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정치 체계와 귀족 중심의 전통 위에, 제국 전역에 걸쳐 정비된 관료제와 행정 조직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여 복잡하게 조직된 작위 및 관직 체계를 형성하였으며, 제국의 정치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정치와 군사의 최고 통치자로서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집행할 권한을 지녔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 국가로서 동로마 제국이 유지되도록 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교회에 대한 외형적 수호자이자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다만 교리 해석과 신학적 결정에 관한 최종 권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집단에 있었으며, 황제는 성직자가 아닌 세속 통치자로서 교회와 국가의 조화를 유지하는 조율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황제의 지위는 전제 군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공화정적 요소 또한 제도적으로 일부 유지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계승한 황제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황위 계승은 엄격한 법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과 현실 정치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황제는 자녀에게 제위를 물려주기 위해 공동 통치자로 선임하거나, 유력한 장군이나 관료를 계승자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실제로는 군대, 원로원, 수도 시민 등 여러 세력이 황제 선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고, 이는 제위 계승이 권력 투쟁과 맞물려 다층적인 양상을 띠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거나 보조하는 다양한 존칭과 명예 칭호들이 존재하였고, 이는 제국의 문화 변동과 함께 변화를 겪었다.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면서 제국의 문화 기반은 라틴어 중심에서 그리스어 중심으로 이동하였고, 이에 따라 작위 명칭과 관직 호칭 또한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점차 대체되었다.
제국의 행정 구조는 고도로 정비된 관료 체계를 바탕으로 운영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군사, 재정, 외교, 사법 등 다양한 부서로 나뉘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였다. 고위 관료에게는 실질적인 행정 권한 외에도 명예 작위가 수여되었고, 이는 단순한 직무 명칭을 넘어 사회적 지위와 의전상의 위계를 반영하는 요소였다. 작위는 황제의 재량에 따라 수여되었으며, 귀족뿐 아니라 제국에 충성을 바친 인물에게도 주어졌다.
작위 체계는 시대에 따라 크게 세 차례 주요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이 강하게 유지되어 라틴어 기반의 명칭이 사용되었고, 이라클리오스 시기에 접어들어 그리스어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알렉시오스 1세의 통치기에 대대적인 행정 개혁이 단행되면서 작위와 관직 구조가 다시 정비되었고, 이 체계는 제국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제국의 영토 축소와 권위 약화로 인해 과도한 작위 수여가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작위의 실질적 의미는 점차 퇴색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작위는 실무 관직과는 구별되는 명예직으로 기능하기도 하였으며, 이 두 체계는 때때로 중첩되거나 분리되었다. 대표적인 명예 작위로는 마기스트로스, 세바스토스, 쿠로팔라테스 등이 있었고, 실무 관직으로는 로고테테스, 스트라테고스, 드롱가리오스 등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제국 내 위계와 행정 질서를 명확히 나누는 기준이 되었으며, 특히 수도와 지방의 통치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작위와 관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은 여러 시기의 문헌에 남아 있다. 『황제 통치지』는 외교와 행정 체계를 정리한 자료로, 콘스탄티노스 7세의 통치 시기를 중심으로 하며, 『클레토롤로기온』은 9세기 작위 체계를 종합적으로 기술하였다. 『관직에 대하여』는 후기 제국의 의전 구조를 설명한 자료로, 제국 말기의 작위 인플레이션 현상도 일부 반영하고 있다. 이들 문헌은 서로 다른 시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동로마의 작위 체계를 고찰할 때에는 시대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제국의 황제는 정치와 군사의 최고 통치자로서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집행할 권한을 지녔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 국가로서 동로마 제국이 유지되도록 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교회에 대한 외형적 수호자이자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다만 교리 해석과 신학적 결정에 관한 최종 권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집단에 있었으며, 황제는 성직자가 아닌 세속 통치자로서 교회와 국가의 조화를 유지하는 조율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황제의 지위는 전제 군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공화정적 요소 또한 제도적으로 일부 유지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계승한 황제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황위 계승은 엄격한 법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과 현실 정치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황제는 자녀에게 제위를 물려주기 위해 공동 통치자로 선임하거나, 유력한 장군이나 관료를 계승자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실제로는 군대, 원로원, 수도 시민 등 여러 세력이 황제 선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고, 이는 제위 계승이 권력 투쟁과 맞물려 다층적인 양상을 띠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거나 보조하는 다양한 존칭과 명예 칭호들이 존재하였고, 이는 제국의 문화 변동과 함께 변화를 겪었다.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면서 제국의 문화 기반은 라틴어 중심에서 그리스어 중심으로 이동하였고, 이에 따라 작위 명칭과 관직 호칭 또한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점차 대체되었다.
제국의 행정 구조는 고도로 정비된 관료 체계를 바탕으로 운영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군사, 재정, 외교, 사법 등 다양한 부서로 나뉘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였다. 고위 관료에게는 실질적인 행정 권한 외에도 명예 작위가 수여되었고, 이는 단순한 직무 명칭을 넘어 사회적 지위와 의전상의 위계를 반영하는 요소였다. 작위는 황제의 재량에 따라 수여되었으며, 귀족뿐 아니라 제국에 충성을 바친 인물에게도 주어졌다.
작위 체계는 시대에 따라 크게 세 차례 주요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이 강하게 유지되어 라틴어 기반의 명칭이 사용되었고, 이라클리오스 시기에 접어들어 그리스어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알렉시오스 1세의 통치기에 대대적인 행정 개혁이 단행되면서 작위와 관직 구조가 다시 정비되었고, 이 체계는 제국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제국의 영토 축소와 권위 약화로 인해 과도한 작위 수여가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작위의 실질적 의미는 점차 퇴색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작위는 실무 관직과는 구별되는 명예직으로 기능하기도 하였으며, 이 두 체계는 때때로 중첩되거나 분리되었다. 대표적인 명예 작위로는 마기스트로스, 세바스토스, 쿠로팔라테스 등이 있었고, 실무 관직으로는 로고테테스, 스트라테고스, 드롱가리오스 등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제국 내 위계와 행정 질서를 명확히 나누는 기준이 되었으며, 특히 수도와 지방의 통치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작위와 관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은 여러 시기의 문헌에 남아 있다. 『황제 통치지』는 외교와 행정 체계를 정리한 자료로, 콘스탄티노스 7세의 통치 시기를 중심으로 하며, 『클레토롤로기온』은 9세기 작위 체계를 종합적으로 기술하였다. 『관직에 대하여』는 후기 제국의 의전 구조를 설명한 자료로, 제국 말기의 작위 인플레이션 현상도 일부 반영하고 있다. 이들 문헌은 서로 다른 시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동로마의 작위 체계를 고찰할 때에는 시대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2. 궁정 작위[편집]
2.1. 로마 황제[편집]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국가의 정점에 선 최고 통치자였다. 황제는 모든 정치·군사적 권한을 손에 쥐고 제국의 질서 유지를 책임졌다. 스스로를 기독교 로마 황국의 수호자로 여기며, 신의 부름을 받아 제국을 다스린다는 신성한 위상을 지녔다. 황제는 세속 군주로서 교회를 보호하고 공의회를 소집할 권위를 가졌지만, 신학 교리 결정의 최종 권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등 성직자들에게 있었다. 이에 따라 황제는 국가와 교회의 조화를 유지하는 조율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황제의 지위는 전제군주적 성격을 띠었으나, 명목상으로는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일부 이어받아 원로원과 군대의 추대에 의해 선출되는 개념도 남아 있었다. 이러한 반(半)공화정적 요소로 인해 제위 계승은 법적으로 정해진 왕위계승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통과 현실 정치의 역학에 따라 전개되었다.
동로마 황제들은 자신의 생전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거나 유력 장군·고관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는 방식으로 황위 승계를 도모하였다. 황제가 제때 후계를 지정하지 못하면 군대, 관료, 원로원, 수도 시민 등이 제위 쟁탈전에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쿠데타와 반란이 빈번하였다. 특히 군대의 지지가 황제 권위의 핵심이어서, 군사적 실패나 정변으로 황제가 폐위되거나 수도원으로 밀려나는 일도 흔했다. 예를 들어 일부 황제들은 전쟁 패배 후 무능하다는 이유로 축출되기도 했다. 황제의 지위는 그야말로 권력 투쟁의 중심이었고, 동로마 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황제가 피살되거나 실각하는 등 극적인 정치 변동이 이어졌다.
황제라는 칭호와 그 의전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초창기 로마 제국의 전통에 따라 황제들은 라틴어 칭호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등을 사용하였으나, 7세기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후로는 공용어가 그리스어로 전환되면서 그리스어 칭호인 “바실레우스”가 공식 황제 호칭으로 정착되었다. 바실레우스는 원래 “왕”을 뜻했지만 이제 로마인의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또한 황제들은 “아우토크라토르”(스스로 다스리는 자)나 “퀴리오스”(주님, 제국의 지배자) 같은 칭호도 함께 사용하며 절대 군주의 지위를 강조했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인의 바실레우스” 칭호를 오직 자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서방의 다른 통치자들은 동등한 황제가 아닌 “렉스”(왕)로 낮추어 불렀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800년 서로마 황제가 부활했을 때도 동로마는 오랫동안 그들을 정통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의 위엄은 여러 의례와 상징을 통해 드러났다. 황제는 항상 자색 비단으로 만든 제복을 입고, 머리에 황제관(디아뎀)을 썼으며, 등장할 때는 친위대의 호위를 받았다. 즉위식은 성소피아 대성당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축성 아래 거행되었고, 황제가 되면 “포르피로게니토스”(Porphyrogenitos, 자색에서 태어난 자)로 태어난 황족임을 내세워 정통성을 강조했다. ‘자색 탄생’이라는 뜻의 이 칭호는 재임 중인 황제의 합법적 아내에게서 황궁의 자색 방에서 태어난 자녀에게만 주어졌는데, 이는 해당 황자가 다른 경쟁자보다 확고한 제위 정통성을 지녔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포르피로γέν니토스 황제가 즉위하면 그의 출생 배경이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하여 반대 세력을 잠재웠다.
황제는 제국 내부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특별한 위상을 가졌다. 주변국의 군주들은 동로마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혼인 관계를 맺어 그 권위를 인정받고자 했다. 황제는 외국 군주에게 동로마의 고위 작위를 하사함으로써 우월한 지위를 과시하기도 했는데, 70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불가르족 수장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준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사례에서 보이듯, 동로마 황제는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선 군주로 여겨 제국 체계 밖의 통치자들까지 포섭하려 하였다.
세월이 흐르며 황제의 권위에도 부침이 있었다. 특히 11세기 이후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황제들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규모로 작위를 남발하였고, 황제 자신도 강력한 장군이나 귀족 가문에 의해 옹립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영토 축소와 군사력 약화로 황제의 통제력이 떨어졌고, 과도한 작위 수여로 황실 작위의 권威마저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동로마 제국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남아 마지막 순간까지 제국의 명맥을 지켰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함으로써 황제직의 종말을 장식하였다.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동로마 황제의 계보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그 전통과 위상은 오랫동안 유럽과 중동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동로마 황제들은 자신의 생전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거나 유력 장군·고관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는 방식으로 황위 승계를 도모하였다. 황제가 제때 후계를 지정하지 못하면 군대, 관료, 원로원, 수도 시민 등이 제위 쟁탈전에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쿠데타와 반란이 빈번하였다. 특히 군대의 지지가 황제 권위의 핵심이어서, 군사적 실패나 정변으로 황제가 폐위되거나 수도원으로 밀려나는 일도 흔했다. 예를 들어 일부 황제들은 전쟁 패배 후 무능하다는 이유로 축출되기도 했다. 황제의 지위는 그야말로 권력 투쟁의 중심이었고, 동로마 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황제가 피살되거나 실각하는 등 극적인 정치 변동이 이어졌다.
황제라는 칭호와 그 의전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초창기 로마 제국의 전통에 따라 황제들은 라틴어 칭호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등을 사용하였으나, 7세기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후로는 공용어가 그리스어로 전환되면서 그리스어 칭호인 “바실레우스”가 공식 황제 호칭으로 정착되었다. 바실레우스는 원래 “왕”을 뜻했지만 이제 로마인의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또한 황제들은 “아우토크라토르”(스스로 다스리는 자)나 “퀴리오스”(주님, 제국의 지배자) 같은 칭호도 함께 사용하며 절대 군주의 지위를 강조했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인의 바실레우스” 칭호를 오직 자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서방의 다른 통치자들은 동등한 황제가 아닌 “렉스”(왕)로 낮추어 불렀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800년 서로마 황제가 부활했을 때도 동로마는 오랫동안 그들을 정통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의 위엄은 여러 의례와 상징을 통해 드러났다. 황제는 항상 자색 비단으로 만든 제복을 입고, 머리에 황제관(디아뎀)을 썼으며, 등장할 때는 친위대의 호위를 받았다. 즉위식은 성소피아 대성당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축성 아래 거행되었고, 황제가 되면 “포르피로게니토스”(Porphyrogenitos, 자색에서 태어난 자)로 태어난 황족임을 내세워 정통성을 강조했다. ‘자색 탄생’이라는 뜻의 이 칭호는 재임 중인 황제의 합법적 아내에게서 황궁의 자색 방에서 태어난 자녀에게만 주어졌는데, 이는 해당 황자가 다른 경쟁자보다 확고한 제위 정통성을 지녔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포르피로γέν니토스 황제가 즉위하면 그의 출생 배경이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하여 반대 세력을 잠재웠다.
황제는 제국 내부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특별한 위상을 가졌다. 주변국의 군주들은 동로마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혼인 관계를 맺어 그 권위를 인정받고자 했다. 황제는 외국 군주에게 동로마의 고위 작위를 하사함으로써 우월한 지위를 과시하기도 했는데, 70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불가르족 수장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준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사례에서 보이듯, 동로마 황제는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선 군주로 여겨 제국 체계 밖의 통치자들까지 포섭하려 하였다.
세월이 흐르며 황제의 권위에도 부침이 있었다. 특히 11세기 이후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황제들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규모로 작위를 남발하였고, 황제 자신도 강력한 장군이나 귀족 가문에 의해 옹립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영토 축소와 군사력 약화로 황제의 통제력이 떨어졌고, 과도한 작위 수여로 황실 작위의 권威마저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동로마 제국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남아 마지막 순간까지 제국의 명맥을 지켰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함으로써 황제직의 종말을 장식하였다.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동로마 황제의 계보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그 전통과 위상은 오랫동안 유럽과 중동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2. 황후[편집]
동로마 제국의 황후는 황제의 배우자로서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여성이었다. 황후는 “바실리사”(여제) 또는 “아우구스타” 등의 칭호로 불리며, 황제의 통치에 의전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황후는 대관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책봉되었고, 남편인 황제와 함께 궁정 의례와 국가 행사에 참석하며 황실의 존엄을 상징하였다. 그녀는 제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 황제를 보좌하고 자선 사업과 궁정 행사를 주관했으며, 황실 가족의 안녕을 책임졌다.
동로마에서 황후의 권한은 공식 직책보다는 개인적 영향력에 크게 의존했다. 일부 황후들은 단순한 배우자를 넘어 국가 통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황제가 어리거나 병약할 경우 황후가 섭정으로서 국정을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유명한 예로 9세기 이래네 황후는 남편 사망 후 황태자 아들이 미성년인 상황에서 단독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나아가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여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단독 통치한 사례를 남겼다. 또한 11세기 조이와 테오도라 자매 황후는 황제가 없던 기간 공동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처럼 황후는 공식적으로는 황제를 보좌하는 위치였지만, 정세에 따라서는 실질적인 지배자로 부상하기도 했다.
