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은 로마시를 역사적 정통성과 황제 권위의 상징으로 존중하였으나, 실제 정치적·군사적 관점에서는 점차 변방에 가까운 도시로 인식하였다.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고, 로마시가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 이탈리아가 게르만 세력 또는 교황령의 통제 아래 놓이면서, 제국의 실질적 통치에서 멀어졌다.
이로 인해 로마시는 제국의 직접 지배에서 벗어난 ‘잃어버린 도시’로 여겨졌으며,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사라졌다. 그러나 상징적 가치와 교회적 권위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제국은 로마 황제의 후계자라는 자의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시를 실질적 중심지로 여기지 않았으나, 제국 정체성의 상징으로는 계속 존중하였다. 따라서 로마시는 ‘정치적 변방’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중심’이라는 이중적 위상을 지닌 도시로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시는 제국의 직접 지배에서 벗어난 ‘잃어버린 도시’로 여겨졌으며,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사라졌다. 그러나 상징적 가치와 교회적 권위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제국은 로마 황제의 후계자라는 자의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시를 실질적 중심지로 여기지 않았으나, 제국 정체성의 상징으로는 계속 존중하였다. 따라서 로마시는 ‘정치적 변방’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중심’이라는 이중적 위상을 지닌 도시로 남게 되었다.
2. 실질적 인식[편집]
로마시는 원래 로마 제국 전체의 상징이자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의 위상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는 제국의 구조적 변화와 더불어 문화적, 종교적 전환이 맞물린 결과였다. 로마 제국이 행정상 동서로 분리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방의 새로운 수도로 부상함에 따라, 로마시는 점차 정치적 실질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고대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유산으로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노스 1세가 동방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 이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황제의 거처일 뿐 아니라 동방의 정치, 군사, 종교를 통합하는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도시는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망과 행정 조직의 중심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를 통해 보다 효과적인 통치를 실현하였다. 반면 로마시는 상징적 수도의 위치에 머무르며 실질적 통치 구조에서 멀어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적 영향력도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은 동로마뿐 아니라 서로마 제국 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는데, 서로마의 통치 중심은 점차 메디올라눔(밀라노)나 라벤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와 같은 도시로 이동하였고, 로마는 황제의 거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명목상의 수도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 수복 정책은 로마시에 대한 제국의 관심이 일시적으로 되살아난 시기였다. 그는 로마시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되찾기 위해 동고트 왕국과의 장기적인 전쟁, 즉 고트 전쟁을 감행하였다. 이 전쟁은 제국군의 일시적 성공을 가져왔지만, 로마시는 반복된 포위와 교전, 약탈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도시는 극심한 황폐화 상태에 놓였고, 인구는 급감하였으며, 행정 및 사회 기반 시설은 마비되었다. 비록 제국은 로마시의 재점령에 성공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제한적이었고, 전쟁 이후에도 로마시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는 급속히 약화되었고, 제국의 관심은 다시 동방 문제로 향하게 되었다.
로마시에 대한 제국 내부의 인식 변화는 단순히 정치적, 행정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적 권위 체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로마 제국 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가 점차 강화되는 동안, 로마 교황청은 동로마와 복잡하고 때로는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제국이 로마시를 전략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실질적으로 보호하지 못하면서, 교황청은 점차 동로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는 교황의 권위가 제국의 황제 권위와 병립하거나 충돌하는 구조로 이어졌으며,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갈등은 동서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분리는 로마시를 동로마 세계의 종교 중심에서도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으며, 결국 교황청은 8세기 중반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동로마 제국과의 결별을 가시화하였다.
