직책을 맡기도 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기에 들어서면서 원로원의 지위는 더욱 약화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원로원을 행정 기구로서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원로원 의원의 신분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해졌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 개혁과 관료제 개편으로 인해 원로원의 역할이 더욱 축소되었으며, 행정적 기능은 중앙 정부의 관료들에게 집중되었다.
7세기 이후 원로원의 존재는 거의 형식적인 것으로 변하였다. 제국이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등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행정 구조가 더욱 군사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지방의 테마(군관구) 체제가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원로원의 역할은 사실상 소멸한 거나 다름없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고, 9세기 이래 공식 기록에서의 언급도 줄어들었으며, 11세기에 이르러선 기존의 원로원(Synkletos)를 대체하는 '상급 원로원(Prote-Synkletos)'[39]이라 불리는 기관마저 등장하여 원로원의 명목상 권한마저 대체했다.
다만 이렇게 권한이 줄어들고 존재감마저 적어지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명목상의 기관으로나마 원로원은 존속했고, 원로원이 완전히 기록에서 사라진 시기는 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인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은 본래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전통을 계승한 기관으로서, 초기에는 황제와 함께 정책을 논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기능은 점점 약화되었으며, 결국 중앙집권적인 황제 체제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오랫동안 귀족 계층의 대표 기관으로 존속하였고, 동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고대 로마의 정치적 유산을 상징하는 요소로 남아 있었다.
3.4. 법률 체계[편집]
동로마 제국의 법률 체계는 고전 로마법의 틀에서 출발하였지만,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층적인 변화를 거쳐 독자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로 정립되었다. 이 체계는 로마 후기 제국의 행정 유산, 헬레니즘 세계의 언어와 문화, 기독교 신학과 윤리, 그리고 다양한 지방의 사회적 관습들이 융합된 결과로, 단순한 규범의 집합을 넘어서 제국 전체의 조직과 통합을 실현하는 근간이었다. 동로마 법은 제도적 정당성의 핵심이자, 행정과 사법, 군사, 경제, 종교생활 전반을 조율하는 구조물로 작동하였다. 나아가 이 체계는 중세 유럽 법 전통의 토대를 형성하였으며, 로마법의 지속성과 계승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 경로였다.
동로마 법률의 초석은 고전 로마법에 있었고, 특히 황제의 절대적 권위에 기초한 칙령과 법해석은 중앙집권 체제의 유지에 긴밀히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법령이 중복되고 충돌하는 문제가 빈번해졌으며, 이에 따라 체계적인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기 429년에 다섯 명의 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법전 편찬을 명령하였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황제들이 발표한 모든 칙령을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서기 438년에 공표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었다. 이 법전은 황제 입법의 정당성을 법적으로 명문화하고, 성문법 중심의 체계를 구축하려는 동로마의 첫 시도로 평가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법률 정비를 제국 통치의 핵심 과제로 간주하였다. 그는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황제 칙령, 판례, 법학자들의 해석 등을 통합하여 하나의 표준화된 법률 체계를 구축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법학 대전』이 편찬되었다. 이 대전은 총 네 부분으로 구성되며, 각각 입법 체계와 실무 해석, 교육 목적, 법학 입문을 아우르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기존의 황제 칙령을 정리한 것으로 입법 권한의 핵심이 황제에게 있음을 강조하였고, 『다이제스트』는 고전 법학자들의 판례와 해석을 종합한 문헌으로서 사법 실무의 기준이 되었다. 『학설집』과 『법학 서론』은 교육과 법이론 보급의 목적을 지녔다. 이 네 문헌은 제국 사회의 정치, 행정, 재산, 혼인, 상속, 형벌 등 거의 모든 사안을 포괄하며 실질적인 생활 법규로 기능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통해 황제권의 신성성과 법적 정당성을 함께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제국의 실질적 공용어는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빠르게 전환되었고, 법률 역시 언어적 재편을 겪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말기부터는 황제의 새로운 칙령이 그리스어로 발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모은 것이 『노벨라에』였다. 『노벨라에』는 기존의 법령 체계를 보완하고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려는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법률 언어의 변화를 선도하는 동시에 그리스어 법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와 같은 언어적 전환은 단순한 번역 차원을 넘어, 제국의 법 개념과 실천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7세기에 접어들며 제국의 동방 속주들이 아랍 세력에 의해 차례로 상실되었고, 이에 따라 국경 방어 체계와 조세 구조, 행정 단위 역시 근본적인 재편을 겪게 되었다. 이전의 로마법은 이러한 변화된 사회 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법률 정비가 불가피해졌다. 레온 3세는 기독교 윤리와 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을 반영한 새로운 법전인 『엑로가』를 제정하였다. 이 법전은 형벌 체계를 인도적으로 재조정하고, 절단형이나 극형 대신 벌금형과 재산 몰수형을 확대하는 등 형평성을 중시하였다. 『엑로가』는 성문법으로서의 체계성과 동시에 기독교적 도덕성을 제도화하려는 시도였으며, 이후 지방에서 실용화된 다양한 법률의 모태가 되었다.
지방 행정의 현실과 특수성을 반영한 실용 법전들도 이 시기에 다수 등장하였다. 『농민법』은 자영농의 토지 소유와 상속, 분쟁 해결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으며, 농업 기반 경제의 안정성과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원법』은 해상 활동이 빈번했던 동로마의 실정을 반영하여, 선박 손상, 계약 불이행, 사고 책임 등을 규정하였다. 『군인법』은 복무 조건, 보수 체계, 복무 기간 종료 후의 보상 문제 등을 제도화하여 군사력 유지를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들 실용 법률은 중앙의 법적 원칙을 토대로 하되, 판관과 지방 행정관의 재량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되었다.
9세기 이후 마케도니아 왕조는 법률 체계의 일관성과 체계화를 위해 본격적인 개편에 나섰다. 바실리오스 1세와 그 후계자들은 과거의 법전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해석상의 모순을 낳는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새로운 법률 정비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편찬된 것이 총 60권에 이르는 『바사일리카』였다. 이 방대한 법전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법학 대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각 조문에 해설과 주석을 덧붙인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바사일리카』는 법학 교육을 위한 교재이자 판관의 해석 기준서로 기능하였으며, 황제권과 정교회의 관계, 행정 규율, 시민의 권리와 의무 등 제국 질서 전반을 체계화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바사일리카』는 제국 전역에서 법적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14세기에 접어들며 제국의 행정력과 정치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나, 법률의 정비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콘스탄티노스 하르메노풀로스는 기존의 방대한 법률 문헌을 간결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재정리한 『헥사비블로스』를 편찬하였다. 여섯 권으로 구성된 이 법전은 『바사일리카』, 『엑로가』, 『프로헤이론』 등에서 실용적 조항을 발췌하여 구성되었으며, 간명한 문장과 실제 적용 사례 중심의 구성으로 법률 실무자들이 일상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헥사비블로스』는 동로마 멸망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 초기의 그리스 정교 사회에서 법률 지침서로 널리 쓰이며, 동로마 법의 지속성과 유산을 증명하는 상징적 문헌이 되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의 법은 로마법의 형식과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그리스어화와 기독교화, 지역화와 실용화를 거치며 독자적인 체계를 완성하였다. 이는 황제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제국의 정치·행정 조직을 안정화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실질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동시에 기독교 윤리를 법적으로 제도화하여 신학과 통치의 일치를 구현하였고, 지방의 다양한 관습과 현실을 유연하게 포괄함으로써 제국의 통합성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법률 전통은 근대 유럽 법률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로마법이 단절되지 않고 중세와 근대를 잇는 역사적 연결 고리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동로마의 법률 체계는 단지 행정적 장치가 아니라, 유럽 문명의 법사적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동로마 법률의 초석은 고전 로마법에 있었고, 특히 황제의 절대적 권위에 기초한 칙령과 법해석은 중앙집권 체제의 유지에 긴밀히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법령이 중복되고 충돌하는 문제가 빈번해졌으며, 이에 따라 체계적인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기 429년에 다섯 명의 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법전 편찬을 명령하였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황제들이 발표한 모든 칙령을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서기 438년에 공표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었다. 이 법전은 황제 입법의 정당성을 법적으로 명문화하고, 성문법 중심의 체계를 구축하려는 동로마의 첫 시도로 평가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법률 정비를 제국 통치의 핵심 과제로 간주하였다. 그는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황제 칙령, 판례, 법학자들의 해석 등을 통합하여 하나의 표준화된 법률 체계를 구축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법학 대전』이 편찬되었다. 이 대전은 총 네 부분으로 구성되며, 각각 입법 체계와 실무 해석, 교육 목적, 법학 입문을 아우르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기존의 황제 칙령을 정리한 것으로 입법 권한의 핵심이 황제에게 있음을 강조하였고, 『다이제스트』는 고전 법학자들의 판례와 해석을 종합한 문헌으로서 사법 실무의 기준이 되었다. 『학설집』과 『법학 서론』은 교육과 법이론 보급의 목적을 지녔다. 이 네 문헌은 제국 사회의 정치, 행정, 재산, 혼인, 상속, 형벌 등 거의 모든 사안을 포괄하며 실질적인 생활 법규로 기능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통해 황제권의 신성성과 법적 정당성을 함께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제국의 실질적 공용어는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빠르게 전환되었고, 법률 역시 언어적 재편을 겪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말기부터는 황제의 새로운 칙령이 그리스어로 발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모은 것이 『노벨라에』였다. 『노벨라에』는 기존의 법령 체계를 보완하고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려는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법률 언어의 변화를 선도하는 동시에 그리스어 법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와 같은 언어적 전환은 단순한 번역 차원을 넘어, 제국의 법 개념과 실천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7세기에 접어들며 제국의 동방 속주들이 아랍 세력에 의해 차례로 상실되었고, 이에 따라 국경 방어 체계와 조세 구조, 행정 단위 역시 근본적인 재편을 겪게 되었다. 이전의 로마법은 이러한 변화된 사회 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법률 정비가 불가피해졌다. 레온 3세는 기독교 윤리와 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을 반영한 새로운 법전인 『엑로가』를 제정하였다. 이 법전은 형벌 체계를 인도적으로 재조정하고, 절단형이나 극형 대신 벌금형과 재산 몰수형을 확대하는 등 형평성을 중시하였다. 『엑로가』는 성문법으로서의 체계성과 동시에 기독교적 도덕성을 제도화하려는 시도였으며, 이후 지방에서 실용화된 다양한 법률의 모태가 되었다.
지방 행정의 현실과 특수성을 반영한 실용 법전들도 이 시기에 다수 등장하였다. 『농민법』은 자영농의 토지 소유와 상속, 분쟁 해결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으며, 농업 기반 경제의 안정성과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원법』은 해상 활동이 빈번했던 동로마의 실정을 반영하여, 선박 손상, 계약 불이행, 사고 책임 등을 규정하였다. 『군인법』은 복무 조건, 보수 체계, 복무 기간 종료 후의 보상 문제 등을 제도화하여 군사력 유지를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들 실용 법률은 중앙의 법적 원칙을 토대로 하되, 판관과 지방 행정관의 재량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되었다.
9세기 이후 마케도니아 왕조는 법률 체계의 일관성과 체계화를 위해 본격적인 개편에 나섰다. 바실리오스 1세와 그 후계자들은 과거의 법전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해석상의 모순을 낳는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새로운 법률 정비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편찬된 것이 총 60권에 이르는 『바사일리카』였다. 이 방대한 법전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법학 대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각 조문에 해설과 주석을 덧붙인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바사일리카』는 법학 교육을 위한 교재이자 판관의 해석 기준서로 기능하였으며, 황제권과 정교회의 관계, 행정 규율, 시민의 권리와 의무 등 제국 질서 전반을 체계화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바사일리카』는 제국 전역에서 법적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14세기에 접어들며 제국의 행정력과 정치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나, 법률의 정비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콘스탄티노스 하르메노풀로스는 기존의 방대한 법률 문헌을 간결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재정리한 『헥사비블로스』를 편찬하였다. 여섯 권으로 구성된 이 법전은 『바사일리카』, 『엑로가』, 『프로헤이론』 등에서 실용적 조항을 발췌하여 구성되었으며, 간명한 문장과 실제 적용 사례 중심의 구성으로 법률 실무자들이 일상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헥사비블로스』는 동로마 멸망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 초기의 그리스 정교 사회에서 법률 지침서로 널리 쓰이며, 동로마 법의 지속성과 유산을 증명하는 상징적 문헌이 되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의 법은 로마법의 형식과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그리스어화와 기독교화, 지역화와 실용화를 거치며 독자적인 체계를 완성하였다. 이는 황제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제국의 정치·행정 조직을 안정화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실질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동시에 기독교 윤리를 법적으로 제도화하여 신학과 통치의 일치를 구현하였고, 지방의 다양한 관습과 현실을 유연하게 포괄함으로써 제국의 통합성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법률 전통은 근대 유럽 법률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로마법이 단절되지 않고 중세와 근대를 잇는 역사적 연결 고리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동로마의 법률 체계는 단지 행정적 장치가 아니라, 유럽 문명의 법사적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3.5. 세계 총대주교와 로마 황제의 관계[편집]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는 정치와 종교의 두 축을 이루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황제는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서 세속 권력을 장악하였고, 세계 총대주교는 정교회의 수장으로서 종교적 권위를 행사했다. 이 둘의 관계는 상호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변화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종교 체제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 황제의 권력은 단순한 세속 통치권을 넘어 종교적 권위까지 포괄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는 로마 황제가 "신의 대리자"로 여겨지면서 황제권의 신성성이 강조되는 흐름과 맞물려 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통치는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은 다신교 사회였으며, 기독교는 여전히 소수 종교였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325년 그는 니케아 공의회를 주재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적으로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로 인해 황제는 단순한 정치적 통치자가 아니라 기독교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를 지도하는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가 종교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는 전례를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황제는 기독교 신앙을 보호하는 수호자로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종교 문제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 황제는 신학적 논쟁에서 교리 문제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이단을 규정하고 정통 신앙을 확립하는 데 있어 최종적인 판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는 에페소스 공의회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 신학 논쟁에 적극 개입하여 단성론 문제를 조정하려 하였다. 이는 황제가 단순히 교회의 후원자가 아니라, 교회의 신학적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인 세계 총대주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 총대주교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강력한 권위를 지닌 존재였으며, 이는 서방 교회의 교황과 대응되는 위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 다음가는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이후 그는 동방 정교회의 중심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황제의 승인 아래에서 유지되었다.
세계 총대주교는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그 직위는 황제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었다. 황제는 자신과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뜻이 맞지 않는 세계 총대주교를 폐위할 권한을 가졌으며, 실제로 역사 속에서 여러 세계 총대주교들이 황제와의 갈등으로 인해 축출되거나 유배된 사례가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 역시 단순한 황제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황제가 종교적 권한을 행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조력자로 기능하였다. 세계 총대주교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신성한 황제권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국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는 일방적인 종속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구조였다. 황제는 대관식을 비롯한 기독교적 의례로 종교적 정통성과 교회의 지지를 확보하며 자신의 권력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세계 총대주교는 황제의 후원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유지되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는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변모해 갔다.
결국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종교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나, 때로는 종교 정책과 권력 구조를 둘러싸고 충돌하기는 경우가 많았다. 황제는 교회의 보호자로서 종교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세계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해임할 권한을 가졌다. 이러한 구조는 교회와 국가가 긴밀히 연결된 동로마 제국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가 황제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독자적인 입장을 고수할 경우, 양측의 관계는 긴장 상태로 돌입하며 심각한 갈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황제의 교회 개입은 신학적 논쟁뿐만 아니라 교회의 운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황제는 자신이 원하는 신학적 입장을 공인된 정통 교리로 확립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 총대주교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황제가 직접 공의회를 소집하여 신학적 논쟁을 조정하는 일도 흔했으며, 세계 총대주교가 황제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폐위되거나 유배되는 사례도 있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는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에서 교회를 국가 통치 체계의 일부로 편입하려 하였다. 그는 교회법을 개정하여 황제의 권위를 종교적 차원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 했으며, 신학적 논쟁에도 적극 개입하여 단성론 문제를 조정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황제를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동시에,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를 황제의 통제 아래에 두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은 황제의 개입을 거부하였고, 세계 총대주교 역시 황제의 종교 정책에 반대할 경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8세기에는 성상 파괴 운동이 발생하면서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성상 숭배를 둘러싼 논쟁은 교회의 신학적 문제를 넘어 제국의 정치적 갈등으로 발전하였다. 일부 황제들은 성상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이를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입장은 군대와 관료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많은 총대주교와 수도사들은 성상 공경을 정당한 신앙 행위로 보았으며, 황제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이로 인해 일부 세계 총대주교는 황제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황제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이 새 총대주교로 임명되기도 했다.
9세기 미카엘 3세 때에는 포티오스 총대주교가 황제의 개입에 반발하면서 동서 교회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포티오스는 황제의 뜻과 다른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며 로마 교황과도 대립하였으며, 결국 이 사건은 포티오스 분열이라는 교회 내부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황제는 교회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했으나, 세계 총대주교 역시 황제에게 종속되지 않으려 하면서 대립이 심화되었다.
11세기 이후가 되고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제국의 정치적·군사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그와 반대로 총대주교는 점점 더 독립적인 종교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특히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동방 정교회의 독립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으며, 이는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세운 것은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동로마 황제는 수도에서 쫓겨나고, 정교회 역시 서방 가톨릭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황제권이 사실상 붕괴된 상황에서 세계 총대주교는 민중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동방 정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망명 정부가 존속하는 동안에도 정교회의 권위는 살아남아, 민족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는 중심축으로 작용하였다.
1261년 미하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라틴 제국을 몰아내고 동로마 제국을 재건한 후에도, 황제는 과거와 같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세계 총대주교는 제국 내에서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일부 황제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세계 총대주교의 지지를 얻으려 적극적으로 교회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협력 관계가 아니라, 종종 갈등과 긴장을 수반하는 관계였다. 황제는 제국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서방 세계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으며, 이에 따라 로마 가톨릭과의 교회 통합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교회의 전통을 수호해야 하는 총대주교와 수도사 집단은 이러한 시도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14세기에 접어들면서 동로마 제국은 점점 더 쇠퇴하였고, 외부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황제와 총대주교는 생존을 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몽골과 오스만 제국의 팽창 속에서 제국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황제는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와 정교회의 대다수 성직자들은 서방 교회의 개입을 거부하며 전통적인 정교회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갈등은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정점에 달했다. 당시 요안니스 8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방 교황과의 교회 통합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으며, 동로마 제국과 가톨릭의 연합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정교회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였으며, 결국 황제의 교회 통합 시도는 민중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1453년,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오스만 제국의 압도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 최후의 방어전을 벌였으나,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의 역할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정교회를 제국 내 종교 공동체(밀레트)로 인정하였고, 세계 총대주교를 정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삼아 그 권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는 동로마 황제가 사라진 이후에도 총대주교가 여전히 민족과 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40]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 황제의 권력은 단순한 세속 통치권을 넘어 종교적 권위까지 포괄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는 로마 황제가 "신의 대리자"로 여겨지면서 황제권의 신성성이 강조되는 흐름과 맞물려 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통치는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은 다신교 사회였으며, 기독교는 여전히 소수 종교였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325년 그는 니케아 공의회를 주재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적으로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로 인해 황제는 단순한 정치적 통치자가 아니라 기독교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를 지도하는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가 종교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는 전례를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황제는 기독교 신앙을 보호하는 수호자로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종교 문제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 황제는 신학적 논쟁에서 교리 문제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이단을 규정하고 정통 신앙을 확립하는 데 있어 최종적인 판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는 에페소스 공의회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 신학 논쟁에 적극 개입하여 단성론 문제를 조정하려 하였다. 이는 황제가 단순히 교회의 후원자가 아니라, 교회의 신학적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인 세계 총대주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 총대주교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강력한 권위를 지닌 존재였으며, 이는 서방 교회의 교황과 대응되는 위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 다음가는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이후 그는 동방 정교회의 중심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황제의 승인 아래에서 유지되었다.
세계 총대주교는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그 직위는 황제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박탈될 수도 있었다. 황제는 자신과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뜻이 맞지 않는 세계 총대주교를 폐위할 권한을 가졌으며, 실제로 역사 속에서 여러 세계 총대주교들이 황제와의 갈등으로 인해 축출되거나 유배된 사례가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 역시 단순한 황제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황제가 종교적 권한을 행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조력자로 기능하였다. 세계 총대주교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신성한 황제권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국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는 일방적인 종속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구조였다. 황제는 대관식을 비롯한 기독교적 의례로 종교적 정통성과 교회의 지지를 확보하며 자신의 권력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세계 총대주교는 황제의 후원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유지되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는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변모해 갔다.
결국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종교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나, 때로는 종교 정책과 권력 구조를 둘러싸고 충돌하기는 경우가 많았다. 황제는 교회의 보호자로서 종교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세계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해임할 권한을 가졌다. 이러한 구조는 교회와 국가가 긴밀히 연결된 동로마 제국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가 황제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독자적인 입장을 고수할 경우, 양측의 관계는 긴장 상태로 돌입하며 심각한 갈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황제의 교회 개입은 신학적 논쟁뿐만 아니라 교회의 운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황제는 자신이 원하는 신학적 입장을 공인된 정통 교리로 확립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 총대주교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황제가 직접 공의회를 소집하여 신학적 논쟁을 조정하는 일도 흔했으며, 세계 총대주교가 황제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폐위되거나 유배되는 사례도 있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는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에서 교회를 국가 통치 체계의 일부로 편입하려 하였다. 그는 교회법을 개정하여 황제의 권위를 종교적 차원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 했으며, 신학적 논쟁에도 적극 개입하여 단성론 문제를 조정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황제를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동시에,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를 황제의 통제 아래에 두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은 황제의 개입을 거부하였고, 세계 총대주교 역시 황제의 종교 정책에 반대할 경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8세기에는 성상 파괴 운동이 발생하면서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성상 숭배를 둘러싼 논쟁은 교회의 신학적 문제를 넘어 제국의 정치적 갈등으로 발전하였다. 일부 황제들은 성상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이를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입장은 군대와 관료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많은 총대주교와 수도사들은 성상 공경을 정당한 신앙 행위로 보았으며, 황제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이로 인해 일부 세계 총대주교는 황제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황제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이 새 총대주교로 임명되기도 했다.
9세기 미카엘 3세 때에는 포티오스 총대주교가 황제의 개입에 반발하면서 동서 교회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포티오스는 황제의 뜻과 다른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며 로마 교황과도 대립하였으며, 결국 이 사건은 포티오스 분열이라는 교회 내부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황제는 교회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했으나, 세계 총대주교 역시 황제에게 종속되지 않으려 하면서 대립이 심화되었다.
11세기 이후가 되고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제국의 정치적·군사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그와 반대로 총대주교는 점점 더 독립적인 종교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특히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동방 정교회의 독립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으며, 이는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세운 것은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의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동로마 황제는 수도에서 쫓겨나고, 정교회 역시 서방 가톨릭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황제권이 사실상 붕괴된 상황에서 세계 총대주교는 민중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동방 정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망명 정부가 존속하는 동안에도 정교회의 권위는 살아남아, 민족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는 중심축으로 작용하였다.
1261년 미하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라틴 제국을 몰아내고 동로마 제국을 재건한 후에도, 황제는 과거와 같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세계 총대주교는 제국 내에서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일부 황제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세계 총대주교의 지지를 얻으려 적극적으로 교회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협력 관계가 아니라, 종종 갈등과 긴장을 수반하는 관계였다. 황제는 제국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서방 세계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으며, 이에 따라 로마 가톨릭과의 교회 통합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교회의 전통을 수호해야 하는 총대주교와 수도사 집단은 이러한 시도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14세기에 접어들면서 동로마 제국은 점점 더 쇠퇴하였고, 외부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황제와 총대주교는 생존을 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몽골과 오스만 제국의 팽창 속에서 제국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황제는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와 정교회의 대다수 성직자들은 서방 교회의 개입을 거부하며 전통적인 정교회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갈등은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정점에 달했다. 당시 요안니스 8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방 교황과의 교회 통합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으며, 동로마 제국과 가톨릭의 연합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정교회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였으며, 결국 황제의 교회 통합 시도는 민중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1453년,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오스만 제국의 압도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 최후의 방어전을 벌였으나,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의 역할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정교회를 제국 내 종교 공동체(밀레트)로 인정하였고, 세계 총대주교를 정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삼아 그 권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는 동로마 황제가 사라진 이후에도 총대주교가 여전히 민족과 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40]
3.6. 테마 제도[편집]
3.7. 프로노이아 제도[편집]
4. 역사[편집]
5. 군사[편집]
6. 문화[편집]
동로마 제국의 문화는 고대 로마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리스어와 헬레니즘 문화, 기독교 신학이 융합된 독자적인 문명 형태로 발전하였다. 공용어는 점차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전환되었고, 제국의 행정과 교육, 문학, 종교 활동은 모두 그리스어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기독교는 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특히 정교회는 제국의 정치 구조와 밀접히 연결되었다. 성화와 모자이크, 대리석 건축물 등은 종교적 상징과 제국의 위엄을 동시에 표현하였고, 성상 논쟁은 예술 표현과 신학의 경계를 둘러싼 문화적 갈등을 보여준다.
교육과 학문은 고전 그리스의 철학과 수사학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수도원은 문헌 보존과 신학 연구의 중심지였다. 동로마는 고대 고전 문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문화적 중개자로서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국 동로마 문화는 로마의 제도, 그리스의 언어와 지성, 기독교의 종교성을 결합하여 천 년에 걸친 문명을 형성하였으며, 이는 훗날 슬라브 세계와 근대 유럽의 문화 발전에도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기독교는 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특히 정교회는 제국의 정치 구조와 밀접히 연결되었다. 성화와 모자이크, 대리석 건축물 등은 종교적 상징과 제국의 위엄을 동시에 표현하였고, 성상 논쟁은 예술 표현과 신학의 경계를 둘러싼 문화적 갈등을 보여준다.
교육과 학문은 고전 그리스의 철학과 수사학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수도원은 문헌 보존과 신학 연구의 중심지였다. 동로마는 고대 고전 문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문화적 중개자로서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국 동로마 문화는 로마의 제도, 그리스의 언어와 지성, 기독교의 종교성을 결합하여 천 년에 걸친 문명을 형성하였으며, 이는 훗날 슬라브 세계와 근대 유럽의 문화 발전에도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6.1. 의복[편집]
동로마 제국의 복식 문화는 고전 로마의 유산, 기독교적 상징 체계, 관료적 위계 구조, 그리고 주변 민족과의 지속적인 문화 교류가 융합된 복합적인 체계였다. 비록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물이나 기록은 제한적이지만, 제국의 모자이크와 벽화, 사본의 삽화, 도상학적 이미지들은 다양한 계층과 시대의 복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복식은 단순히 신체를 가리는 의복이 아니라, 착용자의 지위, 신분, 권위, 심지어는 신성과 정통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가장 엄격한 규범을 따랐던 궁정 복식은 황제의 권위와 제국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였다. 황제 복식의 중심은 로로스로, 이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착용하던 의례용 토가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단과 금실로 제작되었으며 정교한 자수와 보석 장식이 더해졌다. 로로스는 단순한 복식이 아니라 제국의 정통성과 신성한 통치 권위를 표현하는 정치적 장치였다. 황제는 여기에 찬기아라 불리는 장식적인 다리 피복과 자주색 망토, 금관을 함께 착용하였으며, 자주색은 황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으로 엄격히 통제되었다. 이는 시각적으로 황제의 절대적 지위를 표현하는 동시에, 제국 질서의 상징이 되었다.
황실 외에도 귀족과 고위 관료들은 특정한 색상, 천의 질감, 자수와 장식의 형태로 지위가 구분되었다. 고관들은 비단이나 금실이 가미된 의복을 착용할 수 있었고, 특히 군사 귀족들은 클라미스라 불리는 어깨 걸이식 외투를 입었다. 이는 원래 군대에서 유래된 복장이었으나, 점차 정치 의례에서도 사용되며 귀족 계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클라미스는 단정하면서도 권위 있는 인상을 주는 외형 덕분에, 일부 학자들은 이를 오늘날의 정장에 비견하기도 한다. 귀족 여성은 긴 소매의 드레스 형태 복장을 착용하였고, 머리에는 천으로 된 덮개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복식의 재질과 장식은 사회적 지위뿐 아니라 경건함과 여성의 품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민중의 복장은 실용성이 중심이었으며, 린넨과 모직으로 된 간소한 튜닉과 외투, 가죽 신발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지방 농민층은 기후와 지역 전통에 따라 복장 양식이 달라졌으며, 동부 국경지대에서는 중동과 이란 문화권의 복식 요소가 자연스럽게 융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복식 유행이 대개 지방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종종 복식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궁정과 교회의 규율을 엄격히 따랐기 때문에, 복식의 변화는 수도가 아닌 외곽에서 먼저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 복식은 제국의 변천에 따라 점차 변화하였다. 초기에는 고대 로마의 튜닉 형태가 주류였으나, 중기 이후에는 긴 드레스 형태로 변모하였고, 천의 양과 길이가 늘어나는 동시에 머리와 몸을 덮는 요소들이 강화되었다. 이는 기독교적 도덕관과 사회적 규범의 반영으로, 여성의 복장이 점점 더 절제되고 상징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모 마리아 도상에서 나타나는 복식은 실제 궁정 여성들의 복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경건함과 가문의 명예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제국 말기로 갈수록 복식은 외래 문화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해양 도시들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와 제노바식 의복이 상류층 사이에 퍼졌고, 오스만 투르크와 불가르인의 복식 양식도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 후기 동로마 복식은 고전적 황궁 복식과 이국적 장식 요소가 뒤섞인 형태로 발전하면서 제국 말기 사회의 다문화적 성격을 반영하였다. 특히 외국 상인들과 외교 사절, 그리고 이민족 귀족들과의 교류는 복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복식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진화해 나갔으며, 복식을 통해 사회 내부의 위계 구조와 문화적 정체성이 유지되었다. 이는 단지 옷차림을 넘어서 권위, 신분, 정통성, 신앙, 문화적 교류가 응축된 시각적 언어였으며, 동지중해 세계 속에서 동로마가 유지한 고유한 문명적 질서의 일부였다.
가장 엄격한 규범을 따랐던 궁정 복식은 황제의 권위와 제국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였다. 황제 복식의 중심은 로로스로, 이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착용하던 의례용 토가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단과 금실로 제작되었으며 정교한 자수와 보석 장식이 더해졌다. 로로스는 단순한 복식이 아니라 제국의 정통성과 신성한 통치 권위를 표현하는 정치적 장치였다. 황제는 여기에 찬기아라 불리는 장식적인 다리 피복과 자주색 망토, 금관을 함께 착용하였으며, 자주색은 황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으로 엄격히 통제되었다. 이는 시각적으로 황제의 절대적 지위를 표현하는 동시에, 제국 질서의 상징이 되었다.
황실 외에도 귀족과 고위 관료들은 특정한 색상, 천의 질감, 자수와 장식의 형태로 지위가 구분되었다. 고관들은 비단이나 금실이 가미된 의복을 착용할 수 있었고, 특히 군사 귀족들은 클라미스라 불리는 어깨 걸이식 외투를 입었다. 이는 원래 군대에서 유래된 복장이었으나, 점차 정치 의례에서도 사용되며 귀족 계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클라미스는 단정하면서도 권위 있는 인상을 주는 외형 덕분에, 일부 학자들은 이를 오늘날의 정장에 비견하기도 한다. 귀족 여성은 긴 소매의 드레스 형태 복장을 착용하였고, 머리에는 천으로 된 덮개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복식의 재질과 장식은 사회적 지위뿐 아니라 경건함과 여성의 품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민중의 복장은 실용성이 중심이었으며, 린넨과 모직으로 된 간소한 튜닉과 외투, 가죽 신발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지방 농민층은 기후와 지역 전통에 따라 복장 양식이 달라졌으며, 동부 국경지대에서는 중동과 이란 문화권의 복식 요소가 자연스럽게 융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복식 유행이 대개 지방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종종 복식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궁정과 교회의 규율을 엄격히 따랐기 때문에, 복식의 변화는 수도가 아닌 외곽에서 먼저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 복식은 제국의 변천에 따라 점차 변화하였다. 초기에는 고대 로마의 튜닉 형태가 주류였으나, 중기 이후에는 긴 드레스 형태로 변모하였고, 천의 양과 길이가 늘어나는 동시에 머리와 몸을 덮는 요소들이 강화되었다. 이는 기독교적 도덕관과 사회적 규범의 반영으로, 여성의 복장이 점점 더 절제되고 상징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모 마리아 도상에서 나타나는 복식은 실제 궁정 여성들의 복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경건함과 가문의 명예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제국 말기로 갈수록 복식은 외래 문화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해양 도시들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베네치아와 제노바식 의복이 상류층 사이에 퍼졌고, 오스만 투르크와 불가르인의 복식 양식도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 후기 동로마 복식은 고전적 황궁 복식과 이국적 장식 요소가 뒤섞인 형태로 발전하면서 제국 말기 사회의 다문화적 성격을 반영하였다. 특히 외국 상인들과 외교 사절, 그리고 이민족 귀족들과의 교류는 복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복식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진화해 나갔으며, 복식을 통해 사회 내부의 위계 구조와 문화적 정체성이 유지되었다. 이는 단지 옷차림을 넘어서 권위, 신분, 정통성, 신앙, 문화적 교류가 응축된 시각적 언어였으며, 동지중해 세계 속에서 동로마가 유지한 고유한 문명적 질서의 일부였다.
6.2. 식문화와 음식[편집]
동로마 제국의 식생활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계층, 종교,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일상 속의 중요한 행위였다. 이는 고전 시대의 전통 위에 중세적 감각과 실용성이 더해져 형성된 것으로, 식재료의 변화와 조리 방식의 다양화, 그리고 식탁 예절의 진화가 어우러져 독특한 미각 세계를 이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귀족들은 주로 기대 누운 자세로 식사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에 들어서는 이러한 양식이 점차 사라지고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10세기 이후에는 식탁에 깨끗한 아마포를 덮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미관을 넘어서서 위생과 질서를 상징했다. 이와 더불어, 포크가 식사 도구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유럽 식사 예법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단순한 수저 외에 날카로운 갈퀴 형태의 기구로 음식을 집어먹는 행위는 처음엔 기이하게 여겨졌지만 곧 실용성과 위생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귀족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채소류는 단순히 날 것으로 먹기보다는 기름과 식초를 섞은 소스로 버무려 내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이는 오늘날 유럽식 샐러드 문화의 원형에 해당하며, 감각적 식사로서의 개념이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식재료 면에서는 고전 시대의 유산과 더불어 동방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재료가 꾸준히 유입되었다. 발효 생선 소스인 ‘가로스’는 여전히 음식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이는 감칠맛을 내기 위한 고대의 대표적인 조미료였다. 오늘날 동남아 지역에서 흔히 사용하는 액젓과 유사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견과류와 꿀을 얇은 반죽으로 겹겹이 싸서 구워낸 과자인 바클라바도 이미 이 시기에 널리 소비되었으며, 설탕보다 꿀이 주재료였던 점은 당대의 재료 수급 환경을 반영한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 식재료들도 있다. 고전 시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가지나 오렌지 같은 작물은 동방의 농업기술과 무역로를 통해 동로마에 유입되었고, 이는 제국의 식문화에 새로운 풍미를 더했다.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서 들여온 이 과일과 채소는 처음엔 진귀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주로 상류층이나 수도의 궁정에서 소비되었다.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음식도 여럿 있다. 예를 들어, ‘파스톤’이라 불린 염장육은 동로마의 저장기술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늘날의 훈제햄이나 건조육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조되었다. 양유로 만든 하얀 치즈는 지금의 페타와 유사하며, 짠맛이 강해 빵이나 곡류와 함께 먹기에 적합했다. 생선을 소금에 절여 건조한 알 요리는 현대의 부타르그와 같은 형태로 남아 있으며, 철갑상어에서 채취한 흑해산 캐비어는 황실이나 상류층의 연회에서 진귀한 음식으로 올랐다. 이 밖에도 얇은 반죽 속에 치즈를 넣은 파이 형태의 티로피타, 포도잎에 고기와 곡물을 싸서 쪄낸 돌마데스, 발효시킨 곡물 반죽으로 만든 수프인 트라하나스 등은 당시의 입맛과 기술이 응축된 대표적인 음식으로 여겨진다.
술 문화도 매우 발달해 있었다. 단맛이 강한 디저트 와인 계열은 특히 귀족과 외국 사절 사이에서 인기 있었으며, 모넴바시아에서 생산된 말바시아 와인은 유럽 전역에 수출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키프로스산 코만다리아 와인 역시 십자군과의 교류를 통해 유럽 궁정에서 애음되었으며, ‘럼니’로 불리는 와인은 심지어 자신의 명칭을 와인 이름에 남길 정도로 유명했다. 포도주 외에도 서민층에서는 기장이나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보자'가 일반적으로 소비되었고, 송진 향이 강한 '레치나'는 그리스 전통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동로마 제국의 음식은 단지 고대의 유산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맛과 형식을 창출해냈다. 이 식문화는 지중해를 넘어 서유럽과 동방에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동로마 제국이 단순한 정치적 실체를 넘어서 문화적 가교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귀족들은 주로 기대 누운 자세로 식사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에 들어서는 이러한 양식이 점차 사라지고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10세기 이후에는 식탁에 깨끗한 아마포를 덮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미관을 넘어서서 위생과 질서를 상징했다. 이와 더불어, 포크가 식사 도구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유럽 식사 예법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단순한 수저 외에 날카로운 갈퀴 형태의 기구로 음식을 집어먹는 행위는 처음엔 기이하게 여겨졌지만 곧 실용성과 위생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귀족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채소류는 단순히 날 것으로 먹기보다는 기름과 식초를 섞은 소스로 버무려 내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이는 오늘날 유럽식 샐러드 문화의 원형에 해당하며, 감각적 식사로서의 개념이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식재료 면에서는 고전 시대의 유산과 더불어 동방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재료가 꾸준히 유입되었다. 발효 생선 소스인 ‘가로스’는 여전히 음식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이는 감칠맛을 내기 위한 고대의 대표적인 조미료였다. 오늘날 동남아 지역에서 흔히 사용하는 액젓과 유사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견과류와 꿀을 얇은 반죽으로 겹겹이 싸서 구워낸 과자인 바클라바도 이미 이 시기에 널리 소비되었으며, 설탕보다 꿀이 주재료였던 점은 당대의 재료 수급 환경을 반영한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 식재료들도 있다. 고전 시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가지나 오렌지 같은 작물은 동방의 농업기술과 무역로를 통해 동로마에 유입되었고, 이는 제국의 식문화에 새로운 풍미를 더했다.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서 들여온 이 과일과 채소는 처음엔 진귀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주로 상류층이나 수도의 궁정에서 소비되었다.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음식도 여럿 있다. 예를 들어, ‘파스톤’이라 불린 염장육은 동로마의 저장기술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늘날의 훈제햄이나 건조육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조되었다. 양유로 만든 하얀 치즈는 지금의 페타와 유사하며, 짠맛이 강해 빵이나 곡류와 함께 먹기에 적합했다. 생선을 소금에 절여 건조한 알 요리는 현대의 부타르그와 같은 형태로 남아 있으며, 철갑상어에서 채취한 흑해산 캐비어는 황실이나 상류층의 연회에서 진귀한 음식으로 올랐다. 이 밖에도 얇은 반죽 속에 치즈를 넣은 파이 형태의 티로피타, 포도잎에 고기와 곡물을 싸서 쪄낸 돌마데스, 발효시킨 곡물 반죽으로 만든 수프인 트라하나스 등은 당시의 입맛과 기술이 응축된 대표적인 음식으로 여겨진다.
술 문화도 매우 발달해 있었다. 단맛이 강한 디저트 와인 계열은 특히 귀족과 외국 사절 사이에서 인기 있었으며, 모넴바시아에서 생산된 말바시아 와인은 유럽 전역에 수출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키프로스산 코만다리아 와인 역시 십자군과의 교류를 통해 유럽 궁정에서 애음되었으며, ‘럼니’로 불리는 와인은 심지어 자신의 명칭을 와인 이름에 남길 정도로 유명했다. 포도주 외에도 서민층에서는 기장이나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보자'가 일반적으로 소비되었고, 송진 향이 강한 '레치나'는 그리스 전통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동로마 제국의 음식은 단지 고대의 유산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맛과 형식을 창출해냈다. 이 식문화는 지중해를 넘어 서유럽과 동방에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동로마 제국이 단순한 정치적 실체를 넘어서 문화적 가교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6.3. 오락 문화[편집]
동로마 제국에서 오락은 단순한 여흥을 넘어 정치, 사회, 종교적 긴장 속에서 변화하고 조정된 문화적 행위였다. 고대 로마 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극장과 경기장 중심의 대중오락은 초기에는 국가의 보호와 재정을 바탕으로 장려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종교적 분위기와 귀족 중심의 사적 향유로 성격이 바뀌었다.
가장 오래 지속된 대중 오락 중 하나는 전차 경주였다. 전차 경주는 제국 초기에 이미 정립되어 있었으며, 1204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꾸준히 열렸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정치적 의사표현의 수단이기도 했으며, 청색과 녹색 두 주요 응원단의 대립은 때때로 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주 자체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가 원형 트랙을 도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운전 기술뿐 아니라 말의 훈련과 속도도 경기의 승패를 좌우했다. 이 전차 경주는 고대부터 십자군 침공 직전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세계 역사상 가장 장기간 이어진 스포츠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전차 경주 외에도 초기에 성행했던 오락으로는 마임극, 무언극, 야생동물 쇼 등이 있었다. 마임과 무언극은 말 없이 몸짓과 표현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극예술로, 도시의 극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야생동물 쇼는 맹수를 경기장에 풀어놓고 싸우게 하거나 조련된 동물이 묘기를 부리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전통에서 직접 이어받은 형태였다. 그러나 6세기를 전후하여 이러한 형태의 오락은 점차 쇠퇴하였다. 기독교 주교들과 철학자들은 이를 비도덕적이고 육체적 쾌락을 조장하는 행위로 간주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가의 공식 재정 지원이 중단되었다. 결과적으로 대형 공연과 공공 경기는 사라지고, 보다 조용하고 사적인 오락 형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귀족과 도시 상류층 사이에서는 새로운 유입 오락들이 대두되었다. 중기 이후, 특히 십자군 활동과 동방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페르시아 기원의 스포츠가 제국 귀족 사회에 소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치카니온’이었다. 이는 말 위에서 장대나 곤봉을 이용해 공을 치는 경기로, 오늘날의 폴로와 유사하다. 치카니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뿐 아니라 안티오키아와 니케아 같은 대도시에서도 귀족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황제도 종종 직접 참가하거나 후원하였다. 말과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귀족의 전사적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오락이었다.