황후는 황실의 위엄을 나타내는 다양한 특권을 누렸다. 황후에게는 “유세베스타테 아우구스타”[1]라는 경칭이 부여되었으며, 황후의 의복과 보석 역시 자색과 황금으로 꾸며져 그 지위를 드러냈다. 황후는 자체적인 시종들과 궁정 여관들을 거느렸는데, 특히 황후의 궁정은 여성 관원들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황후의 측근 여성들이 황실 생활과 의례를 관장하였다. 황후에게는 공식 문서에 인장을 찍거나 자선기금을 운용하는 등의 권한도 일부 주어져 국정에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황후는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주변국과의 동맹을 위해 황제가 외국 공주와 혼인하거나, 반대로 제국의 공주를 다른 나라 왕에게 시집 보내는 등 혼인 동맹 정책이 활발했는데, 이때 황후의 가문적 배경이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황후의 지위는 황제가 교체되면 급변하기도 했다. 남편 황제가 폐위되거나 사망하면 황후의 처지도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이전 황후는 황태후로서 존중받기도 하지만, 권력 투쟁의 와중에 황후가 수도원으로 밀려나거나 심지어 제거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유력 가문의 딸로서 새 황제의 아내가 된 여성은 곧바로 황후로 책봉되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변동 속에서도 황후라는 작위는 황제권의 필수적 반려로서 비잔티움 국가 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다. 비잔티움 말기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도 황후들은 제국의 존엄을 지키는 상징적 존재로 활동했으며, 마지막 황후까지 황실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동로마에서 황후의 권한은 공식 직책보다는 개인적 영향력에 크게 의존했다. 일부 황후들은 단순한 배우자를 넘어 국가 통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황제가 어리거나 병약할 경우 황후가 섭정으로서 국정을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유명한 예로 9세기 이래네 황후는 남편 사망 후 황태자 아들이 미성년인 상황에서 단독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나아가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여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단독 통치한 사례를 남겼다. 또한 11세기 조이와 테오도라 자매 황후는 황제가 없던 기간 공동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처럼 황후는 공식적으로는 황제를 보좌하는 위치였지만, 정세에 따라서는 실질적인 지배자로 부상하기도 했다.
황후는 황실의 위엄을 나타내는 다양한 특권을 누렸다. 황후에게는 “유세베스타테 아우구스타”[1]라는 경칭이 부여되었으며, 황후의 의복과 보석 역시 자색과 황금으로 꾸며져 그 지위를 드러냈다. 황후는 자체적인 시종들과 궁정 여관들을 거느렸는데, 특히 황후의 궁정은 여성 관원들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황후의 측근 여성들이 황실 생활과 의례를 관장하였다. 황후에게는 공식 문서에 인장을 찍거나 자선기금을 운용하는 등의 권한도 일부 주어져 국정에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황후는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주변국과의 동맹을 위해 황제가 외국 공주와 혼인하거나, 반대로 제국의 공주를 다른 나라 왕에게 시집 보내는 등 혼인 동맹 정책이 활발했는데, 이때 황후의 가문적 배경이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황후의 지위는 황제가 교체되면 급변하기도 했다. 남편 황제가 폐위되거나 사망하면 황후의 처지도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이전 황후는 황태후로서 존중받기도 하지만, 권력 투쟁의 와중에 황후가 수도원으로 밀려나거나 심지어 제거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유력 가문의 딸로서 새 황제의 아내가 된 여성은 곧바로 황후로 책봉되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변동 속에서도 황후라는 작위는 황제권의 필수적 반려로서 비잔티움 국가 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다. 비잔티움 말기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도 황후들은 제국의 존엄을 지키는 상징적 존재로 활동했으며, 마지막 황후까지 황실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2.3. 데스포테스[편집]
데스포테스는 “주인(lord)”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작위였다. 본래 고대에는 전제 군주를 가리키는 일반 명칭이었으나, 중세 비잔티움 시대에 들어 공동 황제 혹은 황제의 후계자를 위한 특별 작위로 제정되었다. 초기 사용 사례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황제가 “데스포테스” 칭호를 전제 군주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바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칭호는 황족 중 황태자나 사위 등에게 부여하는 친왕(親王) 작위로 변모하였다.
데스포테스 작위는 12세기에 공식화되어 황제가 수여하는 최고위 명예 칭호로 자리잡았다. 특히 콤네노스 왕조 이후 황제들은 자신과 가까운 인척에게 이 작위를 주어 황위 계승 서열 1순위임을 나타냈다. 12세기 중엽, 아직 아들이 없던 마누일 1세 콤네노스는 헝가리의 왕자 벨라에게 자신의 딸과 약혼시키는 조건으로 데스포테스 작위를 수여하였다. 벨라는 이로써 황제의 사위이자 추정 상속인이 되어 일시적으로나마 동로마의 공동 통치자 대우를 받았다. 마누일 1세는 이 혼인을 통해 헝가리를 비잔티움 영향권에 두고자 했지만, 이후 황제가 친아들을 얻고 헝가리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벨라의 제위 계승은 무산되었다. 비록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 사건은 데스포테스 작위가 외국 통치자에게까지 수여될 만큼 유연하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도 데스포테스는 황제 다음가는 최고 작위로서 계속 수여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의 황자들은 제국의 변경 지방을 “데스포타트”(Despotate)라는 이름으로 통치하며 준(準)독립 군주 노릇을 했는데, 이때 데스포테스 작위가 공식 칭호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모레아스[2]를 다스린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통치자들은 모두 데스포테스 칭호를 지닌 황제 일가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데스포테스는 황제가 아닌 황족이 독자적으로 영지를 다스릴 때도 사용된 작위였다. 사실상 분봉 군주에 가까운 지위였지만 어디까지나 황제의 권위 아래 인정되는 칭호였기에, 데스포테스는 제국 내신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동로마 황실의 위계를 과시하는 명예였다.
데스포테스는 의전 서열에서 황제를 제외하면 최상위에 위치했다. 황제가 즉위식에서 사용하는 자주색 신발을 데스포테스도 신을 수 있었고, 황제에 버금가는 예복과 예식을 허용받았다. 여성형 칭호인 “데스포이나”는 데스포테스의 아내나 여성 친왕에게 주어졌으며, 서방 언어로는 “여왕”에 해당하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데스포테스 작위는 14세기까지 계속 수여되었으나, 제국 말기의 혼란 속에서 남발되면서 그 권위가 다소 희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도 황제가 되기 전 모레아의 데스포테스로 봉직하였듯이, 데스포테스는 끝까지 동로마 황실 작위 체계의 정점에 속하는 영예로운 칭호로 남았다.
데스포테스 작위는 12세기에 공식화되어 황제가 수여하는 최고위 명예 칭호로 자리잡았다. 특히 콤네노스 왕조 이후 황제들은 자신과 가까운 인척에게 이 작위를 주어 황위 계승 서열 1순위임을 나타냈다. 12세기 중엽, 아직 아들이 없던 마누일 1세 콤네노스는 헝가리의 왕자 벨라에게 자신의 딸과 약혼시키는 조건으로 데스포테스 작위를 수여하였다. 벨라는 이로써 황제의 사위이자 추정 상속인이 되어 일시적으로나마 동로마의 공동 통치자 대우를 받았다. 마누일 1세는 이 혼인을 통해 헝가리를 비잔티움 영향권에 두고자 했지만, 이후 황제가 친아들을 얻고 헝가리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벨라의 제위 계승은 무산되었다. 비록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 사건은 데스포테스 작위가 외국 통치자에게까지 수여될 만큼 유연하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도 데스포테스는 황제 다음가는 최고 작위로서 계속 수여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의 황자들은 제국의 변경 지방을 “데스포타트”(Despotate)라는 이름으로 통치하며 준(準)독립 군주 노릇을 했는데, 이때 데스포테스 작위가 공식 칭호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모레아스[2]를 다스린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통치자들은 모두 데스포테스 칭호를 지닌 황제 일가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데스포테스는 황제가 아닌 황족이 독자적으로 영지를 다스릴 때도 사용된 작위였다. 사실상 분봉 군주에 가까운 지위였지만 어디까지나 황제의 권위 아래 인정되는 칭호였기에, 데스포테스는 제국 내신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동로마 황실의 위계를 과시하는 명예였다.
데스포테스는 의전 서열에서 황제를 제외하면 최상위에 위치했다. 황제가 즉위식에서 사용하는 자주색 신발을 데스포테스도 신을 수 있었고, 황제에 버금가는 예복과 예식을 허용받았다. 여성형 칭호인 “데스포이나”는 데스포테스의 아내나 여성 친왕에게 주어졌으며, 서방 언어로는 “여왕”에 해당하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데스포테스 작위는 14세기까지 계속 수여되었으나, 제국 말기의 혼란 속에서 남발되면서 그 권위가 다소 희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도 황제가 되기 전 모레아의 데스포테스로 봉직하였듯이, 데스포테스는 끝까지 동로마 황실 작위 체계의 정점에 속하는 영예로운 칭호로 남았다.
2.4. 세바스토크라토르[편집]
세바스토크라토르는 “존엄한 통치자(Venerable Ruler)”를 뜻하는 작위로, 11세기 말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새로 만들어낸 황족 칭호이다. 알렉시오스 1세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아우토크라토르와 존엄을 뜻하는 세바스토스라는 말을 결합하여 세바스토크라토르라는 독특한 칭호를 창안하였다. 그는 즉위 후 제위 경쟁에서 자신을 도왔던 형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를 첫 번째 세바스토크라토르로 임명하였는데, 이로써 이사키오스는 황제의 형제로서 특별한 예우를 받게 되었다.
세바스토크라토르는 황제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남성에게만 주어지는 명예 작위였다. 이 칭호 자체에는 구체적인 통치 권한이나 행정 직책이 따르지 않았고, “황제의 존엄을 함께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다시 말해 세바스토크라토르는 황제의 가장 가까운 친족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 황제를 제외하면 최고 수준의 위계를 부여하는 호칭이었다. 실제로 알렉시오스 1세 이후 세바스토크라토르는 항상 황제의 형제나 아들을 위해 남겨두어졌고, 의전 서열에서도 다른 귀족 작위들을 제치고 두 번째 높은 칭호로 인정되었다. 다만 12세기 중반 마누일 1세가 데스포테스 작위를 도입한 후부터는 세바스토크라토르는 위계상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내려가게 되었다.
세바스토크라토르를 받은 이는 황실 일원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공식 행사에서는 황제 바로 아래 자리하며, 황실 연회나 의식에서 특수한 복색과 장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아내에게는 여성형 칭호인 세바스토크라토리사가 주어져 황녀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이 작위는 원칙적으로 동로마 황족에게만 수여되었으나 드물게 외국의 군주에게 내려지기도 했다. 세르비아의 대공 스테판 네마냐는 알렉시오스 3세로부터 세바스토크라토르 작위를 받았고, 불가리아의 귀족 칼로얀도 한때 이 칭호를 사용하며 비잔티움 황실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이러한 예는 주변국의 지배층이 동로마의 작위를 통해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1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졌고,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한층 격하된 명예 칭호로 남았다. 제국의 영토 축소와 더불어 황족의 수가 늘어나자, 세바스토크라토르 작위도 여러 황족과 외국 귀족들에게 수여되어 예전만큼 희귀하거나 지고한 칭호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세바스토크라토르는 여전히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에게만 허용되는 작위였고, 동로마 멸망 때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세바스토크라토르는 황제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남성에게만 주어지는 명예 작위였다. 이 칭호 자체에는 구체적인 통치 권한이나 행정 직책이 따르지 않았고, “황제의 존엄을 함께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다시 말해 세바스토크라토르는 황제의 가장 가까운 친족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 황제를 제외하면 최고 수준의 위계를 부여하는 호칭이었다. 실제로 알렉시오스 1세 이후 세바스토크라토르는 항상 황제의 형제나 아들을 위해 남겨두어졌고, 의전 서열에서도 다른 귀족 작위들을 제치고 두 번째 높은 칭호로 인정되었다. 다만 12세기 중반 마누일 1세가 데스포테스 작위를 도입한 후부터는 세바스토크라토르는 위계상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내려가게 되었다.
세바스토크라토르를 받은 이는 황실 일원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공식 행사에서는 황제 바로 아래 자리하며, 황실 연회나 의식에서 특수한 복색과 장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아내에게는 여성형 칭호인 세바스토크라토리사가 주어져 황녀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이 작위는 원칙적으로 동로마 황족에게만 수여되었으나 드물게 외국의 군주에게 내려지기도 했다. 세르비아의 대공 스테판 네마냐는 알렉시오스 3세로부터 세바스토크라토르 작위를 받았고, 불가리아의 귀족 칼로얀도 한때 이 칭호를 사용하며 비잔티움 황실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이러한 예는 주변국의 지배층이 동로마의 작위를 통해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1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졌고,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한층 격하된 명예 칭호로 남았다. 제국의 영토 축소와 더불어 황족의 수가 늘어나자, 세바스토크라토르 작위도 여러 황족과 외국 귀족들에게 수여되어 예전만큼 희귀하거나 지고한 칭호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세바스토크라토르는 여전히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에게만 허용되는 작위였고, 동로마 멸망 때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2.5. 카이사르[편집]
카이사르는 본래 고대 로마 시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한 칭호로, 로마 제정 초기에는 황제를 가리키는 공식 호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서는 부제(副帝)에 해당하는 작위로 위상이 변화하였다. 즉, 황제에 버금가는 하위 공동황제나 명백한 황위 계승권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로 활용된 것이다. 카이사르 작위를 받은 이는 명목상 황제에 다음가는 서열로서 광범위한 특권과 막대한 명예를 누렸다. 황제는 이 칭호를 통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된 인물에게 권위를 부여하거나, 협력자에게 최고위 포상을 내렸다.
동로마에서 카이사르 작위의 중요성은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동로마 초기에 카이사르는 황제 아래 1인자로서 존중받았으나,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세바스토크라토르 작위를 신설하면서 카이사르는 제3위 작위로 내려앉았다. 이어 12세기 마누일 1세가 데스포테스를 도입하자 카이사르는 네 번째 서열이 되었지만, 여전히 최상위 칭호군에 속했다. 이러한 서열 변화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작위 보유자는 여전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카이사르는 극소수의 황족이나 특별히 공헌한 고관에게만 수여되었으며, 때때로 뛰어난 외국 통치자에게도 예외적으로 하사되었다.
카이사르 작위의 대외 수여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705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불가르족 칸인 테르벨에게 이 칭호를 부여한 일이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폐위되었다가 불가르족의 지원으로 황위에 복귀한 대가로 테르벨에게 카이사르 작위를 주었는데, 이는 한 외국 군주를 동로마의 부제로 인정한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후 테르벨은 비잔티움의 동맹자로서 “불가리아의 카이사르”라는 위신을 갖게 되었고, 훗날 이 칭호는 슬라브어권에서 “차르”(황제를 뜻하는 군주 칭호)로 발전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카이사르 작위는 제국 내부뿐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특정 인물에게 최고위급 위상을 부여하는 외교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동로마 후기에는 황제의 자녀들,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자녀들, 그리고 친밀한 외국 군주들이 카이사르 작위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작위 체계의 남발로 인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자, 콤네노스 왕조 시기에는 “프로토카이사르”[3] 같은 접두어를 붙인 변형 작위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칭호들은 일시적인 처방에 그쳤고, 카이사르 본연의 명예는 시간이 지나며 퇴색해갔다. 결국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말기에는 카이사르 칭호 자체보다 더 높은 칭호들이 난립하여, 카이사르는 황족 방계나 유력 귀족 정도가 받는 작위로 격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 멸망 때까지 카이사르 작위는 황실 작위 목록에서 없어지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그 이름은 이후에도 동유럽 세계에서 차르라는 군주 칭호로 명맥을 이어갔다.
동로마에서 카이사르 작위의 중요성은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동로마 초기에 카이사르는 황제 아래 1인자로서 존중받았으나,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세바스토크라토르 작위를 신설하면서 카이사르는 제3위 작위로 내려앉았다. 이어 12세기 마누일 1세가 데스포테스를 도입하자 카이사르는 네 번째 서열이 되었지만, 여전히 최상위 칭호군에 속했다. 이러한 서열 변화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작위 보유자는 여전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카이사르는 극소수의 황족이나 특별히 공헌한 고관에게만 수여되었으며, 때때로 뛰어난 외국 통치자에게도 예외적으로 하사되었다.