문화적 차이 역시 로마시의 위상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시간이 흐르며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행정과 교육의 중심 언어로 삼았고, 제국의 문화적 정체성은 점점 더 고대 그리스와 동방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두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로마시의 정체성과는 점차 괴리를 형성하였으며, 로마시는 동방 세계의 정서와 문화에서 소외된 존재로 인식되었다. 제국의 이름은 여전히 '로마인들의 제국'으로 유지되었지만, 그 실질적 자의식은 로마시보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동방 정교회 중심의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는 중세 동로마 사회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으며, 로마시는 동로마인들에게 과거의 위대한 유산이자 역사적 기념물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제국의 정책 결정 과정이나 군사 전략, 재정 운영에서 로마시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고, 이는 제국 말기까지 이어지는 구조적 소외로 고착되었다. 나아가 동로마 제국 내 지식인과 행정가, 성직자들의 기록에서도 로마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초기 중심지로서 경건한 의미만을 유지하였을 뿐, 실제 정치나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로마시는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 실질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제국의 시선은 철저히 동방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정치, 행정, 군사, 문화, 종교의 모든 측면에서 완전히 독자적인 구조와 정체성을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표적 사례이다. 로마라는 이름을 유지하면서도, 동로마 제국은 실질적으로 '로마'를 떠나 있었던 셈이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1세가 동방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 이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황제의 거처일 뿐 아니라 동방의 정치, 군사, 종교를 통합하는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도시는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망과 행정 조직의 중심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를 통해 보다 효과적인 통치를 실현하였다. 반면 로마시는 상징적 수도의 위치에 머무르며 실질적 통치 구조에서 멀어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적 영향력도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은 동로마뿐 아니라 서로마 제국 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는데, 서로마의 통치 중심은 점차 메디올라눔(밀라노)나 라벤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와 같은 도시로 이동하였고, 로마는 황제의 거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명목상의 수도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 수복 정책은 로마시에 대한 제국의 관심이 일시적으로 되살아난 시기였다. 그는 로마시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되찾기 위해 동고트 왕국과의 장기적인 전쟁, 즉 고트 전쟁을 감행하였다. 이 전쟁은 제국군의 일시적 성공을 가져왔지만, 로마시는 반복된 포위와 교전, 약탈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도시는 극심한 황폐화 상태에 놓였고, 인구는 급감하였으며, 행정 및 사회 기반 시설은 마비되었다. 비록 제국은 로마시의 재점령에 성공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제한적이었고, 전쟁 이후에도 로마시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는 급속히 약화되었고, 제국의 관심은 다시 동방 문제로 향하게 되었다.
로마시에 대한 제국 내부의 인식 변화는 단순히 정치적, 행정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적 권위 체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로마 제국 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권위가 점차 강화되는 동안, 로마 교황청은 동로마와 복잡하고 때로는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제국이 로마시를 전략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실질적으로 보호하지 못하면서, 교황청은 점차 동로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는 교황의 권위가 제국의 황제 권위와 병립하거나 충돌하는 구조로 이어졌으며,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갈등은 동서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분리는 로마시를 동로마 세계의 종교 중심에서도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으며, 결국 교황청은 8세기 중반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동로마 제국과의 결별을 가시화하였다.