또한 서방으로부터 도입된 기사들의 마상 창시합도 일부 귀족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 경기는 두 명의 기사가 말 위에서 창을 들고 마주 달려 서로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비록 이 스포츠는 동로마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귀족의 무력적 이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보다 일상적이고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오락도 점차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예가 ‘타블리’라는 보드 게임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백개먼과 유사한 게임으로, 주사위를 이용해 말의 위치를 이동시키며 승부를 겨루는 방식이었다. 타블리는 귀족과 중산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도시 주택이나 궁정에서 자주 행해졌다. 전략적 사고와 운의 요소가 어우러진 이 게임은 경쟁심을 유발하면서도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인 연회나 친교의 자리에 자주 포함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오락 문화는 시기와 계층,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대중의 함성과 황제의 위엄이 맞물렸던 히포드롬의 전차 경주부터, 조용한 실내에서 즐기는 게임과 귀족들의 승마 경기까지, 오락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당시 사회의 긴장과 조화, 전통과 변화가 어우러진 중요한 문화적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가장 오래 지속된 대중 오락 중 하나는 전차 경주였다. 전차 경주는 제국 초기에 이미 정립되어 있었으며, 1204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꾸준히 열렸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정치적 의사표현의 수단이기도 했으며, 청색과 녹색 두 주요 응원단의 대립은 때때로 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주 자체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가 원형 트랙을 도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운전 기술뿐 아니라 말의 훈련과 속도도 경기의 승패를 좌우했다. 이 전차 경주는 고대부터 십자군 침공 직전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세계 역사상 가장 장기간 이어진 스포츠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전차 경주 외에도 초기에 성행했던 오락으로는 마임극, 무언극, 야생동물 쇼 등이 있었다. 마임과 무언극은 말 없이 몸짓과 표현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극예술로, 도시의 극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야생동물 쇼는 맹수를 경기장에 풀어놓고 싸우게 하거나 조련된 동물이 묘기를 부리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전통에서 직접 이어받은 형태였다. 그러나 6세기를 전후하여 이러한 형태의 오락은 점차 쇠퇴하였다. 기독교 주교들과 철학자들은 이를 비도덕적이고 육체적 쾌락을 조장하는 행위로 간주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가의 공식 재정 지원이 중단되었다. 결과적으로 대형 공연과 공공 경기는 사라지고, 보다 조용하고 사적인 오락 형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귀족과 도시 상류층 사이에서는 새로운 유입 오락들이 대두되었다. 중기 이후, 특히 십자군 활동과 동방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페르시아 기원의 스포츠가 제국 귀족 사회에 소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치카니온’이었다. 이는 말 위에서 장대나 곤봉을 이용해 공을 치는 경기로, 오늘날의 폴로와 유사하다. 치카니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뿐 아니라 안티오키아와 니케아 같은 대도시에서도 귀족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황제도 종종 직접 참가하거나 후원하였다. 말과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귀족의 전사적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오락이었다.
또한 서방으로부터 도입된 기사들의 마상 창시합도 일부 귀족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 경기는 두 명의 기사가 말 위에서 창을 들고 마주 달려 서로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비록 이 스포츠는 동로마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귀족의 무력적 이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보다 일상적이고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오락도 점차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예가 ‘타블리’라는 보드 게임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백개먼과 유사한 게임으로, 주사위를 이용해 말의 위치를 이동시키며 승부를 겨루는 방식이었다. 타블리는 귀족과 중산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도시 주택이나 궁정에서 자주 행해졌다. 전략적 사고와 운의 요소가 어우러진 이 게임은 경쟁심을 유발하면서도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인 연회나 친교의 자리에 자주 포함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오락 문화는 시기와 계층,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대중의 함성과 황제의 위엄이 맞물렸던 히포드롬의 전차 경주부터, 조용한 실내에서 즐기는 게임과 귀족들의 승마 경기까지, 오락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당시 사회의 긴장과 조화, 전통과 변화가 어우러진 중요한 문화적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6.4. 미술과 건축[편집]
동로마 제국의 미술은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제국의 종교적 정체성과 황제권의 신성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 미술은 고대 로마 후기 양식과 초기 기독교 미술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자연주의적 묘사보다는 상징성과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인물은 사실적인 형태보다는 정신적인 존재로 표현되었고, 배경은 현실 세계보다는 하늘나라를 연상시키는 금색이나 추상적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동로마 미술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자리잡았으며, 이후 유럽 중세 미술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국 초기에 제작된 미술품 중 상당수는 박해와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지만, 시리아 지역의 두라 에우로포스 교회에서 발굴된 3세기 벽화는 현존하는 드문 예로서, 기독교 미술의 형성과정과 그 상징적 표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초기 양식은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더욱 체계화되었고, 교회와 수도원, 궁전과 경기장 같은 다양한 공간에서 모자이크 형태로 구현되었다. 특히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운 금빛 모자이크는 성서의 장면과 성인들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하였으며, 공간 전체를 하나의 상징적 세계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미술과 건축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기 동안 급속히 정비되고 확대되었다. 그는 정치적 안정과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동시에, 제국의 위엄과 신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대규모 건축 사업과 종교 예술 후원에 힘썼다. 이 시기의 결정적인 업적 중 하나는 하기아 소피아의 건립으로, 이 성당은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제국의 이상을 구현한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내부는 거대한 중앙 돔으로 이루어져 하늘을 상징하고, 돔을 지탱하는 펜던티브 구조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구조적 독창성은 비잔티움 건축 양식의 핵심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제국 전역은 물론 슬라브 세계의 교회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기아 소피아의 웅장한 규모와 섬세한 장식은 노브고로드의 성 소피아 성당과 키예프의 성 소피아 성당 등 북방 세계에서도 반복적으로 모방되었다.
이 성당을 설계한 이시도로스와 안테미오스는 동로마 시대에서 드물게 이름이 전해지는 건축가들이며, 당시 대부분의 미술가와 장인들은 익명으로 활동하였다. 제국 사회에서 예술가는 개인적인 창작자라기보다는 종교적 의례와 제국의 질서를 구현하는 기능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작가 개인보다는 양식과 규범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대형 건축과 모자이크 외에도, 소형 예술품은 제국 전 시기에 걸쳐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상아를 정밀하게 조각한 이중판과 삼중판은 종교적 장면이나 황제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궁정이나 교회, 귀족 가문 등에서 귀중한 수집품으로 취급되었다. 금속과 에나멜을 활용한 제기와 장식품은 정교함과 상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와 더불어 화려한 채색 필사본과 황제용 자색 비단은 서유럽에서도 희귀한 보물로 여겨졌다. 동로마에서 제작된 이러한 고급 예술품은 무역과 선물, 정복과 약탈을 통해 서방 세계로 퍼졌으며, 특히 라틴 세계의 종교 예술과 귀족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성상에 대한 사용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었다. 성상은 공공 예배와 개인 신앙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여 반대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종교 회화와 조각이 파괴되었다. 성상 반대론자들은 성상의 사용이 이슬람 세력에게 당한 패배의 원인이라 주장하였고,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시각 예술을 금지하려 했다. 그러나 성상 옹호론자들은 복음서와 초기 교회의 전통을 바탕으로 성상의 가치를 주장하였고, 이는 숭배가 아닌 경배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해석이 제시되었다. 결국 성상 옹호파가 승리함으로써 성상은 제국 미술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성상 논쟁 이후, 마케도니아 왕조 아래에서는 문화적 부흥이 이루어졌으며, 미술과 건축 역시 새로운 정점을 맞이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구조와 주제가 표준화되었으며, 십자형 평면의 교회 건축과 벽면 모자이크, 대칭적 구도와 정면성의 강조가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루카스 수도원의 모자이크와 네아 모니 수도원의 장식이 있으며, 이들은 제국의 신학적 세계관과 예술적 성숙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후 콤네노스 왕조와 앙겔로스 왕조 시기에는 황제의 후원이 다시 강화되었고, 종교화는 감정 표현이 더욱 섬세하게 변화하였다. 특히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애도하는 장면처럼 감정적 고조를 담은 도상이 등장하였고, 이는 시칠리아의 노르만 양식과 베네치아의 대성당 장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발칸반도에서는 세르비아의 교회 건축이 번성하였으며, 라슈카 양식에서 시작된 세르비아 고유의 건축 전통은 동로마 양식과 결합하여 독특한 건축 문화를 형성하였다. 모라바 양식에 이르면 외벽 전체를 덮는 풍부한 장식과 다수의 돔이 특징이 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제국의 재정이 약화되었으나, 예술은 오히려 내면적 깊이와 상징성에서 성숙해졌다. 소규모 성상화나 필사본, 유물함 등이 제작되었고, 제4차 십자군 이후 서유럽으로 유입되면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은 서방의 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치마부에와 두치오 같은 이탈리아 화가들은 동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아 ‘이탈로-비잔틴 양식’을 형성하였다. 이 전통은 조토에 이르러 보다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을 도입하며 르네상스 회화의 시초로 이어지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미술과 건축은 단순한 장식이나 신앙 표현을 넘어서, 제국의 사상과 질서,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복합적 문화유산이었다. 그 영향은 제국의 몰락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럽과 동방에 살아남았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예술사 연구의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제국 초기에 제작된 미술품 중 상당수는 박해와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지만, 시리아 지역의 두라 에우로포스 교회에서 발굴된 3세기 벽화는 현존하는 드문 예로서, 기독교 미술의 형성과정과 그 상징적 표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초기 양식은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더욱 체계화되었고, 교회와 수도원, 궁전과 경기장 같은 다양한 공간에서 모자이크 형태로 구현되었다. 특히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운 금빛 모자이크는 성서의 장면과 성인들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하였으며, 공간 전체를 하나의 상징적 세계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미술과 건축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기 동안 급속히 정비되고 확대되었다. 그는 정치적 안정과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동시에, 제국의 위엄과 신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대규모 건축 사업과 종교 예술 후원에 힘썼다. 이 시기의 결정적인 업적 중 하나는 하기아 소피아의 건립으로, 이 성당은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제국의 이상을 구현한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내부는 거대한 중앙 돔으로 이루어져 하늘을 상징하고, 돔을 지탱하는 펜던티브 구조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구조적 독창성은 비잔티움 건축 양식의 핵심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제국 전역은 물론 슬라브 세계의 교회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기아 소피아의 웅장한 규모와 섬세한 장식은 노브고로드의 성 소피아 성당과 키예프의 성 소피아 성당 등 북방 세계에서도 반복적으로 모방되었다.
이 성당을 설계한 이시도로스와 안테미오스는 동로마 시대에서 드물게 이름이 전해지는 건축가들이며, 당시 대부분의 미술가와 장인들은 익명으로 활동하였다. 제국 사회에서 예술가는 개인적인 창작자라기보다는 종교적 의례와 제국의 질서를 구현하는 기능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작가 개인보다는 양식과 규범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대형 건축과 모자이크 외에도, 소형 예술품은 제국 전 시기에 걸쳐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상아를 정밀하게 조각한 이중판과 삼중판은 종교적 장면이나 황제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궁정이나 교회, 귀족 가문 등에서 귀중한 수집품으로 취급되었다. 금속과 에나멜을 활용한 제기와 장식품은 정교함과 상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와 더불어 화려한 채색 필사본과 황제용 자색 비단은 서유럽에서도 희귀한 보물로 여겨졌다. 동로마에서 제작된 이러한 고급 예술품은 무역과 선물, 정복과 약탈을 통해 서방 세계로 퍼졌으며, 특히 라틴 세계의 종교 예술과 귀족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성상에 대한 사용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었다. 성상은 공공 예배와 개인 신앙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여 반대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종교 회화와 조각이 파괴되었다. 성상 반대론자들은 성상의 사용이 이슬람 세력에게 당한 패배의 원인이라 주장하였고,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시각 예술을 금지하려 했다. 그러나 성상 옹호론자들은 복음서와 초기 교회의 전통을 바탕으로 성상의 가치를 주장하였고, 이는 숭배가 아닌 경배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해석이 제시되었다. 결국 성상 옹호파가 승리함으로써 성상은 제국 미술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성상 논쟁 이후, 마케도니아 왕조 아래에서는 문화적 부흥이 이루어졌으며, 미술과 건축 역시 새로운 정점을 맞이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구조와 주제가 표준화되었으며, 십자형 평면의 교회 건축과 벽면 모자이크, 대칭적 구도와 정면성의 강조가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루카스 수도원의 모자이크와 네아 모니 수도원의 장식이 있으며, 이들은 제국의 신학적 세계관과 예술적 성숙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후 콤네노스 왕조와 앙겔로스 왕조 시기에는 황제의 후원이 다시 강화되었고, 종교화는 감정 표현이 더욱 섬세하게 변화하였다. 특히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애도하는 장면처럼 감정적 고조를 담은 도상이 등장하였고, 이는 시칠리아의 노르만 양식과 베네치아의 대성당 장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발칸반도에서는 세르비아의 교회 건축이 번성하였으며, 라슈카 양식에서 시작된 세르비아 고유의 건축 전통은 동로마 양식과 결합하여 독특한 건축 문화를 형성하였다. 모라바 양식에 이르면 외벽 전체를 덮는 풍부한 장식과 다수의 돔이 특징이 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제국의 재정이 약화되었으나, 예술은 오히려 내면적 깊이와 상징성에서 성숙해졌다. 소규모 성상화나 필사본, 유물함 등이 제작되었고, 제4차 십자군 이후 서유럽으로 유입되면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은 서방의 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치마부에와 두치오 같은 이탈리아 화가들은 동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아 ‘이탈로-비잔틴 양식’을 형성하였다. 이 전통은 조토에 이르러 보다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을 도입하며 르네상스 회화의 시초로 이어지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미술과 건축은 단순한 장식이나 신앙 표현을 넘어서, 제국의 사상과 질서,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복합적 문화유산이었다. 그 영향은 제국의 몰락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럽과 동방에 살아남았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예술사 연구의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6.5. 음악[편집]
동로마 제국의 음악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다양한 음악 전통이 결합된 독자적인 예술이었다. 초기 기독교 성가와 유대교 회당 음악, 시리아와 콥트 교회의 전례 음악, 고대 그리스의 이론 체계 등은 제국의 음악 형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특히 고대 그리스 음악과의 연결성은 오늘날까지도 논의되고 있지만, 실제로 동로마 시대 학자들이 고대의 음악 이론서를 분석하고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다수 남아 있다. 다만 그리스 음악의 실천 양식이 그대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제국의 음악은 크게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으로 나뉘었다. 교회 음악은 제국의 정교회 전례와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동방 정교회 고유의 신학과 예식 구조 안에서 성립되었다. 중심은 동로마 성가로, 반주 없는 단성 성가로서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구성된다. 모든 성가는 고대 그리스어로 불리며,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깊은 영적 울림을 전하는 선율이 특징이었다. 성가 작곡은 8세기부터 여덟 개의 선법 체계인 옥토에코스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이 체계는 각기 다른 모티프와 선율 구조를 통해 요일별 예식, 사순절, 부활절 등 전례력에 따른 맞춤형 성가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모티프들은 단순한 음계의 틀을 넘어서, 억양과 문장의 감정 표현에 적절히 반응하도록 구성되었으며, 때로는 특정 단어의 의미를 살리는 음악적 묘사 기법도 사용되었다.
작곡은 센토나이제이션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이는 정형화된 짧은 선율 단위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완결된 성가로 구성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을 통해 작곡가는 전통 안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였으며, 동시에 성가가 지녀야 할 정교한 구조와 신학적 무게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성가의 초기 전승은 모두 구전에 의존하였고, 시간이 흐르며 점차 기보법이 발달하였다. 9세기부터 등장한 에크포네틱 기보법은 억양과 음의 상승·하강을 단순한 부호로 표시하였다. 이후 10세기에는 보다 복잡한 정보를 담을 수 있는 팔라이오 동로마 기보법이 나타났고, 12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기 동로마 기보법이 정립되어 음높이 간의 상대적 간격까지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교회 음악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5세기부터 사용된 콘타키온은 장편의 서사적 성가로, 각 연이 동일한 선율 구조를 따르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 형식은 로마노스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그는 수많은 성가를 작곡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7세기 말에는 아홉 개의 오데로 구성된 카논이 등장하였고, 이는 성서의 찬가와 연결되며 교육용으로도 사용되었다. 크레타의 안드레아스가 이 형식을 정립한 인물로 꼽힌다. 8세기부터는 스티케론이라는 짧은 성가 형식이 자리 잡았고, 여성 작곡가 카시아는 이 장르를 통해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형성하였다. 그녀는 정교한 운율 감각과 신학적 깊이를 결합한 성가를 남겼다. 제국 말기에는 전통적 성가 양식의 엄격함이 완화되었으며, 요안니스 쿠쿠젤레스는 화려한 장식과 자유로운 선율을 특징으로 하는 칼로포니아 양식을 선도하였다. 그의 작업은 이후 신동로마 음악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세속 음악은 제국 전역에서 일상과 의례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궁정의 공식 의식, 황제 즉위식, 승전 축하식, 대사 접견식 등에서 음악은 국가 권위의 상징으로 기능했으며, 도시 축제와 민속 행사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국가가 후원하는 음악단이 존재했고, 이들은 연주뿐 아니라 작곡과 의식 진행에도 참여하였다. 대부분의 세속 음악은 즉흥 연주로 구전되었기 때문에 기보된 자료는 거의 없으며, 몇몇 악보는 훨씬 후대에 필사된 것으로 원형을 온전히 복원하기 어렵다. 그러나 회화와 문헌, 의식 기록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당시 음악 문화를 추정할 수 있다.
악기 사용은 세속 음악의 핵심 요소였다. 가장 대표적인 악기는 수력의 압력으로 작동하는 수력 오르간으로, 주로 궁정 행사와 경기장에서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아울로스는 갈대나 동물 뼈로 만든 관악기로, 이중 관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탐부라스는 목재 몸체에 줄을 걸어 튕기는 현악기로 반주와 선율 연주에 모두 쓰였다. 특히 동로마 리라는 활로 연주되는 현악기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악기였으며, 농민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널리 연주되었다. 이들 악기는 독주보다는 성악과 함께 연주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단성 혹은 이선율적 형태로 음향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속 음악의 장르는 매우 다양하였다. 아크리틱 노래는 제국 변경지대의 병사들이 부른 영웅 서사시로, 민속적 용맹과 애국심을 담았다. 황제나 고위 인사를 찬양하는 찬송과 경배의 노래는 제국의 통치 권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민간에서는 심포지아라 불리는 연회 음악이 향연 자리에서 연주되었다. 이 전통은 고대의 심포시온 문화와 이어지며, 연주자와 청중 간의 감정 교류를 유도하는 기능을 지녔다. 계절 축제나 결혼식에서는 춤을 위한 음악이 즉흥적으로 연주되었고, 이들은 각 지역의 전통 율동과 결합되어 생명력 있는 민속 예술을 형성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음악은 예술 그 자체이자 제국 정체성과 통치 질서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였다. 황제는 하늘의 의지를 지상에서 구현하는 존재로 여겨졌고, 음악은 이러한 신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었다. 교회 음악은 하늘나라의 예배를 지상에서 실현하는 도구였고, 세속 음악은 제국의 일상과 감정을 반영하는 민중적 언어였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의 음악은 예식과 사상, 예술과 통치가 융합된 복합적인 문화적 표현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동방 정교회 성가와 일부 민속 음악을 통해 그 깊은 전통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제국의 음악은 크게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으로 나뉘었다. 교회 음악은 제국의 정교회 전례와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동방 정교회 고유의 신학과 예식 구조 안에서 성립되었다. 중심은 동로마 성가로, 반주 없는 단성 성가로서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구성된다. 모든 성가는 고대 그리스어로 불리며,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깊은 영적 울림을 전하는 선율이 특징이었다. 성가 작곡은 8세기부터 여덟 개의 선법 체계인 옥토에코스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이 체계는 각기 다른 모티프와 선율 구조를 통해 요일별 예식, 사순절, 부활절 등 전례력에 따른 맞춤형 성가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모티프들은 단순한 음계의 틀을 넘어서, 억양과 문장의 감정 표현에 적절히 반응하도록 구성되었으며, 때로는 특정 단어의 의미를 살리는 음악적 묘사 기법도 사용되었다.
작곡은 센토나이제이션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이는 정형화된 짧은 선율 단위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완결된 성가로 구성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을 통해 작곡가는 전통 안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였으며, 동시에 성가가 지녀야 할 정교한 구조와 신학적 무게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성가의 초기 전승은 모두 구전에 의존하였고, 시간이 흐르며 점차 기보법이 발달하였다. 9세기부터 등장한 에크포네틱 기보법은 억양과 음의 상승·하강을 단순한 부호로 표시하였다. 이후 10세기에는 보다 복잡한 정보를 담을 수 있는 팔라이오 동로마 기보법이 나타났고, 12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기 동로마 기보법이 정립되어 음높이 간의 상대적 간격까지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교회 음악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5세기부터 사용된 콘타키온은 장편의 서사적 성가로, 각 연이 동일한 선율 구조를 따르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 형식은 로마노스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그는 수많은 성가를 작곡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7세기 말에는 아홉 개의 오데로 구성된 카논이 등장하였고, 이는 성서의 찬가와 연결되며 교육용으로도 사용되었다. 크레타의 안드레아스가 이 형식을 정립한 인물로 꼽힌다. 8세기부터는 스티케론이라는 짧은 성가 형식이 자리 잡았고, 여성 작곡가 카시아는 이 장르를 통해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형성하였다. 그녀는 정교한 운율 감각과 신학적 깊이를 결합한 성가를 남겼다. 제국 말기에는 전통적 성가 양식의 엄격함이 완화되었으며, 요안니스 쿠쿠젤레스는 화려한 장식과 자유로운 선율을 특징으로 하는 칼로포니아 양식을 선도하였다. 그의 작업은 이후 신동로마 음악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세속 음악은 제국 전역에서 일상과 의례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궁정의 공식 의식, 황제 즉위식, 승전 축하식, 대사 접견식 등에서 음악은 국가 권위의 상징으로 기능했으며, 도시 축제와 민속 행사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국가가 후원하는 음악단이 존재했고, 이들은 연주뿐 아니라 작곡과 의식 진행에도 참여하였다. 대부분의 세속 음악은 즉흥 연주로 구전되었기 때문에 기보된 자료는 거의 없으며, 몇몇 악보는 훨씬 후대에 필사된 것으로 원형을 온전히 복원하기 어렵다. 그러나 회화와 문헌, 의식 기록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당시 음악 문화를 추정할 수 있다.
악기 사용은 세속 음악의 핵심 요소였다. 가장 대표적인 악기는 수력의 압력으로 작동하는 수력 오르간으로, 주로 궁정 행사와 경기장에서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아울로스는 갈대나 동물 뼈로 만든 관악기로, 이중 관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탐부라스는 목재 몸체에 줄을 걸어 튕기는 현악기로 반주와 선율 연주에 모두 쓰였다. 특히 동로마 리라는 활로 연주되는 현악기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악기였으며, 농민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널리 연주되었다. 이들 악기는 독주보다는 성악과 함께 연주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단성 혹은 이선율적 형태로 음향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속 음악의 장르는 매우 다양하였다. 아크리틱 노래는 제국 변경지대의 병사들이 부른 영웅 서사시로, 민속적 용맹과 애국심을 담았다. 황제나 고위 인사를 찬양하는 찬송과 경배의 노래는 제국의 통치 권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민간에서는 심포지아라 불리는 연회 음악이 향연 자리에서 연주되었다. 이 전통은 고대의 심포시온 문화와 이어지며, 연주자와 청중 간의 감정 교류를 유도하는 기능을 지녔다. 계절 축제나 결혼식에서는 춤을 위한 음악이 즉흥적으로 연주되었고, 이들은 각 지역의 전통 율동과 결합되어 생명력 있는 민속 예술을 형성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음악은 예술 그 자체이자 제국 정체성과 통치 질서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였다. 황제는 하늘의 의지를 지상에서 구현하는 존재로 여겨졌고, 음악은 이러한 신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었다. 교회 음악은 하늘나라의 예배를 지상에서 실현하는 도구였고, 세속 음악은 제국의 일상과 감정을 반영하는 민중적 언어였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의 음악은 예식과 사상, 예술과 통치가 융합된 복합적인 문화적 표현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동방 정교회 성가와 일부 민속 음악을 통해 그 깊은 전통의 흔적이 남아 있다.
6.6. 문학[편집]
동로마 제국의 문학은 제국 전 시기를 아우르며 중세 그리스어로 기록된 방대한 문헌군을 의미한다. 제국은 행정적으로는 로마의 계승자였으나, 언어와 문화 면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헬레니즘적 전통 위에 기독교 신앙과 동방 문화가 덧입혀진 혼성체였다. 다양한 언어와 방언이 공존하던 제국 안에서, 문학 창작의 중심 언어는 중세 그리스어였다. 이 언어는 고전 아테네어를 바탕으로 한 고급 문체와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코이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구어체 문체로 나뉘었으며, 종종 하나의 문서 안에서도 이중적인 언어 사용이 공존하였다.
문학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다. 현대 연구자들은 이 시기 기록된 대부분의 그리스어 문헌을 문학으로 포함시키는 포괄적 입장을 취하지만, 고전적 수사와 형식을 따르는 작품만을 문학으로 간주하는 입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동로마 문학의 본질은 그 자체가 고대의 형식과 기독교적 내용을 융합한 독자적 창작의 장이었으며, 단순한 고대의 모방도, 교리 해설의 도구만도 아니었다.
초기 동로마 문학, 즉 약 330년부터 650년까지는 고전 헬레니즘 전통, 기독교 신학, 그리고 잔존하는 이교 철학이 긴장과 교차 속에서 혼재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교부들은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과 철학을 교육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적 사상과 고전 문체를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신학 문헌을 창조해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대중적인 설교체 문학의 정형을 확립하였고,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는 신비주의 철학과 네오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언어로 재구성하였다. 프로코피오스는 세속사와 전기문학에서 고전 문체를 모범적으로 재현하며 동시대 제국의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을 문학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시기 특유의 문학 양식 중 하나는 성인의 기적담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앙적 이야기 형식이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과 회고를 담은 '사막 교부들의 어록'은 수도원 전통의 심화와 함께 널리 필사되었고, 동로마 사회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널리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처럼 초기 동로마 문학은 교부 문학과 순교문학, 설교문과 교리서, 기적담과 기도문이라는 장르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650년부터 800년까지는 이른바 ‘동로마 암흑기’로 불리며, 제국의 국력 약화, 아랍 세력의 압박, 내전과 행정 혼란으로 인해 새로운 문학 창작이 극히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시모스 고백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르마노스,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 같은 탁월한 신학자들은 이 시기에도 활동하며 성서 해석, 신학 논쟁, 전례문 작성을 통해 문학 전통의 생명력을 이어갔다.
800년부터 10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정치적 안정과 함께 ‘문화의 부흥기’가 도래하였으며, 이 시기는 ‘백과주의 시대’로 불린다. 제국 정부는 고전 문화 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교육 체계에 통합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문학은 창작보다는 편찬, 주석, 정리 중심의 활동으로 옮겨갔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스 7세의 지시에 따라 편찬된 '제국의 통치론'은 군주 통치의 이상을 고전 양식으로 재구성한 정치문헌이며, 이외에도 수많은 고전 그리스 문헌이 이 시기에 필사되고 주석되었다. 이 시기의 문학은 고전적 규범에 충실하면서도 기독교적 체계 속에 고대 지식을 수렴하는 데 집중하였다.
1000년부터 1250년까지는 문학 양식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저자 개인의 정체성과 감성, 신비주의적 신앙이 문학 속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시메온 신학자는 내면적 신비 체험을 시와 산문으로 표현하였고, 미카엘 프셀로스는 철학, 정치, 전기를 넘나드는 지적 산문을 통해 고전 전통과 기독교 사유를 종합하였다. 테오도로스 프로드로모스는 해학적 시와 연애시를 통해 새로운 문학 취향을 이끌었다. 이 시기의 문학은 고전 서사시의 구조와 동방 기사 이야기의 요소가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디게네스 아크리타스’이다. 이 작품은 국경 방어를 맡은 아크리타이의 모험을 다룬 서사시로, 동서 문화의 혼합, 종교 간 긴장, 민족 간 경계라는 동로마 후기 사회의 실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제국의 마지막 세기인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문학의 중심이 다시 성인전과 신학으로 회귀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또한 라틴어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문학의 외연이 확장되었다. 많은 동로마 문헌이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동시에 서방의 철학과 신학이 제국 지식인 사회에 유입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인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고대 철학을 복원하고 이를 기독교적 사유와 조화시키려 하였으며, 베사리온은 고전 문헌의 보존과 수집을 통해 동로마 문화를 이탈리아로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문학과 사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문학은 단지 교리를 전달하는 신학 문헌이나 고대의 재현을 넘어서, 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공간에서 신앙과 지성, 제국적 질서와 개인의 내면, 고전 전통과 새로운 문학 양식이 서로 긴장하고 교차하는 독자적 문화 영역이었다. 그 안에는 수사학과 철학, 역사와 신비주의, 성스러움과 세속성, 동방과 서방이 얽힌 복합적인 문학 세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정신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문학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다. 현대 연구자들은 이 시기 기록된 대부분의 그리스어 문헌을 문학으로 포함시키는 포괄적 입장을 취하지만, 고전적 수사와 형식을 따르는 작품만을 문학으로 간주하는 입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동로마 문학의 본질은 그 자체가 고대의 형식과 기독교적 내용을 융합한 독자적 창작의 장이었으며, 단순한 고대의 모방도, 교리 해설의 도구만도 아니었다.
초기 동로마 문학, 즉 약 330년부터 650년까지는 고전 헬레니즘 전통, 기독교 신학, 그리고 잔존하는 이교 철학이 긴장과 교차 속에서 혼재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교부들은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과 철학을 교육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적 사상과 고전 문체를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신학 문헌을 창조해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대중적인 설교체 문학의 정형을 확립하였고,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는 신비주의 철학과 네오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언어로 재구성하였다. 프로코피오스는 세속사와 전기문학에서 고전 문체를 모범적으로 재현하며 동시대 제국의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을 문학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시기 특유의 문학 양식 중 하나는 성인의 기적담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앙적 이야기 형식이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과 회고를 담은 '사막 교부들의 어록'은 수도원 전통의 심화와 함께 널리 필사되었고, 동로마 사회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널리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처럼 초기 동로마 문학은 교부 문학과 순교문학, 설교문과 교리서, 기적담과 기도문이라는 장르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650년부터 800년까지는 이른바 ‘동로마 암흑기’로 불리며, 제국의 국력 약화, 아랍 세력의 압박, 내전과 행정 혼란으로 인해 새로운 문학 창작이 극히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시모스 고백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르마노스,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 같은 탁월한 신학자들은 이 시기에도 활동하며 성서 해석, 신학 논쟁, 전례문 작성을 통해 문학 전통의 생명력을 이어갔다.
800년부터 10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정치적 안정과 함께 ‘문화의 부흥기’가 도래하였으며, 이 시기는 ‘백과주의 시대’로 불린다. 제국 정부는 고전 문화 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교육 체계에 통합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문학은 창작보다는 편찬, 주석, 정리 중심의 활동으로 옮겨갔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스 7세의 지시에 따라 편찬된 '제국의 통치론'은 군주 통치의 이상을 고전 양식으로 재구성한 정치문헌이며, 이외에도 수많은 고전 그리스 문헌이 이 시기에 필사되고 주석되었다. 이 시기의 문학은 고전적 규범에 충실하면서도 기독교적 체계 속에 고대 지식을 수렴하는 데 집중하였다.
1000년부터 1250년까지는 문학 양식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저자 개인의 정체성과 감성, 신비주의적 신앙이 문학 속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시메온 신학자는 내면적 신비 체험을 시와 산문으로 표현하였고, 미카엘 프셀로스는 철학, 정치, 전기를 넘나드는 지적 산문을 통해 고전 전통과 기독교 사유를 종합하였다. 테오도로스 프로드로모스는 해학적 시와 연애시를 통해 새로운 문학 취향을 이끌었다. 이 시기의 문학은 고전 서사시의 구조와 동방 기사 이야기의 요소가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디게네스 아크리타스’이다. 이 작품은 국경 방어를 맡은 아크리타이의 모험을 다룬 서사시로, 동서 문화의 혼합, 종교 간 긴장, 민족 간 경계라는 동로마 후기 사회의 실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제국의 마지막 세기인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문학의 중심이 다시 성인전과 신학으로 회귀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또한 라틴어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문학의 외연이 확장되었다. 많은 동로마 문헌이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동시에 서방의 철학과 신학이 제국 지식인 사회에 유입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인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고대 철학을 복원하고 이를 기독교적 사유와 조화시키려 하였으며, 베사리온은 고전 문헌의 보존과 수집을 통해 동로마 문화를 이탈리아로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문학과 사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문학은 단지 교리를 전달하는 신학 문헌이나 고대의 재현을 넘어서, 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공간에서 신앙과 지성, 제국적 질서와 개인의 내면, 고전 전통과 새로운 문학 양식이 서로 긴장하고 교차하는 독자적 문화 영역이었다. 그 안에는 수사학과 철학, 역사와 신비주의, 성스러움과 세속성, 동방과 서방이 얽힌 복합적인 문학 세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정신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6.7. 과학과 기술[편집]
동로마 제국은 고대 그리스의 지적 전통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능동적으로 계승하고 확장한 문명으로 평가된다. 제국의 학자들은 자연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 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전의 지식을 해석하고 비판하며, 이슬람권과 라틴 세계와의 지적 교류를 통해 새로운 학문적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고대의 모방이 아니라, 기존 지식을 새로운 시대의 조건에 맞게 재구성하는 창조적 과정이었다.
동로마 학문의 근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문헌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아르키메데스와 에우클레이데스의 수학 이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지리학,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의학 체계 등은 제국의 교육 제도와 학술 활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전통은 고립된 형태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이슬람권을 비롯한 이웃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특히 9세기부터 12세기까지의 시기에는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히브리어로 작성된 문헌의 번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동로마 학자들은 이를 단순히 수용하는 것을 넘어 철학적 비판과 수학적 재구성을 통해 자신만의 이론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과학적 전통의 계승과 혁신은 여러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밀레토스 출신의 이시도로스는 아르키메데스의 저작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붙였으며, 이는 후대에 ‘아르키메데스 팔림프세스트’로 남아 고전 수학의 전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9세기의 학자 레온 수학자는 천문학, 역법학,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과 저술 활동을 펼치며, 당시 제국의 학술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과학 교육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자연철학 분야에서는 요한 필로포노스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사물의 운동이 외력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내재적 운동'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훗날 서유럽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오레스메나 부리단과 같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운동 이론 발전에 간접적인 기초가 되었다. 이는 다시 갈릴레이를 비롯한 근대 과학자들에게 전해지며, 근대 역학의 형성에 기여한 정신적 토대로 작용하였다.
의학 분야에서 동로마 제국은 체계적 병원 제도의 기원을 마련하였다. 고대에는 병원이 신전이나 개인의 호의에 의존하는 장소였으나, 동로마 시대에 들어 병원은 상시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공적 기관으로 정비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는 훈련된 의사가 상주하고 약제를 조제하는 약국이 병설되어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내과, 외과, 산과 등의 기초 진료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제도는 이후 이슬람권의 병원 설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라틴 세계로도 확산되어 오늘날 병원 제도의 원형을 형성하였다.
약초학에서도 동로마 제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디오스코리데스가 저술한 식물 약제에 관한 문헌은 그림과 함께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중세 유럽 전역에서 표준 의학 교재로 활용되었다. 이 문헌은 아라비아어와 라틴어로도 번역되어 오랫동안 약물학의 중심 참고서로 자리 잡았다.
천문학과 지리학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그의 지리학은 동로마의 지도 제작과 항해술에 실질적인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그의 천문 이론은 르네상스기에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중심 우주 체계를 구상할 때 참고한 주요 학문적 자산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아라비아어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이를 통해 다시 서유럽으로 역수입되며 과학 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군사 기술에서도 높은 수준의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제국의 기병대는 등자와 특수한 말안장을 활용하여 안정적인 궁기병 전술을 확립하였다. 이 장비는 기동성과 사격 능력을 동시에 높여주었으며, 전장에서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또한 해군 전력에서는 라틴 돛을 채용하여 선박의 조종성을 강화하였고, 바람의 방향에 구애받지 않는 항해가 가능해졌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발명은 '그리스 불'이라 불리는 화공 무기였다. 이 물질은 물 위에서도 연소하는 성질을 지니며, 불로 공격하는 화염 방사 형태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리스 불은 특히 해상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차례의 공성전을 방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과학과 기술은 폐쇄적 체계가 아니라 유연한 학술 구조 안에서 발전하였다. 수도의 학당과 수도원은 지식의 전승과 확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이곳에서 수련한 학자들은 이슬람권으로 지식의 다리를 놓거나, 서유럽의 학문 형성에 기여하는 중간 매개자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라틴어로 번역된 동로마 문헌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가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고대와 중세,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고리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과학과 기술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과 전환의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는 오늘날 과학 문명의 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문명사적 기반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동로마 학문의 근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문헌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아르키메데스와 에우클레이데스의 수학 이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지리학,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의학 체계 등은 제국의 교육 제도와 학술 활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전통은 고립된 형태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이슬람권을 비롯한 이웃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특히 9세기부터 12세기까지의 시기에는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히브리어로 작성된 문헌의 번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동로마 학자들은 이를 단순히 수용하는 것을 넘어 철학적 비판과 수학적 재구성을 통해 자신만의 이론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과학적 전통의 계승과 혁신은 여러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밀레토스 출신의 이시도로스는 아르키메데스의 저작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붙였으며, 이는 후대에 ‘아르키메데스 팔림프세스트’로 남아 고전 수학의 전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9세기의 학자 레온 수학자는 천문학, 역법학,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과 저술 활동을 펼치며, 당시 제국의 학술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과학 교육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자연철학 분야에서는 요한 필로포노스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사물의 운동이 외력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내재적 운동'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훗날 서유럽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오레스메나 부리단과 같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운동 이론 발전에 간접적인 기초가 되었다. 이는 다시 갈릴레이를 비롯한 근대 과학자들에게 전해지며, 근대 역학의 형성에 기여한 정신적 토대로 작용하였다.
의학 분야에서 동로마 제국은 체계적 병원 제도의 기원을 마련하였다. 고대에는 병원이 신전이나 개인의 호의에 의존하는 장소였으나, 동로마 시대에 들어 병원은 상시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공적 기관으로 정비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는 훈련된 의사가 상주하고 약제를 조제하는 약국이 병설되어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내과, 외과, 산과 등의 기초 진료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제도는 이후 이슬람권의 병원 설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라틴 세계로도 확산되어 오늘날 병원 제도의 원형을 형성하였다.
약초학에서도 동로마 제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디오스코리데스가 저술한 식물 약제에 관한 문헌은 그림과 함께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중세 유럽 전역에서 표준 의학 교재로 활용되었다. 이 문헌은 아라비아어와 라틴어로도 번역되어 오랫동안 약물학의 중심 참고서로 자리 잡았다.
천문학과 지리학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그의 지리학은 동로마의 지도 제작과 항해술에 실질적인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그의 천문 이론은 르네상스기에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중심 우주 체계를 구상할 때 참고한 주요 학문적 자산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아라비아어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이를 통해 다시 서유럽으로 역수입되며 과학 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군사 기술에서도 높은 수준의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제국의 기병대는 등자와 특수한 말안장을 활용하여 안정적인 궁기병 전술을 확립하였다. 이 장비는 기동성과 사격 능력을 동시에 높여주었으며, 전장에서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또한 해군 전력에서는 라틴 돛을 채용하여 선박의 조종성을 강화하였고, 바람의 방향에 구애받지 않는 항해가 가능해졌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발명은 '그리스 불'이라 불리는 화공 무기였다. 이 물질은 물 위에서도 연소하는 성질을 지니며, 불로 공격하는 화염 방사 형태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리스 불은 특히 해상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차례의 공성전을 방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과학과 기술은 폐쇄적 체계가 아니라 유연한 학술 구조 안에서 발전하였다. 수도의 학당과 수도원은 지식의 전승과 확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이곳에서 수련한 학자들은 이슬람권으로 지식의 다리를 놓거나, 서유럽의 학문 형성에 기여하는 중간 매개자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라틴어로 번역된 동로마 문헌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가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고대와 중세,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고리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과학과 기술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과 전환의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는 오늘날 과학 문명의 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문명사적 기반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7. 경제[편집]
동로마 제국의 경제는 고전 고대의 도시 중심 경제와 후기 로마 제국의 제도적 유산, 기독교화된 사회 질서, 그리고 동지중해 특유의 교역망이 복합적으로 융합된 다층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국은 단순한 농업 중심 체제를 넘어서 광범위한 국제 상업, 정교한 조세 행정, 화폐 기반 유통망을 통해 안정된 제국 재정을 유지하려 하였으며, 이 체계는 서로 다른 시대적 위기 속에서도 형태를 바꾸어가며 지속되었다.
제국의 중심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있었다. 보스포로스 해협에 면한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 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교역로의 핵심에 자리하며, 제국 경제의 심장이자 거대한 시장으로 기능하였다. 도시에는 곡물 창고, 금 세공소, 직물 공방, 수입품 집산지, 환전소 등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국가가 직접 도시의 식량 수급을 조절하고 세금 징수와 화폐 주조를 관리하였다. 이는 단순한 행정 중심지가 아닌, 제국의 경제를 유기적으로 통제하는 중심 기구였다.