카이사르 작위의 대외 수여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705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불가르족 칸인 테르벨에게 이 칭호를 부여한 일이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폐위되었다가 불가르족의 지원으로 황위에 복귀한 대가로 테르벨에게 카이사르 작위를 주었는데, 이는 한 외국 군주를 동로마의 부제로 인정한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후 테르벨은 비잔티움의 동맹자로서 “불가리아의 카이사르”라는 위신을 갖게 되었고, 훗날 이 칭호는 슬라브어권에서 “차르”(황제를 뜻하는 군주 칭호)로 발전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카이사르 작위는 제국 내부뿐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특정 인물에게 최고위급 위상을 부여하는 외교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동로마 후기에는 황제의 자녀들,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자녀들, 그리고 친밀한 외국 군주들이 카이사르 작위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작위 체계의 남발로 인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자, 콤네노스 왕조 시기에는 “프로토카이사르”[3] 같은 접두어를 붙인 변형 작위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칭호들은 일시적인 처방에 그쳤고, 카이사르 본연의 명예는 시간이 지나며 퇴색해갔다. 결국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말기에는 카이사르 칭호 자체보다 더 높은 칭호들이 난립하여, 카이사르는 황족 방계나 유력 귀족 정도가 받는 작위로 격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 멸망 때까지 카이사르 작위는 황실 작위 목록에서 없어지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그 이름은 이후에도 동유럽 세계에서 차르라는 군주 칭호로 명맥을 이어갔다.
2.6. 노빌리시모스[편집]
노빌리시모스는 라틴어 “노빌리시무스”(Nobilissimus, “가장 고귀한 자”)에서 유래한 칭호로, 초기 동로마 제국에서 카이사르 바로 아래에 위치했던 황족 작위이다. 본래 황제와 가장 가까운 친인척에게만 수여되던 작위로서, 제위 계승권이 있는 황자나 사위 등이 노빌리시모스로 임명되었다. 이 칭호를 받은 이는 황실 일원으로서 매우 고귀한 대우를 받았으며, 의복과 행렬에서 특별한 예우를 누렸다. 노빌리시모스는 한때 카이사르 다음가는 2인자 칭호였기에 그 위신이 대단하여, 8세기경까지도 수여자가 극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11세기 콤네노스 왕조 시대에 들어 노빌리시모스의 위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자신의 측근들과 외국 유력자들에게까지 이 칭호를 베풀면서, 예전에 비해 더 많은 인물이 노빌리시모스가 되었다. 그 결과 원래의 희소성과 권위가 흐려지게 되자, 황실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프로토노빌리시모스”[4]라는 강화된 칭호를 만들어 가장 특별한 경우에만 부여하고, 기존 노빌리시모스 작위는 다소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며 지위가 내려가자, 한층 장황한 칭호인 “프로토노빌리시모히페르타토스”[5] 같은 극단적인 형태까지 도입되었다. 이러한 접두사가 붙은 복잡한 작위들은 12세기 작위 체계의 남발을 보여주는 단면이 되었다.
결국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쯤에 이르러 원래의 노빌리시모스 작위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도입되었던 강화 작위들 중 일부가 명맥을 이어, 지방 통치자나 관원에게 명예 칭호로 수여되었다. 특히 프로토노빌리시모히페르타토스는 지방 관리들의 칭호로 쓰이며 명예직화하였다. 노빌리시모스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그 유산은 이러한 변형된 칭호들 속에 남았다. 이처럼 노빌리시모스는 작위 체계의 변화와 더불어 흥망을 겪은 칭호로, 초기에는 황제 가문의 혈통을 상징하는 최고 작위였으나 후기에는 행정 귀족의 명예 칭호로 변모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11세기 콤네노스 왕조 시대에 들어 노빌리시모스의 위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자신의 측근들과 외국 유력자들에게까지 이 칭호를 베풀면서, 예전에 비해 더 많은 인물이 노빌리시모스가 되었다. 그 결과 원래의 희소성과 권위가 흐려지게 되자, 황실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프로토노빌리시모스”[4]라는 강화된 칭호를 만들어 가장 특별한 경우에만 부여하고, 기존 노빌리시모스 작위는 다소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며 지위가 내려가자, 한층 장황한 칭호인 “프로토노빌리시모히페르타토스”[5] 같은 극단적인 형태까지 도입되었다. 이러한 접두사가 붙은 복잡한 작위들은 12세기 작위 체계의 남발을 보여주는 단면이 되었다.
결국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쯤에 이르러 원래의 노빌리시모스 작위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도입되었던 강화 작위들 중 일부가 명맥을 이어, 지방 통치자나 관원에게 명예 칭호로 수여되었다. 특히 프로토노빌리시모히페르타토스는 지방 관리들의 칭호로 쓰이며 명예직화하였다. 노빌리시모스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그 유산은 이러한 변형된 칭호들 속에 남았다. 이처럼 노빌리시모스는 작위 체계의 변화와 더불어 흥망을 겪은 칭호로, 초기에는 황제 가문의 혈통을 상징하는 최고 작위였으나 후기에는 행정 귀족의 명예 칭호로 변모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7. 쿠로팔라테스[편집]
쿠로팔라테스는 라틴어 “쿠라 팔라티”[6]에서 유래한 작위로, 직역하면 “궁정 담당관”이라는 의미이다. 이 칭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6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전해지며, 본래 황궁의 관리와 행정을 책임지는 직책에서 비롯되었다. 황궁 내 의전과 운영을 총괄하는 고관에게 주어진 칭호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쿠로팔라테스는 단순한 직무 이상의 명예를 띠게 되었다.
쿠로팔라테스 칭호를 보유한 이는 황제와 지근거리에서 일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궁정 운영을 책임진다는 명목상 역할 덕분에 황제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조언자 겸 권력자로 부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쿠로팔라테스 작위에는 막대한 명성과 부가 따르게 되었고, 7~8세기경에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존귀한 칭호로 자리매김하였다. 황실의 중요한 남성 구성원 – 이를테면 황제의 사위나 형제 – 에게만 수여되는 것이 관례였고, 이 칭호를 받는 것 자체가 황제와 특별한 관계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증표였다.
특히 9세기경, 쿠로팔라테스는 파트리키오스보다도 위에 놓이는 최고 귀족 칭호로 인정되었다. 예를 들어 포티오스 같은 저명한 인물이 마기스트로스와 함께 쿠로팔라테스 칭호를 받은 사례도 있었는데, 이는 그가 황제에 버금가는 신임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11세기에 들어 쿠로팔라테스의 위상은 점차 하락하였다. 제국의 권력이 주변 여러 민족과 공유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황제들은 이 칭호를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의 왕족 등 외국 봉신 군주들에게 수여하기 시작했다. 이제 쿠로팔라테스는 제국 내부보다는 국외 친선용 칭호로 활용되었고, 동로마 황실은 대신 새로운 국내 작위들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결국 쿠로팔라테스 작위는 콤네노스 왕조 이후 제국 내부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외국 군주들에게 주는 명예 칭호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소멸했다. 한때 황실 핵심 인물의 상징이었던 이 칭호는 이렇게 그 역할을 다했지만, 그 이름은 오랫동안 “황제의 궁정관리이자 최측근”의 대명사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쿠로팔라테스 칭호를 보유한 이는 황제와 지근거리에서 일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궁정 운영을 책임진다는 명목상 역할 덕분에 황제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조언자 겸 권력자로 부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쿠로팔라테스 작위에는 막대한 명성과 부가 따르게 되었고, 7~8세기경에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존귀한 칭호로 자리매김하였다. 황실의 중요한 남성 구성원 – 이를테면 황제의 사위나 형제 – 에게만 수여되는 것이 관례였고, 이 칭호를 받는 것 자체가 황제와 특별한 관계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증표였다.
특히 9세기경, 쿠로팔라테스는 파트리키오스보다도 위에 놓이는 최고 귀족 칭호로 인정되었다. 예를 들어 포티오스 같은 저명한 인물이 마기스트로스와 함께 쿠로팔라테스 칭호를 받은 사례도 있었는데, 이는 그가 황제에 버금가는 신임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11세기에 들어 쿠로팔라테스의 위상은 점차 하락하였다. 제국의 권력이 주변 여러 민족과 공유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황제들은 이 칭호를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의 왕족 등 외국 봉신 군주들에게 수여하기 시작했다. 이제 쿠로팔라테스는 제국 내부보다는 국외 친선용 칭호로 활용되었고, 동로마 황실은 대신 새로운 국내 작위들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결국 쿠로팔라테스 작위는 콤네노스 왕조 이후 제국 내부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외국 군주들에게 주는 명예 칭호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소멸했다. 한때 황실 핵심 인물의 상징이었던 이 칭호는 이렇게 그 역할을 다했지만, 그 이름은 오랫동안 “황제의 궁정관리이자 최측근”의 대명사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2.8. 세바스토스[편집]
세바스토스는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라틴어 “아우구스투스”[7]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이다. 원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황제들이 사용한 최고 존호였는데, 동로마에서는 이를 직역한 세바스토스를 도입하여 황제와 관련된 경칭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황제 자신을 가리켜 세바스토스라 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11세기 후반부터 세바스토스는 별도의 귀족 칭호로 분리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는 즉위 후 자신의 둘째 형제 등 가까운 친척들에게 세바스토스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를 통해 황제가 아닌 황족 남성들에게 “존엄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황실 내 위계를 세분화하려 한 것이다. 세바스토스의 여성형은 세바스테로 불렸으며, 황실 여성에게도 드물게 수여되었다. 또한 알렉시오스 1세는 둘째 형제인 아드리아노스에게 특별히 “프로토세바스토스”[8]라는 변형 칭호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는 세바스토스 중에서도 으뜸가는 자라는 의미였다. 프로토세바스토스 칭호는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나 룸 술탄과 같은 외국 통치자들에게도 수여되어 비잔티움의 우호와 존위를 나타내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12세기에 접어들어 세바스토스 칭호는 황제의 직계 자녀들,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아들들, 그리고 일부 외국 군주들에게까지 폭넓게 주어지는 작위로 자리잡았다. 황실 작위의 전반적 남발 추세 속에서 세바스토스는 비교적 흔한 명예 칭호가 되었고, 예전처럼 최고의 위엄을 뜻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에 더 가치 있는 새로운 칭호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황실에서는 칭호에 접두사를 붙여 위계를 구분하는 시도를 했다. “판(παν, 모두)”, “히페르(ὑπέρ, 최고)”, “프로토(πρῶτο, 첫째)”와 같은 접두사를 조합하여 판세바스토스, 판히페르세바스토스, 히페르프로토세바스토스 등 점차 길고 복잡한 칭호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장황한 작위들은 오히려 칭호 체계의 혼란을 야기했고, 대부분 일시적인 유행에 그쳤다.
12세기 말까지 살아남은 몇몇 혼합 칭호들도 제국이 쇠퇴하면서 급속히 빛을 잃었다. 결국 세바스토스 본래의 권위도 더불어 퇴색하여,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는 세바스토스가 더 이상 핵심 황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비교적 일반적인 귀족 작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세바스토스는 본디 “아우구스투스”에 해당하는 말이었기에 그 어원적 위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비잔티움 최후까지 세바스토스 칭호는 일정한 명예를 담고 이어졌으며, 그 혼란스러운 변천사 자체가 동로마 귀족제의 흥망을 보여주는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는 즉위 후 자신의 둘째 형제 등 가까운 친척들에게 세바스토스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를 통해 황제가 아닌 황족 남성들에게 “존엄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황실 내 위계를 세분화하려 한 것이다. 세바스토스의 여성형은 세바스테로 불렸으며, 황실 여성에게도 드물게 수여되었다. 또한 알렉시오스 1세는 둘째 형제인 아드리아노스에게 특별히 “프로토세바스토스”[8]라는 변형 칭호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는 세바스토스 중에서도 으뜸가는 자라는 의미였다. 프로토세바스토스 칭호는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나 룸 술탄과 같은 외국 통치자들에게도 수여되어 비잔티움의 우호와 존위를 나타내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12세기에 접어들어 세바스토스 칭호는 황제의 직계 자녀들,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아들들, 그리고 일부 외국 군주들에게까지 폭넓게 주어지는 작위로 자리잡았다. 황실 작위의 전반적 남발 추세 속에서 세바스토스는 비교적 흔한 명예 칭호가 되었고, 예전처럼 최고의 위엄을 뜻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에 더 가치 있는 새로운 칭호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황실에서는 칭호에 접두사를 붙여 위계를 구분하는 시도를 했다. “판(παν, 모두)”, “히페르(ὑπέρ, 최고)”, “프로토(πρῶτο, 첫째)”와 같은 접두사를 조합하여 판세바스토스, 판히페르세바스토스, 히페르프로토세바스토스 등 점차 길고 복잡한 칭호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장황한 작위들은 오히려 칭호 체계의 혼란을 야기했고, 대부분 일시적인 유행에 그쳤다.
12세기 말까지 살아남은 몇몇 혼합 칭호들도 제국이 쇠퇴하면서 급속히 빛을 잃었다. 결국 세바스토스 본래의 권위도 더불어 퇴색하여,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는 세바스토스가 더 이상 핵심 황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비교적 일반적인 귀족 작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세바스토스는 본디 “아우구스투스”에 해당하는 말이었기에 그 어원적 위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비잔티움 최후까지 세바스토스 칭호는 일정한 명예를 담고 이어졌으며, 그 혼란스러운 변천사 자체가 동로마 귀족제의 흥망을 보여주는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2.9. 마기스트로스[편집]
마기스트로스는 라틴어 “마기스테르”[9]에 그리스어 어미를 붙인 칭호로, 동로마 초기부터 존재했던 고위 관직에서 유래한 명예 작위이다. 원래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사무총감)이라는 관직은 로마 말기와 비잔티움 초기에 중앙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위 직책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해당 관직의 실무는 다른 관리들에게 분산되었고, 8세기경에는 더 이상 구체적 업무가 아닌 명예 칭호로서의 마기스트로스만 남게 되었다.
마기스트로스 작위는 그 기원 덕분에 매우 권위로운 칭호로 여겨졌다. 9세기까지 이 작위는 극히 드물게 수여되어, 제국 내 손꼽히는 원로 원로격 인물들만 마기스트로스가 될 수 있었다. 10세기경의 기록에 따르면, 제국 전체에 마기스트로스 작위자가 12명 남짓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이는 “프로토마기스트로스”[10]로 불리며 별도의 예우를 받았다. 이러한 제한된 수여는 마기스트로스의 가치를 높였고, 작위를 받은 이는 황제의 특별한 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위치에 있었다. 마기스트로스는 행정 경험이 풍부한 원로 관료나 황제의 책사(策士) 격 원훈들에게 주어져, 그들의 지위에 걸맞는 최고 예우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11세기 이후 사회 변동과 귀족 계층의 확대에 따라 마기스트로스 작위 보유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콤네노스 왕조 시기에는 군공을 세운 장군이나 유능한 관료들에게도 마기스트로스가 수여되며 그 수가 급증하였다. 한때 10여 명에 불과하던 마기스트로스가 수십 명을 헤아리게 되자, 이 칭호의 희소성과 권위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2세기 무렵 동로마 정부는 마기스트로스 작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오랜 역사적 명예를 지닌 칭호 하나가 시대 변화 속에서 소멸한 사례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기스트로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중요 작위로서 기억된다. 특히 9~10세기에 마기스트로스를 지낸 인물들은 제국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가 많았다. 황제가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국정을 운영했고, 마기스트로스들은 원로원과 관료 사회의 지도층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몇몇 황후의 섭정기에는 유력한 마기스트로스가 국정을 보좌하거나 대신 결정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기스트로스는 명예직이면서도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한 작위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후대로 갈수록 그 빛이 바래 사라졌지만, 마기스트로스라는 이름은 동로마 관료제의 유산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 남았다.