문화적 차이 역시 로마시의 위상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시간이 흐르며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행정과 교육의 중심 언어로 삼았고, 제국의 문화적 정체성은 점점 더 고대 그리스와 동방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두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로마시의 정체성과는 점차 괴리를 형성하였으며, 로마시는 동방 세계의 정서와 문화에서 소외된 존재로 인식되었다. 제국의 이름은 여전히 '로마인들의 제국'으로 유지되었지만, 그 실질적 자의식은 로마시보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동방 정교회 중심의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는 중세 동로마 사회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으며, 로마시는 동로마인들에게 과거의 위대한 유산이자 역사적 기념물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제국의 정책 결정 과정이나 군사 전략, 재정 운영에서 로마시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고, 이는 제국 말기까지 이어지는 구조적 소외로 고착되었다. 나아가 동로마 제국 내 지식인과 행정가, 성직자들의 기록에서도 로마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초기 중심지로서 경건한 의미만을 유지하였을 뿐, 실제 정치나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로마시는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 실질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제국의 시선은 철저히 동방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정치, 행정, 군사, 문화, 종교의 모든 측면에서 완전히 독자적인 구조와 정체성을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표적 사례이다. 로마라는 이름을 유지하면서도, 동로마 제국은 실질적으로 '로마'를 떠나 있었던 셈이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3. 상징적 인식[편집]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직계로 인식하여 제국 전 시기에 걸쳐 ‘로마’라는 개념을 국가 정체성과 이상으로 삼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새 수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하고 공식 명칭을 ‘노바 로마’(새로운 로마)로 정할 정도로, 동로마인들에게 로마의 유산은 정치·종교·문화 모든 면에서 핵심적인 상징이었다. 이는 옛 로마시가 지닌 권위를 새로운 수도에 계승시키려는 의도로, 실제로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로마 주교 다음의 수위권을 갖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가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이다”라는 교회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초기 동로마 제국에 있어서 로마시는 여전히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로마 제국의 “영원한 도시”로 불리던 로마가 410년 서고트족에 함락되었을 때, 동방의 황제 호노리우스와 테오도시우스 2세는 3일간 궁정 애도기간을 선포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이는 동로마인들이 옛 수도 로마에 대해 여전히 모든 민족의 어머니로서 경외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국의 정치 중심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완전히 옮겨가고, 특히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동로마인들의 인식에서 ‘로마’는 점차 이상화된 개념으로 변모해 갔다. 이제 제국의 수도는 더 이상 옛 로마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였으며, 이미 여러 황제들이 구로마를 외면하고 동방에 주력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새로운 로마(제2의 로마)’라는 의식이 뿌리내려, 동로마의 융성과 함께 이 도시는 인구 수십만의 기독교 세계 최대 도시로 번영하였고 동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위상은 너무나 커서 스스로 ‘모든 도시의 여왕’,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여 있는 곳’이라고 칭할 만큼이었다. 실제로 시민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그 도시”라 부르며 제국의 중심으로 여겼고, 외부 세계에서도 슬라브어로 “차리그라드”(황제의 도시), 바이킹들의 고어로 “미클라가르드”(거대한 도시)라 부르는 등 새로운 로마에 각종 명예로운 별칭을 부여했다. 이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옛 로마의 권위를 거의 완전히 대체하면서, 동로마인들의 관심은 지명으로서의 로마 도시보다는 제국 자체의 로마적 정체성에 집중되었다.
정치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로마 제국의 이념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비록 5세기 이후 이탈리아와 로마를 상실했어도, 동로마의 황제들은 세계에서 유일한 로마 황제로서 보편 지배권을 가졌다고 자처했다. 한때 서로마의 멸망 직후에는 서방의 게르만계 왕들조차 명목상 동로마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로마 세계 질서의 일부임을 내세웠고, 동로마 정부도 서방을 일시적으로 “야만인의 손에 넘어간 로마 영토”로 간주하면서 형식적인 통제권을 주장하였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옛 로마 영광을 되찾고자 로마와 이탈리아를 재정복하는 데 거대한 군사력을 투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서방 회복(“로마 재통일”)의 이상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제국의 꿈으로 남았다. 그러나 7세기 이후 제국이 동방과 북방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현실적으로 서방에 간여할 여력이 감소했고, 8세기 중엽 라벤나 총독부의 붕괴(751년)로 이탈리아의 마지막 거점마저 잃자 사실상 동로마의 통치가 서방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로마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자치를 굳히고 프랑크 왕국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동로마와 멀어졌고, 그 결과 서로마 황제의 빈 자리를 노린 프랑크 왕국이 교황과 연합하여 800년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대관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 황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동로마는 여제 이리니 통치기의 혼란으로 즉각 대응하지 못했지만 이후로도 카롤루스를 정식 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9세기 초 동로마 황제들은 프랑크 군주를 그저 ‘프랑크인의 왕’으로 호칭하며 격하했고, 일부 절충을 통해 “황제” 칭호 자체는 양립할 수 있되 동로마 황제가 “로마인의 황제”라는 점은 양보하지 않는 미묘한 외교 절충도 시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정통성에 대한 동서 분쟁은 해소되지 않아, 이후로도 “두 황제 문제”로 불리는 경쟁 구도가 지속되었다.