제국의 조세 제도는 강력한 관료 체계에 기반을 두었다. 조세는 토지, 곡물, 가축, 인구에 따라 부과되었으며, 황제 재정과 군사 유지에 필수적인 자원이 되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는 제국 전역을 통합하려는 군사 원정과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인해 조세 체계가 더욱 정교화되었고, 그에 따라 세금 부담도 크게 증가하였다.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임차하면서 조세와 병역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 내부의 사회 계층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농업은 제국 경제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밀과 보리, 포도, 올리브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작물 생산이 활발하였다. 이집트와 소아시아 서부는 제국의 대표적 곡창지대로, 곡물과 면직물, 향료, 염료 등을 생산하여 수도와 해외 시장에 공급하였다. 특히 이집트는 나일강 덕분에 매우 안정된 곡물 수확이 가능했고, 이로 인해 제국의 식량 안정성과 세입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7세기 중엽 이슬람 세력에 이 지역들을 상실하면서, 동로마는 단기간에 가장 핵심적인 세입 기반을 잃고 급격한 재정 압박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국은 테마 체제로 알려진 방어 중심의 행정 군사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제 개편이 아니라, 경제 구조의 재조정이기도 하였다. 병사들은 일정 면적의 토지를 분급받고, 그 토지에서 생산되는 수확물로 자급자족하며 병역을 수행하였다. 이 체제는 제국이 직접 병사들의 봉급을 지급하는 부담을 줄이고, 동시에 지방 사회를 국방 체계에 통합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지방 경제의 자립성이 강화되었고, 중소 지주층의 형성이 촉진되었다.
중세 초기 내내 제국은 화폐 경제를 유지하며, 금화인 노미스마 또는 솔리두스를 동지중해 전역에 통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금화는 타국 화폐에 비해 매우 높은 정밀도로 주조되었으며, 신뢰도와 보존 가치 덕분에 유럽 전역에서 귀중한 교환 수단으로 통했다. 심지어 이슬람 세계에서도 동로마 금화는 널리 유통되었으며, 이는 제국의 화폐 주권이 경제적 안정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마케도니아 왕조기에 이르러 제국은 전반적인 회복 국면에 들어섰고, 이에 따라 경제 또한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수도는 다시금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국 각지의 지방 도시들도 생산과 교역을 통해 활력을 되찾았다. 이 시기에는 곡물뿐 아니라 비단, 직물, 금속 세공품, 세라믹, 향료와 약재 등 다양한 고부가가치 상품들이 수도로 유입되었고, 이를 통해 제국은 교역 수익과 관세 수입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동로마는 단순한 생산국이 아니라, 지중해 교역의 중개국으로 기능하면서 제국 재정을 유지하였다. 수도에는 제국이 직접 운영하는 공방과 상점들이 있었고, 공물 형태로 지방에서 거둬들인 물자들은 이곳에서 가공되거나 저장되어 궁정과 도시 소비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귀족 대지주층이 성장하면서 국가는 중소 농민층의 토지를 잠식하는 양상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병역을 수행할 수 있는 자영농 계층은 감소하고, 대토지 소유층은 조세 회피와 사적 자치권을 확대하였다. 국가는 조세 기반을 상실하고 용병 의존도를 높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제국의 재정 기반을 약화시키는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으로 소아시아 중부의 핵심 곡창지대가 무력화되면서, 제국은 군사력뿐 아니라 식량 자립과 조세 수입 면에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제국은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서방 해양 도시국가들과 무역 특권 조약을 체결하여 상업적 활로를 모색하였으나, 이는 제국 내부 시장의 자율성과 수익 구조를 외국 상인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외국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면세를 받으며 활동했고, 이는 제국의 상업 세입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단순한 군사적 충격을 넘어, 제국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킨 사건이었다. 제국은 중앙 행정과 재정 조직을 잃고 분열되었으며, 재건된 제국은 과거의 경제 규모를 회복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후에도 상업 중심지로서 존재하였으나, 상업의 이익 대부분은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의 손에 들어갔으며, 제국은 화폐를 주조할 능력마저 상실하고 외국 화폐에 의존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하의 후기 제국은 과거 동지중해 세계를 장악하던 대제국의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였으며, 수도의 시장조차 외국인 상인과 수도원의 대토지에서 파생된 사적 이익이 장악하고 있었다. 제국의 군사와 행정은 극도로 축소되었고, 남은 영토에서 징수되는 세금은 황제와 군대의 생존을 유지하는 데에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마지막 세기 동안 제국은 상업권과 조세권, 행정권의 상당 부분을 교회나 귀족, 외세에 넘긴 상태로, 실질적인 경제 주권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며 동로마 제국이 소멸했을 때, 이미 그 경제 기반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축소와 분열, 외세 종속 속에서 사실상 붕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는 고전 시대의 도시 경제와 화폐 경제를 중세까지 이어간 독보적인 국가였으며, 그 행정적 정밀함과 국제 상업망은 후대 유럽 경제 체제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복잡하고 조직화된 시장을 가진 도시였으며, 동로마의 경제는 단순한 생존이 아닌 문명적 유산의 보존과 전파라는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제국의 중심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있었다. 보스포로스 해협에 면한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 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교역로의 핵심에 자리하며, 제국 경제의 심장이자 거대한 시장으로 기능하였다. 도시에는 곡물 창고, 금 세공소, 직물 공방, 수입품 집산지, 환전소 등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국가가 직접 도시의 식량 수급을 조절하고 세금 징수와 화폐 주조를 관리하였다. 이는 단순한 행정 중심지가 아닌, 제국의 경제를 유기적으로 통제하는 중심 기구였다.
제국의 조세 제도는 강력한 관료 체계에 기반을 두었다. 조세는 토지, 곡물, 가축, 인구에 따라 부과되었으며, 황제 재정과 군사 유지에 필수적인 자원이 되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는 제국 전역을 통합하려는 군사 원정과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인해 조세 체계가 더욱 정교화되었고, 그에 따라 세금 부담도 크게 증가하였다.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임차하면서 조세와 병역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 내부의 사회 계층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농업은 제국 경제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밀과 보리, 포도, 올리브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작물 생산이 활발하였다. 이집트와 소아시아 서부는 제국의 대표적 곡창지대로, 곡물과 면직물, 향료, 염료 등을 생산하여 수도와 해외 시장에 공급하였다. 특히 이집트는 나일강 덕분에 매우 안정된 곡물 수확이 가능했고, 이로 인해 제국의 식량 안정성과 세입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7세기 중엽 이슬람 세력에 이 지역들을 상실하면서, 동로마는 단기간에 가장 핵심적인 세입 기반을 잃고 급격한 재정 압박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국은 테마 체제로 알려진 방어 중심의 행정 군사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제 개편이 아니라, 경제 구조의 재조정이기도 하였다. 병사들은 일정 면적의 토지를 분급받고, 그 토지에서 생산되는 수확물로 자급자족하며 병역을 수행하였다. 이 체제는 제국이 직접 병사들의 봉급을 지급하는 부담을 줄이고, 동시에 지방 사회를 국방 체계에 통합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지방 경제의 자립성이 강화되었고, 중소 지주층의 형성이 촉진되었다.
중세 초기 내내 제국은 화폐 경제를 유지하며, 금화인 노미스마 또는 솔리두스를 동지중해 전역에 통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금화는 타국 화폐에 비해 매우 높은 정밀도로 주조되었으며, 신뢰도와 보존 가치 덕분에 유럽 전역에서 귀중한 교환 수단으로 통했다. 심지어 이슬람 세계에서도 동로마 금화는 널리 유통되었으며, 이는 제국의 화폐 주권이 경제적 안정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마케도니아 왕조기에 이르러 제국은 전반적인 회복 국면에 들어섰고, 이에 따라 경제 또한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수도는 다시금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국 각지의 지방 도시들도 생산과 교역을 통해 활력을 되찾았다. 이 시기에는 곡물뿐 아니라 비단, 직물, 금속 세공품, 세라믹, 향료와 약재 등 다양한 고부가가치 상품들이 수도로 유입되었고, 이를 통해 제국은 교역 수익과 관세 수입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동로마는 단순한 생산국이 아니라, 지중해 교역의 중개국으로 기능하면서 제국 재정을 유지하였다. 수도에는 제국이 직접 운영하는 공방과 상점들이 있었고, 공물 형태로 지방에서 거둬들인 물자들은 이곳에서 가공되거나 저장되어 궁정과 도시 소비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귀족 대지주층이 성장하면서 국가는 중소 농민층의 토지를 잠식하는 양상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병역을 수행할 수 있는 자영농 계층은 감소하고, 대토지 소유층은 조세 회피와 사적 자치권을 확대하였다. 국가는 조세 기반을 상실하고 용병 의존도를 높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제국의 재정 기반을 약화시키는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으로 소아시아 중부의 핵심 곡창지대가 무력화되면서, 제국은 군사력뿐 아니라 식량 자립과 조세 수입 면에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제국은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서방 해양 도시국가들과 무역 특권 조약을 체결하여 상업적 활로를 모색하였으나, 이는 제국 내부 시장의 자율성과 수익 구조를 외국 상인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외국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면세를 받으며 활동했고, 이는 제국의 상업 세입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단순한 군사적 충격을 넘어, 제국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킨 사건이었다. 제국은 중앙 행정과 재정 조직을 잃고 분열되었으며, 재건된 제국은 과거의 경제 규모를 회복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후에도 상업 중심지로서 존재하였으나, 상업의 이익 대부분은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의 손에 들어갔으며, 제국은 화폐를 주조할 능력마저 상실하고 외국 화폐에 의존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하의 후기 제국은 과거 동지중해 세계를 장악하던 대제국의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였으며, 수도의 시장조차 외국인 상인과 수도원의 대토지에서 파생된 사적 이익이 장악하고 있었다. 제국의 군사와 행정은 극도로 축소되었고, 남은 영토에서 징수되는 세금은 황제와 군대의 생존을 유지하는 데에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마지막 세기 동안 제국은 상업권과 조세권, 행정권의 상당 부분을 교회나 귀족, 외세에 넘긴 상태로, 실질적인 경제 주권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며 동로마 제국이 소멸했을 때, 이미 그 경제 기반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축소와 분열, 외세 종속 속에서 사실상 붕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는 고전 시대의 도시 경제와 화폐 경제를 중세까지 이어간 독보적인 국가였으며, 그 행정적 정밀함과 국제 상업망은 후대 유럽 경제 체제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복잡하고 조직화된 시장을 가진 도시였으며, 동로마의 경제는 단순한 생존이 아닌 문명적 유산의 보존과 전파라는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7.1.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동로마 제국 경제 구조[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 제국의 경제 구조는 단순히 수도 중심의 공급 체계를 넘어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자본이 상호 교차하며 제국 전역을 통합하는 다층적 조직이었다. 이 도시는 정치, 군사, 종교, 법률의 핵심이었을 뿐 아니라, 제국의 재정적 혈맥이 집결되는 경제적 심장부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행한 기능은 단일한 범주에 귀속되지 않으며, 무역과 세금, 화폐, 산업, 물류, 인구통제 등 다면적 역할을 통해 동로마 제국 전체의 경제적 구조를 주도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잇는 세 개의 세계적 교역권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이 지리적 배치는 자연스럽게 도시를 초국적 물류의 중추로 만들었고, 고대 세계의 해상 교역로가 만나는 결절점으로 기능하게 하였다. 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로스 해협, 지중해의 동부 항로, 아나톨리아 내륙과 발칸을 잇는 육상로는 모두 이 도시에 집중되었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은 세계적 경제 네트워크 속에서 독자적 중심지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단지 교역 물품의 중계지를 넘어서, 국가 경제를 조직하고 재편하는 거대한 경제 조정소로 자리하였다.
도시의 항구 시설은 단순한 접안 공간이 아니었다. 테오도시우스 항구를 비롯한 주요 항만은 상품을 하역하고 저장하는 창고, 세관, 무역사무소, 공공 검역소, 운송관리소, 선박 수리소 등의 복합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 항구에는 곡물, 향료, 직물, 금속, 유리, 도자기, 가죽, 고급 수공예품 등 동서양의 다양한 상품이 들어왔으며, 이들 대부분은 도시 안에서 가공되거나 분배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이러한 유통 체계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단순한 소비 도시가 아니라, 생산과 가공, 유통과 통제를 아우르는 복합 경제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세금과 재정 운영은 도시의 핵심 기능 중 하나였다. 제국은 전역에서 거둔 세금을 현물과 금화로 받아들였고, 이 자원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고에 집중되었다. 제국 중앙정부는 도심 내부에 국세청과 재무청을 설치하여 직접적인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였으며, 화폐 주조소에서는 표준 금화인 솔리두스를 생산하였다. 이 금화는 그 정밀도와 순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동지중해뿐 아니라 유럽, 이슬람 세계에서도 통용되었다. 이는 곧 도시가 세계적 금융 중심지로 작동했음을 뜻하며, 국제 거래에서의 신뢰성을 토대로 제국 재정의 안정성을 뒷받침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식량 정책과 물류 통제 면에서도 국가 전략의 중심이었다. 대도시의 인구는 평상시에도 수십만 명을 넘었으며, 곡물 수급의 불균형은 곧 폭동과 정치 불안을 야기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집트와 소아시아, 트라키아와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수입한 곡물을 체계적으로 저장하고 배급하는 시설을 운영하였다. 도시 곳곳에는 곡물 저장고가 존재했고, 공공 배급소에서는 일정한 시기마다 시민들에게 무료 혹은 보조된 가격으로 곡물이 제공되었다. 이는 단순한 사회 안정 정책이 아니라, 곡물 시장을 통제하고 제국 내 가격 균형을 조절하는 국가 경제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였다.
공예 및 제조 부문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로마 경제 구조에서 핵심 기능을 수행한 부분이다. 견직물 공방은 국가 직영 또는 황실 후원 아래 운영되었으며, 이곳에서는 동방에서 수입한 누에고치와 실을 활용하여 고급 견직물이 생산되었다. 이 직물은 궁정 복식과 교회 성직자 복식, 외국 사절에 대한 예물, 고급 무역 상품 등으로 활용되었다. 군수품 생산소 역시 도시 내부나 근교에 설치되어 있었고, 병기, 갑옷, 군화, 전차, 투석기 등 다양한 군사 장비가 제작되었다. 이 모든 생산활동은 단순한 장인의 자율적 작업이 아니라, 국가의 중앙통제 아래 조직되고 관리된 체계적인 산업이었다.
도시 인구의 구성 역시 경제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동로마 각지에서 유입된 상인, 장인, 군인, 귀족, 행정가, 성직자, 농민 출신 하층민까지 다양한 계층이 공존하였다. 이러한 인구 구조는 도시 경제를 활발히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생산과 소비, 세금과 배급, 고용과 봉급을 통해 하나의 경제 생태계를 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 상인들의 상설 거주와 활동도 허용되었으며, 이들을 위한 외국인 거주구와 시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는 도시가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적 혼합과 경제적 융합이 이루어진 열린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단순히 동로마 제국의 행정 수도가 아니라, 정치 권력과 경제 네트워크가 교차하는 다차원적 중심지였다. 제국 전역에서 생산된 자원은 이 도시로 집중되었고, 도시에서 가공, 분배, 통제된 자원은 다시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곡물과 금화, 직물과 금속, 정보와 기술, 제도와 관료제까지, 모든 것이 이 도시에 모여 들고 다시 퍼져나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국 경제를 물리적으로 연결하고, 제도적으로 통합하며, 심리적으로 지탱하는 구심점이자, 동로마 제국 경제 질서의 정점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잇는 세 개의 세계적 교역권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이 지리적 배치는 자연스럽게 도시를 초국적 물류의 중추로 만들었고, 고대 세계의 해상 교역로가 만나는 결절점으로 기능하게 하였다. 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로스 해협, 지중해의 동부 항로, 아나톨리아 내륙과 발칸을 잇는 육상로는 모두 이 도시에 집중되었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은 세계적 경제 네트워크 속에서 독자적 중심지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단지 교역 물품의 중계지를 넘어서, 국가 경제를 조직하고 재편하는 거대한 경제 조정소로 자리하였다.
도시의 항구 시설은 단순한 접안 공간이 아니었다. 테오도시우스 항구를 비롯한 주요 항만은 상품을 하역하고 저장하는 창고, 세관, 무역사무소, 공공 검역소, 운송관리소, 선박 수리소 등의 복합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 항구에는 곡물, 향료, 직물, 금속, 유리, 도자기, 가죽, 고급 수공예품 등 동서양의 다양한 상품이 들어왔으며, 이들 대부분은 도시 안에서 가공되거나 분배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이러한 유통 체계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단순한 소비 도시가 아니라, 생산과 가공, 유통과 통제를 아우르는 복합 경제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세금과 재정 운영은 도시의 핵심 기능 중 하나였다. 제국은 전역에서 거둔 세금을 현물과 금화로 받아들였고, 이 자원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고에 집중되었다. 제국 중앙정부는 도심 내부에 국세청과 재무청을 설치하여 직접적인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였으며, 화폐 주조소에서는 표준 금화인 솔리두스를 생산하였다. 이 금화는 그 정밀도와 순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동지중해뿐 아니라 유럽, 이슬람 세계에서도 통용되었다. 이는 곧 도시가 세계적 금융 중심지로 작동했음을 뜻하며, 국제 거래에서의 신뢰성을 토대로 제국 재정의 안정성을 뒷받침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식량 정책과 물류 통제 면에서도 국가 전략의 중심이었다. 대도시의 인구는 평상시에도 수십만 명을 넘었으며, 곡물 수급의 불균형은 곧 폭동과 정치 불안을 야기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집트와 소아시아, 트라키아와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수입한 곡물을 체계적으로 저장하고 배급하는 시설을 운영하였다. 도시 곳곳에는 곡물 저장고가 존재했고, 공공 배급소에서는 일정한 시기마다 시민들에게 무료 혹은 보조된 가격으로 곡물이 제공되었다. 이는 단순한 사회 안정 정책이 아니라, 곡물 시장을 통제하고 제국 내 가격 균형을 조절하는 국가 경제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였다.
공예 및 제조 부문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로마 경제 구조에서 핵심 기능을 수행한 부분이다. 견직물 공방은 국가 직영 또는 황실 후원 아래 운영되었으며, 이곳에서는 동방에서 수입한 누에고치와 실을 활용하여 고급 견직물이 생산되었다. 이 직물은 궁정 복식과 교회 성직자 복식, 외국 사절에 대한 예물, 고급 무역 상품 등으로 활용되었다. 군수품 생산소 역시 도시 내부나 근교에 설치되어 있었고, 병기, 갑옷, 군화, 전차, 투석기 등 다양한 군사 장비가 제작되었다. 이 모든 생산활동은 단순한 장인의 자율적 작업이 아니라, 국가의 중앙통제 아래 조직되고 관리된 체계적인 산업이었다.
도시 인구의 구성 역시 경제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동로마 각지에서 유입된 상인, 장인, 군인, 귀족, 행정가, 성직자, 농민 출신 하층민까지 다양한 계층이 공존하였다. 이러한 인구 구조는 도시 경제를 활발히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생산과 소비, 세금과 배급, 고용과 봉급을 통해 하나의 경제 생태계를 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 상인들의 상설 거주와 활동도 허용되었으며, 이들을 위한 외국인 거주구와 시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는 도시가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적 혼합과 경제적 융합이 이루어진 열린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단순히 동로마 제국의 행정 수도가 아니라, 정치 권력과 경제 네트워크가 교차하는 다차원적 중심지였다. 제국 전역에서 생산된 자원은 이 도시로 집중되었고, 도시에서 가공, 분배, 통제된 자원은 다시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곡물과 금화, 직물과 금속, 정보와 기술, 제도와 관료제까지, 모든 것이 이 도시에 모여 들고 다시 퍼져나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국 경제를 물리적으로 연결하고, 제도적으로 통합하며, 심리적으로 지탱하는 구심점이자, 동로마 제국 경제 질서의 정점이었다.
7.2. 대외 무역과 해상 상업 체계[편집]
동로마 제국의 경제 구조에서 대외 무역은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제국의 정치 체제와 군사력, 문화 전파와 외교 전략을 아우르는 다층적인 기제였다. 이 무역 구조는 제국의 지리적 이점, 행정 체계, 해상 통제력, 생산 역량, 화폐 안정성, 사회적 수요 등 다양한 요소가 교차하며 형성된 것으로, 제국의 존속 기간 동안 변화와 위기를 거듭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육로와 해로의 접점에 위치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실크 교역망의 서단이자 지중해 상업 네트워크의 동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도시였다. 이 도시는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해 서아시아를 지나온 견직물, 향신료, 보석, 금속공예품 등의 아시아 상품이 집결되는 집산지이자, 유럽과 북아프리카로 이들 상품이 다시 분산되는 분기점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구조는 동로마 제국이 단순히 중계지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가공과 생산, 재분배를 담당하는 적극적 경제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무역의 기반은 강력한 해상 통제력에 있었다. 제국은 동지중해의 주요 해로를 장악하기 위해 함대를 유지하고 항만 도시들을 요새화하였으며, 각지 항구에 세관, 창고, 감시소, 검역소 등을 설치하였다. 이 해상망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에페소스, 안티오키아, 키프로스, 크레타 등을 포함하는 다중 중심적 구조로 짜여 있었으며, 항구와 내륙 도시 간에는 짐꾼 조직과 도로망이 촘촘히 연결되었다.
무역 품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제국이 고부가가치 수공예품을 수출하고, 원료와 식량을 수입하는 형태가 지속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수출품은 국가 관리하에 생산된 견직물이었으며, 이 외에도 유리공예품, 금속 장신구, 상아 조각, 정교한 도자기와 제단용 직물 등이 국제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수입품은 향신료, 피혁, 귀금속, 아프리카산 노예, 고급 목재 등 제국 내에서 자체 생산이 어려운 품목이 중심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무역 활동을 방임하지 않았다. 중앙정부는 국경 무역과 해상 교역 모두에 대해 강도 높은 통제를 가하였으며, 세관 제도를 통해 통관세와 소비세, 도시 진입세를 부과하였다. 또한 외국 상인들의 활동은 엄격히 허가제 하에 제한되었고, 무역 거점 도시에는 외국인을 위한 특별 시장과 숙소, 검역 구역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이 같은 제도적 장치는 제국 내 시장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기반이었다.
금화는 동로마 무역 구조의 중심에서 통화의 신뢰성과 가격 안정성을 유지하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조소에서 생산된 금화는 높은 순도와 일정한 무게로 인해 제국 내외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었으며, 이는 제국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안정적으로 거래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황제는 이 화폐 주조권을 독점하였고, 금리와 이자율 역시 국가가 직접 통제하였다.
국가의 무역 정책은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정치적 위기 대응 수단으로도 작동하였다. 곡물 가격이 폭등하거나 항만이 봉쇄될 경우, 황제는 즉시 개입하여 물가를 통제하고 물자 수송을 지원하였으며, 외국 상인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전매제를 일시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 개입은 일회성 조치가 아니라 정규 행정조직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제국은 단순한 상업 왕국을 넘어, 제도적으로 안정된 경제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 주도의 경제 통제 체계는 11세기를 기점으로 균열되기 시작하였다. 8세기 말부터 도시 수공업 계층과 상인 길드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중앙정부의 통제가 점차 완화되었으며, 무역 활동은 자율성과 민간 중심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특히 12세기에 이르러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군사적 지원을 조건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무역 특권을 대거 획득하면서, 제국 내 상업권은 외세에게 점차 잠식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하루에 금화 수만 개가 유통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무역 규모는 사상 최대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무역의 이익은 점점 외국 세력의 수중에 집중되었고, 제국은 자국 해군력 약화로 인해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수도의 주요 항구와 시장을 장악하였으며, 자국 법으로 운영되는 시장 구역을 독립적으로 설치하였다. 그 결과 제국은 조세 수입을 상실하고 자국 상품의 수출 기회를 잃게 되었으며, 이는 국내 산업과 수공업의 침체로 이어졌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은 이러한 경제 침식의 정점이었다. 수도의 약탈과 분할은 무역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고, 이후 라스카리스 왕조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제국 경제의 회복을 꾀했으나, 내전과 외세 개입, 상업권 상실, 화폐 가치 하락 등으로 인해 회복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후기 동로마 제국은 귀금속 유통이나 금화 주조와 같은 핵심 영역조차 통제하지 못하였으며, 자국 내 주요 항만이 외세에 의존하는 형국이 되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의 대외 무역은 제국 초기에는 국가 주도의 정교한 통제와 해상 지배를 통해 막대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후기에는 외세에 경제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제국 쇠퇴의 가속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무역은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던 수단이자, 제국의 약화와 붕괴를 드러내는 지표가 되었으며, 그 흥망의 궤적은 동로마 제국 자체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육로와 해로의 접점에 위치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실크 교역망의 서단이자 지중해 상업 네트워크의 동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도시였다. 이 도시는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해 서아시아를 지나온 견직물, 향신료, 보석, 금속공예품 등의 아시아 상품이 집결되는 집산지이자, 유럽과 북아프리카로 이들 상품이 다시 분산되는 분기점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구조는 동로마 제국이 단순히 중계지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가공과 생산, 재분배를 담당하는 적극적 경제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무역의 기반은 강력한 해상 통제력에 있었다. 제국은 동지중해의 주요 해로를 장악하기 위해 함대를 유지하고 항만 도시들을 요새화하였으며, 각지 항구에 세관, 창고, 감시소, 검역소 등을 설치하였다. 이 해상망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에페소스, 안티오키아, 키프로스, 크레타 등을 포함하는 다중 중심적 구조로 짜여 있었으며, 항구와 내륙 도시 간에는 짐꾼 조직과 도로망이 촘촘히 연결되었다.
무역 품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제국이 고부가가치 수공예품을 수출하고, 원료와 식량을 수입하는 형태가 지속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수출품은 국가 관리하에 생산된 견직물이었으며, 이 외에도 유리공예품, 금속 장신구, 상아 조각, 정교한 도자기와 제단용 직물 등이 국제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수입품은 향신료, 피혁, 귀금속, 아프리카산 노예, 고급 목재 등 제국 내에서 자체 생산이 어려운 품목이 중심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무역 활동을 방임하지 않았다. 중앙정부는 국경 무역과 해상 교역 모두에 대해 강도 높은 통제를 가하였으며, 세관 제도를 통해 통관세와 소비세, 도시 진입세를 부과하였다. 또한 외국 상인들의 활동은 엄격히 허가제 하에 제한되었고, 무역 거점 도시에는 외국인을 위한 특별 시장과 숙소, 검역 구역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이 같은 제도적 장치는 제국 내 시장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기반이었다.
금화는 동로마 무역 구조의 중심에서 통화의 신뢰성과 가격 안정성을 유지하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조소에서 생산된 금화는 높은 순도와 일정한 무게로 인해 제국 내외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었으며, 이는 제국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안정적으로 거래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황제는 이 화폐 주조권을 독점하였고, 금리와 이자율 역시 국가가 직접 통제하였다.
국가의 무역 정책은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정치적 위기 대응 수단으로도 작동하였다. 곡물 가격이 폭등하거나 항만이 봉쇄될 경우, 황제는 즉시 개입하여 물가를 통제하고 물자 수송을 지원하였으며, 외국 상인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전매제를 일시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 개입은 일회성 조치가 아니라 정규 행정조직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제국은 단순한 상업 왕국을 넘어, 제도적으로 안정된 경제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 주도의 경제 통제 체계는 11세기를 기점으로 균열되기 시작하였다. 8세기 말부터 도시 수공업 계층과 상인 길드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중앙정부의 통제가 점차 완화되었으며, 무역 활동은 자율성과 민간 중심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특히 12세기에 이르러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군사적 지원을 조건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무역 특권을 대거 획득하면서, 제국 내 상업권은 외세에게 점차 잠식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하루에 금화 수만 개가 유통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무역 규모는 사상 최대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무역의 이익은 점점 외국 세력의 수중에 집중되었고, 제국은 자국 해군력 약화로 인해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수도의 주요 항구와 시장을 장악하였으며, 자국 법으로 운영되는 시장 구역을 독립적으로 설치하였다. 그 결과 제국은 조세 수입을 상실하고 자국 상품의 수출 기회를 잃게 되었으며, 이는 국내 산업과 수공업의 침체로 이어졌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은 이러한 경제 침식의 정점이었다. 수도의 약탈과 분할은 무역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고, 이후 라스카리스 왕조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제국 경제의 회복을 꾀했으나, 내전과 외세 개입, 상업권 상실, 화폐 가치 하락 등으로 인해 회복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후기 동로마 제국은 귀금속 유통이나 금화 주조와 같은 핵심 영역조차 통제하지 못하였으며, 자국 내 주요 항만이 외세에 의존하는 형국이 되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의 대외 무역은 제국 초기에는 국가 주도의 정교한 통제와 해상 지배를 통해 막대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후기에는 외세에 경제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제국 쇠퇴의 가속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무역은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던 수단이자, 제국의 약화와 붕괴를 드러내는 지표가 되었으며, 그 흥망의 궤적은 동로마 제국 자체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8. 외교[편집]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군사력과 더불어 제국의 존속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로마는 다수의 이질적인 민족과 정치 세력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국경선은 시대마다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이러한 불안정한 외부 환경 속에서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의 외교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황제권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 질서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결합하여 고유한 외교 체계를 확립하였다.
동로마의 외교는 제국의 중심성과 위계질서를 외부 세계에 투영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제국은 자신을 유일한 정통 권위로 인식하였고, 그 외의 국가는 이른바 ‘야만인’으로 간주하거나 제국 질서에 예속된 존재로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 외교 운영에서는 그러한 관념적 위상을 고수하기보다는, 제국의 이익과 안정을 우선시하는 실용적 접근을 취하였다. 외교는 언제나 정치적 현실과 전략적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용되었으며, 황제는 국익을 위해 권위적 서사를 탄력적으로 조정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외교 수단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였다. 국경을 맞댄 부족 집단이나 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조약 체결과 사절 교환이 기본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약은 종종 일정한 공물 지급, 정기적인 외교사절 파견, 정치적 망명 수용과 같은 조항을 포함하였다. 결혼 동맹 또한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황제 일가는 다른 왕조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외교적 우호를 조성하거나 특정 정치적 구도를 유리하게 형성하였다.
제국은 외부 세력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나 제도적 혜택을 통해 유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대가로 금화나 곡물, 관직명 수여 등의 물질적 유인을 제공하면서, 제국의 우위를 인정받는 형식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제 외교는 특히 북방의 유목 민족이나 동쪽의 사산 왕조, 이후 이슬람 칼리파와의 관계에서 자주 활용되었으며, 제국의 군사력을 소모하지 않고 국경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종교적 권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황제는 단순한 정치적 군주를 넘어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이자 질서의 중심자로 자리매김되었으며, 이는 외교적 교섭에서도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기독교 교리의 해석과 이단 규정은 외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종교 문제에 대한 제국의 개입은 종종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가 되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불가리아와 같은 기독교 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종교 문제에 대한 제국의 입장이 외교의 방향을 좌우하였다.
또한, 동로마는 외교를 통해 적대 세력을 이간하거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도 구사하였다. 특정 부족이나 국가 내의 권력 분열을 조장하여 제국에 유리한 정치 지형을 만드는 방식은 동로마 외교의 핵심적인 특성이었다. 이 같은 분열 전략은 북방의 여러 유목 집단, 이슬람권의 지방 영주들, 그리고 발칸 반도의 슬라브 세력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외교는 단순한 평화 유지 수단이 아니라, 제국의 군사력 사용을 최소화하고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도구였다.
동로마 제국은 국제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였다. 강성한 외세에 맞서기 위해 일시적으로 굴욕적인 조약을 수용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정세가 변하면 기존 조약을 무효화하거나 새로운 협상을 통해 국익을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외교 기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경험과 전문 관료 집단의 분석, 정보 수집 능력을 바탕으로 작동하였다. 동로마는 외교를 단순한 응급 대책으로 보지 않고, 장기적 안목을 지닌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외교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으며, 황제의 성향과 제국 내부의 정치 상황, 주변 국가의 군사적 역량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시기에는 대외 팽창과 군사 정복이 강조되었으나, 이후 제국의 체력이 약화되면서 외교는 더욱 방어적이고 복잡한 전략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특히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에는 체계적인 외교 기록과 관례가 정비되어 제국 행정의 일환으로서 외교가 제도화되었고, 상설 사절단과 정보 조직이 운영되었다.
이와 같이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단순히 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 제국의 권위를 유지하고 복잡한 국제 환경 속에서 질서를 조율하는 중심 기제로 작동하였다. 제국의 존속 기간 동안 외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술이자 예술로 발전하였으며, 황제권과 기독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동로마의 정체성을 외부 세계에 투사하고 조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동로마의 외교는 제국의 중심성과 위계질서를 외부 세계에 투영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제국은 자신을 유일한 정통 권위로 인식하였고, 그 외의 국가는 이른바 ‘야만인’으로 간주하거나 제국 질서에 예속된 존재로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 외교 운영에서는 그러한 관념적 위상을 고수하기보다는, 제국의 이익과 안정을 우선시하는 실용적 접근을 취하였다. 외교는 언제나 정치적 현실과 전략적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용되었으며, 황제는 국익을 위해 권위적 서사를 탄력적으로 조정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외교 수단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였다. 국경을 맞댄 부족 집단이나 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조약 체결과 사절 교환이 기본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약은 종종 일정한 공물 지급, 정기적인 외교사절 파견, 정치적 망명 수용과 같은 조항을 포함하였다. 결혼 동맹 또한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황제 일가는 다른 왕조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외교적 우호를 조성하거나 특정 정치적 구도를 유리하게 형성하였다.
제국은 외부 세력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나 제도적 혜택을 통해 유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대가로 금화나 곡물, 관직명 수여 등의 물질적 유인을 제공하면서, 제국의 우위를 인정받는 형식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제 외교는 특히 북방의 유목 민족이나 동쪽의 사산 왕조, 이후 이슬람 칼리파와의 관계에서 자주 활용되었으며, 제국의 군사력을 소모하지 않고 국경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종교적 권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황제는 단순한 정치적 군주를 넘어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이자 질서의 중심자로 자리매김되었으며, 이는 외교적 교섭에서도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기독교 교리의 해석과 이단 규정은 외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종교 문제에 대한 제국의 개입은 종종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가 되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불가리아와 같은 기독교 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종교 문제에 대한 제국의 입장이 외교의 방향을 좌우하였다.
또한, 동로마는 외교를 통해 적대 세력을 이간하거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도 구사하였다. 특정 부족이나 국가 내의 권력 분열을 조장하여 제국에 유리한 정치 지형을 만드는 방식은 동로마 외교의 핵심적인 특성이었다. 이 같은 분열 전략은 북방의 여러 유목 집단, 이슬람권의 지방 영주들, 그리고 발칸 반도의 슬라브 세력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외교는 단순한 평화 유지 수단이 아니라, 제국의 군사력 사용을 최소화하고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도구였다.
동로마 제국은 국제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였다. 강성한 외세에 맞서기 위해 일시적으로 굴욕적인 조약을 수용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정세가 변하면 기존 조약을 무효화하거나 새로운 협상을 통해 국익을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외교 기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경험과 전문 관료 집단의 분석, 정보 수집 능력을 바탕으로 작동하였다. 동로마는 외교를 단순한 응급 대책으로 보지 않고, 장기적 안목을 지닌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외교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으며, 황제의 성향과 제국 내부의 정치 상황, 주변 국가의 군사적 역량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시기에는 대외 팽창과 군사 정복이 강조되었으나, 이후 제국의 체력이 약화되면서 외교는 더욱 방어적이고 복잡한 전략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특히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에는 체계적인 외교 기록과 관례가 정비되어 제국 행정의 일환으로서 외교가 제도화되었고, 상설 사절단과 정보 조직이 운영되었다.
이와 같이 동로마 제국의 외교는 단순히 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 제국의 권위를 유지하고 복잡한 국제 환경 속에서 질서를 조율하는 중심 기제로 작동하였다. 제국의 존속 기간 동안 외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술이자 예술로 발전하였으며, 황제권과 기독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동로마의 정체성을 외부 세계에 투사하고 조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8.1. 서방권[편집]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세계의 외교적 관계는 겉으로는 불편한 동맹이었으며, 속으로는 정치적 경쟁과 종교적 대립이 얽힌 복합적인 양상을 지녔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서유럽은 통일된 로마 세계의 이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서유럽의 여러 정치 세력은 스스로 로마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하였으며, 이는 곧 이미 존재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고대 로마 제국 체제의 붕괴 이후에도 ‘로마’라는 이름은 단순한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는 개념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곧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상이 되었으며, 특히 중세 이후 유럽의 여러 국가가 자신들의 지배 권한을 합리화하고자 할 때 로마의 후계자임을 주장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격렬하고 장기적인 정통성 경쟁은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벌어졌다.
서기 800년, 교황 레오 3세 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를 ‘로마 황제’로 대관함으로써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을 서방 세계에 다시 등장시켰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었으며, 교황청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제쳐두고 서방에서 새로운 로마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깊은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실질적인 통치권과 고대 로마로부터 이어진 제도, 문물, 군사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서방의 대관식은 동로마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월권이자 정통성의 침해로 여겨졌다.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법적 후계자라고 자임하였다. 이는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제국의 외교문서, 법률 문헌, 종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반영되었다. 황제는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로 호칭하였으며, 제국의 정치 제도는 로마 공화정과 제정 시대의 유산을 제도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행정 체계 속에서도 자신들이 ‘로마인’이라고 여겼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서방의 도전적 행보에 대해 강경한 외교적 대응을 취하였다.
그러나 서방의 시선은 달랐다. 서유럽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동로마 제국을 ‘로마’의 합법적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점차 강화하였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이라 지칭하며 로마적 정체성을 철저히 분리하려 하였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선택이 아닌 정치적 전략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권위를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기반에서 끌어내림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스스로를 ‘서방의 로마’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문필가 아인하르트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기를 반영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로 호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스 황제’로 지칭하는 혼용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서방 내부에서도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에 대한 일관된 이해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서유럽 교회 세력은 동로마 황제를 체계적으로 ‘그리스 황제’로 지칭하는 외교 방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언어 전략은 교황청이 로마 세계의 중심이자 정신적 권위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는 데 중요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들이 정통 로마 제국임을 계속 강조하였다. 황제의 칭호뿐만 아니라, 황제의 즉위 의례, 법전 편찬, 교회와의 관계 설정 등 모든 측면에서 고대 로마의 유산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단순한 옛 제국의 잔존 국가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로마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국민들 또한 자신들을 ‘로마인’이라 불렀고, 이 정체성은 제국이 최후를 맞는 15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이념적으로도 양 제국 간 충돌은 깊었다. 교황 중심의 서방은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황제를 임명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으며, 이는 ‘교황이 왕을 세운다’는 정치 신학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곧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신성한 권위를 지녔다는 ‘황제 우위’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이념 차이는 십자군 전쟁 당시 라틴 제국의 건설과 같은 사태를 초래하였고, 동서 교회의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은 정치적 정통성을 두고 오랫동안 대립하였으나, 완전히 단절된 적은 없었다. 양측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면서도, 외부의 공통된 위협 앞에서는 때로는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중해 전역에서 이슬람이 확산되던 시기, 동로마와 서방은 각각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판단 속에서 제한적인 협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협력은 긴장과 불신 속에서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미묘한 균형 위에 놓여 있었다.
11세기에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서방 교회가 주도한 이 원정은 겉보기에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신앙적 연대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정치적 무대였다. 제1차 십자군 당시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에 맞서려 했지만, 동시에 서방 세력이 동방에서 자율적인 영토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였다. 이는 협력과 경쟁이 얽힌 이중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 라틴 제국의 건설은 동로마의 경계심을 현실로 바꿔 놓았다.
이보다 앞선 10세기에도 양측은 외교적으로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서기 968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고자 자신의 아들 오토 2세와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 안나 사이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이 제안은 명목상으로는 양 제국의 평화와 연대를 위한 결속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양 제국의 권위를 서로 동등하게 인정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외교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외교 문서 한 줄에 의해 좌절되었다. 오토 측에서 전달한 교황 요한 13세의 서신에 동로마 황제를 ‘그리스인의 황제’라 지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이 표현을 중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외교적 예절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서방 사절단의 대표 리우트프란트를 억류한 뒤 곧바로 추방하였다. 니키포로스 황제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로 자처하였기에, ‘그리스인의 황제’라는 호칭은 제국의 정체성을 폄하하고 정통성을 부정하는 언사로 간주되었다.
이 사건은 양측이 황제의 호칭 문제를 단순한 외교적 표현이 아니라 정통성의 본질로 여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리우트프란트는 귀국 후 자신의 저술에서 니키포로스 황제를 조롱과 모욕으로 묘사하였으며, 이는 양 제국 간의 감정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기록은 단지 개인의 불쾌한 경험담이 아니라, 당시 서방 지식인 사회에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경멸과 불신이 어떤 방식으로 언어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양측의 갈등은 정치적 협상을 통한 실용적 접근으로도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문화적 오만과 정체성의 불일치가 협력의 기반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종교적 언어, 황제의 칭호, 의례상의 우열 문제 등은 모두 중세 세계에서 권력의 정통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였기에,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집착하는 태도는 단순한 외교적 예민함 이상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제국은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각자의 세계관 속에서 상대의 존재를 경계하면서도, 필요할 때에는 협력을 모색하고 상호 작용을 이어갔다. 이는 중세 유럽이 단일한 권력 질서가 아닌 복합적 이해관계의 그물망 속에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동로마와 서유럽은 때로는 전장에서는 적이었고, 때로는 외교석상에서는 동맹이었으며, 그 교차점에서 탄생한 역사적 사건들은 중세 세계의 불안정한 균형을 상징한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서방 세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복잡하고도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양측은 공통의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해석의 차이와 정치적 권위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점차 깊은 균열이 나타났다. 특히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의 정통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는 점차 라틴어권 서방 세계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러한 충돌은 단지 신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고, 교회의 통치 권한과 그에 따른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확대되었다.