마기스트로스 작위는 그 기원 덕분에 매우 권위로운 칭호로 여겨졌다. 9세기까지 이 작위는 극히 드물게 수여되어, 제국 내 손꼽히는 원로 원로격 인물들만 마기스트로스가 될 수 있었다. 10세기경의 기록에 따르면, 제국 전체에 마기스트로스 작위자가 12명 남짓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이는 “프로토마기스트로스”[10]로 불리며 별도의 예우를 받았다. 이러한 제한된 수여는 마기스트로스의 가치를 높였고, 작위를 받은 이는 황제의 특별한 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위치에 있었다. 마기스트로스는 행정 경험이 풍부한 원로 관료나 황제의 책사(策士) 격 원훈들에게 주어져, 그들의 지위에 걸맞는 최고 예우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11세기 이후 사회 변동과 귀족 계층의 확대에 따라 마기스트로스 작위 보유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콤네노스 왕조 시기에는 군공을 세운 장군이나 유능한 관료들에게도 마기스트로스가 수여되며 그 수가 급증하였다. 한때 10여 명에 불과하던 마기스트로스가 수십 명을 헤아리게 되자, 이 칭호의 희소성과 권위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2세기 무렵 동로마 정부는 마기스트로스 작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오랜 역사적 명예를 지닌 칭호 하나가 시대 변화 속에서 소멸한 사례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기스트로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중요 작위로서 기억된다. 특히 9~10세기에 마기스트로스를 지낸 인물들은 제국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가 많았다. 황제가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국정을 운영했고, 마기스트로스들은 원로원과 관료 사회의 지도층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몇몇 황후의 섭정기에는 유력한 마기스트로스가 국정을 보좌하거나 대신 결정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기스트로스는 명예직이면서도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한 작위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후대로 갈수록 그 빛이 바래 사라졌지만, 마기스트로스라는 이름은 동로마 관료제의 유산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 남았다.
2.10. 파트리키오스[편집]
파트리키오스(patrikios)는 “귀족원 의원(파트리션)”을 가리키는 칭호로,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파트리키[11] 계층에서 유래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기부터 파트리키오스는 제국의 최고위 귀족 칭호로 정비되었으며, 이후 수 세기 동안 동로마의 지배 엘리트를 상징하는 대표적 작위로 존속했다. 파트리키오스 작위는 혈통이나 공로에 따라 황제가 엄격히 선별하여 수여했는데, 이는 세습되지 않는 일대 작위로서, 한 개인에게 평생 명예를 부여하는 형태였다.
동로마에서 파트리키오스는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가장 높은 존엄 칭호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5~6세기경에는 원로원 의원 계층과 군대 고위 장교들 중 황실에 공훈을 세운 인물이 파트리키오스로 임명되었다. 파트리키오스가 된다는 것은 곧 황제의 신뢰를 얻고 제국 지배층에 편입되었다는 뜻이었고, 작위 소지자는 황제 주재 행사에 참여할 권리와 의전적 특권을 누렸다. 관모와 자색 장식 등 파트리키오스만의 복장이 있었으며, 황실 연회에서 특별 석차를 배정받았다. 또한 황제가 외국의 통치자에게 우호의 표시로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하사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비잔티움의 귀족 지위를 외부 군주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외교적 행위였다.
파트리키오스의 여성형은 파트리키아로서, 파트리키오스의 아내에게 주어졌다. 다만 황후에겐 별도로 “조스테 파트리키아”**라는 특별 칭호가 존재했다. 조스테 파트리키아는 “허리에 검을 찬 귀부인[12]”이라는 뜻으로, 황후나 황태후가 의전상 받는 명예직이었다. 이는 일반 파트리키아와 구분되는 유일한 여성 전용 작위로서, 9세기경부터 등장해 11세기경 사라졌다. 조스테 파트리키아는 필로테오스의 작위서열 기록에 따르면 마기스트로스와 프로에드로스보다 높고 쿠로팔라테스보다 한 단계 아래에 위치할 정도로 그 위계가 높았다. 이처럼 파트리키오스 체계는 남녀를 망라하여 궁정 내 신분 체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틀이었다.
콤네노스 왕조 시기에 들어 제국의 관료제와 귀족층 구조가 재편되면서 파트리키오스 작위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알렉시오스 1세 이후 새로운 작위들이 생겨나고, 기존 귀족 칭호들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파트리키오스는 더 이상 수여되지 않게 되었다. 수백 년간 동로마 지배층의 상징이었던 이 칭호는 그렇게 역사 속에 사라졌으나, 로마의 유산과 비잔티움 귀족전통의 결합체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파트리키오스로 불렸던 인물들의 이름은 제국의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두루 등장하며, 이들을 통해 동로마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는 통치 구조와 사회 질서를 엿볼 수 있다.
동로마에서 파트리키오스는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가장 높은 존엄 칭호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5~6세기경에는 원로원 의원 계층과 군대 고위 장교들 중 황실에 공훈을 세운 인물이 파트리키오스로 임명되었다. 파트리키오스가 된다는 것은 곧 황제의 신뢰를 얻고 제국 지배층에 편입되었다는 뜻이었고, 작위 소지자는 황제 주재 행사에 참여할 권리와 의전적 특권을 누렸다. 관모와 자색 장식 등 파트리키오스만의 복장이 있었으며, 황실 연회에서 특별 석차를 배정받았다. 또한 황제가 외국의 통치자에게 우호의 표시로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하사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비잔티움의 귀족 지위를 외부 군주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외교적 행위였다.
파트리키오스의 여성형은 파트리키아로서, 파트리키오스의 아내에게 주어졌다. 다만 황후에겐 별도로 “조스테 파트리키아”**라는 특별 칭호가 존재했다. 조스테 파트리키아는 “허리에 검을 찬 귀부인[12]”이라는 뜻으로, 황후나 황태후가 의전상 받는 명예직이었다. 이는 일반 파트리키아와 구분되는 유일한 여성 전용 작위로서, 9세기경부터 등장해 11세기경 사라졌다. 조스테 파트리키아는 필로테오스의 작위서열 기록에 따르면 마기스트로스와 프로에드로스보다 높고 쿠로팔라테스보다 한 단계 아래에 위치할 정도로 그 위계가 높았다. 이처럼 파트리키오스 체계는 남녀를 망라하여 궁정 내 신분 체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틀이었다.
콤네노스 왕조 시기에 들어 제국의 관료제와 귀족층 구조가 재편되면서 파트리키오스 작위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알렉시오스 1세 이후 새로운 작위들이 생겨나고, 기존 귀족 칭호들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파트리키오스는 더 이상 수여되지 않게 되었다. 수백 년간 동로마 지배층의 상징이었던 이 칭호는 그렇게 역사 속에 사라졌으나, 로마의 유산과 비잔티움 귀족전통의 결합체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파트리키오스로 불렸던 인물들의 이름은 제국의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두루 등장하며, 이들을 통해 동로마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는 통치 구조와 사회 질서를 엿볼 수 있다.
3. 행정 관직[편집]
3.1.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편집]
동로마 제국 초기에 제국 행정을 총괄하던 최고위 행정관은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Praetorian Prefect)이었다. 이 직책은 원래 로마 제정 시기 황제 근위대를 지휘하던 친위대장(Praetorian Prefect)에서 발전한 것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군사 기능이 축소되고 광역 행정구역의 책임자 역할이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제국을 몇 개의 대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을 두었는데, 동로마 지역에는 동방 관구장관이 설치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제국 동부 전역의 행정을 감독하였다.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은 광범위한 행정·사법권을 행사하는 사실상의 황제 부재시 황제였다. 관할 구역 내에서 세금 징수와 재정 집행, 민사 재판과 치안 유지 등 국가 업무를 총괄하며, 해당 지역 총독들과 관리들의 최상위 상관으로 군림했다. 동방 관구장관의 경우 소아시아와 근동 지역의 속주들을 모두 아우르며, 수도에 다음가는 권세를 누렸다. 예컨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유명한 동방 관구장관 요안네스 카파도키아인은 제국 재정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권세를 떨쳤고, 황제의 대리인으로 각지에 명령을 내렸다. 이처럼 관구장관직은 제국 후기의 총리 격 자리로 발전하여, 행정체계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그러나 7세기 들어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대대적 행정 개혁이 실시되면서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 제도는 전환점을 맞았다. 페르시아 및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전통적 행정구역이 붕괴하고, 대신 군사 방어를 겸하는 테마(군관구) 제도가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옛 관구장관의 많은 권한이 축소되거나 분산되었다. 재정 관리 업무는 새로이 등장한 중앙 관청들로 이관되고, 각 테마의 장군(스트라테고스)이 군사와 행정을 겸임함에 따라 관구장관의 지방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그 결과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이라는 직책은 명목만 남게 되었고, 8세기 무렵에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84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로마 제국 내에 더 이상 관구장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의 폐지는 동로마 통치 구조가 고대 로마의 형식을 탈피하여 중세적인 형태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중앙 정부는 관구장관 대신 다수의 로그테테스(재무관)와 에피토스(장관) 등 전문 관청으로 분화되었고, 지방은 테마 장군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한때 행정의 기둥이었던 관구장관 직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제국 초기의 법전과 문헌 곳곳에 남아있다. 또한 동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 황제가 옛 로마의 영광을 흉내내며 일시적으로 관구장관 칭호를 의전에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를 향한 향수 어린 제스처에 불과했다.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은 광범위한 행정·사법권을 행사하는 사실상의 황제 부재시 황제였다. 관할 구역 내에서 세금 징수와 재정 집행, 민사 재판과 치안 유지 등 국가 업무를 총괄하며, 해당 지역 총독들과 관리들의 최상위 상관으로 군림했다. 동방 관구장관의 경우 소아시아와 근동 지역의 속주들을 모두 아우르며, 수도에 다음가는 권세를 누렸다. 예컨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유명한 동방 관구장관 요안네스 카파도키아인은 제국 재정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권세를 떨쳤고, 황제의 대리인으로 각지에 명령을 내렸다. 이처럼 관구장관직은 제국 후기의 총리 격 자리로 발전하여, 행정체계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그러나 7세기 들어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대대적 행정 개혁이 실시되면서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 제도는 전환점을 맞았다. 페르시아 및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전통적 행정구역이 붕괴하고, 대신 군사 방어를 겸하는 테마(군관구) 제도가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옛 관구장관의 많은 권한이 축소되거나 분산되었다. 재정 관리 업무는 새로이 등장한 중앙 관청들로 이관되고, 각 테마의 장군(스트라테고스)이 군사와 행정을 겸임함에 따라 관구장관의 지방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그 결과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이라는 직책은 명목만 남게 되었고, 8세기 무렵에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84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로마 제국 내에 더 이상 관구장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프라이토리오 관구장관의 폐지는 동로마 통치 구조가 고대 로마의 형식을 탈피하여 중세적인 형태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중앙 정부는 관구장관 대신 다수의 로그테테스(재무관)와 에피토스(장관) 등 전문 관청으로 분화되었고, 지방은 테마 장군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한때 행정의 기둥이었던 관구장관 직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제국 초기의 법전과 문헌 곳곳에 남아있다. 또한 동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 황제가 옛 로마의 영광을 흉내내며 일시적으로 관구장관 칭호를 의전에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를 향한 향수 어린 제스처에 불과했다.
3.2.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에파르코스[편집]
에파르코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 행정관으로서, 흔히 수도 장관 또는 시장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에파르코스는 황제가 수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정한 관료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치안, 사법, 상업을 감독하였다. 이 직위는 고대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13]에서 유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국의 수도가 된 후 그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다.
에파르코스는 수도 시민의 삶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먼저 공공 질서 유지가 주 임무로, 치안대와 야경대를 지휘하여 치안과 화재 예방을 도모했다. 도시 내 범죄를 단속하고 소요 사태를 진압하는 등 경찰 업무를 총괄했으며, 필요시 황실 경비대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에파르코스 법정에서는 수도 거주민들의 민사 및 상사 분쟁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상訟에 대한 판결과 형 집행을 관리하여 수도에서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치안판사 역할도 담당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에파르코스의 중요한 소임 중 하나는 상업과 길드 관리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거대한 국제무역도시로서 수공업자와 상인 조합(길드)이 번성했는데, 에파르코스는 이들 길드를 감독하고 물가와 품질을 규제하였다. 10세기 레온 6세 황제 때 편찬된 에파르코스의 서는 에파르코스가 각 직능 조합별로 세세한 규정을 제정하고 준수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컨대 빵 굽는 조합, 직물 염색 조합, 보석 세공인 조합 등 수십 개에 달하는 길드가 존재했으며, 에파르코스는 이들의 생산품 가격을 통제하고 부정 행위를 단속함으로써 도시 경제를 안정화하였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필요한 물자를 정해진 가격에 공급받았고, 상인들은 규칙 내에서 영업을 보장받았다.
에파르코스는 수도 행정의 중요성을 반영하여 황제 다음가는 실권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특히 수도에서 폭동이 일어날 경우 에파르코스의 대응이 제국 운명을 좌우하기도 했다. 532년 니카의 난 당시 에파르코스는 폭도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사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장군 벨리사리우스를 동원해 진압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수도 장관의 역할이 재정비되고 더욱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에파르코스는 제국 말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관장하는 핵심 관직으로 존속하였다. 비록 13세기 라틴 점령기에 일시적으로 단절되었으나, 팔라이올로고스 왕조가 수도를 수복한 후 에파르코스 직책도 부활하여 최후까지 지속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에파르코스는 수도의 행정을 이끈 마지막 고관으로 기록된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직후, 패망한 비잔티움의 마지막 에파르코스가 누구였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천년 동안 이어진 이 도성 행정관직의 전통은 막을 내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에파르코스는 그 오랜 기간 동안 황제가 없는 자리에서 수도를 지키고 다스린 제2의 통치자였으며, 동로마 수도의 번영과 안녕을 떠받친 든든한 기둥이었다.
에파르코스는 수도 시민의 삶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먼저 공공 질서 유지가 주 임무로, 치안대와 야경대를 지휘하여 치안과 화재 예방을 도모했다. 도시 내 범죄를 단속하고 소요 사태를 진압하는 등 경찰 업무를 총괄했으며, 필요시 황실 경비대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에파르코스 법정에서는 수도 거주민들의 민사 및 상사 분쟁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상訟에 대한 판결과 형 집행을 관리하여 수도에서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치안판사 역할도 담당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에파르코스의 중요한 소임 중 하나는 상업과 길드 관리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거대한 국제무역도시로서 수공업자와 상인 조합(길드)이 번성했는데, 에파르코스는 이들 길드를 감독하고 물가와 품질을 규제하였다. 10세기 레온 6세 황제 때 편찬된 에파르코스의 서는 에파르코스가 각 직능 조합별로 세세한 규정을 제정하고 준수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컨대 빵 굽는 조합, 직물 염색 조합, 보석 세공인 조합 등 수십 개에 달하는 길드가 존재했으며, 에파르코스는 이들의 생산품 가격을 통제하고 부정 행위를 단속함으로써 도시 경제를 안정화하였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필요한 물자를 정해진 가격에 공급받았고, 상인들은 규칙 내에서 영업을 보장받았다.
에파르코스는 수도 행정의 중요성을 반영하여 황제 다음가는 실권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특히 수도에서 폭동이 일어날 경우 에파르코스의 대응이 제국 운명을 좌우하기도 했다. 532년 니카의 난 당시 에파르코스는 폭도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사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장군 벨리사리우스를 동원해 진압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수도 장관의 역할이 재정비되고 더욱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에파르코스는 제국 말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관장하는 핵심 관직으로 존속하였다. 비록 13세기 라틴 점령기에 일시적으로 단절되었으나, 팔라이올로고스 왕조가 수도를 수복한 후 에파르코스 직책도 부활하여 최후까지 지속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에파르코스는 수도의 행정을 이끈 마지막 고관으로 기록된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직후, 패망한 비잔티움의 마지막 에파르코스가 누구였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천년 동안 이어진 이 도성 행정관직의 전통은 막을 내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에파르코스는 그 오랜 기간 동안 황제가 없는 자리에서 수도를 지키고 다스린 제2의 통치자였으며, 동로마 수도의 번영과 안녕을 떠받친 든든한 기둥이었다.
3.3. 로그테테스[편집]
로그테테스는 동로마 제국의 전문 행정관 직책으로, 중앙 관청의 장관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어 “로고테테스”는 원래 “계산하는 자, 기록하는 자”란 뜻으로, 라틴어 “라티오큘라토르”(rationarius)를 번역한 용어이다. 7세기 이라클리오스 황제 시절 대대적인 행정 개혁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로마 관직인 관구장관과 재무관들이 사라지고 보다 세분화된 행정 부서들이 등장하였다. 이 새로운 관청들의 수장이 바로 로그테테스들로, 재정·군수·외교 등 각각의 분야를 맡아보는 고위 관리였다.