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 측은 동로마 황제를 “그리스인의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 등으로 불러 로마 제국임을 부정했고, 동로마 측도 마찬가지로 서방 황제를 공문서에서 “독일인의 왕” 등으로 칭하며 로마의 이름을 양보하지 않았다. 10세기경 동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2세는 심지어 교황이 동로마 황제를 “로마인의 황제”로 호칭하지 않고 “그리스인의 황제”로 낮추어 부르자 크게 분개하였다. 그 측근들은 “거룩한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황실의 홀과 원로원(元老院)과 모든 로마의 기사들을 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왔고, 로마에는 어부와 상인 등 천한 무리만 남겨두었음을 어리석은 교황이 모르고 있다”고 통렬히 질책하였다고 전한다. 이 일화에서 보이듯 동로마인들에게 로마라는 명칭은 제국 통합의 상징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였지만, 정작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 로마 자체에 대한 집착은 차츰 희미해졌다. 실제로 니키포로스 2세는 분노 속에 이탈리아 원정과 로마 탈환까지 거론하였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제국 정치에서 로마시는 현실적인 목표에서 거의 배제되었다. 제국의 영역 축소와 더불어 ‘로마’의 개념은 지리적 실체라기보다 제국의 법통과 이상을 가리키는 추상화된 개념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도 ‘로마’에 대한 인식 변화가 두드러진다. 초창기 동로마 교회는 로마 교회를 사도 베드로가 세운 최고 좌석으로 존중하여, 5대 총대주교좌(펜타르키아) 중 로마를 첫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둘째로 배석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로운 로마를 세우고 교회 행정에서도 동방의 자치권을 강화하면서, 점차 교황의 우월권에 대한 이견이 나타났다. 제국의 신학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사도 안드레아스의 후계좌로서 신 로마의 종교적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였고, 8세기 성상 파괴 운동 등으로 교황청과 갈등을 빚는 동안 로마 교회에 대한 동방의 불신은 깊어졌다. 결정적으로 9세기 중엽 포티오스 총대주교 시대에 동로마와 로마 교회 간 심각한 충돌이 일어났다. 포티오스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교황 니콜라오 1세를 맹렬히 비난하고, 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교황을 이단으로 선언하며 파문해 버렸다. 이 공의회는 로마 교회의 성령론 doctrinal 변경(필리오쿠에 문제)과 교황의 월권을 규탄하고 “정통 신앙의 수호자는 신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이며, 구 로마의 교황은 이에 도전한 이단자”라는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비록 이 사건은 일시적으로 끝났지만, 1054년 동서 교회 대분열로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 교회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그 이후 동로마인들에게 로마 교회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닌 경쟁자이자 때로는 신학적으로 경계해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 제국 말기에 일시적으로 서방에 교황 중심의 원조를 청하기 위해 교회 재통합을 시도한 적도 있었으나, 동로마 시민 다수는 로마를 배신자나 다름없는 이질적 존재로 여겨 통합에 반발하였다. 이렇듯 종교적 담론에서의 ‘로마’는 동로마 초기에는 신앙의 중심지로 우러러보는 대상이었으나, 후기에는 신앙을 위협하는 타자로까지 변모하였다.
동로마 제국 후반부에 이르면, ‘로마’라는 명칭은 완전히 제국 자체를 가리키는 이상적 관념으로 정착하였다. 동로마인은 자신들을 여전히 “로마인(Ῥωμαῖοι)”이라 불렀지만, 이는 더 이상 지리적 도시 로마에 연계된 정체성이 아니라 제국의 역사와 법통에 뿌리를 둔 정체성이었다. 제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고 문화적으로 헬레니즘의 영향이 커졌어도 로마인의식은 유지되어, 동로마의 영토를 뜻하는 “로마니아”(로마인의 땅)라는 말까지 사용되었다. 다만 제국의 현실이 기울어가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로마 정체성에 대한 성찰도 나타났다. 14세기 경에는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 등이 “우리 민족은 실제로 엘리네스(그리스인)이며, 더 이상 로마라는 이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주장도 폈는데, 이는 그만큼 옛 로마와 동로마 사이의 유대가 상징적인 수준으로 희박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는 순간까지 로마 제국임을 자처했고, 마지막 황제까지도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에도 제국의 법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오스만 술탄이 자신을 “룸의 카이사르”(로마 황제)로 칭하며 로마의 계승을 주장하고, 러시아가 “제3의 로마”를 자임하는 등 후대의 여러 권력들이 로마 제국의 상징을 탐냈다. 그만큼 동로마인들에게 ‘로마’란 단순한 한 도시가 아니라 제국의 이상과 정통성을 의미하는 상징이었으며, 비록 세월과 함께 실제 로마 도시에 대한 관심은 옅어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그 자리를 대체했으나, 로마의 이름은 끝까지 제국 존립의 정당성과 영광을 담지하는 관념으로 남았다.