동서 교회 간의 긴장은 일찍이 아카키오스 분열을 계기로 격화되었고, 이후 포티오스 분열에서는 총대주교 임명권과 교회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다. 이 두 사건 모두 단순한 교리적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황이 서방 전체의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주장하려는 데 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동방 교회의 자율성을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은 결국 1054년에 벌어진 상호 파문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9세의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고 성소 제단 위에 파문장을 올려두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응하여 세계 총대주교 역시 교황 사절단을 맞파문하면서, 교회의 분열은 형식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갈등이 신학적 불일치만이 아니라, 황제권과 교황권이라는 정치적 대립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전개된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라틴 세계 간의 관계를 사실상 적대적 양상으로 고착시켰다. 특히 제4차 십자군은 서방과 동로마의 관계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평가된다. 원래 이 군사 원정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개입으로 그 방향이 급격히 전환되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 내 상업적 이권 확보와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벌이라는 대담한 선택을 하였다. 그 결과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도시를 철저히 약탈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단지 제국의 수도가 무너진 사건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제국의 중심이자 심장부가 파괴되었고, 라틴 제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가 일시적으로 제국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권위와 국제적 위상을 결정적으로 훼손하였으며, 제국은 이후 니카이아 제국, 트라페주스 제국 등 여러 계승국으로 분열되었다. 제국은 1261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였지만, 이미 국력은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라틴 제국의 점령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제국 내부에서도 봉건적 분열과 반란이 빈번해지면서 통합된 제국의 모습은 점차 사라졌다.
또한 4차 십자군에 앞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할은 이 시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본래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해상 속령으로서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상업 도시였으며, 제국 내 주요 항구도시에 조계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제국의 해상권을 잠식해 나갔다. 제4차 십자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베네치아는 제국의 수도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을 때 가장 먼저 구원병을 파견한 세력 역시 베네치아였다.
이러한 모순적 행보는 베네치아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에게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외교 상대가 아니라,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이자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였다. 제국이 붕괴할 경우 베네치아의 무역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제국 내 조계지에 정착해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과 주민들은 제국 질서의 안정성과 지속을 희망하였다. 베네치아는 이미 제국의 문화와 행정 체계 속에 일정 부분 동화되어 있었고, 일부는 자신을 제국의 주민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을 붕괴시키는 데 앞장섰으면서도, 동시에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이 약화된 상태에서 상업적 우위를 확보하길 원했을 뿐, 완전한 붕괴로 인한 해상 질서의 붕괴는 자신들에게도 치명적이라 판단하였다.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베네치아가 동로마 제국의 구원에 적극 나섰던 배경이기도 하다. 제국의 종말은 곧 베네치아가 기반으로 삼아온 세계의 해체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의 정치적 개입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제국의 쇠퇴와 종말은 단지 내부적 원인만이 아닌 외부 세계와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세계의 관계는 단일한 구도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 상호작용의 역사였다. 정통성을 둘러싼 경쟁, 종교적 분열,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동 대응은 양측의 외교에서 끊임없이 긴장과 타협을 동반하게 하였다. 이 관계는 종종 모순적이고 충돌로 가득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에서 수행한 수많은 외교적 시도와 전략은 유럽 중세의 정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 제국 체제의 붕괴 이후에도 ‘로마’라는 이름은 단순한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는 개념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곧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상이 되었으며, 특히 중세 이후 유럽의 여러 국가가 자신들의 지배 권한을 합리화하고자 할 때 로마의 후계자임을 주장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격렬하고 장기적인 정통성 경쟁은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벌어졌다.
서기 800년, 교황 레오 3세 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를 ‘로마 황제’로 대관함으로써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을 서방 세계에 다시 등장시켰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었으며, 교황청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제쳐두고 서방에서 새로운 로마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깊은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실질적인 통치권과 고대 로마로부터 이어진 제도, 문물, 군사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서방의 대관식은 동로마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월권이자 정통성의 침해로 여겨졌다.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법적 후계자라고 자임하였다. 이는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제국의 외교문서, 법률 문헌, 종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반영되었다. 황제는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로 호칭하였으며, 제국의 정치 제도는 로마 공화정과 제정 시대의 유산을 제도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행정 체계 속에서도 자신들이 ‘로마인’이라고 여겼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서방의 도전적 행보에 대해 강경한 외교적 대응을 취하였다.
그러나 서방의 시선은 달랐다. 서유럽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동로마 제국을 ‘로마’의 합법적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점차 강화하였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이라 지칭하며 로마적 정체성을 철저히 분리하려 하였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선택이 아닌 정치적 전략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권위를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기반에서 끌어내림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스스로를 ‘서방의 로마’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문필가 아인하르트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기를 반영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로 호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스 황제’로 지칭하는 혼용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서방 내부에서도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에 대한 일관된 이해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서유럽 교회 세력은 동로마 황제를 체계적으로 ‘그리스 황제’로 지칭하는 외교 방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언어 전략은 교황청이 로마 세계의 중심이자 정신적 권위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는 데 중요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들이 정통 로마 제국임을 계속 강조하였다. 황제의 칭호뿐만 아니라, 황제의 즉위 의례, 법전 편찬, 교회와의 관계 설정 등 모든 측면에서 고대 로마의 유산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단순한 옛 제국의 잔존 국가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로마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국민들 또한 자신들을 ‘로마인’이라 불렀고, 이 정체성은 제국이 최후를 맞는 15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이념적으로도 양 제국 간 충돌은 깊었다. 교황 중심의 서방은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황제를 임명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으며, 이는 ‘교황이 왕을 세운다’는 정치 신학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곧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신성한 권위를 지녔다는 ‘황제 우위’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이념 차이는 십자군 전쟁 당시 라틴 제국의 건설과 같은 사태를 초래하였고, 동서 교회의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은 정치적 정통성을 두고 오랫동안 대립하였으나, 완전히 단절된 적은 없었다. 양측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면서도, 외부의 공통된 위협 앞에서는 때로는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중해 전역에서 이슬람이 확산되던 시기, 동로마와 서방은 각각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판단 속에서 제한적인 협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협력은 긴장과 불신 속에서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미묘한 균형 위에 놓여 있었다.
11세기에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서방 교회가 주도한 이 원정은 겉보기에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신앙적 연대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정치적 무대였다. 제1차 십자군 당시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에 맞서려 했지만, 동시에 서방 세력이 동방에서 자율적인 영토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였다. 이는 협력과 경쟁이 얽힌 이중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 라틴 제국의 건설은 동로마의 경계심을 현실로 바꿔 놓았다.
이보다 앞선 10세기에도 양측은 외교적으로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서기 968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고자 자신의 아들 오토 2세와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 안나 사이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이 제안은 명목상으로는 양 제국의 평화와 연대를 위한 결속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양 제국의 권위를 서로 동등하게 인정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외교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외교 문서 한 줄에 의해 좌절되었다. 오토 측에서 전달한 교황 요한 13세의 서신에 동로마 황제를 ‘그리스인의 황제’라 지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이 표현을 중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외교적 예절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서방 사절단의 대표 리우트프란트를 억류한 뒤 곧바로 추방하였다. 니키포로스 황제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로 자처하였기에, ‘그리스인의 황제’라는 호칭은 제국의 정체성을 폄하하고 정통성을 부정하는 언사로 간주되었다.
이 사건은 양측이 황제의 호칭 문제를 단순한 외교적 표현이 아니라 정통성의 본질로 여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리우트프란트는 귀국 후 자신의 저술에서 니키포로스 황제를 조롱과 모욕으로 묘사하였으며, 이는 양 제국 간의 감정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기록은 단지 개인의 불쾌한 경험담이 아니라, 당시 서방 지식인 사회에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경멸과 불신이 어떤 방식으로 언어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양측의 갈등은 정치적 협상을 통한 실용적 접근으로도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문화적 오만과 정체성의 불일치가 협력의 기반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종교적 언어, 황제의 칭호, 의례상의 우열 문제 등은 모두 중세 세계에서 권력의 정통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였기에,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집착하는 태도는 단순한 외교적 예민함 이상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제국은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각자의 세계관 속에서 상대의 존재를 경계하면서도, 필요할 때에는 협력을 모색하고 상호 작용을 이어갔다. 이는 중세 유럽이 단일한 권력 질서가 아닌 복합적 이해관계의 그물망 속에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동로마와 서유럽은 때로는 전장에서는 적이었고, 때로는 외교석상에서는 동맹이었으며, 그 교차점에서 탄생한 역사적 사건들은 중세 세계의 불안정한 균형을 상징한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서방 세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복잡하고도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양측은 공통의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해석의 차이와 정치적 권위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점차 깊은 균열이 나타났다. 특히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의 정통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는 점차 라틴어권 서방 세계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러한 충돌은 단지 신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고, 교회의 통치 권한과 그에 따른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확대되었다.
동서 교회 간의 긴장은 일찍이 아카키오스 분열을 계기로 격화되었고, 이후 포티오스 분열에서는 총대주교 임명권과 교회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다. 이 두 사건 모두 단순한 교리적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황이 서방 전체의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주장하려는 데 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동방 교회의 자율성을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은 결국 1054년에 벌어진 상호 파문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9세의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고 성소 제단 위에 파문장을 올려두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응하여 세계 총대주교 역시 교황 사절단을 맞파문하면서, 교회의 분열은 형식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갈등이 신학적 불일치만이 아니라, 황제권과 교황권이라는 정치적 대립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전개된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라틴 세계 간의 관계를 사실상 적대적 양상으로 고착시켰다. 특히 제4차 십자군은 서방과 동로마의 관계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평가된다. 원래 이 군사 원정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개입으로 그 방향이 급격히 전환되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 내 상업적 이권 확보와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벌이라는 대담한 선택을 하였다. 그 결과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도시를 철저히 약탈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단지 제국의 수도가 무너진 사건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제국의 중심이자 심장부가 파괴되었고, 라틴 제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가 일시적으로 제국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권위와 국제적 위상을 결정적으로 훼손하였으며, 제국은 이후 니카이아 제국, 트라페주스 제국 등 여러 계승국으로 분열되었다. 제국은 1261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였지만, 이미 국력은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라틴 제국의 점령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제국 내부에서도 봉건적 분열과 반란이 빈번해지면서 통합된 제국의 모습은 점차 사라졌다.
또한 4차 십자군에 앞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할은 이 시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본래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해상 속령으로서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상업 도시였으며, 제국 내 주요 항구도시에 조계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제국의 해상권을 잠식해 나갔다. 제4차 십자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베네치아는 제국의 수도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을 때 가장 먼저 구원병을 파견한 세력 역시 베네치아였다.
이러한 모순적 행보는 베네치아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에게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외교 상대가 아니라,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이자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였다. 제국이 붕괴할 경우 베네치아의 무역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제국 내 조계지에 정착해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과 주민들은 제국 질서의 안정성과 지속을 희망하였다. 베네치아는 이미 제국의 문화와 행정 체계 속에 일정 부분 동화되어 있었고, 일부는 자신을 제국의 주민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을 붕괴시키는 데 앞장섰으면서도, 동시에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이 약화된 상태에서 상업적 우위를 확보하길 원했을 뿐, 완전한 붕괴로 인한 해상 질서의 붕괴는 자신들에게도 치명적이라 판단하였다.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베네치아가 동로마 제국의 구원에 적극 나섰던 배경이기도 하다. 제국의 종말은 곧 베네치아가 기반으로 삼아온 세계의 해체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서방의 정치적 개입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제국의 쇠퇴와 종말은 단지 내부적 원인만이 아닌 외부 세계와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세계의 관계는 단일한 구도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 상호작용의 역사였다. 정통성을 둘러싼 경쟁, 종교적 분열,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동 대응은 양측의 외교에서 끊임없이 긴장과 타협을 동반하게 하였다. 이 관계는 종종 모순적이고 충돌로 가득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에서 수행한 수많은 외교적 시도와 전략은 유럽 중세의 정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8.2. 이란 및 이슬람권[편집]
동로마 제국은 4세기 말부터 제국의 동방 국경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외교적 긴장과 군사적 충돌에 시달렸다. 이 지역은 기후와 지형이 험준하여 방어가 용이한 동시에,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비옥하고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따라서 이곳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모두에게 있어 핵심적인 이해관계 지역이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3세기 초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창건된 이후, 동로마 제국과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제국으로 자처하며 유서 깊은 경쟁 구도를 형성하였다. 특히 사산조는 자신들이 고대 아케메네스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임하면서, 동방의 문명을 대표하는 중심국으로 자리매김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조와 로마 제국 사이에서는 문화적 우월성을 둘러싼 경쟁뿐 아니라,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사산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기독교 제국인 로마와의 종교적 정체성을 분명히 구분지었으며, 국경 지대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충돌은 양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반복적 전쟁 양상을 초래하였다.
4세기 후반부터는 유프라테스강과 아르메니아 고원을 경계로 설정하는 여러 차례의 국경 협정과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어느 쪽도 상대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끊임없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 정책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재정복에 집중하면서도, 사산조와의 관계에서는 직접적 충돌을 피하고자 수차례에 걸쳐 막대한 재화를 바탕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대표적으로 532년에 체결된 ‘영구 평화’는 일시적으로 두 제국 사이의 전쟁을 중단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나, 그 기반은 극히 불안정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제국의 내정이 불안정해지고 서방에서의 군사적 부담이 커짐에 따라, 사산조는 보다 공격적으로 국경선을 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호스로 2세는 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비롯한 레반트 전역, 나아가 이집트까지 차지하며 동로마 제국의 핵심적인 속주들을 빠르게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들이 포위되고 약탈당하였으며, 전략 거점들이 줄줄이 함락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외부에서 포위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626년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은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그리고 다르다넬스 해협 건너편에서 압박해오는 사산조 페르시아군의 삼면 포위에 직면하였다. 이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수도는 제국의 상징이자 마지막 보루로서 중대한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해상 방어를 위한 체계적인 전략과 더불어,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비밀 병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당시 동로마의 해군이 사용한 특수 인화 물질로, 물 위에서도 불타는 성질로 인해 적의 함대를 효율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 방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군사적 경험과 공학 기술의 집약체로, 외적의 공세를 물리치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하였다. 결정적으로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결단력과 종교적 동원력이었다. 그는 수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수호를 강조하며 사기를 북돋았고, 전통적인 제국의 지도자상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라클리오스는 단순히 수비에만 만족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전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공세를 단행하였다. 627년 니네베 평원에서 벌어진 대회전은 이러한 전략의 정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직접 군을 이끌고 기동성과 지형을 이용하여 사산조의 주력을 타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니네베 전투에서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성공을 넘어, 제국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상징적인 성과로 작용하였다. 이후 이라클리오스는 유프라테스를 넘어 티그리스강 인근까지 진격하며, 사산조의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 지역을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조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고, 호스로 2세는 휘하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피살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동로마 제국은 이 일련의 반격을 통해 점령당했던 동방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고,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은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제국의 재건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방에서 벌어진 수년간의 전쟁은 동로마와 사산조 양국 모두에게 엄청난 인적 손실과 경제적 파탄을 초래하였다. 마을과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행정망과 세수 체계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전쟁의 상흔은 단순한 패배나 승리로 환원될 수 없는 깊은 사회적 균열로 남았다.
이로 인해 양 제국은 새로운 위협에 대응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 세력은 이러한 양 제국의 약화된 상태를 정확히 포착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시리아, 팔레스티나,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사산조는 이슬람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곧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 역시 안티오키아와 이집트를 상실하며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영토 손실을 겪게 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 사후 정비된 체계 아래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빠르게 세를 확장하였다. 불과 20여 년 만에 사산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동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러한 확장은 동로마 제국의 전략적 기반을 송두리째 약화시켰다. 특히 이집트는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이자 조세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곳의 상실은 제국의 세입 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의의는 사산조와는 다르게 동로마는 이슬람의 파고로부터 끝끝내 생존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관계는 복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선,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수세기에 걸쳐 이어진 복합적인 외교와 경쟁, 그리고 전략적 공존의 역사였다. 이슬람은 제국의 변방에 머무른 적이 없었으며, 그들은 직접적으로 제국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차례에 걸쳐 공략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 속에서도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수세적 자세에 머물지 않았고, 정교한 외교 전략을 통해 국력을 유지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확산된 아랍 이슬람 세력은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점령하며 제국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였다. 이때부터 동로마는 군사력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외교적 수단의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공략이 있었던 674년부터 678년까지의 시기에는, 단순히 그리스의 불을 활용한 해상 방어만이 아니라, 제국은 외교를 통해 후방의 다른 세력들과의 전선을 최소화하며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동로마는 이슬람 세력과 지속적인 소규모 충돌을 벌였으나, 대대적인 전면전보다는 외교와 조공, 국경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협상 등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717년부터 718년까지 이어진 두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황제 레온 3세는 불가리아와의 외교 동맹을 체결하여 북방 방어선을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세력의 퇴각 이후,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 방어 체계의 근본적인 개편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이는 테마 체계의 강화와 직결되었다. 이 체계는 군사 조직과 지방 행정을 통합하여, 제국 전역에 걸쳐 보다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위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외교는 방어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은 때로는 이슬람 내부의 분열을 활용하여 세력 간 이간을 시도하였다. 특히 아바스 왕조 시기에는 동로마가 바그다드 중심의 세력과 협상하며 국경의 긴장을 완화하려 하였으며, 반대로 바그다드에 대항하는 지역 이슬람 세력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외교적 다변화는 10세기에 들어 동로마의 반격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11세기에 접어들며, 이슬람 세계에서 새로운 세력인 튀르크인이 등장하자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셀주크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란 고원과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소아시아 내륙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는 단순한 국지 전투가 아닌, 제국의 전략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는 군사적 패배만이 아니라 정치적 분열도 함께 겪었으며, 이후의 대응은 외교적 노선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셀주크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은 기존의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를 재정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외교 채널을 개척하기 위해 서유럽 세계에 접근하였다. 이는 결국 교황청과의 외교적 협상을 거쳐 제1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제국은 이 원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아나톨리아 일부와 시리아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 세력과의 관계는 점차 충돌로 전환되었고, 외교적 관리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수도 함락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외교 전략의 실패이자, 군사와 외교 양면에서 균형을 잃은 결과였다. 이후 제국은 니카이아, 트라페주스, 에페이로스 등으로 분열되며 잔존하였고, 이들 중 니카이아 제국이 13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국을 재건하였지만, 예전과 같은 외교적 주도권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는 무력 충돌과 병행된 외교 전략의 역사였으며, 특히 외교는 국경 방어, 세력 균형, 내부 안정을 도모하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외교는 고정된 구도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력 간의 이해 조정이었고, 이에 대한 유연하고 정교한 대응이 가능한 시기에는 제국이 생존과 재건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 조율에 실패한 시기에는 치명적인 쇠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몽골 제국의 서진으로 인해 셀주크 제국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아나톨리아에는 다수의 튀르크계 베이국들이 등장하였다. 이 가운데 오스만 베이국은 전략적 위치와 결집된 무장력을 바탕으로 주변 베이국을 병합하며 팽창하였다. 오스만은 동로마 영토를 점진적으로 잠식하였으며, 특히 발칸 반도의 정복은 제국의 생존 가능성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동로마는 이에 대응하여 오스만 내 반란 세력을 지원하거나 혼인 동맹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전략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양 세력은 전쟁만큼이나 교류도 있었다. 동로마 군대에는 '투르코폴레스'라 불리는 튀르크계 기병 부대가 편성되었으며, 이들은 정규군과 함께 국경 방어에 참여하였다. 문화적으로도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동로마 제국 말기에는 궁정 복식이나 건축 양식에서 튀르크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반대로 오스만 초기의 통치 구조나 행정 체계에서도 동로마적 요소가 발견되며, 개국 과정에서 동로마 출신의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례도 있다.
1453년, 오스만 술탼 메흐메트 2세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수개월간의 공성 끝에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종말이자,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동유럽과 아나톨리아로 이동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후 오스만의 제국 수도가 되었으며, 이로써 천 년 이상을 이어온 로마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과 이란 및 이슬람권 세력 간의 관계는 단순한 적대나 충돌의 연속이 아닌, 전략적 균형과 문화적 융합, 외교적 갈등이 교차하는 복합적 양상이었다. 양 세력은 지속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벌였지만, 그 과정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제국 정체성을 형성해나갔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3세기 초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창건된 이후, 동로마 제국과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제국으로 자처하며 유서 깊은 경쟁 구도를 형성하였다. 특히 사산조는 자신들이 고대 아케메네스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임하면서, 동방의 문명을 대표하는 중심국으로 자리매김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조와 로마 제국 사이에서는 문화적 우월성을 둘러싼 경쟁뿐 아니라,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사산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기독교 제국인 로마와의 종교적 정체성을 분명히 구분지었으며, 국경 지대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충돌은 양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반복적 전쟁 양상을 초래하였다.
4세기 후반부터는 유프라테스강과 아르메니아 고원을 경계로 설정하는 여러 차례의 국경 협정과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어느 쪽도 상대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끊임없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 정책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재정복에 집중하면서도, 사산조와의 관계에서는 직접적 충돌을 피하고자 수차례에 걸쳐 막대한 재화를 바탕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대표적으로 532년에 체결된 ‘영구 평화’는 일시적으로 두 제국 사이의 전쟁을 중단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나, 그 기반은 극히 불안정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제국의 내정이 불안정해지고 서방에서의 군사적 부담이 커짐에 따라, 사산조는 보다 공격적으로 국경선을 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호스로 2세는 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비롯한 레반트 전역, 나아가 이집트까지 차지하며 동로마 제국의 핵심적인 속주들을 빠르게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들이 포위되고 약탈당하였으며, 전략 거점들이 줄줄이 함락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외부에서 포위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626년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은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그리고 다르다넬스 해협 건너편에서 압박해오는 사산조 페르시아군의 삼면 포위에 직면하였다. 이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수도는 제국의 상징이자 마지막 보루로서 중대한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해상 방어를 위한 체계적인 전략과 더불어,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비밀 병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당시 동로마의 해군이 사용한 특수 인화 물질로, 물 위에서도 불타는 성질로 인해 적의 함대를 효율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 방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군사적 경험과 공학 기술의 집약체로, 외적의 공세를 물리치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하였다. 결정적으로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결단력과 종교적 동원력이었다. 그는 수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수호를 강조하며 사기를 북돋았고, 전통적인 제국의 지도자상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라클리오스는 단순히 수비에만 만족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전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공세를 단행하였다. 627년 니네베 평원에서 벌어진 대회전은 이러한 전략의 정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직접 군을 이끌고 기동성과 지형을 이용하여 사산조의 주력을 타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니네베 전투에서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성공을 넘어, 제국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상징적인 성과로 작용하였다. 이후 이라클리오스는 유프라테스를 넘어 티그리스강 인근까지 진격하며, 사산조의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 지역을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조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고, 호스로 2세는 휘하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피살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동로마 제국은 이 일련의 반격을 통해 점령당했던 동방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고,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은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제국의 재건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방에서 벌어진 수년간의 전쟁은 동로마와 사산조 양국 모두에게 엄청난 인적 손실과 경제적 파탄을 초래하였다. 마을과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행정망과 세수 체계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전쟁의 상흔은 단순한 패배나 승리로 환원될 수 없는 깊은 사회적 균열로 남았다.
이로 인해 양 제국은 새로운 위협에 대응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 세력은 이러한 양 제국의 약화된 상태를 정확히 포착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시리아, 팔레스티나,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사산조는 이슬람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곧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 역시 안티오키아와 이집트를 상실하며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영토 손실을 겪게 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 사후 정비된 체계 아래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빠르게 세를 확장하였다. 불과 20여 년 만에 사산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동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러한 확장은 동로마 제국의 전략적 기반을 송두리째 약화시켰다. 특히 이집트는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이자 조세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곳의 상실은 제국의 세입 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의의는 사산조와는 다르게 동로마는 이슬람의 파고로부터 끝끝내 생존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관계는 복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선,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수세기에 걸쳐 이어진 복합적인 외교와 경쟁, 그리고 전략적 공존의 역사였다. 이슬람은 제국의 변방에 머무른 적이 없었으며, 그들은 직접적으로 제국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차례에 걸쳐 공략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 속에서도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수세적 자세에 머물지 않았고, 정교한 외교 전략을 통해 국력을 유지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확산된 아랍 이슬람 세력은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점령하며 제국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였다. 이때부터 동로마는 군사력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외교적 수단의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공략이 있었던 674년부터 678년까지의 시기에는, 단순히 그리스의 불을 활용한 해상 방어만이 아니라, 제국은 외교를 통해 후방의 다른 세력들과의 전선을 최소화하며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동로마는 이슬람 세력과 지속적인 소규모 충돌을 벌였으나, 대대적인 전면전보다는 외교와 조공, 국경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협상 등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717년부터 718년까지 이어진 두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황제 레온 3세는 불가리아와의 외교 동맹을 체결하여 북방 방어선을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세력의 퇴각 이후,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 방어 체계의 근본적인 개편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이는 테마 체계의 강화와 직결되었다. 이 체계는 군사 조직과 지방 행정을 통합하여, 제국 전역에 걸쳐 보다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위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외교는 방어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은 때로는 이슬람 내부의 분열을 활용하여 세력 간 이간을 시도하였다. 특히 아바스 왕조 시기에는 동로마가 바그다드 중심의 세력과 협상하며 국경의 긴장을 완화하려 하였으며, 반대로 바그다드에 대항하는 지역 이슬람 세력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외교적 다변화는 10세기에 들어 동로마의 반격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11세기에 접어들며, 이슬람 세계에서 새로운 세력인 튀르크인이 등장하자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셀주크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란 고원과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소아시아 내륙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는 단순한 국지 전투가 아닌, 제국의 전략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는 군사적 패배만이 아니라 정치적 분열도 함께 겪었으며, 이후의 대응은 외교적 노선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셀주크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은 기존의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를 재정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외교 채널을 개척하기 위해 서유럽 세계에 접근하였다. 이는 결국 교황청과의 외교적 협상을 거쳐 제1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제국은 이 원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아나톨리아 일부와 시리아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 세력과의 관계는 점차 충돌로 전환되었고, 외교적 관리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수도 함락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외교 전략의 실패이자, 군사와 외교 양면에서 균형을 잃은 결과였다. 이후 제국은 니카이아, 트라페주스, 에페이로스 등으로 분열되며 잔존하였고, 이들 중 니카이아 제국이 13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국을 재건하였지만, 예전과 같은 외교적 주도권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는 무력 충돌과 병행된 외교 전략의 역사였으며, 특히 외교는 국경 방어, 세력 균형, 내부 안정을 도모하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외교는 고정된 구도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력 간의 이해 조정이었고, 이에 대한 유연하고 정교한 대응이 가능한 시기에는 제국이 생존과 재건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 조율에 실패한 시기에는 치명적인 쇠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몽골 제국의 서진으로 인해 셀주크 제국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아나톨리아에는 다수의 튀르크계 베이국들이 등장하였다. 이 가운데 오스만 베이국은 전략적 위치와 결집된 무장력을 바탕으로 주변 베이국을 병합하며 팽창하였다. 오스만은 동로마 영토를 점진적으로 잠식하였으며, 특히 발칸 반도의 정복은 제국의 생존 가능성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동로마는 이에 대응하여 오스만 내 반란 세력을 지원하거나 혼인 동맹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전략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양 세력은 전쟁만큼이나 교류도 있었다. 동로마 군대에는 '투르코폴레스'라 불리는 튀르크계 기병 부대가 편성되었으며, 이들은 정규군과 함께 국경 방어에 참여하였다. 문화적으로도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동로마 제국 말기에는 궁정 복식이나 건축 양식에서 튀르크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반대로 오스만 초기의 통치 구조나 행정 체계에서도 동로마적 요소가 발견되며, 개국 과정에서 동로마 출신의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례도 있다.
1453년, 오스만 술탼 메흐메트 2세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수개월간의 공성 끝에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종말이자,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동유럽과 아나톨리아로 이동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후 오스만의 제국 수도가 되었으며, 이로써 천 년 이상을 이어온 로마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과 이란 및 이슬람권 세력 간의 관계는 단순한 적대나 충돌의 연속이 아닌, 전략적 균형과 문화적 융합, 외교적 갈등이 교차하는 복합적 양상이었다. 양 세력은 지속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벌였지만, 그 과정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제국 정체성을 형성해나갔다.
8.3. 슬라브권[편집]
동로마 제국과 슬라브 세계 간의 외교 관계는 수 세기 동안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교류가 얽힌 복합적인 관계로 형성되었다. 이 관계는 초기의 무력 충돌에서부터 정교회를 매개로 한 문화적 융합, 그리고 동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제3의 로마 사상으로까지 이어졌다.
6세기 이후 슬라브족은 북방에서 남하하여 발칸 반도 전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동로마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며 약탈을 일삼았으나, 곧 제국 영토 내부에 정착하여 정주민으로 변모하게 된다. 아바르족의 남하와 유목민족의 침입에 편승하거나 이들과 연합하여 활동하던 슬라브족은 동로마 북방 국경에서 지속적인 불안 요소였다. 제국은 이에 대해 군사적 대응뿐 아니라 선교를 통한 동화 전략을 병행하였다.
초기 슬라브족의 약탈은 아바르족의 남하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바르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유목 민족으로,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넓히며 슬라브족을 끌어들였다. 아바르족은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페르시아 원정에 집중하고 있던 틈을 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도 하였으나, 제국의 반격으로 세력이 무너졌다. 이후 슬라브족은 단독으로 제국 영토 내에 정착하여 자립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9세기 중엽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형제가 파견되어 슬라브어 전례와 문자를 정비하면서, 동로마 문명은 슬라브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서는 정교회를 수용하고 제국의 문화적 전통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불가르족은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이었지만, 토착 슬라브인과 연합하여 불가리아 왕국을 세운 뒤 제국과 장기간에 걸쳐 대립하였고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수차례 군사원정을 시도한 끝에 동로마 황제로부터 차르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성립된 불가리아 제1제국은 제국의 북방을 압박하며 수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제국은 외교적으로 달래거나 군사적 원정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굴복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1018년 불가르는 완전히 복속되었다. 하시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불가리아 제2제국으로 재건되어 동로마와 충돌하기 시작한다.
슬라브족 외에도 북방 유목 세력인 페체네그족과 쿠만족은 발칸 반도로 남하하여 제국을 공격하였다. 특히 페체네그족은 제국의 가장 취약한 시기를 노려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였고,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쿠만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궤멸시켰다. 이후 이들 부족은 제국 내에 정착하여 병사, 용병, 정주민으로 전환되었고, 이들이 형성한 부대는 십자군 전쟁 시기 십자군의 호위를 맡기도 하였다.
슬라브 세계와의 관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예는 동슬라브족의 국가인 키이우(키예프) 루스와의 교류이다. 루스는 초기에는 제국의 적이자 침입자였다. 북방에서 내려온 바이킹계 지배층과 슬라브 대중이 결합하여 형성된 이들은 배를 타고 도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고,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동로마와 충돌하여 격퇴당하였다. 이후 루스는 점차 제국과의 외교 경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986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는 행정 개혁과 통치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기존의 슬라브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도입할 결심을 하였다. 당시 고려했던 종교는 이슬람, 유대교, 서유럽의 가톨릭,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였다. 이슬람교는 술과 돼지고기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고, 유대교는 예루살렘을 잃은 민족의 종교라는 점에서 신의 축복을 상실했다는 해석으로 기각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중, 사절단을 동로마 제국으로 보낸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엄과 하기아 소피아의 장엄함에 감탄한 사절들의 권고에 따라 정교회를 선택하였다.
마침 바실리오스 2세 황제가 군사 귀족의 반란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블라디미르는 6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대가로 황제의 여동생 포르피로예니티 안나와의 혼인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반란 진압 이후 황제는 결혼 약속을 미루었고, 이에 분노한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 남부의 헤르소니소스[41][42]를 침공하여 점령한 뒤 결혼 이행을 압박하였다. 제국은 정교회로 개종하고 첩을 정리할 것을 조건으로 혼인을 허락하였고, 블라디미르는 988년 정식으로 개종하였다.
블라디미르는 개종 이후 전 루스 영토를 순행하며 귀족과 백성들에게 집단 개종과 세례를 강제하였다. 이는 단지 종교 변화에 그치지 않고,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와 제국식 정치 문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루스의 문명적 전환을 이끈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후 루스는 제국과 종교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일정 기간 동안 우호적 동맹국으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14세기 무렵, 루스의 후계 국가인 모스크바 대공국은 제국과의 유대를 강조하며 정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어렵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아야 소피아) 대성당 수리비 명목으로 금전적 원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대는 훗날 러시아 제국이 자신을 '제3의 로마'로 자처하게 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정교회 보호와 동로마 계승이라는 명분을 활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슬라브 세계의 외교는 단순한 충돌과 동맹을 넘어서, 종교와 문화, 제국적 이상을 매개로 한 깊은 상호작용이었다. 이 관계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정교회와 제국의 유산으로 오랫동안 슬라브 세계에 계승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동유럽 문화와 정치 정체성의 심장이 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6세기 이후 슬라브족은 북방에서 남하하여 발칸 반도 전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동로마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며 약탈을 일삼았으나, 곧 제국 영토 내부에 정착하여 정주민으로 변모하게 된다. 아바르족의 남하와 유목민족의 침입에 편승하거나 이들과 연합하여 활동하던 슬라브족은 동로마 북방 국경에서 지속적인 불안 요소였다. 제국은 이에 대해 군사적 대응뿐 아니라 선교를 통한 동화 전략을 병행하였다.
초기 슬라브족의 약탈은 아바르족의 남하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바르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유목 민족으로,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넓히며 슬라브족을 끌어들였다. 아바르족은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페르시아 원정에 집중하고 있던 틈을 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도 하였으나, 제국의 반격으로 세력이 무너졌다. 이후 슬라브족은 단독으로 제국 영토 내에 정착하여 자립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9세기 중엽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형제가 파견되어 슬라브어 전례와 문자를 정비하면서, 동로마 문명은 슬라브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서는 정교회를 수용하고 제국의 문화적 전통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불가르족은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이었지만, 토착 슬라브인과 연합하여 불가리아 왕국을 세운 뒤 제국과 장기간에 걸쳐 대립하였고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수차례 군사원정을 시도한 끝에 동로마 황제로부터 차르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성립된 불가리아 제1제국은 제국의 북방을 압박하며 수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제국은 외교적으로 달래거나 군사적 원정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굴복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1018년 불가르는 완전히 복속되었다. 하시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불가리아 제2제국으로 재건되어 동로마와 충돌하기 시작한다.
슬라브족 외에도 북방 유목 세력인 페체네그족과 쿠만족은 발칸 반도로 남하하여 제국을 공격하였다. 특히 페체네그족은 제국의 가장 취약한 시기를 노려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였고,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쿠만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궤멸시켰다. 이후 이들 부족은 제국 내에 정착하여 병사, 용병, 정주민으로 전환되었고, 이들이 형성한 부대는 십자군 전쟁 시기 십자군의 호위를 맡기도 하였다.
슬라브 세계와의 관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예는 동슬라브족의 국가인 키이우(키예프) 루스와의 교류이다. 루스는 초기에는 제국의 적이자 침입자였다. 북방에서 내려온 바이킹계 지배층과 슬라브 대중이 결합하여 형성된 이들은 배를 타고 도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고,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동로마와 충돌하여 격퇴당하였다. 이후 루스는 점차 제국과의 외교 경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986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는 행정 개혁과 통치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기존의 슬라브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도입할 결심을 하였다. 당시 고려했던 종교는 이슬람, 유대교, 서유럽의 가톨릭,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였다. 이슬람교는 술과 돼지고기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고, 유대교는 예루살렘을 잃은 민족의 종교라는 점에서 신의 축복을 상실했다는 해석으로 기각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중, 사절단을 동로마 제국으로 보낸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엄과 하기아 소피아의 장엄함에 감탄한 사절들의 권고에 따라 정교회를 선택하였다.
마침 바실리오스 2세 황제가 군사 귀족의 반란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블라디미르는 6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대가로 황제의 여동생 포르피로예니티 안나와의 혼인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반란 진압 이후 황제는 결혼 약속을 미루었고, 이에 분노한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 남부의 헤르소니소스[41][42]를 침공하여 점령한 뒤 결혼 이행을 압박하였다. 제국은 정교회로 개종하고 첩을 정리할 것을 조건으로 혼인을 허락하였고, 블라디미르는 988년 정식으로 개종하였다.
블라디미르는 개종 이후 전 루스 영토를 순행하며 귀족과 백성들에게 집단 개종과 세례를 강제하였다. 이는 단지 종교 변화에 그치지 않고,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와 제국식 정치 문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루스의 문명적 전환을 이끈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후 루스는 제국과 종교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일정 기간 동안 우호적 동맹국으로 기능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14세기 무렵, 루스의 후계 국가인 모스크바 대공국은 제국과의 유대를 강조하며 정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어렵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아야 소피아) 대성당 수리비 명목으로 금전적 원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대는 훗날 러시아 제국이 자신을 '제3의 로마'로 자처하게 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정교회 보호와 동로마 계승이라는 명분을 활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슬라브 세계의 외교는 단순한 충돌과 동맹을 넘어서, 종교와 문화, 제국적 이상을 매개로 한 깊은 상호작용이었다. 이 관계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정교회와 제국의 유산으로 오랫동안 슬라브 세계에 계승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동유럽 문화와 정치 정체성의 심장이 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8.4. 유라시아 유목 세계[편집]
동로마 제국은 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넘나드는 유목 세계와 끊임없이 접촉하였다. 이러한 접촉은 단순한 전쟁이나 방어 차원을 넘어, 외교와 교역, 종교 교섭, 인적 교류, 문화적 조정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제국은 유목 세력과의 대립을 단지 군사적 충돌로만 대응하지 않고, 이들을 교묘하게 활용하거나 회유하며, 국경 방어와 정치적 안정을 위한 유연하고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제국의 존속이 단단한 방벽과 정교한 행정 체계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외교적 재조정과 주변 세력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고대 후기부터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광대한 초원 지대에서 형성된 다양한 유목 세력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제국의 안보를 위협한 집단은 훈족이었다. 훈족은 5세기 중반, 아틸라의 지휘 아래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를 침입하며 동로마 제국의 북방 방어 체계를 무력화하였다. 특히 447년, 훈족은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까지 접근하였고,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제국의 군사력만으로 이들을 격퇴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대규모의 공물을 지급하며 훈족과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이 유목 세력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무력 대결보다는 외교적 현실 감각과 실용주의를 중시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제국은 훈족 내부의 정치 분열과 계승 갈등을 면밀히 관찰하며, 이들 세력 간의 충돌을 유도하거나, 경쟁 집단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는 유목 세계의 특수한 권력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초기 전략의 사례로 평가된다.
훈족의 세력이 쇠퇴한 이후, 6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유목 세력인 아바르족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집단으로, 도나우 중류에 정착하여 그 주변의 슬라브계 부족들을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적 지배 전략을 펼쳤다. 아바르족은 독립적인 군사력 외에도 다수의 예속 부족을 전쟁에 동원함으로써 다층적인 세력 구조를 형성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에 대한 압박도 보다 복합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동로마는 아바르족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군사적 방어를 넘어서 다양한 외교 전략을 시도하였다. 제국은 아바르와 그 예속 세력 간의 관계를 분리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소수 슬라브 족장들과 직접 교섭하였으며, 이들에게 명예직과 물자, 정교회 사제단을 파견함으로써 아바르의 지배권을 무력화하려 하였다. 특히 626년, 아바르족이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시 공세를 전개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을 때,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방어전에서 나아가 사산조 내부의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동맹 체계를 분열시키고, 북방에서는 아바르 내부의 반대파와 비밀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분산 전략은 물리적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대응 방식이었다.
626년의 포위가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아바르족과 이들의 지배 하에 있던 슬라브계 부족들의 반복적인 침입은 동로마 제국의 발칸 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슬라브계 집단들이 대규모로 남하하여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펠로폰네소스 등 내륙 깊숙한 지역에 정착하게 됨에 따라, 제국은 이들 지역에 대한 직접 통제를 상실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단순한 군사적 진압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새로운 사회 구조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슬라브계 족장들에게 제국 내 귀족 직위를 부여하고, 수도로 초청하여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는 정치 외교는 대표적인 통합 전략이었다. 이와 함께 동로마는 정교회 사제를 슬라브 거주지에 파견하여 교회 중심의 문화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교회 건축과 세례 의식을 통해 동로마적 질서의 상징을 확산시켰다. 이 과정은 단순한 종교 전파가 아니라 정치적 복속과 문화적 동화가 결합된 장기 외교 전략이었다.
슬라브계 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아바르족의 지배 방식,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동로마의 외교 전략은 복합적인 동맹과 이탈, 교섭과 회유의 과정을 통해 발칸 질서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복잡한 구도 속에서 단순히 유목 세력을 외부의 적으로만 간주하지 않았고, 그들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국경 안정과 정치적 우위를 도모하였다. 아바르와 슬라브의 침입은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이 다민족 사회로 이행하며 외교 기술을 정교화하는 시험대이기도 하였다.
결국 훈족과 아바르족, 그리고 슬라브계 집단들과의 초기 접촉은 동로마 제국 외교사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단락이었다. 이 접촉은 단지 영토 방어라는 목적을 넘어, 동로마가 유목 세계와 어떻게 교섭하고, 그 내부의 정치 동향을 어떻게 파악하며,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제국 질서 속에 통합하려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였다. 이러한 유목 세계와의 외교는 이후 마자르족, 페체네그, 쿠만족, 몽골 세력 등 다양한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났으며, 제국 외교의 핵심적 기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바르 족의 쇠퇴 이후 등장한 불가르족은 동로마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장기적인 외교 전략과 문화적 접촉, 그리고 국경지대의 정치 지형 변화에 깊이 얽혀 있었다. 아바르 세력이 약화된 7세기 후반 이후, 흑해 북방 초원에서 남하한 불가르족은 슬라브계 주민들과 융합하여 발칸반도 북부에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동로마 제국은 초기부터 이들의 등장에 깊은 우려를 표하였으며, 단순한 군사적 제압을 넘어 다양한 외교적 대응을 시도하였다.