중기 동로마 정부에는 다양한 로그테테스 직이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메가스 로그테테스”(megas logothetes, 대(大)로그테테스)는 황실 서기관장 겸 총리격 인물로, 여러 부처를 조정하고 국가 기밀을 총괄했다. 그러나 메가스 로그테테스라는 칭호는 주로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이후 사용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분야별 로그테테스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 “로그테테스 투 게니쿠”(logothetes tou genikou)는 국고원(財政 총책임자)으로 제국의 일반 재정과 세입·세출 업무를 감독했다. “로그테테스 투 드로무”(logothetes tou dromou)는 공공 행정 및 외교 통신 담당으로, 국가의 우편망과 정보망을 운영하고 외국 사절 응대와 조약 체결 등의 외교 실무를 관리하였다. 이 밖에도 군대 급여와 물자를 담당하는 “로그테테스 투 스트라티오티쿠”, 황실 목장과 군마 조달을 맡은 “로그테테스 톤 아겔론” 등 여러 세부 직책이 존재했다. 각 로그테테스는 자신만의 관청과 부하 직원들을 거느리며 전문 행정을 수행하였다.
로그테테스들은 황제 직속 관료로서 제국 행정의 실무를 책임졌다. 황제는 중요한 국정 결정 시 해당 분야 로그테테스와 논의하여 방침을 정했고, 로그테테스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국가 재정을 운영하고 군량을 조달하며 외교 교섭을 주선하는 등 중세 행정국가로서의 비잔티움이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 중추였다. 한편 로그테테스 체계의 도입은 관료제를 전문화·분화함으로써 행정 효율을 높였지만, 초기에는 기존 귀족층의 반발도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유력 귀족이 광범한 권한을 가진 관직을 겸했지만, 이제는 전문 관리들이 권한을 나누어 맡게 되어 귀족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그테테스들은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으며 점차 제국 통치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행정 일원화 추세 속에 여러 로그테테스직이 통합·정비되어, 메가스 로그테테스 한 사람이 사실상 재상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재무, 외교, 군무 담당 관청 자체는 유지되었고, 명칭만 약간씩 변형되었을 뿐 기본적인 로그테테스 체계는 지속되었다. 동로마 제국 멸망까지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관료는 여전히 “로그테테스”로 불렸고, 그 전통은 제국의 행정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보자면 로그테테스들은 부처 장관 또는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라 할 수 있으며, 전문적 관료제가 발전한 비잔티움 행정의 상징적 존재였다.
중기 동로마 정부에는 다양한 로그테테스 직이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메가스 로그테테스”(megas logothetes, 대(大)로그테테스)는 황실 서기관장 겸 총리격 인물로, 여러 부처를 조정하고 국가 기밀을 총괄했다. 그러나 메가스 로그테테스라는 칭호는 주로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이후 사용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분야별 로그테테스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 “로그테테스 투 게니쿠”(logothetes tou genikou)는 국고원(財政 총책임자)으로 제국의 일반 재정과 세입·세출 업무를 감독했다. “로그테테스 투 드로무”(logothetes tou dromou)는 공공 행정 및 외교 통신 담당으로, 국가의 우편망과 정보망을 운영하고 외국 사절 응대와 조약 체결 등의 외교 실무를 관리하였다. 이 밖에도 군대 급여와 물자를 담당하는 “로그테테스 투 스트라티오티쿠”, 황실 목장과 군마 조달을 맡은 “로그테테스 톤 아겔론” 등 여러 세부 직책이 존재했다. 각 로그테테스는 자신만의 관청과 부하 직원들을 거느리며 전문 행정을 수행하였다.
로그테테스들은 황제 직속 관료로서 제국 행정의 실무를 책임졌다. 황제는 중요한 국정 결정 시 해당 분야 로그테테스와 논의하여 방침을 정했고, 로그테테스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국가 재정을 운영하고 군량을 조달하며 외교 교섭을 주선하는 등 중세 행정국가로서의 비잔티움이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 중추였다. 한편 로그테테스 체계의 도입은 관료제를 전문화·분화함으로써 행정 효율을 높였지만, 초기에는 기존 귀족층의 반발도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유력 귀족이 광범한 권한을 가진 관직을 겸했지만, 이제는 전문 관리들이 권한을 나누어 맡게 되어 귀족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그테테스들은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으며 점차 제국 통치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행정 일원화 추세 속에 여러 로그테테스직이 통합·정비되어, 메가스 로그테테스 한 사람이 사실상 재상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재무, 외교, 군무 담당 관청 자체는 유지되었고, 명칭만 약간씩 변형되었을 뿐 기본적인 로그테테스 체계는 지속되었다. 동로마 제국 멸망까지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관료는 여전히 “로그테테스”로 불렸고, 그 전통은 제국의 행정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보자면 로그테테스들은 부처 장관 또는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라 할 수 있으며, 전문적 관료제가 발전한 비잔티움 행정의 상징적 존재였다.
3.4. 파라코이모메노스[편집]
파라코이모메노스는 황제의 침실 담당 시종장으로, 황궁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궁정 관직 중 하나였다. 그리스어로 “함께 잠자는 자”라는 뜻을 가진 이 명칭은, 말 그대로 황제가 잠드는 침실 옆에서 시중드는 자리를 가리킨다. 파라코이모메노스는 주로 환관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황제의 사적 공간까지 접근할 수 있는 특수 신분으로서, 여성이나 가문 세력과 관계없도록 환관을 택한 것이다. 이 관직은 비록 공식 행정 직함은 아니지만, 황제의 곁을 지키며 권력의 심장부에 있는 까닭에 실질적으로 엄청난 정치적 무게를 지녔다.
파라코이모메노스의 주 임무는 황제의 침전(寢殿)을 관리하고 황제의 일과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그는 황제가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시각을 챙기고, 침실 열쇠를 관리하며, 밤중에 돌발 상황이 생기면 황제에게 즉시 보고하였다. 외부 사람이 황제를 알현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접촉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파라코이모메노스였으므로, 자연히 누구를 언제 황제에게 접근시킬지 결정하는 문지기 역할을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어떤 신하가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파라코이모메노스의 협조를 얻어야 했기에, 그 권한은 궁정 내에 막강했다.
역사상 많은 파라코이모메노스들이 대리 황제 역할을 하거나 섭정 비슷한 힘을 떨쳤다. 9세기 이후 여러 황제들의 치세에 환관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사례가 늘었는데, 그 중심에는 거의 언제나 파라코이모메노스가 있었다. 예컨대 10세기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때, 황제의 숙부이자 파라코이모메노스였던 바실레오스 렉사노스(바실 레카페노스)가 수십 년간 실권을 쥐고 제국을 좌지우지했다. 또한 11세기 중엽 미하일 4세 황제 치하에서는 형제인 환관 요안니스 오르파노트로포스가 파라코이모메노스로 있으면서 형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정사를 주물렀다. 이런 사례는 파라코이모메노스가 단순한 내시장이 아니라, 권력의 중개자이자 조정자로서 얼마나 큰 정치적 위상을 지녔는지 말해준다.
파라코이모메노스는 대개 1인만 임명되지만,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 궁정 관직이 세분화되면서 두 명의 파라코이모메노스가 존재하기도 했다. 하나는 황제 침실 담당[14], 다른 하나는 황실 보물 창고 열쇠를 맡는 스펜도네스 파라코이모메노스로 나뉘어, 역할을 분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 모두 황제의 측근 환관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이들은 협력하여 황실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챙겼으며, 황제의 신임을 무기로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로마 제국 말기까지도 파라코이모메노스 직책은 유지되어, 마지막 황실에서도 황제 시중을 드는 환관 장관이 존재했다.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들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파라코이모메노스들은 비잔티움 권력사의 은밀한 주역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들은 공식적 지위는 낮을지언정, 제국의 흥망성쇠에 직접 개입한 막후 실세들이었다.
파라코이모메노스의 주 임무는 황제의 침전(寢殿)을 관리하고 황제의 일과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그는 황제가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시각을 챙기고, 침실 열쇠를 관리하며, 밤중에 돌발 상황이 생기면 황제에게 즉시 보고하였다. 외부 사람이 황제를 알현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접촉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파라코이모메노스였으므로, 자연히 누구를 언제 황제에게 접근시킬지 결정하는 문지기 역할을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어떤 신하가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파라코이모메노스의 협조를 얻어야 했기에, 그 권한은 궁정 내에 막강했다.
역사상 많은 파라코이모메노스들이 대리 황제 역할을 하거나 섭정 비슷한 힘을 떨쳤다. 9세기 이후 여러 황제들의 치세에 환관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사례가 늘었는데, 그 중심에는 거의 언제나 파라코이모메노스가 있었다. 예컨대 10세기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때, 황제의 숙부이자 파라코이모메노스였던 바실레오스 렉사노스(바실 레카페노스)가 수십 년간 실권을 쥐고 제국을 좌지우지했다. 또한 11세기 중엽 미하일 4세 황제 치하에서는 형제인 환관 요안니스 오르파노트로포스가 파라코이모메노스로 있으면서 형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정사를 주물렀다. 이런 사례는 파라코이모메노스가 단순한 내시장이 아니라, 권력의 중개자이자 조정자로서 얼마나 큰 정치적 위상을 지녔는지 말해준다.
파라코이모메노스는 대개 1인만 임명되지만,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 궁정 관직이 세분화되면서 두 명의 파라코이모메노스가 존재하기도 했다. 하나는 황제 침실 담당[14], 다른 하나는 황실 보물 창고 열쇠를 맡는 스펜도네스 파라코이모메노스로 나뉘어, 역할을 분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 모두 황제의 측근 환관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이들은 협력하여 황실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챙겼으며, 황제의 신임을 무기로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로마 제국 말기까지도 파라코이모메노스 직책은 유지되어, 마지막 황실에서도 황제 시중을 드는 환관 장관이 존재했다.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들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파라코이모메노스들은 비잔티움 권력사의 은밀한 주역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들은 공식적 지위는 낮을지언정, 제국의 흥망성쇠에 직접 개입한 막후 실세들이었다.
3.5.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편집]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황실 재무와 의복을 관리하는 최고 궁정 관직으로, “왕실 옷장지기장” 정도에 해당한다. 그리스어로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첫째 옷장 담당자”라는 뜻으로, 황제의 의복과 보물 창고를 총괄하는 책임자를 가리킨다. 본래 베스티아리오스(옷장지기)라는 직책들이 여러 있었는데, 그 중 수석을 맡은 자가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였다. 이 직위는 황궁 내 경제를 관리하고 황제의 개인 자산을 돌보는 자리인 만큼, 황제의 신뢰가 두터운 사람이 임명되었다.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의 임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황실 재정 관리로서, 황제 개인 금고의 재산과 귀금속, 보석류 등의 회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황실 경비나 축제 비용, 황제의 사적인 지출 등은 모두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의 손을 거쳤다. 두 번째 임무는 황제와 황실 가족의 의복 및 사치품 관리이다. 동로마 황제의 예복은 매우 화려하고 정교하여 관리가 중요했는데,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황제의 대관식 복장부터 일상 연회복까지 모든 의류와 패물을 준비하고 보관했다. 또한 외국 사신에게 하사할 예물이나 황제가 성물로 바칠 공예품 등을 마련하는 것도 그의 소관이었다.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이러한 실무를 총괄하면서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나 충신이 이 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았다. 11세기 로마노스 4세 황제 시절의 환관 니키포로스는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로서 국정을 장악한 사례가 있으며, 13세기 니케아 제국에서는 존능한 귀족 조지아노스가 이 직책을 맡아 재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단순한 창고지기가 아니라 때로는 제국 재정을 움켜쥔 실력자로 부상하기도 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의 권한과 위상이 더욱 커졌다. 궁정 재정이 국가 재정과 맞물리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사실상의 재무대신처럼 활동하였다. 그 예로 14세기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치하의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는 재정 개혁을 주도하고 문화 후원을 아끼지 않은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는 황실 창고를 책임지면서도 황제의 책사 노릇을 겸하며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모습은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라는 직책이 지닌 잠재적 권력을 잘 보여준다.
물론 모든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가 정치적 실세였던 것은 아니다. 그 중 다수는 조용히 자기 직분에 충실한 관리들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금고 열쇠를 쥐고 있던 그들의 역할은 제국 재정의 성패와 궁정의 사치 통제에 결정적이었다. 동로마 제국 멸망 때까지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 직책은 유지되었고, 마지막 황제의 측근 환관이 이 임무를 맡았다. 전쟁과 혼란 속에 비록 국고는 탕진되고 역할은 축소되었을지라도,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의 존재는 끝까지 황궁 체제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의 임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황실 재정 관리로서, 황제 개인 금고의 재산과 귀금속, 보석류 등의 회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황실 경비나 축제 비용, 황제의 사적인 지출 등은 모두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의 손을 거쳤다. 두 번째 임무는 황제와 황실 가족의 의복 및 사치품 관리이다. 동로마 황제의 예복은 매우 화려하고 정교하여 관리가 중요했는데,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황제의 대관식 복장부터 일상 연회복까지 모든 의류와 패물을 준비하고 보관했다. 또한 외국 사신에게 하사할 예물이나 황제가 성물로 바칠 공예품 등을 마련하는 것도 그의 소관이었다.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이러한 실무를 총괄하면서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나 충신이 이 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았다. 11세기 로마노스 4세 황제 시절의 환관 니키포로스는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로서 국정을 장악한 사례가 있으며, 13세기 니케아 제국에서는 존능한 귀족 조지아노스가 이 직책을 맡아 재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단순한 창고지기가 아니라 때로는 제국 재정을 움켜쥔 실력자로 부상하기도 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의 권한과 위상이 더욱 커졌다. 궁정 재정이 국가 재정과 맞물리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는 사실상의 재무대신처럼 활동하였다. 그 예로 14세기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치하의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는 재정 개혁을 주도하고 문화 후원을 아끼지 않은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는 황실 창고를 책임지면서도 황제의 책사 노릇을 겸하며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모습은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라는 직책이 지닌 잠재적 권력을 잘 보여준다.
물론 모든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가 정치적 실세였던 것은 아니다. 그 중 다수는 조용히 자기 직분에 충실한 관리들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금고 열쇠를 쥐고 있던 그들의 역할은 제국 재정의 성패와 궁정의 사치 통제에 결정적이었다. 동로마 제국 멸망 때까지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 직책은 유지되었고, 마지막 황제의 측근 환관이 이 임무를 맡았다. 전쟁과 혼란 속에 비록 국고는 탕진되고 역할은 축소되었을지라도,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의 존재는 끝까지 황궁 체제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3.6. 사켈라리오스[편집]
사켈라리오스는 황실 회계를 감독하는 고위 재정 관료로, 국고를 관리하는 역할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7세기 초 이라클리오스 황제에 의해 처음 체계화된 직책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가의 중앙 재정을 총괄하는 회계감사원장 혹은 재무 감찰관에 해당한다. 이 직위는 황제 직속으로 설치되어, 제국 내 모든 관청의 재정 운용을 감사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사켈라리오스의 설치 배경에는 격변하던 당시의 재정 개혁 필요성이 있었다. 7세기, 페르시아와 이어 이슬람의 침입으로 제국의 전통적 행정망이 와해되자, 황실 재정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이라클리오스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면서, 신뢰할 만한 인물을 사켈라리오스로 임명해 모든 금전 출납을 관리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관원들의 부정축재를 막고,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려 했던 것이다. 사켈라리리오스는 황제에게 정기적으로 재정 보고를 올리고, 필요시 예산 조정을 건의하였다. 또한 각 지방과 부서에서 걷히는 조세 및 수입이 정확히 국고에 들어오도록 감독하고, 허투루 새는 돈이 없게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시간이 흐르며 사켈라리오스는 단순 감사뿐 아니라 재정 정책 입안자로서도 활동하였다. 예컨대 8세기 어느 사켈라리오스는 인플레이션이 심해지자 통화 개혁을 제안했고, 황제가 이를 받아들여 주화 품질을 높인 사례가 있다. 또 다른 시기에는 세제 개편이나 군비 지출 조정 등에 사켈라리오스가 참여해 재정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렇듯 재정 전반에 통찰력을 제공하는 참모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사켈라리오스는 종종 제국의 주요 재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사켈라리오스 직책은 8~9세기에도 지속되어, 때때로 유력 환관이나 황족이 맡기도 했다. 하지만 10세기 이후 로그테테스 등 개별 재정 담당 부서들이 더 전문화되면서, 사켈라리오스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다. 일부 황제들은 사켈라리오스를 임명하지 않고 직무를 공석으로 두거나, 이름뿐인 명예직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콤네노스 왕조에 이르러 사켈라리오스는 중앙정부 내에서 실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는 지위로 남았고, 차츰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켈라리오스는 동로마 행정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직책이다. 중앙 재정의 투명성과 일원화를 목표로 창안된 이 제도는, 이후 다른 형태로 계승되었다. 예컨대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때 재상 역할을 한 메가스 로그테테스는 사켈라리오스가 하던 국고 통합 관리 업무를 실질적으로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사켈라리오스라는 명칭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동로마 관료제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절정기 동로마의 부강한 재정 운영 뒤에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재정 감찰관의 공로가 있었다.