초기 동로마 제국에 있어서 로마시는 여전히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로마 제국의 “영원한 도시”로 불리던 로마가 410년 서고트족에 함락되었을 때, 동방의 황제 호노리우스와 테오도시우스 2세는 3일간 궁정 애도기간을 선포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이는 동로마인들이 옛 수도 로마에 대해 여전히 모든 민족의 어머니로서 경외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국의 정치 중심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완전히 옮겨가고, 특히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동로마인들의 인식에서 ‘로마’는 점차 이상화된 개념으로 변모해 갔다. 이제 제국의 수도는 더 이상 옛 로마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였으며, 이미 여러 황제들이 구로마를 외면하고 동방에 주력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새로운 로마(제2의 로마)’라는 의식이 뿌리내려, 동로마의 융성과 함께 이 도시는 인구 수십만의 기독교 세계 최대 도시로 번영하였고 동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위상은 너무나 커서 스스로 ‘모든 도시의 여왕’,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여 있는 곳’이라고 칭할 만큼이었다. 실제로 시민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그 도시”라 부르며 제국의 중심으로 여겼고, 외부 세계에서도 슬라브어로 “차리그라드”(황제의 도시), 바이킹들의 고어로 “미클라가르드”(거대한 도시)라 부르는 등 새로운 로마에 각종 명예로운 별칭을 부여했다. 이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옛 로마의 권위를 거의 완전히 대체하면서, 동로마인들의 관심은 지명으로서의 로마 도시보다는 제국 자체의 로마적 정체성에 집중되었다.
정치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로마 제국의 이념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비록 5세기 이후 이탈리아와 로마를 상실했어도, 동로마의 황제들은 세계에서 유일한 로마 황제로서 보편 지배권을 가졌다고 자처했다. 한때 서로마의 멸망 직후에는 서방의 게르만계 왕들조차 명목상 동로마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로마 세계 질서의 일부임을 내세웠고, 동로마 정부도 서방을 일시적으로 “야만인의 손에 넘어간 로마 영토”로 간주하면서 형식적인 통제권을 주장하였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옛 로마 영광을 되찾고자 로마와 이탈리아를 재정복하는 데 거대한 군사력을 투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서방 회복(“로마 재통일”)의 이상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제국의 꿈으로 남았다. 그러나 7세기 이후 제국이 동방과 북방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현실적으로 서방에 간여할 여력이 감소했고, 8세기 중엽 라벤나 총독부의 붕괴(751년)로 이탈리아의 마지막 거점마저 잃자 사실상 동로마의 통치가 서방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로마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자치를 굳히고 프랑크 왕국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동로마와 멀어졌고, 그 결과 서로마 황제의 빈 자리를 노린 프랑크 왕국이 교황과 연합하여 800년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대관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 황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동로마는 여제 이리니 통치기의 혼란으로 즉각 대응하지 못했지만 이후로도 카롤루스를 정식 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9세기 초 동로마 황제들은 프랑크 군주를 그저 ‘프랑크인의 왕’으로 호칭하며 격하했고, 일부 절충을 통해 “황제” 칭호 자체는 양립할 수 있되 동로마 황제가 “로마인의 황제”라는 점은 양보하지 않는 미묘한 외교 절충도 시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정통성에 대한 동서 분쟁은 해소되지 않아, 이후로도 “두 황제 문제”로 불리는 경쟁 구도가 지속되었다.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 측은 동로마 황제를 “그리스인의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 등으로 불러 로마 제국임을 부정했고, 동로마 측도 마찬가지로 서방 황제를 공문서에서 “독일인의 왕” 등으로 칭하며 로마의 이름을 양보하지 않았다. 10세기경 동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2세는 심지어 교황이 동로마 황제를 “로마인의 황제”로 호칭하지 않고 “그리스인의 황제”로 낮추어 부르자 크게 분개하였다. 