불가르족의 세력 확대는 제국 북방 방어선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불가르족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혼인 외교, 종교 외교, 경제적 회유 등의 전략을 복합적으로 추진하였다. 제국은 불가르족과의 조약 체결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이들과의 통상 관계를 조절하여 자원 유입 통로를 통제하려 하였다. 특히 불가르 귀족층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확대하고, 이들에게 명예직과 재정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불가리아 내부의 이탈 세력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점차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면서 자주적인 외교 기조를 확립하였고, 동로마 제국과의 종속적 관계를 거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가르와 동로마 사이의 외교는 다수의 무력 충돌과 병행되었으며, 군사적 위협과 외교적 타협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관계로 전개되었다. 플리스카 전투에서 제국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전사한 사건은, 제국의 북방 외교 실패가 가져온 정치적 충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9세기 중반부터는 기독교 개종을 둘러싼 외교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불가르족의 기독교 수용을 자신들의 종교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전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불가리아도 한때 서방 교회와 접촉하면서 균형 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불가르 통치자 보리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회 조직을 자국 내에 정착시키면서 불가리아는 동방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이는 군사 충돌과는 별개로 외교적 영향력 확장에서 동로마 제국이 거둔 중대한 성과였다.
한편, 10세기 이후 동로마의 북방 외교는 스텝 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 세력들로 중심이 이동하였다. 그 중 페체네그는 드네프르 강에서 다뉴브 강에 이르는 드넓은 지대를 장악하고 제국 북부 국경을 압박하였다. 이들은 수차례 국경을 넘어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로마는 단순한 방어보다 훨씬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제국은 페체네그와의 군사적 충돌과 병행하여, 이들 부족의 지도자들에게 물품과 금전을 지급하거나 귀족 칭호를 수여하며 내부분열을 조장하였다. 또한 때로는 이들을 제국 내 용병으로 고용하여, 다른 유목 세력이나 발칸의 반란군 진압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중적 외교는 제국이 북방 유목 세력을 견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도구였다.
페체네그가 11세기 중엽 레부니온 전투와 베로이아 전투에서 제국군과 동맹 세력에 의해 궤멸되었을 때, 이는 단순한 군사 승리를 넘어 외교와 정보전을 통한 장기 전략의 성공을 의미하였다. 특히 제국은 불가르의 잔존 세력, 러시아계 무장 세력, 그리고 다른 튀르크계 부족과의 삼각 외교를 통해 페체네그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승리는 동로마 외교의 정교함과 장기 전략 수립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결과적으로, 불가르족과 페체네그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대응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닌, 외교적 기민함과 전략적 계산이 융합된 복합적 접근의 전형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국은 때로는 참패를 겪었고 때로는 반격에 성공하였으나, 항상 유목 세력에 대한 외교적 감각을 유지하며 제국의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한 장기적 시도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외교는 단지 국경 방어에 그치지 않고, 종교, 문화, 통상 전반에 걸쳐 제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자르족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는 초기에는 간접적인 충돌과 긴장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교적 교섭과 문화적 교류, 상징적 위계 구조가 점차 형성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마자르족은 9세기 말, 페체네그의 압박을 받아 도나우 강 중류를 넘어 서진하였고, 결국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자르족은 유럽 내에서 새로운 유목계 정착국가로 부상하였으며, 초기에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약탈을 벌이며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들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초기 접근은 대체로 군사적 충돌에 가까웠다. 그러나 10세기 중엽 이후, 머저르족은 점차 정주 사회로 전환하였고, 955년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독일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본격적인 기독교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헝가리 왕국의 성립과 함께 서방교회와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이는 겉으로는 동로마와의 외교적 간극을 넓히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헝가리를 단지 서방 진영의 일부로만 간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가 헝가리 왕 게저 1세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이슈트반 왕관의 하단 링은, 상징적으로 헝가리 왕권이 로마 황제에 의해 승인되었음을 보여주는 외교적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동로마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국이라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주변 정권들에게 제국적 권위의 표식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상징적 외교는 실제로 군사적 지배를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헝가리 왕국에 대한 일정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제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동로마와 헝가리 간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는 북방 안정화를 위해 헝가리와의 군사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누일 1세 재위기에는 하람 전투와 시르미온 전투를 통해 헝가리를 일시적으로 제국의 영향권 아래 두었으며, 당시 헝가리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헝가리 내정에 대한 간접적 영향력도 행사하였다. 제국은 특정 왕위 후보를 지지하고, 이들과 혼인 외교를 추진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구도를 북방에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의 사후, 제국의 대외정책은 급속히 방어적으로 전환되었고, 헝가리 역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동로마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명백히 서방교회 문화권에 편입되어 가면서, 동로마와의 외교는 주로 상징적이고 제한적인 성격을 유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저르족 출신 귀족이나 군사 지휘관들이 제국 내에서 활동한 사례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제국 궁정과 군사 구조 내에서 문화적 교류와 인간관계를 형성하였다.
한편, 동유럽 초원의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한 키예프 루스는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동로마와 접촉하였다. 이들은 초기부터 도나우와 흑해를 통한 교역로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통상과 동맹을 병행하면서 때때로 무력 충돌도 감행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목적으로 한 루스의 침공이 반복되었지만, 제국은 루스의 지도자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교역 항구 개방이나 귀족 작위 부여와 같은 방식으로 이들을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하자르 카간국을 약화시키면서 흑해 북방 초원 지대의 정치 질서는 재편되었고, 이로 인해 쿠만족이 새로운 패권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쿠만은 중앙유라시아에서 서진한 튀르크계 유목 집단으로, 키예프 루스와의 충돌을 중심에 두면서도, 때로는 동로마 제국과 간헐적인 충돌이나 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11세기와 12세기, 쿠만 전사들이 제국 군대에 용병으로 참여하거나, 쿠만계 귀족들이 동로마 귀족층과 혼인 관계를 맺고 궁정 사회에 편입된 사례는, 문화적 통합이 외교의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동로마 제국은 쿠만족의 유목적 특성과 이동성을 고려하여 이들의 거주지를 국경 지대에서 분산시키거나, 동로마령 내의 일부 지역에 정착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이는 쿠만의 무력적 성격을 제어하는 동시에, 국경 방어에 활용하고자 하는 현실적 전략이었다. 나아가 쿠만 용병들은 제국 내 반란 진압이나 북방 방어에 실질적인 병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을 통한 간접적 영향력 확대는 제국 외교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머저르족, 키예프 루스, 쿠만족과의 관계는 단순한 우호나 적대의 이분법을 넘어, 상징적 외교, 실질적 군사 협력, 문화적 통합을 아우르는 다층적 구조로 발전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유목 또는 반정착 세력들을 국경 너머의 적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제국의 전략적 목적에 따라 회유하고 조절하며, 자신들의 국제 질서를 외연적으로 확장하는 데 활용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제국의 북방 외교가 단순한 군사적 방어선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 네트워크와 권위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13세기에 이르러 유라시아 대륙은 몽골 제국의 광범위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전례 없는 정치적 재편을 맞이하였다. 몽골 제국은 동유럽에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기존의 유목 세력뿐 아니라 농경 중심의 제국들과도 새로운 관계 망을 형성해 나갔다. 이처럼 유목 세계의 권력 구도가 거대하고 통합적인 구조로 재편되자, 동로마 제국 역시 이에 적응하며 외교 전략을 정비하였다. 당시 동로마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가칭 니케아 제국[43]의 이름으로 재건되었고, 이후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수도가 회복된 뒤에도 새로운 외교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변화된 세계에서 단지 방어적 자세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몽골 제국 및 그 계승국들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서아시아에 자리잡은 일 칸국과의 관계는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일 칸국은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두고 맘루크 술탄국과 지속적인 충돌을 벌이고 있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 틈을 타 일 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공동의 위협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였다.
황제 미하일 8세는 일 칸국 군주들과의 공식적인 외교를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상호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특사 교환은 단순한 안부의 전달이나 친선 목적을 넘어, 구체적인 군사 협력과 지역 내 세력 균형을 조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제국은 맘루크 세력의 동방 진출을 우려하였고, 일 칸국은 이슬람 중심 세력에 맞서 기독교 제국과의 협력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공동의 이해관계는 종교와 문명의 차이를 넘어서 현실 정치의 논리에 따라 형성된 외교적 접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은 혼인 외교를 통해 일 칸국과의 연계를 공고히 하려 하였다. 제국 황실은 몽골 귀족 가문과의 혼인 가능성을 타진하며 양측의 동맹을 상징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고, 일 칸국 또한 기독교 세력과의 정치적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동방 교회 및 동로마 황제와의 협상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러한 교섭은 일면에서 교회 일치 문제와도 연결되었으며, 일 칸국이 일부 기독교 집단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점은 제국 외교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에도 이러한 외교 기조는 이어졌다. 제국은 일 칸국과의 교류를 지속하며, 몽골 제국의 후계 정권들이 이슬람화하는 양상을 주시하였다. 일 칸국 내부의 권력 교체와 이슬람 수용이 진전됨에 따라, 제국은 몽골 세력과의 관계를 보다 유연하게 조정해야 했으며, 때로는 교역과 군사 협력을 병행하면서도 외교적 거리두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탄력적 외교 전략은 국력이 쇠퇴해가던 제국이 광역 유라시아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현실적 선택이었다.
나아가 동로마 제국과 몽골 세계의 교류는 단지 군사 및 정치적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단일한 교역권으로 연결함에 따라, 동서 간의 상업 노선과 사절 교환이 활발해졌으며, 이는 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국은 몽골령을 경유하는 실크로드 상권을 활용하기 위해 동방 상인과 접촉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렇듯 몽골 제국 및 그 계승국과의 관계는 단순히 제국 외교사의 말기에 등장한 특수 사례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유목 세계와 오랜 기간 유지해온 전략적 교섭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다. 동로마는 유목 세력을 배제하거나 단순히 저지할 수 없는 실체로 인식하였고,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이는 제국이 고립된 농경 문명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복합적 힘의 교차점에서 현실적이고 유연한 외교 감각을 바탕으로 존속해온 문명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유목 세계를 단순한 이질적 존재로 치부하지 않고, 때로는 위협으로 경계하며, 때로는 파트너로 활용하면서 지속적인 교섭과 조정을 통해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왔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제국이 다양한 민족과 세력 속에서 생존하고, 유라시아의 질서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고대 후기부터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광대한 초원 지대에서 형성된 다양한 유목 세력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제국의 안보를 위협한 집단은 훈족이었다. 훈족은 5세기 중반, 아틸라의 지휘 아래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를 침입하며 동로마 제국의 북방 방어 체계를 무력화하였다. 특히 447년, 훈족은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까지 접근하였고,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제국의 군사력만으로 이들을 격퇴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대규모의 공물을 지급하며 훈족과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이 유목 세력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무력 대결보다는 외교적 현실 감각과 실용주의를 중시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제국은 훈족 내부의 정치 분열과 계승 갈등을 면밀히 관찰하며, 이들 세력 간의 충돌을 유도하거나, 경쟁 집단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는 유목 세계의 특수한 권력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초기 전략의 사례로 평가된다.
훈족의 세력이 쇠퇴한 이후, 6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유목 세력인 아바르족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집단으로, 도나우 중류에 정착하여 그 주변의 슬라브계 부족들을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적 지배 전략을 펼쳤다. 아바르족은 독립적인 군사력 외에도 다수의 예속 부족을 전쟁에 동원함으로써 다층적인 세력 구조를 형성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에 대한 압박도 보다 복합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동로마는 아바르족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군사적 방어를 넘어서 다양한 외교 전략을 시도하였다. 제국은 아바르와 그 예속 세력 간의 관계를 분리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소수 슬라브 족장들과 직접 교섭하였으며, 이들에게 명예직과 물자, 정교회 사제단을 파견함으로써 아바르의 지배권을 무력화하려 하였다. 특히 626년, 아바르족이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시 공세를 전개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을 때, 동로마 제국은 단순한 방어전에서 나아가 사산조 내부의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동맹 체계를 분열시키고, 북방에서는 아바르 내부의 반대파와 비밀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분산 전략은 물리적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대응 방식이었다.
626년의 포위가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아바르족과 이들의 지배 하에 있던 슬라브계 부족들의 반복적인 침입은 동로마 제국의 발칸 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슬라브계 집단들이 대규모로 남하하여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펠로폰네소스 등 내륙 깊숙한 지역에 정착하게 됨에 따라, 제국은 이들 지역에 대한 직접 통제를 상실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단순한 군사적 진압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새로운 사회 구조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슬라브계 족장들에게 제국 내 귀족 직위를 부여하고, 수도로 초청하여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는 정치 외교는 대표적인 통합 전략이었다. 이와 함께 동로마는 정교회 사제를 슬라브 거주지에 파견하여 교회 중심의 문화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교회 건축과 세례 의식을 통해 동로마적 질서의 상징을 확산시켰다. 이 과정은 단순한 종교 전파가 아니라 정치적 복속과 문화적 동화가 결합된 장기 외교 전략이었다.
슬라브계 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아바르족의 지배 방식,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동로마의 외교 전략은 복합적인 동맹과 이탈, 교섭과 회유의 과정을 통해 발칸 질서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복잡한 구도 속에서 단순히 유목 세력을 외부의 적으로만 간주하지 않았고, 그들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국경 안정과 정치적 우위를 도모하였다. 아바르와 슬라브의 침입은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이 다민족 사회로 이행하며 외교 기술을 정교화하는 시험대이기도 하였다.
결국 훈족과 아바르족, 그리고 슬라브계 집단들과의 초기 접촉은 동로마 제국 외교사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단락이었다. 이 접촉은 단지 영토 방어라는 목적을 넘어, 동로마가 유목 세계와 어떻게 교섭하고, 그 내부의 정치 동향을 어떻게 파악하며,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제국 질서 속에 통합하려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였다. 이러한 유목 세계와의 외교는 이후 마자르족, 페체네그, 쿠만족, 몽골 세력 등 다양한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났으며, 제국 외교의 핵심적 기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바르 족의 쇠퇴 이후 등장한 불가르족은 동로마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장기적인 외교 전략과 문화적 접촉, 그리고 국경지대의 정치 지형 변화에 깊이 얽혀 있었다. 아바르 세력이 약화된 7세기 후반 이후, 흑해 북방 초원에서 남하한 불가르족은 슬라브계 주민들과 융합하여 발칸반도 북부에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동로마 제국은 초기부터 이들의 등장에 깊은 우려를 표하였으며, 단순한 군사적 제압을 넘어 다양한 외교적 대응을 시도하였다.
불가르족의 세력 확대는 제국 북방 방어선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불가르족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혼인 외교, 종교 외교, 경제적 회유 등의 전략을 복합적으로 추진하였다. 제국은 불가르족과의 조약 체결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이들과의 통상 관계를 조절하여 자원 유입 통로를 통제하려 하였다. 특히 불가르 귀족층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확대하고, 이들에게 명예직과 재정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불가리아 내부의 이탈 세력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점차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면서 자주적인 외교 기조를 확립하였고, 동로마 제국과의 종속적 관계를 거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가르와 동로마 사이의 외교는 다수의 무력 충돌과 병행되었으며, 군사적 위협과 외교적 타협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관계로 전개되었다. 플리스카 전투에서 제국 황제 니키포로스 1세가 전사한 사건은, 제국의 북방 외교 실패가 가져온 정치적 충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9세기 중반부터는 기독교 개종을 둘러싼 외교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불가르족의 기독교 수용을 자신들의 종교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전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불가리아도 한때 서방 교회와 접촉하면서 균형 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불가르 통치자 보리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회 조직을 자국 내에 정착시키면서 불가리아는 동방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이는 군사 충돌과는 별개로 외교적 영향력 확장에서 동로마 제국이 거둔 중대한 성과였다.
한편, 10세기 이후 동로마의 북방 외교는 스텝 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 세력들로 중심이 이동하였다. 그 중 페체네그는 드네프르 강에서 다뉴브 강에 이르는 드넓은 지대를 장악하고 제국 북부 국경을 압박하였다. 이들은 수차례 국경을 넘어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로마는 단순한 방어보다 훨씬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제국은 페체네그와의 군사적 충돌과 병행하여, 이들 부족의 지도자들에게 물품과 금전을 지급하거나 귀족 칭호를 수여하며 내부분열을 조장하였다. 또한 때로는 이들을 제국 내 용병으로 고용하여, 다른 유목 세력이나 발칸의 반란군 진압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중적 외교는 제국이 북방 유목 세력을 견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도구였다.
페체네그가 11세기 중엽 레부니온 전투와 베로이아 전투에서 제국군과 동맹 세력에 의해 궤멸되었을 때, 이는 단순한 군사 승리를 넘어 외교와 정보전을 통한 장기 전략의 성공을 의미하였다. 특히 제국은 불가르의 잔존 세력, 러시아계 무장 세력, 그리고 다른 튀르크계 부족과의 삼각 외교를 통해 페체네그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승리는 동로마 외교의 정교함과 장기 전략 수립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결과적으로, 불가르족과 페체네그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대응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닌, 외교적 기민함과 전략적 계산이 융합된 복합적 접근의 전형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국은 때로는 참패를 겪었고 때로는 반격에 성공하였으나, 항상 유목 세력에 대한 외교적 감각을 유지하며 제국의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한 장기적 시도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외교는 단지 국경 방어에 그치지 않고, 종교, 문화, 통상 전반에 걸쳐 제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자르족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는 초기에는 간접적인 충돌과 긴장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교적 교섭과 문화적 교류, 상징적 위계 구조가 점차 형성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마자르족은 9세기 말, 페체네그의 압박을 받아 도나우 강 중류를 넘어 서진하였고, 결국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자르족은 유럽 내에서 새로운 유목계 정착국가로 부상하였으며, 초기에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약탈을 벌이며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들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초기 접근은 대체로 군사적 충돌에 가까웠다. 그러나 10세기 중엽 이후, 머저르족은 점차 정주 사회로 전환하였고, 955년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독일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본격적인 기독교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헝가리 왕국의 성립과 함께 서방교회와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이는 겉으로는 동로마와의 외교적 간극을 넓히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헝가리를 단지 서방 진영의 일부로만 간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가 헝가리 왕 게저 1세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이슈트반 왕관의 하단 링은, 상징적으로 헝가리 왕권이 로마 황제에 의해 승인되었음을 보여주는 외교적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동로마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국이라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주변 정권들에게 제국적 권위의 표식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상징적 외교는 실제로 군사적 지배를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헝가리 왕국에 대한 일정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제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동로마와 헝가리 간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는 북방 안정화를 위해 헝가리와의 군사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누일 1세 재위기에는 하람 전투와 시르미온 전투를 통해 헝가리를 일시적으로 제국의 영향권 아래 두었으며, 당시 헝가리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헝가리 내정에 대한 간접적 영향력도 행사하였다. 제국은 특정 왕위 후보를 지지하고, 이들과 혼인 외교를 추진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구도를 북방에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의 사후, 제국의 대외정책은 급속히 방어적으로 전환되었고, 헝가리 역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동로마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명백히 서방교회 문화권에 편입되어 가면서, 동로마와의 외교는 주로 상징적이고 제한적인 성격을 유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저르족 출신 귀족이나 군사 지휘관들이 제국 내에서 활동한 사례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제국 궁정과 군사 구조 내에서 문화적 교류와 인간관계를 형성하였다.
한편, 동유럽 초원의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한 키예프 루스는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동로마와 접촉하였다. 이들은 초기부터 도나우와 흑해를 통한 교역로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통상과 동맹을 병행하면서 때때로 무력 충돌도 감행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목적으로 한 루스의 침공이 반복되었지만, 제국은 루스의 지도자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교역 항구 개방이나 귀족 작위 부여와 같은 방식으로 이들을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하자르 카간국을 약화시키면서 흑해 북방 초원 지대의 정치 질서는 재편되었고, 이로 인해 쿠만족이 새로운 패권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쿠만은 중앙유라시아에서 서진한 튀르크계 유목 집단으로, 키예프 루스와의 충돌을 중심에 두면서도, 때로는 동로마 제국과 간헐적인 충돌이나 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11세기와 12세기, 쿠만 전사들이 제국 군대에 용병으로 참여하거나, 쿠만계 귀족들이 동로마 귀족층과 혼인 관계를 맺고 궁정 사회에 편입된 사례는, 문화적 통합이 외교의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동로마 제국은 쿠만족의 유목적 특성과 이동성을 고려하여 이들의 거주지를 국경 지대에서 분산시키거나, 동로마령 내의 일부 지역에 정착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이는 쿠만의 무력적 성격을 제어하는 동시에, 국경 방어에 활용하고자 하는 현실적 전략이었다. 나아가 쿠만 용병들은 제국 내 반란 진압이나 북방 방어에 실질적인 병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을 통한 간접적 영향력 확대는 제국 외교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머저르족, 키예프 루스, 쿠만족과의 관계는 단순한 우호나 적대의 이분법을 넘어, 상징적 외교, 실질적 군사 협력, 문화적 통합을 아우르는 다층적 구조로 발전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유목 또는 반정착 세력들을 국경 너머의 적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제국의 전략적 목적에 따라 회유하고 조절하며, 자신들의 국제 질서를 외연적으로 확장하는 데 활용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제국의 북방 외교가 단순한 군사적 방어선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 네트워크와 권위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13세기에 이르러 유라시아 대륙은 몽골 제국의 광범위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전례 없는 정치적 재편을 맞이하였다. 몽골 제국은 동유럽에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기존의 유목 세력뿐 아니라 농경 중심의 제국들과도 새로운 관계 망을 형성해 나갔다. 이처럼 유목 세계의 권력 구도가 거대하고 통합적인 구조로 재편되자, 동로마 제국 역시 이에 적응하며 외교 전략을 정비하였다. 당시 동로마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가칭 니케아 제국[43]의 이름으로 재건되었고, 이후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수도가 회복된 뒤에도 새로운 외교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변화된 세계에서 단지 방어적 자세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몽골 제국 및 그 계승국들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서아시아에 자리잡은 일 칸국과의 관계는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일 칸국은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두고 맘루크 술탄국과 지속적인 충돌을 벌이고 있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 틈을 타 일 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공동의 위협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였다.
황제 미하일 8세는 일 칸국 군주들과의 공식적인 외교를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상호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특사 교환은 단순한 안부의 전달이나 친선 목적을 넘어, 구체적인 군사 협력과 지역 내 세력 균형을 조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제국은 맘루크 세력의 동방 진출을 우려하였고, 일 칸국은 이슬람 중심 세력에 맞서 기독교 제국과의 협력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공동의 이해관계는 종교와 문명의 차이를 넘어서 현실 정치의 논리에 따라 형성된 외교적 접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은 혼인 외교를 통해 일 칸국과의 연계를 공고히 하려 하였다. 제국 황실은 몽골 귀족 가문과의 혼인 가능성을 타진하며 양측의 동맹을 상징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고, 일 칸국 또한 기독교 세력과의 정치적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동방 교회 및 동로마 황제와의 협상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러한 교섭은 일면에서 교회 일치 문제와도 연결되었으며, 일 칸국이 일부 기독교 집단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점은 제국 외교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에도 이러한 외교 기조는 이어졌다. 제국은 일 칸국과의 교류를 지속하며, 몽골 제국의 후계 정권들이 이슬람화하는 양상을 주시하였다. 일 칸국 내부의 권력 교체와 이슬람 수용이 진전됨에 따라, 제국은 몽골 세력과의 관계를 보다 유연하게 조정해야 했으며, 때로는 교역과 군사 협력을 병행하면서도 외교적 거리두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탄력적 외교 전략은 국력이 쇠퇴해가던 제국이 광역 유라시아 질서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현실적 선택이었다.
나아가 동로마 제국과 몽골 세계의 교류는 단지 군사 및 정치적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단일한 교역권으로 연결함에 따라, 동서 간의 상업 노선과 사절 교환이 활발해졌으며, 이는 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국은 몽골령을 경유하는 실크로드 상권을 활용하기 위해 동방 상인과 접촉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렇듯 몽골 제국 및 그 계승국과의 관계는 단순히 제국 외교사의 말기에 등장한 특수 사례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유목 세계와 오랜 기간 유지해온 전략적 교섭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다. 동로마는 유목 세력을 배제하거나 단순히 저지할 수 없는 실체로 인식하였고,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이는 제국이 고립된 농경 문명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복합적 힘의 교차점에서 현실적이고 유연한 외교 감각을 바탕으로 존속해온 문명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유목 세계를 단순한 이질적 존재로 치부하지 않고, 때로는 위협으로 경계하며, 때로는 파트너로 활용하면서 지속적인 교섭과 조정을 통해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왔다. 이러한 외교적 역량은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제국이 다양한 민족과 세력 속에서 생존하고, 유라시아의 질서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8.5. 비슬라브 동방 기독교권[편집]
동로마 제국은 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동방 기독교권과 밀접한 외교와 종교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비슬라브 계열의 여러 국가 가운데에서도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긴밀히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정치·군사·종교적 접촉이 오랜 기간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고대부터 자국 고유의 정체성과 기독교 전통을 유지해왔으며, 동로마의 종교 노선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외교는 단순한 인접 국가 간의 정치적 접촉을 넘어, 종교, 군사, 귀족 동맹, 영토 통제라는 다양한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외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갈등과 협력, 지배와 자율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동방 국경의 전략적 완충지로 인식하였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사산조 페르시아, 후에는 이슬람 세력과의 접경지대로서 제국 방어의 핵심 축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정치 구조에 지속적인 외교적 개입을 시도하였다. 제국의 외교 전략은 아르메니아를 일방적으로 병합하는 데 있지 않았으며, 현지 귀족 세력과의 동맹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외교는 종교 문제로 인해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아르메니아는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회 조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이 공인한 정교회 노선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제국은 다양한 시기마다 아르메니아에 칼케돈 교리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는 외교적 압력이나 회유책을 통해 시도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교회 독립을 국가 정체성과 결부지었기에, 종교 일치를 통한 통합 외교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국은 대신 현실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아르메니아 귀족층과의 연대를 선택하였다. 아르메니아 내부는 여러 귀족 가문이 할거하고 있는 구조였으며, 제국은 특정 귀족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친제국적 세력을 육성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아르메니아 귀족들에게 제국 내에서의 작위와 토지를 부여하거나, 그 자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초청하여 제국 체제에 편입시키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외교적 통합은 군사뿐 아니라 혼인을 통한 귀족 동맹으로도 전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아르메니아 출신 귀족들 중 일부는 동로마 제국 내 최고위층에 진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 외교는 군사 외교와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국경 방위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하거나, 국지적 분쟁에서 특정 세력을 지원하였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나 아랍 칼리프국의 확장기에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외교적으로 군사적 협정을 맺거나 직접적인 방위 동맹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반면, 아르메니아 내부에서 친제국 성향이 약화되거나 반제국적 움직임이 감지될 경우, 제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완전한 외부 국가로 간주하지 않았다. 제국의 시각에서 아르메니아는 종교적으로 이단일지라도 문명적으로 동방 정교권에 포함되는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이를 제국의 외교 영역 안에 두려는 의지가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독립 국가로서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제국의 교회, 귀족, 군사 정책에 깊이 관여되는 위치에 놓였고, 이러한 상태는 11세기 이후 셀주크 투르크의 등장으로 동방 국경이 재편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요약하면,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외교는 종교 일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귀족 동맹, 군사 협정, 국경 안정이라는 현실적 목적을 기반으로 긴밀히 이루어졌다.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는 동시에 자국의 질서 안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이는 제국의 동방 외교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전략적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조지아와의 외교는 정교회를 매개로 한 종교적 연대와 캅카스의 지배권을 둘러싼 정치적 긴장이 교차하는 구조 속에서 전개되었다. 조지아는 기독교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수용한 국가로서, 중세 초부터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수용하고, 동방 정교회의 교의 체계를 따르는 교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로 인해 조지아는 교리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와 일치된 신앙 노선을 유지하였고, 이는 양국 외교에서 중요한 공통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일관되게 자국의 독립성과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때때로 이러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외교적 압박이나 군사적 대응을 시도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의 통치 시기에는 조지아와의 군사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는 제국이 캅카스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고자 한 일련의 전략적 조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지아는 이에 맞서 자국 영토를 방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전면적인 적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외교적 조율을 통해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다. 제국은 조지아의 독립적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으며, 조지아 역시 제국과의 종교적 유대와 문화적 연계성을 의식하여 일정 수준의 우호 외교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로마 제국이 분열되고, 트라페준타 제국 등 후계 국가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더욱 뚜렷해졌다. 이 시기 조지아 왕국은 흑해 남동 연안에 위치한 트라페준타 제국을 보호국화하면서, 동방 정교권 내에서의 영향력을 자주적으로 행사하였다. 조지아의 이러한 외교는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계와 서방 십자군 사이에서 흔들릴 때, 동방 기독교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자국 중심의 전략이었다.
문화적 외교 또한 조지아와 동로마 사이의 중요한 축이었다. 조지아는 수도원 제도, 교회 건축, 성화 제작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동로마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는 조지아 정교회가 동로마 정교회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자국 고유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조지아어 문헌의 체계화와 성경 번역, 교부 문헌의 수용 과정에서 동로마의 신학 전통은 조지아 내 학문적·종교적 담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조지아는 이를 자국 문화로 융합시켜 독자적 종교 문명을 구축하였다.
결국,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 사이의 외교는 종교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치적 주권을 둘러싼 갈등과 문화적 상호 교류가 동시에 전개된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조지아는 정교회의 교리를 공유하며 제국과 외교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한편, 자국의 정치적 독립성과 외교적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연하고 전략적인 외교를 구사하였다.
또한 고대 악숨 왕국 사이의 외교는 종교적 연대와 전략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전개된 장거리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티오피아는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국가로, 독자적인 전통을 지닌 터와흐도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으며, 이는 동방 단성론 교회의 계통에 속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유사성은 두 문명이 서로를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양국 간의 초기 외교는 종교적 일치감 속에서 형성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특히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반도 남부와 아프리카 동해안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악숨 왕국을 전략적 협력자로 간주하였다. 이는 단지 해상 교역의 안정성 확보 차원을 넘어,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충돌의 대응 전략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6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남단에 자리 잡았던 힘야르 왕국은 유대교를 국교로 채택하였고, 이로 인해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며, 에티오피아 측에 군사 개입을 요청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이에 응하여 홍해를 건너 힘야르를 공격하였고, 결과적으로 기독교 중심의 질서를 복원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와 에티오피아가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며 실질적인 외교적 협력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는 곧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7세기 초부터 이슬람이 아라비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홍해에 대한 해상 통제권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에티오피아 역시 홍해 연안의 항구와 무역로에서 밀려나면서 국제적 교류의 폭이 축소되었고, 양국 간의 직접적 접촉은 점차 희박해졌다.
이슬람의 등장 이후에도 에티오피아는 독립된 기독교 왕국으로 존속하였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는 해상로 단절, 중개 무역의 붕괴, 지리적 고립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양국은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실질적인 외교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종합하면, 동로마 제국과 에티오피아 사이의 외교는 초기에는 종교적 유대와 정치적 전략의 일치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으나, 해상 교통망과 정치 질서의 변화로 인해 단절된 특수한 외교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양국은 각기 다른 대륙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기독교권의 일원으로서 종교와 정치의 틀 속에서 일시적으로 강력한 외교적 협력을 이룬 바 있으며, 이는 고대 후반과 중세 초기의 기독교 세계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비슬라브 계열의 동방 기독교권 국가들과 복합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유목권, 슬라브권에서 보여준 유연한 외교술의 연장아라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종교적 유사성과 차이를 모두 지닌 채로 동로마 제국과 지속적인 정치·군사적 접촉을 이어갔으며,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협력하였다. 제국은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국의 방위를 강화하고,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외교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한 종교적 일치가 아닌, 정치적 이익과 문화적 접점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방 기독교권이 제국의 동쪽 외교에서 중요한 축을 이뤘음을 보여준다.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외교는 단순한 인접 국가 간의 정치적 접촉을 넘어, 종교, 군사, 귀족 동맹, 영토 통제라는 다양한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외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갈등과 협력, 지배와 자율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동방 국경의 전략적 완충지로 인식하였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사산조 페르시아, 후에는 이슬람 세력과의 접경지대로서 제국 방어의 핵심 축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정치 구조에 지속적인 외교적 개입을 시도하였다. 제국의 외교 전략은 아르메니아를 일방적으로 병합하는 데 있지 않았으며, 현지 귀족 세력과의 동맹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외교는 종교 문제로 인해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아르메니아는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회 조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이 공인한 정교회 노선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제국은 다양한 시기마다 아르메니아에 칼케돈 교리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는 외교적 압력이나 회유책을 통해 시도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교회 독립을 국가 정체성과 결부지었기에, 종교 일치를 통한 통합 외교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국은 대신 현실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아르메니아 귀족층과의 연대를 선택하였다. 아르메니아 내부는 여러 귀족 가문이 할거하고 있는 구조였으며, 제국은 특정 귀족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친제국적 세력을 육성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아르메니아 귀족들에게 제국 내에서의 작위와 토지를 부여하거나, 그 자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초청하여 제국 체제에 편입시키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외교적 통합은 군사뿐 아니라 혼인을 통한 귀족 동맹으로도 전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아르메니아 출신 귀족들 중 일부는 동로마 제국 내 최고위층에 진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 외교는 군사 외교와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국경 방위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하거나, 국지적 분쟁에서 특정 세력을 지원하였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나 아랍 칼리프국의 확장기에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외교적으로 군사적 협정을 맺거나 직접적인 방위 동맹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반면, 아르메니아 내부에서 친제국 성향이 약화되거나 반제국적 움직임이 감지될 경우, 제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완전한 외부 국가로 간주하지 않았다. 제국의 시각에서 아르메니아는 종교적으로 이단일지라도 문명적으로 동방 정교권에 포함되는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이를 제국의 외교 영역 안에 두려는 의지가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독립 국가로서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제국의 교회, 귀족, 군사 정책에 깊이 관여되는 위치에 놓였고, 이러한 상태는 11세기 이후 셀주크 투르크의 등장으로 동방 국경이 재편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요약하면,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외교는 종교 일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귀족 동맹, 군사 협정, 국경 안정이라는 현실적 목적을 기반으로 긴밀히 이루어졌다.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는 동시에 자국의 질서 안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이는 제국의 동방 외교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전략적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조지아와의 외교는 정교회를 매개로 한 종교적 연대와 캅카스의 지배권을 둘러싼 정치적 긴장이 교차하는 구조 속에서 전개되었다. 조지아는 기독교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수용한 국가로서, 중세 초부터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수용하고, 동방 정교회의 교의 체계를 따르는 교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로 인해 조지아는 교리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와 일치된 신앙 노선을 유지하였고, 이는 양국 외교에서 중요한 공통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일관되게 자국의 독립성과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때때로 이러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외교적 압박이나 군사적 대응을 시도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의 통치 시기에는 조지아와의 군사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는 제국이 캅카스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고자 한 일련의 전략적 조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지아는 이에 맞서 자국 영토를 방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전면적인 적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외교적 조율을 통해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다. 제국은 조지아의 독립적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으며, 조지아 역시 제국과의 종교적 유대와 문화적 연계성을 의식하여 일정 수준의 우호 외교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로마 제국이 분열되고, 트라페준타 제국 등 후계 국가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더욱 뚜렷해졌다. 이 시기 조지아 왕국은 흑해 남동 연안에 위치한 트라페준타 제국을 보호국화하면서, 동방 정교권 내에서의 영향력을 자주적으로 행사하였다. 조지아의 이러한 외교는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계와 서방 십자군 사이에서 흔들릴 때, 동방 기독교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자국 중심의 전략이었다.
문화적 외교 또한 조지아와 동로마 사이의 중요한 축이었다. 조지아는 수도원 제도, 교회 건축, 성화 제작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동로마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는 조지아 정교회가 동로마 정교회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자국 고유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조지아어 문헌의 체계화와 성경 번역, 교부 문헌의 수용 과정에서 동로마의 신학 전통은 조지아 내 학문적·종교적 담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조지아는 이를 자국 문화로 융합시켜 독자적 종교 문명을 구축하였다.
결국,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 사이의 외교는 종교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치적 주권을 둘러싼 갈등과 문화적 상호 교류가 동시에 전개된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조지아는 정교회의 교리를 공유하며 제국과 외교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한편, 자국의 정치적 독립성과 외교적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연하고 전략적인 외교를 구사하였다.
또한 고대 악숨 왕국 사이의 외교는 종교적 연대와 전략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전개된 장거리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티오피아는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국가로, 독자적인 전통을 지닌 터와흐도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으며, 이는 동방 단성론 교회의 계통에 속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유사성은 두 문명이 서로를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양국 간의 초기 외교는 종교적 일치감 속에서 형성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특히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반도 남부와 아프리카 동해안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악숨 왕국을 전략적 협력자로 간주하였다. 이는 단지 해상 교역의 안정성 확보 차원을 넘어,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충돌의 대응 전략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6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남단에 자리 잡았던 힘야르 왕국은 유대교를 국교로 채택하였고, 이로 인해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며, 에티오피아 측에 군사 개입을 요청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이에 응하여 홍해를 건너 힘야르를 공격하였고, 결과적으로 기독교 중심의 질서를 복원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와 에티오피아가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며 실질적인 외교적 협력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는 곧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7세기 초부터 이슬람이 아라비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홍해에 대한 해상 통제권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에티오피아 역시 홍해 연안의 항구와 무역로에서 밀려나면서 국제적 교류의 폭이 축소되었고, 양국 간의 직접적 접촉은 점차 희박해졌다.
이슬람의 등장 이후에도 에티오피아는 독립된 기독교 왕국으로 존속하였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는 해상로 단절, 중개 무역의 붕괴, 지리적 고립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양국은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실질적인 외교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종합하면, 동로마 제국과 에티오피아 사이의 외교는 초기에는 종교적 유대와 정치적 전략의 일치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으나, 해상 교통망과 정치 질서의 변화로 인해 단절된 특수한 외교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양국은 각기 다른 대륙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기독교권의 일원으로서 종교와 정치의 틀 속에서 일시적으로 강력한 외교적 협력을 이룬 바 있으며, 이는 고대 후반과 중세 초기의 기독교 세계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비슬라브 계열의 동방 기독교권 국가들과 복합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유목권, 슬라브권에서 보여준 유연한 외교술의 연장아라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종교적 유사성과 차이를 모두 지닌 채로 동로마 제국과 지속적인 정치·군사적 접촉을 이어갔으며,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협력하였다. 제국은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국의 방위를 강화하고,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외교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한 종교적 일치가 아닌, 정치적 이익과 문화적 접점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방 기독교권이 제국의 동쪽 외교에서 중요한 축을 이뤘음을 보여준다.
8.6. 그 외의 기타[편집]
8.6.1. 십자군 국가[편집]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국가들 간의 외교 관계는 단순한 동맹이나 적대의 구도로 설명될 수 없으며, 시기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전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생존 전략과 십자군 세력의 영토 확장 야망이 얽혀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서방 세계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받아 이슬람 세력의 압박을 완화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반면 서방의 십자군은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명분 아래 군사적 자율성과 새로운 봉건적 질서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이한 목표는 외교적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방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 배경은 셀주크 튀르크의 급격한 세력 팽창에 있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군에 대패하면서,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제국의 군사적 기반 자체가 붕괴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서방의 군사적 자원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으며, 이러한 절박한 배경 속에서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서방의 기사들이 제국의 봉신으로서 복무하기를 기대하며, 일정한 지휘 체계 아래에서 동방 영토를 탈환하고 이를 제국에 귀속시키는 방식의 협력을 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서방 기사들의 인식과는 명백히 달랐다. 서방의 귀족들과 기사들은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봉신 서약이 아닌, 일종의 명분 제공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로마 교황청의 축복을 받은 독자적 군사 조직으로서 행동하려 하였다. 제1차 십자군은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였고,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대의를 내세워 군사 행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사이에는 시작부터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외교적 긴장의 기저를 형성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조심스럽게 이들과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는 십자군 지휘자들에게 과거 동로마 제국이 상실한 영토를 정복하면 이를 제국에 돌려줄 것을 조건으로 물자와 항로를 제공하였고, 다수의 십자군 지휘자들은 제국 황제에게 봉신 서약을 하였다. 이 협약은 원칙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나, 실제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서약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십자군은 니케아와 안티오키아, 에데사 등 셀주크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을 점령하며, 그 과정에서 일부 영토를 제국에 반환하였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이름으로 봉건 국가들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에데사 백국이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제국의 영토를 점유한 상태로 자치적 정권을 형성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배신이나 다름없었고, 제국의 전통적 영토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십자군의 군사적 활동은 단순히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넘어, 제국의 행정 기반이 복구되지 않은 변방에서 독자적 지배 구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봉건 사회를 형성하며 제국의 전통적인 관료 체계와는 다른 서방식 군사 영주제를 도입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통치 이념과 충돌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십자군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영토와 권위를 잠식하는 세력으로 십자군을 경계하게 되며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외교적 갈등은 안티오키아 공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중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지휘자들 사이에는 정복한 옛 제국 영토를 제국에 반환한다는 합의가 있었고, 이에는 안티오키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098년 보에몽 1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뒤, 그는 해당 도시에 대한 동로마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독립 공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안티오키아는 제국의 외교 질서에서 이탈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를 군사적 침공보다는 외교적 복속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보에몽이 점령한 안티오키아를 명백한 제국 영토로 간주하며, 그의 독립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적 항의와 경고를 수차례 전달하였다. 그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이탈리아 원정 중이던 보에몽과 직접적인 외교 교섭을 진행하였고, 1108년 데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자신은 그 영토를 제국의 봉신 자격으로 통치하겠다는 데 동의하였다. 또한 그는 제국에 매년 조공을 납부하고, 동로마 황제의 요청 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실질적 이행 없이 형식에 그쳤고, 보에몽 사후 그의 후계자들은 동로마의 종주권을 다시 거부하였다.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외교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는 1137년 안티오키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한 뒤, 그 통치자 레몽 드 푸아티에와의 외교 협상을 통해 다시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공국에서 제국의 깃발을 게양하게 하고, 레몽에게 공식 봉신 서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안니스의 죽음 이후 제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공국은 다시 독립적 입장으로 회귀하였다.