사켈라리오스의 설치 배경에는 격변하던 당시의 재정 개혁 필요성이 있었다. 7세기, 페르시아와 이어 이슬람의 침입으로 제국의 전통적 행정망이 와해되자, 황실 재정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이라클리오스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면서, 신뢰할 만한 인물을 사켈라리오스로 임명해 모든 금전 출납을 관리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관원들의 부정축재를 막고,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려 했던 것이다. 사켈라리리오스는 황제에게 정기적으로 재정 보고를 올리고, 필요시 예산 조정을 건의하였다. 또한 각 지방과 부서에서 걷히는 조세 및 수입이 정확히 국고에 들어오도록 감독하고, 허투루 새는 돈이 없게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시간이 흐르며 사켈라리오스는 단순 감사뿐 아니라 재정 정책 입안자로서도 활동하였다. 예컨대 8세기 어느 사켈라리오스는 인플레이션이 심해지자 통화 개혁을 제안했고, 황제가 이를 받아들여 주화 품질을 높인 사례가 있다. 또 다른 시기에는 세제 개편이나 군비 지출 조정 등에 사켈라리오스가 참여해 재정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렇듯 재정 전반에 통찰력을 제공하는 참모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사켈라리오스는 종종 제국의 주요 재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사켈라리오스 직책은 8~9세기에도 지속되어, 때때로 유력 환관이나 황족이 맡기도 했다. 하지만 10세기 이후 로그테테스 등 개별 재정 담당 부서들이 더 전문화되면서, 사켈라리오스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다. 일부 황제들은 사켈라리오스를 임명하지 않고 직무를 공석으로 두거나, 이름뿐인 명예직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콤네노스 왕조에 이르러 사켈라리오스는 중앙정부 내에서 실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는 지위로 남았고, 차츰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켈라리오스는 동로마 행정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직책이다. 중앙 재정의 투명성과 일원화를 목표로 창안된 이 제도는, 이후 다른 형태로 계승되었다. 예컨대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때 재상 역할을 한 메가스 로그테테스는 사켈라리오스가 하던 국고 통합 관리 업무를 실질적으로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사켈라리오스라는 명칭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동로마 관료제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절정기 동로마의 부강한 재정 운영 뒤에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재정 감찰관의 공로가 있었다.
4. 군사 관직[편집]
4.1. 엑사르코스[편집]
엑사르코스(Exarch)는 동로마 제국의 변방 지역을 통치한 지방 총독이자 군사령관으로, 서방의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 설치된 특수 관직이었다. 6세기 말~7세기 초 제국이 거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로서, 라벤나와 카르타고에 각각 엑사르코스[15]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해당 지역에서 민정과 군정을 모두 겸임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고, 황제를 대신하여 반(半)독립적으로 지방을 다스렸다.
엑사르코스의 출현 배경에는 외적 위협이 컸다. 6세기 후반 이후 서로마 옛 영토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는 롬바르드족과 베르베르인, 그리고 서방 게르만 세력의 침공 위협에 시달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먼 이들 지역을 기존의 분산된 행정으로 다스리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다가는 신속한 군사 대응이 어려웠다. 이에 황제는 현지에 포괄적 권위를 지닌 엑사르코스를 임명하여 즉각적이고 통합적인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엑사르코스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졌고, 현지 군단을 직접 지휘하며 필요할 경우 조약을 맺거나 세금을 재조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엑사르코스들의 통치는 상당 기간 효과를 발휘했다. 라벤나의 엑사르코스는 북이탈리아와 지중해 서부에서 비잔티움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고, 카르타고의 엑사르코스는 북아프리카 속주와 지중해 섬들을 방어하며 로마 제국의 존재감을 이어갔다. 이들은 사실상 멀리 떨어진 영토의 작은 황제처럼 행동하였으며, 재위 기간이 긴 경우 해당 지역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강한 권한은 역설적으로 중앙 통제의 약화를 가져와, 몇몇 엑사르코스들은 스스로 황제에 도전하는 위험한 권신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7세기 카르타고의 엑사르코스 헤라클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권에 반기를 들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하여 황제가 된 사례(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있다. 이는 엑사르코스 제도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엑사르코스 제도는 7세기 중엽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팽창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698년 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어 북아프리카 엑사르키가 소멸하였고, 751년 라벤나가 롬바르드 왕국에 점령됨으로써 이탈리아 엑사르키도 사라졌다. 결국 엑사르코스라는 직위는 불과 1~2세기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 개념은 이후 등장한 테마 제도에 일부 영향을 주었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들이 민정과 군정을 겸한 것은 엑사르코스의 지방 통합 통치 모델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엑사르코스는 동로마가 광대한 옛 로마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과도기적 산물이었으며, 중앙집권 제국에서 지방 분권적 군사통치로 옮겨가는 교량 역할을 한 셈이다.
엑사르코스의 출현 배경에는 외적 위협이 컸다. 6세기 후반 이후 서로마 옛 영토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는 롬바르드족과 베르베르인, 그리고 서방 게르만 세력의 침공 위협에 시달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먼 이들 지역을 기존의 분산된 행정으로 다스리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다가는 신속한 군사 대응이 어려웠다. 이에 황제는 현지에 포괄적 권위를 지닌 엑사르코스를 임명하여 즉각적이고 통합적인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엑사르코스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졌고, 현지 군단을 직접 지휘하며 필요할 경우 조약을 맺거나 세금을 재조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엑사르코스들의 통치는 상당 기간 효과를 발휘했다. 라벤나의 엑사르코스는 북이탈리아와 지중해 서부에서 비잔티움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고, 카르타고의 엑사르코스는 북아프리카 속주와 지중해 섬들을 방어하며 로마 제국의 존재감을 이어갔다. 이들은 사실상 멀리 떨어진 영토의 작은 황제처럼 행동하였으며, 재위 기간이 긴 경우 해당 지역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강한 권한은 역설적으로 중앙 통제의 약화를 가져와, 몇몇 엑사르코스들은 스스로 황제에 도전하는 위험한 권신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7세기 카르타고의 엑사르코스 헤라클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권에 반기를 들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하여 황제가 된 사례(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있다. 이는 엑사르코스 제도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엑사르코스 제도는 7세기 중엽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팽창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698년 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어 북아프리카 엑사르키가 소멸하였고, 751년 라벤나가 롬바르드 왕국에 점령됨으로써 이탈리아 엑사르키도 사라졌다. 결국 엑사르코스라는 직위는 불과 1~2세기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 개념은 이후 등장한 테마 제도에 일부 영향을 주었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들이 민정과 군정을 겸한 것은 엑사르코스의 지방 통합 통치 모델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엑사르코스는 동로마가 광대한 옛 로마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과도기적 산물이었으며, 중앙집권 제국에서 지방 분권적 군사통치로 옮겨가는 교량 역할을 한 셈이다.
4.2.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 (및 메가스 도메스티코스)[편집]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은 “근위대 학교단의 장”이라는 뜻으로, 동로마 황제 직속 정예군을 지휘한 군사 관직이다. 스콜라이 팔라티나이[16]라는 부대의 기원이 이름에 담겨 있는데, 이 부대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황제 친위군이었다.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은 원래 이 친위부대의 지휘관을 가리켰지만, 시간이 흐르며 제국 육군 전체를 통솔하는 최고 지휘관으로 발전하였다.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의 초기 역할은 황궁 경비와 수도 방위를 맡은 정예 보병대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8~9세기에 들어 타그마타라는 중앙 기동군단이 편성되면서, 스콜라이 부대도 타그마타의 하나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은 단순 근위대장이 아닌, 동로마 제국 전군의 총사령관 격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9세기 중엽에는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을 역임한 자가 실질적으로 육군 최고지휘를 맡았으며, 때로는 황제가 직접 이 칭호를 유지하며 군권을 틀어쥐기도 했다.
959년경, 당시까지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 직위는 동방과 서방으로 분할되었다. 즉 동부 도메스티코스와 서부 도메스티코스가 따로 임명되어 각각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는 제국 영토가 넓고 방위선이 길어진 데 따른 조치로, 양대 사령관이 서로 다른 전선을 책임지게 한 것이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한쪽 도메스티코스가 전체군을 지휘하거나, 황제가 직접 통합 명령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11세기 이후로는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보다 한층 높은 칭호인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대도메스티코스)가 등장하였다.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는 모든 도메스티코스의 우두머리이자 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지 않는 한 제국 육군을 대표하는 지위였다. 이 칭호는 콤네노스 왕조에서 공식화되었으며,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에 이르러서는 황실 방계나 최고 명문 출신의 장군이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로 임명되었다. 예를 들어 미하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황제가 되기 전에 니케아 제국에서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를 지냈는데, 이는 그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메스티코스 체계는 동로마 군사조직의 변화에 따라 변천했지만, 제국 멸망까지 그 개념이 살아 있었다. 비잔티움 최후의 순간에도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였던 루카스 노타라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한편, 함락 후 오스만에게 처형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처럼 도메스티코스/메가스 도메스티코스는 동로마 군대의 역사와 함께 한 핵심 직책이었다. 황제 바로 아래에서 제국의 칼과 방패를 지휘했던 이들의 존재는 동로머 군사사의 흥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의 초기 역할은 황궁 경비와 수도 방위를 맡은 정예 보병대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8~9세기에 들어 타그마타라는 중앙 기동군단이 편성되면서, 스콜라이 부대도 타그마타의 하나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은 단순 근위대장이 아닌, 동로마 제국 전군의 총사령관 격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9세기 중엽에는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을 역임한 자가 실질적으로 육군 최고지휘를 맡았으며, 때로는 황제가 직접 이 칭호를 유지하며 군권을 틀어쥐기도 했다.
959년경, 당시까지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 직위는 동방과 서방으로 분할되었다. 즉 동부 도메스티코스와 서부 도메스티코스가 따로 임명되어 각각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는 제국 영토가 넓고 방위선이 길어진 데 따른 조치로, 양대 사령관이 서로 다른 전선을 책임지게 한 것이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한쪽 도메스티코스가 전체군을 지휘하거나, 황제가 직접 통합 명령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11세기 이후로는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보다 한층 높은 칭호인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대도메스티코스)가 등장하였다.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는 모든 도메스티코스의 우두머리이자 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지 않는 한 제국 육군을 대표하는 지위였다. 이 칭호는 콤네노스 왕조에서 공식화되었으며,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에 이르러서는 황실 방계나 최고 명문 출신의 장군이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로 임명되었다. 예를 들어 미하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황제가 되기 전에 니케아 제국에서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를 지냈는데, 이는 그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메스티코스 체계는 동로마 군사조직의 변화에 따라 변천했지만, 제국 멸망까지 그 개념이 살아 있었다. 비잔티움 최후의 순간에도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였던 루카스 노타라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한편, 함락 후 오스만에게 처형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처럼 도메스티코스/메가스 도메스티코스는 동로마 군대의 역사와 함께 한 핵심 직책이었다. 황제 바로 아래에서 제국의 칼과 방패를 지휘했던 이들의 존재는 동로머 군사사의 흥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4.3. 스트라테고스[편집]
스트라테고스는 동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군관구 총독을 가리키는 말로, 중기 동로마 행정·군사 제도의 핵심 관직이었다. 그리스어로 “장군”을 뜻하는 이 칭호는 7세기 이후 본격화된 테마 제도와 함께 중요해졌다. 초기 동로마 시대에 스트라테고스는 단순히 야전 지휘관이나 군단장을 의미했지만, 테마라는 군사 행정 구역이 만들어진 뒤로는 해당 테마의 군사·행정을 모두 책임지는 지방 군사 총독의 직함이 되었다.
7세기 중반, 이슬람의 급속한 확장으로 소아시아 방어가 중요해지자, 황제는 소아시아와 기타 지역을 여러 테마로 구분하고 각 테마에 한 명의 스트라테고스를 파견하였다. 스트라테고스는 해당 테마 내 주둔군을 지휘하면서 동시에 민정을 감독하였다. 이는 이후 봉건제와 달리 군사와 행정을 겸직시킴으로써 신속한 방어와 효율적 통치를 노린 동로마의 독자적 체제였다. 예를 들어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는 소아시아 중부를 방어하는 군단의 장군임과 동시에 그 지역 주민들의 세금 징수와 치안을 책임졌다. 따라서 스트라테고스는 지방에서 황제를 대신하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종종 지방 유력 귀족을 압도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스트라테고스의 지위와 세력은 테마 제도의 성쇠와 궤를 같이했다. 8~9세기에는 스트라테고스들이 국경 방위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비잔티움 영토를 지켜냈고, 그 위신도 높았다. 황제들은 때때로 유능한 스트라테고스를 중앙으로 불러들여 주요 관직에 앉히거나, 반대로 지나친 세력을 경계하여 숙청하기도 했다. 10세기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와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 등은 모두 유능한 스트라테고스 출신으로서, 지방 군권을 발판삼아 황제위에 오른 경우였다. 이는 스트라테고스 계급의 사회·정치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이후 대토지귀족 가문들이 성장하고 중앙집권 통치가 강화되면서 전통적 테마 체제가 와해되어갔다. 특히 만지케르트 전투(1071) 이후 소아시아의 많은 테마가 붕괴하면서, 스트라테고스라는 직함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지역 통합 사령관인 “두카스”(Doux, 공작)나 여러 테마를 묶어 지휘하는 “카테파노” 등이 등장해 역할을 대체하였다. 예컨대 동부 국경 방어를 위해 두카 토우 안틱(Antioch의 두카스)이나 발칸 방면의 카테파노 투 이타리아스(이탈리아 총독) 등이 임명되었다. 이 새로운 호칭들은 시대 변화에 따른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스트라테고스 전통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옛 테마보다는 봉건적인 지방 할당이 많아졌지만, 제국 군대를 이끄는 야전 지휘관을 여전히 스트라테고스라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이 칭호가 “장군”이라는 일반 명사로서도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결국 비잔티움 말기에는 행정구역 지휘관으로서의 스트라테고스는 사라졌으나, 동로마 군사사의 긴 세월 속에 스트라테고스들은 국경을 지키고 전쟁을 치른 주역으로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다.
7세기 중반, 이슬람의 급속한 확장으로 소아시아 방어가 중요해지자, 황제는 소아시아와 기타 지역을 여러 테마로 구분하고 각 테마에 한 명의 스트라테고스를 파견하였다. 스트라테고스는 해당 테마 내 주둔군을 지휘하면서 동시에 민정을 감독하였다. 이는 이후 봉건제와 달리 군사와 행정을 겸직시킴으로써 신속한 방어와 효율적 통치를 노린 동로마의 독자적 체제였다. 예를 들어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는 소아시아 중부를 방어하는 군단의 장군임과 동시에 그 지역 주민들의 세금 징수와 치안을 책임졌다. 따라서 스트라테고스는 지방에서 황제를 대신하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종종 지방 유력 귀족을 압도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스트라테고스의 지위와 세력은 테마 제도의 성쇠와 궤를 같이했다. 8~9세기에는 스트라테고스들이 국경 방위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비잔티움 영토를 지켜냈고, 그 위신도 높았다. 황제들은 때때로 유능한 스트라테고스를 중앙으로 불러들여 주요 관직에 앉히거나, 반대로 지나친 세력을 경계하여 숙청하기도 했다. 10세기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와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 등은 모두 유능한 스트라테고스 출신으로서, 지방 군권을 발판삼아 황제위에 오른 경우였다. 이는 스트라테고스 계급의 사회·정치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이후 대토지귀족 가문들이 성장하고 중앙집권 통치가 강화되면서 전통적 테마 체제가 와해되어갔다. 특히 만지케르트 전투(1071) 이후 소아시아의 많은 테마가 붕괴하면서, 스트라테고스라는 직함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지역 통합 사령관인 “두카스”(Doux, 공작)나 여러 테마를 묶어 지휘하는 “카테파노” 등이 등장해 역할을 대체하였다. 예컨대 동부 국경 방어를 위해 두카 토우 안틱(Antioch의 두카스)이나 발칸 방면의 카테파노 투 이타리아스(이탈리아 총독) 등이 임명되었다. 이 새로운 호칭들은 시대 변화에 따른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스트라테고스 전통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옛 테마보다는 봉건적인 지방 할당이 많아졌지만, 제국 군대를 이끄는 야전 지휘관을 여전히 스트라테고스라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이 칭호가 “장군”이라는 일반 명사로서도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결국 비잔티움 말기에는 행정구역 지휘관으로서의 스트라테고스는 사라졌으나, 동로마 군사사의 긴 세월 속에 스트라테고스들은 국경을 지키고 전쟁을 치른 주역으로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다.