그 측근들은 “거룩한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황실의 홀과 원로원(元老院)과 모든 로마의 기사들을 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왔고, 로마에는 어부와 상인 등 천한 무리만 남겨두었음을 어리석은 교황이 모르고 있다”고 통렬히 질책하였다고 전한다. 이 일화에서 보이듯 동로마인들에게 로마라는 명칭은 제국 통합의 상징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였지만, 정작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 로마 자체에 대한 집착은 차츰 희미해졌다. 실제로 니키포로스 2세는 분노 속에 이탈리아 원정과 로마 탈환까지 거론하였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제국 정치에서 로마시는 현실적인 목표에서 거의 배제되었다. 제국의 영역 축소와 더불어 ‘로마’의 개념은 지리적 실체라기보다 제국의 법통과 이상을 가리키는 추상화된 개념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도 ‘로마’에 대한 인식 변화가 두드러진다. 초창기 동로마 교회는 로마 교회를 사도 베드로가 세운 최고 좌석으로 존중하여, 5대 총대주교좌(펜타르키아) 중 로마를 첫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둘째로 배석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로운 로마를 세우고 교회 행정에서도 동방의 자치권을 강화하면서, 점차 교황의 우월권에 대한 이견이 나타났다. 제국의 신학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사도 안드레아스의 후계좌로서 신 로마의 종교적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였고, 8세기 성상 파괴 운동 등으로 교황청과 갈등을 빚는 동안 로마 교회에 대한 동방의 불신은 깊어졌다. 결정적으로 9세기 중엽 포티오스 총대주교 시대에 동로마와 로마 교회 간 심각한 충돌이 일어났다. 포티오스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교황 니콜라오 1세를 맹렬히 비난하고, 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교황을 이단으로 선언하며 파문해 버렸다. 이 공의회는 로마 교회의 성령론 doctrinal 변경(필리오쿠에 문제)과 교황의 월권을 규탄하고 “정통 신앙의 수호자는 신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이며, 구 로마의 교황은 이에 도전한 이단자”라는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비록 이 사건은 일시적으로 끝났지만, 1054년 동서 교회 대분열로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 교회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그 이후 동로마인들에게 로마 교회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닌 경쟁자이자 때로는 신학적으로 경계해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 제국 말기에 일시적으로 서방에 교황 중심의 원조를 청하기 위해 교회 재통합을 시도한 적도 있었으나, 동로마 시민 다수는 로마를 배신자나 다름없는 이질적 존재로 여겨 통합에 반발하였다. 이렇듯 종교적 담론에서의 ‘로마’는 동로마 초기에는 신앙의 중심지로 우러러보는 대상이었으나, 후기에는 신앙을 위협하는 타자로까지 변모하였다.
동로마 제국 후반부에 이르면, ‘로마’라는 명칭은 완전히 제국 자체를 가리키는 이상적 관념으로 정착하였다. 동로마인은 자신들을 여전히 “로마인(Ῥωμαῖοι)”이라 불렀지만, 이는 더 이상 지리적 도시 로마에 연계된 정체성이 아니라 제국의 역사와 법통에 뿌리를 둔 정체성이었다. 제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고 문화적으로 헬레니즘의 영향이 커졌어도 로마인의식은 유지되어, 동로마의 영토를 뜻하는 “로마니아”(로마인의 땅)라는 말까지 사용되었다. 다만 제국의 현실이 기울어가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로마 정체성에 대한 성찰도 나타났다. 14세기 경에는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 등이 “우리 민족은 실제로 엘리네스(그리스인)이며, 더 이상 로마라는 이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주장도 폈는데, 이는 그만큼 옛 로마와 동로마 사이의 유대가 상징적인 수준으로 희박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는 순간까지 로마 제국임을 자처했고, 마지막 황제까지도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에도 제국의 법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오스만 술탄이 자신을 “룸의 카이사르”(로마 황제)로 칭하며 로마의 계승을 주장하고, 러시아가 “제3의 로마”를 자임하는 등 후대의 여러 권력들이 로마 제국의 상징을 탐냈다. 그만큼 동로마인들에게 ‘로마’란 단순한 한 도시가 아니라 제국의 이상과 정통성을 의미하는 상징이었으며, 비록 세월과 함께 실제 로마 도시에 대한 관심은 옅어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그 자리를 대체했으나, 로마의 이름은 끝까지 제국 존립의 정당성과 영광을 담지하는 관념으로 남았다.