마누일 1세 역시 안티오키아에 대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다각적인 외교 전략을 펼쳤다. 그는 공국 내부의 귀족 분열을 이용하여 정치적 개입을 시도하였고, 1159년에는 안티오키아 군주 레몽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방문하여 황제에게 봉신 서약을 하도록 만들었다. 황제는 이에 대한 대가로 안티오키아에 대한 제국의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였으며, 공식적인 조공 및 서신 교환 체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마누엘 사후 제국의 대외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이러한 봉신 관계는 다시 무력화되었고, 공국은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에데사 백국과의 외교 관계는 안티오키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간단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에데사를 제국 영토로 복귀시키려는 외교적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에데사 건국 시기부터 실질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로 인해 양측 간의 공식 외교 관계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1144년 셀주크계 지휘관 우르바크에 의해 에데사가 함락된 이후, 제국은 군사 개입은 물론 외교적 대응조차 제한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이는 곧 에데사 백국에 대한 종주권 포기와도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예루살렘 왕국과의 관계는 보다 복합적인 외교 양상을 보였다.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왕국과의 연합 가능성을 꾸준히 탐색하였다. 특히 마누엘 1세 시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예루살렘과의 군사 동맹이 추진되었다. 마누엘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아말릭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양측은 공동 군사 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된 예루살렘 측 사절단은 제국 황제에게 예의를 갖춘 공식 경례를 진행하였고, 제국은 이에 대해 각종 선물과 조공 면제 등의 외교적 호의를 보였다. 다만 이러한 동맹은 일시적인 실용 외교에 기반한 것으로, 장기적이고 제도화된 외교 체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트리폴리 백국과는 별다른 외교 사료가 남아 있지 않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 지역과의 관계에 있어 별다른 개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제국의 전략적 이익과 거리가 있었던 탓이 크며, 그만큼 상호 교섭도 미약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제2차 십자군 때 다시 한 번 서방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콘스탄티노스 7세 시절에는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대규모 십자군을 이끌고 제국을 경유하였으며, 이들은 제국의 행정력과 식량 보급을 기대하였으나, 제국 측은 이들의 자의적인 행동을 경계하였다. 제국은 십자군이 자신의 영토를 훼손하거나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심을 높였고, 이는 상호 간의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결국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의 대참사로 이어졌다. 원래 이집트를 공격할 계획이었던 십자군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의 조종과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게 되었고, 1204년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외교 갈등을 넘어선 제국의 붕괴로 직결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타 제국 등 여러 잔존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로써 동로마와 십자군 세력 간의 관계는 극단적 파국에 이르렀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은 재건되었지만, 그 위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고, 십자군 국가들과의 관계 역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 교회 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교황청은 제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동로마 제국이 서방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 배경은 셀주크 튀르크의 급격한 세력 팽창에 있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군에 대패하면서,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제국의 군사적 기반 자체가 붕괴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서방의 군사적 자원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으며, 이러한 절박한 배경 속에서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서방의 기사들이 제국의 봉신으로서 복무하기를 기대하며, 일정한 지휘 체계 아래에서 동방 영토를 탈환하고 이를 제국에 귀속시키는 방식의 협력을 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서방 기사들의 인식과는 명백히 달랐다. 서방의 귀족들과 기사들은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봉신 서약이 아닌, 일종의 명분 제공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로마 교황청의 축복을 받은 독자적 군사 조직으로서 행동하려 하였다. 제1차 십자군은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였고,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대의를 내세워 군사 행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사이에는 시작부터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외교적 긴장의 기저를 형성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조심스럽게 이들과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는 십자군 지휘자들에게 과거 동로마 제국이 상실한 영토를 정복하면 이를 제국에 돌려줄 것을 조건으로 물자와 항로를 제공하였고, 다수의 십자군 지휘자들은 제국 황제에게 봉신 서약을 하였다. 이 협약은 원칙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나, 실제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서약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십자군은 니케아와 안티오키아, 에데사 등 셀주크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을 점령하며, 그 과정에서 일부 영토를 제국에 반환하였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이름으로 봉건 국가들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에데사 백국이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제국의 영토를 점유한 상태로 자치적 정권을 형성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배신이나 다름없었고, 제국의 전통적 영토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십자군의 군사적 활동은 단순히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넘어, 제국의 행정 기반이 복구되지 않은 변방에서 독자적 지배 구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봉건 사회를 형성하며 제국의 전통적인 관료 체계와는 다른 서방식 군사 영주제를 도입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통치 이념과 충돌하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십자군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영토와 권위를 잠식하는 세력으로 십자군을 경계하게 되며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외교적 갈등은 안티오키아 공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중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지휘자들 사이에는 정복한 옛 제국 영토를 제국에 반환한다는 합의가 있었고, 이에는 안티오키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098년 보에몽 1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뒤, 그는 해당 도시에 대한 동로마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독립 공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안티오키아는 제국의 외교 질서에서 이탈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를 군사적 침공보다는 외교적 복속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보에몽이 점령한 안티오키아를 명백한 제국 영토로 간주하며, 그의 독립 선언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적 항의와 경고를 수차례 전달하였다. 그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이탈리아 원정 중이던 보에몽과 직접적인 외교 교섭을 진행하였고, 1108년 데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자신은 그 영토를 제국의 봉신 자격으로 통치하겠다는 데 동의하였다. 또한 그는 제국에 매년 조공을 납부하고, 동로마 황제의 요청 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실질적 이행 없이 형식에 그쳤고, 보에몽 사후 그의 후계자들은 동로마의 종주권을 다시 거부하였다.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외교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는 1137년 안티오키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한 뒤, 그 통치자 레몽 드 푸아티에와의 외교 협상을 통해 다시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공국에서 제국의 깃발을 게양하게 하고, 레몽에게 공식 봉신 서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안니스의 죽음 이후 제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공국은 다시 독립적 입장으로 회귀하였다.
마누일 1세 역시 안티오키아에 대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다각적인 외교 전략을 펼쳤다. 그는 공국 내부의 귀족 분열을 이용하여 정치적 개입을 시도하였고, 1159년에는 안티오키아 군주 레몽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방문하여 황제에게 봉신 서약을 하도록 만들었다. 황제는 이에 대한 대가로 안티오키아에 대한 제국의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였으며, 공식적인 조공 및 서신 교환 체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마누엘 사후 제국의 대외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이러한 봉신 관계는 다시 무력화되었고, 공국은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에데사 백국과의 외교 관계는 안티오키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간단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에데사를 제국 영토로 복귀시키려는 외교적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에데사 건국 시기부터 실질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로 인해 양측 간의 공식 외교 관계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1144년 셀주크계 지휘관 우르바크에 의해 에데사가 함락된 이후, 제국은 군사 개입은 물론 외교적 대응조차 제한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이는 곧 에데사 백국에 대한 종주권 포기와도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예루살렘 왕국과의 관계는 보다 복합적인 외교 양상을 보였다.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왕국과의 연합 가능성을 꾸준히 탐색하였다. 특히 마누엘 1세 시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예루살렘과의 군사 동맹이 추진되었다. 마누엘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아말릭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양측은 공동 군사 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된 예루살렘 측 사절단은 제국 황제에게 예의를 갖춘 공식 경례를 진행하였고, 제국은 이에 대해 각종 선물과 조공 면제 등의 외교적 호의를 보였다. 다만 이러한 동맹은 일시적인 실용 외교에 기반한 것으로, 장기적이고 제도화된 외교 체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트리폴리 백국과는 별다른 외교 사료가 남아 있지 않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 지역과의 관계에 있어 별다른 개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제국의 전략적 이익과 거리가 있었던 탓이 크며, 그만큼 상호 교섭도 미약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제2차 십자군 때 다시 한 번 서방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콘스탄티노스 7세 시절에는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대규모 십자군을 이끌고 제국을 경유하였으며, 이들은 제국의 행정력과 식량 보급을 기대하였으나, 제국 측은 이들의 자의적인 행동을 경계하였다. 제국은 십자군이 자신의 영토를 훼손하거나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심을 높였고, 이는 상호 간의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결국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의 대참사로 이어졌다. 원래 이집트를 공격할 계획이었던 십자군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의 조종과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게 되었고, 1204년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외교 갈등을 넘어선 제국의 붕괴로 직결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타 제국 등 여러 잔존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로써 동로마와 십자군 세력 간의 관계는 극단적 파국에 이르렀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은 재건되었지만, 그 위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고, 십자군 국가들과의 관계 역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 교회 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교황청은 제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8.6.2. 인도[편집]
8.6.3. 중국[편집]
9. 인문 환경[편집]
9.1. 민족[편집]
동로마 제국은 천 년 이상 존속한 다민족 국가로서, 그리스인을 중심으로 여러 민족이 공존하였다. 고대 로마 제국의 동부에 뿌리를 둔 이 나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르메니아인, 시리아인(아시리아인), 이집트인(콥트인), 슬라브족, 불가리아인, 라틴인, 유대인, 고트족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을 포괄하게 되었다. 비잔티움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일컬으며 하나의 제국 시민 정체성을 가졌지만, 그 내부에는 여전히 각 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 종교 전통이 존재했고, 시기와 상황에 따라 제국 사회에서 각기 다른 역할과 지위를 차지하였다. 아래에서는 동로마 제국 전 시기에 걸쳐 제국 영토 내에 실제 거주한 주요 민족들의 기원과 정착 경위, 거주 지역, 행정·군사·경제·종교 분야에서의 역할과 위상, 제국의 정책 및 차별 여부, 그리고 역사적 변화를 민족별로 살펴본다.
9.1.1. 그리스인[편집]
그리스인은 동로마 제국의 구성과 정체성에 가장 깊이 뿌리내린 집단으로, 단순한 다수 민족 이상의 의미를 지닌 주축이자 문화적 중심이었다. 이들은 고전 그리스 문명을 계승하고 헬레니즘 세계의 전통을 유지한 집단으로서, 제국이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에게 해 연안과 소아시아 서부, 그리고 발칸 반도 남부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고, 특히 4세기 말에서 5세기에 이르는 과도기를 거치며, 이들은 동쪽 제국에서 문화적, 언어적 기반을 점차 주도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건설된 이래 그 일대는 그리스 문화의 심장부로 자리 잡았으며, 제국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학문을 주도하는 핵심 공간이 되었다.
이들 그리스인은 단순히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동방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원래 라틴어를 기반으로 운영되던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는 7세기 헤라클리오스 황제 시대에 그리스어를 공식 행정 언어로 채택하면서 근본적인 전환을 겪었고, 이로써 제국은 실질적으로 그리스어 문화권 제국으로 재편되었다. 그리스어는 단순한 일상어를 넘어, 제국의 법률과 행정 문서, 신학 논문과 철학 저술의 공통 언어로 기능했으며, 이는 제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그리스인은 중앙정부의 고위 관직과 테마 행정 조직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출했다. 이들은 문서 행정, 세금 징수, 법률 집행 등에서 전문성을 지녔으며, 유년기부터 정규 교육을 받고 문법과 수사학, 철학에 능통한 계층으로 성장하였다. 교회 조직에서도 그리스인은 지배적 존재로서,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의 다수가 그리스계 인물들이었고, 성화 제작과 성서 해석,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은 교육과 종교적 기반은 곧 제국의 학문 활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지식 계층으로서의 그리스인은 고대 철학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신학에 접목한 해석은 동로마 신학의 기틀이 되었으며, 네 명의 대교부와 같은 인물들은 이 전통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수도원에서는 필사본을 보존하고 고전 문헌을 해석하며, 정체성과 문화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 활동이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도 그리스인들은 제국의 생명줄이었다. 항구 도시와 시장 중심지를 장악한 이들은 해상 무역, 수공업, 직물 제작, 금속 세공, 도자기 생산 등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상인들은 이집트, 시리아, 키프로스, 크레타, 에페수스, 테살로니카 등 제국 각지의 도시망을 따라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는 제국 경제의 안정과 재정 기반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다양한 상품과 사람이 모이는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그 중심에는 그리스 상인과 장인이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그리스인은 제국의 미적 기준과 문예 양식을 형성하였다. 제국의 궁정 문화와 시민 사회에서는 고전 그리스 문학에 대한 지식이 교양의 핵심으로 여겨졌으며, 공공 연설, 교육, 기록 문서, 시가와 연극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문화적 요소가 심층적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건축과 미술에서도 비잔틴様式으로 알려진 양식은 그리스 고전양식을 변용한 형태로 발전하여, 교회 건축, 모자이크 예술, 성상 제작 등에서 그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로마인’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국적 개념을 넘어 정치적 귀속과 문화적 자긍심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정체성은 점차 그리스어 문화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경계는 흐려졌다. 결국 제국 후기에는 주민들이 스스로를 ‘헬레네스’, 즉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로 자각하는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는 고전적 그리스 정체성이 다시 부상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에서의 그리스인은 여전히 로마의 후계자라는 자의식을 보존하며, 문화적 우월성과 정치적 중심성을 바탕으로 다른 민족 집단을 흡수하거나 동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르메니아인, 슬라브계 주민, 시리아계와 콥트인, 이베리아계 귀족들이 제국에 편입될 때, 그들이 받아들인 제국 정체성은 대부분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라틴어의 유산을 일부 보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그리스인이 지배하고 주도한 헬레니즘 로마 제국이었으며,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지속된 복합 문명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인은 단순한 민족 범주를 넘어서, 동로마 제국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들 그리스인은 단순히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동방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원래 라틴어를 기반으로 운영되던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는 7세기 헤라클리오스 황제 시대에 그리스어를 공식 행정 언어로 채택하면서 근본적인 전환을 겪었고, 이로써 제국은 실질적으로 그리스어 문화권 제국으로 재편되었다. 그리스어는 단순한 일상어를 넘어, 제국의 법률과 행정 문서, 신학 논문과 철학 저술의 공통 언어로 기능했으며, 이는 제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그리스인은 중앙정부의 고위 관직과 테마 행정 조직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출했다. 이들은 문서 행정, 세금 징수, 법률 집행 등에서 전문성을 지녔으며, 유년기부터 정규 교육을 받고 문법과 수사학, 철학에 능통한 계층으로 성장하였다. 교회 조직에서도 그리스인은 지배적 존재로서,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의 다수가 그리스계 인물들이었고, 성화 제작과 성서 해석,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은 교육과 종교적 기반은 곧 제국의 학문 활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지식 계층으로서의 그리스인은 고대 철학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신학에 접목한 해석은 동로마 신학의 기틀이 되었으며, 네 명의 대교부와 같은 인물들은 이 전통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수도원에서는 필사본을 보존하고 고전 문헌을 해석하며, 정체성과 문화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 활동이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도 그리스인들은 제국의 생명줄이었다. 항구 도시와 시장 중심지를 장악한 이들은 해상 무역, 수공업, 직물 제작, 금속 세공, 도자기 생산 등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상인들은 이집트, 시리아, 키프로스, 크레타, 에페수스, 테살로니카 등 제국 각지의 도시망을 따라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는 제국 경제의 안정과 재정 기반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다양한 상품과 사람이 모이는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그 중심에는 그리스 상인과 장인이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그리스인은 제국의 미적 기준과 문예 양식을 형성하였다. 제국의 궁정 문화와 시민 사회에서는 고전 그리스 문학에 대한 지식이 교양의 핵심으로 여겨졌으며, 공공 연설, 교육, 기록 문서, 시가와 연극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문화적 요소가 심층적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건축과 미술에서도 비잔틴様式으로 알려진 양식은 그리스 고전양식을 변용한 형태로 발전하여, 교회 건축, 모자이크 예술, 성상 제작 등에서 그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로마인’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국적 개념을 넘어 정치적 귀속과 문화적 자긍심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정체성은 점차 그리스어 문화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경계는 흐려졌다. 결국 제국 후기에는 주민들이 스스로를 ‘헬레네스’, 즉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로 자각하는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는 고전적 그리스 정체성이 다시 부상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에서의 그리스인은 여전히 로마의 후계자라는 자의식을 보존하며, 문화적 우월성과 정치적 중심성을 바탕으로 다른 민족 집단을 흡수하거나 동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르메니아인, 슬라브계 주민, 시리아계와 콥트인, 이베리아계 귀족들이 제국에 편입될 때, 그들이 받아들인 제국 정체성은 대부분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라틴어의 유산을 일부 보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그리스인이 지배하고 주도한 헬레니즘 로마 제국이었으며,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지속된 복합 문명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인은 단순한 민족 범주를 넘어서, 동로마 제국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9.1.2. 트라키아인과 일리리아인[편집]
동로마 제국이 형성되던 시기, 발칸 반도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토착 집단인 트라키아인과 일리리아인들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각각 발칸 산맥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에 널리 분포하며, 로마 제국의 통치가 확립된 이후에도 일정한 사회적, 문화적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트라키아인과 일리리아인은 로마 제국의 장기적인 군사적·행정적 통합 속에서 점차 라틴어와 로마 문화에 동화되어 갔지만, 그들의 지역 정체성은 제국 후기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동로마 제국 초기의 군사 및 정치 엘리트층에서 이들 출신 인물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한 현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은 모두 로마 제국 시대에 속주로 편입되어 있었으며,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에는 더욱 세분화된 속주 체계로 개편되었다. 트라키아는 아드리아노폴리스와 필리포폴리스 일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일리리쿰은 현재의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일부에 걸쳐 있었다. 이 지역들은 로마의 주요 병참 기지이자 방위선으로 기능하였으며, 그에 따라 현지 주민들의 군사적 역할도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일리리아인은 제국의 북방 방어선인 다뉴브 강 유역을 방어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 초기 군제에서 일리리아 지방은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고, 이곳 출신의 병사들과 장군들은 다뉴브 전선과 발칸 방면 방어에 있어 중추적 존재였다. 이들은 종종 제국의 집정관, 군사령관 등 고위직으로 진출하였으며, 일부는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대표적으로 유스티누스 1세는 다르다니아 출신의 농민 가문에서 태어나 군 경력을 통해 황제에 즉위한 인물이며, 그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역시 같은 지방 출신으로, 동로마 제국의 제1차 전성기를 이끈 대표적인 황제이다. 이들은 정규 교육을 통해 라틴어와 법률, 군사 지식을 익혔으며, 그 출신 배경에도 불구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력 중심부로 진입하였다. 제국의 역사기록자들은 이들의 출신을 언급할 때 “일리리아인” 또는 “트라키아인”으로 구분하였고, 이는 이들이 단순한 지리적 출신을 넘어 문화적 배경과 민족적 뿌리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의 토착민들은 농경, 목축, 그리고 군사 복무를 중심으로 한 삶을 이어갔으며, 특히 경작지 주변의 산악지대와 강 유역을 따라 촘촘히 거주하였다. 이들은 로마화된 토지 소유제 속에서도 일정한 자율적 공동체 조직을 유지하였고, 때로는 현지 도시 자치와 병합되어 제국의 지방 행정에 기여하였다. 그들의 군사적 조직력과 충성도는 동로마 제국의 변방 안정화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며, 군단 재편과 함께 다수의 부대가 이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6세기 중반 이후, 발칸 반도에는 급격한 외부 변화가 일어났다. 북방에서 남하한 슬라브계 집단과 중앙아시아에서 진출한 아바르계 유목 세력이 발칸 북부와 내륙 전역에 걸쳐 침입을 감행하면서, 기존의 트라키아·일리리아계 토착민들은 점차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주민들이 해안가 요새 도시나 남쪽 헬라스 지방으로 피신하였고, 일부는 침입자들과 융합되어 새로운 인구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지역의 인구 구성뿐 아니라 문화적 연속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 전반기에는 기존의 트라키아·일리리아 정체성이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로마화된 주민들 중 상당수는 헬라스화 또는 슬라브화 과정을 거쳐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특히 일리리아계 후손들은 이후 알바니아인의 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알바니아인은 일리리아인의 후예라는 학설이 존재하며, 이들은 서부 발칸 산악지대에 남아 지속적으로 독자적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였다. 동로마 제국 후기에는 알바니아인들이 에페이로스와 그리스 북서부 일대까지 분포하며, 고산지대를 중심으로 목축과 자치적 부족 생활을 이어갔다. 제국의 여러 황제들은 이들을 국경 지대의 개척민으로 받아들였으며, 한편으로는 병력으로 활용하거나 반란 시 진압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알바니아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중부 그리스 일부에까지 정착하였으며, 용병이나 소작농 계층으로서 지역 사회에 통합되었다. 비잔틴 사료에서는 이들을 '알바노이' 또는 '아르바니타이'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이 형성한 공동체는 이후 오스만 제국기에 이르러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유지하였다.
결과적으로 트라키아인과 일리리아인은 동로마 제국 형성과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군사적, 정치적, 인적 자원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방식으로 후대 민족 집단의 기반이 되었다. 비록 이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은 중세 후반기에 이르러 희미해졌으나, 동로마 제국 초기의 안정과 방어를 이끈 주역이자 발칸 반도에서 로마적 전통을 계승한 핵심 집단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은 모두 로마 제국 시대에 속주로 편입되어 있었으며,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에는 더욱 세분화된 속주 체계로 개편되었다. 트라키아는 아드리아노폴리스와 필리포폴리스 일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일리리쿰은 현재의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일부에 걸쳐 있었다. 이 지역들은 로마의 주요 병참 기지이자 방위선으로 기능하였으며, 그에 따라 현지 주민들의 군사적 역할도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일리리아인은 제국의 북방 방어선인 다뉴브 강 유역을 방어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 초기 군제에서 일리리아 지방은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고, 이곳 출신의 병사들과 장군들은 다뉴브 전선과 발칸 방면 방어에 있어 중추적 존재였다. 이들은 종종 제국의 집정관, 군사령관 등 고위직으로 진출하였으며, 일부는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대표적으로 유스티누스 1세는 다르다니아 출신의 농민 가문에서 태어나 군 경력을 통해 황제에 즉위한 인물이며, 그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역시 같은 지방 출신으로, 동로마 제국의 제1차 전성기를 이끈 대표적인 황제이다. 이들은 정규 교육을 통해 라틴어와 법률, 군사 지식을 익혔으며, 그 출신 배경에도 불구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력 중심부로 진입하였다. 제국의 역사기록자들은 이들의 출신을 언급할 때 “일리리아인” 또는 “트라키아인”으로 구분하였고, 이는 이들이 단순한 지리적 출신을 넘어 문화적 배경과 민족적 뿌리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의 토착민들은 농경, 목축, 그리고 군사 복무를 중심으로 한 삶을 이어갔으며, 특히 경작지 주변의 산악지대와 강 유역을 따라 촘촘히 거주하였다. 이들은 로마화된 토지 소유제 속에서도 일정한 자율적 공동체 조직을 유지하였고, 때로는 현지 도시 자치와 병합되어 제국의 지방 행정에 기여하였다. 그들의 군사적 조직력과 충성도는 동로마 제국의 변방 안정화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며, 군단 재편과 함께 다수의 부대가 이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6세기 중반 이후, 발칸 반도에는 급격한 외부 변화가 일어났다. 북방에서 남하한 슬라브계 집단과 중앙아시아에서 진출한 아바르계 유목 세력이 발칸 북부와 내륙 전역에 걸쳐 침입을 감행하면서, 기존의 트라키아·일리리아계 토착민들은 점차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주민들이 해안가 요새 도시나 남쪽 헬라스 지방으로 피신하였고, 일부는 침입자들과 융합되어 새로운 인구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지역의 인구 구성뿐 아니라 문화적 연속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 전반기에는 기존의 트라키아·일리리아 정체성이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로마화된 주민들 중 상당수는 헬라스화 또는 슬라브화 과정을 거쳐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특히 일리리아계 후손들은 이후 알바니아인의 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알바니아인은 일리리아인의 후예라는 학설이 존재하며, 이들은 서부 발칸 산악지대에 남아 지속적으로 독자적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였다. 동로마 제국 후기에는 알바니아인들이 에페이로스와 그리스 북서부 일대까지 분포하며, 고산지대를 중심으로 목축과 자치적 부족 생활을 이어갔다. 제국의 여러 황제들은 이들을 국경 지대의 개척민으로 받아들였으며, 한편으로는 병력으로 활용하거나 반란 시 진압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알바니아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중부 그리스 일부에까지 정착하였으며, 용병이나 소작농 계층으로서 지역 사회에 통합되었다. 비잔틴 사료에서는 이들을 '알바노이' 또는 '아르바니타이'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이 형성한 공동체는 이후 오스만 제국기에 이르러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유지하였다.
결과적으로 트라키아인과 일리리아인은 동로마 제국 형성과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군사적, 정치적, 인적 자원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방식으로 후대 민족 집단의 기반이 되었다. 비록 이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은 중세 후반기에 이르러 희미해졌으나, 동로마 제국 초기의 안정과 방어를 이끈 주역이자 발칸 반도에서 로마적 전통을 계승한 핵심 집단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9.1.3. 라틴인[편집]
동로마 제국이 출범한 4세기 후반부터 7세기 초반까지, 제국의 영토는 단순히 동지중해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남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였다. 이들 지역에는 로마 제국의 본토라 할 수 있는 라틴어 사용권이 존재하였으며, 오랜 라틴 문화와 제도 전통을 지닌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언어적으로 라틴어를 구사하고, 법과 행정, 종교 의례에 있어 고전 로마의 틀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었기에, 동방의 그리스어 문화권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녔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 내에서 라틴계 주민, 즉 '라틴인'으로 간주되었으며, 제국 초기에 걸쳐 정치, 행정, 군사, 종교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통합되고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라틴인의 존재가 동로마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부각된 시기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기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 회복을 목표로 하여 서방에서 독립국가 형태로 존속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 서고트 왕국 등을 공격하여, 과거 서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였던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다시 동로마의 통치하에 편입하였다. 이 정복 사업은 6세기 중반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고, 그 결과로 라틴계 주민들이 대거 제국의 지배하로 재통합되었다.
이러한 영토 회복은 단순한 군사적 확장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동로마 제국은 정복 지역의 정치적 안정과 행정 효율성을 위해 새로운 지방 행정체제를 구축하였고, 그 중심에 라틴계 주민과 귀족들을 참여시키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북아프리카에는 카르타고 총독부, 이탈리아에는 라벤나 총독부가 설치되었으며, 양 총독부 모두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긴밀히 연결되면서도, 일정 수준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총독부들은 단순한 행정 단위가 아니라, 현지의 로마 전통 귀족과 교회 세력, 그리고 동방에서 파견된 관료들이 협력하는 구조를 지녔고, 초기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공존하는 이중 언어 행정 체계가 운영되었다.
라틴계 주민들은 이러한 재통합 과정에서 전통적인 로마 시민으로서의 법적 지위와 문화적 정체성을 일정 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고전 라틴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던 옛 로마 귀족 가문과 가톨릭 교회 조직은, 제국 내 그리스 문화권과는 다른 고유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교섭하며 현지 통치를 조율하였고, 군사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재정복 군단에 자원을 제공하거나,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협력하였다. 북아프리카의 항구 도시들과 이탈리아 남부 해안지대는 동로마 제국의 곡물 수입과 지중해 무역에 크게 기여하여 경제적 통합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측면에서 라틴계 주민들과 제국 중심부 간의 긴장은 꾸준히 존재하였다. 라틴인들은 주로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전통, 즉 서방교회를 따랐으며, 동방교회와는 예전부터 의례와 교회 권위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제정된 신학적 원칙에는 동의하였으나, 실질적인 교회 운영과 주교 임명, 교황의 권한 문제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청은 서로 다른 노선을 취하였다. 특히 제국 정부는 동방에서의 종교적 통일을 도모하면서도, 서방 교회의 영향력이 정복지에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였고, 이에 따라 일부 지역에서는 종교적 긴장이 정치적 분열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라틴계 공동체는 제국의 영토 축소와 함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639년부터 본격화된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며, 698년에는 제국령 카르타고가 함락되어 북아프리카에서의 제국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 과정에서 카르타고 및 주변 지역의 라틴계 주민들은 아랍계 세력이나 베르베르계 주민들과 동화되거나, 해안 항구를 통해 다른 제국 영토로 이주하였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동로마는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맞서 지속적인 방어전을 벌였지만, 8세기 중반까지는 남부의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일부 지역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은 군사 주둔지로 개편되어 '테마' 체계 하에 편성되었으며, 라틴계 주민들은 제국 병사와 관리로 동원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리스어와 동방 행정 제도에 익숙해졌다.
11세기 중반, 시칠리아가 노르만족에게 정복되고, 이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이 제국에서 완전히 분리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본격적으로 라틴계 주민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라틴인의 존재가 제국에서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12세기 무렵부터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이피로스, 펠로폰네소스 등의 항구 도시로 진출하며 새로운 형태의 라틴인 거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주로 경제적 특권을 바탕으로 거주지를 확보하였으며, 제국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세금 면제, 자치 통치 등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동로마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별개의 공동체로 존재하면서 일정한 긴장을 불러왔다.
1182년, 제국 내 반라틴 감정이 폭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라틴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세계 간의 감정적 단절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후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수도 함락과 라틴 제국 수립으로 이어지는 불신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 시점부터 라틴인은 단순한 제국 내 소수민족이 아니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으며, 제국 후기에 이르기까지 라틴계 주민은 외세 침입과 상업적 착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요약하자면, 라틴계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 초기에 로마의 역사적 연속성을 구성하는 한 축으로 기능하였으며, 정복지 통합과 문화 다양성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팽창과 이탈리아 반도의 상실, 라틴 상인들과의 경제적 갈등을 겪으며 점차 주변화되었고, 제국 말기에는 이질적인 외부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한때 제국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고대 로마와 동로마 사이의 매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은 그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간과할 수 없다.
라틴인의 존재가 동로마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부각된 시기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기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 회복을 목표로 하여 서방에서 독립국가 형태로 존속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 서고트 왕국 등을 공격하여, 과거 서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였던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다시 동로마의 통치하에 편입하였다. 이 정복 사업은 6세기 중반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고, 그 결과로 라틴계 주민들이 대거 제국의 지배하로 재통합되었다.
이러한 영토 회복은 단순한 군사적 확장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동로마 제국은 정복 지역의 정치적 안정과 행정 효율성을 위해 새로운 지방 행정체제를 구축하였고, 그 중심에 라틴계 주민과 귀족들을 참여시키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북아프리카에는 카르타고 총독부, 이탈리아에는 라벤나 총독부가 설치되었으며, 양 총독부 모두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긴밀히 연결되면서도, 일정 수준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총독부들은 단순한 행정 단위가 아니라, 현지의 로마 전통 귀족과 교회 세력, 그리고 동방에서 파견된 관료들이 협력하는 구조를 지녔고, 초기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공존하는 이중 언어 행정 체계가 운영되었다.
라틴계 주민들은 이러한 재통합 과정에서 전통적인 로마 시민으로서의 법적 지위와 문화적 정체성을 일정 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고전 라틴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던 옛 로마 귀족 가문과 가톨릭 교회 조직은, 제국 내 그리스 문화권과는 다른 고유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교섭하며 현지 통치를 조율하였고, 군사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재정복 군단에 자원을 제공하거나,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협력하였다. 북아프리카의 항구 도시들과 이탈리아 남부 해안지대는 동로마 제국의 곡물 수입과 지중해 무역에 크게 기여하여 경제적 통합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측면에서 라틴계 주민들과 제국 중심부 간의 긴장은 꾸준히 존재하였다. 라틴인들은 주로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전통, 즉 서방교회를 따랐으며, 동방교회와는 예전부터 의례와 교회 권위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제정된 신학적 원칙에는 동의하였으나, 실질적인 교회 운영과 주교 임명, 교황의 권한 문제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청은 서로 다른 노선을 취하였다. 특히 제국 정부는 동방에서의 종교적 통일을 도모하면서도, 서방 교회의 영향력이 정복지에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였고, 이에 따라 일부 지역에서는 종교적 긴장이 정치적 분열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라틴계 공동체는 제국의 영토 축소와 함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639년부터 본격화된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며, 698년에는 제국령 카르타고가 함락되어 북아프리카에서의 제국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 과정에서 카르타고 및 주변 지역의 라틴계 주민들은 아랍계 세력이나 베르베르계 주민들과 동화되거나, 해안 항구를 통해 다른 제국 영토로 이주하였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동로마는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맞서 지속적인 방어전을 벌였지만, 8세기 중반까지는 남부의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일부 지역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은 군사 주둔지로 개편되어 '테마' 체계 하에 편성되었으며, 라틴계 주민들은 제국 병사와 관리로 동원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리스어와 동방 행정 제도에 익숙해졌다.
11세기 중반, 시칠리아가 노르만족에게 정복되고, 이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이 제국에서 완전히 분리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본격적으로 라틴계 주민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라틴인의 존재가 제국에서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12세기 무렵부터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이피로스, 펠로폰네소스 등의 항구 도시로 진출하며 새로운 형태의 라틴인 거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주로 경제적 특권을 바탕으로 거주지를 확보하였으며, 제국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세금 면제, 자치 통치 등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동로마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별개의 공동체로 존재하면서 일정한 긴장을 불러왔다.
1182년, 제국 내 반라틴 감정이 폭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라틴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세계 간의 감정적 단절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후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수도 함락과 라틴 제국 수립으로 이어지는 불신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 시점부터 라틴인은 단순한 제국 내 소수민족이 아니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으며, 제국 후기에 이르기까지 라틴계 주민은 외세 침입과 상업적 착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요약하자면, 라틴계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 초기에 로마의 역사적 연속성을 구성하는 한 축으로 기능하였으며, 정복지 통합과 문화 다양성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팽창과 이탈리아 반도의 상실, 라틴 상인들과의 경제적 갈등을 겪으며 점차 주변화되었고, 제국 말기에는 이질적인 외부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한때 제국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고대 로마와 동로마 사이의 매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은 그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간과할 수 없다.
9.1.4. 아르메니아인[편집]
아르메니아인은 동로마 제국 전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비그리스계 집단이자, 제국의 군사와 행정, 종교와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이 뿌리내린 인적 기반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외부 민족이 아니라, 제국의 형성과 발전, 쇠퇴의 모든 국면에 걸쳐 다층적으로 작용하며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동로마 내부의 핵심 구성원으로 통합되었다.
아르메니아인의 본거지는 남캅카스 산맥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아르메니아 고원이며, 이 지역은 고대부터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완충지로 작용하였다. 기원후 387년,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에 체결된 협약을 통해 아르메니아는 두 제국 사이에서 분할 통치되었고, 서부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인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동로마 제국의 신민이 되었으며, 그들은 이후 수세기 동안 정치적 동요와 침략, 종교 분열 등의 역사적 충격 속에서도 제국 내에 깊이 정착하였다.
아르메니아인의 대규모 이주는 7세기 중반 사산조 페르시아의 몰락과 이슬람 세력의 남캅카스 침공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촉진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빠른 확장으로 아르메니아 고지대가 군사적 혼란에 빠지자, 수많은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과 자유민, 심지어 수도승들까지 제국령 카파도키아, 포니수스, 킬리키아 등지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권과의 접경지에 정착하여 기존의 아르메니아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제국 문화와 행정 체제에 점차 융합되었다.
아르메니아인은 무엇보다 군사 분야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들은 고대부터 중기병 전술과 고산 지형에서의 보병 전투에 능했으며, 이러한 특성은 제국의 국경 방어와 정복 사업에서 귀중한 자산으로 간주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시기에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원정군 내에서 아르메니아 병사들이 핵심 부대 역할을 수행하였고, 북아프리카 및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서 『전쟁사』를 남긴 프로코피우스는 반달 왕국과 동고트 왕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아르메니아 병사들의 용맹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였다.
7세기 중엽 테마 제도가 형성되면서, 아르메니아인은 그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특히 아르메니아콘 테마는 명목상 소아시아 북동부에 설치되었으나, 실제로는 광범위한 아르메니아계 병력의 조직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테마는 통상 2만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산되며, 구성원 대부분이 아르메니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지역 방어는 물론 제국 전역에 걸친 전쟁에 투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계 군사 지휘관들이 제국의 전략적 요충지에 대거 배치되었다. 나아가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들은 시위대장, 원로원 의원, 군사령관 등 제국 정규군의 상층부를 구성하게 되었고, 일부는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아르메니아 혈통을 지녔거나 그 출신이 강하게 의심되는 인물들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헤라클리우스 1세는 카르타고 총독부의 아르메니아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제국의 재조직과 시리아 방면 전쟁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바실리오스 1세는 농민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그 가계는 아르메니아계 정복 귀족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그의 후계자들이 이룩한 마케도니아 왕조는 사실상 아르메니아계 왕조로 간주되기도 한다. 요안니스 1세 치미스케스 역시 아르메니아계 귀족 출신으로, 발칸 전선에서의 공훈과 제국 내 권력 투쟁을 거쳐 황위에 오른 인물이다.
이처럼 아르메니아계 인물들이 제국 지배층에 지속적으로 진입하였고, 특히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고위 귀족의 약 10~15퍼센트가 명시적으로 아르메니아계였다. 이름과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가문까지 포함할 경우, 그 비율은 더욱 높아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단순한 병력 공급 차원을 넘어, 아르메니아인이 동로마 지배 엘리트층에서 사실상 두 번째로 큰 민족적 기반이었음을 의미한다.
군사 외에도, 아르메니아인은 제국의 행정과 궁정 문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귀족 출신 아르메니아인들은 속주의 총독, 재무관, 법관, 외교관 등으로 활약하였고, 특히 제국 동부 접경 지역에서의 민정과 군정을 동시에 수행하는 복합 관직에서 두드러졌다. 도시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 장인과 상인들이 건축, 금속세공, 직물 등 수공업에 종사하며 제국 경제에 기여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니케아, 트라페준타 등 주요 도시에는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이 형성되어 상업과 군사 용역의 중심이 되었다.
종교적 측면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은 제국 중심부와 일정한 긴장을 유지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통 신앙으로 확립된 양성론을 아르메니아 교회가 거부하고,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유지하면서, 제국 정교회와 신학적 차이를 보였다. 이는 동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일종의 분열 요인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따라 여러 황제들이 칼케돈파 수용을 유도하거나 아르메니아 교회를 제국 교회 체제로 통합하려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아르메니아 교회 내 보수파를 견제하고 개혁파를 지지하며 신앙 통합을 시도하였으며, 바실리오스 1세는 귀족들에게 영지를 하사하여 충성심을 얻는 방식으로 종교적 간극을 보완하려 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마찰은 때때로 반란과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칼케돈 신조 강요에 반발한 아르메니아 지역에서는 몇 차례 봉기와 귀족 반란이 발생하였고, 일부 아르메니아계 지휘관은 종교적 이유로 제국 정부로부터 의심받거나 탄압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인을 철저히 배제하기보다는, 제국 통합의 장기적 전략 속에서 점진적 동화 정책을 선호하였다.
11세기 중반, 동부 아르메니아의 마지막 독립 왕국들이 제국에 흡수되었고, 이로써 아르메니아 지역은 동로마 제국의 직접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셀주크 튀르크의 침입으로 이 지역은 제국의 통제에서 이탈하였으며, 이와 함께 제국 내 아르메니아계 인구 기반도 크게 축소되었다.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여전히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과 관리들이 제국 체계에 참여하였지만, 전반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이전에 비해 다소 약화되었다.
제4차 십자군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에도, 일부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제국의 망명 정부인 니케아 제국, 트라페주스 제국 등지에서 살아남아 군사와 행정에 참여하였다. 특히 아르메니아인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트라페주스, 키프로스, 로도스 등에서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도시 공동체를 유지하였고, 몇몇은 외국 상인과의 교역 중개자 역할도 맡았다.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을 종합하면, 아르메니아인은 단순한 소수민족이 아니라, 제국의 구성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한 핵심 민족 집단이었다. 이들은 고유의 언어와 종교, 전통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동로마 제국 체제 안에 효과적으로 편입되어 제국을 지탱한 실질적인 주역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점에서 아르메니아인은 흔히 “동로마 제국 속의 제2의 민족”이라 불리며, 이는 제국의 다민족성과 복합적 정체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본거지는 남캅카스 산맥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아르메니아 고원이며, 이 지역은 고대부터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완충지로 작용하였다. 기원후 387년,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에 체결된 협약을 통해 아르메니아는 두 제국 사이에서 분할 통치되었고, 서부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인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동로마 제국의 신민이 되었으며, 그들은 이후 수세기 동안 정치적 동요와 침략, 종교 분열 등의 역사적 충격 속에서도 제국 내에 깊이 정착하였다.
아르메니아인의 대규모 이주는 7세기 중반 사산조 페르시아의 몰락과 이슬람 세력의 남캅카스 침공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촉진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빠른 확장으로 아르메니아 고지대가 군사적 혼란에 빠지자, 수많은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과 자유민, 심지어 수도승들까지 제국령 카파도키아, 포니수스, 킬리키아 등지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권과의 접경지에 정착하여 기존의 아르메니아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제국 문화와 행정 체제에 점차 융합되었다.
아르메니아인은 무엇보다 군사 분야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들은 고대부터 중기병 전술과 고산 지형에서의 보병 전투에 능했으며, 이러한 특성은 제국의 국경 방어와 정복 사업에서 귀중한 자산으로 간주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시기에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원정군 내에서 아르메니아 병사들이 핵심 부대 역할을 수행하였고, 북아프리카 및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서 『전쟁사』를 남긴 프로코피우스는 반달 왕국과 동고트 왕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아르메니아 병사들의 용맹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였다.
7세기 중엽 테마 제도가 형성되면서, 아르메니아인은 그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특히 아르메니아콘 테마는 명목상 소아시아 북동부에 설치되었으나, 실제로는 광범위한 아르메니아계 병력의 조직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테마는 통상 2만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산되며, 구성원 대부분이 아르메니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지역 방어는 물론 제국 전역에 걸친 전쟁에 투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계 군사 지휘관들이 제국의 전략적 요충지에 대거 배치되었다. 나아가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들은 시위대장, 원로원 의원, 군사령관 등 제국 정규군의 상층부를 구성하게 되었고, 일부는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아르메니아 혈통을 지녔거나 그 출신이 강하게 의심되는 인물들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헤라클리우스 1세는 카르타고 총독부의 아르메니아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제국의 재조직과 시리아 방면 전쟁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바실리오스 1세는 농민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그 가계는 아르메니아계 정복 귀족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그의 후계자들이 이룩한 마케도니아 왕조는 사실상 아르메니아계 왕조로 간주되기도 한다. 요안니스 1세 치미스케스 역시 아르메니아계 귀족 출신으로, 발칸 전선에서의 공훈과 제국 내 권력 투쟁을 거쳐 황위에 오른 인물이다.