4.4. 카테파노[편집]
카테파노는 동로마 제국의 군사 직책으로, 여러 테마를 통합한 광역 사령관 혹은 속령 총독을 의미한다. 이 칭호는 9세기 이후 등장하였으며, 특히 제국의 서쪽 영토에서 두드러지게 쓰였다. “카테파노”는 그리스어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 즉 상위에서 감독한다는 뜻으로, 여러 지역을 포괄하여 관리·지휘하는 권한자를 가리켰다.
카테파노의 등장은 테마 체계의 유연한 조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티움 영토는 여러 소테마로 나뉘어 있었는데, 9세기 후반 이후 “이탈리아의 카테파노”라는 직책이 생겨나 그 모든 테마들을 총괄했다. 이탈리아 카테파노는 주로 칼라브리아(롬바르드인들이 말하던 랑고바르디아)와 풀리아를 함께 다스리며, 이탈리아 반도 내 동로마 영토를 통합 지휘했다. 그 거점은 칼라브리아의 수도 바리였는데, 이 때문에 “바리의 카테판”으로도 알려졌다. 이 직책을 통해 동로마는 이탈리아 내 분산된 군사력을 결집하고, 노르만이나 서방 위협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동로마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개념의 카테파노가 임명되었다. 예컨대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접경지대에서는 여러 변경 요새를 묶은 “동방 카테파노”가 운영되어, 분방한 국경 방어를 하나로 합쳤다. 카테파노는 자신 휘하에 여러 스트라테고스들을 거느리고 그 위에 군림하였으며, 필요시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기도 했다. 그 권한은 예전 엑사르코스에 비길 만했지만, 카테파노는 어디까지나 군사에 중점을 둔 직책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행정은 기존 총독들이 계속 처리했고, 카테파노는 군사 결정권과 외교 교섭권 정도를 추가로 부여받았다.
카테파노 제도는 11세기 중엽까지 존속했으나, 동로마 제국이 서방 영토를 잃고 국력이 쇠퇴하면서 함께 사라졌다. 1071년 노르만족에 의해 이탈리아 동로마 영토가 완전히 상실됨과 동시에 바리의 카테파노 자리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카테파노들은 동로마의 영역 수호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세 후반에 제국이 넓은 지리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려 애쓴 마지막 시도의 산물이었다. “총사령관”이라는 이 개념은 이후 십자군 국가나 시칠리아 왕국 등지에서 영향을 받아 사용되기도 했다. 다만 동로마 자체에서는 더 이상 카테파노를 볼 수 없었지만, 그 용어는 정복자들에 의해 계승되기도 한 것이다.
카테파노의 등장은 테마 체계의 유연한 조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티움 영토는 여러 소테마로 나뉘어 있었는데, 9세기 후반 이후 “이탈리아의 카테파노”라는 직책이 생겨나 그 모든 테마들을 총괄했다. 이탈리아 카테파노는 주로 칼라브리아(롬바르드인들이 말하던 랑고바르디아)와 풀리아를 함께 다스리며, 이탈리아 반도 내 동로마 영토를 통합 지휘했다. 그 거점은 칼라브리아의 수도 바리였는데, 이 때문에 “바리의 카테판”으로도 알려졌다. 이 직책을 통해 동로마는 이탈리아 내 분산된 군사력을 결집하고, 노르만이나 서방 위협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동로마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개념의 카테파노가 임명되었다. 예컨대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접경지대에서는 여러 변경 요새를 묶은 “동방 카테파노”가 운영되어, 분방한 국경 방어를 하나로 합쳤다. 카테파노는 자신 휘하에 여러 스트라테고스들을 거느리고 그 위에 군림하였으며, 필요시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기도 했다. 그 권한은 예전 엑사르코스에 비길 만했지만, 카테파노는 어디까지나 군사에 중점을 둔 직책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행정은 기존 총독들이 계속 처리했고, 카테파노는 군사 결정권과 외교 교섭권 정도를 추가로 부여받았다.
카테파노 제도는 11세기 중엽까지 존속했으나, 동로마 제국이 서방 영토를 잃고 국력이 쇠퇴하면서 함께 사라졌다. 1071년 노르만족에 의해 이탈리아 동로마 영토가 완전히 상실됨과 동시에 바리의 카테파노 자리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카테파노들은 동로마의 영역 수호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세 후반에 제국이 넓은 지리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려 애쓴 마지막 시도의 산물이었다. “총사령관”이라는 이 개념은 이후 십자군 국가나 시칠리아 왕국 등지에서 영향을 받아 사용되기도 했다. 다만 동로마 자체에서는 더 이상 카테파노를 볼 수 없었지만, 그 용어는 정복자들에 의해 계승되기도 한 것이다.
4.5. 메가스 둑스[편집]
메가스 둑스는 동로마 제국의 해군 최고사령관을 뜻하는 작위로, “대공”(Grand Duke)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메가스 둑스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1080년대에 신설한 직책으로,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운영되던 제국 및 지방 함대를 하나로 통합함에 따라 제정되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해상 방위를 강화하고 노르만·해적 위협에 대응하고자 제국 전역의 함선을 중앙 지휘 아래 두었고, 그 수장으로 메가스 둑스를 임명하였다.
메가스 둑스는 제국 해군의 모든 전력을 총괄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대뿐만 아니라 에게해, 흑해, 지중해 각지의 테마 함대까지 지휘 체계에 편입시켜 일원화된 명령을 내렸다. 이를 통해 해군 운용의 효율성이 증대되었고, 급변사태 시 신속하게 함대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메가스 둑스의 임무는 크게 외적의 해상 침입 방어, 제해권 장악, 해상 교역로 보호로 요약된다. 12세기 동안 메가스 둑스들은 주로 노르만족이나 이탈리아 해양공화국들의 도전을 견제하며 제국의 바다를 지키는 데 힘썼다. 이 직책에 임명된 인물들은 대개 해군 작전 경험이 풍부한 귀족이나 환관 장군들이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 접어들면서 메가스 둑스의 역할에는 변화가 생겼다. 몽골 침략 이후 동지중해 정세가 재편되고,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해상 주도권을 상당 부분 내어주게 되었다. 이 즈음 몇몇 메가스 둑스들은 전통적 해군 지휘 이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표적 사례로, 15세기 초 루카스 노타라스는 메가스 둑스로서 해군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황제의 총신으로 내정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해군대신 겸 재상”과 같은 위치에 올랐다. 이는 제국 해군력이 미약해진 반면 관직 자체의 명예성만 남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루카스 노타라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차라리 투르크의 투르반(터번)을 쓸지언정 라틴의 티아라(교황관)를 쓰지는 않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인물로, 동로마 제국 최후의 정국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가 바로 메가스 둑스였다는 사실은, 이 작위가 해군을 넘어 정부 수반급 지위로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14세기 후반에 “아미랄리오스”라는 새로운 해군 직함이 도입되어 메가스 둑스의 보좌관으로 기능했다. 아미랄리오스는 서방의 “애드미럴(admiral)” 개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메가스 둑스 휘하에서 제독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동로마 해군 자체가 쇠잔해져 실질적 전력은 크지 않았고, 최후의 전투인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는 소수의 함선만이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 메가스 둑수였던 노타라스는 수도 함락 후 오스만에 처형당하면서 이 작위의 역사도 끝을 맺었다. 메가스 두크스는 비록 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지만, 한때 동로마가 해양 강국으로 남으려 했던 의지의 산물이자 해군 전통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메가스 둑스는 제국 해군의 모든 전력을 총괄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대뿐만 아니라 에게해, 흑해, 지중해 각지의 테마 함대까지 지휘 체계에 편입시켜 일원화된 명령을 내렸다. 이를 통해 해군 운용의 효율성이 증대되었고, 급변사태 시 신속하게 함대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메가스 둑스의 임무는 크게 외적의 해상 침입 방어, 제해권 장악, 해상 교역로 보호로 요약된다. 12세기 동안 메가스 둑스들은 주로 노르만족이나 이탈리아 해양공화국들의 도전을 견제하며 제국의 바다를 지키는 데 힘썼다. 이 직책에 임명된 인물들은 대개 해군 작전 경험이 풍부한 귀족이나 환관 장군들이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 접어들면서 메가스 둑스의 역할에는 변화가 생겼다. 몽골 침략 이후 동지중해 정세가 재편되고,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해상 주도권을 상당 부분 내어주게 되었다. 이 즈음 몇몇 메가스 둑스들은 전통적 해군 지휘 이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표적 사례로, 15세기 초 루카스 노타라스는 메가스 둑스로서 해군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황제의 총신으로 내정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해군대신 겸 재상”과 같은 위치에 올랐다. 이는 제국 해군력이 미약해진 반면 관직 자체의 명예성만 남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루카스 노타라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차라리 투르크의 투르반(터번)을 쓸지언정 라틴의 티아라(교황관)를 쓰지는 않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인물로, 동로마 제국 최후의 정국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가 바로 메가스 둑스였다는 사실은, 이 작위가 해군을 넘어 정부 수반급 지위로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14세기 후반에 “아미랄리오스”라는 새로운 해군 직함이 도입되어 메가스 둑스의 보좌관으로 기능했다. 아미랄리오스는 서방의 “애드미럴(admiral)” 개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메가스 둑스 휘하에서 제독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동로마 해군 자체가 쇠잔해져 실질적 전력은 크지 않았고, 최후의 전투인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는 소수의 함선만이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 메가스 둑수였던 노타라스는 수도 함락 후 오스만에 처형당하면서 이 작위의 역사도 끝을 맺었다. 메가스 두크스는 비록 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지만, 한때 동로마가 해양 강국으로 남으려 했던 의지의 산물이자 해군 전통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4.6. 드롱가리오스[편집]
드롱가리오스는 동로마 제국의 군사 직위로, 원뜻은 고대 로마 군대의 부대 단위인 “드룽곤”(droungos, 약 수백 명 규모)의 지휘관을 가리킨다. 그러나 동로마 시대에 이르러 드롱가리오스는 특정 정예 부대나 해군 함대의 지휘관 칭호로 발전하였다. 중기 동로마의 맥락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드롱가리오스 테스 비글라스”와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이다.
드롱가리오스 테스 비글라스(droungarios tēs viglas)는 직역하면 “경계근무대의 드롱가리오스”로, 황실 호위 및 수도 치안부대의 사령관이었다. 비글라(νιγλά)로 불린 이 부대는 황제 야영지 경비와 수도 일대의 경계를 맡은 정예 기병대로, 드롱가리오스 테스 비글라스는 환관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단순한 부대 지휘관을 넘어, 수도 근교에서 발생하는 반란이나 소요를 진압하고 또 유사시 황제를 호위하는 중책을 졌다. 또한 후대에는 드롱가리오스 테스 비글라스가 황실 재판소의 재판장 역할까지 겸하여, 일정 범죄 사건의 심리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는 군사 사령관이면서 치안 판관의 지위도 병행한 특수한 사례로, 수도 방위를 위한 광범위한 권한을 보여준다.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droungarios tou stolou)는 제국 함대의 지휘관, 즉 해군 제독에 해당했다. 8~10세기 동안 비잔티움 해군은 중앙의 황실 함대와 각 테마의 지방 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는 그 중 제국 본토 함대를 지휘했다. 초기에 이 직위는 동로마 해군의 최고위였다. 예컨대 10세기 중엽 오스만 침입에 대비했던 히메리오스는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로서 성공적인 해전 지휘를 펼쳤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알렉시오스 1세가 해군 조직을 개편하면서, 메가스 둑스가 해군 총사령관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는 메가스 두크스 아래의 고위 해군 장교 직급으로 격하되었다. 이후로는 메가스 드롱가리오스라고 칭해진 경우도 있는데, 이는 메가스 둑스의 차석으로서 함대 부제독 역할을 뜻했다.
드롱가리오스 칭호는 이처럼 상황에 따라 위상이 변화했다. 12세기에는 드롱가리오스라는 호칭이 귀에 익숙해져서, 지방 함대 사령관들도 드롱가리오스라 부른 기록이 있다. 또한 육군에서도 소규모 기동대 지휘관을 드롱가리오스라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주목하는 드롱가리오스는 위에 언급한 두 경우로, 황제 직속 정예대의 지휘자와 제국 함대의 선봉장이다. 두 직책 모두 황제 권위를 지켜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비글라스의 드롱가리오스는 환관 세력의 정치적 입지와 맞물려 조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동로마 말기에 이르러서는 드롱가리오스 칭호의 사용이 드물어졌고, 다른 새로운 작위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군사 체제에서 드롱가리오스들은 제국의 내부와 해상을 수호하는 중견 지휘관들이었다. 그들의 충성과 용맹으로 인해 황제는 수도의 안녕을 지킬 수 있었고, 제국은 해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드롱가리오스 테스 비글라스(droungarios tēs viglas)는 직역하면 “경계근무대의 드롱가리오스”로, 황실 호위 및 수도 치안부대의 사령관이었다. 비글라(νιγλά)로 불린 이 부대는 황제 야영지 경비와 수도 일대의 경계를 맡은 정예 기병대로, 드롱가리오스 테스 비글라스는 환관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단순한 부대 지휘관을 넘어, 수도 근교에서 발생하는 반란이나 소요를 진압하고 또 유사시 황제를 호위하는 중책을 졌다. 또한 후대에는 드롱가리오스 테스 비글라스가 황실 재판소의 재판장 역할까지 겸하여, 일정 범죄 사건의 심리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는 군사 사령관이면서 치안 판관의 지위도 병행한 특수한 사례로, 수도 방위를 위한 광범위한 권한을 보여준다.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droungarios tou stolou)는 제국 함대의 지휘관, 즉 해군 제독에 해당했다. 8~10세기 동안 비잔티움 해군은 중앙의 황실 함대와 각 테마의 지방 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는 그 중 제국 본토 함대를 지휘했다. 초기에 이 직위는 동로마 해군의 최고위였다. 예컨대 10세기 중엽 오스만 침입에 대비했던 히메리오스는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로서 성공적인 해전 지휘를 펼쳤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알렉시오스 1세가 해군 조직을 개편하면서, 메가스 둑스가 해군 총사령관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드롱가리오스 투 스톨루는 메가스 두크스 아래의 고위 해군 장교 직급으로 격하되었다. 이후로는 메가스 드롱가리오스라고 칭해진 경우도 있는데, 이는 메가스 둑스의 차석으로서 함대 부제독 역할을 뜻했다.
드롱가리오스 칭호는 이처럼 상황에 따라 위상이 변화했다. 12세기에는 드롱가리오스라는 호칭이 귀에 익숙해져서, 지방 함대 사령관들도 드롱가리오스라 부른 기록이 있다. 또한 육군에서도 소규모 기동대 지휘관을 드롱가리오스라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주목하는 드롱가리오스는 위에 언급한 두 경우로, 황제 직속 정예대의 지휘자와 제국 함대의 선봉장이다. 두 직책 모두 황제 권위를 지켜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비글라스의 드롱가리오스는 환관 세력의 정치적 입지와 맞물려 조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동로마 말기에 이르러서는 드롱가리오스 칭호의 사용이 드물어졌고, 다른 새로운 작위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군사 체제에서 드롱가리오스들은 제국의 내부와 해상을 수호하는 중견 지휘관들이었다. 그들의 충성과 용맹으로 인해 황제는 수도의 안녕을 지킬 수 있었고, 제국은 해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4.7. 프로토스트라토르[편집]
프로토스트라토르는 동로마 제국의 군사 관직으로, 원뜻은 “제1 기마사령” 즉 “수석 마갑장” 혹은 “마군단장” 정도로 해석된다. 본래 황제의 마구간을 책임지는 관리에서 출발한 직책이지만, 중세 동로머 후기에는 제국 군대의 부사령관 격으로 격상되었다. 이 작위는 특히 콤네노스 왕조와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에 중시되었다.