이처럼 아르메니아계 인물들이 제국 지배층에 지속적으로 진입하였고, 특히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고위 귀족의 약 10~15퍼센트가 명시적으로 아르메니아계였다. 이름과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가문까지 포함할 경우, 그 비율은 더욱 높아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단순한 병력 공급 차원을 넘어, 아르메니아인이 동로마 지배 엘리트층에서 사실상 두 번째로 큰 민족적 기반이었음을 의미한다.
군사 외에도, 아르메니아인은 제국의 행정과 궁정 문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귀족 출신 아르메니아인들은 속주의 총독, 재무관, 법관, 외교관 등으로 활약하였고, 특히 제국 동부 접경 지역에서의 민정과 군정을 동시에 수행하는 복합 관직에서 두드러졌다. 도시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 장인과 상인들이 건축, 금속세공, 직물 등 수공업에 종사하며 제국 경제에 기여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니케아, 트라페준타 등 주요 도시에는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이 형성되어 상업과 군사 용역의 중심이 되었다.
종교적 측면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은 제국 중심부와 일정한 긴장을 유지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통 신앙으로 확립된 양성론을 아르메니아 교회가 거부하고,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유지하면서, 제국 정교회와 신학적 차이를 보였다. 이는 동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일종의 분열 요인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따라 여러 황제들이 칼케돈파 수용을 유도하거나 아르메니아 교회를 제국 교회 체제로 통합하려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아르메니아 교회 내 보수파를 견제하고 개혁파를 지지하며 신앙 통합을 시도하였으며, 바실리오스 1세는 귀족들에게 영지를 하사하여 충성심을 얻는 방식으로 종교적 간극을 보완하려 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마찰은 때때로 반란과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칼케돈 신조 강요에 반발한 아르메니아 지역에서는 몇 차례 봉기와 귀족 반란이 발생하였고, 일부 아르메니아계 지휘관은 종교적 이유로 제국 정부로부터 의심받거나 탄압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인을 철저히 배제하기보다는, 제국 통합의 장기적 전략 속에서 점진적 동화 정책을 선호하였다.
11세기 중반, 동부 아르메니아의 마지막 독립 왕국들이 제국에 흡수되었고, 이로써 아르메니아 지역은 동로마 제국의 직접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셀주크 튀르크의 침입으로 이 지역은 제국의 통제에서 이탈하였으며, 이와 함께 제국 내 아르메니아계 인구 기반도 크게 축소되었다.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여전히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과 관리들이 제국 체계에 참여하였지만, 전반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이전에 비해 다소 약화되었다.
제4차 십자군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에도, 일부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제국의 망명 정부인 니케아 제국, 트라페주스 제국 등지에서 살아남아 군사와 행정에 참여하였다. 특히 아르메니아인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트라페주스, 키프로스, 로도스 등에서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도시 공동체를 유지하였고, 몇몇은 외국 상인과의 교역 중개자 역할도 맡았다.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을 종합하면, 아르메니아인은 단순한 소수민족이 아니라, 제국의 구성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한 핵심 민족 집단이었다. 이들은 고유의 언어와 종교, 전통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동로마 제국 체제 안에 효과적으로 편입되어 제국을 지탱한 실질적인 주역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점에서 아르메니아인은 흔히 “동로마 제국 속의 제2의 민족”이라 불리며, 이는 제국의 다민족성과 복합적 정체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9.1.5. 시리아인과 아시리아인(아람계)[편집]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시리아인과 아시리아인으로 통칭되는 아람어계 주민 집단은, 단순한 변방의 민족이 아니라 동방의 복합적 문화와 종교, 정치 질서를 구성하는 중심 세력이었다. 이들은 언어적으로 아람어를 기반으로 한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고대 셈족 계통의 후예로,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와 메소포타미아 북서부 변경지대, 팔레스타인과 킬리키아 인근 지역까지 널리 분포하였다. 문화와 종교, 상업과 학문 영역에서의 활약은 이들을 단순한 토착민이 아니라 제국과 동방 사이에서 교량의 역할을 하였다.
시리아의 아람계 주민의 존재는 로마 제국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고대 아람어는 기원전부터 서아시아 전역에 걸쳐 국제어로 기능하였으며,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전통은 시리아어(중세 아람어)의 문어적 발전으로 이어졌고, 로마 제국 시기 시리아 지역은 풍부한 문해력을 기반으로 한 상공업과 지식층이 성장하였다. 안티오케아, 에데사, 다마스쿠스, 보스트라 등의 도시들은 헬레니즘 문명과 시리아 전통이 융합된 고도(古都)로서 기능하며, 그리스어와 시리아어가 병존하는 다중 언어 공간을 형성하였다. 특히 농촌과 내륙 도시의 다수 주민들은 시리아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며, 고유의 문학과 학문 전통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시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도시화된 지역으로 평가받았다. 관개 농업과 수공업이 결합된 경제 기반은 강력한 상공 계층을 형성하였고, 동방과의 교역에서는 비단길과 향신료 무역, 유리 및 방직품 생산을 매개로 한 무역망이 활발히 작동하였다. 시리아인 상인들은 페르시아 및 인도, 아라비아와 연결되는 중개자 역할을 맡았고, 이를 통해 제국의 세수 기반에도 실질적 기여를 하였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시리아의 아람계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시리아어로 번역된 철학과 신학, 자연과학 문헌들은 제국 동부의 교육 전통에 깊이 스며들었으며,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와 프로코피우스 등 당대의 주요 역사가와 문필가 중 다수가 시리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동방의 복잡한 종교 분파 및 이단 논쟁을 분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제국과 사산조 사이의 외교적 마찰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성기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기점으로 격렬한 종교적 분열을 맞이한다. 공의회에서 결정된 양성론 교리는 시리아의 대다수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 노선과 충돌하였고, 이들은 단일성(일체성)을 주장하는 미아피즈티즘 신앙을 고수하면서 독자적인 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시리아 정교회 또는 ‘야곱파’로 불리는 공동체로 발전하였으며, 그 중심에 있던 주교 야곱 바라데우스는 6세기 중반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자체 성직자 계층을 재건하고 시리아어 교회 구조를 공고화하였다. 이로 인해 시리아 지방은 제국 국교와 대립하는 거대한 신앙 공동체의 본거지로 부상하였으며, 신앙이 곧 지역 정체성과 반동로마 감정의 표현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당국은 시리아 야곱파 공동체에 대해 일관되게 회유와 탄압을 병행하는 정책을 펼쳤다. 제국은 동방 정교로의 귀속을 유도하며 시리아어 성직자들을 축출하거나 교체하였고, 시리아 교회 건축과 수도원을 파괴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하지만 시리아 공동체는 탄압 속에서도 신앙 정체성을 강화하였고, 고립된 농촌이나 변경지에서 독립적인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시리아인의 거주 지역 대부분은 단일한 신학적 입장을 공유하며, 아람계 전통과 기독교 신학을 결합한 독자적 신학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복음서 해석, 교부 문헌 번역, 주해학, 그리고 성인 전승의 편찬에 이르기까지 독립적인 문헌 체계를 갖추었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정통 신학과는 또 다른 지적 우주를 형성하였다.
7세기 초, 제국은 페르시아와의 전쟁과 이슬람의 등장으로 인해 시리아 지역 대부분을 잃게 된다. 602년부터 628년까지 이어진 동로마-사산 전쟁은 시리아를 포함한 동방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으며, 시리아 도시와 농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종결되기도 전에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이 부상하였고, 630년대 초부터 동방으로의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미 장기 전쟁으로 병력과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시리아 지방 주민들은 종교 탄압과 과중한 세금, 그리고 신앙적 소외로 인해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637년 예루살렘 함락, 638년 안티오케이아 함락 등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은 아랍에게 빠르게 함락되었으며, 큰 저항 없이 이슬람 정복이 진행되었다.
이후 레반트의 시리아인들은 제국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 이슬람 제국의 다르 알이슬람 하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시리아어 교회와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후대 이슬람 세계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유지하며 존속하였다.
그리고 시리아어는 아랍어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종교와 학문의 언어로 널리 사용되었고, 시리아어 수도사와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과학, 의학 문헌을 아람어로 번역하여 이슬람 세계 지식 체계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들은 바그다드의 번역 운동에 참여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저작을 시리아어로 옮긴 후, 다시 아랍어로 재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동로마 제국의 학문 유산을 이슬람 세계로 이전시켰다.
동로마 제국 내에도 시리아계 공동체는 일부 남아 있었다. 키프로스섬과 킬리키아 접경 지대, 소아시아 동남부 등지에는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거주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수공업과 농업, 지방 용병 부대 등으로 제국 사회에 기여하였다. 10세기,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와 요안니스 1세 치미스케스가 북시리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제국령으로 되찾자, 안티오케아 총대주교좌가 재건되고, 시리아인 공동체 일부는 제국 내로 재편입되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는 그리스 정교 총대주교를 임명하여 통합을 시도하였고, 이에 따라 지방 농촌의 야곱파 신자들은 일정한 종교 자치를 누리면서도 계속된 신앙적 긴장을 겪었다.
11세기 후반에는 셀주크 튀르크의 침공으로 시리아계 농촌 공동체들도 큰 변화를 겪는다. 메소포타미아 접경 지역, 특히 멜리테네(말라티아)와 그 주변에서는 시리아 아시리아계 주민들이 자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이들은 튀르크, 아르메니아, 동로마 세력 사이에서 복잡한 생존 전략을 추구하였다. 때로는 동로마에 협력하고, 때로는 셀주크 통치에 자발적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1080년대 말, 멜리테네가 셀주크 술탄에게 자진 개방된 사례는, 오랜 차별과 탄압을 견딘 시리아 공동체가 어떤 새로운 질서 속에서 생존을 꾀했는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시리아인과 아시리아인들은 동로마 제국 동방의 핵심 토착민이자, 언어적·종교적·문화적으로 독자적 위상을 지닌 집단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정치와 경제, 학문과 신앙에 다면적으로 기여하였으며, 동시에 국교 충돌과 제국의 정체성 통합 시도 속에서 지속적인 갈등과 저항의 역사를 지녔다. 이들의 유산은 제국 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동방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문명 전이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로 기능하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이 소아시아 중심으로 축소되면서 이들의 존재감은 희미해졌지만, 시리아인의 문화적·신학적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오리엔트 정교와 동방 기독교, 중동의 문화사에서 결정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시리아의 아람계 주민의 존재는 로마 제국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고대 아람어는 기원전부터 서아시아 전역에 걸쳐 국제어로 기능하였으며,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전통은 시리아어(중세 아람어)의 문어적 발전으로 이어졌고, 로마 제국 시기 시리아 지역은 풍부한 문해력을 기반으로 한 상공업과 지식층이 성장하였다. 안티오케아, 에데사, 다마스쿠스, 보스트라 등의 도시들은 헬레니즘 문명과 시리아 전통이 융합된 고도(古都)로서 기능하며, 그리스어와 시리아어가 병존하는 다중 언어 공간을 형성하였다. 특히 농촌과 내륙 도시의 다수 주민들은 시리아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며, 고유의 문학과 학문 전통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시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도시화된 지역으로 평가받았다. 관개 농업과 수공업이 결합된 경제 기반은 강력한 상공 계층을 형성하였고, 동방과의 교역에서는 비단길과 향신료 무역, 유리 및 방직품 생산을 매개로 한 무역망이 활발히 작동하였다. 시리아인 상인들은 페르시아 및 인도, 아라비아와 연결되는 중개자 역할을 맡았고, 이를 통해 제국의 세수 기반에도 실질적 기여를 하였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시리아의 아람계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시리아어로 번역된 철학과 신학, 자연과학 문헌들은 제국 동부의 교육 전통에 깊이 스며들었으며,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와 프로코피우스 등 당대의 주요 역사가와 문필가 중 다수가 시리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동방의 복잡한 종교 분파 및 이단 논쟁을 분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제국과 사산조 사이의 외교적 마찰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성기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기점으로 격렬한 종교적 분열을 맞이한다. 공의회에서 결정된 양성론 교리는 시리아의 대다수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 노선과 충돌하였고, 이들은 단일성(일체성)을 주장하는 미아피즈티즘 신앙을 고수하면서 독자적인 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시리아 정교회 또는 ‘야곱파’로 불리는 공동체로 발전하였으며, 그 중심에 있던 주교 야곱 바라데우스는 6세기 중반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자체 성직자 계층을 재건하고 시리아어 교회 구조를 공고화하였다. 이로 인해 시리아 지방은 제국 국교와 대립하는 거대한 신앙 공동체의 본거지로 부상하였으며, 신앙이 곧 지역 정체성과 반동로마 감정의 표현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당국은 시리아 야곱파 공동체에 대해 일관되게 회유와 탄압을 병행하는 정책을 펼쳤다. 제국은 동방 정교로의 귀속을 유도하며 시리아어 성직자들을 축출하거나 교체하였고, 시리아 교회 건축과 수도원을 파괴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하지만 시리아 공동체는 탄압 속에서도 신앙 정체성을 강화하였고, 고립된 농촌이나 변경지에서 독립적인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시리아인의 거주 지역 대부분은 단일한 신학적 입장을 공유하며, 아람계 전통과 기독교 신학을 결합한 독자적 신학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복음서 해석, 교부 문헌 번역, 주해학, 그리고 성인 전승의 편찬에 이르기까지 독립적인 문헌 체계를 갖추었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정통 신학과는 또 다른 지적 우주를 형성하였다.
7세기 초, 제국은 페르시아와의 전쟁과 이슬람의 등장으로 인해 시리아 지역 대부분을 잃게 된다. 602년부터 628년까지 이어진 동로마-사산 전쟁은 시리아를 포함한 동방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으며, 시리아 도시와 농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종결되기도 전에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이 부상하였고, 630년대 초부터 동방으로의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미 장기 전쟁으로 병력과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시리아 지방 주민들은 종교 탄압과 과중한 세금, 그리고 신앙적 소외로 인해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637년 예루살렘 함락, 638년 안티오케이아 함락 등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은 아랍에게 빠르게 함락되었으며, 큰 저항 없이 이슬람 정복이 진행되었다.
이후 레반트의 시리아인들은 제국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 이슬람 제국의 다르 알이슬람 하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시리아어 교회와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후대 이슬람 세계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유지하며 존속하였다.
그리고 시리아어는 아랍어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종교와 학문의 언어로 널리 사용되었고, 시리아어 수도사와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과학, 의학 문헌을 아람어로 번역하여 이슬람 세계 지식 체계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들은 바그다드의 번역 운동에 참여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저작을 시리아어로 옮긴 후, 다시 아랍어로 재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동로마 제국의 학문 유산을 이슬람 세계로 이전시켰다.
동로마 제국 내에도 시리아계 공동체는 일부 남아 있었다. 키프로스섬과 킬리키아 접경 지대, 소아시아 동남부 등지에는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거주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수공업과 농업, 지방 용병 부대 등으로 제국 사회에 기여하였다. 10세기,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와 요안니스 1세 치미스케스가 북시리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제국령으로 되찾자, 안티오케아 총대주교좌가 재건되고, 시리아인 공동체 일부는 제국 내로 재편입되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는 그리스 정교 총대주교를 임명하여 통합을 시도하였고, 이에 따라 지방 농촌의 야곱파 신자들은 일정한 종교 자치를 누리면서도 계속된 신앙적 긴장을 겪었다.
11세기 후반에는 셀주크 튀르크의 침공으로 시리아계 농촌 공동체들도 큰 변화를 겪는다. 메소포타미아 접경 지역, 특히 멜리테네(말라티아)와 그 주변에서는 시리아 아시리아계 주민들이 자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이들은 튀르크, 아르메니아, 동로마 세력 사이에서 복잡한 생존 전략을 추구하였다. 때로는 동로마에 협력하고, 때로는 셀주크 통치에 자발적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1080년대 말, 멜리테네가 셀주크 술탄에게 자진 개방된 사례는, 오랜 차별과 탄압을 견딘 시리아 공동체가 어떤 새로운 질서 속에서 생존을 꾀했는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시리아인과 아시리아인들은 동로마 제국 동방의 핵심 토착민이자, 언어적·종교적·문화적으로 독자적 위상을 지닌 집단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정치와 경제, 학문과 신앙에 다면적으로 기여하였으며, 동시에 국교 충돌과 제국의 정체성 통합 시도 속에서 지속적인 갈등과 저항의 역사를 지녔다. 이들의 유산은 제국 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동방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문명 전이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로 기능하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이 소아시아 중심으로 축소되면서 이들의 존재감은 희미해졌지만, 시리아인의 문화적·신학적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오리엔트 정교와 동방 기독교, 중동의 문화사에서 결정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다.
9.1.6. 이집트인[편집]
이집트인, 특히 콥트인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 집단으로, 제국의 초기부터 중기까지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였다. 이들은 고대 이집트 문명의 후예이자, 로마 제국 시기부터 기독교를 수용한 토착 주민으로, 제국의 핵심 구성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중심부로부터의 지속적인 소외와 종교적 갈등, 과도한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점차 이탈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제국이 이집트를 상실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집트는 동로마 제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곡물 생산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식량을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나일강의 범람은 비옥한 토양을 공급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농업 생산은 제국 재정의 기둥이었다. 제국의 조세 체계에서도 이집트는 엄청난 세입을 담당했으며,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국제 무역과 수공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파피루스 제조는 문서 행정과 학문 활동에 필수적인 자원을 제공했고, 유리 공예와 직물 생산 역시 동지중해 전역에서 이름을 알렸다. 이와 같은 산업과 상업 활동은 알렉산드리아의 상인들과 기술자들을 통해 제국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종교적으로 이집트는 기독교 초기부터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사도 마르코에 의해 전해졌다고 전해지는 기독교는 1세기 말까지 이집트 전역으로 퍼졌고, 이후 여러 순교자와 신학자들의 활동으로 인해 이집트는 신앙과 신학의 요람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기독교 신학 발전의 중심이었으며, 특히 오리게네스와 아타나시우스, 그리고 키릴루스 같은 인물은 동로마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막에서 독거 수행을 시작한 안토니우스와, 공동체 수도원 체계를 창시한 파코미우스의 사례는 수도원 제도의 표준을 마련하여 동로마와 서방 기독교 모두에 전범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활력과는 달리, 이집트 내의 교회는 5세기 중반부터 제국 중심부와 점점 더 갈등을 빚게 된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통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명확히 구분하는 신학 정의를 채택했지만, 이집트 다수의 신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예수의 성품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에 따라 칼케돈파와 분리되어 콥트 정교회를 따르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이견을 넘어 정치적 충성심의 분열로 이어졌고, 알렉산드리아 총주교직을 둘러싼 대립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황제와 제국 정부는 칼케돈파 총주교를 강제로 임명하고 콥트 교회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오히려 콥트 신자들의 저항을 낳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두 교파 간의 유혈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후에도 제국은 회유와 탄압을 반복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욱 뿌리 깊은 종교적 분열과 민족 정체성의 강화였다. 많은 콥트인들은 로마 황제를 이방 지배자로 간주하였고, 교회에 대한 탄압은 곧 민족적 억압으로 인식되었다. 그리스계 관료와 군대가 이집트에 상주하면서 발생한 갈등은 이중적 권력 구조를 형성했고, 콥트인들은 행정과 군사 구조에서 소외되었다. 그들은 주로 지방의 하급 관리, 세리, 혹은 마을 공동체 지도자 등으로 한정되었으며, 제국 엘리트 계층에 진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경제적으로도 이집트는 지속적인 수탈에 시달렸다. 제국은 이집트를 곡물 창고로 간주하고, 세금은 물론 병사와 공물 징발까지도 강요하였다. 7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조세 정책은 심각한 사회적 불만을 야기했고, 콥트 농민과 도시는 모두 경제적 압박에 허덕이게 되었다. 특히 제국 후기에 접어들면서 세금 제도가 더욱 체계화되고 강화되자, 이집트 민중은 제국 정부를 억압자로 인식하였다. 동시에 종교적 박해가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조직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콥트 교회와 신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욱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랍 이슬람 군이 이집트에 진입한 것은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640년경 이슬람군은 나일강 삼각주를 향해 진격하였고, 비잔틴 제국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콥트인 다수는 제국의 편에서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동로마 군은 현지 지원 없이 외롭게 싸워야 했고, 결국 641년 알렉산드리아는 함락되었다. 이후 제국은 다시 이집트를 되찾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콥트인들은 비잔틴 영토로 탈출하여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에는 학자와 상인, 성직자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부는 동로마 제국 내에서 소수 집단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황실은 필요한 경우 통역이나 종교적 자문 역할로 콥트인을 고용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그 존재감은 미미해졌다.
이집트인의 이탈은 단순한 인구 유출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의 사회 통합 전략과 종교 정책, 경제 제도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제국은 이집트인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고, 콥트 교회를 품지 못한 결과 이집트 전체를 잃게 되었다. 이슬람 정복은 이집트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고, 콥트인은 이후 점차 이슬람화된 다수 사회 속에서 소수 종교 공동체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고대 이집트의 후예이자, 동로마 제국 시기의 풍부한 문화와 신앙 전통을 간직한 집단으로, 오늘날까지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콥트인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핵심적인 경제적 기둥이자, 신학적 중심지를 구성한 민족이었으나, 제국 중심부와의 갈등을 끝내 해소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그 결과, 이집트는 제국의 가장 중대한 영토 상실 사례가 되었고, 이는 제국 쇠퇴의 중요한 전조로 작용하였다. 콥트인의 경험은 동로마 제국이 내부의 민족과 종교 집단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제국 통합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표적 역사적 단면이다.
이집트는 동로마 제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곡물 생산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식량을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나일강의 범람은 비옥한 토양을 공급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농업 생산은 제국 재정의 기둥이었다. 제국의 조세 체계에서도 이집트는 엄청난 세입을 담당했으며,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국제 무역과 수공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파피루스 제조는 문서 행정과 학문 활동에 필수적인 자원을 제공했고, 유리 공예와 직물 생산 역시 동지중해 전역에서 이름을 알렸다. 이와 같은 산업과 상업 활동은 알렉산드리아의 상인들과 기술자들을 통해 제국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종교적으로 이집트는 기독교 초기부터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사도 마르코에 의해 전해졌다고 전해지는 기독교는 1세기 말까지 이집트 전역으로 퍼졌고, 이후 여러 순교자와 신학자들의 활동으로 인해 이집트는 신앙과 신학의 요람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기독교 신학 발전의 중심이었으며, 특히 오리게네스와 아타나시우스, 그리고 키릴루스 같은 인물은 동로마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막에서 독거 수행을 시작한 안토니우스와, 공동체 수도원 체계를 창시한 파코미우스의 사례는 수도원 제도의 표준을 마련하여 동로마와 서방 기독교 모두에 전범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활력과는 달리, 이집트 내의 교회는 5세기 중반부터 제국 중심부와 점점 더 갈등을 빚게 된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통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명확히 구분하는 신학 정의를 채택했지만, 이집트 다수의 신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예수의 성품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에 따라 칼케돈파와 분리되어 콥트 정교회를 따르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이견을 넘어 정치적 충성심의 분열로 이어졌고, 알렉산드리아 총주교직을 둘러싼 대립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황제와 제국 정부는 칼케돈파 총주교를 강제로 임명하고 콥트 교회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오히려 콥트 신자들의 저항을 낳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두 교파 간의 유혈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후에도 제국은 회유와 탄압을 반복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욱 뿌리 깊은 종교적 분열과 민족 정체성의 강화였다. 많은 콥트인들은 로마 황제를 이방 지배자로 간주하였고, 교회에 대한 탄압은 곧 민족적 억압으로 인식되었다. 그리스계 관료와 군대가 이집트에 상주하면서 발생한 갈등은 이중적 권력 구조를 형성했고, 콥트인들은 행정과 군사 구조에서 소외되었다. 그들은 주로 지방의 하급 관리, 세리, 혹은 마을 공동체 지도자 등으로 한정되었으며, 제국 엘리트 계층에 진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경제적으로도 이집트는 지속적인 수탈에 시달렸다. 제국은 이집트를 곡물 창고로 간주하고, 세금은 물론 병사와 공물 징발까지도 강요하였다. 7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조세 정책은 심각한 사회적 불만을 야기했고, 콥트 농민과 도시는 모두 경제적 압박에 허덕이게 되었다. 특히 제국 후기에 접어들면서 세금 제도가 더욱 체계화되고 강화되자, 이집트 민중은 제국 정부를 억압자로 인식하였다. 동시에 종교적 박해가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조직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콥트 교회와 신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욱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랍 이슬람 군이 이집트에 진입한 것은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640년경 이슬람군은 나일강 삼각주를 향해 진격하였고, 비잔틴 제국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콥트인 다수는 제국의 편에서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동로마 군은 현지 지원 없이 외롭게 싸워야 했고, 결국 641년 알렉산드리아는 함락되었다. 이후 제국은 다시 이집트를 되찾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콥트인들은 비잔틴 영토로 탈출하여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에는 학자와 상인, 성직자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부는 동로마 제국 내에서 소수 집단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황실은 필요한 경우 통역이나 종교적 자문 역할로 콥트인을 고용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그 존재감은 미미해졌다.
이집트인의 이탈은 단순한 인구 유출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의 사회 통합 전략과 종교 정책, 경제 제도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제국은 이집트인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고, 콥트 교회를 품지 못한 결과 이집트 전체를 잃게 되었다. 이슬람 정복은 이집트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고, 콥트인은 이후 점차 이슬람화된 다수 사회 속에서 소수 종교 공동체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고대 이집트의 후예이자, 동로마 제국 시기의 풍부한 문화와 신앙 전통을 간직한 집단으로, 오늘날까지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콥트인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핵심적인 경제적 기둥이자, 신학적 중심지를 구성한 민족이었으나, 제국 중심부와의 갈등을 끝내 해소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그 결과, 이집트는 제국의 가장 중대한 영토 상실 사례가 되었고, 이는 제국 쇠퇴의 중요한 전조로 작용하였다. 콥트인의 경험은 동로마 제국이 내부의 민족과 종교 집단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제국 통합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표적 역사적 단면이다.
9.1.7. 슬라브족[편집]
슬라브족은 6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의 북방 경계를 넘어 대규모로 이주하여, 발칸 반도의 인구 지형과 사회 구조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민족 집단이다. 본래 오늘날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일대의 북방 평원 지대에서 기원한 이들은, 동유럽 내부의 인구 팽창과 기후 변화, 유목민과의 상호 작용을 배경으로 남하하였다. 동로마 사료에서는 이들을 ‘스크라베노이’ 또는 ‘소클라브오이’와 같은 용어로 지칭하였으며, 이는 단일 민족이라기보다 느슨한 부족 연맹 형태의 슬라브계 이주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슬라브족의 남하 과정은 단기간의 군사 침공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이주와 정착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6세기 중엽부터 슬라브족은 아바르족과 같은 유목 세력과 연합하여 도나우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고, 540년대부터 발칸 북부에서 산발적인 약탈이 보고되었다. 이후 578년부터 580년대에 이르러, 수만 명 단위의 슬라브족이 본격적으로 남하하면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심지어 그리스 본토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586년에는 슬라브 무리가 아바르족과 함께 아테네 인근까지 도달하였고, 7세기 초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도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주는 발칸 전역에 슬라브계 마을과 자치 공동체가 산재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동로마 제국은 초기에는 이들 슬라브 이주민을 완전히 축출하거나 근절하지 못하였으며, 점차 공존과 통합이라는 현실적 대응으로 정책 기조를 선회하였다. 특히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재위 초기에는 제국의 전반적 군사력 약화와 동방 전선의 긴장으로 인해, 슬라브 이주민과의 타협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동로마 정부는 일부 슬라브 부족에게 토지와 자치를 허용하고, 이들의 세력권을 테마 체제의 범주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병행하였다.
8세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다수의 슬라브 포로들을 소아시아 내지 제국 내륙으로 이주시켜 군사 조직에 편입시키거나, 교역과 토목 사업에 활용하였다. 이와 동시에 동로마 제국은 슬라브족을 정교회 신앙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교 활동을 강화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은 발칸 각지에 성직자를 파견하고, 슬라브어를 익힌 선교사들을 통해 점진적인 기독교화를 추진하였다.
슬라브족의 기독교화와 동로마화는 9세기 들어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양상을 띠었다. 동로마의 성직자인 키릴과 메토디우스는 슬라브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문자를 고안하였으며, 이는 후에 키릴 문자로 발전하여 슬라브 세계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모라비아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서슬라브 계열에도 복음을 전파하였고, 동시에 동로마는 발칸 내 슬라브 집단들을 더욱 제국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슬라브 정착지를 테마 행정 체계에 포함시키고, 부락 중심의 자치 구조를 해체하며 기존 도시권을 재건하는 방식으로 슬라브인들의 생활 양식을 변형시켰다. 일부 지역에는 황족 직할의 영지(디아볼레타 등)가 설치되었고, 슬라브 마을은 제국의 과세 및 징병 체계에 통합되었다. 8세기 후반 콘스탄티노스 5세와 이리니 여제 시기에는 슬라브 반란이 발생하였고, 이를 진압한 후 수천 명의 슬라브 포로가 소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자리는 그리스계 주민으로 채워졌고, 이주민들은 슬라브 문화의 확산을 억제하는 완충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9세기 말경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슬라브 문화가 크게 약화되고, 슬라브인의 대다수가 언어 및 종교 면에서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발칸 반도의 중북부, 특히 오늘날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알바니아 지역에는 슬라브계 부족 연맹이 일정한 자치를 유지하며 존속하였다.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 시기, 세르브족과 크로아트족은 제국의 외교 전략에 따라 ‘초청 이주’ 형태로 달마티아 내륙과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동로마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각기 부족장이 통치하는 정치 구조를 유지하였고, 제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면서 점차 정치적 실체로 성장하였다.
9세기에 이르러 이들 집단도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세르비아는 동방 정교회의 전통을 따랐고, 크로아티아는 서방 교회의 영향을 받아 라틴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10세기에는 크로아티아가 실질적인 독립 왕국으로 등장하였고, 세르비아도 동로마 또는 불가리아의 간섭 속에서 제한적인 자치를 유지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남슬라브 국가를 적절한 외교 관계를 통해 견제하거나 동맹 대상으로 삼았고, 발칸 내의 전략적 균형을 조절하는 데 활용하였다.
슬라브족의 동로마 제국 내 거주는 단순한 피정복자나 외부 이주민이 아니라, 제국의 생산 기반과 군사 체계의 일부로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발칸 내의 슬라브 농촌은 곡물, 가축, 목재 등의 공급지로 기능하였고, 슬라브계 주민은 제국의 보병과 해군 조직에 참여하여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슬라브 해적 출신은 진압 후 제국 해군에 편입되었으며, 동방 원정에는 슬라브계 보병 연대가 자주 동원되었다. 이러한 통합은 점차 종교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 제국의 시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였다.
특히 슬라브 문자 도입 이후 슬라브 문화권은 정교회 세계에 편입되었고, 동로마는 이를 자국 문명의 외연 확장으로 인식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스스로를 슬라브 세계의 종주국이라 자임하며, 발칸과 동유럽의 신생 슬라브 국가들을 문명화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슬라브 문화와 동로마 문화는 긴밀하게 결합되었고, 훗날 세르비아, 불가리아, 키예프 공국 등의 문화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동화 과정이 모든 슬라브 집단에 동일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9세기 후반부터 불가리아 제국이 급성장하면서, 동로마는 오히려 강력한 슬라브계 경쟁자와 직면하게 되었고, 세르비아 등 주변 부족국도 전략적 균형 속에서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제국 내부의 일부 슬라브 부족은 10세기 이후에도 저항을 지속하였다. 펠로폰네소스의 밀링고이족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생활을 이어갔으며, 제국의 과세와 징세를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에 대해 동로마는 기독교 세례 강제와 행정구역 편입, 귀족화 정책 등을 통해 이들을 점차 제도권 내로 흡수하였다.
결론적으로, 슬라브족은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침략자이자 신민, 동시에 제국의 사회경제적 기초를 이루는 핵심 집단으로 전환된 복합적 존재였다. 초기에는 외부의 위협이었으나, 수세기에 걸친 정착과 동화 과정을 거쳐 제국 사회에 완전히 융합되었고, 이후 동방 정교회를 공유하는 동로마 문명의 일원으로 자리하였다. 10세기 이후 제국 사료에서 슬라브족을 지명이나 종교 공동체로 언급하는 경향이 강화된 것은 이와 같은 문화적 통합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 말 제국의 쇠퇴와 함께, 슬라브계 국가들은 독자적인 정치 체계를 확립하며 동로마로부터 독립된 역사 경로를 걷게 되었다.
슬라브족의 남하 과정은 단기간의 군사 침공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이주와 정착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6세기 중엽부터 슬라브족은 아바르족과 같은 유목 세력과 연합하여 도나우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고, 540년대부터 발칸 북부에서 산발적인 약탈이 보고되었다. 이후 578년부터 580년대에 이르러, 수만 명 단위의 슬라브족이 본격적으로 남하하면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심지어 그리스 본토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586년에는 슬라브 무리가 아바르족과 함께 아테네 인근까지 도달하였고, 7세기 초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도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주는 발칸 전역에 슬라브계 마을과 자치 공동체가 산재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동로마 제국은 초기에는 이들 슬라브 이주민을 완전히 축출하거나 근절하지 못하였으며, 점차 공존과 통합이라는 현실적 대응으로 정책 기조를 선회하였다. 특히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재위 초기에는 제국의 전반적 군사력 약화와 동방 전선의 긴장으로 인해, 슬라브 이주민과의 타협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동로마 정부는 일부 슬라브 부족에게 토지와 자치를 허용하고, 이들의 세력권을 테마 체제의 범주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병행하였다.
8세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다수의 슬라브 포로들을 소아시아 내지 제국 내륙으로 이주시켜 군사 조직에 편입시키거나, 교역과 토목 사업에 활용하였다. 이와 동시에 동로마 제국은 슬라브족을 정교회 신앙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교 활동을 강화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은 발칸 각지에 성직자를 파견하고, 슬라브어를 익힌 선교사들을 통해 점진적인 기독교화를 추진하였다.
슬라브족의 기독교화와 동로마화는 9세기 들어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양상을 띠었다. 동로마의 성직자인 키릴과 메토디우스는 슬라브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문자를 고안하였으며, 이는 후에 키릴 문자로 발전하여 슬라브 세계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모라비아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서슬라브 계열에도 복음을 전파하였고, 동시에 동로마는 발칸 내 슬라브 집단들을 더욱 제국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슬라브 정착지를 테마 행정 체계에 포함시키고, 부락 중심의 자치 구조를 해체하며 기존 도시권을 재건하는 방식으로 슬라브인들의 생활 양식을 변형시켰다. 일부 지역에는 황족 직할의 영지(디아볼레타 등)가 설치되었고, 슬라브 마을은 제국의 과세 및 징병 체계에 통합되었다. 8세기 후반 콘스탄티노스 5세와 이리니 여제 시기에는 슬라브 반란이 발생하였고, 이를 진압한 후 수천 명의 슬라브 포로가 소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자리는 그리스계 주민으로 채워졌고, 이주민들은 슬라브 문화의 확산을 억제하는 완충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9세기 말경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슬라브 문화가 크게 약화되고, 슬라브인의 대다수가 언어 및 종교 면에서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발칸 반도의 중북부, 특히 오늘날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알바니아 지역에는 슬라브계 부족 연맹이 일정한 자치를 유지하며 존속하였다.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 시기, 세르브족과 크로아트족은 제국의 외교 전략에 따라 ‘초청 이주’ 형태로 달마티아 내륙과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동로마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각기 부족장이 통치하는 정치 구조를 유지하였고, 제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면서 점차 정치적 실체로 성장하였다.
9세기에 이르러 이들 집단도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세르비아는 동방 정교회의 전통을 따랐고, 크로아티아는 서방 교회의 영향을 받아 라틴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10세기에는 크로아티아가 실질적인 독립 왕국으로 등장하였고, 세르비아도 동로마 또는 불가리아의 간섭 속에서 제한적인 자치를 유지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남슬라브 국가를 적절한 외교 관계를 통해 견제하거나 동맹 대상으로 삼았고, 발칸 내의 전략적 균형을 조절하는 데 활용하였다.
슬라브족의 동로마 제국 내 거주는 단순한 피정복자나 외부 이주민이 아니라, 제국의 생산 기반과 군사 체계의 일부로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발칸 내의 슬라브 농촌은 곡물, 가축, 목재 등의 공급지로 기능하였고, 슬라브계 주민은 제국의 보병과 해군 조직에 참여하여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슬라브 해적 출신은 진압 후 제국 해군에 편입되었으며, 동방 원정에는 슬라브계 보병 연대가 자주 동원되었다. 이러한 통합은 점차 종교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 제국의 시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였다.
특히 슬라브 문자 도입 이후 슬라브 문화권은 정교회 세계에 편입되었고, 동로마는 이를 자국 문명의 외연 확장으로 인식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스스로를 슬라브 세계의 종주국이라 자임하며, 발칸과 동유럽의 신생 슬라브 국가들을 문명화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슬라브 문화와 동로마 문화는 긴밀하게 결합되었고, 훗날 세르비아, 불가리아, 키예프 공국 등의 문화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동화 과정이 모든 슬라브 집단에 동일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9세기 후반부터 불가리아 제국이 급성장하면서, 동로마는 오히려 강력한 슬라브계 경쟁자와 직면하게 되었고, 세르비아 등 주변 부족국도 전략적 균형 속에서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제국 내부의 일부 슬라브 부족은 10세기 이후에도 저항을 지속하였다. 펠로폰네소스의 밀링고이족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생활을 이어갔으며, 제국의 과세와 징세를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에 대해 동로마는 기독교 세례 강제와 행정구역 편입, 귀족화 정책 등을 통해 이들을 점차 제도권 내로 흡수하였다.
결론적으로, 슬라브족은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침략자이자 신민, 동시에 제국의 사회경제적 기초를 이루는 핵심 집단으로 전환된 복합적 존재였다. 초기에는 외부의 위협이었으나, 수세기에 걸친 정착과 동화 과정을 거쳐 제국 사회에 완전히 융합되었고, 이후 동방 정교회를 공유하는 동로마 문명의 일원으로 자리하였다. 10세기 이후 제국 사료에서 슬라브족을 지명이나 종교 공동체로 언급하는 경향이 강화된 것은 이와 같은 문화적 통합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 말 제국의 쇠퇴와 함께, 슬라브계 국가들은 독자적인 정치 체계를 확립하며 동로마로부터 독립된 역사 경로를 걷게 되었다.
9.1.8. 불가리아인[편집]
불가리아인은 남동 유럽에서 형성된 복합 민족 집단으로, 주로 남슬라브계 농경민과 투르크계 유목민인 불가르족의 융합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들의 정체성은 단순한 혈연 융합을 넘어 정치, 종교, 언어, 문화적 결합을 통해 다층적으로 발전하였다. 불가리아인은 동로마 제국과 장기간에 걸쳐 대립과 협력을 반복했으며, 이 양 민족의 관계는 중세 발칸 반도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축을 이루었다.
불가르족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한 투르크계 유목민으로, 여러 차례의 이동을 거쳐 7세기 중반에 다뉴브 하류에 도달하였다. 680년경 불가르족의 지도자 아스파루흐는 남하하여 오늘날의 불가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현지의 남슬라브계 주민들을 통합하거나 지배함으로써 최초의 불가리아 국가가 성립되었다. 이 국가는 681년 동로마 제국에 의해 사실상 승인받음으로써 국제적 실체로 자리잡았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동로마의 북방 경계에 거대한 군사적 존재로 부상하였다. 특히 9세기 후반 시메온 1세가 즉위하면서 불가리아는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급속히 성장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경쟁자로 등장했다. 시메온은 스스로를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 칭하며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위치를 주장하였고,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의 통치하에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 같은 강력한 불가리아 제국도 내부의 권력 갈등과 외부 압박으로 점차 약화되었다. 10세기 말부터 동로마는 반격을 강화하였으며, 바실리오스 2세의 지휘 아래 제국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불가리아를 압도하였다. 1014년 클리디온 전투에서 바실리오스는 대승을 거두고 수천 명의 불가리아 병사를 생포한 후 모두 실명시켰다. 이 일로 그는 ‘불가르학살자’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불가리아인의 역사 기억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마침내 1018년, 동로마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였고, 불가리아 영토는 제국의 새로운 주가 되었다.
정복 이후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 통치에 있어 초기에는 유화적인 방식을 택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무력보다는 온건한 제도적 통합을 통해 불가리아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불가리아 귀족층은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불가리아인들이 사용하던 관습법과 슬라브어도 일정 부분 공공 영역에서 허용되었다. 특히 종교적 자치는 핵심적인 양보 사항이었다. 제국은 불가리아 교회의 총대주교구를 폐지하는 대신, 오흐리드 대주교구라는 자율적 정교회 교구로 전환하여 존속시켰으며, 이는 불가리아인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통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유화책은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점차 철회되었고, 동화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제국 정부는 불가리아 출신 귀족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제국 귀족 사회에 편입시키는 한편, 지방 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전통적인 불가리아 귀족 가문을 해체하거나 권한을 박탈하였다. 지방 행정은 동로마 특유의 테마 제도에 따라 재편되었으며, 불가리아의 전통적 지도층이 맡던 코메스와 같은 지위는 폐지되고 제국 관료들이 대신 파견되었다. 과세 또한 점차 강화되어, 불가리아 농민들은 군사 징집과 물자 부역 등 제국 시민과 동등한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합 정책은 불가리아 내부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040년대에는 불가리아인 페터르 델리안이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옛 불가리아 왕국의 부흥을 시도하였다. 이후에도 1070년대에는 세금과 징병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 귀족층이 다시 봉기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나, 불가리아인들 사이에 자리잡은 민족적 자긍심과 자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12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내정 불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제4차 십자군이 제국의 중심부를 위협하던 상황에서 불가리아인들은 다시 봉기하였다. 1185년 이반 아센 1세와 페터르 2세 형제가 봉기를 주도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을 수립하였다. 이 봉기는 불가리아 농민과 블라흐인이라 불리는 라틴계 목동 집단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단순한 귀족 중심의 정변이 아니라 광범위한 민족 해방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제2제국의 성립으로 동로마는 발칸 북부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불가리아는 다시금 독자적인 군주국으로 부활하였다.