초기 프로토스트라토르는 황제의 마차와 마필(馬匹)을 관리하는 시종무관이었다. 그러나 12세기 콤네노스 왕조 때부터 이 직위를 받은 자가 황제 측근 장군으로 활약하는 예가 늘어났다. 예컨대 마누일 1세 콤네노스 황제는 자신의 충복을 프로토스트라토르에 임명하고 전장에서 부장으로 삼았다. 이처럼 군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프로토스트라토르는 더 이상 단순 시종장이 아닌 황제의 기병대 지휘관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프로토스트라토르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대 작위 체계를 기록한 의전서에 따르면, 프로토스트라토르는 메가스 둑스나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와 함께 서열 상위에 속했으며, 황제를 직접 보좌하는 최고위 장군 중 하나로 인정되었다. 실제로 14세기 내전에 활약한 명장 시릴 팔라이올로고스는 프로토스트라토르 칭호를 지니고 황제측 군대를 지휘했고, 그 위력은 메가스 도메스티코스 못지않았다. 또한 프로토스트라토르는 전쟁시 황제의 말을 곁에서 이끄는 영예로운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렇듯 군권과 의전 모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프로토스트라토르 작위의 진화는 동로마 군대 지휘 체계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궁정 시종직에서 출발하여 야전 사령부까지 겸하게 된 이 사례는, 동로마 제국이 필요에 따라 기존 직책의 성격을 바꾸어 활용했음을 뜻한다. 특히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절 황실 인척들이 주로 프로토스트라토르에 임명되면서, 작위는 단순 명예가 아닌 실질적 권력 보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당시 문헌에는 “프로토스트라토르인 나의 형제…”와 같이 황제가 신뢰를 나타내는 표현도 등장한다. 이는 그만큼 중요한 직임이었음을 나타낸다.
동로마 최후의 날들에도 프로토스트라토르들은 수도 수비에 투입되어 싸웠다. 그러나 제국과 운명을 함께하며 이 작위 역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후세의 기록에서 프로토스트라토르는 때로 생경하게 보이는 칭호지만, 그 내력에는 동로마 군제의 변화와 적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처음엔 마구간을 다스리던 자가 나중엔 군대를 이끌었던 것처럼, 비잔티움의 관직들은 이렇게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천년 제국을 지탱했던 것이다.
초기 프로토스트라토르는 황제의 마차와 마필(馬匹)을 관리하는 시종무관이었다. 그러나 12세기 콤네노스 왕조 때부터 이 직위를 받은 자가 황제 측근 장군으로 활약하는 예가 늘어났다. 예컨대 마누일 1세 콤네노스 황제는 자신의 충복을 프로토스트라토르에 임명하고 전장에서 부장으로 삼았다. 이처럼 군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프로토스트라토르는 더 이상 단순 시종장이 아닌 황제의 기병대 지휘관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프로토스트라토르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대 작위 체계를 기록한 의전서에 따르면, 프로토스트라토르는 메가스 둑스나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와 함께 서열 상위에 속했으며, 황제를 직접 보좌하는 최고위 장군 중 하나로 인정되었다. 실제로 14세기 내전에 활약한 명장 시릴 팔라이올로고스는 프로토스트라토르 칭호를 지니고 황제측 군대를 지휘했고, 그 위력은 메가스 도메스티코스 못지않았다. 또한 프로토스트라토르는 전쟁시 황제의 말을 곁에서 이끄는 영예로운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렇듯 군권과 의전 모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프로토스트라토르 작위의 진화는 동로마 군대 지휘 체계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궁정 시종직에서 출발하여 야전 사령부까지 겸하게 된 이 사례는, 동로마 제국이 필요에 따라 기존 직책의 성격을 바꾸어 활용했음을 뜻한다. 특히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절 황실 인척들이 주로 프로토스트라토르에 임명되면서, 작위는 단순 명예가 아닌 실질적 권력 보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당시 문헌에는 “프로토스트라토르인 나의 형제…”와 같이 황제가 신뢰를 나타내는 표현도 등장한다. 이는 그만큼 중요한 직임이었음을 나타낸다.
동로마 최후의 날들에도 프로토스트라토르들은 수도 수비에 투입되어 싸웠다. 그러나 제국과 운명을 함께하며 이 작위 역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후세의 기록에서 프로토스트라토르는 때로 생경하게 보이는 칭호지만, 그 내력에는 동로마 군제의 변화와 적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처음엔 마구간을 다스리던 자가 나중엔 군대를 이끌었던 것처럼, 비잔티움의 관직들은 이렇게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천년 제국을 지탱했던 것이다.
4.8. 헤타이리아르호스[편집]
헤타이리아르호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외국인 용병 부대인 헤타이레이아를 지휘한 장군이다. 헤타이레이아는 그리스어로 “동료들의 무리”를 뜻하며, 다양한 출신의 용병들로 조직된 황제 친위 군단을 가리킨다. 이 부대의 대장은 헤타이리아르호스(또는 에테리아르크)라 불렸고, 제국 군제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헤타이레이아의 기원은 9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잔티움은 예로부터 외국인 용병을 고용해왔지만, 미하일 3세 황제 시절 이들을 묶어 친위대를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바랑기아인(노르드계 용병), 프랑크인, 투르크인 등 이방 출신 용사들을 뽑아 황제 직속의 기병대로 운용하였다. 헤타이리아르호스는 이러한 이국 용병 집단의 통솔자로서, 일반 동로마 장교들과 다른 노선을 걷는 경우가 많았다.
헤타이리아르호스의 임무는 일차적으로 황제의 신변 경호였다. 황제가 행차할 때 헤타이레이아 기병들이 호위대를 형성했고, 전쟁터에서는 황제의 친위대로 최후까지 곁을 지켰다. 동시에 이 부대는 제국 내 치안 유지나 쿠데타 방지에도 투입되었다. 외국인들로 구성되었기에 궁정 내 파벌 싸움에 비교적 중립적일 수 있었고, 따라서 황제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부대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헤타이리아르호스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종종 환관이나 황실 친척이 이 지휘권을 맡았다.
헤타이레이아 부대는 규모와 조직 면에서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메갈레 헤타이레이아(대헤타이레이아), 메세 헤타이레이아(중헤타이레이아), 미크라 헤타이레이아(소헤타이레이아)였다. 흥미롭게도 이 구분은 병력 규모라기보다 위계와 역할에 따른 것이었다. 메갈레 헤타이레이아는 황실 근위와 어전(御前) 경호를 맡은 최정예로서, 주로 바랑기아 도끼병 등으로 편성되었고, 그 지휘관은 메가스 헤타이리아르호스라 불렸다. 미크라 헤타이레이아는 수도군단에 속한 외국인 기병대로, 인원은 오히려 메갈레보다 많았지만 격이 낮았고, 지휘관은 미크로스 헤타이리아르호스라 했다. 메세 헤타이레이아는 그 중간급으로 특수 임무대에 가까웠다. 이러한 편성 아래 헤타이리아르호스들은 각자 맡은 병력을 이끌고 황제를 호위했다.
시간이 흐르며 바랑기아 친위대 등 일부 부대가 독립적 명성을 얻었지만, 전체적으로 헤타이레이아 체제는 팔라이올로고스 왕조까지 존속하였다. 다만 후기에 가면 재정 악화로 용병 규모가 줄고, 황제가 라틴 용병에 의존하는 경우도 생기면서 옛 헤타이리아르호스 직책의 영향력은 감퇴하였다. 그래도 최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전에서도 노르만 출신 병사들이 황제 곁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고, 이는 전통적인 외인 친위 부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동로마의 헤타이리아르호스들은 다민족 제국의 용병 문화를 보여주는 존재로, 그들이 지휘한 이색적인 군단은 동로마 군대의 다채로운 측면을 상징한다.
헤타이레이아의 기원은 9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잔티움은 예로부터 외국인 용병을 고용해왔지만, 미하일 3세 황제 시절 이들을 묶어 친위대를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바랑기아인(노르드계 용병), 프랑크인, 투르크인 등 이방 출신 용사들을 뽑아 황제 직속의 기병대로 운용하였다. 헤타이리아르호스는 이러한 이국 용병 집단의 통솔자로서, 일반 동로마 장교들과 다른 노선을 걷는 경우가 많았다.
헤타이리아르호스의 임무는 일차적으로 황제의 신변 경호였다. 황제가 행차할 때 헤타이레이아 기병들이 호위대를 형성했고, 전쟁터에서는 황제의 친위대로 최후까지 곁을 지켰다. 동시에 이 부대는 제국 내 치안 유지나 쿠데타 방지에도 투입되었다. 외국인들로 구성되었기에 궁정 내 파벌 싸움에 비교적 중립적일 수 있었고, 따라서 황제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부대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헤타이리아르호스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종종 환관이나 황실 친척이 이 지휘권을 맡았다.
헤타이레이아 부대는 규모와 조직 면에서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메갈레 헤타이레이아(대헤타이레이아), 메세 헤타이레이아(중헤타이레이아), 미크라 헤타이레이아(소헤타이레이아)였다. 흥미롭게도 이 구분은 병력 규모라기보다 위계와 역할에 따른 것이었다. 메갈레 헤타이레이아는 황실 근위와 어전(御前) 경호를 맡은 최정예로서, 주로 바랑기아 도끼병 등으로 편성되었고, 그 지휘관은 메가스 헤타이리아르호스라 불렸다. 미크라 헤타이레이아는 수도군단에 속한 외국인 기병대로, 인원은 오히려 메갈레보다 많았지만 격이 낮았고, 지휘관은 미크로스 헤타이리아르호스라 했다. 메세 헤타이레이아는 그 중간급으로 특수 임무대에 가까웠다. 이러한 편성 아래 헤타이리아르호스들은 각자 맡은 병력을 이끌고 황제를 호위했다.
시간이 흐르며 바랑기아 친위대 등 일부 부대가 독립적 명성을 얻었지만, 전체적으로 헤타이레이아 체제는 팔라이올로고스 왕조까지 존속하였다. 다만 후기에 가면 재정 악화로 용병 규모가 줄고, 황제가 라틴 용병에 의존하는 경우도 생기면서 옛 헤타이리아르호스 직책의 영향력은 감퇴하였다. 그래도 최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전에서도 노르만 출신 병사들이 황제 곁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고, 이는 전통적인 외인 친위 부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동로마의 헤타이리아르호스들은 다민족 제국의 용병 문화를 보여주는 존재로, 그들이 지휘한 이색적인 군단은 동로마 군대의 다채로운 측면을 상징한다.
4.9. 바랑기아 친위대장(아콜루토스)[편집]
바랑기아 친위대는 동로마 황제를 호위한 유명한 북유럽계 용병 친위부대이며, 그 지휘관은 특이하게도 “아콜루토스”라고 불렸다. 아콜루토스(Akolouthos)는 그리스어로 “수행자, 수행원”이라는 뜻으로, 황제 옆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에 걸맞게 친위대의 대장을 가리켰다. 이 칭호는 특히 11세기 이후 바랑기아 친위대의 지휘관 직함으로 굳어졌다.
바랑기아 친위대는 10세기 말 바실리오스 2세 시기에 형성되었다.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가 개종과 동맹의 대가로 보낸 노르드인 용병 부대가 그 시초로, 이들의 용맹과 충성을 눈여겨본 황제가 친위대로 편입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영국, 스칸디나비아, 러시아계 등 다양한 북유럽 출신 전사들이 모여들어 바랑기아대는 강화되었다. 그들은 커다란 전투 도끼를 주무장으로 사용해 “도끼병 친위대”로도 악명이 높았다.
아콜루토스는 이러한 바랑기아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대부분 동로마인이 맡았다. 흥미롭게도 친위대원들은 이방인이지만, 지휘는 제국 내 신뢰받는 인물이 담당한 것이다. 아콜루토스는 황제의 직속 부하로서 바랑기아 용병들의 숙소와 급료, 훈련을 관리하고, 위급시에는 그들을 지휘하여 황제 호위 및 전투에 투입했다. 11세기 이후 바랑기아대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아콜루토스 지위도 상승했다. 황제가 아닌 사람이 이 강철 같은 친위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곧 궁정에서 상당한 힘을 가졌음을 뜻했다. 실제로 11~12세기 몇몇 아콜루토스는 정부 고위직을 겸하며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프로토스파타리오스(근위보병대장) 등이 친위대장을 겸했으나, 11세기부터 아콜루토스라는 별칭이 바랑기아대 지휘관의 공식 명칭으로 굳었다. 이 무렵부터 영국 출신 잉글랜드인들이 노르만 정복을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와 바랑기아대에 대거 합류함에 따라, 친위대 규모와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동로마의 전투마다 바랑기아대는 최후의 보루로 활약했고, 그 최전선엔 아콜루토스가 서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라틴 제국 이후 황실 재정이 악화되면서 바랑기아 친위대도 점차 축소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때는 그 명맥은 이어졌지만 이전같은 영광은 퇴색하였다. 1400년경 기록에 마지막 바랑기아 용병들의 언급이 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즈음에는 극소수만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콜루토스 직책도 자연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바랑기아 친위대와 아콜루토스의 이야기는 비잔티움 군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황제의 도끼친위대”라는 전설은 후대에까지 회자되었다. 아콜루토스는 비록 공식 문헌에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가 지휘했던 용맹한 이방인 전사들은 동로마를 지탱한 힘 중 하나였다.
바랑기아 친위대는 10세기 말 바실리오스 2세 시기에 형성되었다.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가 개종과 동맹의 대가로 보낸 노르드인 용병 부대가 그 시초로, 이들의 용맹과 충성을 눈여겨본 황제가 친위대로 편입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영국, 스칸디나비아, 러시아계 등 다양한 북유럽 출신 전사들이 모여들어 바랑기아대는 강화되었다. 그들은 커다란 전투 도끼를 주무장으로 사용해 “도끼병 친위대”로도 악명이 높았다.
아콜루토스는 이러한 바랑기아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대부분 동로마인이 맡았다. 흥미롭게도 친위대원들은 이방인이지만, 지휘는 제국 내 신뢰받는 인물이 담당한 것이다. 아콜루토스는 황제의 직속 부하로서 바랑기아 용병들의 숙소와 급료, 훈련을 관리하고, 위급시에는 그들을 지휘하여 황제 호위 및 전투에 투입했다. 11세기 이후 바랑기아대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아콜루토스 지위도 상승했다. 황제가 아닌 사람이 이 강철 같은 친위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곧 궁정에서 상당한 힘을 가졌음을 뜻했다. 실제로 11~12세기 몇몇 아콜루토스는 정부 고위직을 겸하며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프로토스파타리오스(근위보병대장) 등이 친위대장을 겸했으나, 11세기부터 아콜루토스라는 별칭이 바랑기아대 지휘관의 공식 명칭으로 굳었다. 이 무렵부터 영국 출신 잉글랜드인들이 노르만 정복을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와 바랑기아대에 대거 합류함에 따라, 친위대 규모와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동로마의 전투마다 바랑기아대는 최후의 보루로 활약했고, 그 최전선엔 아콜루토스가 서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라틴 제국 이후 황실 재정이 악화되면서 바랑기아 친위대도 점차 축소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때는 그 명맥은 이어졌지만 이전같은 영광은 퇴색하였다. 1400년경 기록에 마지막 바랑기아 용병들의 언급이 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즈음에는 극소수만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콜루토스 직책도 자연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바랑기아 친위대와 아콜루토스의 이야기는 비잔티움 군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황제의 도끼친위대”라는 전설은 후대에까지 회자되었다. 아콜루토스는 비록 공식 문헌에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가 지휘했던 용맹한 이방인 전사들은 동로마를 지탱한 힘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