동로마의 지배 시기 불가리아인들의 지위는 복잡하였다. 한편으로는 피정복민으로 멸시와 억압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국 내부로 흡수된 인재들이 다수 존재하였다. 불가리아 출신 귀족과 지식인, 상인, 군인들은 제국의 행정과 군사 조직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불가리아 용병들은 동방 원정과 국경 방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상인들은 내륙의 소금, 가죽, 가축을 운송하여 제국 시장에 공급함으로써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블라흐인과 함께 짐수레를 이용한 장거리 육상 교역을 담당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다뉴브 너머의 영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종교적으로 불가리아는 이미 9세기 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수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복 이후에도 신앙 자체는 큰 충돌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다만 오흐리드 대주교구를 통한 자치 교회 조직 유지가 중요한 이슈였으며, 이를 통해 불가리아 정체성은 신앙의 틀 안에서 계속 존속할 수 있었다. 제국이 이를 어느 정도 허용한 덕분에 불가리아인들은 동로마 세계의 종교적 일원으로 남을 수 있었다.
불가리아와 동로마의 관계는 단지 대립의 역사로만 설명할 수 없다. 오랜 시간에 걸친 충돌과 통합, 협력은 양 민족 사이의 문화적 상호작용을 심화시켰다. 언어, 법률, 군사 제도, 건축, 종교 의례 등에서 동로마의 영향은 불가리아 사회 깊숙이 파고들었고, 불가리아는 이를 수용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융합시키며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특히 불가리아 정교회는 동로마 신학과 슬라브 문화를 결합하여 고유한 종교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는 훗날 세르비아, 러시아 등 주변 정교회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합하면 불가리아인은 동로마 제국과의 접촉을 통해 고유한 국가 정체성을 위협받는 동시에, 제국의 제도와 문화를 흡수하며 더 넓은 정교회 문명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강압적 통치는 불가리아인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였고, 두 차례의 독립 국가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국과의 교류를 통해 불가리아는 단순한 주변 민족이 아닌 유럽 중세 문명사의 핵심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몽골과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 속에서 불가리아와 동로마는 정교회를 공유하는 문명 공동체로서, 때로는 함께 저항하고 때로는 갈등하는 복합적인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불가르족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한 투르크계 유목민으로, 여러 차례의 이동을 거쳐 7세기 중반에 다뉴브 하류에 도달하였다. 680년경 불가르족의 지도자 아스파루흐는 남하하여 오늘날의 불가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현지의 남슬라브계 주민들을 통합하거나 지배함으로써 최초의 불가리아 국가가 성립되었다. 이 국가는 681년 동로마 제국에 의해 사실상 승인받음으로써 국제적 실체로 자리잡았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동로마의 북방 경계에 거대한 군사적 존재로 부상하였다. 특히 9세기 후반 시메온 1세가 즉위하면서 불가리아는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급속히 성장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경쟁자로 등장했다. 시메온은 스스로를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 칭하며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위치를 주장하였고,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의 통치하에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 같은 강력한 불가리아 제국도 내부의 권력 갈등과 외부 압박으로 점차 약화되었다. 10세기 말부터 동로마는 반격을 강화하였으며, 바실리오스 2세의 지휘 아래 제국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불가리아를 압도하였다. 1014년 클리디온 전투에서 바실리오스는 대승을 거두고 수천 명의 불가리아 병사를 생포한 후 모두 실명시켰다. 이 일로 그는 ‘불가르학살자’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불가리아인의 역사 기억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마침내 1018년, 동로마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였고, 불가리아 영토는 제국의 새로운 주가 되었다.
정복 이후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 통치에 있어 초기에는 유화적인 방식을 택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무력보다는 온건한 제도적 통합을 통해 불가리아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불가리아 귀족층은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불가리아인들이 사용하던 관습법과 슬라브어도 일정 부분 공공 영역에서 허용되었다. 특히 종교적 자치는 핵심적인 양보 사항이었다. 제국은 불가리아 교회의 총대주교구를 폐지하는 대신, 오흐리드 대주교구라는 자율적 정교회 교구로 전환하여 존속시켰으며, 이는 불가리아인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통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유화책은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점차 철회되었고, 동화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제국 정부는 불가리아 출신 귀족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제국 귀족 사회에 편입시키는 한편, 지방 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전통적인 불가리아 귀족 가문을 해체하거나 권한을 박탈하였다. 지방 행정은 동로마 특유의 테마 제도에 따라 재편되었으며, 불가리아의 전통적 지도층이 맡던 코메스와 같은 지위는 폐지되고 제국 관료들이 대신 파견되었다. 과세 또한 점차 강화되어, 불가리아 농민들은 군사 징집과 물자 부역 등 제국 시민과 동등한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합 정책은 불가리아 내부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040년대에는 불가리아인 페터르 델리안이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옛 불가리아 왕국의 부흥을 시도하였다. 이후에도 1070년대에는 세금과 징병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 귀족층이 다시 봉기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나, 불가리아인들 사이에 자리잡은 민족적 자긍심과 자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12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내정 불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제4차 십자군이 제국의 중심부를 위협하던 상황에서 불가리아인들은 다시 봉기하였다. 1185년 이반 아센 1세와 페터르 2세 형제가 봉기를 주도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을 수립하였다. 이 봉기는 불가리아 농민과 블라흐인이라 불리는 라틴계 목동 집단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단순한 귀족 중심의 정변이 아니라 광범위한 민족 해방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제2제국의 성립으로 동로마는 발칸 북부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불가리아는 다시금 독자적인 군주국으로 부활하였다.
동로마의 지배 시기 불가리아인들의 지위는 복잡하였다. 한편으로는 피정복민으로 멸시와 억압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국 내부로 흡수된 인재들이 다수 존재하였다. 불가리아 출신 귀족과 지식인, 상인, 군인들은 제국의 행정과 군사 조직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불가리아 용병들은 동방 원정과 국경 방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상인들은 내륙의 소금, 가죽, 가축을 운송하여 제국 시장에 공급함으로써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블라흐인과 함께 짐수레를 이용한 장거리 육상 교역을 담당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다뉴브 너머의 영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종교적으로 불가리아는 이미 9세기 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수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복 이후에도 신앙 자체는 큰 충돌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다만 오흐리드 대주교구를 통한 자치 교회 조직 유지가 중요한 이슈였으며, 이를 통해 불가리아 정체성은 신앙의 틀 안에서 계속 존속할 수 있었다. 제국이 이를 어느 정도 허용한 덕분에 불가리아인들은 동로마 세계의 종교적 일원으로 남을 수 있었다.
불가리아와 동로마의 관계는 단지 대립의 역사로만 설명할 수 없다. 오랜 시간에 걸친 충돌과 통합, 협력은 양 민족 사이의 문화적 상호작용을 심화시켰다. 언어, 법률, 군사 제도, 건축, 종교 의례 등에서 동로마의 영향은 불가리아 사회 깊숙이 파고들었고, 불가리아는 이를 수용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융합시키며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특히 불가리아 정교회는 동로마 신학과 슬라브 문화를 결합하여 고유한 종교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는 훗날 세르비아, 러시아 등 주변 정교회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합하면 불가리아인은 동로마 제국과의 접촉을 통해 고유한 국가 정체성을 위협받는 동시에, 제국의 제도와 문화를 흡수하며 더 넓은 정교회 문명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강압적 통치는 불가리아인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였고, 두 차례의 독립 국가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국과의 교류를 통해 불가리아는 단순한 주변 민족이 아닌 유럽 중세 문명사의 핵심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몽골과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 속에서 불가리아와 동로마는 정교회를 공유하는 문명 공동체로서, 때로는 함께 저항하고 때로는 갈등하는 복합적인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9.1.9. 유대인[편집]
동로마 제국 시기의 유대인은 제국 전역에 걸쳐 분포한 소수 민족이자 종교 공동체로, 고대 유대 왕국의 멸망 이후 시작된 디아스포라 전통을 이어받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와 같은 동부 속주 출신뿐 아니라, 고대 로마 시기에 이미 이주하여 정착한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발칸, 이탈리아 반도 등지의 유서 깊은 유대인 공동체의 후손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로마 제국 시기부터 현지에 정착하였고,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와 함께 해당 지역의 언어, 특히 그리스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유대교를 신봉하였으며, 유일신 사상과 토라 중심의 율법 체계를 고수하면서 기독교를 신앙적·사상적으로 명확히 구분하였다.
동로마 정부는 유대인을 제국 내의 정식 시민이 아닌 법적으로 구분된 피복속 민으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한 정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고, 따라서 정식 시민권의 여러 권리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제국은 유대인을 일괄적으로 탄압하지는 않았으며, 회당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들의 종교 생활과 공동체 운영에 일정한 자율권을 부여하였다. 단, 새로운 회당 건축이나 기존 회당의 확대에는 황제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였고, 기독교 신앙을 모독하거나 성인을 조롱하는 행위에는 무거운 형벌이 부과되었다.
특정 황제들은 종종 유대인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대표적으로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페르시아와 동맹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는 보고를 접한 후, 제국 전역의 유대인들에게 강제 개종을 명령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반유대 정책 중 하나였으며, 이후 여러 도시에서 회당이 폐쇄되거나 파괴되었다. 9세기의 바실리오스 1세 역시 남이탈리아의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강요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지속되지 못하였고, 후대 황제들은 다시 관용 기조로 돌아섰다.
동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는 주로 도시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제국의 수도에는 별도의 유대인 구역이 존재하였고, 이곳의 주민들은 상업, 금융, 의학, 수공업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였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니케아, 안티오케이아, 알렉산드리아, 에페소스 등 제국 내의 주요 도시들에도 상당 규모의 유대인 인구가 있었으며, 각 지역 공동체는 회당과 유대인 학교를 중심으로 종교 및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유대인들은 상업 및 수공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염색업, 직조업, 보석 세공, 비단 생산 등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전문 장인으로 활동하였다. 유대계 장인들은 자줏빛 염료를 가공하는 기술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고, 이는 황실 직물 제작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국의 비단 산업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는 데에는 유대인 장인들의 기술력이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유대인 상인들은 지중해 세계를 가로지르는 교역망에서 중개자로 활약하였으며, 이슬람 세계와 서방의 프랑크 국가들을 잇는 라단인 무역망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향신료, 약재, 비단, 금속제품 등을 거래하며, 국제 금융의 중간자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경제 활동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법적으로 여러 제약을 받았다. 황제 칙령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공공시설 공동 이용을 금지하였으며, 유대인이 공직에 임명되는 것을 제한하였다. 특히 지방 행정관, 군 장교, 황실 직책 등 제국의 핵심 권력 구조에는 유대인이 접근할 수 없었다. 이는 유대인의 종교적 독자성과 기독교 중심의 제국 이념 사이에 놓인 간극을 반영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종종 궁정 의사, 세무 고문, 학자 등으로 발탁되었고,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한 유대인도 적지 않았다. 제국이 필요로 할 때,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 능력과 국제 정보망을 바탕으로 외교나 경제 전략의 조언자로서 기용되었다.
유대인 공동체는 제국의 법 질서 내에서 제한적 자치를 누렸다. 각 지역의 유대인들은 장로회 혹은 유대인 원로회의 형태로 구성된 자치 조직을 운영하였으며, 랍비들이 율법에 따른 재판과 종교 의례를 집행하였다. 분쟁 발생 시 유대인 내부에서는 유대 율법에 따른 판결이 내려졌고, 대외적 분쟁에 한하여 제국 법정이 개입하였다.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징병 의무에서 면제되었으며, 이는 그들을 군사적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동시에, 상업과 금융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한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시대에 따라 유대인을 둘러싼 제국의 태도는 변동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2세의 시대에는 유대교 신앙 자체는 인정되었으나, 기독교인으로의 개종을 막는 활동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중세 중기에 들어서면, 특히 코무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유대인이 보다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되었고, 이들을 세입 확대 및 궁정 기능 강화에 활용하고자 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유대인 의사들은 궁정의 주치의로 활약하였으며, 황실 회계관 중에서도 유대계가 발견된다. 이들은 제국의 국제적 정보망 유지에 기여하였으며, 기독교 관료가 접근하기 어려운 이슬람권 시장과의 교섭에서도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2세기 말 십자군 전쟁과 제4차 십자군의 혼란 속에서 유대인 공동체는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등지에서는 유대인 거주 지역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일부 회당과 상점이 약탈되었다. 이 시기의 민중 폭동은 주로 경제 불안과 반외세 정서 속에서 촉발되었으며, 유대인은 그 희생양이 되었다. 다만 서유럽과 달리 대규모 학살이나 공식적인 추방령은 거의 선포되지 않았고, 황제 권위 아래 유대인 공동체는 꾸준히 존속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상대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거주 환경을 제공했던 국가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 내 유대인들은 법적 제한 속에서도 공동체 중심의 삶을 유지하며, 경제와 학술, 의료,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국의 실질적 운용에 기여하였다. 제국은 이들을 제도권 바깥의 이교도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제국 체제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특유의 다원적 통치 방식의 일면이었다. 유대인의 존재는 동로마 제국이 단일 민족이나 단일 종교로 구성된 국가가 아닌, 다양한 종교·언어·문화 공동체가 공존하는 복합 제국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사례였다. 이러한 전통은 동로마 멸망 이후에도 계승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살로니카의 유대인 공동체는 오스만 제국 시기에도 이어져 지중해 유대계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동로마 정부는 유대인을 제국 내의 정식 시민이 아닌 법적으로 구분된 피복속 민으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한 정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고, 따라서 정식 시민권의 여러 권리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제국은 유대인을 일괄적으로 탄압하지는 않았으며, 회당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들의 종교 생활과 공동체 운영에 일정한 자율권을 부여하였다. 단, 새로운 회당 건축이나 기존 회당의 확대에는 황제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였고, 기독교 신앙을 모독하거나 성인을 조롱하는 행위에는 무거운 형벌이 부과되었다.
특정 황제들은 종종 유대인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대표적으로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페르시아와 동맹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는 보고를 접한 후, 제국 전역의 유대인들에게 강제 개종을 명령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반유대 정책 중 하나였으며, 이후 여러 도시에서 회당이 폐쇄되거나 파괴되었다. 9세기의 바실리오스 1세 역시 남이탈리아의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강요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지속되지 못하였고, 후대 황제들은 다시 관용 기조로 돌아섰다.
동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는 주로 도시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제국의 수도에는 별도의 유대인 구역이 존재하였고, 이곳의 주민들은 상업, 금융, 의학, 수공업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였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니케아, 안티오케이아, 알렉산드리아, 에페소스 등 제국 내의 주요 도시들에도 상당 규모의 유대인 인구가 있었으며, 각 지역 공동체는 회당과 유대인 학교를 중심으로 종교 및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유대인들은 상업 및 수공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염색업, 직조업, 보석 세공, 비단 생산 등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전문 장인으로 활동하였다. 유대계 장인들은 자줏빛 염료를 가공하는 기술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고, 이는 황실 직물 제작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국의 비단 산업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는 데에는 유대인 장인들의 기술력이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유대인 상인들은 지중해 세계를 가로지르는 교역망에서 중개자로 활약하였으며, 이슬람 세계와 서방의 프랑크 국가들을 잇는 라단인 무역망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향신료, 약재, 비단, 금속제품 등을 거래하며, 국제 금융의 중간자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경제 활동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법적으로 여러 제약을 받았다. 황제 칙령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공공시설 공동 이용을 금지하였으며, 유대인이 공직에 임명되는 것을 제한하였다. 특히 지방 행정관, 군 장교, 황실 직책 등 제국의 핵심 권력 구조에는 유대인이 접근할 수 없었다. 이는 유대인의 종교적 독자성과 기독교 중심의 제국 이념 사이에 놓인 간극을 반영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종종 궁정 의사, 세무 고문, 학자 등으로 발탁되었고,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한 유대인도 적지 않았다. 제국이 필요로 할 때,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 능력과 국제 정보망을 바탕으로 외교나 경제 전략의 조언자로서 기용되었다.
유대인 공동체는 제국의 법 질서 내에서 제한적 자치를 누렸다. 각 지역의 유대인들은 장로회 혹은 유대인 원로회의 형태로 구성된 자치 조직을 운영하였으며, 랍비들이 율법에 따른 재판과 종교 의례를 집행하였다. 분쟁 발생 시 유대인 내부에서는 유대 율법에 따른 판결이 내려졌고, 대외적 분쟁에 한하여 제국 법정이 개입하였다.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징병 의무에서 면제되었으며, 이는 그들을 군사적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동시에, 상업과 금융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한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시대에 따라 유대인을 둘러싼 제국의 태도는 변동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2세의 시대에는 유대교 신앙 자체는 인정되었으나, 기독교인으로의 개종을 막는 활동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중세 중기에 들어서면, 특히 코무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유대인이 보다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되었고, 이들을 세입 확대 및 궁정 기능 강화에 활용하고자 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유대인 의사들은 궁정의 주치의로 활약하였으며, 황실 회계관 중에서도 유대계가 발견된다. 이들은 제국의 국제적 정보망 유지에 기여하였으며, 기독교 관료가 접근하기 어려운 이슬람권 시장과의 교섭에서도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2세기 말 십자군 전쟁과 제4차 십자군의 혼란 속에서 유대인 공동체는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등지에서는 유대인 거주 지역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일부 회당과 상점이 약탈되었다. 이 시기의 민중 폭동은 주로 경제 불안과 반외세 정서 속에서 촉발되었으며, 유대인은 그 희생양이 되었다. 다만 서유럽과 달리 대규모 학살이나 공식적인 추방령은 거의 선포되지 않았고, 황제 권위 아래 유대인 공동체는 꾸준히 존속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상대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거주 환경을 제공했던 국가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 내 유대인들은 법적 제한 속에서도 공동체 중심의 삶을 유지하며, 경제와 학술, 의료,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국의 실질적 운용에 기여하였다. 제국은 이들을 제도권 바깥의 이교도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제국 체제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특유의 다원적 통치 방식의 일면이었다. 유대인의 존재는 동로마 제국이 단일 민족이나 단일 종교로 구성된 국가가 아닌, 다양한 종교·언어·문화 공동체가 공존하는 복합 제국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사례였다. 이러한 전통은 동로마 멸망 이후에도 계승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살로니카의 유대인 공동체는 오스만 제국 시기에도 이어져 지중해 유대계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9.1.10. 고트족 및 게르만계 민족들[편집]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계 민족은 동로마 제국 역사 초기에 군사적 조력자이자 정치적 변수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용병 또는 연합군(foederati)의 형태로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일부는 제국 영토 내에 정착하여 제한된 자치를 누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게르만계 집단의 존재는 제국 군사체제의 유연성과 외래 세력에 대한 실용적 수용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트족은 원래 발트해 남쪽에서 기원한 동게르만계 부족으로, 3세기 이후 남하하여 흑해 북방과 다뉴브 남쪽에 걸친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서로마와 동로마 양 제국의 국경을 자주 넘나들며 전투와 정착을 반복하였으며, 4세기 말에는 훈족의 침입을 피해 대규모로 도나우 강을 넘어 발칸 반도로 진입하였다. 동고트와 서고트로 나뉜 고트족 중 동로마 제국과 직접 접촉한 것은 주로 동고트 계열이었다.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고트족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고트족 연합군은 당시 황제 발렌스를 전사시키며 제국군에 참패를 안겼고,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들과 강화를 맺고 포에데라디[44]로 받아들였다. 이 조약에 따라 고트인들은 제국군에 편입되어 일정 지역에 정착하며 자치를 허용받았고, 대가로 전시 동원을 수행하는 조건을 수용하였다. 이때부터 동로마 내에는 고트계 군인과 장군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399년 고트계 장군 가이나스는 동로마의 최고 군사 지위인 집정대신(magister militum)에 올랐으며, 황실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하고 고트 병력의 권력을 과도하게 확대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과 원로원은 이에 반발하였다. 결국 가이나스는 봉기 속에 도망쳤다가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 게르만계 세력의 정치적 한계를 보여주는 일례로 남게 되었다.
5세기 중엽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이후, 고트족과 그 외 게르만계 민족 대부분은 서방에 독자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일부 집단은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국경지대에 잔류하였다. 트라키아, 모이시아, 일리리아 등지에는 고트, 헤룰리족, 스키리족, 게피드족 등이 흩어져 정착하였고, 이들은 제국의 국경 방어를 보조하는 용병 또는 농촌 공동체로 존재하였다. 황제 조이노스는 재위 중 게르만계 용병들의 세력을 축소하고, 이사우리아나 아르메니아 출신 병사 등 자국민 중심의 군대로 군제 개혁을 시도하였다.
6세기 초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다시금 게르만계 용병의 역량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는 서로마의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대외 정복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반달 전쟁과 고트 전쟁 등 서방 원정에 투입된 병력 중에는 고트족, 헤룰리족, 롱고바르드족 출신의 용병들이 포함되었고,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같은 동로마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전후 제국군에 흡수되거나 이탈리아와 발칸에 정착하였다.
게르만계 병사들은 군사 분야 외에는 제국 내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고트족을 비롯한 이들은 대체로 도시 외곽에 집단 거주하였고, 언어와 신앙의 차이로 제국 사회로의 동화가 더뎠다. 초기 고트인은 대체로 아리우스파 신앙을 고수하였고, 정통파 정교회를 믿는 제국 시민들과 종종 충돌하였다. 가이나스 사건처럼 아리우스 교회당 건축을 둘러싼 갈등은 종교적 불일치가 공동체 통합에 장애가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중세 중기 이후, 고트족이라는 명칭은 좁은 의미의 민족 명칭에서 점차 확장되어, 동로마 군대 내에서 북방 게르만계 출신 병력을 포괄하는 통칭으로 쓰이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10세기 말 바랑기아 친위대 창설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부대는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 노르만디 등 서북유럽 출신의 전사들로 구성된 황제 직속 근위대로, 북방 게르만계의 군사적 전통이 동로마 군사 체계에 통합된 사례였다. 바랑기아 전사들은 충성심, 전투력, 제국 외부와의 연결망에서 강점을 보여주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군사 외의 영역에서 게르만계 출신은 제국 사회에 거의 흡수되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변방에 배치되거나 수도 근처에 주둔하면서, 독자적인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였다. 일부 고트 출신 병사는 전역 후 정착하여 현지인과 혼인하고 동로마 시민으로 동화되었으며, 그 자손은 점차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반면 다른 집단은 동방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북방이나 서방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크림 반도의 고트인 집단은 동로마 제국 변경에서 오랫동안 자치를 유지한 독특한 사례이다. 이들은 원래 흑해 북안에서 로마와 접촉했던 고트계 집단의 후손으로, 중세 내내 크림 고원의 고립된 지대에서 자신들의 언어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였다. 일부는 동로마의 테마 체제 내에 편입되어 세금 납부와 병역 제공을 조건으로 부분적 자치를 허용받았고, 황제의 외교 전략에 따라 흑해 북방 세력과의 완충 지대로 활용되었다.
한편 게르만계에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이란계 유목민인 알란족이 있었다. 이들은 흑해 북방과 캅카스 지역에 정착한 반유목민으로, 11세기 후반 쿠만족의 압박을 피해 동로마 제국에 망명하였다. 제국은 이들을 트라키아 변경에 정착시켜 국경 방어를 맡겼고, 일부는 제국군 기병 부대에 복무하였다. 14세기에도 알란 출신 병사들이 비잔티움-오스만 전쟁에 참전한 기록이 있으며, 이들은 게르만계 용병과 유사하게 비잔틴 군사 조직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요약하자면, 고트족을 중심으로 한 게르만계 민족은 동로마 제국 초기에 주요 군사적 조력자로 활약하였으며, 일부는 정치적 실권에 접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교, 언어, 문화의 차이는 그들의 동화 가능성을 제한하였고, 제국은 실용적 관점에서 이들을 수용하되 필요시 철저히 제어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게르만계 집단은 제국 사회 내에서 소멸하거나 동화되었고, 북방 용병의 전통은 바랑기아 친위대와 같은 새로운 형태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동로마 제국이 다민족 제국으로서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어떻게 활용하고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이다.
고트족은 원래 발트해 남쪽에서 기원한 동게르만계 부족으로, 3세기 이후 남하하여 흑해 북방과 다뉴브 남쪽에 걸친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서로마와 동로마 양 제국의 국경을 자주 넘나들며 전투와 정착을 반복하였으며, 4세기 말에는 훈족의 침입을 피해 대규모로 도나우 강을 넘어 발칸 반도로 진입하였다. 동고트와 서고트로 나뉜 고트족 중 동로마 제국과 직접 접촉한 것은 주로 동고트 계열이었다.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고트족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고트족 연합군은 당시 황제 발렌스를 전사시키며 제국군에 참패를 안겼고,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들과 강화를 맺고 포에데라디[44]로 받아들였다. 이 조약에 따라 고트인들은 제국군에 편입되어 일정 지역에 정착하며 자치를 허용받았고, 대가로 전시 동원을 수행하는 조건을 수용하였다. 이때부터 동로마 내에는 고트계 군인과 장군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399년 고트계 장군 가이나스는 동로마의 최고 군사 지위인 집정대신(magister militum)에 올랐으며, 황실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하고 고트 병력의 권력을 과도하게 확대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과 원로원은 이에 반발하였다. 결국 가이나스는 봉기 속에 도망쳤다가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 게르만계 세력의 정치적 한계를 보여주는 일례로 남게 되었다.
5세기 중엽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이후, 고트족과 그 외 게르만계 민족 대부분은 서방에 독자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일부 집단은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국경지대에 잔류하였다. 트라키아, 모이시아, 일리리아 등지에는 고트, 헤룰리족, 스키리족, 게피드족 등이 흩어져 정착하였고, 이들은 제국의 국경 방어를 보조하는 용병 또는 농촌 공동체로 존재하였다. 황제 조이노스는 재위 중 게르만계 용병들의 세력을 축소하고, 이사우리아나 아르메니아 출신 병사 등 자국민 중심의 군대로 군제 개혁을 시도하였다.
6세기 초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다시금 게르만계 용병의 역량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는 서로마의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대외 정복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반달 전쟁과 고트 전쟁 등 서방 원정에 투입된 병력 중에는 고트족, 헤룰리족, 롱고바르드족 출신의 용병들이 포함되었고,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같은 동로마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전후 제국군에 흡수되거나 이탈리아와 발칸에 정착하였다.
게르만계 병사들은 군사 분야 외에는 제국 내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고트족을 비롯한 이들은 대체로 도시 외곽에 집단 거주하였고, 언어와 신앙의 차이로 제국 사회로의 동화가 더뎠다. 초기 고트인은 대체로 아리우스파 신앙을 고수하였고, 정통파 정교회를 믿는 제국 시민들과 종종 충돌하였다. 가이나스 사건처럼 아리우스 교회당 건축을 둘러싼 갈등은 종교적 불일치가 공동체 통합에 장애가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중세 중기 이후, 고트족이라는 명칭은 좁은 의미의 민족 명칭에서 점차 확장되어, 동로마 군대 내에서 북방 게르만계 출신 병력을 포괄하는 통칭으로 쓰이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10세기 말 바랑기아 친위대 창설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부대는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 노르만디 등 서북유럽 출신의 전사들로 구성된 황제 직속 근위대로, 북방 게르만계의 군사적 전통이 동로마 군사 체계에 통합된 사례였다. 바랑기아 전사들은 충성심, 전투력, 제국 외부와의 연결망에서 강점을 보여주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군사 외의 영역에서 게르만계 출신은 제국 사회에 거의 흡수되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변방에 배치되거나 수도 근처에 주둔하면서, 독자적인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였다. 일부 고트 출신 병사는 전역 후 정착하여 현지인과 혼인하고 동로마 시민으로 동화되었으며, 그 자손은 점차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반면 다른 집단은 동방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북방이나 서방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크림 반도의 고트인 집단은 동로마 제국 변경에서 오랫동안 자치를 유지한 독특한 사례이다. 이들은 원래 흑해 북안에서 로마와 접촉했던 고트계 집단의 후손으로, 중세 내내 크림 고원의 고립된 지대에서 자신들의 언어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였다. 일부는 동로마의 테마 체제 내에 편입되어 세금 납부와 병역 제공을 조건으로 부분적 자치를 허용받았고, 황제의 외교 전략에 따라 흑해 북방 세력과의 완충 지대로 활용되었다.
한편 게르만계에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이란계 유목민인 알란족이 있었다. 이들은 흑해 북방과 캅카스 지역에 정착한 반유목민으로, 11세기 후반 쿠만족의 압박을 피해 동로마 제국에 망명하였다. 제국은 이들을 트라키아 변경에 정착시켜 국경 방어를 맡겼고, 일부는 제국군 기병 부대에 복무하였다. 14세기에도 알란 출신 병사들이 비잔티움-오스만 전쟁에 참전한 기록이 있으며, 이들은 게르만계 용병과 유사하게 비잔틴 군사 조직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요약하자면, 고트족을 중심으로 한 게르만계 민족은 동로마 제국 초기에 주요 군사적 조력자로 활약하였으며, 일부는 정치적 실권에 접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교, 언어, 문화의 차이는 그들의 동화 가능성을 제한하였고, 제국은 실용적 관점에서 이들을 수용하되 필요시 철저히 제어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게르만계 집단은 제국 사회 내에서 소멸하거나 동화되었고, 북방 용병의 전통은 바랑기아 친위대와 같은 새로운 형태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동로마 제국이 다민족 제국으로서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어떻게 활용하고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이다.
9.1.11. 기타 소수 민족[편집]
9.1.11.1. 라즈인과 조지아인[편집]
흑해 동남부와 캅카스 남부에는 고대부터 이베리아인(조지아인)과 라즈인으로 대표되는 조지아계 민족이 정착해 있었다. 라즈인은 서조지아의 콜키스 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6세기 초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의 패권 다툼인 라지카 전쟁 이후 동로마의 보호국이 되었다. 라즈 왕국은 명목상 동로마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자치적 통치를 유지했으며, 라즈인 귀족은 로마식 작위를 수여받고 제국 궁정에 참여하였다. 라즈인은 그리스 문화를 접하면서도 라즈어를 유지하였고, 정교회 신앙을 받아들여 종교적으로도 동로마와의 친연성이 높았다.
조지아인, 특히 동부의 이베리아인들도 제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10세기 말 동로마는 캅카스 서남부에 이베리아 테마를 설치하고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조지아 귀족들은 제국의 장군이나 태수로 복무하며, 아토스 산 수도원 건립 등 정교회 문화사업에 기여하였다. 특히 11세기 알라니아의 조지아 왕녀 마리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후로 즉위하면서 동로마-조지아 간 문화적 결합이 절정에 달하였다. 중세 후반에는 동로마와 조지아가 모두 몽골 및 튀르크계 세력에 대항하는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지아인, 특히 동부의 이베리아인들도 제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10세기 말 동로마는 캅카스 서남부에 이베리아 테마를 설치하고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조지아 귀족들은 제국의 장군이나 태수로 복무하며, 아토스 산 수도원 건립 등 정교회 문화사업에 기여하였다. 특히 11세기 알라니아의 조지아 왕녀 마리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후로 즉위하면서 동로마-조지아 간 문화적 결합이 절정에 달하였다. 중세 후반에는 동로마와 조지아가 모두 몽골 및 튀르크계 세력에 대항하는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9.1.11.2. 쿠르드족[편집]
쿠르드족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아르메니아 남부에 주로 거주하던 이란계 산악민으로, 동로마 제국 동방 접경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였다. 쿠르드족은 조직적인 국가 체계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지역적 유력 부족 중심의 연맹체 형태로 활동하였으며, 때로는 이슬람 세계 내 반독립 세력으로 제국과 외교적·군사적 접촉을 하였다. 9세기 초 테오필로스 황제 치세에는 쿠르드계 반란군 지도자 테오포보스가 제국으로 망명하여 장군이 되었고, 그의 휘하 병력은 제국 동방에서 이슬람 세력과 교전하였다. 10세기 마르바니드 왕조는 쿠르드족을 기반으로 하여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독자 정권을 세우고, 동로마와 외교를 맺었다.
쿠르드족은 정규 제국민으로 편입되지는 않았으나, 일부는 제국 군에 용병으로 복무하였다. 이들 병사들은 만지케르트 전투와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동원되었으며, 쿠르드 출신 지휘관이 등장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대체로 자치적이거나 외부 집단으로 남아 있었고, 제국 내 정착 공동체로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쿠르드족은 정규 제국민으로 편입되지는 않았으나, 일부는 제국 군에 용병으로 복무하였다. 이들 병사들은 만지케르트 전투와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동원되었으며, 쿠르드 출신 지휘관이 등장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대체로 자치적이거나 외부 집단으로 남아 있었고, 제국 내 정착 공동체로는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9.1.11.3. 튀르크계 유목민[편집]
중세 중기 이후, 흑해 북방 초원과 동방 변경을 중심으로 다양한 튀르크계 유목민 집단이 동로마와 접촉하였다. 이들은 때로는 침입자로, 때로는 용병으로 동로마 군사 체계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집단은 페체네그족과 쿠만족이다. 이들은 11세기 불가리아 및 헝가리 일대에서 활동하며, 제국과 충돌하다가 일부 무리는 패배 후 동로마에 귀순하였다. 제국은 이들을 발칸 변경지대에 정착시키고, 경기병으로 재편하여 십자군 국가 또는 불가리아 반란 진압에 투입하였다.
이들 집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불가리아화, 루마니아화 또는 그리스화되어, 후기에는 정교회를 신봉하는 튀르크어 사용자, 즉 가가우즈인과 같은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쿠만 출신 병사들은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까지 군에서 활약했으며, 제국이 점점 쇠퇴하는 시기에는 그들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11세기에는 오구즈 튀르크계 일부가 제국에 투항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발칸에 정착했으나, 전염병과 사회적 배제 속에 사라진 집단도 있다. 14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진출하면서 제국의 내전에 개입하였고, 황실 혼인 외교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제국 내부로의 튀르크 세력 유입이라기보다는 외세로서의 침투에 해당하며, 종국에는 동로마 제국의 패망으로 귀결되었다.
이들 집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불가리아화, 루마니아화 또는 그리스화되어, 후기에는 정교회를 신봉하는 튀르크어 사용자, 즉 가가우즈인과 같은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쿠만 출신 병사들은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까지 군에서 활약했으며, 제국이 점점 쇠퇴하는 시기에는 그들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11세기에는 오구즈 튀르크계 일부가 제국에 투항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발칸에 정착했으나, 전염병과 사회적 배제 속에 사라진 집단도 있다. 14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진출하면서 제국의 내전에 개입하였고, 황실 혼인 외교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제국 내부로의 튀르크 세력 유입이라기보다는 외세로서의 침투에 해당하며, 종국에는 동로마 제국의 패망으로 귀결되었다.
9.1.11.4. 훈족, 아바르족, 기타 북방 유목민[편집]
5세기 말 훈족은 아틸라의 지도 아래 동로마 제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강력한 세력이었으나, 그의 사후 분열되며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일부 훈 전사들은 동로마에 귀순하여 용병으로 복무하였으며, 이후 "훈"이라는 명칭은 넓은 의미에서 북방 기마 유목민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6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군에는 '훈족 궁수' 부대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실질적으로 아바르계 또는 투르크계 병사일 가능성이 크다.
아바르족은 6~7세기 발칸 북부를 장악한 유목 집단으로, 직접적으로 동로마의 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아바르 연합이 해체된 후, 일부 잔존 아바르 집단이 제국 내 소수 용병으로 흡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명확한 공동체로 제국 내에 남지는 않았지만, 그 후계 집단의 일부는 프랑크나 불가르 세계로 흡수되며 사라졌다.
아바르족은 6~7세기 발칸 북부를 장악한 유목 집단으로, 직접적으로 동로마의 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아바르 연합이 해체된 후, 일부 잔존 아바르 집단이 제국 내 소수 용병으로 흡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명확한 공동체로 제국 내에 남지는 않았지만, 그 후계 집단의 일부는 프랑크나 불가르 세계로 흡수되며 사라졌다.
9.1.11.5. 로마인(집시)[편집]
11세기경 동로마 제국 내에 등장한 로마니족은 인도 아대륙 기원으로 추정되는 이동 집단으로, 주로 점술, 대장장이, 음악 등 특정한 기능 노동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제국에서는 이들을 "아칭가노이"라 불렀으며, 초기에는 이단적 주술사로 경계되었으나 점차 도시 외곽에 정착하여 생업을 이어갔다. 이들은 중세 후반기 발칸 전역으로 퍼져 나가며 유럽 내 집시 공동체의 시초가 되었고, 동로마 후기 사회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독립적 요소로 기능하였다.
9.2. 언어[편집]
9.3. 종교[편집]
10. 로마의 유산[편집]
11. 관련 문서[편집]
12. 둘러보기 틀[편집]
|
[1] 로마 왕국 건국 기준[2] 로마 제국 건국 기준[3] 사두정치 시절 로마의 동서 분할 기준[4] 콘스탄티노폴리스 완성 기준[5]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 격상 기준[6] 로마의 최종적인 동서 분할 기준[7]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기준[8] 모레아 전제군주국 멸망 기준[9] 트라페준타 제국 멸망 기준[10]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멸망 기준[11] 1204년, 제4차 십자군[12] 1453년, 최종 멸망[13] 로마자 전사: Rhōmanía[14] 당사자들이 쓰던 이름. 라틴 제국 역시 공식 국호는 '로마니아'였다.[15] 로마자 전사: Basileía tōn Rhōmaíōn[16] 로마자 전사: Árchē tōn Rhōmaíōn[17] 로마자 전사: Politeia tōn Rhōmaíōn[18] 로마자 전사: Hellēnes[19] 1204년 이후 국토가 헬라스인들의 거주지로 한정되면서 용례가 늘어난 이름이다. Nicol, Donald M. (30 December 1967). "The Byzantine View of Western Europe". Greek, Roman, and Byzantine Studies. 8 (4): 318. ISSN 2159-3159[20] '그리스'를 말한다.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연장으로 거부하겠다는 의미와 함께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때때로 동로마를 '로마'라 칭하지 않고 '그리스'라고 불렀다. 같은 맥락에서 '유나스탄(Յունաստան, 이오니아(그리스의 땅))이나 '그리스 제국(Imperium Graecorum)' 등도 사용되었으며, 아예 그리스마저 빼버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imperium Constantinopolitanum)'이라고 하기도 했다. 다만 후술하듯이 서방 세계도 내심 동로마 제국이 옛 로마 제국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반증하듯 당대에 가장 많이 쓰여진 명칭은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이었다.[21] 이슬람에서의 명칭.[22] '비잔틴'과 함께 현대에 가장 널리 통용되는 이름이다.[23] 역시 '동로마'처럼 현대에 가장 통용되는 이름이다.[24]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동방의 수도로 지정되어 근처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워질 때까지도 수도 역할을 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여기서 생을 마감하였다.[25] 라틴어 Constantinopolis. 한국어와 영어로는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쓴다. 동로마 제국의 주 공용어인 그리스어로는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Kōnstantinoúpolis)라고 쓰는데,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현대 그리스어처럼 ντ의 τ를 /d/로 발음했고, ού는 이미 코이네 시절부터 /u/로 발음했기 때문에 실제 발음은 '콘스탄디누폴리스'다. 현대 그리스어로는 주로 콘스탄디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고 쓴다.[26]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지방 정권들의 분립기 시대이다. 그중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제국의 부활을 선포해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것이 아닌 로마 제국 그 자체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제국 당시엔 지리상의 문제로 님페온이 실질적인 수도였다.[27]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제국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바꾸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에도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제국 동방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가 널리 쓰였다. 로마법 대전에서 라틴어가 쓰이는 등 동로마에서 라틴어의 지위는 결코 '외국어'가 아니었으나, 7세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간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았고 의례 부분으로 나타나는 정도였다.[28] 자신들을 '로마인(Ῥωμαῖοι 로메이)'라고 불렀다.[29] 특정한 민족만이 로마인을 구성한 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다양한 민족들이 로마인 정체성으로 융화되었다.[30] 이탈리아인 등.[31] 고트인, 반달인 등 동게르만계와 프랑크인을 비롯한 서게르만계, 그리고 바랑인 근위대로 들어온 북게르만인(노르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게르만계 민족들이 유입되었다.[32] 초기 불가리아의 지배층인 불가르인은 튀르크계였으나 이후 슬라브화되었다.[33] 오리엔트 정교회(합성론), 단성론, 네스토리우스파, 비삼위일체파(아리우스파, 영지주의 등).[34] 공화정 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로마 고유의 전제정이었다.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거나 심각한 실정을 범할 경우 황제는 군단장이나 원로원의 반란을 직면해야 했으며 이렇게 새워진 왕조는 금방 시민의 인정을 받았으나 이전 왕조와 똑같은 한계를 지녔다. 동로마의 황제들은 자신의 통치를 신의 권위를 빌려 정당화하려 했으나 궁극적으로 동로마 멸망까지 이런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은 황제를 제위 세습이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으로 기술하고 있다.[35] 당시에는 행정수도 건설. 359년이 돼서야 로마시에만 두었던 수도시장 내지는 특별시장(Praefectus Urbi)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두었으며, 원로원 또한 로마의 그것과 동급으로 격상시켰다.[36] 니케아 제국(1204~1261년) 포함.[37] 이로 인하여 서방과 외교적 마찰도 많았으나 로마 제국은 외교적 불리함을 무릎쓰고라도 이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38] 그러나 서방에서도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이라 불렀고 바실리오스 2세의 군사 원정이 절정에 달하자 오히려 신성 로마 제국의 호칭을 자제하기도 하였다.[39] 영어권에선 추밀원(Privy Council)로 의역되기도 한다.[40] 하지만 오스만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면 폐위는 물론 처형당하기까지하여 오스만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었다.[41] 고대~코이네 그리스어 명칭은 케르소네소스.[42] 우크라이나의 도시 헤르손의 어원이 된 지역이지만, 오늘날의 헤르손이 아닌 세바스토폴에 위치했다. 이는 예카테리나 2세가 그리스 계획에 따라 도시를 건설할 당시에는 고대~중세 헤르소니소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서 실제 헤르소니소스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지역에 동명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 그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43] 공식 국호는 여전히 로마 제국이었다.[44]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제국에서 사용된 라틴어 용어로, 기본 뜻은 "조약에 의해 동맹된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용어는 특히 로마 제국이 외부의 이민족들과 맺은 군사 동맹관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